第 十 四 章. 만남 1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 그 구름은 마치 속세를 지켜보는 선인처럼,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발을 떼는 떠
돌이처럼 너무 유유하기만 하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 쬐어도 그것은 생기(生氣) 가득한 세상임을 증명하는 그 어느
하늘 아래였다.
[란아. 란아.]
옥 구르는 소리인지, 남자라면 한번쯤 가슴도 저릴 법한 아름다운 목소리다. 누구를 찾고 있는 듯 한데 목소리는 아
주 작고 속삭이는 듯 했다. 주변은 모두 커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으론 초록 빛깔이 난무한다.
담장 위에는 한 소녀가 엎드려 있었다. 담장 밑에서 보면 그녀의 이마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몸을 담장에 찰싹 붙
이고 있었다. 문득 푸드덕푸드덕 하는 소리가 그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들려는데 어깨로 비
둘기 한 마리가 먼저 앉는다.
[희구(喜鳩)네. 란이는 어쩌고 너만 와?]
그녀가 비둘기의 몸통을 잽싸게 움켜쥐며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아는 비둘기였나 보다. 비둘기는 그녀가 몸통을 잡
자 심하게 푸드덕거렸다. 잡지 말라는 듯, 한사코 빠져나가고 싶은 것 같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너 내 말 안 듣지. 혼내줘야겠다.]
갑자기 담장 위에 웬 화려한 미녀가 일어났는가. 아니, 엄연히 말하자면 미녀라기보다 귀여운 소녀에 가까웠다. 그
녀가 몸을 일으키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담장 밑에서 볼 수 있을 듯 했다. 뜨겁고 강렬한 햇빛이 그녀의 피
부에 닿자 새하얗고 고운 살결이 한층 더 빛을 발했다.
허나 그녀의 귀여운 협박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는지 비둘기는 여전히 날개 짓을 해댔다. 하얀 살결의 소녀요, 하얀
깃털의 비둘기가 서로 앙숙인 듯 하다. 갑자기 그녀의 눈 꼬리가 가늘게 찢어졌다. 그러더니 비둘기의 다리를 잡아
빙글빙글 돌린다. 비둘기가 꾹꾹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녀는 악독하게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돌리던 그녀는
팔을 멈추고 비둘기의 몸통을 잡으며 말했다.
[히히. 아프지? 다음부터 내 말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그녀의 입가로 승리의 미소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비둘기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날개를 세게 휘젓는 바
람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번뜩였다.
[너 진짜 고통스럽게 해줄 테다.]
그녀가 막 돌리려는 찰나,
[너 또 내 비둘기 괴롭히지.]
담장 밑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비둘기를 날려버리고는 자신도 뛰어내렸다. 그곳엔 그녀와 나이
가 비슷해 보이는 소녀가 한 명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미모가 대단치 않다는 것이요, 차림새도 소박하다는 것이었
다.
[내 비둘기 괴롭히지 말아. 안 그래도 저 애 어제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단 말야.]
[아니 왜?]
미모의 소녀가 아직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소박한 소녀가 울상을 지으며 말한다.
[우리끼리 몰래 교애산(交崖山)에 다녀왔다고 그러셨어. 희구 때문에 너와 내가 제멋대로 다닌다고.. 10년 전에 희구
를 구해준 게 잘못이라면서..]
미모의 소녀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어떻게 혼났는데?]
[잡아서 막 세게 때리고 도망치는데 또 잡아서 고함치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비둘기를 향한 소박한 소녀의 마음은 보통이 아닌가보다. 기억하자 슬프고 무서워서 눈물도 글썽거렸다. 그러나 미
모의 소녀는 달랐다.
[바보야.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난 또 희구를 죽이려 했다는 줄 알았네.]
[뭐? 희구를 죽인다고? 안 돼 그건.]
[히히. 농담이야.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려고 그러니.]
미모의 소녀는 장난을 쳤지만 농담 한마디에 안색이 대변하자 할 수 없이 그만두었다. 그녀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
었다.
[란아. 우리 오늘도 놀러가자.]
[안 돼. 또 희구만 혼날 거야.]
소박한 소녀의 눈으론 두려운 빛이 지나갔다.
[뭐 그런 걱정을 하니? 나도 교애산 일 때문에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어.]
[너는 어떻게 혼났는데?]
[백마사(白馬寺) 안 갔다고 어제 하루종일 방에 갇혀 있었지 뭐.]
[그래서 어제 못 왔구나.]
미모의 소녀가 표독스럽게 중얼거렸다.
[못된 중놈들. 나중에 걸리면 모두 죽여줄 테야.]
[능아! 그런 말 하면 못 써.]
소박한 소녀는 낮은 음성으로 그녀를 타이르며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간을 가늠하는 듯 혼자 손가락까지 동원
하더니 금방 안색이 변했다.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다.
[아이고 큰일이야! 아버지 오실 때 됐다. 나 들어가야 해.]
[아저씨는 지금이면 벌써 오셨을 거야. 그냥 우리 도망가자.]
[안 돼! 희구가 혼난단 말야.]
그녀는 거칠게 도리질하며 머리 위로 빙빙 돌고있는 희구를 바라보았다. 희구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아주 태평했다. 아예 옆 나뭇가지에 편안히 걸터앉는다. 그걸 본 미모의 소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거봐. 마음대로 하래. 네 생각은 신경도 안 쓰는 걸 보면 아저씨가 안 무서운가봐.]
[안 무서울 리 없어. 어제 희구가 얼마나 불쌍했는데..]
그녀가 또 눈물을 글썽거린다. 미모의 소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억지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너 혼나면 내가 도와줄게.]
[나는 괜찮아. 희구가 혼나.]
[그럼 희구를 도와줄게.]
순간 소박한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금방 희색만면해져서는 재차 물어댔다.
[정말이지? 정말로 희구 도와줄 거지?]
[희구가 내 말 잘 듣나 안 듣나 보고 판단해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녀의 눈이 또다시 붉어졌다. 그러자 미모의 소녀가 그녀를 달래며 이끌었다.
[농담이지 그걸 믿니? 빨리 가자. 빨리. 아저씨 오시면 못 도망가잖아.]
그녀는 금새 어리둥절해했다. 뭐가 뭔지 눈만 동그랗게 뜨며 미모의 소녀가 이끄는 데로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정
작 그녀의 발이 가볍고 잘도 가는 걸 보면 꼭 끌려간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서 꾹꾹 소리내는 희
구가 미행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교애산은 명실공히 중악(中岳)으로 꼽히는 숭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대단히 큰산도 아니요, 훌륭한 경관이 있는
것도 무슨 특별한 사연이 담겨 유명한 산인 것도 아니었다. 숭산의 남쪽에 없었다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평
범하고도 평범한 산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 교애산은 매우 남달랐다. 엄한 아버지에게서 고집스러운 교육을 받아온 삶, 때문에 그
녀들은 조금은 도피처 같은 장소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쭉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지낸 그녀들이었기에 함께 이 교
애산을 도피 장소로 결정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슬프건 기쁘건 함께 이곳에 왔고, 한참 꽃이 피나는 시기여서 더욱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했다.
그녀들은 오늘도 이 교애산에 도착했다. 한 여름의 더운 날씨가 그녀들을 지치게 했지만 허리에 매달린 작은 물병
하나로 목을 축였다. 소박한 소녀는 갑자기 생각나는 무언가가 있었는지 문득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무더운 여름 날 나른한 걸음 옮기며,
한 모금 술로 내 목을 축이노라.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걸으니,
가려던 임안은 저기 뒤편이 아니던가.
또 온다고 찍찍대는 새들아.
오늘은 줄 게 없다고 내 살을 쪼느냐.>
이 시는 그녀의 아버지가 지은 시였다. 본래 부녀가 모두 시를 좋아하여 항상 시를 자주 짓곤 했다. 그녀는 아직 시
짓는 실력이 볼품 없었으나 역시 듣는 게 있다하니 제법 운치를 따질 줄 알았다.
그녀의 시에 미모의 소녀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 시는 처음 듣네. 아저씨가 지으신 거야?]
[응. 4년 전에 지은 시였는데 아직 못 들었었구나.]
그녀도 웃음으로 대답하며 다시 산을 올랐다. 교애산은 본디 높지가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아 그녀들이 오르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더구나 각자 무공이라도 지닌 듯 발걸음이 여간 가벼운 게 아니다. 지금 보니 미모의 소녀 허
리춤엔 중검이 하나 걸쳐져 있었다.
언제나 다니던 대로 교애산 정로를 밟고 지나 산의 뒤편을 빙 둘렀다. 정해진 행로처럼 언제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기야 그건 10년이 넘도록 함께 지낸 친구였기에 가능했고, 또 그만큼 함께 자주 왔었음으로
가능한 얘기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비단 둘 중 한 명뿐이 아닌 둘 모두가 기분이 이상하다고 느
낄 수 있었다. 10년 동안 적어도 5일에 한번은 오던 산이 바로 이 교애산이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발을 옮기면
옮길수록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되,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껴지는 그런 어떤 생
소함이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함. 그건 마치 그녀들이 처음 이 교애산에 왔을 때 느낀 것과 같았다. 그때
는 처음 만난 희구를 따라 온 가족이 놀러 나왔을 적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생각이 적중하는 듯 하늘을 배회하던 희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혼자서 꾹꾹 소리를 내는가
하면 제멋대로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박한 소녀와 미모의 소녀 모두 희구가 겁을 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희구는 싸움을 매우 싫어하고 특히 피 냄새만 맡으면 아주 요동을 쳤다. 지금 희구의 반응으로 보아, 피
를 본 것도 모자라 무슨 대단한 싸움이라도 본 게 확실했다.
[저 앞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어? 저기는 우리가 놀던 곳인데.]
소박한 소녀는 조금 울상을 지었다. 그녀도 희구와 성격이 비슷한지 가까이 가기가 싫은 눈치였다. 그러나 미모의
소녀는 전혀 달랐다.
[겁먹었지? 걱정 마 내가 보호해줄게.]
[네가 무슨 보호를 해주니. 차라리 내가 너보다 낫겠다.]
그녀가 농담조로 대꾸하자,
[날 무시하지마.]
미모의 소녀도 맞대응하며 앞서 내달렸다. 소박한 소녀의 안색이 확 변해버린다. 그녀를 허겁지겁 쫓아가며 몇 번
소리쳐 불렀지만 그녀는 듣는 체도 안 하고 제멋대로 냅다 가버렸다. 그래도 배운 무학이 있어 배운 대로 경신법을
펼치니 금방 따라잡을 순 있었다. 도착하니 과연 누군가 그녀들이 놀던 장소에서 싸움을 벌이는 듯 했는데, 미모의
소녀는 이미 한쪽 나무 뒤에서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몰래 미모의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 있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쉿. 지켜보자. 웬 싸움이 났지?]
미모의 소녀는 얼른 입을 막으며 유심히 격전장을 바라보았다. 격전장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정말 가관이었다. 아무
리 그래도 그렇지 그녀들은 그 모습을 보며 해도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분노 같은 걸 한 건 아니었고 단지 황당하
고 어이가 없던 것이었다. 바로 격전장엔 웬 스님 한 명과 두 명의 젊은이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이없던 건 바로 스님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녀들은 중으로써 저렇게 둔탁한 지팡이로 사람을 패는 경
우는 보지 못했다. 자주 백마사를 들락날락하긴 했지만 저리 무식한 중은 도대체 본 적이 없었다. 잘 보니 생김새도
조금 흉악해 보였다. 손에 든 게 중들이 쓴다는 반룡장(蟠龍杖)이라는 걸 알고 있긴 했으나 아무래도 처음 봤으니
너무 놀랍고도 황당했다.
반면에 그에 맞서는 젊은이는 달랐다. 젊은이 두 명이 같이 맞서는데 한 명은 스님 못지 않게 흉악한 생김새이며
거한이었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진 않았다. 허나 다른 한 명은 달랐다. 분명 미남은 아니지만 그래도 둘
보다는 나은, 좀 더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걸까?]
소박한 소녀의 속삭임에 미모의 소녀가 답한다.
[분명 저 못생긴 중이 잘못한 걸 거야. 생긴 것만 봐도 알아. 벌써 나쁘게 생겼잖아. 게다가 저 청년 중 한 명이 누
군지 모르겠어?]
[저 무섭게 생긴 사람? 그 사람이 누구라고..]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 저 분은!]
[쉿! 조용히 해 바보야.]
소박한 소녀의 얼굴에 금방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는 사이 싸움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들은 더 입을 열지
않고 그들의 싸움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들 셋의 무공은 매우 대단했다. 가장 약한 자는 평범한 청년인 듯 했고, 가장 강한 자는 그 스님인 듯 했다. 중의
무공은 매우 중후하고 위력이 있어 한 대라도 잘못 맞았다간 즉사라도 할 듯 싶었다. 더구나 용 형상이 그려진 반
룡장을 휘둘러대니 그 무서움은 한층 더했다.
그래서 청년은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했고 주로 거한이 창으로써 거리를 두고 있는 듯 했다. 언뜻 보기에도 창법이
매우 현란하고 빠른 덕에 아직은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감히 중에게 공격을 가할 수 없어 쓸데없이
시간과 힘만 허비하는 셈이었다. 청년도 공격을 하고 싶은 듯 했지만 일 권을 내지르면 무섭게 용 지팡이가 날아드
니 도대체 방도가 없었다.
여차여차 하는 사이 10여 동작이 지나갔다. 멀리서도 잘 알 수 있을 만큼 청년과 거한의 얼굴은 벌개져있었다. 무슨
무공이라도 대단해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의 손발이 어지럽다는 것마저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니 얼마
나 고전하고 있는지 아주 훤하게 보이는 셈이다. 다시 몇 동작이 지나갈 무렵, 갑자기 중의 반룡장이 무겁게 날아들
었다. 정확히 목표는 잡지 않은 듯 맹렬히 그냥 후려칠 기세였다. 청년은 다시 물러서고 거한 역시 한 걸음 물러서
며 창을 내질렀다. 창 끝이 반룡장의 모서리를 밀어낸다.
거한의 창법은 참 신기하기도 했다. 정말 아차 하는 순간 창이 부러질 것도 같은데 기어코 부러지지 않았다. 아니,
부러지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반룡장을 퉁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무학 지식이 적어서 그런 거지 실제로
이 수법은 사량발천근에 속했다. 물론 이 고단의 수법이야말로 거한의 창법에 있어선 최고 수법으로 통한다.
[하압!]
다시 반룡장이 번쩍였다. 이번엔 시간이 알맞지 않았다. 반룡장이 예상외로 빠르게 움직여 거한이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이젠 청년이 달려나갔다.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그가 무슨 수로 저 반룡장을 막아낼까. 순
간 모두의 머릿속으로 끔찍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허나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청년의 동작도 만만치 않게 신기했다. 중의 공격이 중(重)하고 무서우리만큼 맹렬하다면
청년의 동작은 마치 춤을 추듯 유유자적하는 사람처럼 부드러웠다. 소박한 소녀는 그의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
다. 세 가지 동작만이 연달아 반복됐지만 반룡장을 일 촌의 차이로 피하고 되려 중의 팔을 공격했다. 강하게 꽂히는
지 퍽, 하는 음향이 들렸다.
놀랍게도 중의 팔에 변화가 있기는커녕 그의 안색에조차 어떤 변화도 없었다. 잠시 그의 유유한 무공이 놀라웠다는
표정 빼고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청년은 크게 놀라 황급히 물러섰지만 이미 늦어 그의 돌려차기에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사기꾼 중놈아! 네 대머리에 기름을 발라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구워 맛있게 먹어줄 테다!]
볼썽사납게 자빠진 청년이 독살스럽게 소리쳤다. 그 말이 너무 유치하면서도 은근히 악랄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어
미모의 소녀는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소박한 소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말이 악랄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재밌다고만 생각했다. 한편 그 흉악한 중은 기도 안 차는지 입을 허 벌렸다.
[이 맹랑한 놈이 죽고 싶어 작정을 했구나.]
[그래 나는 맹랑한 소리 좀 해야겠다. 중처럼 대가리만 빡빡 밀면 그게 다 중인 줄 아냐? 행동이 중이어야지 네 행
동은 무슨 날강도로구나!]
[뭐라고!]
흉악한 중이 반룡장을 땅에 찍었다. 쿵, 하고 마치 큰돌 떨어지는 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겼다. 그의 표정을 보니 어
지간히 분노한 듯 했다. 무섭게 치켜 떠진 눈이 파르르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창을 든 거한이 말문을 연다.
[당신은 정말 중이 아닌 것 같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렇게 덤벼드는 거요?]
중이 버럭 호통쳤다.
[저 쳐죽일 꼬마 놈이 나를 비웃지 않았느냐!]
[아니.. 그런 농담에 중이 사람을 죽이려 한단 말이요?]
[너는 중들이 전부 보살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흉악한 중은 정말 말투부터가 중답지 않았다. 생긴 것만 봐도 알만했지만 말투는 한술 더 뜬다. 청년이 비웃음을 흘
리며 말했다.
[옳아. 알고 보니 넌 파계승이었구나.]
[네 이놈! 누가 파계승이냐?]
중이 다시 고함을 쳐댔다. 목청은 또 얼마나 큰지 귀가 다 따가웠다.
[파계승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나? 내 농담 한마디에 사람을 죽이려는 걸 보니 적어도 조용히 도닦는 놈은 아니겠
다.]
[닥쳐라! 나는 소림사 중이다.]
[소림사 무공만 익히고 있으면 뭐 하냐? 성격부터가 글러먹었는데.]
중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다시 출수할 낌새가 여실히 보여지고 있었다. 청년도 그것을 느꼈는지 다시 권법 수식을
취하는데 갑자기 거한이 소리쳤다.
[아! 당신의 법명은 바로 운화(雲火)였군요!]
중의 눈이 반짝인다.
[흥. 덩치만 큰놈이 제법 견문이 있군.]
거한의 말에 중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우습다는 듯 코웃음쳤지만 은근히 풍기는 흡족함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인정하자 거한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운화대사. 저희는 대사께 악감정이 없습니다. 제 친구가 한 말은 정말 농담이었으니 이제 그만하죠.]
[내가 운화란 걸 알았다고 이제 그만두겠다는 거냐? 흥.]
[운화대사란 건 이미 처음 부딪쳤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소림사 무공을 쓰는데 성격이 불같은 분은 한 분뿐이지 않
습니까?]
거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운화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네까짓 놈들이 감히 나를 시험했다는 얘기구나.]
[부인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설마 대사가 그렇게 살기를 띠며 공격할 줄 몰랐습니다.]
거한은 이제 말을 끝맺은 듯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운화도 뭘 생각하는지 땅만 쳐다보며 반룡장을 부들부들 떨어댔
다. 청년만 거한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한참동안 그렇게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더니 문득 운화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너희들의 이름은 무엇이냐?]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더는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이름을 묻는다는 건 어떤 의도에서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미모의 소녀는 저 중이 나중에 복수하려고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청년도 거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고 있을 테니 분명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모두 싹싹 빗나갔다.
[제 이름은 악만풍이라 하고 이쪽은 진양이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바로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에 미모의 소녀도 놀랐고 운화도 제법 놀란 듯 했다. 운화가 기괴
한 웃음을 흘린다.
[제법 배짱이 있군. 내가 나중에 보복할 텐데 두렵지 않느냐?]
[사기꾼 중놈아. 할말 다했으면 이만 꺼지지 그러냐?]
청년은 아직도 시비조다. 그는 아주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운화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으나 좀
전처럼 출수 하진 않았다. 다만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갑자기 옆의 숲을 쳐다보았다. 뭐가 불만이라고 그 숲을 노려
보는지 거한과 청년은 이상함을 느끼고 그의 시선을 따랐다. 일순 운화의 입에서 무서운 호통소리가 들렸다.
[당장 나오지 않으면 너희 두 놈 다 모가지를 비틀어주겠다!]
바로 미모의 소녀와 소박한 소녀가 있던 그곳이었다. 그녀들은 운화가 어떻게 알았나 하며 매우 놀라했다. 마음 한
구석엔 두려움도 치밀어 함부로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운화가 안면을 씰룩이며 갑자기 좌수를 쳐들었다. 오
른발을 옆으로 디디어 몸이 한 바퀴 회전했고 그의 왼손은 맹렬히 휘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퍼펑!>
장풍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하는 게 아닐까. 언덕 앞에 있던 나무 다섯 그루가 동시에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나무의
몸통이 완전 박살이 나며 제멋대로 주저앉아버린다. 청년과 거한은 그의 놀라운 장풍에 할말을 잃어버렸다.
[이 흉악한 중놈! 감히 내게 공격을 해?]
나무가 무너지던 무렵, 그 뒤에서 두 인영이 빠르게 솟아올랐다. 나무들이 쓰러져 언덕 뒤에 있어봐야 아무런 소용
이 없었던 것이다. 방금 앙칼진 외침소리는 미모의 소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운화는 또 이런 소리를 듣자 분통이 터지고 약이 올랐다. 그곳에 웬 두 명이 숨어있다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혼내주려는 마음을 먹었었다. 청년과 거한의 농간에 분노를 발산할 곳이 없어지자 마침 그들을 생각해
내곤 일 장을 날린 것이다. 어차피 누군지 정체는 확인해야하고 또 청년과 거한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이 봐준 거라
는 인식을 해주기 위한, 고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셈이다.
[소녀들이었군. 어쩐지 호흡이 엉망이더라.]
운화는 숨은 자들의 정체가 어린 소녀 둘이란 걸 알자 완벽히 흥미를 잃어버렸다. 손을 휙휙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떠나려는 듯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청년과 거한을 노려보았다. 거한은 사심 없는 눈빛으로 맞섰으나 청년은 조롱
의 기가 다분한 눈빛으로 맞섰다. 운화는 분노를 뒤로하며 일순간 몸을 날렸다. 더 있어봐야 의미도 얻는 것도 없단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