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六 章. 흉수 1
악만풍은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의 엉덩이만 때린 덕에 종남산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겨우 닷
새만 흘러 어찌나 말을 재촉했는지 알만했다. 황마는 마치 힘들다는 걸 말하고 싶은 듯 악만풍을 내려놓으며 옆으
로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숨을 헐떡이며 자꾸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결국 죽고 만다. 악만풍은 이 황마가 별로 좋
은 말은 아님을 알았으나 이렇게 죽고 나니 가엾은 생각도 들어 땅을 파 묻어주었다.
그는 종남산까지 말을 타고 오르진 않았다. 종남산은 거의 전진교가 장악하고 있어 함부로 오르다간 눈에 띄기 십
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종남 객잔으로 향했다. 종남 객잔은 여전히 낡고 힘없는 자세로 하염없이 서있다.
"어서 오십…… 아!"
점원이 반기다가 그를 알아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악만풍이 예전 이 객잔에서 시를 외우고 도사들, 여행객들과 살벌
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던가. 다행히 금방 좋게 풀렸지만 악만풍 생김새부터 워낙 험악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날 알아보는가?"
"무, 물론이죠."
악만풍은 실소하며 방을 하나 내달라고 했다. 점원이 좋은 방으로 안내하려 하자 그는 구석지고 조용한 방을 원했
다. 악만풍은 방에 들어서며 점원을 부르고는 한마디한다.
"나는 오늘 이 객잔에 들리지 않은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
말을 잇던 점원은 깨달은 게 있는지 금방 고개를 숙였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그래. 나는 이 객잔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악만풍은 말하며 품속에서 동전을 한 주먹 꺼내주었다. 점원이 금방 눈을 휘둥그래 뜬다. 그는 재빠르게 챙겨놓고는
수없이 인사를 하며 희희낙락 방을 나섰다. 악만풍이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종남 객잔이 비록 전진교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역시 전진교의 세력 범위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다.
악만풍은 그 날 밤, 몰래 객잔을 나섰다. 종남산의 밤은 어둡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왠지 모를 귀기를 더했다. 나
뭇잎하나 밟자 부스럭 소리가 유난히 크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 전진교 근방으로 향했다. 전진교는 종남산 높
이 위치하여 오르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가장 빠른 길은 정로(正路)로 돌계단이 있고 길이 전진교를 향해 일직으
로 뻗어있어 오르기도 편했다. 허나 악만풍은 지금 잠입을 하려하기 때문에 정로를 통해갈 리가 없었다. 그는 조용
히 산 뒤쪽을 기어오르며 힘겹게 전진교로 접근하고 있었다.
가끔 가다가 부엉이가 울 때면 악만풍은 깜짝 놀래기도 했다. 존경하던 전진교에 잠입한다는 것이 어쩌면 죄책감
같은 감정을 일으켰는지도 몰랐다. 천하 방방곳곳을 여행하며 익혔던 자객과 같은 움직임에 매우 은밀히 이동할 수
는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더 오르니 저 멀리 전진교 담이 보였다. 넘으면 바로 후원임을
악만풍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한번 이 길을 지나간 적이 있어 호기심에 훑어봤었기 때문이다. 그는 담을 바로
넘지 않고 먼저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담에 손을 얹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보니 과연 전진 도사들 여러 명이 순
찰을 하고 있다. 악만풍은 그냥 뛰어넘었다면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다시 한번 고개를 내밀어 일단 전진교의 구조를 샅샅이 알아보기로 했다. 저 가운데에 중양궁이 보이고 뒤로 후원
과 또 다른 건물이 보였다. 저 끝에도 웅장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악만풍은 들어갈 방도를 생각해봤으나 이쪽이 그
나마 가장 좋은 쪽임을 알고 도사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다. 도사들은 서로 연계하여 각자 따로 움직이지만 서로
를 볼 수가 있었다. 한 명을 습격하면 아마 다른 한 도사가 볼 것이고 그 도사가 소리를 지르면 모두가 알게 될 것
이다. 악만풍은 저번 만났던 그 일만 알면 됐기에 한 도사만 사로잡아도 충분했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침으로 마침
가만히 서있던 한 도사의 다리를 명중시켰다. 그 도사가 놀람과 아픔에 짧막한 비명을 지른다.
"악!"
다른 도사들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악만풍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날아올라 담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던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나무 두 그루에 양발을 붙여 힘을 가하고 몸은 최대
한 움츠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도사들이 잠시 후 달려왔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경종만 울렸다.
<뎅뎅뎅>
짧게 세 번 울린 경종은 사실 전진교에선 <누군가 침입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는 제법 컸지만 정말
위험한 듯 울리는 종이 아니라 악만풍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들켜도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도사들과 만나지만
않으면 될 뿐, 어차피 들키건 말건 한 도사만 사로잡아 채근하면 되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나무 몸통을 붙잡고 아주 조용히 내려앉았다. 발이 땅에 닿는데도 미세한 소리하나 나지 않는다. 악
만풍의 덩치가 매우 컸어도 그에겐 경험으로 얻은 방법이 있는 것이다. 문득 도사 두 명이 나무들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부로 두 명씩 짝을 지어 행동하는 듯 했다. 악만풍은 나무 몸통만을 붙잡으며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움직
였다. 마지막 나무에 이르렀을 땐 두 다리로 나무 몸통을 감고 두 손을 번쩍 내뻗었다. 도사 둘은 이 나무 사이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올 줄 몰라 전혀 방비하지 못하고 혈도를 짚였다.
악만풍은 양손으로 각자 그들의 두 혈을 짚었다. 아혈까지 짚었기 때문에 그들은 소리도 못 지르고 멍청하게 있는
것이다. 그는 그들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량으로 말을 건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희는 어차피 혈도를 짚여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내 말에 성실히 대
답한다면 풀어주되, 거짓이라거나 시간을 끌면 즉시 죽여주겠다."
도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악만풍은 이만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곤 다시 입을 뗐다.
"전진 칠자 중 한 명이 한 달 전쯤에 돌아왔지?"
아혈을 짚여 대답도 못하자 악만풍이 질책하는 어투로 말한다.
"맞으면 눈알을 위아래로, 아니면 좌우로 흔들어."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의 눈알은 좌우로 움직였다. 악만풍은 깜짝 놀라 다시 물었으나 역시 대답은 같았다. 그는 그
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음산하게 말했다.
"지금 너희가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때 전진 칠자 중 한 도사가 이리로 간다고 했는데 안 왔다고? 솔직히 말해라
거짓이면 정말 죽여버리겠다."
허나 그렇게 말했음에도 도사들의 눈알은 좌우로 움직일 뿐이었다. 안색을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악만
풍은 크게 이상하다고 여겼다. 분명 전진 칠자 중 한 명이라던 그 도사는 종남 객잔에서 빨리 전진교로 오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지금 전진교엔 전진 칠자가 한 명도 없느냐?"
이번엔 도사들의 눈알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전진 칠자가 오래 전에 각자 떠난 후 아무도 들리지도 않았다고?"
역시 위아래로 움직인다. 정말 사실인 듯 했다. 악만풍이 거짓아면 죽이겠다며 다시 손을 흔들었지만 그들의 안색은
마치 <사실이니 살려달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날 만났던 도사에게 무슨 큰 일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본래 목적은 그 도사가 반드시 도착해서 당광의 일을 처리했을 것이니 전진교가 어떤 상황이 됐는가 알아볼 겸 그
도사가 누군지 알아볼 겸 온 것인데, 애당초 오지도 않았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들 두 도사는 그대
로 내버려두고 다시 나무를 타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젠 머뭇거릴 필요도 없다. 어차피 신경 쓴다고 몰래 빠져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들키던 말던 도망가는 게 중요했다. 그가 막 담을 향해 달리자 저편에 있던 도사들
이 발견하고 고함친다. 악만풍은 급한 마음에 등에 매달렸던 창을 땅에 찍고는 독룡출동(毒龍出洞)의 묘수를 펼쳐
몸을 훨훨 날아가게 만들었다. 담을 넘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날아간다. 도사들이 놀라 입을 벌리는 걸 바라보며
악만풍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한편 낙양 객잔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낙양성에 사는 사람이라면 낙양 이대가장이 불타오른 사실, 그리고 장
주인 형웅강과 문인강목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성외에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요, 삽
시간에 번져나간 소식으로 이미 많은 강호인들도 알고 있었다.
형웅강은 쾌묘대협으로 칭송되며 그동안 낙양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문인강목도 마찬가지지만 호화스
러운 집에 돈을 조금은 아끼는 성품을 보여 형웅강보다는 덜했다. 처음 낙양에 금국 병사들이 들어서는 날 형웅강
은 형가장 사람들을 데리고 나서서 싸우기까지 했다. 다행히 금국은 형웅강이 강호인이나 낙양 사람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음을 알고 내버려두었다. 허나 그런 일로 인해 쾌묘대협의 명성이 더 드세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형란은 그의 늦둥이 딸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성품이 너무 선하고 어찌 보면 멍청한
수준이라 그녀를 많이 좋아했다. 성밖으로도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하고 돈벌 방책이 없는
자들을 데려와 형웅강에게 제자로 삼아달라고 떼쓰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안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오늘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본래 눈물이 많은 소녀였지만 오늘은 그 이유부터가 다르다. 세상에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안 잠길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따랐기 때문에 그녀가 너무 안쓰
러워 보였다. 이미 형웅강과 문인강목을 묻고 왔어도 형란과 문인능은 좀처럼 슬픔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이러기를
이미 나흘째다.
<똑똑>
낙양 객잔의 어느 작은 방문을 점원이 두들기는 소리였다. 객잔 대청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광경을 지
켜보고 있었다. 대부분 손님이 아니고 형웅강이나 문인강목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한쪽 구석에선 구질구질
한 옷에 누런 방립만 눌러쓴 진양이 보인다.
"형아가씨, 문인아가씨. 여기 죽이 있으니 좀 들어보세요."
점원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성이 제법 커 안에서 듣지 못할 리가 없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나흘째다. 문을 잠그거나 못 들어오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도 점원은 함부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 역시
형웅강과 형란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형란이나 문인능이 들어오란 말만하
면 기쁘게 들어가겠지만 그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점원은 두어 번 더 문을 두드리고 몇 번 말도 걸어보았으나 대답이 없자 결국 몸을 돌렸다. 시선이 집중되어 있음
을 아는지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며 고개만 뒤흔들었다.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동시에 객잔 안으로 울려 퍼졌
다. 오늘도 실패인 셈이다.
"석대협. 석대협 뿐입니다."
주인장이 달려와 한 말이었다. 진양은 여전히 화주대도 석앙 행세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도 잘 따르고 있었다.
이대가장이 불타 오르던 날, 그가 불길로 뛰어들어 구해냈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간 사람
들은 몇 번 시도를 해보고 안 되자 진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러다 굶어죽겠으니 어떻게든 좀 도와달라는 것이
었다. 진양의 말은 그녀들도 잘 듣는 걸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챈 사람들이라 매일같이 사정했다.
허나 진양은 그녀들을 달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형란이 자신을 많이 위해주었고 형웅강과 문인강목의 시신을 구
해온 그이긴 하나, 굳이 그녀들을 달래며 눈물을 받아주긴 싫었다. 아니, 귀찮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더구
나 자신이 달래준다고 해서 단번에 밝아질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왕령이 슬픔에 잠겼을 때 달래보아서 안다. 그
녀를 진정 사랑하여 온힘을 다해 달래보았지만 달래면 더 울었고 차라리 내버려두니 금방 괜찮아졌다. 그것을 잘
아는 진양은 달랠 필요성도 의무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달랜다 하더라도 형란이라면 모르되, 문인능이라
면 칼을 들고 설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부탁할 때면 진양은 그저 <슬픔은 혼자 이기는 것>이라고 하며 잘라버렸다. 매일같이 애걸하여 짜증도
나서 확 그냥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허나 악만풍에 대한 생각과 어차피 낙양 어딜 가나 같다는 것을
알고는 그냥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지금도 술을 마시지만 사람들은 또 애걸하고 있다.
"석대협. 제발 부탁입니다. 형아가씨가 저러다 돌아가시면 어쩝니까."
"거참. 슬픔은 혼자 이기는 법이래도 그러네. 내가 들어간다 해도 그녀들은 듣지 않을 테고 나도 우는 여자 달래줄
능력이 없어."
"하지만 모르지 않습니까? 한번만 해보세요 석대협."
주인방이 말하며 무릎까지 꿇었다. 진양은 깜짝 놀라 발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주인장이 무릎을 꿇으려 했다는 걸 본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다들 <부탁
합니다, 부탁합니다> 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진양은 조금 어이가 없어짐을 느꼈다.
(세상에나.. 형웅강과 문인강목이 괜히 명성이 높은 게 아니었구나. 강호인이 이런 인심을 모으다니 듣도 보도 못한
경우다.)
한편으론 악만풍에게 들은 형웅강의 과거를 떠올리며 비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형웅강을 제일
의 대협으로 알며 문인강목 또한 대협으로 알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형웅강의 과거를 들려준다고 해서 물러
날 이들도 아니고 믿을 사람들도 아니다. 도리어 욕만 먹을 게 뻔했다. 그 과거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어도 사람
들이 너무 법석을 떠니 귀찮아서 그런 생각이 스친 것이었다.
"석대협! 부탁합니다. 제발 아가씨들을 도와주세요."
진양은 점점 짜증이 났다. 억지로 외면하며 죽엽청만 들이키고 있었지만 귀청으로 파고드는 애걸에 정신이 다 산만
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한마디하려고 고개를 돌린 그는 뭔가를 보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 무언가란 바
로 사람들의 머리였다. 그들은 머리를 땅에 꽂으며 애원하고 있던 것이었다. 죽엽청만 먹고 흘낏해보지도 않아 몰랐
는데 아까 작게 들렸던 쿵쿵 소리가 이들이 머리 박는 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진양은 그런 그들을 보니 더 거절
할 자신이 없었다.
"휴! 알았어. 들어갈 테니 그 몸부터 일으켜."
"대협께서 들어가시면 몸을 일으키겠습니다."
진양은 이젠 황당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는 대단히 큰 은혜를 줘보지도 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을 이
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덕에게는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한번도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박아본 적은 없었
다.
그는 이들이 정말로 자신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일어날 거라는 걸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농담으로 들었을 텐데
상황이 이러니 그들의 마음이 마치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이층으로 올라 그녀들이 있는 방문을 두
드렸다.
<똑똑>
역시 대답이 없다. 그러자 진양은 입을 열었다.
"나다. 문 열어."
"아!"
순간 무릎을 꿇은 채로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희열이 엿보였다. 나흘만에 처음으로 들린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꾸물거리는지 문이 바로 열리지 않자 진양은 짐짓 화주대도인양 떠들었다.
"빨리 문을 안 열면 혼내줄 테다."
안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렸다. 과연 금방 문이 열렸다. 진양은 가볍게 실소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란과 문인능은 각자 주춤한 자세로 서있었다. 화주대도의 탈을 쓴 진양을 어지간히 불편해하는 모양이다. 자세가
너무 엉성하여 진양은 들어서자마자 웃음부터 터트렸다. 형란은 깨닫지 못했지만 문인능은 그가 왜 웃었는지 깨닫
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도 눈이 퉁퉁 붓고 볼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은 둘 다 똑같았다.
진양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왕령을 떠올렸다. 그녀도 이들처럼 매일같이 눈이 붓고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삼
년상 하는 내내 툭하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으니 답답해도 보통 답답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왕령을 달래는 동안 깨
달은 건 여자가 울 때 무조건 달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웃게 해주면 모를까 달래는 건 한두 번
으로 족하고 나머진 혼자 슬픔을 극복하게 내버려두는 게 좋다는 걸 알았다.
지금 형란과 문인능 또한 달래서 좋을 바가 없었다. 더구나 형란은 어리니 달랜다면 더 울 것이 뻔했다. 문인능은
달래줄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녀들이 조금 안쓰럽기는 했다. 왕령처럼 부모를 잃고 슬퍼하니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그는 달래지는 않고 한쪽 자리에 앉으며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뭐해? 엉거주춤하게 서있지 말고 아무 데나 좀 앉아라."
그녀들은 안색이 빨개진 채로 의자에 앉았다. 진양은 그녀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형란은
고작 나흘만에 매우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아까도 그런 느낌을 받긴 했지만 자세히 보니 비쩍 마른 게 꼭 죽을 병
걸린 사람 같았다. 문인능도 초췌하지만 좋은 감정은 없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 들어왔어요?"
문인능이 꺼낸 말이었다. 정적을 견디지 못했나보다. 진양은 가늘게 조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두 꽃송이가 얼이 빠져 사람들이 나만 괴롭히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왔다."
"죄송해요 석대협. 저희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형란은 그에게 매우 미안한 듯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슬퍼 금새 또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러자 문
인능이 울지 말라며 어깨를 툭툭 쳐주지만 역시 그녀도 눈망울이 젖고 있었다. 진양은 그녀들이 다시 안쓰러워졌다.
"석대협께서 오셨으니 이제부턴 정신 차릴게요."
형란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눈과 눈살 모두가 부르르 떨려 그녀의 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그
녀를 보자 또 왕령이 떠올랐다. 금녀를 잃고 슬퍼하는 그녀를 달랠 때 보이던 그 눈이다. 반은 고마움이며 반은 슬
픔. 울고는 싶지만 달래는 진양을 생각하여 억지로 슬픔을 억누르는 그 눈이었다. 진양은 눈동자가 가볍게 풀렸다.
눈앞으로 아미산의 절경이 펼쳐졌다. 서늘하며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한
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 되가 그런지 추위는 별로 없었다. 그는 옆에서 훌쩍이는 왕령을 끌고 내달렸다. 한참 내
달리니 유유히 흐르는 평강강이 보였다. 자욱한 안개가 저절로 헤쳐지는 것 같고 만개한 꽃이 왕령의 미모에 움츠
러드는 것 같다. 새로 핀 싹이 푸른 세상을 만들며 아름다운 꽃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세외도원이
요, 지상낙원이다. 그는 왕령을 보며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좋아하고 또 꽃을 좋아
하니 분명 기뻐할 것이다. 확실히 맘에 드는지 한이 맺히게 내리던 눈물도 한시 멎고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
랐다. 새하얀 비단으로 치장한 산사(山査)나무의 꽃을 그녀의 머리에 꽂아줄 무렵, 난데없이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석대협?"
그는 형란의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양이 멍하게 있음을 느끼고 부른 것이었다. 진양은 정신이 들며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형란의 눈을 보니 왕령과 함께 지낸 지난 6년의 세월이 떠올랐던 것이다. 한번 더 그녀의 눈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게 있어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슬퍼만 할 것이냐, 복수를 할 것이냐."
그의 난데없는 말에 형란과 문인능은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문인능의 반응이 좀 더 빨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대
답했다.
"복수를 해야지요!"
"너는?"
진양은 형란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골똘히 뭘 생각하더니 애매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복수를 하긴 해야하는데.. 아버지는 옛날부터 복수란 복수를 낳는 거라고 하셔서.."
"그럼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거냐?"
"그, 그건 아니지만.. 복수는.."
그녀는 자꾸 같은 말만 되뇌었다. 문인능이 재촉한다.
"복수를 해야지 안 할 수 있니? 부모님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하잖아."
형란은 그제야 결단을 내린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까지 어물어물 이상한 말만 하던 그녀도 한번 결단을
내리자 문인능 못지 않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진양은 미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복수를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지. 흉수가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 없느냐?"
아주 결정적인 문제였다. 그의 말에 열의로 불타던 형란과 문인능은 일순 어깨가 늘어졌다. 그녀들이 어찌 흉수를
알겠는가. 흉수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볼 수도 없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불은 진양과 그녀들이 객잔에
있을 때 일어난 것이었다. 진양에게 구함을 받아 돌아가던 중 형란이 그에게 감사를 전해야 한다면서 다시 객잔으
로 왔을 때, 그러는 사이 이대가장에 불이 난 셈이다. 지나던 사람의 말로는 장원 안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도 조
금 들렸다고 했다.
"대충 감잡히는 자들이 있어요!"
"누구?"
문인능이 소리치자 진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녀는 몰래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말을 이었다.
"북망채! 아니면 사공환 무리일 것이 틀림없어요."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진양으로서는 당연한 궁금증이다.
"그들은 모두 형가장과 원한이 있어요. 더구나 융정 그 못된 놈이 그 날 낙양 객잔에 들렸잖아요."
"그럼 북망채 짓이겠군."
"사공환 무리일 수도 있죠."
"그들은 절대 아니야."
진양이 실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형란이 묻는다.
"사공환 등은 왜 아니죠?"
"사공환의 무공은 형편없어. 방홍미녀가 명성을 날린다니 제법 실력이 될지도 모르지만 낙양 이대가장을 휩쓸 만큼
대단하지는 못해. 게다가 형웅강과 문인강목은 장법에 맞아 죽었어."
"아.. 과연 그렇군요."
형란과 문인능도 그의 말을 들으며 동감했다. 확실히 사공환은 고사하고 방홍미녀가 온다한들 무너질 이대가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북망채도 아닐 가망이 높았다. 문인능은 그것을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
"허나 그렇게 따지면 북망채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의 실력은 형아저씨나 우리 아버지의 발끝에도 못 미쳐요."
"북망귀곡편법을 동시에 펼치는 걸 보니 숫자만 많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니에요! 그들 따위가 어떻게 우리 아버지를 이긴다는 거죠?"
문인능이 곧바로 따졌다. 진양은 그녀가 아직도 어린애라고 생각하며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문인능은 그걸
비웃는 것으로 생각하고 분노했다.
"감히 문인강목 대협을 비웃나요?"
진양은 그녀가 자꾸 따지며 문인강목만 추켜세우는 꼴이 맘에 들지 않아 코웃음쳤다.
"흥. 비웃지는 않았지만 못 비웃을 것도 없지."
"뭐라고?"
그녀는 소리를 내지르며 살벌한 공기가 방안을 메웠다. 형란은 상황이 안 좋음을 깨닫고 그들을 사이에 끼며 말린
다.
"싸우지 마세요. 능아. 아무래도 북망채 짓일 거 같아. 그들이 아니면 손쓸 사람도 없잖아."
"하지만 그까짓 놈들 실력이 뭐 대단하다고 이대가장을 무너트려?"
"그건 나도 모르지."
하긴 그녀가 알 리 없다. 진양이 싸늘한 냉기를 풍기며 말한다.
"이 녀석은 내 말이 옳다고 믿으니 데리고 북망채로 가겠다. 넌 열심히 원수나 찾아보렴."
"뭐라고? 란이가 널 따라갈 것 같아?"
"안 따르면 강제로 데려갈 거다."
진양은 말하기가 무섭게 손을 날려 형란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형란이 놀라 비명을 지른다. 문인능은 그가 너무 방
자하다고 생각했다.
"더러운 놈! 그 손 놔!"
"네 팔이 잡힌 것도 아닌데 왜 난리냐? 그리고 넌 내가 왜 화주대도라 불리는지 잊어먹은 것 같군."
"너.. 너.."
문인능은 안색이 변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해하는 형란을 끌고 그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