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七 章. 북망산의 밤 1
진양은 한 마리의 괴물을 봤다고 생각했다. 귀신이라고 해도 좋고, 미친놈이라 해도 좋으며 더러운 거지라고 해도
좋다. 환히 밝아지는 촛불아래 드러난 가량의 모습은 그야말로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인데 그것도
그냥 봉두난발이 아니라 더러운 오물로 젖어있었고, 아무렇게나 흩어진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오물이 떨어지고 있
었다. 상의가 벗겨져 있고 가슴엔 채찍질이라도 당했는지 심한 상처로 가득했으며, 피와 오물이 섞여 아래로 흐르고
허리는 굵직한 강철로 벽에 둘러매어져 있었다.
"혀, 형부!"
형란은 크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녀가 놀란 건 가량의 상의가 벗겨져 그런 게 아니었다. 이미 안길 때 상
의가 벗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래부터 가량을 남자가 아닌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맨살의 품
에 안겼다고 해서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놀란 건 더러운 오물도 아니었고 봉두난발도 아닌 가슴
에 심한 상처 때문이었다. 더구나 안길 때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그것이 가량의 몸을 둘러맨 강철이라
는 것도 알 수 있어 더욱 놀랐다.
"라.. 란아.. 네가 살아있었구나."
가량은 형란을 바라보며 꿈꾸듯이 말했다. 실상 가량이 형란의 형부니 형란은 가량의 처제가 되는데, 그는 형란을
그저 란아라고 불렀다. 그녀가 어릴 때 이미 친해져서 란아, 란아 부르던 게 버릇된 것이었다. 가량은 형란이 살아
있는 게 잘 믿기 지가 않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손을 그녀의 머리로 뻗다가 문득 자신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는지 급히 손을 뺀다.
"란아.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그게.. 좀 복잡해요."
형란은 그가 이대가장의 붕괴를 모를 거라 생각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는 형란 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
었다.
"복잡하다니? 말해보거라. 이대가장이 무너졌는데 네가 살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그런 거란다."
"아, 아니 형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니?"
가량이 미소하며 말한다. 예전 같으면 그래도 제법 품위 있는 미소였을 텐데 지금은 완전 귀소(鬼笑)다. 허나 북망
산의 황량함에 그리도 떨던 형란이 지금은 조금도 떨지 않고 있었다.
"에이. 지금 날 구하러 온 걸 테니 일단 이것부터 풀고 얘기하자. 답답하구나."
형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허리를 둘러맨 강철을 바라보았다. 왠지 보통 단단한 게 아닐 듯 바라만 봐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형란은 일단 두 손을 들어 어떻게 해보려 머리를 굴렸지만 그녀 머리로 나올 방책도 없고 손으로
는 죽어도 떨어질 강철이 아니었다.
"란아 소용없단다. 이건 열쇠가 따로 있어서 열쇠 없이는 열지 못한다."
"그.. 그럼.."
그녀는 눈을 진양에게로 돌렸다. 가량도 그제야 같이 온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고개 돌리던
가량이 깜짝 놀란다.
"아니 능아가 아니냐!"
"안녕하세요.. 가아저씨."
문인능은 그가 알아보자 웃으며 인사했지만 치솟는 어색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방안에 있는 것조차도 고
약한 냄새로 질식할 것 같은데 그 원흉이 바라보며 말을 걸으니 끔찍할 만도 했다.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가
량이라 그냥 인사만 하고 넘어간 것일 뿐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방안에서 나섰을 것이다.
"란아. 저 분은 누구시냐?"
"아.. 저 분은 화주대도 석대협이세요."
"뭐라고! 화주대도 석앙?"
가량이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반응이 이상함을 알고 형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량이 낮은 목소
리로 말했다.
"왜 저런 자와 함께 있느냐? 그가 왜 화주대도라고 불리는지 모르는 거냐?"
"그건.. 알고 있지만 좋은 분이세요. 오늘 복수도 해주시고 형부도 구출한대요."
가량은 어이가 없어 진양을 바라보았다. 본래 화주대도는 남을 돕지 않는다. 그는 그저 여자와 술만 훔쳐 홀로 즐거
움만 느끼면 된다 생각하는 자다. 가량은 이 일의 진위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형란과 문인능의 몸을 담보 삼아 돕
는 거라고 생각했다.
"안 된다! 내가 이곳에서 썩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희들이 그에게 끌려 다니는 건 볼 수 없다!"
"혀.. 형부.."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걸 좌시한다면 내가 쳐죽일 망할 놈이고 구천에선 민아와 장인어른을 뵐 수조차 없다."
문인능은 눈치 빠르게도 그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깨달았다.
"가아저씨! 이상한 소리하지 말아요. 이 자는 단지 우리를 돕는 거고 다른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가량이 또 놀라 입을 쩍 벌린다.
"그럴 리가 없어. 화주대도는 절대 남을 돕지 않는다. 그가 남을 돕는 경우는 여자가 몸을 바쳤거나, 귀한 명주를
구해 주었을 때다."
"그만해요! 아무런 일도 없었고 이 자에게 내 몸을 주느니 차라리 죽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가량은 문인능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토록 부정하며 스스로 죽는다는 말까지 하니 이제야 조금 믿음
이 갔다. 그러나 여전히 화주대도라는 별호가 거슬렸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진양을 응시한다. 진양도 그 시선을 알
고 있었다. 그는 가량이 자꾸 오해하자 그냥 정체를 밝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히면 꼴이
좀 우습게 될 듯 하여 그냥 그만두었다. 그는 가량의 파헤치는 시선을 무시하고 북망 제자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으, 으.."
"열쇠는 어디 있냐?"
"여.. 열쇠는 채주님이.."
"그럼 융왕은 어디 있느냐?"
"채주님은 중앙에 있는 거채(巨砦)에.."
이제 이 자는 필요가 없었다. 진양은 그의 혼혈을 눌러 정신을 잃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니 형
란과 문인능의 얼굴을 봐서 살려두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어도 앞으로 계속 화주
대도 행세를 할 텐데 불편함이 있을 지도 모른다. 진양은 몰래 천주혈을 눌러 죽이려다가 가량의 의구심에 가득 찬
눈을 보고 당당히 때려죽이기로 했다. 손을 번쩍 들었다가 백회를 내리치자 그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 눈알이
튀어나왔다.
"꼭 죽일 필요가 있었나요?"
문인능과 형란은 죽는 모습이 끔찍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말은 문인능이 다시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억지로 입가
에 조소를 띄우고 있지만 역시 이런 광경은 처음인 듯 얼굴이 새하얗다.
"너 따위가 어찌 화주대도의 생각을 아느냐?"
진양이 냉소하며 맞받자 문인능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그녀는 뭐라고 따지려고 했으나 입을 벌리기도 전에 진양이
먼저 말했다.
"네 이름이 가량이라 했지? 북망채에 잡혀서 그 꼴이라니 한심하다. 네가 날 의심하는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만, 한
번만 더 재수 없는 눈알로 날 노려보면 깨끗이 도려낼 테다."
가량의 낯빛이 변했다. 조금 두려움을 느낀 듯 좀 전까지 강렬하게 빛나던 눈빛이 한층 사그라졌다. 진양은 그제야
웃음소리를 내며 터벅터벅 강철에 손을 갖다댔다. 살짝 두드려보니 과연 매우 단단한 듯 했다. 꽉 조여져 부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량의 허리를 자를 수도 없는 일이다. 역시 융왕에게서 열쇠를 뺏어오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 했다.
진양은 몸을 돌리며 아무 말도 없이 집채를 나섰다. 형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급히 따라갔다. 문인능은 그를 따
르고 싶지 않았지만 이 더러운 곳에 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역시 그를 따라갔다. 진양이 나오며 보니 감옥
바로 앞이 거채였다. 허나 이름처럼 특별히 크다거나 할 건 없었고 단지 중앙에 있다는 점뿐이었다. 뒤에서 형란이
달라붙는다.
"석대협. 바로 가실 건가요?"
"꾸물댈 수야 없지. 너희는 안에 들어가서 저 가량이란 놈이나 잘 데리고 있어라."
형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문인능은 따라오다 듣고는 안색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진양은 기척을 죽이고 거채로 접근했다. 아까 했던 방법대로 나무 벽면에 귀를 바싹 붙여 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
리지 않는다. 고요하고 너무 정적으로 가득 차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진양은 슬쩍 의혹이 일었으나 무시하고
한번 더 내공을 끌어올려 보았다. 물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다는 건가? 그럼 오히려 잘 됐군.)
그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거채의 문고리를 서서히 밀었다. 끼이익 소리도 나지 않고 정말 조용하게 열린다. 진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안은 어두컴컴하여 도무지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았다. 손을 들어 눈앞
에 가져가니 겨우 윤곽만 보인다.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러면서도 일단 눈을 감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에 적응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순 암흑이요, 이곳도 암흑이니 이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잠시 후
눈을 뜨자 이제는 좀 앞이 보였다. 자신의 손이 보이는 건 물론이고, 저 안에 가구들도 대충 보였다.
그는 발 아래를 조심하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먼저 저 안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는 게 옳았다. 가장 구석에 침상
이 놓여진 것 같은데 융왕이라도 자고 있다면 이참에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침상엔
이부자리만 놓여있다. 그는 융왕이 정말 없다고 판단하고 그제부턴 조금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급
히 열쇠를 찾기 시작한다.
한편 감옥 안에서 형란은 자신의 옷을 찢어 가량의 몸에 묻은 오물을 닦아내 주고 있었다. 가슴에 난 상처에 더러
운 것이 스미지 않도록 상처 부위도 붕대인양 빙빙 감아두었다. 하다보니 자연히 손과 그녀의 옷에도 더러운 오물
이 묻어났다. 가량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를 말린다.
"란아. 내 상처를 가려주는 건 좋다만 이 더러운 건 건들지 말거라."
"왜요?"
형란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쯧쯧. 이 녀석아. 네 옷하고 손을 봐."
그의 말에 그녀가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무언가 묻어있는 걸보고는 또 물었다.
"이게 왜요?"
"너는 그게 뭔지 모르느냐?"
"알아요. 오물이란 거."
"아니 아는데도 그리 태연하다니 신기하구나."
형란이 히히 웃었다.
"형부. 예전에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선행에는 깨끗함과 더러움, 착함과 못됨, 재물과 미색의 정도에 차
별을 두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오물은 너무 더럽잖니."
"형부를 위해서 하는 선행인데 어떻게 더럽다고 내버려둘 수 있겠어요?"
가량은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오래 전, 그녀가 바보 정도로 선해서 큰 불행이 있을 거라 예감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그 바보 정도의 선함이 그의 코끝을 찡하게 하고 있지 않는가. 그는 형란이 이만큼 컸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
고 대견하여 제 손이 더러운 것도 모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그녀도 그 더러움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켜보는 문인능은 달랐다. 지금 이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역질나고 진절머리가 나는데 형란이 가량의
오물을 닦아주자 소름이 다 끼쳤다. 당장이라도 구토가 하고 싶을 만큼 속이 부글거리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
다. 가량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는 정말 못 참을 뻔할 정도였다.
"능아. 화주대도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고 오렴."
가량은 문인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안색만 보고도 대강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가 말하자 문
인능은 매우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크게 심호흡하며 마치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온 사람처럼 얼굴이 평온해졌다. 진양이 향한 거채를 바라보니 아무런 동정도 없다. 허나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
가긴 싫어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기를 채 반 각도 안 지났을 때였다. 거채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진양이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뛰면서
도 소리가 별로 나지 않아 새삼 그의 신법이 놀랍게 느껴졌다.
"열쇠는 찾았어요?"
"넌 왜 나와있어?"
진양은 그녀의 물음엔 답도 안 하고 제 묻고 싶은 것만 물었다. 문인능의 가는 검미가 꿈틀댈 무렵 진양은 벌써 안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빨리 나온 진양이 한스러웠지만 억지로 숨을 참고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과연 열쇠를 구해왔다. 그는 서둘러 가량의 허리에 매여진 굵은 강철을 풀었다. 뒤에 있는 구멍에 금빛 열쇠
를 넣고 돌리자 강철은 힘없이 늘어진 것이다. 가량이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훔쳤구려."
조금 의심이 든다는 말이다. 진양은 냉소하고 있었지만 면사 때문에 가량이 알 턱이 없었다.
"잔말말고 따라와라."
진양은 열쇠를 집어던지며 먼저 달려나갔다. 문인능이 코와 입을 막으며 달려나가고 가량과 형란도 곧장 따라나갔
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열쇠를 훔치고 가량까지 구하는 것도 모른다는 듯 아주 고요하기만 했다. 진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까 지나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울타리 앞에 다다랐을 때도 가량 등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혼자 뛰어넘었다. 문인능은 잠깐 가량을 돌아보더니 자신도 곧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형란도 단번에 뛰어 넘
어갈 순 있지만 가량이 못 넘을 것 같았다.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비쩍 마르고 온몸에 힘도 없는 듯 해서 지금까지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오지 않았는가.
"란아. 난 넘을 수 있으니 먼저 가라."
"형부. 정말 괜찮아요?"
"그래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넘으마."
형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펄쩍 뛰어올랐다. 허나 역시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 듯 단번에 넘지는 못했다. 울타
리를 소리내며 잡고 거의 기어서 넘어가듯 겨우 넘어갔다. 형란이 따라 넘어오며 다시 그를 부축했다.
진양은 그들이 모두 넘어오자 또 혼자 내달렸다. 뒤에 그들이 따라오는 건지 죽은 건지 신경도 안 쓰고 혼자 열심
히 달려갔다. 조금 달리니 이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어두워서 잘 안 보여도 저 밑에 나무가 있는 듯 했다. 그곳
도 지나 달리고 또 달려 어느새 북망산 아래 기슭까지 도달했다. 뒤를 돌아보니 가량 등 모두 잘 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또 먼저 달려가려다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달리면 속도가 늦어지기 때문에 혼자 먼저 달려 그들
이 급히 쫓아오도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잡풀로 가득하고 넓게 퍼진 땅이라 굳이 힘들게 내달릴 필
요가 없었다. 곧 가량 등이 달라붙었다.
진양은 또 발을 떼었다. 잡초가 많아서 발을 땅에 댈 때마다 푸석푸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가는 입장이라 그런
지 그 소리도 왠지 크게 느껴진다. 주변이 넓게 트였어도 역시 황량한 느낌은 버릴 수가 없었다. 싸늘한 밤바람이
무성한 잡초를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스스스스>
진양이 깜짝 놀라 급히 멈춰 섰다. 곧장 따라붙은 문인능이 말한다.
"뭐해요? 안 가고."
보아하니 그녀는 못 들은 듯 했다. 그러나 진양은 분명 들었다. 수십 명이 발을 옮기며 풀 밟는 듯한 소리였다. 그
것도 막 속력을 내려고 내공까지 끌어올렸던 참이라 더욱 확실했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훑어봐도 사람은커녕 쥐
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안 갈 건가요? 그럼 저 먼저 가요."
문인능은 진양이 주변을 훑어보자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도 훑어봤으나 아무것도 없어서 안심하
고 먼저 내달리는 것이다. 진양은 그녀의 뒤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갔다. 형란과 가량은 그 뒤로 달려가고 있었
다.
"생각보다 쓸만한 걸."
언덕 위에서 들려오는 음성이었다. 진양 등은 절대 듣지 못할 테지만 언덕 위의 사람들은 모두 들을 수 있는 소리
였다. 목소리가 매우 굵직하고 차분하여 범인의 목소리는 아닌 듯 했다.
"저 자가 바로 그 자예요. 그 탄지신통을 썼던 놈이요. 두 년을 다 잡았는데 나타나서는 방해했죠."
놀랍게도 지금 대답한 사람은 융정이었다. 자고 있었던 게 아닌 듯 눈빛이 형형하고 옷도 잘 갖춰 입고 있었다. 그
의 곁에는 엄청난 장한이 한 명 서있었다. 융정의 머리가 그 장한의 어깨에도 못 미친다. 장한은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정도의 실력이면 네 따위가 상대할 수 없지. 아마 지금 보낸 애들도 뚫고 도망갈 거다."
"아니! 그렇다면 빨리 애들을 더 보내야겠군요."
융정이 놀라 소리치자,
"됐다 내버려둬라. 이 정도만 해둬야 우리에게 득이 된다."
장한은 여유로 가득 차 있었다. 융정과는 매우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저들이 감옥과 거채에 열쇠가 있다는 걸 알아냈으니 분명 다른 정보도 얻었을 겁니다. 내버려두면 후환이 될 겁니
다."
"멍청한 놈. 다른 것도 알아갔으니 내버려두는 거지, 못 얻었을 거 같으면 진작에 죽였다."
장한의 말은 꽤나 아리송했다. 융정은 그 속뜻도 못 알아들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한참을 내달리던 진양은 과연 그들의 대화처럼 매복한 자들을 만났다. 어림잡아 스무 명은 될 듯 했고 하나같이 채
찍을 들고 있어 북망귀곡편법을 사용할 것 같았다. 진양은 일전에 그들과 붙어본 기억이 있어 그것이 얼마나 위력
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라면 상관없지만 수가 많으면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다. 하물며 스무
명이랴.
진양은 융정과 웬 장한이 자신들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모르고 단지 들통이 났다고 생각했다. 뭔가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지만 깊이 생각할 순 없어 그 정도로 끝을 맺었다. 지금 진양 등은 포위된 상태였다. 스무 명은 원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지. 확실히 북망채가 보통은 아니군.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돼."
"석대협.. 이제 어떡하죠?"
형란은 크게 걱정되는 듯 말했다. 그녀도 전에 북망귀곡편법에 맞서봐서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문인능
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량만 숨을 헐떡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린 포위 당했고 저들 채찍은 길어서 접근하는 수밖에 없지. 다 쳐죽일 생각은 버리고 일단
저 앞에 놈들만 뚫어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여인의 눈썹 같은 초생달이 검푸른 하늘에 한 폭의 그림처럼 걸려있는 북망산의 밤, 그 아래 잡초 위에서 한바탕의
대전이 벌어졌다. 진양은 무엇보다 돌파를 중요시하고 있었다. 저번에 맞설 때 보니 가운데에 몰리면 크게 위험해진
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일단 신법을 펼쳐 정면으로 접근했다. 가량은 무기가 없고 힘도 없어 형란에게 기대 질질 끌
려가고 있었지만 형란과 문인능은 각자 검을 뽑았다. 진양이 달려가자 채찍이 두 방향으로 변화했다. 스무 개의 채
찍 중 10개가 진양에게로 남은 10개가 형란 등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진양은 그녀들이 저것을 막지 못함을 알고 일
단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 편법에 맞서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 중앙에 있으면 반드시 패퇴하니 내 뒤를 바싹 붙어라!"
진양은 빠르게 말을 마치고 다시 정면으로 내달렸다. 채찍들이 진양에게로 쏠렸다. 수십 개의 채찍이 한꺼번에 쏟아
지자 진양이 아니라 무굉이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다행히도 진양은 경공이 뛰어나 채찍들을 태반 피해낼
수 있었다. 피하거나 막지 못한 채찍은 여지없이 진양의 몸통을 후려갈겼다. 맞을 때마다 <찰싹>하는 소리가 울리
듯 매우 따갑고 아팠다.
"비켜라 개놈들아!"
그는 한층 더 속력을 내서 돌진했다. 그러자 채찍들이 갑자기 변초하여 진양의 앞길을 막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무
리다. 절대 돌파할 수가 없었다. 진양은 역시 탄지신통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뒤로 물러서는 척 하며 빠르게
중지를 퉁겼다. 이건 정면으로 날아가 그 중 한 명의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다. 6년 간 수련한 결과 대성하여 이젠
먼 거리에서도 자유자재로 명중시킬 수 있었다.
"탄지신통!"
따라오던 가량은 진양의 무공을 유심히 살피다가 탄지신통을 보았다. 무림인 치고 탄지신통을 모르는 자가 얼마나
될까. 소림사 72절예 중 하나로 유명한데다, 근래 소림사 방장 운무(雲無)가 자주 선보여 더욱 유명해진 절기 중에
절기였다. 그걸 화주대도 석앙이 쓰니 놀랄 만도 했다. 북망 제자들은 그게 뭔 무공인지 몰랐지만 가량의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탄자신통의 명성은 이미 많이 들어서 그들도 일순 주춤하는 마음이 생겼다.
진양은 이만한 기회가 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순간 눈을 번뜩이며 맹렬히 돌진했다. 대천산의 험한 산악지대
를 살아와 경공이 뛰어난 진양이다. 더구나 검법이나 권법보다도 경공을 펼치며 원숭이처럼 뛰어다니길 좋아했던
사람이니 보통 뛰어나겠는가. 고수들의 경공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적어도 지금 이 북망 제자들보다는 훨
씬 뛰어났다. 그들이 아차, 하는 사이 진양은 이미 정면에 있는 북망 사람 면전으로 도달해있었다.
그는 도달하기가 무섭게 바로 유리장쾌의 수를 썼다. 그의 면전에 있는 세 명의 북망인은 나름대로 몸을 날리며 피
하려 했지만 진양이 한 수 더 빨랐다. 각자 물러서는 그들의 이마를 정확히 가격했다. 돌 깨지는 소리가 울리며 그
들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공로(攻路)를 가씨 놈에게 돌려라!"
좌측에 있는 자가 소리쳤다. 가씨 놈이란 당연히 가량이다. 채찍이 갑자기 회수되더니 금방 방향이 바뀌며 가량 등
에게로 쏟아졌다. 그들은 모두 크게 놀라 황급히 몸을 낮추며 전력으로 내달렸다. 허나 스무 개에 가까운 채찍을 어
찌 모두 피할 수 있으랴. 더구나 가량은 몸이 성치 못해 힘도 없으니 피해내기란 어불성설이다. 가량과 그의 팔을
어깨에 두른 형란만 채찍 세례를 받았다. 문인능은 그들과 붙어 있어서 몇 대 맞았으나 서둘러 떨어지자 채찍을 맞
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형란이 맞는 걸 보며 울상을 지으면서도 주춤거릴 뿐 감히 도와주진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순간 주춤거리는 문인능의 옆으로 진양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녀가 놀라기도 전 진양은 왼팔을 들어 떨어지는 채찍
을 후려 잡았다. 손바닥으로 두어 개를 쥐어 잡고 옆으로 꺾으며 팔을 들자 수많은 채찍이 그의 팔로 떨어졌다. 형
란과 가량은 덕분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서, 석대협!"
형란은 진양이 대신 얻어맞는다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급히 검을 휘둘러 급한 대로 채찍을 자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잘릴 채찍이 아닌가보다. 힘을 다해 올려쳤지만 잘라지지 않고 단지 깊숙이 패인 자국만
남았다. 한번 더 휘두르니 겨우 하나가 잘렸다. 그렇게 하나 자르는데 진양은 이미 수십 대는 더 맞았다.
"뭐 하는 거냐? 얼른 달려가!"
"석대협!"
형란은 갈 기세가 아니었다. 고개를 가량에게로 돌리니 그는 진양의 뜻을 알아듣고 그녀를 끌었다. 하지만 그래도
형란은 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팔을 잡아 끄는 가량을 제치고는 다시 검을 열심히 휘둘러댔다. 그 모습에 진양은
한편으론 답답했지만 훈훈한 고마움도 느껴졌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훈훈한 마음을 느끼며 맞고만 있을 텐가. 진양은 자각을 하고는 아까 지시를 내리던 자를 찾아
보았다. 저 한편 끝에 서서 채찍을 후리고 있다. 진양은 저 자를 쓰러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날 연경후가 <승리
의 조건 중 하나는 장군을 침이다.>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즉각 탄지신통을 전개했다.
"앗! 대사형이 쓰러졌다!"
명중했다. 정확히 그 자의 머리로 꽂히는 걸 진양은 볼 수 있었다. 그 자의 곁에 있던 자가 놀라 부르짖자 떨어지던
채찍의 수가 줄고 강도도 많이 약화되었다. 진양은 기회로 생각하고 채찍을 한순간 잡아끌며 내달렸다. 놀란 북망
제자들이 채찍을 다시 떨어트렸지만 일단 발에 발동이 붙자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양은 손에 잡고 있던 채찍
을 놓으며 형란과 가량을 양팔로 감쌌다. 이들은 느리니 내버려두면 다시 귀곡편법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는 사력을 다해 달렸다. 뒤에서 뭐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달리며 문인능의 옆을 지났지만 진양은 아는 척
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