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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七 章. 북망산의 밤 2 (38/90)

                                     第 十 七 章. 북망산의 밤 2

한참을 달리니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 그는 형란과 가량을 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열심히 달려오는 문인능이 

보였고 그 뒤로 성난 북망 제자들이 쫓아오는 것도 보였다. 진양은 형란과 가량을 재촉하며 달렸다. 형란이 외친다. 

"능아는 어떡해요?" 

"저 암캐는 저 살자고 너희 둘이 맞는데도 신경을 안 썼다. 잘난 대로 알아서 쫓아올 테니 빨리 달리기나 해!" 

그래도 형란이 주춤거리자 진양은 그녀의 뒷목을 잡아 앞으로 던져버렸다. 아직 어린  소녀라 잘도 들려 훨훨 날아

간다. 가량은 날아갈 몸이 아니라 등을 밀어버렸다. 그러자 넘어질 듯 휘청휘청 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다시 달려

갔다. 진양은 그 모습을 다 보고서야 자신도 그 뒤를 따랐다.  아까 너무 맞아서 그런지 어깨와 허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갔지만 달리는 데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뒤에서  문인능이 같이 가자고 하는 듯 했지만 진양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쉬지 않고 달린 덕일까. 모두 녹초가 되면서도 결국엔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북망산을 벗어날 때까지 쫓아오던 자들

도 산과 거리가 멀어지자 곧 돌아가는 듯 했다. 진양 등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어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쉴 곳을 찾으려다 보니 저 앞에 작은 촌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정신 없이 도망쳐서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일단 들어서서 쉰 후에 알아보기로 하고 작은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진양은 객잔 이층으로 오르다

가 쓰러졌다. 

진양이 다시 깬 건 이튿날 아침이었다. 객잔 밖으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은은히 찰랑찰랑 하는 소리도 들렸

다. 온몸은 굉장히 아팠다. 허리고 머리고 어깨고 팔이고, 도대체가 성한 곳이 없는 듯 했다. 정신을 차리니 객잔 방

의 침상 위인 것 같았다. 팔이 잘 안 움직여 이불을 들춰보고는 누군가 자신을 치료했다는 걸 깨달았다. 팔은 물론 

허리와 가슴까지 하얀 붕대로 꽉 감아져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려 했다. 허나 살갗이 심하게 까진 듯  몸을 움직이자 허벅지가 아파 신음소리를 

흘렸다. 아무래도 그냥 가만히 누워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제 깼군요." 

진양은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벅지가 또 따가웠지만 상관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저 옆에 작은 칸막이 뒤에

서 웬 남자가 걸어나왔다. 진한 약 냄새가 풍겨 그가 의원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몸은 누가 치료했냐?" 

"제가 했습니다." 

역시 그 남자가 한 일이었다. 진양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

다. 진양은 처음엔 이유를 몰랐으나 머릿속으로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머리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방립은 쓰여져 

있다. 그가 이상하게 본 건 치료를 받으면서도 방립을 쓰고 있는 거였나 보다. 

"날 치료하면서 방립은 왜 안 벗겼지?" 

"당신의 동행 분들이 벗기지 말라고 하더군요. 벗겨서 얼굴을 보면 분명 해가 된다면서.."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진양은 그제야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의원을 내보내고는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잠시 후 쿵쾅거리며 뭐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덜컥 열린다. 

"석대협! 깨어나셨군요." 

진양은 이번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 단연 형란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언뜻 들어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누운 채로 말만했다.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됐나?" 

"이틀밖에 안 됐어요. 의원이 하는 말이 석대협의 쾌유가 매우 빠르데요." 

진양이 낮게 웃으며, 

"무림인 치고 회복이 느린 자가 어디 있겠느냐. 그나저나.. 여긴 그때 봤던 촌락인가?" 

"그렇죠. 근처에 낙하(洛河)도 흐르고 인심도 좋아요." 

"마음에 드나보군." 

그의 말에 형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지 눈도 초롱초롱 빛나고 만면에 웃음꽃을 피워댔다. 또 진양

까지 깨어났으니 더욱 좋을 것이다. 진양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은은히 들렸던 물소리가 강 흐르는 

소리였다는 걸 느끼며 다시 드러누웠다. 

"편히 쉬세요. 내일 다시 찾아올게요." 

그녀는 말하며 문밖으로 나섰다. 

진양은 누운 채로 많은 생각을 했다. 본래는 자고 싶었으나 방립을 쓴 채로  자자니 매우 불편했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북망산에서 보았던 북망채  사람들을 기억했다. 북망귀곡편법이 떠오르고 으스스한  산이 떠오른다. 

밤이 되자 들려오는 소리며 그들이 펼치던 편법이며 정말 귀곡으로 가득 차 북망귀곡편법이란 말이 전혀 아깝지 않

았다. 

편법을 떠올리니 자신이 문득 한심해졌다. 무굉처럼 세상에 겁낼 게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자신의 무공이 모자

라 그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만일 그 날 무굉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아마 북망채

를 정면으로 쳐들어가 몽땅 뒤집고 나왔을 것이다. 실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다 떨린다. 그러나 진양에게는 그런 무

공도 없었고 언제나 맞설 때면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 날도 가량을 데리고 나오며  맞섰던 스무 명 때문에 지금 이

렇게 누워있지 않는가. 항상 경공에 의지해 싸우는 자신이 한심해지고, 당당하게 덤비면서도 결국엔 물러서는  것도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자연 유루봉법이 떠오르게 되었다. 현재 진양에게 있어서 가장 대성한 무공이라면 역시 유

루봉법이다. 함종절검법은 최상과의 일로 11초식 중 고작 앞에 세 초식밖에 익히지 못햇고, 함종권법을 오래 연마하

긴 했지만 위력적이지 못해 쓸만하지가 않았다.  나중에 휴정에게서 탄지신통을 배우고 대성했으나  그것도 위력만 

대단할 뿐, 남과 싸울 때마다 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결국 남는 건 유루봉법 뿐인 것이다. 하지만 유루봉법을 

쓰자니 왕령이 또 떠올랐다. 종남산의 꽃핀 산길을 당주고와 함께 걷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고 유루

봉법도 쓰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생각한 거지만 전진교에서 벌였던 행동은  아직도 후회가 되고 있었다. 본래 옛일에  깊이 파묻히는 성격이 

아니지만 왕령의 일이라면 다르다. 결과적으로 중양궁에서 직접 왕령과 당주고의 혼인을 인정한 셈이 아닌가. 그 당

시에는 흥분하고 분노가 치밀어 그랬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허나 과거는 돌아오

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다. 

귀로는 시원한 물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파도처럼 시원하진 않아도 졸졸, 하는 소리는 절로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왕령도 이제 잊을 때가 됐건만 죽어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여전히 함께 보낸 6년의 세월은 모두가 생생했

고, 중양궁에서 일도 좀 전의 일처럼 깨끗이 남아있었다. 진양은 답답함에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따갑고 쑤셔 한숨 

푹 자두면 좋으련만 잠도 안 오고 가슴엔 응어리가 진 듯 자꾸 한숨이 흘러나온다. 

창문은 한번 열어보았다. 이 객잔은 어제 봤던 기억으론 이층으로 되어있던 것  같은데 촌락 어디 부근에 있었는지

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확실히 그 날 무리했기는  했는가보다 싶어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창문을 여니 마치 

옛일은 잊어버리라는 듯 은근히 살랑거리는 시원한  바람이 진양의 방립을 때렸다. 그는 방립을  벗고 싶어 단숨에 

내던지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고 단지 좀 핼쑥한 게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능아! 저거 봐!" 

또 형란의 음성이 들렸다. 진양은 깜짝 놀라 부지중에 움찔했지만 밑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

니 밖엔 형란과 문인능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 객잔은 힘차게 흐르는 낙하의 옆이었다. 멀리 넓게 자리잡아 흐르는 

낙하가 보이고 그 너머로 희끗희끗하게 산이 보였다. 

"멋있다 정말." 

"정말 아름다워! 이런 곳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형란이 꿈같은 소리를 했다. 확실히 낙하와 먼 산 사이로 흰 구름 떠다니는 게 절경은 절경이었다. 보는 이의 생각

을 말끔히 지워주고 세속의 일을 잊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 란아. 그는 자고 있니?" 

진양은 다시 놀라 고개를 안으로 내뺐다. 문인능이 말한 그는 물론 진양일 것이고 형란이 돌아보며 대답할 것 같았

기 때문이다. 곧 그녀의 대답이 들린다. 

"응. 석대협은 피곤한지 주무셔. 그건 왜?" 

"아니.. 그 인간이 힘들어하는 걸 보니 통쾌해서." 

"능아." 

문인능은 아직도 독기가 서려있는 듯 말투에 서늘한 한기가 묻어났다. 

"흥. 그 날도 날 버려 두고 달려갔잖아. 더러운 호색한 주제에.." 

"능아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냐." 

그녀는 정말 더럽다는 듯 말하며 퉤, 침까지 내뱉었다. 형란이 인상을 쓰며 만류하자 그제야 입이 다물어졌다. 진양

은 그걸 들으며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두고 혼자 달려간 건 그녀가 미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격받는 형

란과 가량을 좌시했던 이유도 있었다. 적어도  형란이라면 예전엔 옆집에 살던 죽마고우(竹馬故友)요,  함께 부모를 

잃고 집도 잃은 동병인(同病人)이 아닌가. 가량 또한 형란의 형부 되는 사람이고 매우 잘 아는 사이일 텐데  그녀는 

형란과 가량이 당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 진양은 그걸 보며 그녀가 참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겁이 나고 

능력도 안 된다 해도 지켜만 봤다는 건 역시 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호색한이란 말을 들으니 또 어이가 없기도 했다. 왕령을 잃고 많은 여인들을  봤지만 사감이라곤 느껴본 적도 없는 

진양이었다. 마음속엔 오로지 왕령뿐인데 어찌 다른 여자를 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악만풍과 청루에 묵고 있을 

때도 기녀의 얼굴조차 잘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진양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호색한에 도둑놈인 화주대도 

석앙이다. 

문득 그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생각해보니 대단한 이유

도 없다. 그저 형가장이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때, 형란과 문인능을  돕느라 잠시 신분을 숨긴 것뿐이었다. 고

작 그거 때문에 귀찮게 방립을 쓰고 하얀 면사로 눈만 내비친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허나 저번에도 그랬듯 이제 

와서 신분을 밝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지금 신분을 밝힌다면 그게 더 우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 밖에선 형란과 문인능의 탄성이 연발하고 있었다. 낙하의 모습을 보며 넋이 나간 채로 있다. 진양은 흥

미를 잃고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방립은 쓰지 않고 단지  얼굴에 올려놓은 채로 잠을 청했다. 형란 등이 자신이 

쓰러졌을 때 굳이 벗기지 않았다고 하니 잘 때 들어와서도 몰래 얼굴을 훔쳐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막 

양기(陽氣)가 불어나는 대낮, 진양은 물소리를 들으며 눈이 감기고 있었다. 

화산은 여름에 진정 멋을 낸다. 오천 길에 달하는 높이로 수많은 절색의 꽃들이 만발하고, 유명한 도림엔 복숭아 열

매가 수없이 맺힌다. 진양은 일전에 악만풍과 화산에 와서 그 도림을 구경한 적이 있다. 분홍빛이 초록빛과 어울려 

보는 이들조차 얼굴이 붉어질 만큼 절로 탄성이 나오는 곳. 바로 화산의 도림이다. 

진양과 가량, 형란, 문인능은 지금 그 화산에 도착했다. 낙하 옆에 자리잡은 촌락은 북망산과 가까워 아무래도 위험

이 존재했다. 지난 날 복면인들 때문에 화산을 제대로 돌아다녀 보지 못했고, 화산은 산세가 깊고  험하여 숨는다면 

이만한 곳도 없었다. 이미 악만풍과 와본 적이 있는 진양은 길을 잘 알아 쉽게 화산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헌데 그런 멋진 화산을 앞에 두고 진양 등은 모두 딴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바로 가량의 말에 정신이 집중된 것이

다. 발걸음은 네 명 모두가 멈추지 않고 마치 따로 알아서 가듯 걷고  있지만 생각과 눈은 모두 가량에게로 쏠려있

었다. 가량은 지금 북망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잡혔어. 도망을 가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화아가 죽어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지. 민이 죽은 후

로 화아도 죽다니.. 정말 슬프고 한스러워 그냥 그들의 포박을 받아주었다." 

가량은 막 북망채에게 사로잡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화아는 그의 딸인 가화를 이름이고 그녀는 이미 죽은 듯 했

다. 화산에 도달하기 얼마 전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앞의 이야기는 모두 진양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본래 

형민과 혼인하기 이전부터 전진교 도사였고 당씨 집안과 원한을 져서 도망치다 형민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

고 무공이 뛰어난 두 남녀를 만나 도움을 받았으나 낙양으로 향하던 중 북망채에게 가화가 죽고 자신은 사로잡혔다

는 이야기들이었다. 형란이 도중 진양이란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놀라며 이것저것 캐물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두

운 안색으로 진양이 대가도 받지 않은 채 그냥 떠났다고 하자 그는 매우 안타까운 듯 허희탄식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진양이 몰랐던 것도 있었다.  사실 가량이 옥양자 왕처일(玉陽子王處一)의 다섯 번째 제자라는 

것이다. 진양은 그 날 종남 객잔에서 봤던 전진 칠자 중 한 사람이라는 자가 가량의 사부라고 했으니, 그 자가 바로 

왕처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갑자기 악만풍이 떠올라 종남산에서 무사히 있기는 한가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럼.. 언니는.." 

"미안하다 란아.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형란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지만 역시 천성적으로 눈물이 많아서 그런지 찔끔찔끔 나오는 

눈물은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카뻘 되는 가화까지 죽었다니 더욱 슬펐다. 가량은 그녀를 다독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북망산이 매우 으스스했다느니 북망채에서  오물을 쏟아 붓고 채찍을 휘둘러  괴롭혔다느니 하는 

모두 진양 등이 알만한 사실들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얻고 맞기만 하다 나온 것도 아니지. 실상 여러 가지 놀라운 정보를 얻었다." 

문인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그게 뭐죠?" 

"대부분 너희 둘 다 알고있는 사실이지. 허나 그때는 충분히 놀라운 얘기들이었어. 이대가장이 북망채  손에 무너졌

다던가, 융왕의 무공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하여 장인어른과 문인대협이 함께 덤비고도 이기지 못했다던가 하는 이야

기들 말이다." 

문인능은 진양에게 들은 바가 있어서 융왕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게 사실이라니 조금 부끄러워 안색

을 붉혔다. 이번엔 형란이 묻는다. 

"그럼 저희가 모르는 사실은 뭐죠?" 

"그것은.." 

가량은 막 입을 열어 대답하려다 힐끔 진양을 쳐다보았다. 매우 중요한 거라도 되는지 아무래도 그가 듣는 걸 꺼리

는 것 같았다. 진양은 금새 눈치채고 눈에 조롱기를 띄우며  앞서 걸음을 옮겼다. 형란이 놀라 그를 불렀지만 그는 

듣지도 않고 계속 빠르게 걸어 올랐다. 조금 거리가 생기자 가량이 말한다. 

"그건 바로 북망채가 전진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뭐라고요!" 

형란이 소스라치게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전진교라면 그녀도 많이 알고 있고 문인능도 잘 안다. 형웅강이 전진교 

왕중양과 전진 칠자를 존경하여 그들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잘 아는 것이다. 협명을 많이  들었고 도를 깊이 

쌓으며 정도를 잘 지켜 무림의 명문정파로 이름을 크게 날린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런 전진교가 추악한 도적 집

단인 북망채와 연관이 있다니 그녀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인능은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린 채로 물

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나도 모른다. 남들은 이 말을 들으면 내가 미친놈이라 비웃겠지만 난 이 말을 믿는다. 분명  전진교는 북망채와 연

관이 있어." 

"어째서요?" 

가량이 안면을 씰룩거리며 대답한다. 

"아까 말했듯이 지금 전진교는 당광 그  말아먹을 놈이 교주행세를 하고 있어. 그  음흉하고 더러운 놈이 교주직에 

앉아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형란과 문인능은 믿기 지가 않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럴 것이  전진교가 지금껏 쌓은 협명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이 수도하여 시비를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자들로 그녀들의 머리엔 단단히 인식된 상태다. 허나 

가량을 면전에 두고 반박할 수는 없어 그냥 알았다는 듯 눈짓만 했다. 

그러는 사이 진양은 먼저 산을 오르고 있었다. 가량이 듣지 않길 원해 혼자 산을 오르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런 이야기를 듣는데 차별을 두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가

량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걸음을 느리게 하고 내공을 전부 끌어올리면,  따라오는 가량

의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먼저 달려나갔다가 한 바퀴 돌아 숨어서 엿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양은 그러

지 않았다. 그렇게 엿듣는 건 매우 비굴하고 구차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더러워서 안 듣는다고 굳게 다짐

하는 것이다. 

한참 오르니 하늘 높이 뻗은 연화봉이 보였다. 운대(雲臺), 공주(公主), 옥녀(玉女)라고 하는 작은 세 봉우리가 마치 

시립하듯 떠받치고 있어 문득 한 글귀가 머리를 스쳤다. 

<여러 봉우리가 자손인양 솟아 있도다.> 

이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인 두보(杜甫)가 연화봉 밑에 세 봉우리를  두고 지은 시 중 한 글귀였다. 오래 전 왕령과 

아미산에서 지내며 어쩌다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그녀가 중얼중얼 읊었던 시가 바로 이 시였다. 전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렇듯 연화봉을 바라보니 이 부분만 절로 떠올랐다. 

어느덧 날씨가 쌀쌀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 날 이곳에 왔을 때 그를 맞던 열기는 많이 수그러들어 있고, 약

간 시원한 바람만 불고 있다. 하기야 악만풍과 일전에 이곳에 왔을 때가 막  시작된 여름이니 지금은 여름도 다 지

나가고 있을 법했다. 하지만 초록빛깔은 여전했다. 원하지 않아도 허리가 펴지고 눈이 휘둥그래지며 탄성이  나오게 

하는 초록빛깔, 험난한 산세, 그리고 분홍색의 조화는 참으로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진한 황색으로 물들 텐데 그때는 또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깐 경치를 구경하다보니 가량 등에게 뒤를 따라잡혔다.  가량은 좀 전 그를 먼저 보낸 게  무안한지 함부로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제가 하는 이야기도 못 듣게 했으니 가슴에 

찔리는 게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가량이 매우 미안해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다 그가 화주대도 석앙이라 그런 

것일 뿐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진양은 그들이 붙어도 아는 체 한번 안 하며 혼자 산을 올랐다. 그는 먼저 도림으로 향했다. 여긴 북쪽이니 도림으

로 가는 길은 별로 멀지 않다. 조금만 걸으니 금새 청홍색(靑紅色)의 세외도원이 진경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광활히 

펼쳐진 도림, 도림새는 참으로 할 말을 잊게 만들고 있었다. 

하물며 형란과 문인능은 이런 광경을 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진양은 이미 한번 본 적이 있고, 이런 아름다움보다 

고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하는 괴팍한 풍취가 있어 좀 덜했을지  모른다. 허나 형란이나 문인능은 이만

큼 아름다운 걸 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은은한 청홍이요, 광활하게 트인 

복숭아나무요. 모두 처음 보는 풍경이고 진경인 셈이다. 가량도 이만한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여기며  매우 

좋아했다. 

한참 얼이 빠져 입만 벌리고 있던 문인능이 문득 진양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죠? 당신이 이런 곳을 안다니 매우 의외이군요." 

진양이 피식 웃는다. 문인능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생각했다. 

"일전에 지나간 적이 있었다. 이곳은 숨기도 좋고 경치도 좋으니 한동안 머물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정말 좋아요! 저번 촌락에서 본 낙하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요즘은 참 눈을 둘 데가 없군요!" 

형란은 마냥 좋기만 했다. 이런 멋진 곳에서 한동안 지내자면 그야말로 대찬성이었다. 문인능도 반대할 리가 없었고 

가량 또한 숨기가 좋은 걸 알아 반대하지 않았다. 진양 등은 그리하여 일단 도림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게 되었다. 

진양의 상처는 이제 많이 나았다. 본래 상처가 심각한 게 아니었다. 귀곡편법을 펼치며 쓰는 채찍이 보통 단단한 채

찍이 아니라서 살갗이 많이 터지고 속이 좀 상했을 정도였다. 진양의 내공은 대단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있는 걸 모

두 끌어올려 힘을 썼으니 큰 부상을 면한 것이다. 또 북망 제자들의 실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었다. 해

서 살갗이 까지고 뭉개진 상처들은 이미 촌락에서 모두 해결했다. 얼마나 운이 좋은 건지 그만한 작은 촌락에 의원

이 있다. 실력은 별로인 듯 하고 겁이 많으며 재물을 좀 밝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의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진양의 몸은 완쾌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편해져있었다.  도림 깊숙이 들어앉아 멋대로 복숭아를 

따먹고 노는 걸 보면 건강하면 건강했지 아픈 몸은 아니었다. 형란도 그가 건강한  듯 보이자 기뻐 그를 잘 따라다

녔다. 도림 안을 이리로 저리로 들어가 놀다가 방향을 잃어 고생하기도 하고 벌레도 조금 있어서 형란의 비명이 울

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형란에게 있어서든 진양에게 있어서든  이유는 달랐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

간이라 느끼는 점은 같았다. 형란은 복수를 잠시 잊고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노는 게 행복했고, 진양은 편안한 안식

을 느끼며 놀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물론 진양은 왕령이 자꾸 떠올라  슬픈 생각도 들었으나 그래도 청홍색을 보

면 조금 잊혀져 행복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순식간에 닷새나 흘러 진양의 상처는 더  깨끗하지 못할 만큼 완전 치유되었

고 문인능과 가량의 복수심은 한결 불타 오른 것이다. 가량은 손을 쓴 건 북망채지만 전진교와 연관이 있으니 종남

산에 한번 가보는 게 좋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게다가 악만풍도 그곳에 있다니 한시바삐 가는 게 좋다고 했다. 문인

능은 찬성했고 형란과 진양은 침묵할 뿐이었다. 

"란아.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지. 형아저씨가 구천에서 편히 눈 못 감으실 거야." 

문인능은 형란을 부추겼다. 형란은 정말 복수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 네 사람 가운데 홀로 가

진 생각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형웅강에게 인(仁)을 많이 교육받은 그녀로선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인능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마음 중 동하는  부분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제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킨 셈이고 살해당한 

것이니 밝힐 건 밝혀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문인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석공자는 어떻게 하실 것이오?" 

이번엔 가량이 진양을 보며 한 말이었다. 형란과는 달리 석대협이라 죽어도 부르지 않는다. 진양은 그의 말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종남산이라니, 왜 하필 종남산인가.  그는 지금 왕령과 당주고가 떠올라  갈팡질팡 선택을 못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의 몸 한구석에 자리잡은 악만풍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낙양 객잔에서 기다리겠다 해놓고는 지

금 화산 도림에서 편안히 놀고 있다는 걸 생각했다. 시일로 예상해볼 때, 악만풍이 낙양으로 돌아오려면  앞으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난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종남산에 가고 말아야 하는가? 령아를 보면 나도 좋고 악만풍도 있으니 더

없이 좋다. 그러나 령아는 이미 당주고와 혼인을 했다. 그럼 내 꼴이 뭐란 말인가! 내가 거기에서 대체 뭘 하겠다고 

간단 말인가!) 

진양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정이 안 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량 등이 놀라 눈을 크게 뜬다.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양의 눈은 그들에게 향해있지 않았다.  땅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로 눈앞

도 아닌, 그 사이의 중간. 참 애매한 시선으로 꼬집어 말하면 망상에  빠져있는 눈동자였다. 그렇듯 진양은 아직 상

념에 묻혀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악만풍은 어찌하지? 여기서 노는 것도 좋지만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낙양으로 가면 내가 없

고 이대가장이 무너진 걸 알아 크게 걱정할 텐데 여기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그럼 차라리 낙양으로 가야 하는

가? 안 돼. 그건.. 낙양으로 향하면 또 북망채 도적들을 만날 것이다. 내 무공은 아직 미약하니 그들과 맞붙으면 재

수가 없는 날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왕령도 보지 못하고 죽을 순 없다. 난 죽지 않는다!) 

그의 눈이 일순간 부릅떠졌다. 가량 등은 그가 지금 깊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왕령과 그의 사이를 모

르는 그들은 종남산에 가는 것 가지고 저리 고민한다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말끔히 없애주듯 

진양의 입에선 힘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종남산으로 가자!"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달려나갔다. 가는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도 안 하는 듯 제멋대로 복숭아나무 사이를 

지나갔다. 형란이 놀라 그를 쫓으려 했으나 가량이 황급히 만류한다. 

"따라가지 말거라. 석공자는 뭔가 마음 편치 못한 일이 있는 것 같다." 

"마음 편치 못한 일이라니요? 어떻게 알아요?" 

가량은 느긋하게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그저 진양의 음성이나 자세가 격정이 끌어 오른 것 같아 한 말인데 그녀

는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에겐 그냥 그런 게 있다며 얼버무리고는 진양의 뒤를 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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