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八 章. 애절한 정 1
종남산은 서안의 남부에 위치하여 화산에선 멀지가 않았다. 그래도 걸어간다면 먼 거리라 문인능은 말 네 필을 사
서 돌렸다. 모두 힘없고 값싼 말이었지만 종남산까지 빠르게 가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듯 했다. 진양은 격정이 치
솟아 홀로 독주했고 형란 등은 함께 뒤를 따랐다.
진양의 독주 때문에 빨리 간 탓일까. 화산에선 아침나절에 출발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새벽이었다. 날이 서서히 밝아
져오고 새벽의 찬 공기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워줬다. 형란과 문인능은 피곤하여 거의 말에 매달려 가는 수준이었다.
진양을 붙잡고 잠시 멈추라고 하고 싶지만 거리가 멀어 말이 전해지질 않는다. 종남산까지 오면서 이미 여러 차례
불렀어도 그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문인능이 중도에 분을 참지 못하고 우리끼리 쉬었다 가자고 했다. 허나 형란은
진양이 혼자 가는 걸 원치 않았고, 가량도 혹 모를 일에 대비하자면 그가 필요해서 그녀의 뜻은 어쩔 수 없이 사라
졌다.
종남산 역시 변함이 없었다. 오래 전 왕령, 무굉과 함께 지났던 곳들도, 당당히 자리를 지키는 보광사도 모두 그대
로였다. 머리 위로는 짹짹 새가 울며 지나가고 황토색 갈대가 바람에 춤을 춘다. 진양은 종남산을 오르면서부터 마
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보이는 것 하나 하나가 전부 왕령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왕령. 왕령. 그녀는 잘 있을까,
당주고와 혼인하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혹 당주고가 그녀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가
득 메워 사실 지금 그 자신조차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 길이 전진교로 향하는 길인지 저 너머 번천
으로 가는 길인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발은 알아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진양은 생각하지 않지만 발은 마치 그의 뜻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알아서 움직여주었다. 그리고 발은 일전에 번천 구경하던 언덕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역시 조금도 변함이 없었
다. 진양이 이곳에 앉아 정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번천이며 앉았던 자리며 모두 이전 그대로였다. 너무 생생하
여 꿈만 같고 어제 일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얼이 빠진 그는 느긋이 번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대협!"
그가 정신을 차린 건 한참 후였다. 갑자기 고막을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형란이다. 그녀는 가량, 문인능과 함께 그를 따라 오르고 있었는데 그가 자꾸 길을 빙빙 돌며 이곳에 오는 걸보고
매우 기괴하게 여겼다. 게다가 이곳에 와서는 멍청하게 번천만 바라보자 형란은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 그를 부른
것이었다.
"석대협! 어디 편찮으세요?"
"아.. 아니다."
진양은 어색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번천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니 어떻게 이리로 왔는지 조금 기억이 났다. 문득 부
지중에 또 이곳을 왔다고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에 실소가 다 터졌다. 형란 등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캐묻
지는 않았다. 그들은 진양을 그저 화주대도 석앙으로 알고 있고 석앙은 호색한이며 좋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형란은 차별을 두지 않고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양은 잠시 후 악만풍에 대해 망각했던 자신을 깨달았다.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왕령과 악만풍 때문이지 않는가.
형란 등은 그가 전진교에 대해 조사하러 같이 온 거라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 아님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말없이
형란 등을 쭉 쓸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종남산 길을 돌아보았다. 화산엔 못 미쳐도 역시 산세가 험한 편이었다. 전
진교를 기억해보니 은근히 철저하고 잘 갖춰진 방비가 떠올랐다. 진양은 이들과 함께 전진교에 잠입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너희가 원하는 정보는 무엇인지 말해라."
그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형란 등에겐 충분히 난데없는 헛소리였다. 허나 문인능은 금방 느껴지는 게 있어 입을
열어 말했다.
"전진교와 북망채의 확실한 관계하고, 낙양 이대가장을 몰살시킨 일과 전진교가 혹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좋다. 내가 전진교에 잠입할 것이니 너희는 모두 한 곳에 숨어있어라."
진양은 과연 문인능이라 생각하며 바로 대답했다. 그제야 형란과 가량도 뭘 깨달았는가보다. 눈을 크게 깜박이며 형
란이 물었다.
"저희는 모두 한 곳에 숨어있으라니.. 그럼 석대협 혼자 잠입하시게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량이 반대한다.
"안 되오 그건. 이건 우리 일인데 석공자에게 맡길 수 없소."
"흥. 걱정 말아라. 알아내는 대로 잘 전해줄 것이고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당광 같은 소인배라 착각하지 마라."
가량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를 의심하여 슬쩍 돌려서 한 말인데, 어떻게 바로 진위를 알고는 도리어 냉소를 치니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형란이 쓰디쓴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는 석대협을 믿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혼자 가신다는 건.."
"너희는 따라와 봐야 방해만 된다. 차라리 기다리며 소식이나 기다리는 게 훨씬 낫다."
"그래도 어떻게.."
형란이 반대하는 이유는 확실히 가량과 달랐다. 진양이 그걸 모를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매우 착하다고 느
끼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난 사실 전진교와 인연이 있다. 이번 기회에 내가 알고 싶은 것도 알아내고 너희도 돕고 하려는 거다. 그러니 쓸데
없는 말은 그만해도 된다."
이제야 사실을 알았다는 듯 그들 모두의 표정이 풀렸다. 그러나 아직도 형란은 걱정하고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는지
미미하게 찌푸려진 눈썹이 제자리를 찾지 않고 있다. 진양은 옆에 울창한 숲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저 숲에서 숨어있어라. 그리고 내일 이 시간 이곳에서 만나자."
"아니 지금 바로 떠나시게요?"
형란이 눈을 놀란 토끼처럼 떴다. 가량과 문인능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놀랍다기보다 어이없는 쪽에 가까웠
다. 지금은 이제 막 날이 밝아지는 아침인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문인능은 이번에도 역시 그의 생각을
짐작했다. 은근히 제 눈치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들어 얼른 말한다.
"아하. 그러니 잠입은 오늘밤에 하고 지금은 종남산을 둘러보겠다는 거군요."
진양은 그녀가 사실 반만 맞춘 거지만 알아맞힌 건 알아맞힌 거라 몰래 호기가 생겼다. 그러나 고작 16세의 소녀를
데리고 무슨 경쟁을 하자니 그것도 우스워 그냥 그만두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몸을 돌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종남산을 미리 봐두려 했다. 잠입을 하자면 지리를 모르고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진교 안은 예전에 들어가 봐서 대충 위치를 알지만 그것 역시 자세히 모르고, 전진교 주변 지리 또한
거의 알지 못했다. 오늘 낮 동안은 그 지리를 조사하리라 생각했다.
허나 꼭 그 이유만도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욱 큰 이유, 진양이 아침부터 종남산을 나다니게 한 데는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왕령이었다. 이 주변 번천을 비롯해 보광사까지 모두 전진교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근방에선 쉽게 전진교 도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왕령은 지금 당주고와 혼인을 했으니 전진교에 속하고, 그녀가 혹
시 이 근방을 지나다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지세를 익힐 겸 혹시나 있을 왕령과의 재회를 기대할
겸, 진양은 아침부터 종남산을 돌아다니기로 결정한 셈이다.
그러나 왕령을 만난다 해도 진양은 아는 척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도 자신이 왕령을 보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유부녀요, 전진교에 속하는 고로 자신의 적이다. 6년 동안 가졌던 애틋
한 정은 그 날 중양궁에서 이미 사라졌고 지금 남은 건 오로지 추억일 뿐이다. 하지만 진양은 그래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아는 척을 하며 서로 얼굴을 맞댈 생각은 아니나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한번만 보고 싶었다. 잘 지내고는 있
는지 큰 문제는 없는지 하는 것들을 알고 싶었다.
진양은 이런저런 오만 잡가지 상상을 다하며 전진교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태양이 햇빛을 비추며 아직 선선
한 공기가 사라지지 않은 아침. 생기를 느끼고 한창 돌아다니는 새들이 보였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고 대
지까지 펄펄 끓듯 달구어진 낮. 꽃과 나무들마저 매우 나른하다는 듯 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해가 저
편 산 너머로 숨으며 곧 어둠이 깔리는 저녁까지. 다시 서늘한 공기가 종남산을 찾고 가끔가다 귀뚜라미가 우는 소
리만 들렸다. 순식간에 하루가 다 지난 것이다.
그는 그동안 지세는 많이 익혔다. 이제 전진교에 잠입할 때 좀 더 수월할 것이다. 덤으로 전진교 근처까지 다가가
들어갈 곳을 찾아보았으니 더욱 수월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역시 왕령은 만나지 못했다. 중간중간 지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 급히 몸을 숨기고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왕령은커녕 당씨 집안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
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행객이었고 어쩌다 전진교 도사 한둘이 지나갔다.
그렇게 되니 진양의 마음은 더욱 애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왕령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흑색으로 칠해진 하늘에 띄엄띄엄 빛나는 별이
보인다. 시간상으론 이제 잠입할 시간이 됐다. 그는 왕령을 만나지 못해 실망감이 들었지만 어쩌면 또 안에서 만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서둘러 전진교 뒷길로 내달렸다.
돌다리와 비탈길을 올라 오르고 또 오르니 금새 전진교 후원에 당도할 수 있었다. 낮은 담장이 있어 넘으면 그만이
지만, 과연 안에는 전진 도사들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진양은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적어도 그는 모
를 것이다. 이곳에서 예전 악만풍이 똑같은 자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말이다. 진양은 한참을 지켜본 후에야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봐도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는다. 날이 새도록 여기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냥 들어갈 수도 없으니 차라리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을 돌려 옆길로 달렸다.
달리던 그가 멈춰선 곳은 어이없게도 큰 건물 바로 뒤편이었다. 담장이 높고 건물이 붙어 있는데 역시 그 건물도
크고 높았다. 그러나 진양의 경공으론 이 정도도 못 넘을 수준이 아니다. 그는 전진교가 담장이 낮고 침입이 쉬운
지대만 순찰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침입이 가장 어려운 곳을 택한 것이었다. 그가 한순간 발을 놀리니
몸이 붕 뜨며 건물 뒤쪽으로 찰싹 붙었다. 작은 기척이 들렸지만 그리 크지는 않아 안심이었다. 그는 그대로 건물
꼭대기까지 기어올랐다. 대단히 높은 건물이라 그런지 전진교가 한눈에 보인다. 저 편에 있는 것이 중양궁이고 그
뒤로는 자신이 넘으려 했던 후원이 보였다. 역시 왔다갔다하는 도사들은 그곳에 많이 집중되어있었다.
그곳을 제외하면 다른 곳들은 띄엄띄엄 한 도사씩 순찰을 하고 있었다. 이야말로 좋은 때다. 진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가까이 지나는 한 도사를 노렸다. 그리고 그가 다른 자들의 시선에서 사라질 무렵, 그는 번쩍 몸을 날려 그
를 덮쳤다. 바로 등뒤로 떨어지며 어깨에 견정혈을 찍자 그 도사는 뭐라 외치지도 못하고 힘없이 무너진다.
진양은 쓰러진 그의 혈도를 몇 개 더 짚어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말문을 열었다.
"죽을 테냐 살 테냐."
그 도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살고 싶다고 말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견정혈을 세게 찍혀 힘이 안 들어가는 듯 입만
뻥긋거렸다. 진양은 알아들었다는 듯 조소기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고 싶다면 내 물음에 답을 해야지. 그렇지?"
"네… 네……."
겨우 한 말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다.
"일전에 전진교를 침입한 자가 있었느냐?"
"네… 네……."
"그 자가 누구냐?"
"모.. 모.. 릅.."
진양은 그가 모른다고 하련다는 걸 알고 또 물었다.
"그 자는 붙잡혔느냐?"
도사가 힘겹게 고개를 흔든다. 그에 진양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도사의 말대로라면 악만풍은 침입했으나 정
체도 드러내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셈이 된다. 이번엔 북망채와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북망채를 아느냐?"
"아.. 압니다.."
"그럼 이 종남산에 자주 온다는 것도 알겠군."
도사의 눈빛이 순간 놀라움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 럴 리가.."
"모른 척 하지 마라. 이건 내가 아는 사실이다."
"정말.. 모.."
진양은 그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않고 뚫어지게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 도사는
정말로 그럴 리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럼 북망채에서 들은 말이 거짓이란 말인가. 그것도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고 아마 이 도사가 모를 것이다. 진양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이 부분에 대해선 파헤칠 수 없음을 알
았다.
"그럼 낙양 이대가장이 무너진 것과 전진교의 관계도 모르겠군."
도사가 다시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진양은 포기하고 이번엔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묻기로 했다. 그동안 애타고
가슴 저미도록 알고 싶었던 사실을 물었다.
"전진교엔 왕령이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당주고와 혼인했느냐?"
도사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러나 잠시 후 억지로 입을 뗀다.
"그녀는… 혼.. 인을 하지 않……."
진양이 눈을 부릅떴다.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 그의 말은 분명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
인 것이라 흥분되고 기쁘면서도 놀라운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진양은 그의 머리통을 깨부술 듯
누르며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왜? 혼인을 했을 게 분명한데 왜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거지?"
"그… 그건……."
그때였다.
"두사제. 두사제 또 어디서 농땡이를 피고 있는가."
"이놈 또 농땡이라니. 사부님께 일러야하나."
바로 건물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진양은 아직 물어볼 게 남아있어 도사를 노려보며 재촉했다. 그러나 그 도사
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자꾸 말을 더듬었다.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잠도 한숨 못 이룰 것 같았
다. 그러나 터벅터벅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옆으로 보이는 그림자 두 개는 자꾸 커져만 갔다. 진양은 오는 자들
을 죽일까 하는 마음을 먹었지만 위치가 좋지 못한데다 두 명이나 돼 분명 다른 도사들이 눈치를 챌 것이라고 여겼
다. 그는 분한 마음을 먹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담장이 높아 잡힌 이 도사를 데리고 떠날 수도 없으니 죽여버
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개 같은 놈. 너 같은 건 이 세상에 남을 필요가 없다."
진양은 내공을 끌어올려 그의 머리통을 세게 쥐어갔다. 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린다. 진양은 다시 왼손 중지로 그
의 뇌해(腦海)혈을 찔렀다. 갑자기 도사가 눈알이 굴러 나올 듯 부릅뜨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몸이 허물어졌다. 진양
은 쓰러지는 그의 머리를 밟고 건물 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끝까지 오르진 못하고 나무 벽에 몸을 찰싹 붙인 후
다시 몸을 날려 담장 밖으로 뛰어넘어 갔다. 나오기가 무섭게 안에선 놀라 부르짖는 소리 두 개가 터지고 있었다.
진양은 전진교에서 울리는 경종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내달렸다. 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빨리 달리는 게 아니다.
만나면 모두 죽일 마음도 있다. 능력이 안 되더라도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태가 아니었다. 왕령은 혼인을 하지 않
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고 다만 전진교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진양의 머리엔 오로지 <
왜?>라는 말만이 떠올랐다. 어째서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런 걸까.
달리다보니 금새 형란 등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도달했다. 진양은 그 자리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분했
다. 사실 그녀가 혼인을 하지 않았다니 기뻐해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니 답답하고 수많은 의혹이 일
었다.
(혹시 그녀가 나를 잊지 못해 혼인을 거절한 것일까? 아니면 당주고의 성격이 나쁘다는 걸 깨닫고 미루는 것인가?
아냐..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진양은 혼란스러워 약간의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그러나 왕령에 대한 생각을 지우지는 않았다. 대체 어떤 일이 있는
것인지 너무 궁금하고 애타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렸다. 순간 깜짝 놀란 비명소리가 들린다.
"아! 석대협!"
형란이었다. 진양도 놀라 그녀를 보고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는 일단 숲에 숨어서 생
각해보기로 하고 그녀를 따라 사라졌다. 잠시 후 도사 몇 명이 지나갔으나 이 나무들 사이는 뒤져보지 않는다.
"석대협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사히 오셨으니 안심이에요."
형란이 숲 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허나 진양은 듣지 못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멍하게 정신나간 눈만이
괴이쩍을 뿐이었다. 그렇듯 진양은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왕령, 왕령이 머리를 가득 메워 떠나질 않았다. 종남산에
이른 이후로 계속 그랬지만 그녀가 혼인까지 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데도 이유는 모르게 됐으니 더욱 왕령만 머
릿속에 자리잡았다. 형란의 말은 모두 한 귀로 들으며 다른 귀로 빠져나가는 실정이다.
"석공자!"
진양은 가량이 어깨를 건드리며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이들이 알고 싶
은 게 있고 부탁한 게 있는데 자신은 계속 왕령 생각으로 이들을 무시했던 걸 깨달았다. 하지만 머리가 다 아파 와
잠시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 사실대로 모든 걸 얘기했다. 한 명을 잡아 캐물었으나 북망채와의 관
계를 모를뿐더러 그들이 종남산에 자주 온다는 것도 모르고 있더라는 걸 다 얘기해주었다. 물론 왕령의 얘긴 입 밖
으로 내지 않았다.
얘기를 모두 들은 그들은 전부 허탈한 듯 했다. 하루를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것도 알지 못하여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고생한 진양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이 못남을 탓해야만 하니 더 답답할 것이다. 형란도 허탈
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진양이 수고했다는 걸 알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석대협 덕분에 그래도 전진교 도사들은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진양은 그녀의 말을 듣고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눈 한번 돌려주지 않고 오로지 땅만 쳐다보며 왕령 생각에
넋이 나갔다.
진양이 다시 제정신을 차린 건 이른 아침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형란 등은 제각기 그 자리에 눕고 나무에 기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어제 일을 기억하며 자신이 왕령 생각으로 밤을 샜다는 걸 깨달았다. 힘없게 늘어진 몸을
강제로 일으키며 숲을 빠져나갔다.
조금 걸어가니 번천이 보였다. 전진 도사들은 성과가 없어 그냥 돌아갔는지 그들이 지나간 흔적만 남아있었다. 진양
은 그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번천을 바라보았다. 저걸 보자니 또 왕령 생각이 떠오른다. 정말 종남산은 보이는 것
모두가 다 왕령을 떠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멍청해지고 또 허탈감만 느낀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생각은 억지로 접는 게 좋다.
억지로 접는다고 접혀질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악만풍이 떠올랐다. 이곳은 사실 악만풍과 처음 만났던 장소
가 아닌가. 진양은 그에 대해 생각하며 왕령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악만풍은 대체 어디 있을까. 침입했다가 무사
히 빠져나갔다니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낙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망은 매우
적었다.
"악만풍. 악만풍. 넌 또 어디 있느냐?"
진양은 이상하리 만큼 탄식이 치고 올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라도 떠들지 않으면 또 한숨을 내쉬며 늘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악만풍이 종남산 어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종남산이 몇
걸음에 다 돌아다닐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괜히 찾으려다 길만 엇갈릴 수도 있다. 지금은 낮이니 찾으려면 이때가
좋았다.
"어? 석대협 벌써 일어나셨네요."
돌아보니 형란이다. 그녀는 막 잠에서 깨서 그런지 눈을 비비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자다 일어난 모습을 남
에게 보여주기 꺼려하는데 형란은 그렇지 않아 재밌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농담 한마디라도 했겠지만 기분이 별
로라 그만두는 진양이었다.
"너희는 악만풍이란 사람을 알고 있겠지?"
형란은 악만풍이란 이름을 듣자 번쩍 정신이 드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석대협이 그 분을 어떻게 알죠?"
"그냥 아는 친구다. 여기에 있다는 얘길 너희들이 하기에 한번 알아봤더니 아직 이 종남산에 있는 것 같다."
진양은 화주대도인 척 해야하기 때문에 다 알면서도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형란은
그저 놀랍기만 한 듯 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석대협과 악대협이 아는 친구라니 정말 몰랐어요."
"지금 그를 찾으러 갈 테니 모두 깨워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숲 안으로 들어갔다. 뭐라고 잠꼬대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가량과 문인능
도 졸린 눈으로 숲을 나왔다. 진양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종남산은 숲이 많고 조금 더워서 이런 여름날 돌아다니기는 매우 힘들었다. 잠입하기 전 진양은 이미 힘들게 돌아
다녔기에 그런 걸 잘 알고 있었다. 또 이미 적응도 되어 가지고 있던 물을 아껴두는 편이었다. 그러나 형란 등은 모
두 덥고 힘든지 가지고 있던 물을 금방금방 마셔댔다. 급기야 채 두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물통이 바닥났다.
그들은 진양의 물이 아직 남아있다는 걸 알고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진양이 이를 모를 인물이 아니었지만 애써 모
른 척 했다. 물이 아깝기도 하고 또 물을 안 줘서 혼이 나봐야 다음에 혹 이런 일이 있을 때 지금 같은 일을 당하
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형란은 진양도 목이 마르면서 참는 거라 생각하여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문인능은 달
랐다. 그녀는 목이 말라 당장이라도 쓰러질 기분이었다. 그가 가진 물통이 흔들거리며 찰랑, 하는 소리를 낼 땐 정
말 한순간에 뺏고 싶을 만큼 목이 탔다. 그러나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니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함부로 입을 열
지는 않았다. 가량도 목이 탔지만 역시 달라는 말을 하진 않고 은근히 눈치만 줄뿐이었다.
진양은 버젓이 그들 보라는 듯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마치 무슨 빙수(氷水)라도 먹은 듯 몸까지 부르르 떤다.
문인능은 그 꼴을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달라고 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해 가량에게 말했다.
"가아저씨. 우리 객잔이라도 찾아봐요. 목 마르고 배고파서 도저히 못 참겠어요."
"허나 악대협은 어쩌고.."
둘 다 목소리가 축 늘어져있다. 진양은 낄낄 웃으며 다시 물을 들이켰다. 그 모습에 문인능은 그가 자신들을 놀리려
한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보니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
"비웃지 말아요! 당신 혼자서 악대협을 좀 찾아보세요. 물도 많겠다 시원하겠다 뭐 문제는 없을 거 같군요."
"내가 그를 뭐 하러 혼자 찾아다녀? 너희는 쉬는데 나 혼자 찾는다면 그야말로 미친 짓이지."
"흥. 친구라면서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과연 화주대도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요."
문인능이 그를 살살 비꼰다. 진양은 그녀의 화술도 제법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신을 따를 순 없다고 가늠했다.
"너와 저 아이는 그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라던데 목이 탄다는 이유 하나로 찾다말고 쉬러 간다니. 참으로 암캐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진양은 그녀와 형란을 가리키며 역시 빈정거렸다. 예전에 악만풍에게 그녀들을 도운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
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인능은 그런 사실까지 알 줄 몰랐다는 듯 얼굴색이 변했으나 그래도 목은 매우 마른 모양이
다.
"내가 언제 쉬기만 한다고 했어요? 가서 조금만 쉬다가 다시 찾으러 갈 거예요."
"그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참 헛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뭐라고요?"
분위기가 또 험악해졌다. 문인능이 눈을 부라리자 형란이 나서며 말린다.
"둘 다 그만해요. 능아. 정 힘들면 객잔에서 쉬다 와. 난 석대협과 함께 악대협을 찾아볼게."
진양은 그렇게 말하는 형란도 매우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땀방울이 얼굴을 타 줄줄 흐르고 얼굴빛도 창백한데 모
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만이라도 저리 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진양은 그녀에게 됐다고 말하고
그만 혼자 떠나려고 했다. 그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안 데리고 다니는 게 차라리 편했
다.
그렇게 막 말하려던 진양이 입을 벌리다가 꼬옥 다물었다. 순간 머리를 스쳐 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객잔이라면 종남 객잔 뿐이라 갑자기 악만풍이 떠오른 것이다. 그가 지었던 종남 객잔이라는
시가 생각나자 어쩌면 악만풍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진양이 낮게 웃으며 말한다.
"좋아. 그럼 다같이 객잔에서 쉬도록 하지. 재수가 좋아 악만풍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곳에 그 분이 왜 있어요? 괜히 자기도 쉬고 싶으니까."
문인능이 또 걸고넘어진다. 진양은 눈에 조롱하는 빛을 띄우며 말했다.
"하긴 네 따위가 나와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순 없겠지. 허허실실(虛虛實實)을 네가 어떻게 알겠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들고있던 물병을 형란에게 넘겨주며 마시라고 했다. 형란이 놀라 엉겁결에 받자 진양은 눈웃
음 지며 홀로 걸음을 옮겼다. 문인능은 물통을 형란이 얻게 되자 침이 다 흘렀으나 진양이 준 물이라 먹고 싶지가
않았다. 방금도 허실의 계책을 모른다며 비웃었다. 그녀는 물통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지 빨리 걸음을 옮겼고 형란
이 가량에게 물 마시라며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