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八 章. 애절한 정 2
종남 객잔 역시 한번 갔던 길이라 찾아가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보광사 위쪽이라 위치를 알기엔 더
욱 편했다. 진양은 홀로 앞장서서 걸었고 뒤로는 어느새 따라붙은 형란 등이 나란히 서서 쫓아오고 있었다. 진양은
가면서 혹 악만풍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하찮은 이유에서지만 어쨌든 화주대도로 변장
을 한 상태고 이 상태로 그냥 악만풍을 만난다면 그가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럼 자연 형란 등의 의문을 살 것이
뻔하다. 진양은 이들보다 앞서 악만풍을 만나 사정을 얘기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남 객잔에 이르자 과연 점소이가 급하게도 달려나왔다.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안내하자 주인장도 따라
인사를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진양 등이 간만에 온 손님인 듯 했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듯
중앙에 자리를 잡게 해주며 점소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방은 잡으실 건가요?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이 말은 진양에게 한 말이었다. 그의 행색은 사실 남루하고 얼굴은 면사로 가려 보이는 건 고작 눈뿐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당당히 들어왔기 때문에 왠지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여긴 것이다. 점소이의 말에 진양은 형란
을 가리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소이는 곧 형란을 바라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진양은 그대로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주인장 역시 웃는 낯으로 말한다.
"뭐 불편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 물어볼 게 있다."
주인장은 아직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한 다 답해드리죠."
"좋아. 악만풍이 여기 있지?"
순간 주인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얼굴색이 변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표정관리를 할 수조차 없
었을 것이다. 진양은 그의 낯빛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알았다.
"그.. 그럴 리가.. 전 그 분이 누군지 모르겠군요."
"네가 아는 한 대답한다고 해놓고선 왜 거짓말을 하느냐?"
"저, 저는 정말로 모릅니다."
주인장은 끝까지 부정했다. 그러자 진양은 형란 등이 모르게 면사를 살짝 들췄다.
"내가 누군지 알면 어서 악만풍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라."
진양은 자신의 본 얼굴을 보여줬다. 그러나 주인장은 아직 그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실
상 진양의 얼굴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사공환처럼 절정의 미남도 아니요, 악만풍처럼 험악한 인상도 아니요, 그렇
다고 당주고처럼 대단히 훤칠한 얼굴도 아니었다. 못생긴 것도 아니고 평범한 것도 아니고 잘생긴 것도 아닌 참 애
매모호한 얼굴인 셈이다. 그것도 어찌 보면 기억에 남을지 몰라도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그냥 평범한 얼굴이라 주
인장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양은 주인장이 기억해내지 못할 거라는 걸 느꼈다.
"좋아. 그럼 이 시는 아느냐? 저 앞산에 느껴지는 기운은 대체 웬 호기더냐. 비호 보내 알아봐야겠다 하니 되려 비
호가 도망친다."
"아! 그 시는.."
진양은 악만풍이 지었던 종남 객잔을 읊었다. 그러자 주인장도 그를 알아봤는지 안색이 변해버렸다. 진양은 다시 입
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겠지. 지금은 내 사정이 있어 이렇게 얼굴을 숨기지만 악만풍은 만나서 할말이 있다.
어서 안내해."
그의 말을 듣고도 주인장은 영 믿음이 안 가는 듯 자꾸 주춤거렸다. 그러는 사이 벌써 주문을 마친 듯 형란이 부른
다.
"석대협. 만두하고 죽엽청 좀 시켰으니 와서 드세요."
진양은 흘낏 돌아보고는 다시 주인장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악만풍과 만나게 된다. 다만 내가 미리 그에게 할말이 있는 거니 어서 안내해."
"저, 정말이죠?"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주인장은 조금 안심이 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진양을 안내하여 어느 방으로
향했다. 형란 등이 이상하게 보자 진양은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손짓한다.
주인장은 방문을 처음에 한 번, 다음에 두 번, 또 그 다음엔 세 번씩 띄엄띄엄 두드렸다. 이건 신호와 같은 거라 진
양은 새삼 그들의 치밀함에 감탄이 터졌다. 이런 걸 주인장이 알 리는 없고 분명 악만풍이 미리 시킨 것이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리자 곧 문이 열렸다. 바로 보이는 건 악만풍이다.
"아니. 이 자는 누군가?"
악만풍은 조금 놀란 듯 했다. 주인장은 일단 진양을 끌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다시 닫고는 말했다.
"이 분은 예전에 함께 오셨던 바로 그 분입니다. 맞지요?"
진양이 그 말에 상응하듯 방립을 벗어 던졌다. 순간 악만풍이 앗, 하고 소리를 내지른다.
"진양! 진양이잖아!"
"그래 나다 악만풍. 하하!"
진양은 악만풍의 놀란 모습이 재밌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장도 이제 확인을 해서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진양은 악만풍과 잠시 대화했다. 악만풍이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왜 방립을 썼느냐는 것이었다. 그 훤칠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 억울하지 않느냐며 농담처럼 말한다.
"하하. 쓸데없는 말은 그만둬. 사실 일이 있어서 쓰게 된 거다."
"일은 무슨 일?"
"뭐 얘기하자면 길지. 하나 하나 말해줄 테니 천천히 들어."
진양은 먼저 이대가장이 북망채 손에 무너진 이야기와 자신이 방립을 쓰게 된 이야기를 했다. 덧붙여 북망채에서
가량을 구해내고 화산을 지나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도 하게됐다. 오게 된 이유까지 말함으로써 모두 설명한 셈이다.
간략하게 줄여서 말한 거지만 진양의 화술이 뛰어나고 악만풍도 이해력이 좋아 금방 알아들었다.
"그럴 수가.. 내가 없는 사이 그런 일이."
"일단 밖에 나가보자. 나머지 얘긴 나가서 하도록 하지. 그리고 나를 절대 진양이라 부르지 마. 난 네 친구인 화주
대도 석앙이다."
진양이 농담조로 말한다. 악만풍도 좀 전 얘기를 들어 상황을 알기 때문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곧 문 밖으로 나오자 객잔 대청에선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진양의 거동이 수상해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
는데 설마 악만풍을 만나게 될 줄이야, 형란 등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편 악만풍은 그들까지 보니 너무
기뻤다. 진양을 만난 것도 기쁜데 형란 등이 무사한 걸 보자 더욱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모두 무사하구나!"
"악대협!"
순식간에 객잔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주인장과 점소이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한다. 악만풍은 일단
진양과 함께 자리를 잡으며 점소이를 불렀다. 그리고는 동전을 꺼내 넘겨주며,
"오늘은 장사를 그만하지 그러냐. 죽엽청이나 네댓 병 가져오너라!"
점소이가 깜짝 놀라 주인장을 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객잔 문을 잠근다. 이미 악만풍에게 많은 돈을
받아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얼마나 돈을 버는 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만풍은 죽엽청이 나오자 한 사발로 따라 진양, 가량과 함께 건배를 했다. 그는 너무 기쁘고 좋은 것이다. 이대가
장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우울해졌지만 이들은 살아있고 또 모두를 만났으니 기쁠 법도 했다. 그들은 많은 이야
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객잔 문도 닫히고 손님이라곤 그들뿐이니 못할 말도 없었다. 주인장과 점소이가 있어 조금
꺼려졌지만 악만풍이 전혀 신경을 안 쓰자 진양 등도 말하기를 서슴대지 않았다.
한참 웃으며 대화하던 그들은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악만풍은 마치 그에 맞추듯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가 진
양을 보며 말한다.
"혹 그 날 종남 객잔에서 봤던 전진 칠자 중 한 명이 누군 줄 아나?"
진양은 이미 알고 있지만 짐짓 모른 체를 하며 도리질 쳤다.
"그는 사실 옥양자 왕처일이야. 그와 함께 있던 사람은 그의 제자고."
"그래? 본래 옥양자였군."
악만풍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느낀 문인능이 묻는다.
"악대협. 그 분께 무슨 일이 있나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그 분은.."
악만풍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은 돌아가셨다."
"아니.. 그럴 수가!"
그의 말에 다들 놀라 비명을 질렀다. 옥양자 왕처일이 죽다니 놀라운 얘기였다. 사람이라면 모두 죽는 건 당연하지
만 왕처일이 벌써 죽을 나이가 된 것도 아니고, 병이 들었다는 얘기도 들은 바가 없었다. 무공도 대단하고 내공도
심후하니 그냥 죽을 인물도 아니지 않는가. 진양도 그가 죽었다는 데는 큰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니. 무슨 일이 있었나?"
진양의 물음에 악만풍은 침울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랬다.
악만풍은 그 날 별로 정보를 얻지 못하여 매우 기괴하게 생각했다. 잠입해서 전진 도사를 잡아 캐물었는데도 그는
왕처일이 나타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악만풍은 이에 뭔가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깊숙이 전진교에 관여하
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숨어들어 가 정보를 캐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좀
다른 인물을 붙잡은 것이다. 도사들과는 다르게 무공이 제법이었고 위기의 순간에 이르자 전진교 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썼다. 묵직한 장법인데 심상치가 않았다. 악만풍은 의문을 가지며 그를 괴롭힌 결과, 사실 왕처일이 오래 전
에 왔었지만 당광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른 평범한 도사들은 이를 모르도록 숨겼다는 걸 캐낼 수 있었다.
악만풍은 그 얘기를 듣고 믿지 않았다. 전진 칠자의 무공은 뛰어나 당광이 구처기의 제자라고 해도 그에게 죽임을
당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었고 왕처일은 죽어 계곡에 버려졌다고 했다. 악만풍은 분노했다.
그를 죽이려다 애걸하기에 목숨은 살려주고 돌려보낸 후, 당광을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 와중 진양 등이 찾은
것이었다.
"전진교 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썼다고?"
"그래. 위험해지니까 갑자기 강렬한 장법을 썼다."
진양은 당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자의 나이가 얼마쯤 되어 보였나?"
"우리와 비슷해 보였어."
"그럼 당주고겠군."
진양은 사실 당씨 가문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저 당광의 자식으로 당무, 당주고, 당유민이 있다는 것만 알뿐이다.
그러나 정황을 바라봐 볼 때 그 사로잡힌 자란 분명 당주고일 게 분명했다. 당무는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고 당유민
은 여자이지 않는가.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양은 문득 왕령의 생각이 떠올랐다. 당주고 얘기가 나오니 그녀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는다.
"혹시 왕령이란 여인을 본 적이 있나?"
악만풍 등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만풍은 그녀가 누군지 몰라 그런 거지만, 문인능이나 가량은 과연 화주대
도 석앙이라며 속으로 비웃었다. 진양은 악만풍이 대답하지 못하자 조급한 마음이 들어 다시 물었다.
"본 적이 없나?"
"글세. 왕령이란 이름의 여인은 나도 본 적이 없어. 그러나 어떤 절색의 여인은 본 적이 있지. 정말 대단한 미녀였
어."
진양의 눈에 금방 환한 기색이 엿보였다. 악만풍은 그가 왕령이란 여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또
묻는다.
"어디서 그녀를 보았어? 옆엔 누가 있었지?"
"그녀를 본 건 예전에 너와 내가 만났던 그 장소였지. 그리고 그녀 곁에는.."
악만풍은 대답하려다 진양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진양이 소리친다.
"그녀 곁에는!"
"왜 그리 성급하게 굴어? 그녀 곁에는.. 네가 말한 그 당주고란 남자가 서있었다."
순간 진양의 눈에 허탈한 빛이 지나갔다. 그리고 곧 분노, 슬픔, 한스러운 온갖 눈빛이 차례로 지나가더니 결국 멍
한 눈빛으로 변한다. 악만풍은 면사 때문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지금 그가 매우 실망했다는 건 알 수가 있
었다. 혹 그가 좋아하는 여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양은 그렇게 실망했다. 너무나 허무했다. 아직도 혼인을 안 했다 하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나 싶었는데, 당주
고와 왕령은 혼인만 안 했을 뿐 매우 친한 것 같았다. 눈으로 보진 못했어도 악만풍이 한 말이니 거짓이 아닐 것이
다. 이건 확실한 것이다. 거짓이 아니다.
그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계단을 올랐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간다 어쩐다 하는 말 한마디 없이 홀로 올라갔다. 주인장
이 다가가며 방을 안내하려 하지만 그는 주인장에게 신경도 안 쓰며 그냥 악만풍의 방으로 들어섰다. 주인장이 놀
라 악만풍을 쳐다보자 그는 그냥 내버려두라는 눈짓을 보냈다. 형란이 결국 걱정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벌떡
일어선다.
"어딜 가려고?"
"석대협이 이상해요. 종남산에 오른 후부터 계속 이상했는데 지금은 더 이상한 거 같아요. 아무래도 가서 물어봐야
겠어요."
악만풍은 그녀의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지만 상황은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앉아라. 네가 간다고 해서 소용없을 거다. 혼자 있게 해주자."
"하지만.."
악만풍은 더 듣지 않고 혼자 술을 따라 마셨다. 진양이 이상하자 그도 역시 기분이 울적해진 것이다. 가량이 함께
술잔을 맞춰주었으나 진양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주량이라면 가량이 나을지 몰라도 악만풍의 친구는 진양이지 가량
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 진양이 대청으로 나왔다. 어제처럼 눈빛은 여전히 멍청했고 온몸에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악만풍은 이미 대
청에 나와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혼자 생각할 수 있도록 일부로 다른 방을 잡았던 것이다. 그가
나올 무렵, 막 형란과 문인능도 나왔다. 가량은 지금 뒷간에 갔다.
진양은 악만풍 앞에 앉으며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활짝 열려진 정문을 보며 시원한 바람만 맞고 있었다.
답답하여 방립도 벗고 싶지만 형란 등이 있어 그건 안 된다. 그는 한숨을 크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만풍. 어젠 내가 정신이 없어 그런 거니 이해해라."
악만풍이 웃는다.
"바보 같은 놈. 그럼 내가 이해도 못할 거 같아?"
그의 말은 은근히 웃음에 찬 말투였다. 어제 일을 기억하거나 언급하기 싫은 모양이다. 진양은 그가 참 좋은 친구라
고 생각했다. 점소이를 불러 죽엽청 두 병을 시키고는 악만풍과 자신의 술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술이 빙글빙글 고이며 술잔이 부딪치자 심하게 떨었다. 그리고 금방 진양의 입 속으로 넘어갔다. 한 방울도 남김없
이 깨끗이 사라진다. 진양은 술이 마시고 싶어서 다시 제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또 들이켰다. 예전에는 몰랐던 어떤
술맛이 느껴진다.
진양은 어제 푹 쉬지 못했다. 밤늦게까지 왕령의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왕령과 당주고가 함께
번천을 구경하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억지로 그 생각을 지우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에 각인되는 건 막
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늦게나마 잠은 청할 수 있었다. 하룻밤을 이미 지샌 격이라 피곤하기도 했고, 또
왕령과 당주고가 그렇게 지난다니 의혹이 일었을 때보단 후련해서 쉽게 잠을 잤다.
마침 술을 마실 때 가량도 돌아왔고 형란과 문인능도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 다섯 명이 어제처럼 빙 둘러앉았다. 진
양은 그들을 본 체 만 체 하며 혼자 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문득 악만풍이 그를 막으며 말한다.
"오늘 할 일이 있어. 술은 그 정도로 해둬야 해."
"무슨 일?"
진양이 약간 벌게진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악만풍은 천천히 얘기를 들어보라며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옥양자의 복수를 하러 갈 거야. 들어보니 북망채와 전진교도 관계가 있을 것 같고.. 그러니 오늘 밤 전진
교에 잠입해서 당광에게 복수하고 북망채와 전진교의 관계도 캐오려고 한다. 바로 어둠 속의 대협이지."
악만풍이 오늘 할 일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문인능이 넌지시 말한다.
"그럼 누가 가죠? 악대협은 가실 테지만 혼자선 무리일텐데요."
그 말은 곧 진양의 의사를 묻는 셈이다. 악만풍도 이를 알고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탁상만 바라보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악만풍과 함께 가주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양은 내키지가 않았다. 왕령도 당주고와
함께 있을 테니 더 전진교에 관련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종남산에 아예 있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가장이 뭐고 북
망채가 뭐며 전진교가 뭐냐고 생각했다.
"난 가지 않는다."
"아니 왜?"
진양의 말에 악만풍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왕처일과 무슨 은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광과 은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대가장의 사람도 아니고 내
가 이대가장에 은혜를 입은 것도 아니지. 나는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문인능이 코웃음친다.
"그러면 그렇지. 화주대도가 무슨 협을 하겠어?"
"능아!"
악만풍의 호통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그가 이렇게 크게 호통친 적이 없었다. 형란이나 가량도 제법 놀란 듯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는 조용히 진양을 바라보았다. 오래 바라봐서 충분히 시선을 느꼈을 텐데 진양은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술만 따르고 마시고 따르고 마시고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에 악만풍은 그가 아직 상념에서 깨지 못했
음을 알았다. 본래 진양이 협을 많이 행하거나 하는 인물은 아니어도, 자신과 연관이 있다면 끼어 들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진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나 혼자 가야겠군. 이 친구가 아니면 함께 잠입할 만한 사람이 없어."
"나도 가겠소 악대협!"
악만풍의 말에 가량이 소리쳤다. 실상 악만풍의 말은 조금 무례한 말이었지만 형란 등은 모두 그의 성격이 솔직하
다는 걸 알아 굳이 따지지 않았다. 단지 그를 혼자 보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악만풍이 고개를 뒤흔든다.
"솔직히 가선배님의 실력은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냥 저 혼자 가겠습니다."
"허나 혼자서 당광을 죽일 수 있겠어요?"
이번엔 문인능이 물었다.
"그를 혼자 죽이기는 힘들 거야. 옥양자 선배님도 당했으니 나야 말할 것도 없지. 차라리 그를 죽이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전진교와 북망채의 자세한 관계부터 알아봐야겠다."
"그럼 당광은 언제 죽이죠?"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악만풍은 소탈하게 대답했다. 진양에게 괜히 미안한 감정을 만들게 하긴 싫었다.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진양
의 술을 빼앗아 자신도 한 잔 들이켰다. 진양도 그의 마음을 알고 낮게 웃었다.
그들의 술판은 낮이 돼서야 끝이 났다. 모두 각자의 방으로 사라지고 진양도 제 방으로 돌아와 창 밖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오늘은 날이 맑지 못했다. 우중충해서 마치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 그러면서도 비는 안 오는 아주 애매한
하늘이었다. 하늘 색깔도 이상하고 자세히 바라보면 구무럭거리는 듯 자꾸 기분이 울적해졌다.
이런 날에도 저 나무들은 변함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흐린 날이나 맑은 날이나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변함이 없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질 것이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뼈만 남을 것이며 또 봄이면
다시 잎이 피고 여름이 되면 열매도 주렁주렁 맺을 것이 분명하지만, 저 자리는 꿋꿋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부러지지 않고 눈이 온다고 자리를 피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를 때까지 옆에
있는 많은 나무들과 함께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여름이긴 해도 다간 여름이요 날씨도 이러니 은근히 추웠다. 일순 바람이 불며 그의 방립에 걸쳐진 면사를 흩날리
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바람은 그의 얼굴을 말려주고 있었다. 진양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계속 술만 퍼마
시고 비틀거리는 몸과 마음, 눈으로 자연 경관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하게 있
을 것인가. 그는 더 멍청하게 있을 수도 없고 바보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즉시 악만풍의 방으로 사
라졌다.
"아니 갑자기 웬일이야? 쉬지 않고."
"할말이 있어서 왔다."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악만풍이 방문을 열며 웃는 낯으로 맞았다. 악만풍이 묻자 진양은 단도직입으로 눈을 빛내
며 말했다.
"오늘밤에 전진교에 잠입하는 일. 나도 가겠다."
악만풍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가 이런 말을 하니 좀 이상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며 그가 뜻을
굳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그러는 동안 뭔가 생각한 게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좋아! 네가 같이 간다면 당광이고 전진교고 겁낼 게 없지!"
악만풍은 물어보고 싶은 게 태산 같이 많았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기쁜 기색만 감추지 못하는 듯 짐짓 큰소리
만 쳐댔다. 그는 많은 걸 짐작하고 진양의 마음을 생각해주는 셈이다. 진양이 한 결심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전진교
에 함께 잠입하는 것. 왕령의 생각으로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을 잡고 생각해보니 다르게 느
껴졌다. 그녀가 혼인을 하지 않았다 해도 결국은 당주고와 친구요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녀에 대한 것은 이제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것에 휘둘려 평생 이러고 지낼 순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몇 안 되는 벗 중 하나인
악만풍이 원하는 것이 아닌가. 진양은 밤에 대청으로 나오라는 약속을 들으며 그의 방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