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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九 章. 패퇴 2 (42/90)

                                        第 十 九 章. 패퇴 2

순양검요는 최고 초식인 만큼 과연 위력이 대단했다. 당주고가 전진수검법을 대성한 건 아니었으나 워낙 검법 자체

가 뛰어난데다 강력한 초식이다 보니 진양이 일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진양의 이마로 검이 날아들었고 

피했지만 이어서 연달아 날아드는 검에 진양은 당황하고 있었다. 접근을 할 수가 없는 셈이다. 발을 열심히 놀려 일

단 몇 수 피하고 접근했어도 역시 주먹을 내밀 수는 없었다. 조금 접근했다 싶으면 검진에 말려 몸을 뺄 수밖에 없

는 것이다. 

진양은 유루봉법은 고사하고 함종절검법만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아귀에 봉도 검도 없으니 권

법뿐이다. 남은 거라면 탄지신통인데 내력도 소모가 심하고 또한 당씨 가문 사람들이  알아볼 게 뻔해서 사용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진양은 쓰기로 했다. 탄지신통이건 유루봉법이건  당주고를 죽일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서 목숨을 잃을 텐데 그를 죽이지 못하고 간다면 구천에서도 눈을 감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몸을 살짝 뒤로 내뺐다. 공격을 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물러난다는 듯 자세가 그러했다. 당주고는 그에 완벽히 

속고 말았다. 이제 쫓아가 그를 몰아세우고 목을 쳐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진수검의 여러 초식을 멋지게 

선보이며 한 발 한 발 접근했다. 그러며 진양이 한 네댓 발짝 물러섰을  때였다. 이쯤이면 충분하다. 당주고가 안이

한 생각을 가질 때 한순간 죽여야 한다. 그는 갑자기 역습하듯 왼 주먹을 당주고의 안면으로 내질렀다. 막 검이 찔

러 들어가던 상황이라 그는 어깨를 살짝 베였지만 주먹은 멈추지 않고 돌진했다. 당주고가 놀라 몸을 뒤로 빼낸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 죽어봐라!" 

진양은 단숨에 중지를 퉁겼다. 그의 손목을 노리며 탄지신통을  전개한 것이다. 당주고가 그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곡지혈이 명중 당했을 때였다. 팔이 통째로 저려오고 힘이 빠져 검을 힘없이 놓고 말았다. 진양은 달려들며 검을 쥐

고는 그의 목을 향해 횡으로 그어버렸다. 

"안 돼!" 

어디서 들려온 비명일까. 진양은 검을 휘두르며 그것이 환청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왕령의  목소리였

기 때문이다. 한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6년을 함께 보낸 사람인데 잊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혹시 진짜 그녀가 이 주변에 있는 건 아닐까. 환청치고는 너무 생생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지금은 전진교 

안이요 왕령은 전진교 안에서 지내고 있다. 진양은 검은 여전히 휘두르면서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비명이 들린 방향

을 쳐다보았다. 

순간 면사와 방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이 멍해져버렸다. 좀 전 비명은 환청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진짜 그녀의 목

소리였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저 건물 2층에 사색이 된 표정으로 울 것 같이 서있는 미인은 누구란 말인가. 진양은 

여느 때처럼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맑고 슬픔이 서려있다. 헌데 지금은 좀 다

르다. 뭘 보고 놀랐는지 눈엔 놀랍고도 슬프고 안타깝고도 애절한  빛이 보였다. 진양은 그 눈빛을 보며 가슴이 콱 

막히는 걸 느꼈다. 뭔가 울컥하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달려가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외치고도 싶다. 

점점 힘이 빠졌다. 

"이 쳐죽일 놈!" 

그런데 웬 자가 이런 상념을 깨버리게 하는가. 진양은 갑자기 뭔가 자신의 가슴을 친다고 느꼈다. 감촉이나 느낌으

로 보아 아무래도 손바닥 같은데 정면에는 당주고가 시뻘게진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가슴이 매우 아프다. 고통이 

안으로 스미는 것 같더니 내장까지 건드리는 것 같아 매우 아팠다. 몸이 붕 뜨며 지면에서 발이 떨어진다. 날고 있

는 것이다. 왜 날아갈까. 

"지.. 진양!" 

진양은 악만풍 옆으로 떨어졌다. 방금 음성은 악만풍이 놀라 부르짖은 소리였다. 어찌나 놀랬는지 이름을 부르지 말

라는 진양의 말도 잊어버렸다. 동시에 그가 썼던 방립은 저편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떨어지며 낙법을 하지 못해 방

립이 퉁겨 나간 것이었다. 진양은 물론 알지 못했고 악만풍 역시 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진양! 괜찮나? 이봐!" 

"뭐… 뭐야… 이건……."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공이 풀린 채로 자꾸 헛소리만 해댔다. 

"만풍.. 령아는 어디 있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이놈아!" 

"령아… 령아……." 

악만풍은 보았다. 진양이 탄지신통으로 당주고의 검을 빼앗고 그의 목을 베려던 것을. 또한 검을 휘두르며 누군가를 

보고 힘이 빠졌다는 것도 보았다. 마지막엔 느려진 검을 당주고가 피하고 위력적인 장법으로 진양의 가슴을 격타하

는 것도 전부 보았다. 악만풍은 필시 진양이 뭔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령아라니. 일전에 그가 물었던 왕령이란 여

인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진양이 바라보았던 곳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절정의 미

녀가 서있었다. 

"옳아! 네놈은 사실 진양 그 놈이었구나." 

악만풍이 놀라 보니 당주고가 놀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느새 뛰어온 당무와  당유민도 굉장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당무가 실소하며 말한다. 

"어쩐지 자꾸 당가가 어쩌고 욕을 하더라 싶더니." 

"어찌 되었건 이자는 비열한 수단으로 날 죽이려 하고 아버지도 암살하려 했으니 죽어 마땅해!" 

당주고가 떠든다. 악만풍은 쓰러져 헛소리만 지껄이는 진양을 껴안고 창을 앞으로 들었다. 접근하면 싸우겠다는  뜻

이었다. 그러자 당무가 웃는다. 

"언뜻 보니 진가 놈은 미친 거 같은데. 너도 저리 되고 싶지 않으면 목을 내놔라." 

"더러운 놈들! 오늘 내 죽는 한이 있어도 진양 만큼은 살려서 내보낼 테다." 

"능력이 되느냐?" 

당무가 빈정거렸다. 악만풍이 분노에 몸을 떤다. 

"전진교 안 한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다니 과연 전진 칠자가 없고 당씨 가문에 들어서서 모든 게 변하는구나!" 

"흥. 그런 말로 이간질시키지 마라. 너 같은 놈은 빨리 죽어야해." 

당무가 스릉, 소리를 내며 검을 뽑는다. 악만풍은  이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계속 정신이  나가있는 진양을 눕히고 

그 앞에 창을 들며 당당히 섰다. 반대편엔 당무가 나서더니 당주고도 함께 나섰다.  당유민만 그냥 물러선다. 그 모

습에 악만풍은 이를 꽉 물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살아나가기가 틀린 듯 싶구나. 이미 당광을 상대하느라 힘이  빠져 저들을 이길 수 없을 테니 반

드시 질 것이다. 죽기 전에 진양만이라도 구해주고 싶건만 도대체 방도가 없다.) 

그는 곧 누운 진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양.. 미안하다. 난 널 구하고 싶지만 구할 수가 없구나. 대신 저들 중 한 명이라도 끌고 가겠다." 

악만풍은 말을 마치며 창을 꼬나 쥐고 당무와 당주고에게로 덤벼들었다. 그들도 가만있지 않고 달려든다. 

한편 형란 등은 이미 사경이 훨씬 넘었음을 알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진양과 악만풍은 돌아오지 않으니 분

명 일이 생긴 거라 생각했다. 가량이 말한다. 

"악대협과 석공자가 오지 않으니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내가 가볼 테니 너희는 먼저 도망치거라." 

"도망치다니요? 어떻게 저희끼리만 갈 수 있겠어요?" 

형란이 즉각 반대한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의지가 엿보여 절대로 먼저 갈 것 같지가 않았다. 문인능은 조금 주저하

는 듯 싶어 가량이 말했다. 

"떠나도 된다. 악대협도 너희가 여기 남는 걸 원치 않았다." 

"란이와 나는 지금껏 계속 함께 해왔는데 어떻게 떠나요? 더구나 악대협께 은혜도 있으니 그냥 갈 수 없어요." 

가량은 그녀의 말에 약간의 모순을 느꼈지만 따지지 않았다. 아마 떠나고 싶어도  혼자 떠나긴 미안하여 이러는 거

라 생각했다. 그들은 곧 전진교로 가보기로 했다. 

전진교에 근접하니 과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쇳덩이 소리가 난무하고 여러 기합소리가 리듬을 맞춰주고 있

었다. 정문에서 들리는 소리라 가량 등은 즉시 그리로 향했다. 그리곤 악만풍이 두 도사에 둘러싸여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로 쓰러진 웬 남자도 보았다. 방립은  쓰지 않았지만 분명 화주대도 석앙이 입었던 그 남루한 

옷차림이다. 

가량과 형란, 문인능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립을 쓰지  않은 석앙의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진양이지 않는

가. 그들은 잠시 황당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제각기 멍해져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깨달아지는 게 있어 정신을 되찾

았다.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사실 석앙은 진양이 변장한 사람이었던 거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됐으니 주저할 순 없다. 악만풍도 위기에 처해있고 진양은 눈은 뜨고 있는데 꼭 미친 사람처럼 뭐라고 중얼

중얼 해댔다. 가량 등은 지체할 틈이 없음을 알고 일순 함성을 지르며 정문에 있는 전진 도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

다. 

"오냐 이놈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가량은 근래 몸이 회복되어 다시 연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설연검법(蛇舌軟劍法)이라 하여 오래 전 우연히 얻게 

된 무공이었다. 대단한 무공은 아니어도 제법 공격로가 불규칙하고 괴상하여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검법이었다. 

형란과 문인능도 각자 자기 가문의 검법을  펼쳤다. 형란은 8식으로 이루어진 쾌묘검법을  펼쳤고 문인능은 가전의 

비기인 문인양검(聞人陽劍)을 선보였다. 둘 다 대단한 검법으로 각각 쾌(快)와 착(着)을 주로 하여 명성을 떨친 낙양 

이대가장의 절학이다. 그러니 평범한 전진 도사들이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면이 있었다. 실상 가량이 없다면 정 

반대가 되지만 가량의 사설연검은 매우 어지러워 그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하물며 기습임에랴. 

악만풍도 그들이 등장했음을 알고 탄식했다. 분명 시간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찾아올  듯 하여 미리 말을 해뒀

는데 기어코 왔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전진 도사들을 서서히 뚫으며 전진하고 있는 것 같아 생각이 뒤바뀌었다. 이

렇게 되면 진양은 구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면이 있는 도사들 때문에  위험이 있어도 자신이 마지막에 남아 

시간을 끌어준다면 반드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당무와 당주고의 검은 그의 요혈을 잘도 노려왔다.  지금까지는 악가창법으로 버티고 있긴 했으나 

역시 더 버티기가 힘들 듯 했다. 가량 등이 조금만 더 빨리 와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나보다. 악만풍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가량의 연검이 도사들 사이를 헤치고 있었다. 그가 도사들의 검을 혼란스럽게 하면 형란과 문인능이 좌우로 뛰어들

어 각자 도사들을 제압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가망이 있을 듯 했다. 그들은 진양과 악만풍을 구하겠다는 생각 하나

로 세 가지의 다른 검법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당유민이 나타나 방해를 한다. 

"가량. 당신이 대담하게도 이곳에 왔군요." 

"저들을 구해야겠다 당유민. 비켜라!" 

가량이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가량은 사실 그녀보다 무공이 못했다. 그녀는 당무나 당주고보다 실력이  떨어

지지만 가량보다는 뛰어나 그 혼자서는 그녀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형란과 문인능도 가량이 단 몇 수만에 밀리는 

걸보고 달려들었다. 셋이서 협공을 하니 과연 상황이 뒤바뀌었다. 

"너희는 두 분을 구해내라! 내가 이 요녀를 막겠다." 

가량이 외친 소리였다. 그에 형란은 주춤거리며 함부로 검을 빼지 못했으나 문인능은 금방 몸을 돌려 악만풍에게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들조차 위기에 빠진 것 같았다. 어느새 다른 편에 있던 도사들이 대거 몰려들

어 그녀들마저 포위한 것이다. 가량 등도 그제야 사실을 깨닫고 다급해졌다.  진양과 악만풍부터 시작하여 가량, 형

란, 문인능까지 모두 큰 위기를 맞은 것이었다. 전진교의  담장을 타고 날아드는 바람이 어찌나 그렇게 매정하게만 

느껴지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왕령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당무 등과 맞서 싸우는 진양과 악만풍과 좀 전 

나타나 한참 돌파하더니 결국 위기를 맞는 가량 등까지 모두 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사들 틈에 끼지 않고 다른 건

물 2층에서 관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진양과 악만풍이 침입했던 그 큰 건물. 그곳은 사실 손님을 접대하는 

영빈전(迎賓殿)이었다. 

그녀는 진양이 자신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걸 알았다. 악만풍이란 자도 진양과 대단한 친구인 듯 싶었고 지금 달

려오는 자들도 그들을 구하려는 것임을 모두 알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쭉 싸우는 광경에 열중하지 않았다. 오로지 

진양만 보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부상을 입고 쓰러져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만 하는 진양. 그를 보며 약간의 죄책

감, 약간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녀도 처음 본 것이었다. 6년을 함께 지내고  강호를 돌아다녔어도 그가 저렇게 허탈

해하고 슬퍼하며 미친 사람처럼 늘어진 모습은 보지 못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그가 자신을 보고 그리 멍청해

하며 당주고를 죽이지 못했을까. 그 정도도 모를 왕령이 아니다. 진양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까지 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당주고가 죽지 않은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진양이 저

리 된 건 매우 슬픈 일이었다. 

문득 중양궁에서의 진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분하고 억울한지 한참 싸움을 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난 너에게 있어서 무엇이냐? 6년을 함께 보낸 난 너에게 있어서 뭐였냐?> 

이 말은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머리에 콕 박혀있다. 절대 지워지지 않고 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녀는 대답했다. 

<넌 나의 벗. 6년을 함께 보낸 좋은 벗.> 

그녀는 그런 말을 하며 저미는 가슴을 달래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실제로 진양은 그녀에게 있어서 단순한 벗이 아

니었다. 사실 당주고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가 바로 왕령의 사랑이었다. 6년 동안의 정은 역시 진양만 느낀 게  아닌 

셈이다. 그러나 당주고를 보면서 그녀의 생각은 바뀌었다. 너무나 훤칠하고 호연한 기운이 풍기며 예(禮)를 아는 모

습. 무조건 굽힐 줄 모르는 진양과는 다른 모습에 그녀는 그만 넋이 나갔다. 그녀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지

만 본능이 움직이는 건 그녀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당주고는 그녀의 사랑이 되었다. 진양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도 당주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시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맺힌 음성으로 <나는 너의 무엇이냐?>하고 물을 때도 매정하게 <벗>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진양은 그녀의 벗이고 당주고는  그녀의 사랑이지만, 오늘 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진양을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다. 6년을 함께 보낸 정을  갚고 그를 배신한 걸 갚으며 그에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구해줘야겠다 생각했다. 설령 이 일로 인해 당주고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영빈전에서 쫓겨나도 어쩔 수가 

없다. 정말 그런 경우는 상상하기조차 싫어도 진양이 저렇게 고통받는 모습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악만

풍이나 가량 등이 위기에 처하여 그를 구할 수 없을 테니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단단히 결심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놓지 않았던 봉. 금녀가 한시라도 놓고 다

녀선 안 된다고 하여 뒷간에 갈 때조차 들고 다니는 봉이다. 진양의 봉이  부러지고 지금도 그에겐 봉이 없음을 알

았다. 하기야 아미산에 있을 때부터 그는 그런 걸 만들  생각도 안 했고 만들어도 아주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하나의 추억일 뿐이나 그래도 진양은 여전할 것이다. 

그녀는 한 손에 봉을 들고 영빈전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렸다. 경공이라면 절대 진양에게 뒤지지 않는다. 금녀에게서 

경공술을 배워 한 때는 <금수쌍녀는 한번 도망치면 잡을 수 없다>라는 말도 나돌았다. 앞에 널린 도사들의 어깨를 

밟으며 빠르게 내달린 그녀는 실력대로 진양의 곁에 금방 도달했다. 

"령아… 령아……." 

왕령은 그의 곁에 와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렇게 정신이 나간  상황에도 자신을 애타게 부르다니 정말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즉각 진양을 업었다. 한 손에 봉이 들려있어 불편했지만 필요하니 꼭 들고 있어야 했다. 

"령아……." 

진양은 지금 자신을 업은 자가 그렇게 찾는 왕령이라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눈은 뜨고 입은 자꾸 열리지만 실상 

기절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한순간에 내달렸다. 

"앗! 멈춰!" 

악만풍이 보고 지른 소리였다. 갑자기 그녀가 나타나 진양을  업더니 떠나는 걸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순간 

당무의 검이 그의 어깨를 베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사력을 다해 틀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팔이 잘려나갈 

뻔했다. 당무와 당주고도 대단히 놀란 듯 했다. 그녀가 진양의 곁으로 가자 내심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갑자

기 업어서 정문으로 향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악만풍은 이 틈을  이용해 그들의 검진에서 재빠르게 빠져나

왔다. 

"어딜 가려고 하느냐?" 

당무와 당주고는 아차 싶어 일갈하며 다시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악만풍은 이미 멀어진 상태라 검이 닿지 않는다. 

그는 그들을 무시하고 몸을 돌려 내달렸다. 뒤에서 추격을 하건 말건 검이  날아오건 화살이 날아오건 무작정 내달

렸다.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양이었기 때문이다. 

가량 등도 당유민도 왕령이 진양을 업고 정문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가량이 보니 악만풍 역시 도망치려는 듯 정문

으로 달려간다. 가량은 형란과 문인능에게 소리쳤다. 

"됐다. 모두 무사하게 도망치니 우리도 떠나자!" 

"그녀들은 가도 당신은 갈 수 없어요." 

형란과 문인능이 도사들을 뚫고 달려나가다가 당유민의 음성을 듣고 멈칫했다. 가량의 길을 그녀가 막은 것이다. 가

량은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좋다! 정 네가 날 죽이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갑자기 검을 그녀에게로 내던졌다. 무림인에게 있어서 무기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검법을 쓰는 자가 검을 내

던지면 뭐로 검법을 펼칠 것이며 권법을 쓰는 자가 주먹을 잃으면 뭐로 권법을  펼친 것인가. 이런 모습은 매우 추

잡한 것이며 또 미친 짓이었다. 한마디로 발악에 가깝다는 거다. 당유민은 그가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너무 의외의 공격이라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가량은 형란과 문인능에 붙으며 함께 도망을 치

기 시작했다. 당유민은 벌떡 일어서며 추격하려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길게 한숨만 내쉬며 발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전진교에서부터 시작되는 행렬은 참으로 재미있게 되었다. 앞장서서  진양을 업고 달리는 왕령이 있고 

그 뒤로 악만풍이 사력을 다해 추격한다. 그 다음엔 가량 등이 나란히 도망치고 있고 또 뒤로 당무 등 전진 도사들

이 추격을 하는 셈이다. 

왕령은 진양을 업은 채로 사력을 다해 달렸다. 당무 등이 그녀를 못 봤을 리가 없어 반드시 쫓아올 것이다. 그들을 

만나서 혼이 나거나 욕을 먹는 건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어차피 진양을 구해주고 돌아가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6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며 그가 자신을 위해 해주었던 것들을 설명할 심산이다. 지금  그녀가 겁을 먹은 듯 힘을 다

해 도망치는 건 진양이 다시 잡혀 목숨을 잃을까봐 그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 너머로 튀어나온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도 눈은 희미하게 뜬 채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

찌나 슬프고 가엾은지 보기만 해도 눈물이 치솟고 머리가 띵했다. 그녀는 달리는  동안엔 절대 그를 보지 말아야겠

다고 생각했다. 더 보면 눈물이 나 힘이 빠져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달리다가 문득 종남 객잔의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쪽 방향

은 산의 대로에 속해서 아무래도 안 좋을 듯 했다. 차라리 번천을 돌아가는 게 낫겠다. 그녀는 그렇게 작정을 하고 

방향을 틀었다. 보광사에 미치지 않고 산언저리를 돌아 내려가면  번천에 도달할 수 있다. 번천은 종남산에서도 잘 

보이는 곳이지만 진양이 도망치기만 한다면 반드시 잡히진 않을 것이다. 

"너는.. 누구냐?" 

순간 귀 가까이로 들려오는 낯익은 음성에 그녀는  그만 몸을 떨었다. 진양의 음성이었다. 그가  깬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리 충격을 받고 내상을 입었다지만 계속 헛소리만 하며 미친 상태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다시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 얼굴을 붙이고 늘어져있는 진양의 모습. 그는 혼수상태였던 것이

다. 조금 전처럼 정신이 나간 것보단 나았지만 어쨌든 인사불성(人事不省)인 건 같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아무

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뜨고 제정신을 차렸다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며 아니어도 그렇다. 

"령아… 령아……." 

또 시작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마치 꿈을 꾸는 듯 그 말만을 반복했다. 왕령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

다.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혼수상태에서도  자신을 

찾을까. 그녀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볼을 타고 따스한 물기가 번진다. 

왕령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몸을 날렸다. 멍청하게 있을 시간이 없다. 이런 감상에 젖어 눈물만 흘리고 있으면 반드

시 진양에게 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매정하게 떠나보내야 한다. 그녀는 그대로 번천을 향해 질

주했다. 어떻게든 그 슬픔을 잊으려는 듯 무작정 힘만 내서 달렸다. 번천으로 달리며 나무가 있으면 피해가고 길이 

없으면 뛰어넘고 오로지 번천만을 향해 달렸다. 

얼마 가다보니 저 멀리 번천 물줄기가 보였다. 이제 진양과도 헤어짐이다. 그를 여기에 내려다주고 지금 뒤따라오는 

자에게 어서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면 된다. 그녀의 내공이 뛰어나진 않아도 기척이 크게  들려 그걸 잘 알 수 있었

다. 그런데 그때 다시 진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령아……. 나는.. 나는 너와 떨어질 수 없어.. 우린 친구가 아니야……." 

잠꼬대와 같았다. 혼수상태에서 지껄이는 헛소리였고 마음속 한  편에 담아져있던 한이요 슬픔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양이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고 원하는 바다. 왕령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그를 

깨워 몇 마디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가 정신이 있다면 모든 걸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었다. 그러나 진양은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너를 친구라 생각하지 않.. 우리.. 6년.. 정.. 당주고 따위.. 버리면……." 

점점 그의 말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 이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끊겨서 들려 뭐라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왕령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짐작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되고 띄엄띄엄 들어

도 다 알만한 얘기다. 그녀는 진양의 중얼거림에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가 듣지도 못하고 또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

지만 이 말에는 그녀의 온갖 정과 감정이 다 들어있었다. 

"미안해 양아……." 

한순간 발에 힘을 가하니 꼭 눈 깜박하는 사이  도착한 것 같았다. 얼마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눈앞에 보이는 건 

하염없이 흐르는 번천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진양을 내려놓았다. 그를 땅바닥에 고이 눕히고 갈대로  주변을 

가렸다. 가장 근접해서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래도 진양의 동료인 듯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

다. 손에 들고 있던 봉을 쳐다보았다.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해온  그녀의 봉. 유루봉법을 펼치며 자신의 

운명 한탄을 함께 해온 그 봉은 모양새가 예전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봉을  곧 진양의 손에 쥐어주고 자신의 이름

만 부르는 그를 뒤로한 채 매정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다시 전진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정면에서 힘에 가득 찬 음성이 들린다. 

"내 친구는 어쨌느냐? 내 친구를 내놓아라!" 

악만풍이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보아하니 딱히 경공을 배운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급히 오느라 자빠지기라도 했는

지 진흙으로 범벅된 옷은 아주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풍기는  기도는 심상치 않았다. 왕령의 수준으로 그의 기운을 

가늠하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나 지금 그가 풍기는 기운은 살기가 짙었기 때문에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양이는 번천 부근에 가면 있을 거예요. 도사들이 올 테니 어서 데리고 떠나세요." 

"정말이냐? 거짓말이면 반드시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는 매우 흥분한 듯 했다. 그 모습에 왕령은 진양이 이런 친구를 사귀었다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친구가 

한 명 있으니 조금 안심도 되었다. 그녀는 흥분하는 악만풍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며 그저 손가락으로 진양이 있는 

방향만 가리켰다. 그가 그곳과 왕령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리고 잠시 후 뭐라고 하는 고함소리

가 들렸다. 

왕령이 산을 오르다보니 또 가량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보고  심히 놀라는 듯 했는데 친절히 진양과 

악만풍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며 떠나자 매우 기괴하게 생각했다. 허나 머뭇거릴 순 없으니 일단 달리고 볼 일이다. 

그들도 그렇게 달려가고 좀 후엔 당무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니 당주고도 그녀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 한숨만 내쉬었다. 당무가 나서며 소리친다. 

"왕소저. 진양은 어디 있소?" 

"그는 잡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럼 왕소저가 그를 빼돌렸단 말이오?" 

그의 호통에 당주고가 말렸다. 

"형님. 그만하세요. 아무래도 그들은 잡을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만하라니? 그들이 어떤 자들인데 그냥 내버려둬? 반드시 잡아야 한다! 추격!" 

그는 말리는 당주고를 뿌리치며 손을 휘저었다. 당주고만 남겨두고는 모두가 함께 추격을 개시했다. 

왕령은 차마 당주고를 볼 수 없었다. 그에게도 미안하고 당무 등에게도 미안했다. 그들에게 진양 등을 잡을 수 없다

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자신이 밉기도 했다. 그러나 안 그러면 진양에게 또 죄가  되니 참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주고는 그녀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금수쌍녀 중 수녀라는 사실도 안다. 이것은 실상 당씨 가문 

사람이면 다 아는 거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을 당주고는 알고 있었다. 진양과 왕령의 관계. 단지 친구나 벗이 아니고 

또 사랑하기만 했던 사이만이 아닌, 6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보내며 의지하고 의지 받았던 사이란 걸 다 알고 있

는 것이었다. 직접 왕령의 입을 통해서 그 만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령의 마음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왕령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는 그 생각에 맞춰주듯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당주고는 말없이 등을 쳐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도록 왕령은 그의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나무 잎새는 몰래  살랑거렸고, 어느 

순간 거센 바람에 휘말려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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