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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十 章. 남양(南陽)의 인연 1 (43/90)

                                  第 二 十 章. 남양(南陽)의 인연 1

남양은 꽤나 널리 알려져 있고 또한 하남(河南) 지방에 속한다. 낙양에서 계속 남하하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며  후

한의 광무제가 여기에서 병을 일으켜 후한을 세웠기에 더욱 이름이 알려진 곳, 바로 남양이다. 

얼마 전 남양엔 이상한 여행객들이 찾아들었다. 한 명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로 덩치 큰 남자에게 들려져 있었

다. 팔이 축 늘어지고 온몸에 힘이 없는 듯 보이는 게 큰 병에 걸렸거나 부상을 입었을 듯 했다. 그리고  그를 업은 

거한은 매우 흉악하게 생겨 보는 이들이 절로 겁을 먹을 만 했다. 수염도  덥수룩하고 힘도 세 보여 건드렸다간 끝

장일 것 같다. 그러나 더 해괴한 건 그들과 함께 온 소녀들이었다. 두 명인데 둘 다 제법 미색이 있지만 특히 한 명

은 대단했다. 적어도 남양에서 오래 살던 사람들은 이만한 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침 가을이라 날도 선선하니 남

양 숫총각들은 그녀를 본 이후로 잠도 못 이루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 이상한 여행객들이란 진양 일행이었다. 늘어진 남자란 진양이고 거한은 악만풍이며 두 소녀는 

형란과 문인능이었다. 그들은 종남산에서 도망쳐 결국 이 남양에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남양은 종남산과 거리가  제

법 되어 오는 동안 고생이 많았으나 편히  쉬며 가다간 언제 붙잡힐지 몰라 서둘러 달려왔다.  때문에 그들 모두가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악만풍은 도착하자마자 형란과 문인능에게 먼저 객잔에 방을 잡아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남양에서 의원을 찾아

다녔다. 사실 그는 이 남양을 지난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로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지만 남양은 처음이다. 그래서 

의원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진양의 치료를 위해선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남양엔 의원이 많은 듯 했다. 달려가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모두 이런 의원이 있고  저런 의

원이 있고 말이 많았던 것이다. 악만풍은 이게 의원이 많다는 증거라 생각했다. 지나던 사람에게 가장 뛰어난 의원

을 물으니, 

"장씨 의원이죠 뭐. 그 늙은이의 의술이 매우 대단합니다." 

악만풍은 그 자의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남양에  그만한 의원이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문득 그의 뇌리로 

어떤 말이 지나간다. 

<이 사람의 상태는 저로썬 치료할 수가 없군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내장이 피해를 입었고 근골도 상했어요.> 

그 말은 남양으로 오는 도중 찾은  의원에게 들은 말이었다. 종남산과 가까웠으나 진양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 할 수 없이 찾았는데 그런 말을 하여 악만풍 등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남양까지 피해오며 결국 찾은 의원은 치료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일 여기서도 같은  말을 듣는다면 또 

떠날 것이다. 천하 곳곳의 모든 명의를 뒤져서라도 그는 반드시 진양을 살리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만큼 실상 

진양의 상태는 엄중했다. 

진양이 맞은 장법은 당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당가웅웅장(唐家雄熊掌)이라는 절학이었다. 지난날 악만풍도 당주고

가 쓰는 위력적인 장법을 보았는데 바로 그게 당가웅웅장인 것이다. 당주고는 내공이 부족하고 자질이 별로 뛰어나

지 못해 웅웅장을 대성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당광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런데도 위력

은 대단했다. 진양이 왕령으로 인해 방비 없이 정통으로 맞았다지만  그 위력이 형편없다면 이만큼 곤혹스러워하지

도 않을 것이다. 악만풍도 그를 데리고 오며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맞은 장법이 무슨 장법인지는 몰라도 여하

튼 대단하며 당주고가 보인 장법이란 건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대단한 걸. 이만한 부상을 입다니 놀랍군." 

악만풍은 이미 장씨 의원이 산다는 집에 도착해있었다. 방금 말은 그 의원이 진양의 상태를 본 후 한 말이었다. 

"그럼 치료할 수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그거 참 서두르지 말게." 

장씨 의원은 매우 늙은 노인이었다. 허리도 꾸부정하고 지팡이가 없으면 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다 죽어 가는 노

인네였다. 악만풍은 의혹이 일었다. 

"정말 치료할 수 있소? 괜히 치료 못하면서 그러는 거라면 그만두시오.  나는 그를 반드시 살려야하기 때문에 남양

에서 못 고치면 또 다른 곳으로 갈 거요." 

"참나. 성격도 참 급하구먼. 까짓 거 고쳐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고칠 수 있소?" 

악만풍은 금새 마음이 뒤바뀌었다. 진양이 죽을까봐 안절부절못하는 이때 장씨가 한 말은 매우 기쁜 말이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장씨는 가만히 웃으며 다시 진양의 맥을 짚었다. 

"내 팔십 생애를 살면서 이런 병자를 많이 봤지.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갖고 와서는 못 고치면 죽이겠다는 사람도 

봤고, 이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실려온 사람도 있었어. 대부분 내상이 심한 사람들이지." 

악만풍은 그 자들이 모두 부상 입은 강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로 어떻게 됐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반은 살고 반은 죽었지 뭐." 

"뭐라고? 그럼 내 친구도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소!" 

악만풍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자, 

"누가 보장이 없다고 했나? 이 사람의 내상은 별로 심한  게 아니야. 그냥 침 몇 대 놔주고 약  몇 첩 먹이면 나을 

걸.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 마음이지." 

"마음이라니?" 

장씨는 잠시 여유를 두고 한숨을 쉬더니 말한다. 

"이 사람은 몸보다 마음이 상했어. 저 눈을 봐. 저게 제정신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눈인가?" 

"저건 몸이 상해서 인사불성이 된 거잖소." 

"자넨 인사불성이 된 사람을 몇이나 봤는가?" 

악만풍의 말문은 턱 막혀버렸다. 

"난 수없이 봤어. 단순히 몸이 망가져 인사불성이 됐다면 저 정돈 안 되지. 저건 몸과 마음이 모두 상한 상태야."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고칠 수 있소, 없소?" 

"허허. 끝까지 그것만 따지네 그려." 

장씨 의원이 히죽거렸다. 무슨 번데기인양 주름살이 생기고 군데군데 빠진 이가 드러나자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명약이 하나있지. 내가 만든 건데 한번도 쓰지 않은 거라 효능은 나도 잘 몰라." 

"의원이 약효에 대해 모르면 그게 무슨 의원이오?" 

"자네는 너무 따지는 게 탈이군." 

악만풍은 사실 잘 따지는 성격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진양의 상태가 너무  엄중하여 흥분해있는 상황이라 그런 셈

이다. 그는 불쾌할 만도 했지만 별로 중요한 것이 못 돼 개의치 않았다. 

"고칠 수 있다면 모르되, 아니라면 그만두시오." 

"그럼 고칠 수 있다고 해두지." 

"정확히 말하시오!" 

"알았네 알았어. 고칠 수 있네 고칠 수 있어." 

악만풍은 슬슬 약이 올랐으나 꾹 억누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장씨가 짐짓 두려운 체 한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 얼마나 무서운지 오금이 다 저리네." 

"나도 병을 못 고친다며 의원을 괴롭힘은 옳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러나 이 친구는 내 유일한 벗이기 때문에 

흥분한 상태요. 장난치지 말고 진지해주면 좋겠소." 

"원.. 그렇다면 진작 말하지." 

장씨는 또 농담처럼 한마디하더니 금새 정색하며 침통을 열어 시침(施鍼)했다. 그는 먼저 정명(睛明)과 거골(巨骨)에 

침을 놓았다. 잠깐 맥을 짚으며 시간을 두다가 다시 삼양락(三陽絡)과 청냉연에 침을 놓는다. 그리고는 사람을 불러 

뭐를 가져오라고 시키고는 진양의 앞에 진지하게 앉아있었다. 

과연 한번 진지해지니 좀처럼 얼굴이 펴질 기색이 안 보였다. 방금 전처럼 늙은이의 추태를 부리는 일도 없고 오로

지 진양만 바라보며 시술에 열중했다. 악만풍은 그 모습에 남양 제일명의라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젠 결과만 지켜보면 된다. 진양의 상태가 호전되면  장씨는 정말 남양 제일명의고 아니라면 그냥 의원일 

거라 생각했다. 채 일다경이 흐르지 못해 장씨는 곧 침을 거두었다. 놓았던 순으로 차례차례 뽑았다. 

침을 뽑자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심부름꾼이 한 약병을 들고 왔다. 호리병인데 크기는 악만풍이 쥐면 안 보일 

정도로 작았다. 붉은 빛깔을 가진 호리병 붉은 빛깔의 단약이 은근히 탄내를 풍겼다. 장씨가 말한다. 

"이건 자네 친구에게 먹일 약일세. 하루에 한 알이면 충분하고 그 안엔 아마 열 개의 알이 들었을 걸세." 

"이것이 좀 전에 말한 명약이요?" 

악만풍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름은 뭐 이심치상단(裏心治傷丹)이라고 붙여놨는데 효능이 있을 거야." 

악만풍은 낮게 이심치상단이란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진양의 상태와 일맥상통하는  게 있음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장씨가 그를 보면서 웃는다. 

"이제 좀 안색이 풀리는군. 안 그래도 무섭게 생겼는데 인상 좀 쓰지마. 도적놈도 아니고 그래서야  원 여인이 따르

겠나?" 

"하하. 여인이 없으면 어떻소? 벗이 있고 술이 있고 충심이 있는데." 

장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여기 충렬(忠烈)한 대협이 한 분 계셨군." 

그는 놀랍다는 듯 입을 헤 벌렸다. 악만풍이 웃자 그도 따라 웃는다. 악만풍이 진양을 업자 장씨는 하루에 두 알 이

상 먹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나흘 후엔 제정신을 차릴 것이라 말해주었다. 

진양은 그렇게 객잔에서 누워만 지냈다. 남양 시내가 북적거리면 진양과 형란만 빼고 모두들 놀러나갔다.  이틀째는 

객잔에 콕 박혀있더니 사흘이 되자 점점 몸을 꿈틀거렸고 나흘이 넘으며 그들은  밖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전진

교의 영역을 벗어났음은 물론이나 혹시 모를 추격을 대비한 것인데, 아무래도 추격은 없는 듯 했다. 

형란은 그들과 함께 나가지 않았다. 문인능이 놀러나가자고 볶아도 그녀는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가량과 악만풍은 

주로 술이나 마시러 갔고 형란만 진양 곁에 붙어있는 셈이다. 그들도 진양의  곁에 있고싶어 했지만 형란이 있으니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일이 지나면 지날수록 진양의 몸은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장씨 의원의 말대로 하루 한 알씩 먹이자 나흘만에 정

신을 차렸고 열흘이 지나자 혼자 일어서기도 했다. 이심치상단의 효능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처음엔 맛이 쓰고 신데

다가 탄내까지 심하여 도저히 먹을 약이 아니었지만 하루 이틀 억지로 먹다보니 후부턴 별 생각 없이도 잘 먹을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악만풍 등은 모두 기쁘기만 할 따름이었다. 

오늘은 그들이 남양으로 온지 보름이 되는 날. 진양은 말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남양이 본래 큰 도시는 아니라 

사람이 많지 않아도 그렇다고 작은 촌도 아니어서 제법 사람이 북적거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모습을 봐서 그런지 

이심치상단이란 약을 먹어서 그런지 왕령의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하진 않았다. 

"진대협. 깨셨어요?" 

문득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형란이 들어왔다. 손에는 소반 한 상을 들고 온다. 진양이 아직 자고있는 줄 알고 일

단 가져다 놓기만 하려했던 모양이다. 진양은 그녀가 보름동안 한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

느 날 깨보니 그녀가 자신 침상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음 날 깨면 또 그녀가 졸고 있고 그 다음 날 깨보

니 막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눈이 퉁퉁 붓고  얼굴도 부은 모습으로 그저 진양이 깬 모

습만 보면 좋아했다. 

나중에 악만풍이 정황을 말해주자 그는 그제야 형란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진양은 이상하게 생각했

다. 자신이 사실 화주대도가 아니라 진양임을 알았으면 문인능처럼 더욱 불쾌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더구나  방립을 

쓰지 않은 맨 얼굴로 그녀와 만난 건  지난 날 교애산 때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성심을 다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는 그런 것 가지고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든 형란은 그를 위해 밤잠을 설쳤고 매일같이 간식거리를 들

고 방을 찾지 않는가. 남양 거리가 볼만하던 거 같은데 문인능과 함께 놀러가지  않고 곁을 지켜줬다는 게 그저 고

맙기만 했다. 

"만풍은 오늘도 술 마시러 갔나?" 

"네. 객잔 술이 질이 안 좋다며 형부하고 주루에 가셨어요." 

진양은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에게 불만은 없다. 언뜻 보면 형란만 남고 그들은 각자 놀러갔으니 불만이 있을 

법도 했지만, 진양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가량은 모르되 악만풍에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까짓 거 안 보

살펴주면 어떤가. 해주면 고마워도 형란이 있으니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라 짐작했다. 게다가 악만풍과 그

는 서로 진정한 벗이라 생각하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역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군." 

"악대협의 본래 그러셨어요. 처음 형가장에 오던 날도 아버지와 함께 밤을 샜죠." 

말하던 형란의 안색이 일순 침울해졌다. 형가장과 형웅강을 떠올리니 그런 것이다. 진양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

를 툭툭 쳐주었다. 

"나도 이제 몸이 다 낫는데 한번 나가서 놀지 그러냐? 가을이라 낙엽이 지고 추풍(秋風)이 부니 매우 볼만할 거다." 

"전 괜찮아요. 진대협이 나가실 때 같이 나가면 되죠 뭐." 

"나와 함께? 꼭 나와 함께 가려고?" 

진양이 짓궂게 장난치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안절부절못하며 소반을 가리키고는 후닥닥 사라져버렸다. 

진양은 웃으며 그녀가 놓고 간 소반을 들었다. 마침 시장기가 느껴진 터라 맛도 좋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놓았더

니 추풍이 불어온다. 창가 아래 묵묵히 기댄 봉이 추풍이 불자 몸을 떠는 것만  같았다. 서서히 묻혀 가는 계절, 가

을의 세상은 절로 한숨이 일게 했다. 

한편 형란의 말대로 악만풍과 가량은 날이면  날마다 주루에서 시간을 보냈다. 벌써 며칠째  술 싸움을 벌이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술 대결이었다. 싸움의 승은 물론 악만풍이다. 본래부터 주귀라  술 대결이라면 절대 빠지지 않았다. 

지금껏 술 대결에서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인 셈이다. 그런 그를 가량이 이길 리 없었다. 

"후! 정말 주귀로구나 주귀야!" 

가량이 약간 취한 음성으로 탁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들은 이미 술로서 매우 친해져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옆엔 

큰 술독이 다섯 독이나 있었다. 한 독이면 평범한 사람이 며칠 밤낮으로 마실 수 있는 양이다. 그러나 이미 악만풍

과 가량의 대결로 인하여 이 다섯 독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악만풍은 현재 큰 대접으로 술을 쏟아 붓고 있었다. 

"커! 가선배님도 대단하십니다. 오랜만에 비슷한 주귀를 만났군요." 

"하하. 농담 말게나. 나 같은 묘지 귀신하고 자네 같은 천하제일 거귀(巨鬼)하고 어떻게 비교를 하는가?" 

가량의 말에 악만풍이 크게 웃어댔다. 

"정말 요즘은 편하고 좋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가선배님과 술도 한 잔 하고, 그 녀석도 몸이 거의 쾌유됐으니 참 기

쁘기 짝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 분이 진대협일 줄은 몰랐네. 그 날 전진교에서 어찌나 놀랐던지.." 

"그 녀석이 좀 괴팍하죠. 별로 대단한 이유도 없이 변장을 하다니. 저도 처음 얘기 듣고 웃음이 터졌지요." 

악만풍이 말하며 술독을 들었다. 힘이 좋아 한 손에 술독을 번쩍 쳐들었다. 그런데 술이 대접의 반도 제대로 못 채

우고 방울로 떨어진다. 

"어이! 여기 술 두어 독만 더 가지고 와." 

그가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지금껏 그들은 보고 있었다. 매일같이 와서 일곱 여덟 독씩 

축내더니 오늘도 그러려나 생각했다. 점소이가 울상을 지으며 달려온다. 

"아이고 대협. 이제 술이 없습니다. 아직 낮인데 벌써 술이 떨어졌으니 큰일이에요." 

"아니 주루에 술이 없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대협께서 다 드셨잖습니까. 제발 저희 사정도 좀 봐주세요." 

악만풍은 정신이 아직 말짱하여 점소이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마 술이 얼마 안 남았는가 보다. 그들이야 돈을 벌

면 좋지만 대낮부터 술이 바닥나면 밤에 올 손님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그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냥 호탕하게 웃으

며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점소이의 얼굴이 훤해졌다. 

"왜? 오늘은 그만 하려고?" 

"저들 사정도 봐줘야지요. 대낮부터 술이 동나면 다른 손님들은 어쩌겠어요." 

가량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악만풍이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술로 인해 서로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이전에는  그를 

대협이라고 하며 존중해주었다.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바른 인물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 이심치상단의 효능은 대단하더군요. 장씨 의원이 말한대로  정말 나흘만에 깨어나더니 열흘만에 돌아

다니니까요." 

"암. 남양 제일의 의원이라니 뭐 그 정도는 돼야지. 듣자하니 장지증(張志贈)라고 한다던데." 

"네. 성격은 여유작작해도 좋은 사람입니다. 그 날도 농담만 일삼다가 일단 한번 시술이 시작되니까 돌변하더군요." 

악만풍은 그때 일이 생각나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 혈에 능숙하게 침을 꽂고 시간도 재가면서 진지했죠.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아요." 

"보통 인물이 아니라니? 의원들은 다 그 정도는 한다네." 

가량의 말에 그가 낮게 웃었다. 

"하지만 다른 의원들에겐 없는 충(忠)이 있었습니다." 

"충? 한낱 의원이 충이라고?"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량이 놀랍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묘하다 묘해! 나라에 썩은 관리들도 충을 모르는데 한낱 의원이 충을 안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순간 주루 안이 적막으로 가득 차버렸다. 방금 가량이 외친 말 때문이었다. 그런 말을 잘못했다간 역적이라며 붙잡

혀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하면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가량은 조금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술기

운인지는 몰라도 매우 당당했다. 

"의원이 황제보다 백 배는 낫다!" 

"천 배는 낫겠죠. 하하." 

급기야 악만풍까지 합세했다. 주루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금새 새파래지며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괜히 옆에 있다가 동지로 오해받아 난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악만풍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량이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소리친다. 

"정말로 더럽구나! 제 목숨 아끼기에 연연하다니 너희들은 민족이 고통받고 국토의  절반을 뺏긴 금국이 밉지도 않

으며, 오랑캐에 허리를 굽히는 황제가 우습지도 않단 말이냐?" 

"가선배님. 그만하시죠.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욕할 게 못 됩니다." 

"그래도 너무 화가 나는군!" 

"저도 화가 나긴 합니다." 

가량은 악만풍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았다. 분노가 치미는지 남은 만두 두 개를 단숨에 집어먹는다. 조금 시

간이 지나자 주루가 텅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모두 겁을 먹고 각자 다른 주루로 가든 집에 가든 떠난 것이다. 악만

풍과 가량은 문득 이 주루의 주인장에게 미안해졌다. 괜히 자신들 때문에 장사를 망친 것 같았다. 주인장이 억지로 

미소를 띄우지만 그도 겁을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악만풍이 일어서며 탄식한다. 

"후.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그는 텅 빈 주루 맨 구석에 아직 앉아있는 사람 두 명을 보았다. 허나 그들은 악만풍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저희들

끼리 밥 먹기에 바쁜 듯, 악만풍과 가량에게 아는 척 하기 싫다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악만풍은 더욱 안타까

워 입을 벌려 뭔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怒髮衝冠 憑欄處 瀟瀟雨歇 

擡望眼 仰天長嘯 壯懷激烈 

三十功名塵與土 八千理路雲和月 

莫等間* 白了少年頭 空悲切 

靖康恥 猶未雪 臣子恨 何時滅 

駕長車踏破 賀蘭山缺 

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관을 찌르는 성난 머리칼로 난간에 기대서니 오던 비도 그친다. 

치켜 뜬 찢어진 눈빛 하늘을 우러러 길게 포효하노니 

장사의 가슴에 피가 끓는다 

삼십 년 공명은 티끌 같고 전선을 달려온 팔 천리 

공허한 구름과 달빛뿐 

한시인들 한가했던가 소년의 머리가 이제 희어졌으니 

공허하고 슬픈 마음뿐 

그러나 나라가 망한 치욕을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된 자의 한을 한순간인들 잊으랴 

하란산의 허점을 뚫고 전차를 몰아 돌파하리니 

이 병사의 굳은 마음 

배가 고프면 오랭캐의 살을 씹고 목이 마르면 오랭캐의 피를 마시며 

맨 선두에 서서 빼앗긴 산하를 수복한 후 

천자의 궁궐에 조회하리라.> 

이건 악비의 만강홍이라는 시였다. 악비가 생에 지어놓은 시로 근래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로 영웅의 기상

이오, 충렬한 의기가 느껴지는 훌륭한 시다. 악만풍은 시를 외우며 한스럽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영웅은 가셨소만 남은 이들은 장군만 위할 뿐 몸을 버리지는 않소. 천하에  충심으로 가득 찬 이들 있으면 무엇하

리! 서너 말 외웠다고 사라지는 무리 가득하고 움츠려 숨어 배 채우기에 바쁘구나!" 

그의 외침에 문득 구석에 앉아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돌려졌다. 처음으로 돌려진 시선이다. 정면으로 보니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한 명은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고 다른 한 명만 중년에 접어드는 듯 했다. 악만풍은 그 모습에 더욱 

안타깝고 슬퍼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가세. 더 있다간 나라 쓰레기들이 몰려올 걸세." 

가량이 탄식하는 그를 붙잡고 이끌었다. 헌데 그때였다. 

"잠깐!" 

갑자기 그 두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소리는 그들이 외친 것 같았다. 가량은 일순 그들이 관부와 연관된 사람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악만풍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악만풍은 겁먹지 않고 묻는다. 

"왜 가는 길을 막소?" 

"우리에게 사과하시오." 

"뭘 사과하란 말이오?" 

악만풍이 불만스럽게 묻자, 

"방금 움츠려 숨어 배 채우기에 바쁘다는 말에 대해 사과하란 말이오." 

중년인이 한 말이었다. 악만풍은 피가 끓어올랐다. 

"나는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왜 사과를 해야하오?" 

"사과를 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가량이 끼어 든다. 

"그래서 관병이라도 부르겠다는 거냐?" 

가량은 제 분을 못 참았는지 일갈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중년인이 코웃음치며 뒤로 물러선다. 

"나라를 위한다는 자들이 주먹질만 일삼는구나." 

"너희처럼 위하지 않는 자들은 때려도 상관없다!" 

가량은 아예 연검까지 뽑아들며 소란을 부렸다.  주인장이 옆에서 말리려는 듯 자꾸 주춤거리나  눈길도 줄 그들이 

아니다. 중년인도 조금 화가 솟은 듯 했다. 

"그럼 너희는 위선자다." 

"옳아! 왜 두 명만 남아있는가 했더니 결국 이렇게 시비를 붙이려고 했었군." 

"뭐라고?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나는 지껄여야겠다!" 

중년인의 호통에 가량은 벌써 연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연검이 뱀  혓바닥처럼 흔들거리며 중년인의 가슴으로 날아

들었다. 그러자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속히 뽑으며 연검을 쳐냈다. 자세나 수법으로 보아 과연 무공을 알고 있

는 자들인 듯 싶었다. 가량은 더욱 분노하여 아예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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