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章. 남양(南陽)의 인연 2
중년인의 무공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눈빛도 별로 형형하지 않고 검법도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화접목(移花
接木)의 수법을 자주 이용하여 가량을 단숨에 패퇴로 몰아넣었다. 이화접목이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그 힘을
중화시키는 방법이다. 이건 사량발천근과 비슷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네 냥의 무게로 천 근을 든다는 사량발
천근은 순전히 방향을 바꾸는데 있다. 즉, 상대가 정면으로 검을 내질렀을 때 사량발천근으로 퉁겨서 찔러오는 방향
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셈이다. 허나 이화접목은 이보다 한층 상승의 무학으로 단지 퉁겨내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힘을 약하게 만든다.
가량의 사설연검법은 본래 사량발천근엔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기부터 벌써 연검이라 퉁겨낼 것도 없기 때문
이었다. 더구나 방향도 종잡을 수 없고 그렇다고 공격에 무게가 실리는 것도 아니니 방향을 잡아도 퉁겨낼 필요가
없었다. 해서 사설연검법의 특수한 점은 오로지 쾌속과 불규칙한 공격로로 상대를 혼란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이화접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화접목은 상대의 공격만 잡아내면 반드시 그 힘을 중화할 수 있었다. 무
게가 천 근이건 일 냥이건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그 힘을 중화시키니 사량발천근처럼 네 냥의 힘조차 필요 없는 것
이다. 또한 연검이라 퉁겨내긴 힘들어도 이화접목은 퉁겨내는 게 목적이 아니니 이 무학에 맞선 가량은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는 이런 상승 무학을 접해본 적이 없다.
젊은 남자는 이 광경을 구경만 했다. 훤칠한 얼굴임에도 은은히 지조가 엿보였다. 그는 상황이나 자세로 보아 아무
래도 참견하지 않을 태세였다. 악만풍은 곧 들고있던 창을 휘저었다.
"내가 상대해주겠소!"
그의 외침에 가량이 재빠르게 물러섰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상대에게 맞지는 않고 힘만 허무하게 사라지니 마침
빠지고 싶던 참이었다. 악만풍도 이화접목 같은 상승 무학은 모른다. 그러나 좀 전에 봐둔 게 있어서 중년인이 쓰는
방법이 매우 괴상한 거라 생각했다.
악만풍은 창을 꼬나 쥔 채로 목과 허리 다리를 차례로 찔러 들어갔다. 악가창법의 명성처럼 과연 보통이 아니다. 동
작이 착착 이어지고 흠이 보이지 않아 악가창법에는 매우 대성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창법 역시 이화
접목에는 무리였다. 중년인은 그냥 가볍게 물러서더니 다리를 향해 찔러오는 창을 발로 툭 건드렸다. 순간 그의 발
이 창을 감듯 빙글빙글 돌며 신발 끝으로 자꾸 건드리는 듯 했다.
악만풍은 이 중년인이 보통이 아님을 알았다. 좀 전 삼단 공격은 어느 정도 힘을 줘서 아무리 중화시켜도 소용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치 힘이 새나가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마치 10냥의 힘을 줘서 밀었거늘 감쪽같이 8냥이 사라지
는 것과 같은 괴상한 느낌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대처하기로 하고 창을 매섭게 돌렸다. 찌르기로 통하지 않으면 찌
르기를 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는 또 당하고 말았다. 그가 창을 빼고 회전시키는 순간 중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번쩍 달려들며 일
권을 가한 것이다. 악만풍은 어디서 많이 본 수법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가슴을 격타 당했다.
"윽.."
숨이 차 오른다. 가슴 한 가운데를 적중 당하자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악만풍은 중년인이 힘을 뺐다는 걸 알았
다. 좀 전 상황은 완벽한 기회라 힘을 다해 쳤다면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봐준 것은 좋으나 원하지 않으니 제대로 하시오."
"당신들은 날 이길 수 없소. 그냥 사과하시오."
"흥. 충도 모르는 자들에겐 죽어도 사과할 수 없다!"
악만풍이 고함치며 다시 달려들었다. 중년인의 얼굴에 문득 놀라운 빛이 지나간다. 악만풍이 독룡출동의 묘로 빠르
게 덤볐다. 창 끝이 중년인의 목을 노린다. 그는 몸을 옆으로 꺾어 피하며 날아오는 창을 덥석 움켜쥐었다. 허나 괴
상하게도 힘은 주지 않아, 마치 힘 빼고 그냥 잡기만 한 듯 창의 움직임에는 전혀 불편이 없었다. 악만풍은 그가 또
봐준다고 생각하고 약이 올랐다.
"후회할 거요!"
그가 일갈하며 창에 온힘을 가했다. 창이 옆으로 휘저어지며 중년인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갑자기 중년인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원숭이처럼 창을 중심에 두고 빙글거렸다. 무슨 춤을 추는 듯 금새 접근하더니 맹렬히 악만풍
의 손목을 친다. 팍, 하는 음향이 들리며 악만풍은 견디지 못하고 창을 놓고 말았다.
"좋아! 대단하구나. 우린 널 이길 수가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죽이든 관부로 넘기든 마음대로 해라."
악만풍이 한탄하듯 소리쳤다. 가량이 연검을 내던진다. 악만풍보다 자신의 무공이 약함을 잘 아는 그라 싸워봐야 추
잡한 짓이란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년인의 대답은 놀라웠다.
"누가 누굴 관부로 넘긴단 말이오? 누굴 매국노로 아시오? 아까 한 말에 대해서 사과나 하시오."
"관부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악만풍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그가 웃는다.
"하하. 내가 관부 사람 같이 생겼나. 이보게 마사제, 내가 그런가?"
"아뇨 사형. 저 사람들이 오해를 했나 봅니다."
그들은 아무래도 사형제인 듯 싶었다. 중년인은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악만풍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우릴 오해했군. 왜 오해를 했소?"
잠자코 있던 가량이 나선다.
"정말 관부 사람이 아니오? 관부 사람이 아니면 왜 모두 겁먹고 떠나는데 당신들은 떠나지 않았소?"
"하하. 설마 세상 사람들이 전부 겁쟁이란 건 아니겠지. 우리가 그런 자들과 같다고 생각 마시오."
"그럼 왜 안 떠났소?"
젊은 사람이 대답했다.
"왜 안 떠났냐니. 우린 요기하며 쉬고 있는데 그럼 당신들 말에 겁먹고 나가야만 한단 말이오?"
가량이 어리둥절해하며 눈만 깜박였고 악만풍은 잠시 뭔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
다.
"오늘 큰 결례를 범했소. 생각해보니 내가 처음부터 말을 잘못했구려. 사과하오."
그는 정중한 자태로 정중하게 말했다. 금방 중년인과 청년의 얼굴이 풀렸다. 가량도 그제야 깨닫고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중년인이 맑게 웃는다.
"사실 우리도 잘못은 있소. 충렬한 분이 계시는데 아는 척도 안 하고 무시했으니.. 그것 때문에 오해가 더 된 듯 싶
소."
"정말 그런 거구려. 오늘은 정말 실례했소."
악만풍이 한번 더 읍하며 가볍게 인사치레를 했다. 이제 그만 가겠다는 어투다. 그러자 중년인이 잠깐 청년을 돌아
보다가 문득 손을 들며 그들을 막았다.
"오늘 이렇게 다투며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한번 사귀어 봄이 어떻소?"
"미안하오만 나는 바빠서 그럴 경우가 못 되오."
"하하하."
악만풍의 대답에 중년인이 낮게 웃었다. 한동안 얼굴에 미소기를 지우지 못하고 여유를 부리더니 천천히 몸을 돌리
며 걸음을 떼었다.
"사람이 사람을 못 알아보는데 무슨 교우가 있겠는가. 마사제. 우리도 떠나세."
중년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콕 다물었다. 자리로 돌아가 짐을 챙겨들고는 청년과 함께 주루의 문을 나섰다.
그들이 간지 잠시 시간이 흘렀으나 악만풍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가량이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그를 불렀지만 대
답이 없다. 그는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던 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사람이 사람을 못 알아본다. <충인이 충인을 못 알아본다> 라는 뜻이구나!"
그는 그렇게 소리치고 급하게 주루 문 밖을 나섰다. 그는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들도 사실은 나라를 걱정하는 충
인이라는 것을. 사람과 사람은 같은 존재요, 충인과 충인도 같은 존재라는 걸 퍼뜩 느꼈다. 그는 남양 시내를 달려
가며 지나는 사람들을 잡고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서너 명 잡고 물으니 한 사람이 동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는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비호처럼 내달렸다. 본래 경공을 배우지 못해 속도는 느렸지만 그래도 빠른 편이라 남양 시
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보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뒤로 가량이 급히 쫓았다.
한참 달리자 저 멀리 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필시 아까 그들일 것이다. 지금 보니 그들의 옷은 도복이었다. 한 문
파에 소속된 인물들인 듯 과연 범인들은 아니었다. 걸음이 사뿐사뿐 흔적이 매우 적었고 걷는 자세도 곧았다. 악만
풍은 그들을 황급히 불러 세웠다.
"왔구려."
중년인이 살짝 미소하며 말했다.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말투가 그러했다. 악만풍은 그들이 한번 더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무지하여 두 분의 끝까지 오해했소. 그러나 이제 깨달았으니 문제될 것도 없다고 생각하오. 나와 사귀어봅시
다."
중년인이 씨익 웃는다.
"좋소! 알았다니 문제될 것도 없지. 오늘 처음으로 강호출도하여 처음으로 벗을 사귀는구려. 하하."
중년인은 호탕한 대소를 터트렸다. 옆에 청년도 흡족한 웃음을 흘린다. 악만풍은 그들과 대화를 하며 남양으로 다시
되돌아왔고, 중간에 만난 가량만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문득 남양 거리에 어둠이 깔렸다. 가가호호 불이 꺼지고 두런두런 들리던 말소리도 모두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말
았다. 그러나 이런 밤에도 주루와 객잔은 아직 불빛으로 휘황찬란하고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낮
보다 밤에 더욱 손님이 들끓어 오늘도 그들 주인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진양 역시 오늘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술을 들고 있었다. 그의 방은 객잔 이층이다. 창가로 고개를 내빼면 이 객잔
과 맞붙은 주루가 보여 모든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오늘도 그저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시간을 때
우는 셈이다. 그동안 몸은 거의 완쾌되었다. 내상은 심한 편이라도 아주 대단하리 만큼 망가진 게 아니라 약을 먹으
며 금새 치유가 되었다. 왕령으로 인해 깊이 상했던 마음도 이심치상단의 효능에 포함되어 그런지 왠지 모르게 편
해졌다. 꼭 바람만 불면 생각나던 그녀도 요즘은 간들간들한 추풍이 불어도 잘 생각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쁘거나 행복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기억 속에는 왕령이 자리잡아 있고 종남산에서 자신을 업어
살려준 그녀가 떠올랐다. 그 사실에 대해선 본래 기억을 하지 못한다. 악만풍이 이야기 해줘서 사실을 알 수 있었
다. 봉이 쥐어져 있어 함께 가지고 왔다는 말에 그는 봉을 고이 모셔두었다. 한참 생각한 후 그는 왕령이 봉을 준
진위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곧 당주고와 혼인을 하겠다는 뜻임을.
그녀의 봉은 확실히 평생을 함께 한 봉이다. 아직 나이가 젊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평생이었다. 새로 만들면 되지만
평생 써온 봉이라 담긴 뜻이 남달랐다. 진양이 이를 모를 리 없었고, 또 진양이 모를 리 없다는 걸 왕령도 알고 있
었을 것이다. 그는 한 달여 가까이 창가에 기대 쉬기만 하는 봉을 바라보았다. 세상일도 진양의 일도 아무것도 모른
다는 듯 무심하게 기대있는 봉, 오로지 제만 편해 보였다.
악만풍은 요즘 바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저께도 찾아와 얘기를 했는데 새로운 충인 둘을 사귀어 마음이 잘 맞는
다고 했다. 그리고는 소개해준다며 따라나서길 권했지만 진양이 본래 충인도 아니요, 그렇다고 근래 기분이 들뜬 것
도 아니라 그냥 거절하고 말았다. 악만풍은 오늘도 그들과 노느라 주루에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향하는 주
루는 이 객잔 옆 주루가 아니라 한 반 각은 걸어야 나오는 곳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향할 수 있지만
끌리는 바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그들과 만나야만 하는가보다. 언제 왔는지 악만풍은 그의 등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진양이 돌아보며 안 건데 역시 흉악하긴 흉악하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거품을 물고 기절했겠지만 진양은 이미 적
응이 되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세상에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안 하던 장난까지 하나?"
"내가 무슨 술을 마셨다고 그래?"
그러면서도 냄새가 나는 걸 느꼈는지 짐짓 기침만 해댔다.
"그래 오늘은 그들과 잘 놀았나?"
"하하. 놀다마다. 더구나 오늘은 그냥 놀기만 한 게 아니지."
"그럼?"
진양이 묻자 그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는다.
"오늘은 그들이 여기에 놀러왔거든."
그의 말에 진양은 대충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뻔한 얘기로 필시 악만풍이 억지로 데려왔을 것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물들이 아니던데, 진양이 원하지 않음을 알고도 꼭 찾아올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마 악만풍이 거짓말을 했거나 어떤 수단을 써서 데려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악만풍이 밉지는 않았다.
"정말 자네도 집요한 면이 있어."
"하하. 칭찬 고마워."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하 웃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는 사람들을 끌고 온다. 먼저 형란과 문인능이 방안으로
들어왔고 나중엔 가량도 왔다. 아무래도 꼴을 보니 한번에 전부 소개를 시켜주려는 듯 했다. 진양은 악만풍이 새로
사귀었다는 인물이 보통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 들어오시오. 오늘 내 일행을 모두 소개하지."
악만풍이 나갔다가 새로 두 명을 끌고 왔다. 등불에 비춰져 그림자가 점점 커지더니 곧 그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악
만풍은 미소하며 그들을 소개했다.
"이 친구는 나와 동갑일세. 이름이 마보강이라고 해."
그리고는 곧장 이어서,
"이 분의 춘추는 제법 되셔. 그래서 내가 말도 함부로 못 붙이네. 함자는 연경후."
앞서 소개한 사람은 청년이고 두 번째는 단연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말도 함부로 못 붙인다면서 낄낄거리는 폼이
장난치는 것 같았다. 서로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양이다.
이 말과 보이는 모습에 진양은 놀랄 대로 놀랐다. 형란 등은 모두 그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양은
개구리 눈처럼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얼어붙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악만풍이 이상함을 느껴 입을 열려는데 순간
마보강이 소리쳤다.
"너.. 너.. 진양!"
"뭐라고 진양이라고?"
마보강의 떨리는 음성에 연경후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 이리저리 살피더니 안색이 돌변하며 크게 기
쁜 빛을 띄웠다.
"진양! 너 정말 진양이 맞구나. 맞지? 진양 너 맞지?"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달려와 그를 둘러쌌다. 진양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도 단번에 터트리지 못했다.
"이거 참 괴상한 인연이야!"
"하하! 진양이구나! 오랜만이다."
그들은 대소하며 진양을 와락 껴안았다. 그들은 너무 기쁜 것이다. 대체 얼마 만인가. 헤어진 지 자그마치 7년은 되
어간다. 서로 나이를 먹고 모습이 변하여 금방 알아채진 못했지만 결국엔 서로를 알아보았다. 진양은 너무 기뻐 코
끝이 다 찡했다. 이들이 정말 이게 꿈인가 생각했다. 이런 해괴한 경우가 있다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쁘고 감동이
느껴져 가슴에 뭔가가 울컥거렸다. 진양은 눈물이라도 날까봐 억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날 밤은 주루보다도 객잔보다도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않았다. 궁금해하는 악만풍 등에게 진양은 자신의 과거를
설명해주었다. 이 넓은 대륙에서 지나다 만난다는 게 참 즐겁고 기쁜 일, 그리고 조금은 황당한 일이다. 더구나 악
만풍이 사귄 친구가 사실은 진양의 옛 사형제라니 더욱 해괴하면서도 좋은 일이었다.
형란과 문인능도 이 날 밤은 자리가 파할 때까지 곁에 있었다. 형란은 즐거워하는 진양을 보며 기뻐하기만 했고 문
인능은 웬일인지 넋이 나가있었다. 모두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밤, 각자의 생각 속에 행복하고
기쁘게만 느껴지는 이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영웅대회(英雄大會)?"
진양이 놀란 어투로 말했다. 지금은 그들 모두 함께 남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주루에서 진
양은 마보강의 말을 듣고 되물은 것이었다.
"그래 영웅대회. 우리 함종문이 그동안 명성을 날리지는 못했는데 청성파와 교류가 있어서 그랬는지 초청장이 날아
들었어."
"청성파와 교류가 있었나?"
진양은 청성파에 대해 남달리 좋은 감정이 없었다. 마보강도 이미 들은 얘기가 있는지라 그냥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가까우니까 그랬지 뭐."
"영웅대회는 누가 주최하지?"
이번엔 옆에 앉아있던 악만풍이 물었다. 듣자하니 소림만 사정이 있어 빠지고 이름을 날리는 문파는 거의 다 참석
하는 것 같은데 누가 주최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물음에 마보강이 웃는다.
"도가 제일의 문파지.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고 무공으로도 크게 이름을 떨쳤지."
순간 악만풍의 낯빛이 변했다.
"전진교?"
마보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양을 비롯한 그들 일행의 얼굴색이 돌변해버렸다. 전진교에 대해선 온갖 안 좋은 기억
들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사실을 모르는 마보강은 어리둥절해하며 사실을 물었다.
곧 진양의 설명에 모든 걸 깨달은 마보강과 연경후는 믿기지가 않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처일이 죽었
다는 말이 가장 믿기지 않는 듯 했다.
"옥양자 왕선배님이 돌아가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 당광이란 작자를 혼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연경후가 분통을 터트리며 탁상을 후려쳤다. 모두의 생각은 그와 같았다. 다들 오르는 분을 삭히느라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와중 진양은 궁금한 게 생겼다.
"아. 전진교가 주최한다면 설마 당광이?"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연경후가 고개를 저었다. 진양이 이유를 묻자 그는 금새 얼굴이 펴지며 입을 열었다.
"함종문과 청성파에 영웅첩(英雄牒)을 들고 온 사람은 장생자(長生子) 유처현(劉處玄) 유선배님이셨어. 이번 영웅대
회를 주최하는 분들은 사실 전진 칠자야. 구선배님이 북방에 나가 계셔서 마선배님 등이 주관하시지."
진양 등은 그제야 영웅대회를 주최하는 자들이 전진 칠자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 기회에
참석하여 전진 칠자에게 사실을 고하면 좋을 듯 싶었다. 필시 그들은 전진교 사정을 모르고 또 왕처일이 죽은 사실
도 모를 테니 좋은 방법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 모두 영웅대회에 참석하자."
악만풍이 말했다. 물론 반대가 있을 리 없다. 그들은 그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고 행로를 절강(浙江)의 임안(臨安)으
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