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一 章. 무림산 영웅대회 1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 이 말은 당나라 초기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 지은 시에 나오는 말이다. 두심언은 두예
(杜預)의 자손이고 두보의 조부가 되는 사람으로 젊은 날 이미 이름을 날렸다. 추고마비(秋高馬肥), 천고마비(天高馬
肥)라는 말도 본래는 이 말에서 시작한 말이다.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이 살이 찐다. 참으로 가을의 형상을 잘 표현한
말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진양 일행이 동으로 걸어 임안에 가는 동안 가을은 점점 무르익었다. 하늘은 한없이 높게만 보
이고 날씨는 맑으며 시원했다. 이런 날 문인능이 가만있을쏘냐. 그녀는 툭하면 일행을 붙잡고 놀다 가기를 원했다.
지나는 길은 하나같이 좋고 편안하게 느껴져 진양 등도 절로 놀고 싶을 만큼이었다. 그러나 영웅대회는 중추절(仲
秋節)에 열리기 때문이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놀 일보다는 역시 영웅대회가 더 중요했기에 그들은 기어
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면서 진양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이번에 열리는 영웅대회의 목적은 첫째가 금국에 대항하는 무림인
들의 약속을 정하는 일이오, 둘째가 서하령(棲霞嶺) 기슭에 생긴다는 악묘(岳墓)를 축하하는 것이었다. 당금 제일의
명장이자 충인으로 추앙 받는 악비는 이미 오래 전 간신 진회의 모함으로 죽었다. 세월이 흘러 그 무고함이 드러나
그를 기리기 위해 새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 얘기가 천하 곳곳으로 퍼져 요즘 임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고 한다.
진양 등은 간간이 휴식을 취하며 조금은 빠르게 걸어간 결과, 중추절을 삼 일 앞두고 임안에 당도할 수 있었다. 임
안은 과연 복잡했다. 안 그래도 악묘가 생겨 온갖 사람들이 바글거리는데 거기에 영웅대회까지 겹치니 그야말로 대
성황을 이루었다. 임안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이 일로 인해 한참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별 다른 탈 없이 임안 성내로 들어선 진양 등은 아직 여유가 있음을 알았다. 영웅대회는 무림산(武林山) 비래봉(飛
來峰)에서 열리는데, 임안에서 하루도 안 걸리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로 인해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나가다 부딪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요 이 때를 틈타 날뛰는 도둑 꼬마들도 많았다.
"뭔 사람이 이리도 많대요. 악묘에 가보려 했더니 다 틀린 듯 싶군요."
이를 바라보던 문인능이 한 말이었다. 그들은 지금 임안 성내 한복판에 있었다.
"정말 심하군. 악묘는커녕 서호에도 못 가보겠다."
악만풍이 짐짓 아까운 체 한다. 그 말에 모두가 씨익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진양은 본래 악비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령과 지내며 그가 지었다는 만강홍을 자주 들었다. 그녀가 시를 좋아하니 그만한 건 당연했다. 때
문에 악비의 기상을 알게 되어 많은 흥미가 일었었으나 오늘 이 거리를 보니 갈 마음이 싹 가셔졌다.
"오늘은 틀렸다. 내일도 마찬가지일 테니 아무래도 객잔 방이나 잡는 게 좋겠다."
진양이 말하자 모두 동의했다. 허나 문인능만은 여전히 촐싹댄다.
"객잔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안까지 와서 서호도 구경 못한다는 건 억울해요. 방은 진대협이 잡으세요. 저희는
놀다 올게요."
"문인소저. 이런 날은 무리예요."
마보강이 낮게 웃으며 나섰다. 이곳에 오는 동안 마보강과 연경후는 진양과 문인능의 사이가 나쁘다는 걸 대강 짐
작했다. 헌데 마침 그녀가 마보강의 말을 잘 들어서 다툼이 일어나면 항상 중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
찬가지다. 그의 말에 문인능은 헤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가보지도 않고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죠. 우리 한번 가봐요."
"하지만 다들 갈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요."
오늘은 그녀가 고집을 부렸다. 아무래도 서호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터라 꼭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보강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 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뒤흔든다.
"그럼 저희끼리 가죠 뭐. 객잔은 저 앞에 낙향 객잔(樂杭客棧)으로 잡아두세요. 가장 좋은 곳 같군요."
그녀가 가리킨 객잔을 보니 과연 호화스러웠다. 집채가 크고 사람도 많이 들락거려 제법 이름을 날리는 객잔인 듯
싶다. 마보강은 그녀가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 당황했다.
"소저. 그들은 우리 일행이지 노비가 아니잖아요. 정 서호에 가고 싶으면 일단 함께 방을 잡고 떠나기로 해요."
"당연히 그들은 노비가 아니죠. 전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어요. 음.. 방을 잡고 떠나면 늦을 것 같지만 마공자가
원하면 그리 해야지요 뭐."
그녀의 말은 마보강을 더 곤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진양 등 모두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허나 뭐라 하는 사
람은 없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그녀의 성격은 연경후 등도 다 파악했기 때문이다. 과연 문인가장에서 귀여움만
받고 자란 아이였다. 진양은 한마디 해주고 싶었으나 따라간다니 그만두었다.
낙향객잔에 들어서자 역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워낙 넓고 커서 방이 남아있을 것도 같지만 사람이 많으니 또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다행히도 방은 딱 두 개가 남아있었다. 한 방은 형란과 문인능이 써라 넘겨주고 남은 방에
진양 등 모두가 들어가기로 했다. 본래 세 명이 지내도 가득 차는 방인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방을 잡자마자 문인능은 마보강을 달달 볶았다. 그는 쉬고싶은 눈치가 역력했지만 문인능은 뭘 먹고 힘이 그리 솟
았는지 아주 난리법석이다. 그러나 마보강도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피곤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며 그녀와
함께 객잔을 나섰다.
"저 친구도 미인은 처음이던가?"
악만풍이 실실거리며 진양에게 물었다. 진양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 저렇게 약하구먼. 너라면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칠 텐데."
"잘 아는군."
그는 가볍게 냉소하며 짧게 대답했다. 문인능 얘기만 나오면 그에게선 항상 냉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마보강은 이해
가 갔다. 정말로 그는 저런 미인이 처음일 것이다. 이전부터 함종문엔 여자가 없었다. 장문인 조덕의 처가 있었으나
일찍 죽어서 자식 한 명 못 얻었다. 더구나 함종문 제자는 어떻게 하다보니 여자가 없게되어 순 남자로만 구성된
셈이다. 듣자하니 연경후와 마보강은 이번에 나온 게 처음인 듯 싶은데 그 중에서도 문인능만한 미녀는 보지 못했
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가 미인이긴 했다.
그 날 마보강과 문인능은 저녁이 돼서야 돌아왔다. 말을 들어보니 서호는 구경했다고 한다. 워낙 사람이 많아 시끄
럽고 복잡했어도 서호의 명관은 훌륭했다며 문인능이 밤새 조잘거렸다. 다음 날 진양 등은 무림산으로 떠났다. 악묘
에 들려보려 한번 가까이 가보긴 했었다. 헌데 사람이 너무 많고 관부에서 사람까지 나와 더욱 보기 힘들어 그냥
포기하고 영웅대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무림산은 임안의 서북쪽에 있다. 말을 타고 달리니 채 반나절도 안 걸려 도달할 수 있었다. 가다보니 과연 강호인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림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일신의 무예를 갖춘 자들 같았다. 눈빛부터 심상
치 않고 모두 검이나 도를 들어 쟁쟁한 명성을 날리는 자들임을 알게 했다.
영웅대회는 무림산의 비래봉 위에서 열린다. 비래봉을 보니 과연 보통 봉우리가 아니었다. 높이는 낮은 작은 봉우리
지만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평범한 봉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비래봉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천축 승려 혜리(慧
理)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곳에 와 비래봉을 보며 <천축 영취산(靈鷲山)의 봉우리가 언제 이리로 날아왔는
고>라고 감탄하였다 하여 비래봉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옆 시냇물 넘어서는 영은사(靈隱寺)라는 절도 보였다.
비래봉을 오르며 암벽 곳곳의 석불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 오르며 본 것만 수십 개는 될 듯 싶었
다. 허나 들리는 바로는 무려 3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진양 등은 그 얘기를 들으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오르니 과연 주변에 붙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시끌벅적해졌다. 문득 위로 오르자 정면에 조금은 낡은 큰 집채
가 보이고 넓은 공터에 서로 인사하는 강호인들로 가득해졌다.
큰 집채는 아무래도 임시로 지은 숙소인 듯 했다. 2층으로 이루어져있고 좌우 너비가 매우 긴 게 낙향 객잔보다 규
모가 커 보였다. 진양 일행은 일단 앞에 늘어선 줄을 따라 들어섰다. 앞에 방명록이 있어 참가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듯 싶었다. 진양이 잘 보니 영웅첩이 없으면 아무래도 들어갈 수 없는 듯 하다. 밖에서 나무를 타고 오른
자들이나 어슬렁거리는 자들도 많은 걸로 보아 영웅첩이 없으면 밖에서 지켜봐야 하는 듯 했다.
진양은 영웅첩은 고사하고 드러낼 이름도 없었다. 명성이 있어야 뭔 말을 하던가 하지, 생각해보면 진양만 내세울
이름이 없다. 형란과 문인능은 이미 망했다지만 한때 이름을 날렸던 낙양 이대가장의 여식들이다. 마보강과 연경후
는 조덕 대신에 함종문에서 온 사람들이고, 악만풍은 악가창법의 맥을 이었으며 낙양 이대가장과 인연이 있어 역시
명성이 조금은 있었다. 진양만 없는 것이다.
그는 만일 이대로 들어가면 자신만 퇴짜를 맞을 거라 짐작했다. 이름이 있으면 모르되 영웅첩도 이름도 없는 자가
마음만 가지고 들어서기엔 너무 자리가 부족했다.
"양아. 아무래도 영웅첩이 있어야 들어가는 모양인데?"
"나도 알고 있다."
마보강의 말에 진양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지금 어떤 방도가 없을까 고민하는 터라 그의 말은 사실 귀에 들어오지
도 않았다. 이 모습을 밉게 본 문인능이 코웃음치며 나섰다.
"걱정이 많은가보죠. 악대협도 명성이 있고, 나와 란이야 뭐 이대가장으로 이름이 있으며, 마공자와 연공자도 함종
문에서 온 영웅첩이 있는 손님이니 문제가 없는데."
그녀는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진양의 약이 오르게 만드는 데는 거의 천재 수준이다. 어떻게 그의 마음을 알아서는
살살 빈정거렸다. 이번에도 역시 마보강이 나선다.
"문인소저. 양이도 들어가야 하니 무슨 방책이 있으면 말해봐요."
"음.. 모르겠어요. 저도 방도가 없군요."
그녀는 마보강이 말하자 좀 전에 비꼬던 표정을 싹 지우고 대답했다. 진양은 조금 화가 났으나 참으며 다시 생각에
빠졌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 한참 고민하던 그는 문인능 얼굴을 보자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만한 방도는 없
다고 생각하고는 손뼉을 치며 금방 어디론가 사라졌다. 악만풍이 불러 세웠으나 먼저 들어가라고 하고는 다시 사라
진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걸까요?"
형란이 모두에게 묻자,
"호호. 혼자 못 들어가니 창피해서 도망간 게 아니겠어?"
"능아. 입 조심하거라."
문인능의 태도에 결국 악만풍이 한마디했다. 그가 엄숙하게 말하자 그녀는 금새 입을 꼬옥 다문다. 그러면서도 삐쭉
거리는 입은 어쩌지 못하여 악만풍은 실소가 다 터져 나왔다. 마침 형란이 다급한 음성으로 멍청한 소리한다.
"정말로 그런 거면 어떡하죠?"
악만풍 등은 그 말에 한참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그들은 곧 차례가 되어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연경후가 영웅첩을 보여주니 전진 도사는 잠시 살펴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삼은 집채가 그리 큼에도 불구하고 방은 가득 찼다. 몇몇 사람들은 기어코 들어오지 못해 급히 만든 울타리
안에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악만풍 등은 모두 방을 잡을 수 있었다. 영웅대회는 다음 날 진시(辰時)에
시작된다고 했다. 문인능은 또 마보강을 볶아 밖으로 끌고 나갔고 악만풍 등은 전진 칠자에게 말을 전하려 그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전진 칠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도사들은 믿을 수가 없어 함부로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그들 힘
으로 흩어져서 찾아보았는데 워낙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도무지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내일
영웅대회 때 직접 말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다들 편히 쉬는 밤 형란만 창문 밖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일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리도 시끌벅적한 영웅대회는 시작되었다. 숙소 앞에 널찍한 단상이 세워져있고 그 앞으로 공터에
사람들이 몰렸다. 단상 위엔 문파로서 초청을 받은 장문인들이 앉았다. 함종문은 장문인이 직접 오지 않아 연경후와
마보강이 그곳에 오르지는 못했다.
악만풍은 단상 위에 있는 인물들 몇이 낯익음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단상 위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 중 하나는 감
총방 방주 용상이었다. 그 뒤엔 복차경이 시립해있었다. 그는 복차경을 보고 아직도 용상이 그를 감싸고 있음을 알
았다. 도망쳤다더니 또 돌아왔나 보다. 그쯤 되어 진시가 되자 단상 위로 전진 도사 한 명이 올랐다. 그는 아무래도
참가한 문파를 소개하려는 듯 했다. 앞에서 몇 마디 겉치레를 하고는 곧 입을 연다.
"그럼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쪽은 청성파 장문인이신 청청인도(靑淸仁道) 용장문. 옆으로 사제이신 화대협입니다. 그
리고 개방 방주 묵방주와 감총방 방주 용방주. 다음 분은……."
그가 소개할 때마다 이름이 불린 자들은 각자 읍하며 예를 표했다. 모두 명성이 쟁쟁한 현 강호의 태두들이었다. 소
림사가 빠졌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영웅대회라 할 수 있었다. 소개는 줄줄이 이어져 장문인들이 끝나자 곧 함종문처
럼 장문인이 직접 오지 못한 문파도 소개하였다. 강호인들은 함종문이란 이름을 잘 알지 못했다. 이번에 영웅첩을
받게 된 것도 순전히 청성파와의 교류 때문이었다. 지난 날 화연철의 무례가 있었지만 용정학이 금녀의 죽음에 교
화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며 함종문에 사과를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서로의 앙금이 풀리고 유처현이 청성파에 찾
아왔을 적 함종문을 소개한 셈이다. 사람들은 그런 문파가 있었냐며 저희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런 상황쯤은
연경후와 마보강도 이미 짐작했었다. 게다가 다행히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아 무안하진 않았다.
"빨리 진행합시다! 소개는 다 했으니."
"맞아. 빨리 처리합시다. 이러다 날 새겠어!"
몇 명이 벌써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상 위에 전진 도사는 가볍게 웃으며 소리쳤다.
"압니다. 이제 곧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금새 사라졌다. 잠시 후 무림산 비래봉에 때아닌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함성은 비래봉을 타 무림산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그만한 정열을 보여주었다. 바로 전진 칠자가 나타난 것이다. 허나 실제로 단상에 오른 사람은 전진 오
자다. 구처기는 징기스칸과 함께 있고 왕처일은 이미 죽은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주관은 마옥이 하는 듯 했다. 전진 칠자의 대사형으로 침착하고 아주 바른 사람이었다. 여기 온 사람들 중
마옥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우레 같은 함성소리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읍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빈도가 무능하여 영웅호걸 분들께 불편을 드렸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인사치레였다. 잠시 후 장중이 고요해지자 마옥은 슬슬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내용은 먼저 영웅대회를 연
이유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이어서 모두의 충심을 돋구는 말로 정강의 변도 들먹거렸다. 마침 악비 장군의 묘
가 생겼으니 이는 영웅대회를 열기에 아주 알맞은 시기라는 말도 했다.
장중은 순식간에 고요해져 누구하나 기침소리 내지 않았다. 그만큼 마옥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고 또 분개하고 있었
다. 악묘가 생긴 건 정말 기쁜 일이지만 금국에 당하는 송의 모습을 떠올리니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악만풍도 충심
이 끌어올라 몸을 가늘게 떨었다. 더구나 그는 악가창법의 맥을 이은 자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사실 그는 악씨가 아니다. 악비가 모함 당해 죽임을 당할 적 일가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맥이 있을 리가
없고 악가창법이 전수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악비는 이미 모함을 당하기
전 악가창법을 누군가에게 전수했고 그 자는 악비가 처형당하고 난 후 사라졌다. 역사에 남지도 않았고 이름도 알
려지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요, 반대로 악만풍만 아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악만풍에게 악가창법
을 전수한 사부였기 때문이다.
악만풍은 본래 양(梁)씨였다. 호남에 작은 촌에 살던 소년으로 어렸을 적부터 덩치가 커 많은 기대를 얻었다. 허나
금녀와 수녀로 인해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유일하게 목숨을 건져 그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악가창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충을 배웠다.
일순 요란한 박수소리가 들려 악만풍은 제정신을 차렸다. 분개하다보니 예전 사부까지 생각이 나 이제야 상념에게
깼다. 일장연설은 이미 다 끝난 듯 했다. 마옥이 다시 입을 연다.
"그럼 금국에 대항할 방도를 찾아야지요. 어떤 고견들이 있으십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전쟁에 참가하자는 말도 있고, 암살을 기도해보
자는 말도 있었다. 온갖 이야기가 순식간에 터져 나와 장중은 금방 소란해지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런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맹주 아니겠습니까? 맹주가 있어야 뭘 하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금방 소리친 자에게로 돌려졌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대단히 보기 힘든 절정의 미남이란 것 빼
고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허나 그렇게 생각하던 자들도 그의 뒤에 서있는 여인들을 보곤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뒤에 우뚝 서있는 네 명의 미녀는 모두 아름다운 홍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하나같이 미모도 뛰어났다. 다름
아닌 방홍미녀가 아닌가.
악만풍과 형란, 문인능도 그 사실을 알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럼 지금 소리친 사람은 사공환인 것이다. 그런
자가 맹주를 뽑자고 소리치니 어이없어 황당하여 웃음이 다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모두들 공
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옥도 미소하며 입을 연다.
"아무래도 맹주를 먼저 뽑아야겠군요. 과연 금국에 잘 대항하려면 맹주야 당연히 있어야지요."
그러더니,
"그럼 맹주로 누가 뽑히는 게 좋겠습니까?"
다시 또 소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사방에서 별별 별호와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엔 마옥도 있었고 구처기, 개
방 방주 묵산(默産), 청청인도 용정학 등등 수도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도 끼어 있었다. 마옥이 웃으며 소리친
다.
"빈도는 부족하여 감히 맹주를 할 수 없고 구사제는 변방에 나가있으니 역시 힘들군요. 남은 분들은 모두 뛰어나고
명망이 높으신 분들이라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여운을 두었다. 장내가 진정되며 시선은 그의 입으로 박혀있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무공으로 승부를 짓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역시 무림인인 만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
지요."
그의 말에 이곳저곳에서 찬성하는 의견이 터졌다. 그러나 게 중엔 반대도 많았다.
"아니 그럼 무공만 세고 포악한 인물도 맹주가 될 수 있단 말이오?"
"에이 이 사람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그런 경우는 예외지."
"무공만 센 위선자가 맹주에 앉는 경우는 또 어떡하나?"
"무림인인 만큼 무공으로 맹주를 정하는 건 당연하잖소!"
사방에서 서로 의견이 엇갈리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쪽에서 한마디하면 저쪽에서 한마디, 저쪽에서 한마
디하면 이쪽에서 한마디하는 식으로 다시 시끌벅적해지고 말았다. 과연 맹주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들 민감했다. 그
럴 수밖에 없다.
첫째로 여기서 뽑히는 맹주는 앞으로 금국에 대항할 강호인들을 총지휘할 인물이다. 그러므로 무공이 센 것도 물론
이요 지혜나 판단력도 있어야 한다. 성품이 곧고 바르기도 해야하니 그야말로 뽑기 힘든 것이다.
둘째로 예전부터 맹주에 대해서는 항상 의견이 엇갈렸다. 아무리 충인들이 모인 자리라 해도 그 중엔 반드시 자신
의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맹주를 자신들 장문인으로 추대하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맹주 문제만 나오
면 항상 복잡해지고 어떨 땐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마옥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급히 소리를 쳐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가 내공을 실어 일갈하자 수많은 강호인들
이 몸을 흠칫 떨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과연 명성만큼 보통 인물이 아니다. 모두들 그의 내공에 찬탄을 아끼지 않
았다. 마옥은 곧 장내가 조용해지자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의견이 엇갈리고 서로의 생각만 고집하면 영웅대회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럼 지금부터 조건을 달도록 하
겠습니다."
계속 말을 잇는다.
"첫째로, 일단은 무공을 겨루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강호인이고 무공으로 사는 사람들이니 가장 첫째로 합니다. 둘
째는 선악입니다. 매우 애매한 문제이긴 해도 사람들이 선하다고 인정하면 대결을 펼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임 없는 맹주의 말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결을 하면서 절대
로 상대를 죽이거나 큰 부상을 입혀선 안 됩니다. 상황을 보아 일부로 그랬다고 짐작되면 대회장에서 추방하겠습니
다."
그의 말은 하나같이 이치에 맞았다. 이렇게 되니 다시 떠드는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 무공만으로 정하는 건 불공평
하다 하던 사람들도 선과 신임을 넣자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대결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있으신 분은 단상 위로 오르시길 바랍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단상 가운데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관전을 하겠다는 뜻이다. 여전히 대회를 주관하긴 해도
일단 오를 사람은 오르라는 얘기였다. 그가 행동을 취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아니, 이번엔 좀 전과는 다른 엄숙함
마저 느껴졌다. 이런 일은 매우 신중히 결정해야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나섰다가 신임이나 선하지 않다고 하여 쫓
겨나면 그게 무슨 개망신인가.
"내가 먼저 나서지!"
그런데 어떤 당당한 인물이 크게 소리치며 단상 가운데로 떨어졌다. 다 낡아빠지고 구정물로 범벅된 더러운 옷을
입었고 머리는 조금도 정돈이 안되어 완전 개판오분전이다. 멀리서만 봐도 더러움에 몸을 움찔거리는데 가까이 가
면 얼마나 냄새가 날까. 허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전혀 깔보는 눈빛 따윈 보내지 않았다. 도리어 일부는 존경이요 일
부는 두려워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 묵방주시구려. 묵방주라면 빈도는 이의가 없소."
그는 바로 현 개방의 방주, 묵산이었던 것이다. 본래 성정이 급하고 무공에 깊이 심취하여 처음 보는 무공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인품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서 마옥은 이의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건 다른
호웅들도 마찬가지다.
"자! 나와 대결해볼 분 없소?"
묵산은 그리도 유명한 타구봉(打狗峰)을 땅에 찍으며 고함쳤다. 내공도 마옥 못지 않게 대단한 듯 땅이 다 울렸다.
실로 대단한 위엄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호웅들은 함부로 몸을 날리지 못했다. 물론 그가 무서운 점도
있지만 역시 처음 나선다는 건 좀 그랬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질 급한 묵산은 몇 번 더 고함을 쳐댔다. 내공을 실어 지껄이니 귀가 멍멍
해지고 뱃속이 부글거렸다. 잠자코 지켜보던 마옥이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연다.
"10을 셀 동안 나오는 분이 없으면 맹주는 개방의 묵방주가 됩니다."
그가 곧 입을 열어 10을 외웠을 때였다.
"결국 내가 나가네! 어디 개방의 실력 좀 봅시다."
사람들이 놀라 눈을 치켜 떴다. 그는 묵산처럼 단상 위에 있던 자 중 하나인 용상이었다. 난주 최대의 방파 감총방
의 방주인 그였다. 호웅들은 그 모습에 눈살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호웅들은 이번엔 그가 나서길 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방과 감총방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결을 빌미로
크게 싸움을 벌일까 모두들 걱정했다.
"용방주 역시 이의가 없소. 빈도는 지켜보겠소."
마옥은 이번에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확실히 묵산이나 용상이나 둘 다 맹주가 되기엔 부족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영웅이요 호걸이었다. 묵산은 용상을 잠시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좋아! 서로 감정은 담지 말고 오로지 맹주를 위하여 정정당당히 합시다."
"내가 방금 그 말 하려고 했었소."
용상이 대답하자 묵산은 작게 코웃음치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사실 그들은 화해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날 화산
에서 얘기를 들었듯이 복차경 때문에 다시 일이 불거지고 말았다. 기껏 화해를 해놓았는데 그 일로 결국 사이가 틀
어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용상은 여전히 복차경을 옹호하여 급기야 오늘 영웅대회까지 데려오고 말았다. 아까부터
묵산은 그게 매우 불만스러웠는데 이렇게 대결한다니 참으로 좋았다.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려 하는 건 아니되, 어디
얼마나 잘났는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