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一 章. 무림산 영웅대회 2
용상도 지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난주에서까지 판치고 다니는 개방이 밉살스러웠다. 일순간 화해했다가 복차경 때
문에 일이 다시 틀어졌지만, 그 일에 대해서 별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형식적인 사과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감정은 담지 말자고 해놓고선 감정 담은 게 눈에 뻔히 보였다. 둘 다 안색이 시뻘개져서는 맹
렬히 싸워댔다. 묵산은 타구봉법을, 용상은 혼연권법을 사용하여 대결을 펼쳤다. 타구봉법은 타구봉과 더불어 개방
의 유산이요 절학이다. 이미 긴 역사와 함께 방주 대대로 전해 내려져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그 위력은 가히 천지
를 진동했다. 타구봉법, 하면 모르는 강호인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묵산은 타구봉법을 자주 쓰지 않았다. 그가 가장 애용하는 무공은 삼화무추(三華舞醜)라는 권법이었다. 본래
명칭은 삼화무추대장권(三華舞醜大掌拳)인데 그냥 삼화무추로 널리 알려졌다. 이 권법은 묵산의 사부가 되는 전대
고수이자 개방 전대 방주, 추전시(追展示)가 만든 뛰어난 권법이었다. 해서 묵산은 타구봉법을 자주 쓰지 않고도 쟁
쟁한 이름을 날렸다. 삼화무추만 가지고도 천하에 명성을 날렸으니 그리도 대단하다는 타구봉법을 쓰면 어떻게 되
겠는가. 호웅들이 그의 등장에 서늘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반면에 용상의 무공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강호인들은 감총방의 절학이 혼연권법이라는 것만 알
았다. 본래 혼연권법은 감총방 대대로 내려오는 무학이다. 개방처럼 방주에게만 전수되어 감총방 역사 백여 년임에
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용상이 방주에 오르며 혼연권법의 묘수를 빼서 제자들 모두에게 전
수했다. 그가 방주에 오른 지는 채 10년을 넘지 못했으나 이미 그 권법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알려졌다. 개방과의 충
돌 때 개방이 감총방 제자들 앞에서 힘을 못 썼다는 말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묵산은 여러 차례 타구봉법으로 용상을 공격했다. 혼연권법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개방 최고
의 무학인 타구봉법을 어찌 당하랴. 묵산은 십여 동장 붙어보고는 자신이 금새 승리할 것을 알았다. 단숨에 봉타쌍
견(捧打雙犬)의 묘로 용상의 허리를 제압하려드니 그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혼연권법의 특유한 점은 팔, 다리의
동작이 몸과 일치한다는 것이라 허리를 제압하면 자연 공격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혼연권법을 시전
하는 자는 반드시 허리를 단련하고 방어하는 연습을 가장 많이 하게 된다. 용상은 이미 감총방 역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방주고 그런 단련이면 지겹도록 많이 했다. 그럼에도 그가 손을 쓰지 못하는 건 그만큼 타구봉법이 오묘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맨손으로 대적하는데 상대가 봉을 쓰니 더 어렵기도 했다. 날아오는 봉을 손으로 막으니 따끔따끔 아팠고
그러다 보니 자꾸 피하게 되어 승패가 여실히 갈려버렸다. 용상은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여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나는 권을 쓰는데 세상에 개방 방주가 무기를 드느냐!"
묵산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던 거라 그 말을 듣자 급히 봉을 빼내었다. 실력이 부족하여 타구봉법을 이기지 못하는
건 모르고 무기 탓만 한다고 생각했다. 슬쩍 호웅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래
도 불공평한 건 맞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묵산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봉을 단상 위에 꽂아버렸다. 내공을 주입
하여 일순간 내려꽂으니 소리도 내지 않고 푹 깊이 쑤셔들어 간다. 호웅들은 그의 내공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말았
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내 권법으로 상대해주마."
묵산이 갑자기 손을 괴상하게 휘젓기 시작했다. 흐느적흐느적 힘이 다 빠진 듯, 거나하게 취해 제정신이 아닌 듯 손
을 아무렇게나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는 살짝 흔들거릴 뿐 손처럼 흐느적거리진 않았다.
점점 흔들흔들 하던 손이 자세를 잡아갔다. 그때쯤 되자 머리도 가만있지 않았다. 머리도 빙글빙글 제자리를 못 잡
는다. 이미 천하에 명성을 떨친 삼화무추대장권이 시전되는 것이다.
삼화무추, 세 개의 꽃이 술에 취해 춤을 춘다는 말이다. 세 개의 꽃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양손과 머리였다. 과연
그것을 말해주듯 이미 묵산은 공격에 들어갔다. 양손으로 종잡을 수 없는 해괴한 공격을 가하더니 툭하면 머리를
들쑤셔 정신을 혼란시켰다. 두 손은 함께 하되 머리는 따로 놀고, 용상은 그에 하나처럼 움직이는 혼연권법으로 대
항했다.
삼화무추의 진수는 바로 머리에 있다. 머리는 양손의 중심이요 이를 조정하고 혼란시키는 원흉이었다. 삼화무추가
진정 무서운 건 그 머리 때문에 정신이 사납다는 것이다. 실제로 머리는 혼란만 시키고 양손을 조정하듯 움직일 뿐
딱히 공격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묵산이 좌우 손을 흔들며 다시 공격을 가했다. 왼손이 가슴을 후리고 오른손이 허
리를 후리며 머리통이 기울며 용상을 압박한다. 용상은 이미 들은 바가 있어 함부로 머리는 공격하지 않았다. 몸을
옆으로 돌리며 일순간 정면으로 일 권을 내질렀다. 삼화무추의 시전자에게 절대 머리는 공격할 수 없다. 비열한 짓
에 연연하지 않는다 해도 결과적으로 공격하면 낭패를 보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머리를 들이미는데 그에
대한 방비가 없다면 말이 안 된다.
몸을 돌려 일 권을 내지르니 묵산은 머리통을 밑으로 더 후려 박았다. 한 다리를 뒤로 빼고 허리를 굽히자 머리가
단숨에 용상의 팔로 근접했다. 저 머리에 맞으면 아프지는 않아도 하나 하나가 요혈을 노려 무섭기 짝이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팔을 빼며 동시에 몸도 뺐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 따로 없었다.
악만풍은 그들의 싸움을 보며 매우 감탄했다. 저런 대단하고도 괴이한 무공이 다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더구나
두 사람이 승패가 쉽게 갈리지 않아 더욱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는 연경후나 마보강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이미 함종문 상승의 무학 이화접목을 익히고 있지만 이런 괴이한 무공을 접하기는 처음이었다. 모두 눈을 밝히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한 식경이 다 지나도록 그들의 싸움은 끝을 맺을 줄 몰랐다. 둘 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묵산의 옷에선 땀에 젖는
때가 줄줄 흘러내렸다. 단상 위로 거무튀튀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 있다간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단상
위가 구정물로 가득해질 것 같다. 마옥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중지시키는 게 좋으리라 싶었다.
싸움이 점점 감정적으로 변하는 건 그도 알고 있었고 또 그러면서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만하시오. 승부가 갈리지 않는구려."
마옥이 한 발짝 나서며 소리쳤는데 그들은 듣지 못한 듯 싸움만 계속했다.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옆에서 그가 말하
긴 했지만 둘 다 감정이 있어서 함부로 손을 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내공을 실은 음성
으로 또 일갈했다.
"그만하시오!"
그의 내공은 과연 대단하다. 한번 고함치니 단상이 다 흔들렸다. 내공면에선 대단히 심후하다는 묵산마저도 그의 고
함에 살짝 몸을 떨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멀리 떨어지고 있었다. 마옥은 그제야 안색을 살짝 풀
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과연 절세의 무공을 지니신 분들이오. 아무리 봐도 승부가 갈리지 않을 듯해 이렇게 끝낼 수밖에 없었소."
"승부가 갈리지 않다니? 이보쇼 단양자(丹陽子). 이제 좀 있으면 승부가 갈릴 것이오."
묵산이 안타깝다는 듯 즉각 말했다. 그러자 용상도 가만있지 않는다.
"정말 안타깝군! 단양자가 말리지 않았다면 내가 이겼을 텐데."
"뭐라? 그럼 내 무공이 당신만 못하다는 거요?"
그의 말에 묵산이 따졌다. 아무리 봐도 역시 감정이 깊이 담긴 말투들이었다. 마옥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
다.
"내가 보기엔 두 분의 대결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소.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립시다. 두 분은 승부가
나지 않으니 일단 들어가시고 나중에 다시 오를 수 있소."
마옥은 과연 시비를 잘 가려 공정하게 판단했다. 둘이 비겼으니 다음에 다른 자가 올랐을 때 또 싸울 수 있어야 했
다.
"자! 그럼 두 분은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다른 분이 오르시길 바랍니다. 오르실 분?"
그의 외침에 모두들 입을 콕 다물고 말았다. 저마다 서로의 눈치를 보고 함부로 나서길 꺼려했다. 먼저 나서는 게
불리하다는 건 삼 척 동자도 알 것이다.
한동안 사람들이 나서지 않자 마옥은 다시 한번 말문을 열려고 했다. 장중이 고요해진 가운데 갑자기 누군가 나섰
다.
"이렇게 됐다면 내가 나서보고 싶군. 사형 괜찮죠?"
군웅들이 보니 성격 괴팍하기로 유명한 화연철이었다. 그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는 맹주
감이 아니었다. 마옥은 그를 보며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인자하고 공정하기로 유명한 청청인도 용정학이 가만
있는 걸 보았다. 화연철이 괜찮은가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화대협이라면 뭐 이의가 없소."
마옥은 이미 청청인도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화연철이 나서는데 말리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 생
각했다. 그리고 화연철도 성격이 좀 괴팍하고 급할 뿐 악한 무리는 아니라 이의를 달지 않았다. 군웅들도 용정학의
반응을 보며 마옥의 말에 따지지 않는다.
"오를 분은 어디 계시오?"
화연철이 소리치자,
"화선배님. 후배가 나서도 되려는지요."
군웅들은 화연철을 선배라 부르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는 마치 마옥과 화연철의 의사를 묻는 듯 말하
며 단상 가운데로 뛰어들지 않고 단상 끝에 올라섰다. 자신이 맹주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내려가겠다는 정중한
자세였다. 악만풍은 그를 보고 가볍게 낯빛을 바꾸었다. 좀 전에 말한 사람은 바로 연경후였다.
"아니 자네가? 자네라면 좀 힘들 텐데."
화연철은 저런 후배와 대결해야 한다는 게 불만스러웠다. 그 역시 무학에 심취하여 사실 이곳에 오른 것도 맹주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겨뤄보고 싶어서 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기껏 오른 자가 함종문이라는 작은
문파의 장문인도 아닌 대제자도 아닌 이제자라니. 얘기를 들어 사실 함종문 제자 중 가장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
지만 역시 후배는 후배였다.
"아. 함종문의 조장문을 대신해서 온 연소협이구려."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맹주에 오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나 처음 강호출도하여 제 자신을 주체못하고 오르고
말았습니다. 자격이 없다면 내려가겠습니다."
마옥이 아는 척 하자 연경후는 정중하게 겸손을 보여주었다. 군웅들은 그의 태도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처
음 강호출도 했다며 자신을 주체못했다는 말에 모두들 과거를 떠올린 셈이다. 마옥도 그리 생각했으나 맹주 선출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먼저 뒤에 묵묵히 서있는 유처현을 불렀다.
"사제. 나는 연소협에 대해 아는 바가 없네. 자네는 함종문에 가봤으니 혹 뭐 하는 바가 있는가?"
마옥의 말에 그는 웃었다.
"연소협은 심기가 곧고 생각이 깊어 맹주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함종문에서 본 바라 확신
하고 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그리 따르겠네."
군웅들은 유처현의 칭찬에 새삼 연경후를 쳐다보았다. 연경후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있
었다. 마옥이 말한다.
"사제의 말에 제 생각도 그리 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유사제는 거짓말을 안 해서 믿고 있습니다. 일단 저는 이의
가 없고 군웅분들 중 혹 연소협에 대해 아는 분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모두들 서로만 바라볼 뿐 나서는 자가 없었다. 대천산에 함종문이 있다는 걸 그들은 모두 처음 알았는데 어
떻게 연경후를 알겠는가. 하물며 장문인도 아니고 이제자며 설령 안다해도 유처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박할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전진 칠자는 매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없다면 이의가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말이 없자 마옥은 연경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경후가 금방 단상 중앙으로 날아든다.
"화선배님. 오늘 후배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자네가 정 그렇다면야 나도 어쩔 수 없지 뭐."
화연철은 불쾌한 듯 대강 대답하고는 금새 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허나 선배로서 선공은 못하고 공격을 기다렸
다. 연경후도 그의 뜻을 알고 검을 뽑으며 덤벼들기 시작했다.
연경후의 무공은 과연 함종절검법이었다. 그는 매우 성장해있었다. 진양이 성장하고 마보강이 성장하듯 무공이 대단
해졌다. 사실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중년인이지만 자질이 뛰어나 더욱 대단해진 것이다. 악만풍은 이미 그와 거리를
없애며 함종절검법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진양이 사정이 있어 3초밖에 익히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검법에
있어서는 연경후만큼 뛰어난 인물이 없다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허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눈을 크게 뜨고
대전장을 지켜보았다.
화연철은 이미 명성이 쟁쟁한 인물로 연경후와는 배분 차가 그리 크진 않지만 확실히 맞서기는 창피한 일이었다.
그는 그게 불만스러웠다. 한번 다른 파 장문인 정도와 싸울 줄 알았는데 고작 나오는 인물이 함종문의 이제자라니.
그러나 십여 동작을 붙어보고 나선 생각이 뒤바뀌었다. 연경후를 가볍게 상대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함종문 무공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사실 함종문의 무공을 본 일도 그리 자주 본 게 아니었고 검법은 더
욱 보지 못했다. 함종절검법은 함종권법과 다르게 매우 뛰어나다. 진양이 자주 선보이는 권법과는 다르게 사량발천
근을 기본으로 시작하여 최후 초식을 익히며 이화접목을 배우는 대단한 수법인 것이다. 조덕에게 그만한 상승무학
이 있다는 게 의문스러워도 사실은 있었다. 조덕도 이화접목은 대성한 게 아니라서 잘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강호를 잘 돌아다녀 세상일에 대해 많은 걸 알았기 때문에 함부로 모든 무공을 드러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하던 그
였다. 이화접목은 고이고이 감춰둔 함종 무공의 최고 요결인 셈이다.
그러니 화연철이 이화접목에 대해 들었을 리가 없다. 그도 이화접목이란 무학이 있어 대단히 뛰어나다고는 들었지
만 맞서기는 처음이었다. 연경후는 지금 검법을 펼치며 검으로 이화접목의 수단을 최대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웅들은 듣기만 하던 이화접목을 보아 모두 멍해졌고 마옥 등 전진 칠자도 어이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물
며 당사자 화연철이랴.
화연철은 청운적하검과 수양대구수를 잘 혼합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실제로 이만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막기 힘들
정도의 공격이었다. 청운적하검 하나만으로도 무서운데 중간중간 갑자기 손이 튀어나와 수양대구수를 펼친다고 생
각해보라. 동시에 두 가지를 펼치지는 못해도 어느 순간 공격이 바뀔지 모르니 대단히 무섭다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연경후가 이화접목을 아는 한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연철의 움직임만 따라잡으면 되는 것이다.
일단 움직임을 잡아 공격을 알 수 있다면 함께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천 근의 힘을 이백 근으로 줄여버릴 수 있었
다. 그리고 그렇게만 되면 쉽게 역습을 가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지금 싸움은 백중지세였다.
화연철은 너무나 창피하여 분통이 다 터졌다. 그가 살면서 어찌 이런 모욕을 당해봤겠는가. 연경후는 사력을 다해
싸울 뿐이지만 화연철은 그를 처리하지 못하고 도리어 백중지세니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계속 공격해도 힘을
중화시키며 역습만 노리는 연경후가 얄미워죽겠다.
"이놈아! 언제까지 그 방법만 쓸 것이냐?"
급기야 대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러자 연경후도 느껴지는 바가 있는 듯 이화접목의 사용은 줄이며
대신 사량발천근을 이용해 새롭게 공격에 나섰다. 이렇게 되자 또 그만큼 우스울 수가 없다. 이화접목으로 백중지세
를 이루더니 사량발천근으로 하며 맹렬히 공격을 가하자 또 백중지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군웅들은 함종문의 무공
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화연철만 개망신을 당하고 있었다.
연경후는 풍리초절(風裏草切), 회풍불절(回風彿切)과 같은 함종절검의 뛰어난 초식을 자주 사용했다. 거기에 사량발
천근을 더하니 도대체 백중지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화연철의 무공이 뛰어나서 백중지세지 그가 조금만 뒤쳐졌
다면 정말 개망신을 당할 뻔했다. 고로 연경후가 상승 무학으로 화연철과 동급을 이루는 거지만, 화연철 역시 자신
의 모든 무공을 드러내어 연경후와 동급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들의 싸움은 온갖 찬사와 감탄 속에 다시 시간이 흐
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되자 연경후의 검법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힘이 드는 듯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그렇게 잘 쓰던 사량발천
근도 종종 쓰지 못하며 피하는 경우가 다발했다. 아무래도 승패는 명백히 기운 듯 했다. 순간 연경후가 하우직절의
묘를 살리는데 갑자기 나타난 화연철의 손에 그만 완맥을 잡히고 말았다. 너무나 순식간이라 과연 화연철이 보통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었다. 완맥을 잡힌 연경후는 온몸에 맥이 빠져 검을 떨구고 만다.
"됐소 화대협. 연소협은 아무래도 패한 듯 싶소."
화연철의 성격을 잘 아는 마옥은 낮게 미소하며 말을 꺼냈다. 화연철은 완맥을 붙잡힌 연경후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용정학의 눈빛을 보고 금방 입을 다물었다. 연경후는 사정을 봐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단상 아
래로 내려갔다.
"자! 화대협이 이겼소. 다음 나설 분은 어디 계시오?"
지금은 절호의 기회다. 화연철이 힘이 빠져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못난 실력으로도 그를 이길 수가 있었
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자연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또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 더구나 마옥과 군웅
들이 인정을 안 해주면 대결을 벌일 수도 없어 창피를 무릅써야만 했다.
그러다 누군가 고함치며 단상 위로 올랐다. 알고 보니 하북(河北)에서 이름을 꽤나 날린다는 소영랑(小令郞)이란 사
람이었다. 나이 40세로 제법 대협이란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다. 군웅들은 그에 이의를 달지 않으면서도 치사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시 대결은 진행되고 있었다.
형란은 지금까지 이 대회를 잘 보고 있었다. 그러나 연경후가 패하고 내려가자 더 볼 흥미를 잃어 숙소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깨가 힘없이 늘어진 게 아무래도 무슨 근심이 있는 듯하다. 악만풍이 그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으나
이유를 알만하여 굳이 잡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대결들이 흥미로워 함부로 눈을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방은 문인능과 함께 쓰는 2층의 구석진 방이었다. 창문이 작지만 일단 열고 보면 영웅대회 전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영웅대회에 대해 대단한 흥미가 사실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형웅강에게 대협과 영웅의 도를
가르침 받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런 영웅보다 한 사람이 더욱 중요했다. 그런데 그는 매정하게
도 아직 오지 않는다.
뭐를 생각하고 떠났는지 모습도 보이지 않고 어제부터 열심히 찾아봤는데 코빼기도 비춰지지 않았다. 어젯밤 자기
전에 문인능의 말이 있어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역시 보이지가 않으니 걱정이 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안
보이니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오고 뭔가 허전하여 침울한 마음이 절로 생기고 있었다. 문인능이 어젯밤 한 말은,
<그는 반드시 화주대도 석앙으로 변장해올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매우 그럴 듯 했다. 화주대도 석앙이라면 분명 영웅 호한은 아니나, 명성은 제법 있어 영
웅 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진짜 석앙이 나타나지 않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방립 쓴 남자는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다. 가끔가다 깊게 눌러 쓴 몇몇 사람들을 보았지만 여자가 대부분
이고 나머지는 진양도 아니었다. 생각하니 우울해져 또 한숨만 나온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했다. 교애산이었다. 미남이라고 할 만한 얼굴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신비감이 느껴지
는 남자였다. 말투가 경박하다가도 다시 묵묵하고 침울해졌으며 매우 고집스러워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허나
한번 침울해지면 무슨 세상이 무너진 듯 우울하고 슬픈 눈으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남이 불러도 듣지 못하
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 눈빛으로 돌아볼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어찌나 슬픈 눈인지 참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곁에 있으면 좋기만 했다. 함께 이곳까지 오면서 그가 슬퍼하는 걸보고 힘들어하는 걸 많이 보았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서 기뻤다. 화산 도림에서 함께 놀러 다녔던 기억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며 그 일만 떠올리면 밤잠도 못
이룬다. 때문에 지금은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가 옆에 없고 얼굴 한번 볼 수 없으니 걱정과 안타까움만 머리에
가득했다.
문득 함성이 들려 그녀가 대회장을 돌아보았다. 소영랑이란 사람은 화연철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패배한 모양이
었다. 새로 사람을 오르라고 하니 또 다른 사람이 오른다. 이대로 가다간 화연철이 맹주 자리에 앉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연철이 앉든 마옥이 앉든 지금의 그녀에겐 별로 의미가 없어 금방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침 창가로 웬 새 한 마리가 들어앉았다.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 듯 창가에 엎드린 형란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도
대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잡아먹히고 싶은가보다. 형란은 그 새를 보자 갑자기 희구가 떠올랐다. 이대가장
이 불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희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번 찾아보려고 구적을 열심히 불어
본 적도 있지만 희구는 오지 않았다. 그 생각 하니 한층 더 기분만 우울해진다.
왠지 바람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직감이랄까. 휑하니 부는 바람이 지금껏 불던 가을 바람하고는 느낌이 다른 듯
했다. 황색빛깔을 가지며 휘날리던 낙엽도 예전처럼 춤을 추지 않는다. 막 이상하게 생각하는 때 무림산 정문이 시
끄러웠다. 군웅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곧 시선을 돌리다가 순간 안
색이 새파래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전진교 도사들이었던 것이다. 맨 앞장서서 오는 사람은 당무요, 옆에 있는 사람은 당주고다. 그
뒤를 따르는 어여쁜 여인은 당유민일 테다. 그 세 명의 뒤로 왕령과 도사가 십여 명이나 따르고 나가는 길 또한 십
여 명이 막아버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하며 군웅들도 모두 웅성거리는 상황이었다. 형란은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악만풍과 문인능, 가량이 있는 곳을 보니 그들도 사태를 안 듯 급히 몸을 숙이고 있었다.
당무, 당주고, 당유민. 이들 셋은 왕령과 도사 십여 명을 단상 밑에 내버려두고 대담하게 단상 위로 올랐다. 마옥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가까이 가며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헌데 자네들이 여기는 웬일인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하려 급히 달려왔습니다."
당무가 대답했다. 안 좋은 소식이란 말에 전진 칠자가 금방 몰려들었다. 그들은 뭔가 직감한 모양이었다. 마옥이 떨
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게 무엇인가?"
그에 당무는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여운을 두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단상 가운데로 향했다. 좀 전까지
대결을 펼치던 화연철은 이미 한쪽으로 물러서 있는 상황이었다. 당무는 한번 더 길게 한숨을 뽑더니 마옥 등을 돌
아보며 무릎을 꿇었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상황이라 군웅들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옥 등 전진 칠자도 놀라
일으키러 달려가는데 당주고와 당유민도 무릎을 꿇고 따라온 전진 도사들마저 무릎을 꿇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
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어서 일어나게!"
마옥이 소리치며 모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당무는 고개도 들지 못하며 침울해 보였다. 전진 칠자는 그 모습들
에 더욱 가슴이 떨려 함부로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실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답답하게 하지말고 어서 말해보게!"
유처현이 달려들며 묻자,
"옥.. 옥양자 왕처일, 왕사숙조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장중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해졌다. 모두 침 한번 삼키지 않고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순식간
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다들 어이가 없어 입만 쩍 벌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만 머리에 인식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인물은 마옥이었다.
"그.. 그럴 수가. 왕사제가 왜?"
그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이 그랬고 목소리가 떨리는 건 당연했다. 허나 그래도 역
시 수도가 깊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매우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 쳐죽일 놈이.. 왕사숙조를.."
"그 쳐죽일 놈이 누구냐?"
학대통이 껴든다.
"성은 진이고 이름은 양이라 하여 천하의 죽일 놈입니다! 그놈을 죽여 왕사숙조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당무가 부르짖듯 소리치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전진 칠자는 그런 이름을 들어보지 못해 저희들끼리 진양 진양하고
되뇌고 있었다. 군웅들도 들어본 일이 없어 저희끼리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서며 고함쳤다.
"진양이란 놈을 반드시 잡아 복수합시다!"
"그래. 반드시 쳐죽여야겠다."
한 사람이 고함치자 사방에서 찬동하는 외침이 터졌다. 모두 진양울 죽이자는 악독한 말들이었다. 마옥은 한동안 아
무 말 없이 서있더니 당무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사제가 죽은 걸 보았는가?"
당무가 고개를 흔든다.
"저희는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보셨답니다."
"당사질이? 그렇다면 어떻게 사제가 죽임을 당했다던가?"
마옥의 어투로 보아 조금은 진정이 된 듯 싶었다. 과연 이름을 날리는 도사답다. 당무도 은근히 감탄하며 대답했다.
"사숙조께서 종남산에 도착한 후 아버지와 함께 산을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진양이 나타나서 사숙조를 기
습했습니다. 경공이 뛰어나 매우 빠르게 암습했기 때문에 왕사숙조와 아버지도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것입니다."
"그 자의 이름이 진양이란 건 확실한가?"
"일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안 좋은 인물로 생각했는데 급기야 그런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듣는 군웅들은 분개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악만풍을 비롯한 진양 일행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들이었다.
저희들이 죽여놓고선 진양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악만풍은 참지 못하고 몸을 떨더니 한순
간 나가려고 했다. 급하게 문인능이 잡자 그는 억지로 분노를 누르며 입술까지 깨물어댔다. 피가 턱을 타고 뚝뚝 떨
어진다.
"진양이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그 자를 찾아야 하네."
"반드시 죽여 복수해야 합니다."
"아니 죽여서는 안되네. 일단 잡아서 진상을 규명하고 이유를 묻겠네."
"허나 왕사숙조를 죽인 쳐죽일 놈입니다!"
당무는 끝까지 진양을 죽여야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옥이 일순 엄한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당무도 시선을 깔았
다. 그러나 군웅들은 모두 당무의 생각과 같았다. 이 상황에 당무의 말에 찬동하지 않는 인물이 어디 있으랴.
"오늘 매우 안 좋은 소식을 접했습니다. 왕처일 사제가 죽임을 당했다니.. 어쩐지 연락이 없더라 했었습니다."
마옥의 말에,
"맹주를 뽑고 그 자부터 죽입시다!"
"죽여야 하오! 감히 왕선배님을 죽이다니."
"그놈이야말로 역적일 것이오."
"가만둬선 안 돼! 그놈부터 찾읍시다."
군웅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모두들 단단히 분노한 모양이었다. 마옥은 고개를 젓는다.
"죽여선 안됩니다. 그를 찾는 분께선 반드시 죽이지 말고 사로잡기를 부탁드립니다."
군웅들은 마옥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던 악만풍은 당광의 계략을 알 수
있었다. 진양을 비롯한 자신들 일행은 그들의 사정을 안다. 당광이 왕처일을 죽였으며 가량을 죽이려 했고 못된 횡
포를 일삼으며 전진교를 거머쥐려 한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악만풍 등의 이름은 그들이 모르고 있을 것
이다. 진양은 예전부터 그들과 사이가 안 좋아 여러 번 부딪쳤고 왕령이 또 그쪽으로 넘어갔으니 필시 진양의 이름
만 아는 것이다.
때문에 진양만 얘기하면 그 일행은 모두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당무가 자꾸 죽이라 강조하는 것도 단숨에 진양과
자신들을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는 계획임이 틀림없었다. 좀 전 정문에서 전진 도사들이 나타나며 부렸던 소란을 떠
올렸다. 갑자기 시끄러워 돌아봤는데 방명록을 뒤척거리는 걸 보았다. 그건 분명 진양의 이름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
리라.
생각하면 할수록 악만풍은 분통이 터졌다. 객잔 창문으로 이야기를 듣는 형란은 어이가 없어 입만 벌렸고 연경후와
마보강 문인능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황당해했다. 그러나 지금 나서서 사실을 알리겠다는 건 미친 짓이다. 군웅들
의 분노가 고조된 상황이라 잘못하다간 돌을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같은 무리라며 반드시 죽이려 들 것이다. 마옥
등이 있다지만 저 수많은 군웅들의 분노를 어찌 억누르겠는가.
다행히 진양은 곁에 없었다. 정말로 생각해보면 가슴이 철렁한 경우다. 진양이 만일 명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
찌 되었을까 떠올리니 참으로 뜨끔하고 가슴이 떨렸다. 다행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화주대도로 변장했을 테니, 그
도 어디선가 이 광경을 보며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번 변장한 모습을 당무 등이 보긴 했지만 진양은 알아서
숨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악만풍은 그가 무사하길 기원하며 한편으로 왕령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대단한 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대회장에 온 강호의 미녀들도 매우 많지만 왕령만큼 대단한 미
색의 소유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방홍미녀도 그에 못 미치고 문인능도 그에 못 미친다. 저만하면 실로 천하제일미
(天下第一美)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 했다. 하지만 악만풍은 그런 미색 때문에 그녀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그
가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는 건 바로 태도다.
지금 진양이 말 같지도 않은 오인을 받는데 그녀는 좌시하고만 있었다. 아무리 저들 편으로 넘어갔다 해도 이건 경
우에 어긋났다. 악만풍은 모르는 것이다. 왕령이 진양에게 넘겨준 봉의 의미를, 또한 그녀가 얼마 전 당주고와 혼인
했다는 사실을. 그런 걸 전부 모르는 악만풍은 그녀가 천하제일미면 무엇하냐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한동안 말들이 없던 대회장에서 다시 마옥이 말문을 열었다.
"계속 이어서 영웅대회를 진행하겠소. 우선 맹주를 뽑으면 그 맹주는 금국에 대항하는 걸 첫째로 하며 둘째로 진양
이란 자를 사로잡아야 하오."
군웅들이 동시에 <옳소!>하고 외친다. 금국이니 진양이니 지금 그들에겐 모두 분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 외침에선 어딘가 모를 살기마저 느껴졌다.
그런 모습에 형란은 이미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생각했다. 당무를 비롯한 그
들이 너무 미웠고 진양이 불쌍하여 눈물이 샘솟았다. 어릴 적 형웅강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진실과 거짓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때문에 거짓을 일삼는 자는 반드시 후회한다.>
형란은 그 말을 기억하며 억지로 제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가슴에 얹으려는 손이 덜덜 떨려 오는 걸 그녀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진양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화주대도로 변장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혹 무슨 일이 생겨
정체라도 드러나면 어찌할까. 일단 한번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자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대회장에선 다시 맹주를 뽑는 일이 진행되려는 듯 했다. 형란은 아까부터 나서서 따지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
라며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악만풍 등 모두가 몸을 떨면서도 나서지 않아 그녀도 함부로 나서지는 않았
다. 지금 맹주를 뽑으려 진행하고 뽑힌 맹주는 진양을 사로잡아야 한다니 안타까움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분한 마음
을 뒤로하며 악만풍처럼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