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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十 二 章. 고난의 퇴각로 1 (47/90)

                                  第 二 十 二 章. 고난의 퇴각로 1

모든 상황은 당광이 계획했던 대로 흘러갔다. 분개한 사람들 속에 맹주 선출은 진행되었다. 군웅들은 마옥이 나서주

길 원했다. 고인이 된 왕처일의 사형이요 전진 칠자의 대사형이 아닌가. 현재는 전진교 교주로 이미 사해에 이름이 

알려져 있어 군웅들은 그가 나서주길 원했다. 마옥은 한참을 거절했으나 군웅들이 지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나서고 

말았다. 마침 오른 자는 화연철이었다. 

화연철은 그와 대적할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싸워서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연경후부터 시작해서 

여러 명을 누르고 계속 대결을 펼치고 있었지만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군

웅들의 기세나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그와 맞서면 좋을 게 없을 듯 했다. 명목상으론 맹주 선출을 위한 대결이라 

해도 하다보면 좋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 용정학도 그리 생각하고 화연철을 불러들였다. 

"저는 감히 마교주께 맞설 수 없어 이만 물러서겠습니다." 

화연철이 마옥을 앞에 두고 가볍게 읍 했다. 군웅들은 그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무작정 박수만 쳐댄다. 

이만하면 이제 맹주는 선출된 거나 다름없었다. 마옥은 무안한 듯 두 손을  들어 진정시키려 했지만 군웅들은 듣지 

않고 더욱 크게 박수를 쳐댔다. 한참 후에야 진정이 되자 그가 입을 연다. 

"손 한번 쓰지 않고 맹주에 앉는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결을  펼치지 않았으니 화대협을 맹주로 

합시다." 

그 말에 군웅들이 저마다 외친다. 

"에이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맹주감은 옥양자 뿐이오!" 

"옥양자가 주최했지만 우리 모두가 원하니 맹주에 오르시오!" 

"화대협은 지쳐서 물러났으니 맹주를 하세요!" 

사방은 마옥이 맹주가 되는 걸 찬동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마옥은 다시 또  한참을 거절했으나 군웅들이 듣지 않

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제가 감히 맹주에 앉겠습니다. 모든 일은 공평하고 진실 되게  처리하며 금국에 이 한 몸 불사르겠습

니다." 

마옥의 외침에 비래봉이 다시 우렛소리로 들끓는다. 

"그럼 먼저 왕사제의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금국에 대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은 알고 있지만 그 일은 섣불리 

할 것이 못되어 가벼운 일부터 처리하겠습니다." 

사방에서 또 옳소, 하는 외침이 터졌다. 그가 가볍게 읍하며 단상에서 내려가자 또다시 우레 같은  함성이 무림산을 

뒤흔들었다. 금국에 대항하고 악묘가 생긴 걸 축하하며 열린 중추절, 무림산 비래봉의 영웅대회는 마옥을 맹주로 하

고 먼저 진양을 잡기로 결정을 보며 하루만에 막을 내렸다. 

악만풍 등은 영웅대회가 끝나고 최대한 전진 도사들의 시선을 피해  무림산을 빠져나왔다. 진양의 소식이 궁금했으

나 끝내 나타나지 않아 더욱 걱정이 치솟았다. 화주대도로 변장했으며  또 임기응변이 뛰어나니 무사하겠지만 아무

래도 걱정이 들었다. 일단 무림산에서 벗어나 임안으로 향하지 않고 바로 남양으로 향했다. 사방으로 군웅들이 흩어

질 테니 하루속히 멀리 떨어지는 게 좋았다. 재수 없어 당무라도 만나는 날에는 그야말로 억울한 개죽음을 당할 것

이다. 진양은 어떻게 됐는지 시일이 한참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남양으로 향한 지 사흘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중추절이 이제  막 지나니 날이 점점 추워지는 듯 날씨가 서늘했다. 

바람이 불어 여인들의 머리가 흩날리고 옷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악만풍 일행은 그동안 험로를 택해 이동했다. 임안

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절강 지방을 벗어나자 그제야 안심할 수 있어 대로를  통해 걸음을 옮겼다. 남양에 당도하려

면 약 사흘은 더 가야할 듯 했다. 절강 지방에서 벗어나서 대로로 향하니 지난번과 같은 불편은 적어졌다. 중간중간 

객잔에 들려 푹 쉬기도 했고 날이 좋은 날은 말을 치지 않으며 천천히 이동했다. 

형란만 제외하고는 모두들 편안해 보였다. 가끔 농담도 주고받고  이미 무림산에서 일은 잊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잊었겠는가. 문인능만 제외하고는 억지로 긴장을 풀어보려는 거짓 웃음과도 같았다. 형란은 그런  생각

을 하지 못해 그저 우울한 표정으로 맨 뒤에서 따라다녔다. 

그나저나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문인능은 날씨가 좋다며 마을에 들려서 놀다 가기를 원했고 모두들 

이의가 없었다. 허나 근처에 마을을 찾아보니 작은 촌  하나만 보였다. 모두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농부들이 

모인 촌이라 뭐 구경거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좋은 거라면 산과 들 경치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그 촌 거리를 걷던 악만풍은 먼저 객잔을 잡으러 향했다. 다행히 이런 촌에도 객잔은 있었다. 비록 객잔이라 하기에 

흠이 많을 정도로 작고 초라한 곳이었지만 하룻밤 묵고 떠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악만풍 등은 방을 세 개나 잡고 

대청으로 나와 간단한 요기를 할 참이었다. 

"소주님. 여기 객잔이 있어요." 

"너무 초라한 걸. 하기야 이런 촌에 뭐가 있겠냐." 

문득 문 밖에서 두런대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악만풍은 그 목소리들이 매우 귀에 익다고 생각했다. 

"헤헤. 뭐 어때요? 어차피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문 너머로 인영이 다섯 개나 보였다. 하나는 크고 네 개는 작다. 악만풍은 그걸 보며 금새 그들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낮게 웃을 때쯤 그들이 들어섰다. 문인능과 형란은 낯빛이 가볍게 변하고  가량도 놀란 듯 했다. 연경

후와 마보강만 누군지 몰라 형란 등의 반응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아니? 악대협이시군요." 

그들은 바로 사공환 무리였다. 사공환과 네 명의 방홍미녀다. 지금 악만풍에게 아는 척 한 소녀는 아북이었다. 방홍

미녀 중 막내로 항상 촐싹대면서도 말발이 대단히 뛰어난 소녀였다. 지난날 청루에도 당당히 들어섰던 바로 그녀다. 

"그래 이렇게 또 만나는구나." 

"일행이 많아졌군요. 형아가씨랑 문인아가씨도 있네. 어? 가아저씨도 있다." 

그녀는 그게 뭐가 신기하다는 건지 손뼉을 치며 놀라워했다. 문인능이 영 아니꼬운 듯 눈썹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죽겠네. 저리 가지 못해?" 

"문인아가씨는 꼭 나만 보면 뭐라고 한다. 피." 

"너.." 

문인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보강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억지로 앉히자 비소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들은 예전에 이대가장과 원한이 있던 자들이에요. 저기 남자가 보이시죠?  석앙보다 더러운 호색한에 무공도 형

편없지만 저 애들 때문에 이름이 좀 알려졌죠." 

마보강은 웃음이 터지는 걸 참았다. 문인능의  나이와 그녀들의 나이는 어슷비슷해 보이는데  그녀들을 애들이라고 

하니 우스웠다. 석앙보다 더러운 호색한이란 말에는 그저 쓴웃음만 머금었다. 그녀가 석앙을 봤을 리는 없고 은근히 

진양을 모욕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문인아가씨. 일행이 많다고 말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소녀가 말하자, 

"흥. 누가 말을 함부로 한다는 거냐? 저리 썩 꺼지지 못해?" 

"헤헤. 저희는 여기에 앉을 거예요." 

문인능의 반 협박에도 그녀는 웃으며 그들 바로 옆에 앉았다. 악만풍 일행은 큰 탁상을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 옆으

로는 좀 작은 탁상이 놓여져 있었다. 문인능이 다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선다. 

"죽고 싶으냐?" 

"문인아가씨. 실력도 없으면서 큰 소리 치지 말아요. 호가호위(狐假虎威)가 정말 따로 없네요." 

"뭐라고?" 

문인능이 검을 뽑을 기세로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정작 검은 뽑지 못했다.  사실인즉, 그녀의 실력으론 그 소녀조차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소녀는 그걸 보며 깔깔거린다. 

"실력이 없으면 그만둬요. 악대협이  나서신다면 모를까, 하지만 대협이라  먼저 시비는 안 거시겠죠.  그렇죠 악대

협?" 

"훗. 그래 네 말이 맞다." 

악만풍은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사공환이 그녀를 붙잡으며 한마디한다. 

"북아. 그만해라." 

"네 소주님." 

소녀는 과연 사공환의 말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문인능이 비꼰다. 

"흥. 호색한 말은 잘도 듣네." 

이 매우 의미심장한 말에 소녀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방홍미녀의 첫째인 아동(兒東)이 나섰다. 

"오늘 문인아가씨의 기분이 별론가 보군요. 계속 시비를 거니 참 재밌어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뭐야? 그럼 내가 호가호위한다는 말이냐?" 

"저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오늘 문인아가씨가 유난히 말이 많은 것 같아서요." 

문인능이 눈을 부라렸다. 생각 같아선 검을 뽑아 한 대 후려주고 싶었지만 실력이 안 됨을 알고 마보강에게 매달렸

다. 

"마공자. 저들이 절 모욕하고 있어요. 혼내주세요." 

마보강은 당황했다. 지금 이리 된 건 명백히 그녀의 잘못인데 편을 안 들어주면 그녀가 화낼 것 같았다. 그가 어쩌

지 못하자 소녀는 재밌다는 듯 킥킥거렸다. 

"뭘 웃어?" 

"재밌잖아요. 공자께선 매우 당황하시고 있군요." 

소녀가 말을 마치고는 또 킥킥거린다. 사공환이 그녀를 향해  뭐라고 하자 그녀는 또 입을 다물어버렸다. 문인능이 

마보강을 볶는다. 

"마공자. 정말 가만있으실 거예요?" 

"아.. 아니.. 전.." 

악만풍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능아. 그만해라." 

"그만 하라니요? 저들이 절 모욕했는데 제가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어요?" 

그녀는 이제 악만풍 말도 듣지 않는다. 악만풍은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만 뱉었다. 마보강은 눈치를 좀 보고는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문인능이 달달 볶아서 매우 무안하지만 싫지도 않아 그녀를  위해 좀 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

했다. 그는 방홍미녀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문인소저가 오늘 기분이 별롭니다. 소저들은 그녀의 화를 돋구지 말아주세요." 

이건 한마디하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수준이다. 소녀는 또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문인능이 달려와 소리친다. 

"휴! 마공자. 저런 더러운 애들에게 무슨 예의를 갖춰요?"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문인능이 또 한숨을 내쉰다. 

"쟤들은 방홍미녀라는 명칭이 있어요. 항상 사공환 저  호색한만 졸졸 따라다니는 애들이에요. 저 사공환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요?" 

"사공씨라면 혹시 전대에 유명한 고수 사공유의 후손?" 

"잘 아시는군요! 그래요. 저 자는 사공유의 후손이에요." 

마보강과 연경후는 적지 않게 놀랐다. 사공유라면 천무대협과도 인연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이미 오

래 전 조덕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 무공이 대단하겠군요." 

"푸하하." 

마보강의 말에 문인능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참을 배꼽이 빠져라 낄낄거리더니 겨우 숨을 고르게 쉬며 입을 

열었다. 

"사공씨 가문이 멸한 건 알죠? 그들이 멸하면서 사공환은 무공을  배우지 못했어요. 마보진검이라는 절학이 있다던

데 별 게 아닌가봐요." 

"꼭 무공만 세야 좋은 건 아니죠. 성격이 좋다면 상관없어요." 

문인능은 조금 화가 났다. 

"그가 성격이 좋은 줄 아세요? 석앙보다 호색한이라 툭하면 청루에서 나자빠져있고 지나가던 여인을 보면  곱게 지

나가지 않아요. 저 자 때문에 자살한 여인만 수천 명은 될 거예요." 

사실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앞에 얘기는 전부 사실이지만 자살한 여인이 수천 명이라는 건 엄청난 과장이었다. 

사공환의 미모가 절륜하여 수십 명이란 얘기가  있긴 있어도 수천 명은 아니었다. 마보강도  이를 눈치챘지만 그녀 

앞에서 차마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인물이 훤하다 했어요." 

"흥. 그 인물이 훤하면 뭐해요? 더러운 잔데." 

드디어 방홍미녀는 참지 못했다. 네 명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탁상을 치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문인능! 죽고 싶으냐?" 

"그렇게 하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마공자의 무공은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나서 나를 보호해주실 거야. 그렇죠?" 

문인능의 작태는 가면 갈수록 가관이었다. 악만풍이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다시 말문을 여는데 먼저 아동이 소리

쳤다. 

"딱 호가호위로구나!" 

"흥. 그래도 너희처럼 더러운 애들보단 낫다." 

"뭐라고?" 

그녀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문인능이 그걸 보며 통쾌한 듯 소리친다. 

"호호. 저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창피하면 얼른 사라져!" 

"너.. 너.." 

방홍미녀가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순식간에 객잔 안엔 정적이 감돌며 은은한 살기가 느껴졌다. 마보강은  그녀들

이 덤벼들면 막아낼 순 있었으나 오늘 일은 명백히 문인능의 잘못이라 그녀들과  싸우고 싶지가 않았다. 막 말리려

는데 문인능이 말한다. 

"네 명이 동시에 덤벼들려면 덤벼들어라. 마공자의 무공이 뛰어나니 너희처럼 더러운 애들은 상대가 안 될 걸. 사공

환이야 뭐 잘난 것이라면 석앙보다 호색한다는 거니 말할 것도 없고." 

방홍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금새 싸움이 벌어질 상황이다. 사공환이 놀라 말리려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래 누가 나보다 호색한다고?" 

순간 들려온 음침한 음성에 문인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홍미녀도 달려들다 움찔하며 멈췄고  형란 등 모두의 

시선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 밖엔 아무도 없다. 그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기는 사이 다시 문인

능의 정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있었나? 내가 옆에 없으니 잘도 욕해대는군." 

"꺅!" 

문인능의 정면엔 어느새 웬 남자가 서있었다. 모두들 그제야 알아차리고 놀라면서도 몇 명은 기뻐했다. 목소리가 분

명 진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는 척은 할 수 없었다. 그냥 석앙으로 아는  척만 해야했다. 문인능은 크게 놀란 

듯 비명을 내지르며 마보강의 등뒤로 잽싸게 숨어버렸다. 

"너.. 넌.." 

마보강도 놀라 하마터면 진양, 하고 소리칠 뻔했다. 다행히 일전에 악만풍에게 얘기를 들어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

키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석앙 자네였군. 미안해 문인소저가 실언한 걸 거야." 

"흠. 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괴롭힐 순 없지. 하긴 저런 여우를 어떻게 괴롭히나." 

진양은 아무래도 진작부터 지켜본 듯 했다. 문인능을 여우에 비유한 건 호가호위를 말한 것이다. 문득 아동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화주대도 석앙인가요?" 

"그래. 저 여우만 빼고 모두 친구니 그만하거라." 

이번엔 소녀가 나섰다. 

"에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문인아가씨가 저희를 모욕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죠." 

그녀는 이미 문인능이 이 방립 쓴 석앙에게 약하다는 걸 눈치챘다. 처음에 귀신을  본 듯 놀라 마보강 뒤에 숨더니 

그 후로도 쉽사리 몸을 빼려 하지 않았다. 소녀의 말에 진양은 웃는다. 

"하하. 나도 저런 여우는 그냥 혼내라고 해주고 싶다만 내 친구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  친구는 대천산에 함종문 

사람으로 이미 영웅대회에서 본 적이 있을 텐데." 

방홍미녀와 사공환은 한번 더 그를 바라보고는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영웅대회를  시작하기 전 소개할 때 함

종문 조장문 대리로 온 사람이라는 걸 들었었다. 진양이 또 다른 사람을 가리켜 보니 매우 놀라운 무공을 보여주었

던 연경후마저 있었다. 

"그렇군요. 만일 싸웠다면 저희가 크게 당했겠어요." 

"알면 이제 사공환을 데리고 얼른 이곳을 떠라." 

진양은 짤막하게 말하고 악만풍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악만풍은 뭐가 그리 좋다고 실실대는지 입가에 걸쳐진 미소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비단 악만풍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기뻐하는 눈치였다. 형란은 아예 넋이 나

가있다. 문인능만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방홍미녀와 사공환은 저 화주대도가  그들에게 매우 신임 받고 있음을 알았다.  악만풍도 저리 좋아하는 

걸 보면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 중 소녀는 더 많은 걸 눈치챘다. 본래 방홍미녀 중 가장 나이가 어려 아

북으로 불리면서도 머리는 가장 잘 굴렀다. 조금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진작에 지켜봤던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싸

우기 직전에 나타났다는 건 일부로 싸움을  못하게 하려했다는 얘기다. 그 말은 다시  그녀들을 위해주었다는 말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사공환이나 남은 세 명은 몰랐지만 아북은 알 수 있어 사뭇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오늘 석대협이 저희를 크게 위해주었군요. 후에 반드시 보답할 일이 있을 거예요." 

아북은 진양이 보지도 않는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진양이 앉은 채로 손만 흔든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지만 그녀

는 조금도 불만을 갖지 않고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잠시 후 그녀를 비롯하여  사공환 등은 모두 객잔 밖으로 나섰

다. 간단한 요기만 하고 진양의 말대로 떠나는 듯 했다. 

그들이 떠나기가 무섭게 형란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태산같이 많고 그동안 걱정했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다 젖

는다. 

"석.. 아니 진대협. 그동안 대체 어떻게 됐던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빛도 떨리고 몸도 떨려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진양은 가볍게 웃으며 정황을 이야기했다. 

과연 예상대로 그는 화주대도로 변장을 했다. 남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 같아 일부로 사람들  틈에 껴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영웅대회가 시작된 후 연경후의 무공을 볼 땐 매우 놀랐었다. 악만풍에게서 그의 무공이 대단하다

는 건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바뀌었을 줄은 몰랐다. 화연철을 상대로 싸우며  백중지세를 이루는 게 그저 놀랍

기만 했다. 

화주대도 석앙 행세를 하며 조용히 관전만 하던 그는 곧 당무 등이 온 것을 알았다. 화주대도로 변장한 건 이미 한

번 걸려서 아무래도 위험했다. 군웅들 중에 방립을 쓴 사람도 많아서 조금  안심은 되었지만 역시 멀리 떨어져있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 숙소의 꼭대기에 올랐다. 굉장히 크다지만 본래 경공이 뛰어나서 한두 번 벽

을 타며 오르니 금새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왕령을 보았다. 집채가 높아 확연히 보이는 건 아니어도 유난히 빛을 발하듯 눈에 띄는 절색의 미녀

는 왕령뿐이었다. 그녀를 보니 봉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봉도 왕령을 보았다는 듯 함께 떨었다. 그러나 이

심치상단의 덕인지 이미 봉을 건네준 뜻을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 이전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

고 최대한 무심하게 대회장을 내려다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듯 했다. 

잠시 후 당무의 허무맹랑한 말에 그는 기가 막혔다. 방명록을 뒤척이기에 왜 그러나 했는데 아마 자신의 이름을 찾

아보았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악만풍 등이 어이없어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들이 나서지 않길 바랬다. 지금 

나서면 그 당시 악만풍이 생각했던 것처럼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 중 아무도 나서지 않

았다. 형란이 걱정되었으나 어찌 됐는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영웅대회가 막을 내린 후부터는 악만풍 일행의 뒤를 쫓았다. 몰래 뒤를 따라가며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

냐하면 아직 절강 지방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절강 지방을 벗어난  후에도 안심할 수가 없어 함부

로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객잔에서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본래 좀 더 시일을 두었다가 천천히 드러내려 했는

데 싸움이 벌어지려는 걸 보고 할 수 없이 나선 셈이다. 그 방홍미녀 중 가장 어린 아북은 지난날 본 적이 있고 아

는 사이는 아니라도 행동이 맘에 들었었기 때문에 도와주기로 했다. 

쭉 이야기를 듣고 난 악만풍 등은 모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진양답게 철저하다는 생각만 할 수 있었

다. 생각이 깊은 건 아니나 머리가 좋아 한번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형란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조금 얼굴이 풀렸다. 이제 다시 진양이 곁에 있다는 걸 느끼니 마냥 좋기만 했다. 허나 악

만풍은 조금 달랐다. 

"이제부턴 어떻게 하나? 넌 지금 천하 강호인들의 적이 되어있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돌아다니면 되지. 그깟 오해로 덤비는 자들이 뭐가 무섭다고." 

그동안 묵묵히 지내기만 하던 가량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과연 당당하시오!" 

그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는다. 문인능만 삐쭉거리는 입을 들이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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