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三 章. 맥적산(麥積山)을 적시는 물방울 1
진양 일행은 한동안 고생한 끝에 함곡을 벗어났다. 골짜기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 덕에 추격
하는 무리는 없었다. 그들은 조금 안심하는 마음을 가지며 마을에 들려 새로 말을 샀다. 네 필을 사니 돈이 부족하
여 형란이 한참을 부탁해야 했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착한 마음을 알아봤는지 말 주인은 거부하다가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허나 네 필의 말은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서안도 지나 한동안 달리니 어느새 모양이 특이한 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멀리서 언뜻 보면 꼭 모습이
보릿단 쌓은 모습 같았다. 진양은 예전부터 산에 관심이 많아 지나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니 이름도 맥적산이라 했
다. 과연 보릿단 쌓은 모습 같아 맥적이라 했나보다. 진양은 금방 흥미가 돌아 악만풍을 향해 말했다.
"난주로 향하려면 어디를 지나야 하나?"
"네가 가고싶은 방향이라면 어디든 가능하지."
악만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단숨에 진양의 속내를 알아차린 듯 했다. 진양도 웃으며,
"그럼 저 맥적산을 지나가자. 크게 돌아가는 길이 아니면 좋지."
맥적산을 지나는 건 그리 멀리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난주 동남쪽에 있어서 조금 내려가다 올라야 하지만 그래도
거리가 가까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듯 했다. 험난한 길이면 힘들어도 추격은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진양 일
행은 그 길로 맥적산을 올랐다. 다들 별 다른 이의를 달지 않아 맥적산을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허나 이런 진
양의 선택이 가량의 죽음과 연결된다는 걸 그 누가 알았으랴.
산은 그다지 험하지도 않았고 낮은 언덕처럼 평평했다. 오르는 길이 잘 주조 되어있어 산행에 불편도 없었다. 산 역
시 그리 높은 산이 아닌 듯 했다. 별로 오르지도 않았는데 지나던 사람이 말하길, 산 중턱이라 했다. 진양은 조금
실망하는 마음이 생겼으나 그대로 맥적산을 올랐다. 좀 오르니 옆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반대편으론 내려
가는 길인 듯 지세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가 악만풍을 쳐다보니 악만풍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르고 싶으면
들렸다 가자는 대답과 다름없었다.
진양은 실망을 좀 했지만 이런 날 한번 산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금방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침 도달
했을 때가 맑은 날 오후라 맥적산 주변이 통째로 보였다. 저 아래 있는 게 천수(天水)현이요 서북으로 크게 난 대로
가 난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진양은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일단 올랐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자체가 마음에
든다. 한동안 산 정상에 오른 일이 없었고 호된 고초와 아픔만 겪었다. 낮은 맥적산이라도 높이 올라 세상을 보니
가슴에 쌓여있던 일말의 슬픔이 한순간 씻겨나가는 것 같다.
잠시 후 그들은 하산했다. 서북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며 난주를 향해 곧장 가려는 것이다. 내려가는 동안 많은 석불
들이 있어 문득 무림산 비래봉이 떠오르기도 했다. 석불의 수로 보면 비래봉이 훨씬 많았으나 이곳도 만만치 않은
숫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진양은 본디 불가하고는 인연이 없어 흥미를 금방 잃었다. 헌데 악만풍은 좀 다른 듯 했
다. 앞에 작은 불당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리 보나?"
진양이 묻자 그는 손가락으로 7개의 석불을 가리켰다.
"저것 봐라. 저게 뭔 줄 알아?"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진양이 픽 웃었다. 옆에 있던 형란이 눈을 반짝이더니 손뼉을 치며 나선다.
"아! 저건 칠불(七佛)이군요. 일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 난 저게 칠불이라는 것만 아는데 저것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니?"
"책에서 본 적이 있어서 기억은 하고 있지요."
그녀는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되살리는 듯 했다. 진양은 그녀가 머리는 좋지 못해도 책은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
했다. 가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그녀의 지식은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곧 입술에 침을 묻히며
말문을 열었다.
"칠불에 대해서 보긴 했는데 전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저 그 칠불이 과거에 나타난 일곱 부처라고 했어요. 시기
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
牟尼佛).. 그리고.. 음."
일곱 부처라면서 아직 여섯 부처밖에 못 외웠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음, 음 소리만 냈다. 아무래도 기억을 되
살리는 건 불가능한가 보다. 악만풍은 됐다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홀로 중얼거렸다.
"다른 불상과는 다른 것 같아서 눈에 이끌렸다. 이상하게 기운이 감돌아."
"기운은 무슨 기운. 쓸데없는 생각말고 얼른 가자."
가량은 본래가 전진교 출신이라 불가에는 진양처럼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시간이 지체된다고 여기며 몸을 돌
렸다. 헌데 그때였다.
"기운은 무슨 기운이냐고?"
다들 몸을 돌리는데 순간 칠불에서 괴상한 음성이 터졌다. 형란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음은 말할 나위
도 없거니와 진양과 악만풍 가량마저도 몸을 움찔 떨었다. 홱 고개를 돌려 칠불을 바라보았으나 칠불은 전혀 움직
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음에 형란이 더욱 공포를 느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누.. 누구세요?"
그녀의 말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칠불 뒤에서 웬 일곱 사람들이 번쩍 튀어 올랐다.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다. 아무리
기습적으로 몸을 날렸다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진양과 악만풍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진양이 본
그들의 모습은 이랬다. 온몸은 검붉은 옷으로 맞춰 입었고 이마엔 역시 검붉은 띠를 둘렀다. 손엔 뱀 같이 흐느적거
리는 걸 들고 있는 듯 했으며 얼굴은 아주 검었는데 자세히는 보지 못했다. 그는 그걸 보며 퍼뜩 떠오르는 자들이
있었다. 다만 전부 보지는 못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나타난 일곱 명의 그림자를 쫓았다.
"오랜만이야. 다들."
과연.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진양은 혹시나 했는데 정말 들어맞자 조금 당황하는 마음이 생겼다. 알고 보니 그
들 일곱 명은 다름 아닌 복면인들이었던 것이다. 지난번엔 네 명이었지만 이번엔 더 늘어난 듯 싶다. 손에 든 건 채
찍이었고 얼굴에만 복면을 썼을 뿐이었다. 지금 보니 색도 예전과는 다르게 검붉다. 진양은 전엔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옳아. 너희는 본래 북망채의 개들이었구나."
"그래. 설마 네놈이 그때 진양이란 놈인 줄은 몰랐다."
진양은 잘 생각해보니 그의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조소를 흘린다.
"너는 지난 날 거세를 당할 뻔했는데 또 이렇게 나서는구나."
악만풍과 가량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형란도 그들의 복장이나 채찍을 보며 북망채 사람이란 건 알았
지만 융정인 줄은 몰랐다. 방금 진양이 말한 거세는 지난날 낙양 객잔에서 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진양은
정말로 하진 않았어도 융정을 거세시키겠다고 했었다. 진양은 말하면서도 제가 웃긴지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흥! 알고 있구나. 언제 알았지?"
과연 그는 융정이었다. 그가 복면을 벗어 던지며 모습을 드러내자 악만풍 등은 모두 정색했다. 그는 낙양 이대가장
을 몰살시킨 북망채의 소주가 아닌가. 형란도 그가 원수라는 사실을 알아 조금 노한 마음이 생겼다. 검집을 꽉 움켜
쥐며 매섭게 그를 노려본다.
융정은 형란의 매서운 눈빛에 놀랐다는 듯 하하, 웃었다.
"형소저가 많이 컸구려. 뭐 대단한 무공이라도 익혔소?"
"제가 무슨 무공을 익히겠어요? 저는 자질이 둔해서 실력이 형편없지요."
"눈빛으로 보면 아닌데 뭘 그러시오?"
형란은 대답하지 않고 한층 눈만 더 빛냈다. 그러자 융정은 또 웃으며 말했다.
"하하. 형소저는 필시 대단한 무공을 익혔을 거요. 오늘 어쩐지 눈빛이 심상치 않소. 헌데 지식은 별론가 보오. 저
칠불을 모르오?"
그는 좀 전의 그 칠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란이 칠불의 이름 중 하나를 대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다. 그녀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가 말한 건 전부 맞았는데 남은 한 명은 대지 못하더구려. 그 하나는 바로 비바시불(毘婆尸佛)라 하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이대가장을 몰살시킨 너를 오늘 죽여버리겠다!"
가량이 성급하게도 연검을 뽑으며 버럭 호통쳤다. 악만풍이 그의 옷깃을 잡지 않았으면 그는 이미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그의 호통에 융정은 또 웃음을 터트린다.
"이래서 무식한 것들하고는 얘기가 안 되는군. 그나저나 너는 참 안됐구나. 멍청하고 무지한데 거기에 나를 죽일 실
력도 없을 테니.. 쯧쯧."
"뭐라고? 누가 너를 못 죽인단 말이냐?"
가량은 분통이 터져 악을 고래고래 질렀다. 그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자 뒤에 서있던 복면인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를 둘러쌌다. 허나 그는 무슨 생각이 있는 건지 그들을 물리치며 말했다.
"네 무공 따위로는 날 이길 수 없을 거다. 너희 넷이 덤벼도 못 이길 텐데 하물며 네 따위가 무슨 상대가 되겠느
냐?"
"오냐 이놈. 예전엔 나만 봐도 설설 기던 놈이 무슨 약을 처먹고 정신이 나갔나 봐야겠다."
악만풍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이상했다. 본래 융정은 가량의 적수가 못 된다. 오래 전 가량이 혼인하기 전부
터 북망채는 이대가장을 자주 귀찮게 했는데, 가량이 나서 융정을 개 패듯 팬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형웅강의 말로
그 일이 있은 이후 융정은 가량을 무서워한다고 했었다.
헌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니다. 융정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지만 예전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매우 당당해지고 겁이 없
어진 것 같아 참 해괴할 따름이었다. 순간 융왕이 번쩍 떠올랐다. 융정의 아버지이자 북망채 채주인 융왕. 들리는
말로 이대가장의 장주인 형웅강과 문인강목을 한 손으로 상대했다는 괴상한 소문을 가진 자다. 그 자가 떠오르자
악만풍은 금방 깨달아지는 게 있어 싸우려는 가량을 말리려했다. 그러나 한 발 늦어 가량은 이미 악만풍의 손아귀
에서 벗어나 있었다.
가량은 들고있던 연검으로 즉각 융정의 목덜미를 후렸다. 사실 검하고는 달라서 후려쳤다 함은 뱀 혓바닥처럼 흐물
흐물 하다가 한순간 꽂히는 것과 같았다. 이야말로 연검을 상대하기 힘든 이유요, 그런 장점을 최대로 살린 사설연
검을 상대하긴 더욱 까다로웠다. 가량이 지금 흥분하고 있지만 그 위력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셈이다.
헌데 융정은 웃고 있었다. 검이 날아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히죽거린다. 복면인들은 보면서도 그가 말려서
그런지 전혀 막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융정은 백이면 백 죽임을 당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진
양도 그리 생각하고 악만풍도 그리 생각했다. 허나 그들 둘 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맞춰
주듯 융정은 가볍게 채찍을 끌어올려 연검을 휘말아버렸다. 예전이면 상상할 수도 없는 동작이다. 매우 빠르고 기민
하여 가량은 손도 못쓴 채로 허무하게 연검을 봉쇄 당하고 말았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던 가량은 옛날 전진교에서 배운 칠성선권(七星仙拳)을 썼다. 왕처일에게 직접 배운 거라 그 위
력이 남다른 권법이었다. 가만히 있는 왼손으로 칠성선권의 대도뇌전(大道雷電)의 초수를 이용해 융정의 안면을 후
려치려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융정이 가볍게 발을 들어 가량의 겨드랑이를 걷어차는 게 아니겠는가. 겨드랑이는 한
번 잘못 맞으면 팔이 저려와 한동안 쓸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가량이 그런 듯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떨
었다.
갑자기 융정이 채찍을 높이 쳐들었다. 보법인 듯 발을 몇 번 규칙적으로 놓으며 몸도 이동했다. 가량이 놀라 연검을
꾹 쥐었는데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가량의 몸이 붕 뜨고 말았다. 가량의 덩치는 악만풍에 비하고 힘 역시 악만
풍에 비하는데 그의 몸이 뜬다는 건 참으로 놀랄만한 경우였다. 가량은 재치를 발휘해 검을 좋으며 두 손으로 칠성
선권을 빠르게 펼쳐버렸다. 용호상박의 초수로 두 주먹이 융정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순간 융정이 일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세가 여간 무서운 게 아니라 가량은 허리를 비틀 수밖에 없었다. 몸이 떠
있는 상황이라 아무래도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허리를 비틀자 갑자기 채찍이 목을 휘어 감았
다. 가량이 깜짝 놀라는 찰나 융정은 여유를 부리듯 채찍을 돌려 그를 멀리 내던져버렸다. 곧 나무 위로 떨어지며
우지끈뚝딱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허리야.."
형란이 놀라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녀가 가보니 허리에 나뭇가지를 연달아 들이받아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진양과
악만풍은 지금 싸움을 보면서 융정이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이전의 융정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편법을
펼치는 것도 매우 재빠르고 묘수가 엿보이며 지난날엔 모르던 무시무시한 장법까지 가지고 있다. 당주고가 쓰던 장
법만큼 위력적인 장법이었다.
악만풍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왜 이리 오만한가 했더니 무공이 대단히 진보했군. 융왕이 가르쳤나?"
"그렇다. 아버지의 무공은 천하제일이라 내가 이렇게 단기간에 힘을 쌓을 수 있었지."
융정은 부정하지 않았다. 진양이 피식 웃는다.
"융왕이 천하제일이라고? 우습구나."
"뭐라고? 그럼 네가 천하제일이냐?"
"난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그의 말에 융정은 눈을 부라렸다. 융왕이 천하제일임을 아주 굳게 믿는 것 같았다. 허나 진양은 융왕이 대단히 세다
고만 알지 실제로 보진 못했다.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엔 무굉을 따를만한 실력자가 없다.
"그럼 누가 천하제일이냐?"
융정의 말에 진양은 간단히 자존자대로 대답했다. 융정이 웃는다.
"자존자대라고? 푸하하. 우습군. 그런 미친 자가 무슨 천하제일이냐?"
"그래? 그럼 넌 그 분의 무공을 무시하는 거군."
"물론이지. 그런 정신나간 늙은이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천하제일이라면 적어도 내 아버지만큼은 돼야지."
진양이 봉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어디 천하제일의 아드님 솜씨 좀 보자."
이번엔 진양이 상대할 참이었다. 그가 막 나서려하자 악만풍은 그를 붙잡고 싶었다. 자신이 본 바로 진양은 이제 융
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유루봉법 정도로는 아무래도 힘들거라 생각했다. 허나 만일 싸우지 않는다면 융정은 반드시
복면인들을 동원해 그들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욱 상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진양을 말리지 않았다. 위기가 닥치면 그때 나서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진양은 봉을 든 채로 두어 걸음 나서며 유루봉법의 수식을 취했다. 양끝 봉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봉을 잡은 두
손의 모양이 해괴하다. 오른손은 안쪽으로 왼손은 바깥쪽으로 말아서 만일 유루봉법을 보지 못했다면 한참 웃을 자
세였다. 하지만 유루봉법엔 이 자세가 바로 적합했다. 열심히 회전하려면 이만큼 좋은 자세도 없다. 융정은 유루봉
법을 보지 못했지만 진양의 무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탄지신통도 익힌 자고 경공이 뛰어나니 저런 무식한
자세에도 뭔가가 있을 거라 여겼다. 방심하지 않는 마음으로 천천히 채찍을 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한참 노려보았다. 틈을 노리는 것이다. 서로의 틈이 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기회요, 그것을 잡으면
바로 승리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조금도 경시하는 마음이 없어서 더욱 긴장은 고조되고 있었다. 한순간 융정이 채
찍을 움찔했다. 그를 노려보고 있던 진양이 못 봤을 리가 없다. 진양은 매섭게 돌진하며 봉을 휘젓기 시작했다. 봉
과 몸이 하나가 되어 물 흐르듯 빙글빙글 계속 돈다.
융정은 그의 봉법이 해괴하다고 생각하며 일단 피하기로 했다. 살짝 뒤로 뛰며 채찍을 갈기자 진양 역시 한 발 물
러선다. 서로 안심하고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양이 몇 번 더 달려들었으나 융정은 계속 피하기만 했다. 때때로
귀곡편법을 펼쳐 역습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진양은 빠른 경공을 펼쳐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섰다. 그도 융정의 채
찍이 매우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융정의 채찍은 고룡(蛟龍)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여간 단단한 게
아니었다.
진양은 이래선 승부가 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융정이 계속 피하는 걸 보니 혹시 동료를 기다리는 걸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봉을 맹렬히 돌리며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순간 발끝에 힘을 주자 몸이 고기 본
호랑이처럼 번쩍, 하고 날랐다. 꼭 실에 퉁겨지듯 빠르고 기습적인 움직임이었다. 융정은 오른손에 쥔 채찍을 재빠
르게 휘저으며 동시에 왼손으로 일 장을 내질렀다. 진양의 봉법이 해괴하여 채찍은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봉에 채찍이 닿는 순간 채찍이 먼저 봉을 감았다. 허나 유루봉법 특유의 전(轉)으로 봉이 회전하자 채찍은 실
이 말리듯 회전하는 봉에게로 점점 감겨들어 갔다. 나중엔 진양이 손에 든 게 봉인지 방망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
큼 돌돌 말아지고 말았다. 뒤엉키고 무게가 상당히 무거워졌지만 이로써 융정은 북망귀곡편법을 펼칠 수 없게 되었
다. 진양은 가볍게 내공을 끌어올려 양팔에 주입하자 돌돌 말린 채찍의 무게를 감당해낼 수 있었다. 이전처럼 똑같
이 유루봉법을 펼치며 융정에게 달려든다.
융정은 좌장으로 진양의 가슴에 내밀었다. 헌데 봉이 자꾸 회전하니 함부로 손을 넣을 수가 없었다. 손에 대단히 빠
르면 모르되, 더구나 봉엔 고룡 가죽으로 만든 채찍까지 감겨져있어 잘못 맞았다간 손목이 부러질지도 몰랐다. 융정
은 하는 수 없이 두어 발짝 물러서다가 진양이 다가오자 갑자기 쌍장을 내밀었다. 진양도 그것을 보고 자도종모의
묘를 응용했다. 봉이 융정의 두 팔을 감는 듯 지나가 맹렬히 어깨에 꽂혔다.
<파팍!>
융정은 처음 보는 해괴한 봉법에 참으로 기가 막힌다는 생각을 하며 낮게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웃기지
도 않은 봉법이 있다니, 어깨가 시큼하여 두 팔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 그 여력이 남아 정신을 못 차리는 때 갑자기
진양이 일 권을 내질렀다. 수식이나 자세로 보아 그가 자주 쓰는 유리장쾌의 묘인 듯 싶었다. 융정은 가까스로 몸을
돌려 전중혈이 부서지는 건 면했으나 또 왼쪽 어깨를 맞아 몸이 서너 장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아악……."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그는 왼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복면인들이 황급히 달려와 법
석을 떨자 그가 호통친다.
"꺼져! 저.. 저 개놈들을 잡아 모두 죽여버려라!"
복면인들은 그의 말을 바로 따르지 못하고 서성댔다. 그들에겐 소주인인 셈인데 어찌 내버려두겠는가. 허나 그가 한
번 더 호통치자 그들은 어쩌지 못하고 진양 일행의 앞에 섰다.
"이번엔 너희들이냐?"
진양은 봉을 어깨 너머로 걸치며 조롱기 가득하게 말했다. 굉장히 오만하고 당당한 게 꼭 무굉 같다. 그의 자신만만
한 말투에 복면인들은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보이는 눈에선 은근한 두려움이 엿보였다.
실상 진양은 융정을 상대로 이길 수가 없다. 만일 융정이 유루봉법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진양은 반드시 패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융정은 유루봉법에 대해 말로만 두어 마디 들었을 뿐 구경도 하지 못했다. 단지 끊임없이 회
전하는 봉법이라고는 들었는데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진양이 이길 수 있었다. 채찍까지 휘감
아 무게가 증가하고 위력이 강해지니 융정은 결국 패하게 된 셈이다.
이런 사실을 진양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등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융정이 매우 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만큼
대단해졌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맞붙어 보니 그 실력을 알만했다. 마지막에 쌍장이 짓쳐올 때를 생각하면 지금
도 오금이 저리는 것만 같다. 때문에 현재 진양이 보이는 오만한 행동은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았다. 복면인들이 두
려운 눈을 뜨는 것으로 보아 융정은 그들보다도 강한 게 확실했다. 허나 복면인들은 좀 전 유루봉법을 보았으니 상
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일곱 명이나 되어 더욱 불리할 거라 생각했다.
진양은 봉을 어깨에 뉘인 채로 흔들거렸다. 눈앞 일곱 명의 복면인은 신경 쓰지도 않는 듯 정말 오만하고 대담했다.
악만풍은 그가 운이 좋아 이겼음을 알아서 저것이 허장성세임을 눈치챘다. 한 걸음 나서며 창을 땅에 내리꽂는다.
"덤빌 테면 얼른 덤벼라!"
악만풍이 고함치자 복면인들은 눈에 띌 정도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각자 채찍을 쳐들었다. 곧 공격
할 태세다. 멀리서 가량을 돌보던 형란이 이 상황을 보고 뛰어왔다. 상대가 넷이라 아무래도 자신이 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빨리 처리하고 가자."
진양은 꼭 금방 누를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악만풍도 그 짝짜꿍이를 맞춰주느라 고개를 끄덕인다. 형란은 그냥 멋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검을 뽑아들었다. 복면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단숨에 멀리 흩어졌다. 두 복면
인은 그냥 뒤로 물러서서 관전할 듯 했고 네 명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그들 셋을 에워쌌다. 채찍을 머리 위로 흔들
며 기회를 엿보며 살기 가득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무슨 고기 잡으려고 포망을 펼치는 것처럼 빙글빙글 채
찍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진양이 중지를 퉁겨 한 복면인의 견정혈을 강타했다. 난데없이 탄지신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공격은 복면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악만풍조차 짐작하지 못한, 실로 허실의 공격이라 그 복면인은 견정혈을 부
여잡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남은 복면인 세 명과 융정 곁에 있는 두 명의 복면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리고 잠시 눈짓을 주고받는다.
"무슨 계략을 꾸며? 얼른 공격이나 해라. 난 수를 맞춘 거니까."
진양은 갑자기 아북이 말했던 <철면피 무공>이 떠올라 웃음이 터질 뻔했다. 스스로 말하고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
을 했다. 물론 복면인들은 그가 대단히 강하다고 생각할 테니 철면피라 여기진 않을 것이다.
복면인들은 일순 돌리던 채찍을 그들 머리 위로 날렸다. 채찍이 날아들자 진양과 악만풍, 형란은 약속이나 한 듯 각
자 한 명씩을 향해 내달렸다. 모두 이 편법에 대해선 많이 알기 때문에 접근을 해야한다는 걸 알았다. 채찍이 대단
히 긴 건 아니어도 일단 거리가 멀면 채찍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진양은 한 복면인을 향해 즉각 유루봉법을 펼쳤다. 그 복면인은 또 탄지신통이 날아 올까봐 대단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진양이 한순간에 봉을 돌리자 복면인은 엉겁결에 채찍을 휘말리고 말았다. 참으로 멍청하게도 좀 전 융정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당하는 셈이다. 허나 복면인은 장법조차 모르는 듯 감긴 채찍만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진양은 한동안 버티더니 갑자기 풀어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서로 잡아당기는 중에 한쪽이 손을 놓으면 반대편은
반드시 쓰러지게 되어있다. 그 복면인도 지금 그 꼴이 나는 것이다.
진양은 즉각 달려들어 복면인의 천령개를 갈겼다. 콰직, 하며 머리통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복면인은 그 자리에
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 복면인들의 무공이 융정보다 대단히 못남을 알았다. 예전 유루봉법을 쓸 수 없었을 때라면
이리 쉽게 해치울 순 없었겠지만, 이젠 유루봉법이 있으니 귀곡편법 따위는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는 곧 고개를 돌
려 악만풍과 형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무얼 보았는지 깜짝 놀라 호통친다.
"네 이놈들."
그는 갑자기 몸을 날려 정면으로 돌진했다. 알고 보니 허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가량에게 아까 융정 옆에 있던
두 복면인이 다가가고 있던 것이다. 좀 전 주고받던 눈짓이 그걸 가리켰나보다. 진양은 매섭게 봉을 휘저으며 돌진
했으나 한 발 늦은 듯 하다.
"잠깐! 만일 덤벼들면 이 자를 죽여버리겠다."
언제 또 검을 뽑았는지 가량의 목엔 검 한 자루가 기대어있었다. 더 다가오면 긋겠다는 뜻이었다. 진양은 분통이 터
져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이 개놈새끼들. 북망채라 해서 왜 이리 이름이 재수 없나 했더니 정말 하는 짓부터 더럽고 재수가 없어."
마침 악만풍은 독룡출동으로 한 복면인을 제압하고 형란을 도왔다. 형란은 쾌묘검법을 대성하지 못하여 무공이 보
잘 것 없었다. 악만풍이 단숨에 뛰어들어 창을 연달아 내지르자 복면인은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융정 곁
으로 돌아갔다. 악만풍과 형란도 그제야 가량이 붙잡힌 걸 본 듯 했다.
"그 검을 버려라!"
"너희들의 무기나 버려라. 무기를 버린다면 어떤 해도 가하지 않겠다."
검을 가량의 어깨에 내려놓은 복면인이 말했다. 악만풍은 분노에 입술까지 떨었고 형란은 가량이 걱정되어 발만 동
동 굴렀다. 악만풍은 진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는 뜻이다. 여기서 만일 가량을 무시하고 떠난다면 그들은
도망칠 수 있었다. 허나 무기를 버린다는 건 패배를 의미하고 그들에게 잡히는 것으로 연결된다.
진양은 가량에게 대단한 호감이 없다. 단지 술 잘하고 은원을 알아 조금 마음에 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갈림길에
놓이니 매우 고민이 되었다. 그냥 떠나는 건 지금껏 함께 한 정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반드시 구해줘야 할
듯 싶은데 도대체 방도가 없어 보인다.
"얼른 무기를 버려!"
그 자가 한번 더 호통치며 가량의 목에 검을 가까이 들이댔다. 형란은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검을 떨구고
말았다. 악만풍은 창을 쥔 손을 가늘게 떤다. 진양만 태연자약하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역시 허장성
세로 겉으론 태연자약이요, 속으론 안절부절이다.
"무기를 안 버린다는 거지? 좋아."
그 자는 간사한 어투로 말하며 검날을 가량의 목에 갖다대었다. 가량의 목에서 가는 선혈이 흐른다. 검이 제법 날카
로운 듯 살짝 댔는데 선혈이 많이도 쏟아 내렸다. 약간만 힘을 준다면 바로 황천길로 떠날 것이 분명했다. 형란이
크게 놀라 잠깐, 잠깐 하고 부르짖으며 악만풍과 진양에게 무기를 놓아달라고 애걸했다.
"진대협! 악대협! 제발.."
그녀는 금새 눈이 붉게 젖더니 곧 눈물까지 주르륵 흐른다. 악만풍은 그것을 보고 이겨내지 못하여 창을 놓고야 말
았다. 그러자 형란은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자세로 눈만 매서웠다. 봉을 든 손이 떨리는 것도
아니고 눈빛이 떨리는 것도 아니다. 꼭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라고 하는 것처럼
너무나 태연했다. 형란이 그에게 달려가 팔을 부여잡으며 다시 애걸하려 했다.
"휴! 진대협."
갑자기 가량이 입을 열었다. 형란이 놀라 그를 홱 돌아보았는데 그는 의외로 얼굴빛이 환했다. 목에 검을 댄 복면인
의 눈이 흉악하게 변했으나 힘을 쓰진 않는다. 그 틈에도 가량은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오래 전 나는 진대협과 다른 한 분께 큰 은혜를 입었소. 덕분에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지. 북망채에 잡혔
을 때도 대협은 변장을 하여 나를 구해주었소."
형란은 일순 코끝이 찡해져 입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동안 나는 진대협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고민했소. 헌데 별로 해줄 것이 없더
구려. 진대협이 다쳐도 의술을 모르고 위기에 처해도 무공이 약하니 참으로 항상 도움만 받았소."
"은혜를 갚을 것은 없다. 난 협심으로 너를 도운 게 아니니까."
"그거야 어찌되었든 내게 있어서 당신은 대협이오. 그리고 은혜는 갚는 게 도리지……."
순간 그는 목을 비틀었다. 꼭 옷 찢어지는 소리 같았다. 어떻게 들으면 나무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잎 찢어지
는 소리 같기도 했다. 복면인이 들고 있던 검 끝으로 붉은 물이 줄줄 흘렀고 그것은 가량의 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 끝에서 그 물방울이 뚝 떨어질 때쯤 형란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 가버렸다.
"이런 미친 작자!"
복면인이 놀라 검을 떼며 소리쳤다. 지금 가량은 스스로 검에 목을 그은 것이다. 옆 목이 깊게 파여 지금은 할딱할
딱 숨을 쉬고 있었지만 곧바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땀과 피로 바닥을 적시며 힘겹게 마지막 말문을 열었다.
"하하.. 이제 마누라와 딸애를 볼 수 있겠군.. 이.. 것도 어쩌면 대협의 은덕이.. 되는 걸지도……."
그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더 할말이 남았는지 입은 벌려진 채였으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주 미세하
게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의 눈꺼풀은 어느새 덮여져 있었고 한 가닥의 실낱처럼 들리던 숨소리 또한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후로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진양은 두 눈을 찢어지게 부릅뜬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가량이 죽었다. 비록 본의 아니게
도움을 줘서 인연이 생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함께 다니며 많은 정이 생겼던 사람이었다. 진양은 문득 멍
히 창공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숨결이 나올 땐 가늘게 떨린다는 걸 진양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늘을 보며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점점 아주 천천히 푸른 하늘이 어느새 청록으로 바뀌고, 다시 그 청록이
금방 검은 색으로 뒤바뀌었다. 복면을 쓴 자들, 그들의 눈을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빛은 무심할 때 더욱 해괴하고 두려운 법이다. 진양의 눈빛은 무심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멍했다. 얼이 빠진 눈
으로 생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매서운 눈보다 더욱 소름이 끼치는 눈이었고 복면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융정도 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살금살금 걸었다. 악
만풍이 보곤 호통친다.
"이놈. 어딜 가려고!"
그는 악만풍의 호통을 듣자 흠칫 떨더니 한순간에 발을 밟아 사력을 다해 뛰었다. 복면인들도 몸을 어물거리며 서
있다가 융정이 도망치는 걸 보고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헌데 예상외로 진양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멍청히 복면인
들이 있던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은 점점 내려가 다시 가량에게로 꽂힌다. 그의 목에 난 가는 혈흔이 왜
그리도 크게 보이는 것일까.
옆에 복면인이 한 명 남아있다. 그는 좀 전 형란과 대결하다 융정 곁으로 도망친 자였다. 악만풍이 그라도 잡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자 그는 융정이 도망친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
"우린 이미 당신들을 찾았다는 얘기를 전진교에 전했소. 난주로 향할 것도 알고 전했으니 그리로는 안 가는 게 좋
을 것이오. 이곳엔 곧 전진 도사들이 들이닥칠 거라 얼른 떠나는 게 목숨을 건지는 방법이오."
악만풍은 그의 말에 몸을 움찔거렸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악만풍은 그가 아마도 지난날 화산에서
만났던 복면인들 중 한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그 날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비교해보니 매우 비슷했고 또 이런
말을 해주는 복면인은 그 밖에 없을 것이다. 악만풍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버렸다.
쓰러진 형란을 안고 진양을 불렀다. 진양은 한동안 듣지 못했지만 직접 와서 어깨에 손을 얹으니 그제야 잠에서 깬
듯 눈을 떴다. 그들은 가량을 그 자리에 묻었다. 평소 불가와 인연이 없었지만 칠불 곁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
이 없다. 덩치 큰 그를 안고 도망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한참 묻는 도중 형란이 깨어나 한바탕 곡성을 터트렸다. 진
양이 다독거려주자 그의 가슴에 안겨 눈물을 한없이 뽑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