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四 章. 난주 대전의 서막 1
진양 일행은 맥적산을 벗어나 수일 말을 타고 달린 끝에 난주에 도달했다. 난주는 지난날 진양이 왕령과 함께 와본
곳이라 잘 알고 있다. 악만풍도 예전에 들린 적이 있었다며 지세와 풍토를 훤히 꿰뚫은 듯 했다. 이 일대는 이미 몽
고군이 점령하여 한인과 몽고인의 숫자가 거의 비슷했다. 난주 성내로 향하며 보이는 열 명의 사람 중 반이 한인,
반이 몽고인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난주 일대는 지세가 높고 산봉이 많다. 어딘가 이색적인 향기가 느껴지며 성내로 근접할수록 그 냄새는 심해졌다.
코로 맡아지는 향기가 아닌, 피부로 느껴지고 머릿속에 박히는 향기라고나 할까. 지난날 진양이 찾았을 때보다 더욱
이색 풍토가 느껴져 거부감이 치솟았다. 허나 이곳에도 한족으로 이루어진 감총방이 있으니 크게 따질 것도 없다.
성문에 보니 몽고병 서너 명이 지나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본래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두 명을 넘기가 힘든
데 과연 몽고족이 요즘 세력을 떨친다더니 보초부터 남다른 듯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은 아닌 듯 하고 항상 이러는
것 같았다. 함께 성문을 향해 가던 한 남자가 혼자 꿍얼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고 감시를 철저히 해. 어제오늘도 아니고 매일같이 이 지랄이니 지긋지긋하군. 금
국의 개들도 싫지만 우리 강토를 차지하고 간섭하는 몽고도 싫구나."
진양 일행이 그 소리를 들으며 살짝 시선을 돌리니 평범한 상인이었다. 도대체 입이 쉴 새가 없듯 계속 떠들었다.
남들이 들을 음성으로 떠들긴 또 무서운지 혼자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혼자 듣는 실정이다. 과연 그가 불만스러워할
만큼 성내로 들어서는 게 매우 느렸다. 보초가 네 명이라지만 하루 성문을 나서는 숫자가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이
동이 빠르겠는가. 하물며 지금은 아침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더욱 많았다.
한참을 제자리 걷듯 천천히 이동한 끝에 드디어 진양 일행도 성문에 도달했다. 몽고병 두 명이 시선을 돌리다 악만
풍을 보고는 서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진양이 이상하다 생각할 무렵, 두 병사는 어느새 악만풍 면전으로 다가와
있었다.
"네 이름은 뭐냐?"
"그건 왜 묻소."
몽고병 한 명의 물음에 악만풍은 싸늘히 되물었다. 금병이 싫지만 좀 전 상인의 이야기를 들어 슬쩍 불만이 생긴
터였다. 더구나 자신의 생김새가 험악하다 하여 제 강토에 있는 성 들어가는 걸 막는 것 역시 불만스러웠다.
"뭐라고? 대답을 안 한다는 건 금인이렷다."
몽고병 하나가 칼을 내밀며 호통쳤다. 악만풍이 그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텐가.
"너는 내가 대송의 매국노로 보이느냐!"
악만풍이 그 자리에서 버럭 고함을 치자 몽고병은 바람에 휘말려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귀가
따갑고 여운으로 얼떨떨했다. 반대편에 있던 두 몽고병은 사정을 모르고 달려오며 칼을 뽑아들었다.
"감히 대몽고에 대적한다는 거냐?"
"누가 대적을 했다는 거냐? 나는 우리 강토를 침범한 개들의 졸개가 될 만큼 무지한 자가 아니다."
몽고병은 그 말뜻의 진위를 못 가리고 다만 금인이 아님을 말하는 거라 여겼다.
"그럼 이름을 대라."
"나는 악 씨 성을 가지고 이름은 만풍이다. 한민족으로 진회와 같이 사람 탈을 쓴 짐승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는 왜 왔느냐?"
악만풍이 얼굴을 씰룩이며 대답했다.
"한민족이 한민족 강토도 못 온단 말이냐?"
"여기는 남송의 땅이 아니다. 대몽고의 영토로 너희를 도와주는 분들이 계시는 곳이다."
"그럼 이 땅엔 남송인이 지날 수 없다는 말이냐?"
"물론 지날 수는 있지. 하지만 너처럼 위험한 인물은 못 지나간다."
악만풍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듣기로 몽고인은 의심이 별로 없고 호탕하여 마음에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곤 그게 아님을 알았다. 퍼뜩 이곳에서 오래 산 몽고인이라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분통이 터지는 건
변함이 없었다. 형란이 급히 나서며 입을 연다.
"사실은 못된 무리가 저희를 쫓고 있어서 이리로 도망쳐온 거예요."
"너희가 못된 무리가 아니고?"
진양도 이젠 참지 못한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대몽고고 대지랄이고 다 죽여버리겠다."
"뭐라고? 네놈들은 역시 금인들이구나."
진양이 봉을 단숨에 쳐들어 그 몽고병을 죽이려 했다. 갑자기 한 차례 앞서 지났던 상인이 허겁지겁 뛰어오며 소리
친다.
"멈춰요 멈춰!"
그는 아무래도 근처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던 듯 했다. 지금 보니 사방엔 한인과 몽고인으로 가득했다. 그들도 진양
일행을 금인으로 아는지 눈빛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상인이 급히 나와 진양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모두 왜 싸웁니까. 우리는 동지예요. 이쪽은 내가 아는 분들로 금인들이 아니라 도리어 송을 위하는 충신들입니다."
"서존(西存). 그게 정말인가?"
몽고병은 그 상인을 보자 태도가 많이 변했다. 상당히 친하고 제법 교류가 있는 듯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가
상인에게 그게 정말이냐고 물은 건 마치 주변의 시선을 보아 해두는 말처럼 눈빛에는 신뢰가 엿보였다.
"정말이지 그럼 그게 거짓말인 줄 아쇼? 이 봉을 든 분은 성이 진 씨고 저 무섭게 생긴 분은 성이 악 씨요 악 씨!
악 모르오? 악이란 말이오 악!"
상인이 흥분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한편 그의 말에 몽고병은 물론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안색이 뒤바뀌고
말았다. 몽고병은 설마, 라고 생각하는지 어설프게 웃는다.
"하하. 말투가 꼭 명장 악비 장군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 같네. 하기야 세상에 악 씨가 어디 한둘인가?"
"푸하하. 난주에서 문지기 밥만 일 년을 처먹더니 이제 제법 눈치도 생기셨군. 분명 세상에 악 씨는 많소. 허나 악
가창법을 쓰는 악 씨는 평범한 악 씨가 아니지."
"악가창법?"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아마 놀라자빠졌을 말에 몽고병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제로 남송인
이나 그런 걸 알지 평범한 문지기 몽고병이 알 턱이 없다.
"바로 남송의 대명장이자 영웅인 악비 장군께서 쓰셨던 창법이란 말이오."
설마설마 했더니 몽고병들 네 명은 동시에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고 사방은 금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악비의 일가
족이 모두 몰살된 사실을 알았지만 정말 악가창법을 쓴다니 놀라웠다. 다들 시선이 악만풍의 창으로 돌려진다. 창날
엔 악(岳)이란 글자가 우람하게도 새겨져있었다. 몽고병이 변한 안색으로 악만풍과 상인을 번갈아 보더니 곧 묻는
다.
"그.. 그럼 저 자가 악비의 후손이란 말이오?"
"후손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지. 허나 악가창법을 쓰는 건 확실하다오. 못 믿겠으면 그에게 덤벼보시오."
몽고병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금방 악만풍을 돌아보더니 잠시 후 사실여부를 물었다. 그에 악만풍은 낮게
웃더니 대답한다.
"나는 악 씨가 아니오."
"뭐라고? 그럼 어떻게 악가창법을 알고 있소?"
몽고병의 말투가 조금 변해있다.
"사정이 있어 우연히 습득할 수 있었소. 나는 사실 양 씨로 악가창법만 이어받았을 뿐이오."
그의 당당한 말에 몽고병은 몸을 떨었다. 생각해보니 그냥 악 씨라고만 해도 대단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데 진실을
말해주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런 자가 금인이라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악가창법이 악비의
창법이라면 그걸 전수받은 자는 필시 남송인일 것이 분명했다.
"음. 크게 오해해서 미안하군. 들어가게."
그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진양 일행을 통과시켜주었다. 사방에선 웅성거림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악만풍에게로, 아
니 양만풍에게로 쏠렸다. 진양도 처음 안 사실이다.
성문에서 멀어지며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상인의 뒤를 밟았다. 상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걸음을 옮긴다.
한참이나 쫓아가며 진양 등은 그가 점점 성내의 구석으로 향한다는 걸 알았다. 북서쪽으로 자꾸 이동하며 더 가다
간 꼭 성외로 나설 것만 같다. 진양 등은 그의 상점이 구석진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평범한 인물로는 안 보여
도 상인은 상인일 거라 짐작했다.
헌데 의외로 그가 도달한 곳은 상점 같은 곳이 아니었다. 온통 집 뿐이요 나무들뿐인 장소에서 그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진양 일행은 한동안 미행하며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했기에 드러낸 채로 그 뒤를 쫓던 중이었다.
그가 고개를 홱 돌리자 진양 일행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가 웃는다.
"하하. 왜 쫓아오시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양만풍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악가창법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복면인들과
당무 등 인물들이 알고는 있어도 자신들을 도와줄 명분이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박수를 치고 좋아해야지 도
와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양만풍은 그의 정체가 심히 궁금했다.
"나는 서 씨의 상인이오."
"평범한 상인이 아닌 듯 싶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내가 악가창법을 쓴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소."
"하하. 당신 창에 당당히 악 자가 붙어 있는데 내가 장님으로 보이오?"
"농담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시오."
양만풍은 한껏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인은 갑자기 정색하며 말한다.
"좋아요 좋아. 내 당신들 마음을 잘 안다오. 사람들에게 쫓겨 위기에 처했는데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고 또 무공
까지 알고 있으니 정체를 알고 싶겠지."
진양 등 모두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내 정체가 알고 싶으면 마저 쫓아오시오. 얼마 안 갈 거요."
과연 상인은 진작부터 미행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아까 가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
다. 진양 일행은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좀 더 집들을 지나고 객잔 하나를 지나자 그는 웬 큰 집 앞에 당도했다.
규모가 상당하고 안에선 강한 기합소리도 들렸다. 집을 주변으로 뭔가 있는 듯 싶었고 그 밖으로는 둥그렇게 담장
이 싸여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담장이 높은 건 아니다.
"자. 다 왔소."
"여기가 어디요?"
양만풍이 알 턱이 없다. 상인은 아무 말 없이 씨익 웃더니 담장으로 가려진 중앙, 정문 위의 편액을 가리켰다. 그리
고 보니 그 앞에 편액이 있었다. 널찍한 게 매우 당당하고 호기롭게 보였다. 형란은 그 편액에 적힌 글을 읽었다.
"감총 대전(甘總大殿)?"
알고 보니 이곳은 감총방이었던 것이다. 형란은 기쁨에 가득 차 진양과 양만풍만 돌아보았고 그들도 놀랐다는 듯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렇다면 이 상인은 사실 감총방의 제자라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감총방을 찾으러 왔는
데 마침 안내가 된 셈이니 참으로 웃기는 경우였다.
"하하. 그렇다면 알고 우리를 도와줬구려."
양만풍은 은근히 기분 좋다는 듯 사람 좋게 미소했다. 상인도 웃는다.
"그럼 내가 괜한 사람 알고 있겠소? 뭐 어쨌든 여긴 이목이 많으니 일단 들어갑시다."
상인은 말을 하며 어느새 대전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두어 번 쿵쿵 하니 커다란 대문이 열리며 감총 제자 두 명이
나왔다.
"아.. 서형. 웬일이오 이 시간에."
"방주님 명으로 귀한 분들을 모셔왔으니 비키게."
상인은 거만하게 짧은 수염을 쓸며 위세를 떨었다. 그에 두 사람은 안색만 붉히며 급히 좌우로 물러섰다. 진양 일행
은 상인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감총 대전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전방에 있는 집은 대청인
듯 싶었고 좌우로 건물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운데가 연무장인 듯 대단히 넓으며 저 뒤로는 큰 건물이 보여
안채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진양은 감총방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몰라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만풍도 일전에 난주에는 왔지만 감총
방이 이리 크지는 않았었기에 입만 쩍 벌리고 말았다. 상인이 그 모습을 보며 은근히 좋아하는 듯 했다. 연무장 가
운데는 수십 명의 감총 제자들이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다. 앞에 사람 모형의 목인(木人)을 상대로 진지하게 혼연권
법을 펼쳤다. 목인은 제법 단단해 보이는데 한 제자가 혼연권법으로 일격을 가하니 팔이 콰직, 하고 날아가 버린다.
진양과 양만풍은 흥미가 돌아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연무를 구경했다. 본래 연무는 남에게 보여주거나 보는 게 아니
라 예의에 어긋났지만, 그들 수련생들이 손님을 보고도 연무하자 별로 상관없음을 알았다. 과연 상인도 그냥 그 옆
에 서서 저것은 혼연권법이니 목인을 새로 또 갈아야겠다느니 혼자 떠들어댈 뿐이었다.
한참 눈여겨보던 진양과 양만풍은 그들의 권법이 용상과 조금 다름을 알았다. 일설에 용상이 주요 묘수를 빼고 제
자들에게 전수했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영웅대회 때 본 권법과는 크게 차이가 났다. 용상은 묵산과 대결을 펼치며
많은 묘수를 보여줬다. 때문에 그걸 본 진양과 양만풍은 지금 보이는 혼연권법과의 차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매 초식마다 적절한 묘수는 빼둔 듯 싶었다. 결정적인 뭔가가 부족하여 고수와 붙는다면 힘도 못
쓸 듯 했다.
"지난날 봐둬서 그런데 정말 소문대로 묘수가 빠진 듯 싶소."
"역시 영웅대회 때 참가하셨구려. 그렇소이다. 혼연권법은 본래가 감총방의 상승무공으로 대제자가 아니면 전부 전
수해주지도 않는다오. 이전엔 도권(道拳)이라 하는 평범한 권법만 썼었지."
상인은 진양 일행을 대단히 신임하는 듯 했다. 양만풍이 한마디 물었는데 그는 배가 넘게 떠든다. 예전 일까지 상세
히 말해주는 폼이 어째 이상했다. 진양과 양만풍은 그걸 동시에 느껴 서로 눈짓을 했으나 함부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한편 형란은 한참동안 연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헌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저번 영웅대회 때 제대로 안 봐서
그런지 별 다른 차이를 못 느끼고 있었다. 그저 양만풍과 상인의 대화를 들으며 그런가 하고 홀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잠시 후 상인의 안내에 따라 대청으로 들어섰다. 감총방은 대단히 돈이 많은 듯 했다. 집의 크기나 땅의 넓이만 보
고도 대충 짐작했지만 안은 더욱 호화스러웠다. 대청 문은 뭐로 만들었는지 은근히 빛이 났고 내부에는 각양각색의
장식품으로 화려함을 더하고 있었다. 문득 안이 훤해 보여 위를 쳐다보니 천정엔 야광주 같은 것도 박혀있었다.
"우리 감총방은 조금 부유하오. 역사는 그리 긴 편이 아니지만 지난날 비단길 덕에 이 주변에 매우 풍요로웠어요.
그 장로분들은 성외와 난주 부근에 땅을 사서 수박하고 보리를 재배해서 호구책을 마련했었지요. 어쩌다 명성이 퍼
져 요즘 돈이 더 모였는데 마침 몽고군과 친구가 되어 더욱 돈이 생겼다오."
"몽고와 친구가 됐소? 오다보니 이곳 한족들은 매우 불만스러워하던 거 같은데."
"하하. 그건 내가 장난친 거지 누가 불만스러워한단 말이오."
양만풍은 그제야 속았다는 걸 알았다. 상인이 혼자 꿍얼거렸던 것까지 계획이었던 셈이다.
"그럼 이곳 한족들은 모두 불만이 없단 거요?"
"그런 건 아니지. 하지만 다들 금국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몽고군이 도움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오."
상인은 다시 그들을 이끌어 대청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원체 집안이 커서 얘기로만 들었던 궁궐 같았다. 사방
팔방으로 여러 개의 문이 나있어 익숙하지 않다면 길이라도 잃어버릴 듯 하다. 중간에 감총 제자들 여러 명이 스쳐
지나가며 상인에게 인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상인의 배분이 제법 되는 듯 그는 인사를 하는 제자들에게 슬쩍 눈
짓만 해준다.
"아.. 저기 계시는군. 방주님. 명하신 대로 진소협 일행을 데려왔습니다."
진양이 상인의 시선을 따라보니 과연 앞엔 용상이 있었다. 그는 대청 끝에 높이 올려진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꼭 황제라도 되는 것 같다. 그는 상인의 말에 고개를 돌리다 양만풍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오! 악소협도 오셨는가."
그는 진양과 형란에겐 살짝 눈길만 줬을 뿐 양만풍만 보면서 좋아했다.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가고는 한껏 기뻐한다.
양만풍은 어리둥절하여 눈만 멀뚱거렸다. 상인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연다.
"양형. 방주님께서 매우 고심하셨소. 방주님은 지난날 양형을 좋게 보았는데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어 참으로 안타
까워하신 거요. 그래서 돕기로 했소."
"아니.. 그럼.."
양만풍은 자신이 할말을 그들이 먼저 하니 당황하고 말았다. 용상이 대소를 터트린다.
"하하. 자자. 그런 얘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안채에 차려놓은 술상이 다 식겠소."
용상은 양만풍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의자 옆으로 들어서는 문이 그의 방이었다. 양만풍이 걸음을 옮겨 형란이
막 따라가려는데 진양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상인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진소협께선 안 들어오시오?"
"나는 본디 호화스러운 걸 싫어하여 그냥 나가 있겠소."
안으로 들어가던 양만풍이 그 말을 듣고 멈춰 서며 말한다.
"같이 가자. 이들은 우릴 도와줄 사람들이니 호의를 무시하면 안되지."
"하하. 호의는 본래 원하는 게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법이야. 나는 이 녀석과 나갔다오마."
진양은 그렇게 말하며 형란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형란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발걸음은 그가 원하는데로 이동
했다. 양만풍이 뭐라고 더 말하려 하자 용상이 한바탕 웃으며 그를 다시 이끌었다. 상인은 잠시 그 자리에 있더니
진양을 쫓았다.
밖으로 나온 진양은 길게 한숨을 뽑았다. 나오는 동안 형란은 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영 아
닌 듯 싶어 묻지 못했다. 이제 나오니 도저히 참지 못한 듯 했다.
"진대협. 왜 저들의 호의를 무시하세요?"
"호의를 무시하다니. 우린 그 호의를 받아도 쓸데가 없으니 받을 필요가 없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이죠?"
형란이 이해할 턱이 없다. 진양은 이미 용상이 반갑게 맞는 순간 뭔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나쁜 뜻은 아니
겠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양만풍이 좋아서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양만풍에게 대단히 호의적인 걸로 보
아 필시 그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상인도 그의 말에 매우 친절히 대답해주지 않았던가.
"자자. 그런 건 천천히 말해줄 테니 주루로나 가자. 시장하구나."
"아! 그래요. 저도 배고프던 차였어요."
형란은 금새 활짝 웃으며 앞서 걸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다 진양 뒤에 있는 상인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상인의 표정이 진양에게 뭔 말을 하고 싶은 듯 했다. 진양도 곧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할말이 있으면 빨리 해라. 나는 시간이 별로 많지가 않다."
"하하. 과연 진소협은 듣던 대로 보통이 아니구려."
상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본명은 서존이오. 영웅대회 때 아무래도 모함을 받은 거 같던데.. 그 얘기가 매우 궁금하구려."
진양은 그가 자신의 행적을 이미 조사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 얘기라니, 알면서도 묻는 게 분명하다. 무슨 수작이
있어서 접근하는 걸까.
"궁금하면 다른 사람에게 알아봐라. 나는 바빠서 이만 가보겠다."
"에이. 뭘 그리 서두르시오. 사실 알긴 아오. 진형과 좀 친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요."
진양은 그가 진형이라 부르자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누가 네 진형이냐? 그리고 나 같은 놈과는 친해지지 말아라. 너까지 한 패로 오인 받아 죽음에 이를 것이다."
"하하. 한 패로 오인 받는 건 이미 오인 받았소. 감총방이 당신들을 데리고 있으니 감총방 자체가 한 패 아니오?"
"용상의 계획이 뭐냐? 양만풍에게 뭘 바라고 있지?"
진양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서존은 안색이 일순 하얘졌다. 허나 제법 얼굴 관리를 잘 하는지 금새 얼굴색을 돌려놓
았다.
"그건 뭐.. 하여튼 양형에겐 좋은 일이라 진형이 괘념치 않아도 된다오."
"말하기 싫으면 관둬라."
"아이고 알았소 알았어. 천천히 알려줄 테니 나와 함께 저리로 갑시다. 객잔까지 가서 뭐 하러 돈 내고 식사를 하시
오? 저긴 감총 대전의 주방이라 먹을 거로 가득하오."
그는 진양의 하대에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하긴 이미 뒤를 캐봤을 테니 짐작하여 별로 화가 나지 않
는 걸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진양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자꾸 친해지려 노력하는 듯 했다.
"나는 의심이 많아서 함부로 남을 따라가지 않는다. 왜 너는 나와 친해지려고 하나?"
"거참 정말 의심도 많네. 진형. 우린 이제 한 식구요. 공생공사(共生共死)란 말이오."
"공생공사라니? 그럼 너희는 평생 우리편에 서겠다는 얘기냐?"
진양은 조금 놀라 물었다. 그러자 서존은 쓴웃음 지며 뭘 좀 먹으면서 천천히 말해주겠다고 했다. 진양은 그 공생공
사라는 말이 양만풍과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객잔으로 가서 돈을 쓰느니 공짜로 먹는 게 낫고 양만풍을
대접하는 이유도 알아야했기 때문에 그는 형란과 함께 서존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