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五 章. 허무한 반란 2
융왕의 기가 막히는 말에 당광은 잠시 멍해졌다. 곧 버럭 호통을 친다.
"네놈이 미쳤느냐! 너마저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저들을 죽여라."
"모조리 죽이라면서요?"
"이 녀석이 뭘 잘못 처먹었나……."
당무도 황당했는지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융왕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융왕의 키가 머리통 하나는 더 크지만 그가 조
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 턱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너 죽고 싶으냐? 뭐를 잘못 처먹었기에 자꾸 헛소리만 늘어놔?"
"헛소리라니요? 전부 죽이라고 했잖습니까."
"적을 모조리 죽이라는 말이지 누가 우리편까지 공격하라고 했느냐! 이전엔 똑똑하던데 이 작자가 돌았나……."
"그렇죠 전 돌았습니다."
순간 융왕의 우수가 번쩍였다. 당무는 눈앞으로 뭔가 따스한 것이 온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 그냥 어
둠 정도였고 들리는 건 퍽, 하는 소리 정도였다. 그리고는 의식이 끊겼다. 너무 센 장력을 맞아 다행히 죽지는 않았
지만 기절하고 만 것이다. 이어 우수를 날려 그의 따귀를 후려치자 머리통과 함께 몸이 석 장은 날아가고 말았다.
"무슨 짓이냐!"
당광은 그의 손이 번쩍하는 걸 보았으나 너무 빨라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당무가 바닥에 쓰러진 후에야 버럭 호통
을 쳤다. 뒤에서 당주고와 당유민의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무슨 짓이라니. 난 돌았다고 했잖아."
"너… 감히……."
"어떠냐? 배신을 당한 기분이. 난 배신을 하는 입장이라 그런지 매우 기분이 좋다. 이제 세상이 내 것이 되겠지."
"미쳤군! 대가는 치르게 해주마."
융왕이 앙천대소 한다.
"하하. 언제부터 자식 사랑이 그리 크셨나. 본래 당무는 아들로 취급도 안 하는 수준이었잖아."
"이놈이……."
그게 사실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융왕의 반란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당광은 융왕을 죽여야겠다고 생
각했다. 그 즉석에서 두 손을 번쩍여 금방 융왕을 공격했다. 적어도 융왕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이다. 형웅강과 문인강목을 한 손으로 상대했다는 얘긴 들었지만 그만한 건 그도 할 수 있다. 당가웅웅장이면 한 손
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두 손을 움직여 용호상박의 초수를 내보였는데 융왕이 한 손으로 막아내는 게 아닌가. 양쪽
으로 빠르게 한 손을 왔다갔다하여 한순간에 처내버렸다. 당광은 다시 우수로 완맥을 노리고 좌수를 그의 가슴에
내질렀다. 그러자 이번엔 가볍게 왼팔을 비틀어 완맥을 노리는 손을 피하고, 다른 손으론 가슴에 날아드는 일 장에
맞섰다. 두 장법이 부딪치자 꼭 지진 일어나듯 쿠쿠쿵, 하는 소음이 울렸다. 당광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 같아 안색
이 벌게진 채로 뒤로 서너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하하. 당가웅웅장 따위가 어찌 내 초고성장(超高聖掌)을 당해낸단 말이냐?"
"초고성장이라고? 그런 장법이 있었나?"
융왕이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자 당광은 깨달아지는 게 있어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옳아……. 네놈은 사실 처음부터 실력을 숨겼구나!"
"그렇다 이 멍청한 놈아. 천하에 감히 누가 나를 따른단 말이냐?"
그러나 이미 깨닫기엔 늦었다. 그의 초고성장이라는 장법은 과연 당가웅웅장보다도 대단했다. 내공의 차이도 대단하
고 정말 절정 고수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이럴 수가……. 설마 네놈이 나를 배신하리라고는……."
"하하. 이제야 깨달은 네놈이 멍청한 거다."
당광은 한참 멍하니 있더니 혼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하……. 허무하구나."
"허무하지. 인생은 무상이다.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나야 능력이 있으니 제일을 노릴 수 있지만 너는 약하니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하……. 그래 오늘 너와 싸우다 죽는 게 좋겠구나."
당광은 그 자리에서 땅을 쿵, 밟았다. 그의 내공이 대단함을 여실히 보여주듯 은은한 진동이 감총 대전에 퍼졌다.
융왕도 웃으며 발을 쿵, 밟자 좀 전보다 더한 진동과 소음이 울렸다. 내공에서 이미 큰 차이가 난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당광은 씁쓸하게 미소하며 두 손을 쳐들고 자세를 취했다.
"아버지! 저희도 돕겠어요."
뒤엔 당주고와 당유민, 왕령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아비인 당광이 모를 리 없지만 어떻게 자신도 못 이기는 자를
상대로 자식들을 싸워라 내보내겠는가.
"헛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라. 전진교를 차지하는 일은 이미 다 틀렸다. 심산유곡에 은거하며 평안하
게 살거라."
"아버지!"
당주고와 당유민은 당무와는 다르게 효심이 제법인 편이었다. 당무가 호가호위 식의 권세를 빌리기라면 당주고와
당유민은 호가호위이긴 하되, 아비를 존경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지금 대세를 모를 리 없다. 좀 전 두어 수 붙으
며 당광이 밀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싸우겠다는 건 죽어도 함께 죽겠다는 말과 같았
다. 당광도 이를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서 가거라."
"흥. 누구 맘대로 간단 말이냐? 저들은 평생 내 종으로 살아야해."
융왕이 코웃음치며 융정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수십 명의 북망채 무리가 그 주변을 겹겹이 둘러쌌다. 단양이십사
진을 펼치고 있던 전진 도사들은 그 위세에 겁을 먹어 이미 오래 전에 진을 와해시킨 상황이었다. 당광이 융왕을
보며 말한다.
"꼭 그리 해야하나?"
"당연하지. 내가 이 날을 위해 네 밑에서 하수인 노릇을 했는데 그 대가는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내 목숨으로 만족하거라. 저런 어린애들에게까지 손을 쓸 참이냐."
"물론 내가 손은 안 쓴다. 내 아들 녀석이 하겠지. 후후."
그의 음흉한 말에 융정이 발맞추듯 뜻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당광은 가볍게 몸서리치며 융왕을 노려보았다.
"정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어찌 하겠다는 거냐?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못 돼."
당광은 그를 정면에 둔 상태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당주고와 당유민, 왕령을 잠시 쳐다보더니 허허 웃는다.
"바보 같은 녀석들. 미리미리 도망 좀 가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소를 지우지는 않았다. 그 미소는 당주고든 당유민이든 정말이지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자애의 미소였다. 그들이 어렸을 때 본 듯한 기억… 몇 번 되지 않았던 듯한 진실의 미소였다. 당주고는
가슴이 뭉클해져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버지. 오늘 저희는 모두 아버지와 함께 죽겠습니다."
"허허… 누가 죽는단 말이냐. 설마 내가 융왕 정도의 녀석에게 패배할 거라 생각하느냐?"
"아버지……."
당광은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말했다.
"천하는 이제 내 것이다. 우리의 계략은 성공하지 않았느냐. 이제 융왕만 죽이면 모든 게 원만하게 풀리는 게야."
"좋아요! 그럼 그 모든 걸 어서 성공시켜야지요."
당유민이 말을 맞춰주었다. 어서 융왕을 죽이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설마 융왕을 죽일 수 있을까. 당광도 당
주고도 당유민도 왕령도 융왕을 죽이는 건 고사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기조차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주고
옆에서 잠자코 있기만 하던 왕령이 봉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저도 돕겠어요."
"그래. 우린 이미 한가족이니 못할 게 뭐 있겠느냐."
지켜보던 융왕이 기어코 웃음을 터트린다.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하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야."
"융왕. 이제 끝장을 보자. 어디 나를 이겨보아라!"
당광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융왕에게로 달려들었다. 배반에 이은 배반이요, 살육에 이은 살육전이 또 벌어지려는 것
이다.
당광은 당가웅웅장을 믿었다. 당년 웅웅객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웅웅객의 자질이 대단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
는 당가웅웅장을 제외하면 특별히 익혔다고 할 만한 무공이 없었다. 오로지 쌍장을 휘둘러 상대를 쓰러트렸고 그것
가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의 경외를 얻었다. 당광은 그의 직계 후손이 된다. 때문에 현재 당광은 당가웅웅장에 매우
대성한 상태였다. 어렸을 적부터 배워 허와 실의 묘수를 알고 장법 하나 하나의 진퇴를 알았다.
그러나 융왕의 초고성장법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자신의 무공만 알뿐 상대의
무공에 대해선 모르는 셈이다. 기껏 아는 거라고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맹렬한 장법이라는 정도다. 좀 전 그와 일 장
을 부딪쳤을 때 그걸 알았다. 장법이 꼭 요동치는 듯한 느낌으로 팔을 타고 전류가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당광
은 선공을 가하기로 했다. 선공이 아니면 크게 고전을 겪을 거라 생각했다. 당가웅웅장은 믿지만 융왕을 이길 수 있
을 거라고는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당광은 전룡파미(電龍波尾)로 선공을 시작했다. 빠른 용이라는 그 말처럼 정말 쌍장의 움직임은 비할 데 없이 빨랐
다. 언제 우장이 날아가는가 싶더니 금새 사라지곤 반대로 좌장이 날아들고, 쌍장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가 싶더
니 눈 깜짝 하는 새 융왕의 안면으로 날아들던 것이다. 당가웅웅장의 초식 중 하나로 동작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당
광이 자주 애용하는 초식이었다. 융왕도 그의 기세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 신중히 대처하기로 했다. 좀 전까지 보였
던 조롱기 가득한 웃음은 지워버리고 진지한 색깔만이 그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순간 당광의 좌수가 번쩍할 무렵, 융왕은 역으로 일 장을 가하고 있었다. 당광이 그의 어깨를 잡으려 하자 어깨를
뺌과 동시에 반대 손으로 일 장을 날리는 공수겸비(攻守兼備)의 수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광은 이대로 있다간 먼
저 맞을 거라는 걸 알았다. 일단 좌장을 접고 우장으로 먼저 융왕의 초고성장법에 정면으로 맞섰다. 아무래도 한번
힘이 어느 정도인가 정확히 파악해두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두 손이 맞닥뜨리며 쩍, 하는 음향의 울렸다. 곧 당광의 안색은 매우 창백해지며, 뒤로 서너 발짝이나 물러서고 말
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초고성장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 정확하게 알고자 맞서봤
는데 그 위력이 대단하여 참 큰일날 뻔했다. 허나 여기서 겁먹을 수도 없고 그럴 리도 없다. 그는 다시 힘을 내듯
이를 악물며 융왕에게 짓쳐 들어갔다. 역시 전룡파미로 수를 시작하되, 이번엔 큰 변초를 하기로 했다. 좌, 우장을
번갈아 가며 휘두르다 틈이 엿보이자 사력을 다해 좌장을 내쳤다.
융왕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가 제법이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지는
않는다. 그 정도야 힘을 들이든 안 들이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가 전룡파미로 이목을 교란시
키자 거센 일 장이 날아들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과연 그대로 좌장이 날아든다. 융왕은 초고성장법에 대단한 자신
감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세가 조금 불안정했지만 빠르게 한 발 앞으로 디디며 우장을 내밀
자 정확히 자세가 잡혀졌다.
또다시 쌍장이 맞붙으니 이번엔 쩍, 이 아니라 쩡, 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내공의 싸움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것
이다. 물론 융왕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한번 장이 부딪치면 융왕은 제자리에 서있는데 당광만 서너 발짝씩 뒤로 비
틀비틀 밀려났다.
"너는 역시 내 상대가 아니다. 당가웅웅장 따위로는 초고성장을 당해낼 수 없다."
"누가 당해낼 수 없다고 하더냐!"
당광은 자존심에 불을 붙이며 또 덤벼들었다. 융왕이 피식 실소하며 사정없이 두 손을 휘둘렀다. 당광이 새로 날린
좌장이 이르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 왼팔의 손목을 움켜쥔 상황이었다. 빠르게 손가락을 날려 곡지혈을 찌르자 당
광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더욱 빠르게 움직여 연액을 건드리려하자 당광은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가까스로
피할 순 있었지만 이미 곡지혈을 점혈 당하여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손을 몇 번 주물럭거리다 놔주었
다. 허나 정말로 그게 주물럭거리는 정도일까. 단지 주물럭거린 수준이 아니라 아예 돌덩이로 두어 번 찍은 듯한 느
낌이었다. 이게 무력인지 내력인지 알 수는 없어도 지금 이 힘 하나만큼은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뼈가 으스
러지는 고통이요, 근육이 멋대로 찌그러지는 고통이었다. 당광은 고통을 최대한 참아냈지만 너무 아파 저도 모르게
신음은 흘러나오고 말았다.
"으음……."
아직 왼팔이 어찌 됐는지 잘 보지도 못했는데 또 융왕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당광은 급한 대로 비호일수(飛虎
一手)를 펼쳤다. 전룡파미처럼 빠르지만 다른 건 한 팔 만으로도 펼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왼팔은 일단 늘어트린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비호일수를 시전했다. 달려드는 융왕의 전중혈을 향해 빠르고도 명확히 날아든다. 융왕은 갑작
스런 반격에 조금 놀라며 몸을 비틀고 다시 다리를 걸었다. 몸을 옆으로 누이며 당광의 발목을 돌려 걸어버리니 당
광이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더구나 비호일수를 막 펼친 상황이라 다리를 걸리는 일엔 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 몸의 축을 뒤로 이동시켜 앞다리를 걸리고도 넘어지는 추태는 면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때문에 비호일수도 완벽하지 못하고 완벽한 건 딱 하나, 융왕에게 공격받을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시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고수들 싸움에선 이런 것이 더 중요했다. 긴 시간보다도 그 찰나의 순간 하나 하나
가 대세를 판가름한다. 정말로 융왕은 반동을 이용하여 새로 우장을 치밀고 있었다. 이번엔 몸통이 아니라 안면으로
날아들어 더욱 위험했다. 당광은 허리가 부러져라 몸을 뒤로 젖혔다. 코 바로 위로 휭, 하고 맹렬한 기운이 지나가
는 것 같았다. 단지 손뿐이 아닐 것이다. 내공이 가득 담긴 위력적인 힘인 듯 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일단 거
리를 두려고 하는데 그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정말로 숨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융왕은 공격이 끊어지지가 않
았다. 장법을 후리고 피하면 다리를 걸며 또 피하면 반동을 이용해 새롭게 일 장을 날리고 또 피하자 양손을 벌려
춤추며 호랑이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당광에게 있어선 위기였다. 이대로 당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이를 본 당주고는 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
의 싸움이 정신 없어 한동안 멍청했지만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그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그걸 당유민과
왕령이 보고만 있을까. 절대 아니다. 당주고가 나가기 무섭게 그들 또한 함께 달려들었다.
헌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바로 왕령이다. 뛰어들고 보니 항상 손에 잡혀있던 봉이 없는 게 아닌
가. 그녀는 속으로 아차, 하고 부르짖었다. 이미 진양에게 넘겨줬는데 너무 습관이 되어 깜빡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여기 올 때도 당주고가 <당신은 그저 구경만 하면 돼. 진양을 봐도 아는 척 하지 말고 조용히 있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라고 말을 해뒀었기 때문에 싸움에 대해선 신경도 안 쓰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시 되
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급하게 봉을 만들 수도 마구잡이로 맨주먹만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바로 떠오른 것은 진양이었다. 형란, 양만풍과 함께 용상 곁에 서서 대결을 지켜보는 진양 말이다. 그의 봉에
는 그녀가 이 나이 때까지 함께 해왔던 정이 든 봉이 들려 있었다. 그도 이제 그녀처럼 한순간도 봉을 놓지 않는
듯 했다. 그녀의 머리론 순식간에 여러 잡념이 스쳐 지나갔고 그 와중에 겨우 입을 떼어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진양! 봉을 잠깐 빌려줘."
진양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봉을 그녀에게 던져버렸다. 진작부터 그녀의 행동에 대해선 매우 신경을 쓰고 있던
터였다. 슬픔도 고통도 억울함도 느끼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긴 했다. 마침 그녀가 당황해하는 걸 보며
그는 깨달아지는 게 있어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봉의 끝을 잡아 휘딱 던지자 왕령은 능숙하게 그 봉
을 받아들었다.
"다시 봉을 왜 돌려줘?"
"그녀가 필요하대잖아."
양만풍의 말에 진양은 감정 없이 대답했다. 양만풍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한순간 그 눈을 부릅떴다.
"잠깐… 설마 저 왕령이란 여인은……."
"그래 너도 내가 유루봉법을 쓰는 걸 보고 들었지? 아까 내가 외쳤듯이 난 수녀에게 이 봉법을 전수 받았어. 그리
고 수녀는 바로 왕령이야."
"이럴 수가……."
양만풍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실로 할말이 없었다. 근래에 들어선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살면서 금수쌍녀를
찾아다녔는데, 사실은 바로 그 수녀가 진양이 사랑하는 여인, 왕령이었다니……. 이미 한참 전에 진양의 봉법이 바
로 수녀의 봉법, 유루봉법이란 얘기를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먹었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 그 수녀가 왕령이라니.
왕령에게 별로 좋은 인식이 있었던 건 아니어도 그리 나쁜 여인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설마 수녀일 줄이야. 양만
풍은 어이도 없고 가족을 몰살시킨 한도 치밀어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진양은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
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만풍의 가족이 금수쌍녀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격전장은 매우 복잡했다. 융왕을 가운에 두고 당광, 당주고, 당유민, 왕령 4명이 일사분란하게 협공을
가하고 있었다. 과연 이리 되자 융왕이 밀리는 듯 했다. 이 중 당주고나 당유민의 무공은 당광, 왕령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전진수검을 펼치니 그런 대로 괜찮았다. 또한 왕령의 유루봉법은 과연 기괴하여 융왕도 조금 당황한 상
태였다. 융왕은 이대로 있다간 크게 패할 걸 알았다. 일시에 내공을 끌어올리고 한순간 터트리며 쌍장을 매우 빠르
게 움직였다. 사면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두 손은 당당하고 굳건히 열 손 이상으로 변해갔다. 그만큼 빠르게 움직
인다는 얘기다.
당광과 왕령은 직감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껴 몸을 내뺐다. 그러나 당주고, 당유민은 아직 무공이 일천(日淺)하여 그
걸 느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융왕의 손바닥이 그들 몸으로 사정없이 날아든다. 몸을 내빼던 당광과 왕령은 소스
라치게 놀라 각자 당유민과 당주고를 보호했다. 다행히 급히 움직인 덕에 그들 남매는 경상 정도로 그쳤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왕령의 입에서 터진 말이었다. 시선은 당주고에게 고정되어 있다. 진양은 이 모습을 보고 정말로 혼인했음은 물론
그녀가 여전히 진실 되게 당주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걱정 어린 물음에 당주고는 고개를 끄덕였
다.
"난 괜찮아… 누이가 다쳤을 거야."
"저도 괜찮아요. 어깨에 일 장을 빗맞아 조금 쑤실 뿐이에요."
그들 둘 다 모두 괜찮다고만 했다. 그러나 안색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분명 경상 정도겠지만 융왕 같은 인
물에게 초고성장법 같은 장법을 격타를 당했으니, 그거야말로 일반 강호인들에게 일 장을 정통으로 맞는 것과 동격
인 걸지도 몰랐다. 왕령은 조금 화가 났다.
"융왕! 죽고 싶으냐?"
"흥. 이젠 네년도 나서는구나. 난 네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바로 수녀라는 걸 말이다."
"너……."
그의 말에 다들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좀 전에 왕령이 펼친 봉법을 보고 그녀가 수녀라는 걸 짐작
했다. 그렇게 유유한 봉법은 유루봉법 뿐일 것이고 또한 진양과 봉수 초식이 같지 않던가.
"너는 당주고와 혼인했지. 그리고 당광은 네가 수녀라는 걸 알면서도 혼인을 수락했다. 왜냐하면 넌 도움이 되기 때
문이야. 어차피 신분이야 금방 탄로가 나지 않을 것이며 오늘 같은 날 만일 내가 없었다면 영원히 진짜 정체가 파
묻혔을지도 모르니까."
"닥치지 못해? 더 지껄이면 죽여버리겠다."
"하하. 네 까짓게 감히 나를 죽이겠다고? 네가 제법이긴 해도 너 홀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놈이……."
왕령은 쌍심지를 켜며 봉을 휘저었다. 소원범활로 하여 자도종모, 이아야마 등 뛰어난 절초를 사용했다. 봉은 그녀
의 두 손을 왔다갔다하면서 끝없이 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혼자로는 융왕을 상대하기 무리였다. 봉을 돌려
내려찍다가도 융왕의 무시무시한 장법이 날아들면 어쩔 수 없이 피해야만 했다. 본래 유루봉법은 공격력이 있다고
는 할 수가 없다. 내공이 대단하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강한 힘을 내지 못한다. 애당초 유루봉법도 금녀의 악
행에 의한 슬픔 때문에 만든 봉법이라 살기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융왕의 무시무시한 손바닥과 가볍게 부
드러운 유루봉법이 부딪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봉이 한순간 작살날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루봉법이 명성을 날리는 건 역시 전(轉) 때문이었다.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상대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
는데 만일 상대가 검을 들어 막는다면, 봉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회전의 방향이 뒤집혀 반대로 회전한다. 그럼 반대
쪽 봉 끝이 밑에서 돌아올라 와 자연히 상대방의 턱을 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기회에는 힘을 준다. 결
정적으로 격타하는 기회, 즉 한번에 죽일 수 있는 기회라던가 부상을 입히거나 또는 점혈의 기회일 때는 격타하려
는 순간 힘을 주어 효력을 발휘한다.
허나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유루봉법은 그 특성상 절대로 봉을 잡혀선 안 된다. 일단 무기를 잡힌다는 건 굉
장히 위험한데, 하물며 융왕 같은 고수에게 잡힌다면 맥없이 뺏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유루봉법은 회전을 주축으로
하니 무기를 잡히는 순간 그 흐름이 끊기는 셈이다. 상대의 무기를 잡는 건 여러 수법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수법의
오묘함, 또는 내공이다. 융왕은 손이 크고 내공도 대단하니 아무래도 봉을 그냥 내리쳤다간 잡힐 위험이 컸다.
그런 이유로 봉의 회전로를 자꾸 바꾸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결과적으로 봉의 흐름을 끊는 셈이니 그 위력이 나올
턱이 없던 것이다. 왕령이 본 실력을 전부 발휘해도 상대가 안 되거늘 이런 상황임에랴. 결국 채 10여 동작을 못 넘
기고 왕령은 일 장을 맞고 말았다. 어깨에 얻어맞아 비틀비틀 물러섰다. 융왕이 다시 접근하자 드디어 당주고가 몸
을 날렸다.
"멈춰라! 그녀는 건드리지 말아라."
"하하. 그래 마누라가 당하니 슬프겠지.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어차피 너희는 모두 죽고 그녀는 내 아들 녀석이
잘 돌봐줄 테니까."
"뭐… 뭐라고?"
당주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말이 매우 더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왕령은 둘 다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
다. 함께 검과 봉을 휘두르며 다시 융왕에게 달려들었다. 융왕은 그들의 공격에 조금도 주춤하지 않았다. 그들 둘이
양옆으로 나눠 서서 주위를 맹렬히 긋고 있었지만 이기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령이 봉을 앞뒤로 돌리
다가 갑작스레 그의 허리를 찔렀다. 회전의 힘을 이용하여 바로 때리려하자 그 기세가 제법 무섭다. 반대편에서 당
주고가 펼치는 선도입지는 이미 잘 알려진 전진교의 대표적 검법 초식이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세가 있어 함
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헌데도 융왕은 잘도 막아냈다. 날아오는 봉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한편으론 고개를 숙여
당주고의 검을 피해냈다. 왕령의 봉이 그의 주먹에 맞자 곧장 역으로 회전하며 반대편 허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융
왕은 이미 여러 번 보고 들어서 한순간 손을 뻗어 봉을 끝을 잡아버렸다.
당주고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황급히 검을 그었다. 융왕의 목을 향해 평으로 그어지자, 그는 검이 채 닿기도 전에
먼저 손을 날려 당주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양손으로 두 상대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한 셈이다. 하지만 발이 있었
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당주고와 왕령은 동시에 두 발을 날렸다. 그러자 융왕은 봉을 강제로 잡아끌어 당주고의
발에 갖다댔다. 이리 되자 왕령의 자세가 무너짐은 물론이요 당주고도 놀라 발을 뺐다. 이게 기회였다. 융왕은 사정
없이 왼발을 들어 그들 둘의 안면을 세게 후려갈겼다. 짧게 파팍, 치는 것이 보통 빠른 게 아니었다.
둘 다 모두 무기를 놓치고 급히 뒤로 물러서는데 어느새 면전으로 융왕이 달려들고 있었다. 맹렬히 두 팔을 뻗어
쌍장을 그들에게 펼쳤다. 당주고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당가웅웅장을 펼쳤으나 왕령에겐 그럴 만한 무공이 없었다.
독조수가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았고 본래 손톱을 길러야 진짜 제대로 쓸 수 있는 무공이라 대항할 방도가
없었다. 기껏해야 몸을 최대한 틀어 어깨에 격타 당하는 정도였다. 아까 맞았던 쪽 말고 반대편 어깨를 맞으니 양어
깨가 모두 시큼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이 막혀 호흡도 곤란해지고 말았다.
당주고는 융왕과 손바닥을 맞붙이자 단숨에 몸이 붕 뜨고 말았다. 어찌나 위력이 대단한지 하마터면 단전이 다 박
살날 뻔했다. 하기야 당광도 당해내지 못하는데 그가 이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상은 입어서 후회하기는 늦
었다. 융왕은 부상을 입은 두 명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야 원 상대가 안 되는구나."
"너……."
왕령이 이를 갈며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부상을 입어서 그런지 머리가 멍했다. 융
왕은 음흉하게 웃으며 주저앉아 있는 당주고와 왕령 앞으로 다가갔다. 왕령이 뭔가를 직감하고 급히 당주고를 막자
융왕이 말한다.
"대신 죽으려고? 여기 열녀가 한 명 있었군."
왕령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당주고를 바라보았다. 당주고가 숨을 할딱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도망치라
는 뜻 같았다. 허나 왕령이 이에 어찌 따르겠는가. 그녀는 도리어 눈을 빛내더니 한순간 좌수를 돌려 융왕의 무릎을
공격하려 했다. 이렇게 되자 어떤 수가 없다. 독조수를 펼치기엔 여건이 맞지 않았지만 상황이 안 좋으니 쓸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금녀를 묻을 당시 꽁꽁 얼은 바닥을 파헤칠 때 썼던 그 식으로 독조수를 펼쳤다. 정말로 독조수는
손톱이 길어야 그 위력이 나온다. 내공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왕령은 내공도 적고 손
톱도 없지만 요령을 알았다. 어릴 적 금녀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기른 손톱과 익힌 무공 때문에 제법 능통해있었다.
총기도 있고 자질도 괜찮아 이런 일을 벌이는데는 그녀만큼 뛰어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할 수 있다.
손톱이 짧아 위력은 없지만 일단 한번 펼치니 정말로 이름처럼 손가락에서 독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융왕의 무릎
을 단숨에 깨트릴 듯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융왕은 그녀의 손이 무릎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가 한순간 무릎을 굽히
고 몸과 함께 앞으로 밀어나갔다. 갑자기 무릎이 굽혀지고 왕령의 안면으로 날아들어 그녀는 손도 못쓴 채 얼굴을
맞고 말았다. 실제로 이러한 동작은 찰나의 순간에 모두 일어난 것이었다. 융왕의 무공이 대단하여 이렇게 느긋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좀 전 왕령의 공격은 기습에 가까워 평범한 강호인은 피할 엄두도 못내는 수준이
었다.
왕령은 광대뼈를 맞아 볼이 시뻘게지고 말았다. 공격을 들어가다 역으로 맞았기 때문에 그 위력은 배가되어 목도
조금 뻐근했다. 좀 더 세게 맞았다면 목뼈가 부러질 수 있었다는 상황이란 얘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당주고의 정
면을 가로막고 있었다. 함께 나자빠진 채로 꼭 금방 함께 운명할 듯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눈빛 하나만은 달랐다.
둘 다 부상을 입고도 죽을 거면 함께 죽겠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후후. 그래 죽는다면 함께 죽는 것도 좋겠지. 허나 내 아들 녀석이 널 원하는데 어찌 그냥 무시하겠느냐."
"오라버니를 해하면 나도 혀를 깨물고 죽을 테다."
"하하. 그럴 능력이나 있느냐."
순간 융왕의 몸이 번쩍했다. 희뿌옇게 뭔가가 쌩, 하고 앞으로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기가 무섭게
왕령의 견정혈엔 이미 융왕의 손이 닿아있었다. 그걸 깨달음과 동시에 몸을 비틀었으나 이미 늦었는지 온몸에서 힘
이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완벽히 혈도를 짚이고 만 것이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곧장 아혈마저 짚어버렸다. 융
왕이 대소했다.
"것 봐라. 너는 자결할 능력도 없는 년이다."
융왕은 잔악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당주고에게로 뻗어갔다. 왕령의 눈빛이 점점 처참해져갔다. 그때 당광이 다시 나
섰다.
"후배들에겐 손을 쓰지 않는다면서 뭐 하는 것이냐?"
"그럼 내 아들 녀석에게 죽이라 일러야겠군."
"내가 가만있을 것 같으냐!"
당광은 즉각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싸움이라며 융왕은 그를 낮게 비웃었다. 당광의 좌, 우장이 번갈아
날아들자 융왕은 빠르게 손가락을 날려 그의 양팔 곡지혈을 노렸다. 당광이 고황승천(高皇昇天)으로 변초하여 융왕
의 머리를 때리려했다. 변초한 덕으로 곡지혈은 무사히 피했으나 융왕이 그렇다고 그만둘 위인이 아니었다. 당광이
변초하기 무섭게 자신도 변초하며 그의 양팔 곡지혈을 기어코는 누르고야 말았다. 당광은 팔에 힘이 쪼옥 빠져 자
세가 금방 흐트러지고 말았다. 융왕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어깨를 일 장으로 내리찍었다.
"으윽!"
당광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우드득, 하고 어깨가 부러지는 오금 저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유
민이 놀라 달려들었다. 검을 뽑아 순양검요의 정초로 융왕의 양팔을 노렸다. 검이 흔들거리며 이리저리 혼란스러운
게 보통 초식이 아닌 듯 싶었다. 허나 융왕은 이 초식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다지 두려워할 게 없었다. 어차피 그
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세니까. 그는 검이 날아오길 기다렸다가 가까이 근접하자 돌연 손가락을 퉁겼다.
깡, 하고 금속성이 울리며 당유민의 검이 하늘 위로 빙글빙글 돌며 떠올랐다. 당유민은 저도 모르게 그걸 보고야 말
았다. 그 순간 융왕은 그녀의 거골혈(巨骨穴)을 점혈하여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틈에 당광은 융왕에게로 또 남은 손으로 일 장을 날리고 있었다. 왼팔 어깨가 부서져 엄청난 고통과 전의를 상
실했음에도 그는 꿋꿋이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우장이 또 덤비자 융왕은 이제 지겨웠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곧장 우장을 중심으로 한 손을 빙글 돌렸다. 언뜻 보기엔 그냥 돌리는 것 같지만 상대의 장이 날아오는 중에
이런 짓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럴 만큼 이건 그냥 돌리는 게 아니라 사망난전(四罔亂轉)이라는 초식이었다.
당광의 우장을 축으로 하여 빠르게 한 바퀴 돌리더니 어떻게 그의 완맥을 붙잡고 말았다. 당광은 온몸에 힘이 빠지
는 걸 느꼈다. 더 있다간 꼼짝도 못할 거라 생각하고 젖 먹던 힘까지 쓰듯 발을 힘겹게 걷어올렸다. 거의 발악에 가
까운 몸짓이었다.
그에 융왕은 봐주다시피 완맥을 놓아주고 그의 가슴을 밀었다. 살짝 밀었는데 당광은 아직 기운이 안 돌아왔는지
한동안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융왕이 적당한 속력으로 다가가서는 한마디 내뱉고 일 장을 내질렀다.
"이제 죽을 때란다!"
당광은 이게 마지막 일 장임을 알았다. 사력을 다해 맞서야 한다. 날아드는 일 장의 속력은 움직임처럼 그리 빠르지
가 않았다. 죽이고자 했다면 이미 골백번은 죽였을 테니 이것도 결국엔 가지고 놀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면 죽을 것이다. 당광은 곧장 필생의 공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우장으로 맞섰다. 이전까지와 다른, 당
광이 죽느냐 사느냐를 판가름하는 위험한 맞대결이었다. 두 손바닥이 마주치자 역시 쩍이나 쩡, 하는 소리가 아닌
펑, 하는 소리가 났다. 강렬한 폭발음처럼 당광은 오른팔의 뼈들이 가닥가닥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고 가슴엔 무시무
시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걸 당광이 느낄 때쯤엔 이미 실 끊어진 연인양 훨훨 날아가고 있을 때였다. 결국 당광이
최후의 일 장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아… 아버지!"
당주고와 당유민이 꼼짝달싹 못하면서도 입은 벌려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부축해주고 싶고 어떠
냐고 묻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아까 융왕이 행했듯 당주고는 부상을 입어 그렇고 당유민은 거골혈을 맞아 온몸
이 마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왕령은 말도 못하는 처지라 말할 것도 없다.
당광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지며 열 바퀴가 넘도록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낯빛
이 시뻘건 게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융왕은 그 자리에서 숨만 할딱였다.
"하하. 당광. 넌 이렇게 죽는구나."
융왕은 만족하는 듯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당가웅웅장은 그런데로 쓸만했다. 다만 내 내공이 너무 대단해서 나를 이길 수 없는 거야. 네 실력은 사실 대단
하지만 나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지."
"저… 정말로… 대단하군……."
당광이 간신히 한 말이었다. 융왕은 한번 더 대소했다.
"대단할 수밖에 없다. 내 사부님은 사실 누군지 잘 모른다. 그냥 무공만 전수해주고 언젠가 사제관계만 맺었을 뿐이
었다. 그런데 무공 하나는 대단하셨지. 사부님이 말씀하시길, 천무대협과 붙어보지 못한 게 한이라 하시더군."
"천… 천무대협……. 대… 대단한… 일대 무… 학 종사……."
"그래 천무대협은 말 그대로 천무다. 그러나 만일 내 사부님과 붙었다면 반드시 천무라는 별호를 버려야했을 것이
다. 내 사부님이야말로 진정한 무학의 대종사였거든."
융왕은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듯 싶었다. 하기야 그의 무공만 보아도 사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광의 죽음이 임박하고 있었다. 잠시 경련이 멈추더니 또 사
지에 경련이 일어나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연신 기침도 해댔고 그 입 속에선 핏방울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
다.
"인… 인생무상……. 천하… 이제 겨… 겨우… 내 것이 됐는데……."
"네 건 되지 않았다. 될 뻔했을 뿐이지."
"이제… 우리 당… 당 씨… 집안… 이름… 드세게……."
그의 말은 갈수록 알아듣기 힘들게 변하고 있었다. 당유민과 당주고가 쓰러진 채로 계속 처절하게 뭐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당광은 그 외침을 전혀 듣지 못하는 듯 했다.
"배반… 반… 이… 응보……. 나는 아… 아직… 끝… 않았……."
격전장내는 매우 고요해졌다. 돌연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한 명의 강호인은 그렇게 죽고 말았다. 이제 융왕의 손에
이루어질 일대 살육전의 서막일까. 바닥에 즐비 차게 늘어진 강호인들, 감총 제자들. 그리고 여지까지 바닥에 정좌
하고 있는 용상 이하 사람들. 또한 마옥 등 전진 오자, 진양 일행……. 모두 숨 한번 고르게 내쉬지 못했다. 세상의
시간은 그렇게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