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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十 七 章. 일단락, 그리고 갈등 2 (57/90)

                                第 二 十 七 章. 일단락, 그리고 갈등 2

융왕 등이 떠난 후 감총 대전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쓰러진 강호인들과 감총 제자들의 혈도를 모두 풀어주고 마

옥 등에겐 단약을 주며 회복을 빠르게 하고 있었다. 이번 싸움으로 부상자와 사상자는 그 끝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특히 강호인들과 감총 제자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 피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건 무림의 별 몇  개가 떨어졌음이요, 

감총방의 뼈아픈 손실이었다. 

용상의 상처도 제법 컸다. 융왕을 상대로 싸우느라 내상이 대단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팔과 어깨가 부러졌으니 여기 

있는 자들 중 부상은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호들갑떠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었다. 많

은 사람을 대청이 수용할 수 없어 이미 넓은 연무장에 막을 치고 임시로 치료할 공간을 만들었기에 모두가  그곳에

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한편 진양은 형란, 양만풍과 함께 난주 성외에 있는 야산에  올라 있었다. 이들 셋은 부상이 대단한 경우가 아니라 

단약 좀 먹고 운기조식하니 움직이는 일엔 문제가 없었다. 양만풍과 형란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도우려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난주에 있는 모든 의원들이 전부 감총 대전에 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

서 어물거려봐야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란 게 의원들의 말이었다. 

진양은 야산에 올라 멍하니 서쪽 하늘만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 있는 이름 모를 산이 안개와  구름에 뒤덮여 제법 

볼만했다. 진양이 그걸 보고 있는 걸까. 양만풍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고작 저런 광경이나 보면서 멍

하니 넋이 빠졌을 리는 없었다. 그가 멍청하게 있는 건 필시 왕령 때문이리라. 

그의 짐작대로 정말 진양은 왕령 생각에 넋이 빠져 있었다.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야 자신이 대단한 실수를 한 

거라고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당주고와 그녀의 행동이 보기 미웠어도 이번 일은 큰 실수였다. 융왕과 융정이 어

떤 인물이던가. 아주 음흉하고 사악하여 왕령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진양은 그녀의 행동이 

아니꼽게 느껴져 그대로 보내버렸다. 크나큰 실수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지나가고 그건 어제 일이 되어버렸다. 

"정말 멋있는 광경이에요. 구름으로 뒤덮인 산이 매우 보기 좋군요." 

형란은 분위기도 파악 못하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양만풍이 진양 몰래 눈짓을 보내자  그녀는 뭘 또 잘못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꽉 다물었다. 다행히 진양은 못들은 듯 하다. 

"진양. 이봐 진양아……." 

"으… 응?" 

양만풍이 두 번이나 부르자 겨우 듣는 진양이었다. 진양은 꼭 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양만풍이 잠시 

여유를 두다가 말을 잇는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 일은… 너무 자괴감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 

진양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녀가 작은 감사의 표현이라도 했다면 네가 가만히 있었겠니?" 

"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보낸 건 잘못한 거야." 

"아니라니깐.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고 은혜에는 역시 보은도 있는 법이야. 대가를 바라는 건 물론  좋은 게 아니

지만, 그래도 어떻게 고맙다는 눈짓한번 안 보내?" 

양만풍의 말은 맞는 말이라 그로선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잘못했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울 수 없었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허나 나도 크게 잘못했어. 그들은 따지고 보면 갓 결혼한 상탠데 서로 위하는 마음이 대단

하겠지. 그걸 생각하지 않고 위험에 빠지도록 좌시한 건 정말……." 

"괜찮다니까. 방금 내가 말했잖아.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어. 나쁜  일을 해도 언젠가는 나쁜 일이 돌아오기 

마련이지. 수녀는 오래 전부터 악행을 일삼아 죄악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그건 틀렸어!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야." 

진양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양만풍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옹호해주기만 하는 건 옳지 못해. 사실은 사실대로 처리해야지." 

"아니 그거야말로 틀렸어! 그녀는 금녀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지른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자신의 의지만 있었다면 그런 악행을 하기도 전에 자결을 했을 거야. 넌 금수쌍녀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한번도 못 본 듯 하니 내 말을 이해 못하겠지." 

그의 말에 진양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양만풍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난 본래 양 씨였어.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겠지." 

진양과 형란이 고개를 끄덕인다. 

"난 양 씨로 하남 지방에서 태어났어. 우리 마을은 작은 촌으로 다른 마을과 별다른 왕래도 없이 그저 조용하게 사

는 곳이었지. 모두 농사를 짓고 그 안에서만 지냈으며 혹 여행자들이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않았어. 조금 폐쇄적이라

고나 할까." 

진양과 형란은 그가 하남 지방 출신이란 걸 이제야 처음 알았다. 진양은 직감적으로 이 얘기를 해주는 이유가 왕령

과 관계됐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8살 때였지. 마을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괴상한 사람들이 지나간다더군. 기억은 자세히 안 나는데 무척 

괴인들이 지나갔던 건 기억해. 가서 보았더니 정말로 괴인들이었거든. 한 명은 추악하게 생긴 노파고 한 명은 가면

을 쓴 소녀였으니까." 

"그건……?" 

"그 중 노파는 단단해 보이는 철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었고, 소녀는 매우 가벼워 보이는 봉을 하나 들고 있

었어. 노파는 몸에서 과격한 기운이 풍기고 소녀에게선 수줍은 기운이 풍겼지. 한마디로  느낀 건 단 한 가지, 대조

적이었다는 거야. 이건 너무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지. 뭐 그 날 기억은 생생하게 살아있지만……." 

진양이 뜨끔하여 물었다. 

"설마 그들이 금수쌍녀?" 

"그래. 바로 소녀가 왕령이자 수녀였으며 함께 걷는 노파는 금녀였다." 

진양은 금녀라는 말을 자꾸 들으니 가슴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분명 무슨 짓을 벌인 게 틀림없다. 순간적으로 최악

의 상상이 스쳐 갔으나 억지로 지워버렸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 

형란이 듣다가 물은 것이었다. 양만풍의 안색이 금방 어두워진다. 

"그 날은 유난히 기억에 똑똑히 남아있지. 그 일을 내가 어떻게 잊겠어? 겨우  40여 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고통

과 공포에 몸부림치며 하나 둘씩 피를 흘리던  그 광경을! 그렇게 많은 피는 그때  처음 봤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

해." 

"서… 설마……." 

"그래! 금수쌍녀가 우리 마을을 몰살시켰단 얘기다!" 

진양은 설마 했던 얘기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였어. 갑자기 마을 가운데에 서서는 둘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마을 사람들

을 죽이기 시작했지. 잔인하게… 악랄하게… 마치 살귀 같았어.  늙은이고 어린애고 없이 모조리 개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더군. 난 그때 두려움에 젖어 무작정 집까지 도망쳐버렸지. 얘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날 호되

게 나무라시며 집안에 있던 몽둥이를 들고 나가셨어. 그리고 내가 본 건 아버지의 시체야." 

"……." 

"그때 내 기분을 넌 알겠니? 갈기갈기 찢겨진 사지와 부서진 머리를! 그게 내 아버지라는  걸 알았을 때 고작 여덟 

살 먹은 꼬마가 생각한 것을!" 

진양도 형란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로지 양만풍만 홀로 소리쳐댈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보고 기절하셨는데 그들은 기절한 어머니마저 죽여버렸지. 기절한 어머니를 단숨에 죽인 자는 바로 

수녀야. 봉으로 어떻게 배를 이리저리 때리니까 돌아가시더군. 하하… 그래 그렇게 돌아가셨어. 매우 아프셨나봐. 눈

물까지 흘리면서… 만풍아! 만풍아! 하시던 걸 보니까 말야! 난 그것을 보고 생각했지. 아니 결심했어.  이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이 미친 마녀 두 명을… 이유도 없이 우리 가족을 죽이고 힘들게 농사진 땅에 피를 뿌리며 마을을 

송두리째 쓸어버린 그 마녀 두 명을!" 

"만풍……." 

"난 그 자리에서 수녀에게 덤벼들었어. 그녀가 수녀인지 지랄인지 내 어찌  알겠냐만 그냥 무작정… 무공도 모른 8

세 소년이 그냥 팔만 휘두르며 달려들었지. 그러자 그녀가 나를 걷어차더군. 어디를 맞았는지는 기억이 안 나. 다만 

맞고 매우 아팠어. 슬프고 그녀를 죽일 수도 없다는 것에 열이 뻗쳤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난 그

래서 돌멩이를 들어 그녀에게 마구 던졌어. 맞는지 안 맞는지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도 기억이 안 나. 그때 내 상

태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날 죽이려고 할 때 누군가 나타나서 구해준 기억은 나." 

"누가 구해줬지?" 

양만풍은 열이 올라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몰라! 그 분이 누군지 몰라.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 좀 늙은 할아버지였을 뿐이야. 단지  나에게 악가창법을 

전수해준 분이자 책을 읽게 해주고 의(義)와 협(俠), 도(道), 충(忠)을 알게 해준 분이야." 

"……." 

"1년 동안 그 분은 날 가르쳤고 난 1년 만에 많은 걸 깨우쳤어. 악가창법을 전수받고 이름도 악  씨로 바꿨지. 그리

고 내 고향에 되돌아 가봤어. 예상대로 모두 파괴되어 있더군. 하나도 남김없이… 말 그대로 폐허였어." 

여전히 말을 잇는 양만풍을 향해 진양과 형란은 단지 눈만 뜨고 있었다. 

"그 후로 난 금수쌍녀를 찾으러 떠났어. 사부님도 아직 모든 걸 전수하지 못했다 하시며 나와 동행했지. 5년을 그렇

게 헤맸어. 사부님께 창법을 계속 배우고 지식도 쌓으며 이리저리 천하를 방황했지. 결국 금수쌍녀는 못 찾았고 사

부님은 함께 떠난 지 5년이 되던 겨울 날 돌아가셨어……." 

"그땐… 아마 그녀가 나와 함께 있을 때일 거다. 금녀는 이미 죽었을 때고……." 

진양의 말해주자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침통한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멍하기만 

했다. 진양도 형란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양만풍은 정신을  차리며 길게 허희탄식했다. 진양을 잠시 바라보더니  문득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금수쌍녀가 저지른 악행은 이 말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걸 알고 있겠지……. 수녀가 강요에 의해 했건 아

니건 그녀는 어쨌든 그걸 따랐으니 잘못한 거야. 나라면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못해." 

"만풍……. 령아는 효심이 깊어 그런 거야." 

"나도 효심이 있다! 네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제 효를 지키자고 남의 가정을 싹 망하게 한단 말이냐?" 

양만풍은 크게 흥분한 듯 했다.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대며 열을 낸다. 

"대답해봐라! 너도 내 입장이 돼서 생각해봐!" 

"만풍. 그만 하자. 우리 몸도 좋지 않으니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자." 

진양은 그의 상태를 짐작하고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양만풍이 다시  뭐라고 하려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양대협! 양대협! 방주님께서 찾습니다!" 

뛰어온 자는 감총 제자였다. 용상이 양만풍을 찾는다는 말을 전하러 온 듯 했다. 양만풍은 진양을 쳐다보더니 길게 

탄식하며 감총 제자와 함께 대전으로 떠났다. 

"양대협이 가여워요. 저런 가슴 아픈 과거가 있었다니……." 

떠나는 양만풍을 보며 형란이 한 말이었다. 진양은 그녀의 말에 쓰게 웃었다. 

"세상 사람 모두 한 가지씩의 슬픔은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슬픔을 겪어보지 못한 자는 저렇게 클 

수 없지." 

"저도 있을까요?" 

"바보야. 네 과거 중에 가장 슬프고 안타까웠던 일이 뭐야?" 

형란은 그의 말에 멍하게 있다가 곧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필시 형웅강의 죽음을 생각했으리라. 진양도 

슬픔이 없을 리 없다. 형란에게 형웅강의  죽음이, 양만풍에게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몰살이 있었다면, 진양에게는 

왕령이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여자.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다행히 그것들은 모두 

옛일이었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이요, 잊고 싶은 기억이다. 이심치상단의 효능일지  어떤 상황의 결론인지 진양은 이

제 왕령을 생각하며 깊은 슬픔에 잠기는 일 따윈 없었다. 다만 그녀를  아직 그리워하긴 하고 안타까움만은 버리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는 형란과 함께 잠시 산 경치를 구경하다가 난주성으로 돌아갔다. 가을 바람이 점차 뼈를 시리게 몸을 찌르고 허

전함은 추위로 변하는 그 어느 날이었다. 

이틀이 지나고 용상이 사람들을 부른다는 말에 진양은 침실을 나섰다. 방에서 나오며  보니 다른 사람들도 많이 보

였다. 뭔가 분주해 보이는 게 무슨 일을 벌이려 하는 듯 했다. 2층에서 형란도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형란이 진양에게 물었지만 알 리가 없는 진양은 고개를 뒤흔들 수밖에 없었다. 헌데 정말 날은 날인가보다. 영빈전

을 나와보니 감총 대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연무장으로 모이고 있던 것이다.  그 날 있었던 강호인들은 물론이

고 감총 제자들도 보였다. 마옥 등 전진 오자 역시 한쪽에 자리를 잡아 앉아있었다. 무굉도 어느새 나타나서는 진양 

곁에 찰싹 붙어있었다. 

이곳에 모인 군웅들 중 태반이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듯 했다. 어떤 이는 절뚝거리고 어떤 이는 부축을 받아 나

오는 것이 모두 치료하려면 한 몇 달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모이는 걸 보면 또  이번에 모이는 이유가 

보통 중요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군웅들이 하나 둘씩 모여 순식간에 연무장을 다  메워버리자 그제야 용상이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쪽 팔은 쓰지도 못하는 듯 축 늘어져 있고 혼자 걷지도 못하는지 제자 

세 명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 옆으론 양만풍도 따라오고 있었고 한마일, 서존도 보였다. 

용상이 겨우겨우 연무장 앞에 있는 단상에 오른 후에야 한 제자가 소리쳤다. 

"어지러운 이때 모두 몸이 편치 않으면서도 전부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짤막한 서두로 시작하는 외침이었다. 

"사실 오늘 매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감총방의 가장 큰 일이자 앞으로  무림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장 중요한 일

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불편한 여러분을 모신 겁니다." 

"그 중요한 일이 대체 뭐요?" 

연무장 앞쪽에 서서 있던 한 강호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이미 싹 지워졌지만 몸이 아픈데도 

자꾸 불러내서 마침 짜증나던 차였던 것이다. 이곳에 있는 거동이 불편한 군웅들은  대체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

고 있었다. 그 강호인의 말에 감총 제자는 미소했다. 

"매우 중요하지요. 방파의 새 방주가 취임하시는 날인데 어찌 안 중요하겠습니까?" 

군웅들이 놀라 웅성거린다. 그들에겐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전투로 용방주님께서 크게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방주님께선 이번  일로 감총방에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고 하셨습니다. 방주가 몸이 성치 않으면 방파가 문란해질 거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방주를 선출하

기로 결정이 됐습니다." 

"부상이 그 정도요? 융왕 그 자식이 뭘 어쨌기에……." 

군웅 중 한 명이 묻자 이번엔 용상이 직접 말문을 열었다. 

"융왕의 무공은 가히 절정의 경지였소. 난 그와 무리하게  싸우다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오. 그래서  새로이 

방주를 내세우려는 거요." 

잠자코 듣고 있던 무굉이 웃으며 중얼거린다. 

"융왕 고놈이 뭐가 센가. 별 것도 아니던데." 

그 중얼거림은 제법 커서 주변에 있던 군웅들은 모두 듣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역시 오만한 게 자

존자대란 칭호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쪽에선 대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새 방주가 누구요?" 

"새 방주는 매우 훌륭한 친구요. 사실 제자도 아니고 대단한 인연이 있는  친구도 아니지만 서로의 마음이 맞고 감

총방을 잘 이끌어갈 거라 생각하여 그로 결정했소." 

군웅들이 서로 쳐다보며 누군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용상은 씨익 미소하며 옆에 서있던 양만풍에게 소리쳤다. 

"꿇어라!" 

그의 난데없는 말에 군웅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진양과 형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자기 양만풍에게 꿇으라니 그

게 무슨 말인가. 그러나 진양은 순간적으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새 방주란 자가 누군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의 외침에 양만풍은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을 털썩 땅에 붙이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용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상은 서존과 한마일의 부축을 받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감총방 방주로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이냐?" 

"방주를 크게 빛내는 일입니다." 

양만풍은 빨리도 대답했다. 용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어떻게 빛낸다는 거냐?" 

"나라와 무림에 해가 되는 인물은 처리하고 천하의 안녕에 한 몫을 하겠습니다." 

"나라와 무림에 해가 되는 인물은 대체 누구냐?" 

"살인, 방화, 강도 짓을 서슴대지 않고 일삼는 무리들로 대표적으론 북망채 무리들이나 수녀가 있습니다." 

"그들은 북망채에 모두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정정당당히 대결하며 반드시 일망타진하겠습니다." 

양만풍의 대답은 시원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엔 아니꼬운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무리들도 점점 표정이 변하더

니 나중엔 급기야 박수까지 치고 환호했다. 

"강호 영웅들은 얼마 전 전투로 부상을 입었는데 일망타진은 대체 언제 할 것이냐?" 

"모두 강호 영웅들이니 시일을 늦추지 않습니다. 두 달 내로 작전을 시행할 것입니다." 

"시일을 늦추지 않는다면서 어찌 두 달씩이나 걸리느냐?" 

"자존자대 무대협과 융왕의 약속된 대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결은  이미 정해진 거라 무대협이 이기든 융왕이 

이기든 둘 다 크게 지칠 것입니다. 그런 시기에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건 영웅호한이 할 행위가 못 됩니다. 저희는 

정정당당히 이 일을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그야말로 영웅호한다운 말이었다. 모두가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모인 강호인들은 하나같이 협

을 행하고 명리를 멀리하는 강호인들이라 그의 말에 크게 동조하고 있었다. 

"좋다! 내가 본 건 틀리지 않았어." 

용상은 혼잣말하듯 말하며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양만풍은 그가 자신의 무공을 시험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곁에서 봤어도 직접 붙어본 적은 없는 그들이다. 제자도 아니고 대단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차대 방주

로 선출한다면 그 실력쯤은 정확히 알아야할 것이 아닌가. 용상은 양만풍에게 내공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일부로 힘을 적게 했다. 어차피 부상으로 크게 내공을 쓸 순 없다. 의원 왈,  무공을 사용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

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양만풍은 그런 대로 대응할 수가 있었다. 용상은 장심에 공력을 집중

하고 양만풍의 어깨를 잡아 올렸으나, 전력을 다할 수도 다하지도 않았으니 그 힘은 별로 대단한 게 아니었다. 

헌데 양만풍의 얼굴이 점차 벌게지더니 언제부터인가  몸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내공이 없는  만큼 오래 버틸 

수가 없는 셈이다. 단지 완력만으로 버티는 건 시정잡배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좋아. 이만하면 됐어." 

용상이 손을 놓자 양만풍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비웃지 않는다. 의지도 의지려니와 

이미 군웅들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용상은 서존의 어깨에 팔을 얹히고 군웅들을 보며 말했다. 

"저는 이제 뒤로 물러날까 합니다. 감총방에서  뼈를 묻을 계획이긴 해도 함부로 강호  은원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부터 감총방의 모든 일은 제 5대 방주 양만풍이 맡습니다." 

말을 마친 용상이 한마일에게 눈짓하자 용상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단 같기도 하여  매우 귀중해 보이는데 

앞면엔 심신(心身)이오, 뒷면은 일도(一道)라는 글귀가 새겨져있었다. 한눈에도 감총방의  보물임을 짐작할 만 했다. 

용상은 그 비단 쪼가리를 두 손으로 맞잡아 양만풍에게 넘겨주었다. 

"너는 대 감총방의 5대 방주로 취임하는 일에 이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양만풍의 말은 단호했다. 그가 대답하며 비단 쪼가리를 받자  수많은 감총 제자들은 환호했다. 우렁찬 함성 소리가 

저번 날 융왕과의 전투 때보다 더욱 시끄러웠다. 양만풍은 비단 쪼가리를 두 손으로 맞잡고 용상을 향해 절을 했다. 

다시 몸을 일으킨 후 단상 정중앙으로 이동한다.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금국 오랑캐가 우리 강산을 넘보고 북망채 같은  무리들은 강호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

습니다. 그것들을 정리하는데 저 양만풍과 감총방은 앞장설 것입니다." 

다시 한번 환호로 대전이 진동했다. 이번엔 강호인들도 함께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양만풍은 잠시 여운을 두고 있

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저희는 요 얼마간 큰 고생을 겪었습니다. 다름 아닌  진양이라는 친구가 억울

하게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모두들 모른다고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그의 말에 박수를 치고 좋아하던 강호인들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이제 끝난 일이니 더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군웅들께서 한 명의 허황된 말을 듣고 무작정 몰아세웠던 

걸 생각하면 다시금 화가 납니다. 후에 이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맞는 말이네." 

조용히 있던 마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찬동했다. 

"당광 이하는 어찌되었건 모두가 전진교 소속이었으니 내 잘못도 대단히 크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됐지만 진소협은 

아직 불만이 있을 지도 모르니 내가 사과하겠네." 

그는 진양을 돌아보며 가볍게 읍 했다. 이만하면 영광이리라. 전진 칠자 중 우두머리 마옥이 스무 살을 넘긴지 얼마 

되지도 않는 청년에게 읍을 했으니 말이다. 군웅들은 마옥의 정당함에 절로 기분이 나서 모두 함께 진양에게 읍 했

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미안한 표정으로 진양에게 고개를 숙이니 그 광경이야말로 가관이 아니라 할 수 없

다. 

허나 역시 진양은 진양이었다. 그 괴팍한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마옥을 비롯한 수십 명의 군웅들이 읍하며 사과하

는 데도 그는 미소도, 괜찮다는 말 한마디도, 그런 몸짓도 눈짓도 하지 않았다. 일부 군웅들은 그 행동에 조금 불쾌

한 모양이었으나 어쨌든 자신들이 잘못했으니 할말은 없었다. 

"이야! 우리 아우 꼭 대장군이 된 거 같구나." 

분위기는 역시 무굉이 깨트렸다. 그는 강호인들이 진양에게 한결같이 읍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 연신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도 박수치며 좋아하더니 급기야 진양에게 자신도 읍 한다. 그 순간 진양의 행동이 돌변했다. 급히 

무굉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리는 것이었다. 

"엥. 왜 말리는 거냐. 나는 너한테 읍 하면 안 되는 거냐?"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형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고 오히려 여기 있는 모두를 구해주신 분이니 제가 도리어 감사

를 드려야지요." 

진양은 그렇게 말하며 막 절을 하려고 했다. 이번엔 무굉이 놀라며 빠르게 식지를 내민다. 식지의 끝이 진양의 어깨

에 맞닿자 진양은 도저히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완력인지 공력인지 알 수는 없어도 여하튼 대단한 힘임은 틀림

없었다. 

"이놈아. 난 널 구하자고 온 거지 쟤들 구하자고 온 게 아니란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아느냐?" 

"형님……." 

진양은 이런 상황에도 코끝이 찡해져 감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얘기는  들어 무굉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는 있었다. 무굉은 지난 날 종남산에서 복면인들의 계략에 빠져 산을 헤매다가  겨우 빠져나온 후 진양이 사라졌음

을 알았다. 한동안 종남산을 배회하다가 포기하고 천하를 뒤집고 다니며 진양을 찾아다녔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

었지만 무굉에게 있어선 하루가 1년이었다. 그리도 마음이 잘 맞는 의제인데  행여나 복면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크게 걱정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무림인들의 말을 듣고 그는 펄쩍 뛰었다. 임안 북쪽 무림산 비래봉에서  영웅대회가 있다

는 걸 들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말을 훔치고 사력을 다해 임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대회는 끝나 있었

고 그때야 진양이 왕처일을 죽였다는 일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진양을  욕하는 무리를 모조리 혼내주고 그는 

다시 소문에 소문의 꼬리를 물어 겨우겨우 진양의 흔적을 찾아 이곳 난주까지 쫓아오게 된 것이었다. 

진양은 그 얘기를 무굉으로부터 듣고 참으로 의형 하나는 잘 둔 거라 생각했다. 이만큼 자신을 위해주는 인물이 어

디 많기나 하던가. 왕령은 이제 자신을 걱정해주지도 않고 남은 사람들이라면 양만풍, 형란, 무굉 정도일 것이다. 그

들의 대화를 듣던 강호인들은 금방 흥미를 잃고 양만풍을 다시 바라보았다. 다음 할말을 하라는 태도였다. 물론 양

만풍에게 더 할말이 있을 리 없었다. 계획은 좀 전 용상과의 대화로 모두가  알았고 단상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진

양의 억울함이었을 뿐이다. 

양만풍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서자  모두들 방주 선출이 끝났음을 알았다. 마옥이  틈을 보다 나서서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그만 가볼까 합니다. 일들이 다 끝마쳐졌고 저흰 이곳에 남아있을 면목이 없으니 이만 종남산으로 돌

아가겠습니다." 

"왜 벌써 가십니까. 좀 더 계시다 천천히 가세요." 

용상이 좋은 말로 권유하나 마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전진자들과 함께 모두를 향해 읍  하더니 몸을 달려 

대전을 나서고야 말았다. 그들이 떠나고 나니 다른 강호인들도 계속 머무르기가 미안했다. 거동이 괜찮은 몇몇 강호

인들은 그 자리에서 따라 떠났다. 

그 날 밤, 진양은 무굉, 형란과 함께  양만풍을 찾았다. 양만풍은 이미 감총방 5대 방주가  돼서 그들처럼 영빈전에 

묵지 않았다. 대청 깊숙이 들어가면 있는 방주 침실에서 지내는 것이다. 진양 등은 한마일의 안내에 따라 양만풍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웬일이야. 이곳엘 다 오고." 

양만풍은 조금 놀란 듯 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진양은 감총방이 너무 호화스럽다 하여 대청엔 거의 발을 들

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양은 다른 말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난 오늘 작별을 고하러 온 거야. 이제 떠나야지." 

"떠나다니? 나는 어쩌고 너만 가?" 

"넌 감총방 5대 방주잖아." 

진양의 말에 양만풍은 섭섭해했다. 

"설마 내가 방주가 됐다고 차별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단지 급히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 

진양은 양만풍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고야 말았다. 

"북망산에 가봐야지……." 

양만풍이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진양이 북망산에 급히 가봐야 한다는 건 왕령 때문인 것이다. 양만풍

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를 모를 리 없다. 

"꼭 그리 해야하나? 무대협과 융왕의 대결도 있는데 괜히 먼저 갔다가 욕을 먹으면 어찌하나?" 

"남들이 욕하는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들이 욕하든 말든 내가 뭘 걱정해?" 

양만풍은 더 할말이 없었다. 진양의 성격은 본래 이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제 내가 한 말이 있었지. 수녀는 나의 원수라고." 

"물론 기억해." 

"그럼 선택해줘라. 나와 함께 수녀를 처단할 것인지, 아니면… 나와 맞서 그녀를 지켜줄 것인지." 

진양은 이런 일을 이미 짐작해서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침통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고민한 문

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방주 선출이 끝나고 홀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왕령은 구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때 일을 큰 잘못이라 여기고 있었다. 반드시 그녀를 구해야한다. 설령 당주고와 왕령이 

함께 오순도순 잘 먹고 잘 산다 해도, 그녀는 진양이 사랑했던 여인이자 6년을 함께 보낸 벗이니까. 그러나  여기서 

부딪친 난관은 필시 양만풍과의 관계가 어색해질 거라는 점이었다.  피할 수 없는 선택. 왕령을 선택하든 양만풍을 

선택하든 진양에겐 고통이었다. 

진양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형란은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고 무굉은 하품만 늘어져

라 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진양의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미안하다……. 난… 6년의 정을 잊지 못해." 

기어코 그의 대답은 이랬다. 양만풍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하. 그렇군. 뭐 어쩔 수 없지… 그래 다음 번에 만나면 우린 적이겠구나." 

"만풍……. 훗날 이 일에 대해 어떤 것으로든 갚겠다." 

양만풍은 그를 더 보지 않았다. 그에게서 매정하게 몸을 돌려버렸다. 

"가라. 짐작하던 대답이라 별로 상심하진 않았으니까. 행여 나중에 만나면 선의로써 대결하길 바란다." 

진양은 양만풍의 말에 가슴이 저리는 걸 느꼈다. 자신과 맞서고 결국 사랑하던  여자를 도우려는 건데 이렇게 말해

주는 그를 보니 절로 격정이 치솟았다. 

"어서 가라. 두 달… 두 달 전에 수녀를 구해서 심산유곡에 은거한다면 나와 맞서지 않을 수도 있지……." 

"우린 이제 맞서겠지만… 영원히 벗이겠지?" 

진양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영원한 벗. 양만풍은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뭘 생각하는지 깊이 고개

를 숙인 채로 반응이 없었다. 진양은 마음이 요동쳐 다시 묻는다. 

"만풍! 영원한 벗!" 

"그래 영원한 벗!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니… 불공대천……." 

그들 둘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양만풍은 더 뭔가를 말할 것처럼 하더니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여전히 진양은 보

지도 않고 어서 가달라는 듯 손짓만 한다. 진양은 묵묵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을 나

서기 전 돌아보았던 그의 등, 예전보다 더 넓고 크게 보이는 등은 대체 무엇일까. 

막 침실을 나와 대청을 지나가는 중 갑자기 무굉이 멈칫했다. 진양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의형이 갑작스레 멈추

자 이유를 안 물을 수 없었다. 

"형님. 어서 가요." 

"잠깐잠깐……. 누가 떠든다. 아까 고 녀석인가." 

진양의 낯빛이 싹 변했다. 아까 고 녀석이란 양만풍을 말하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히 무굉을 닦달했다. 

"뭐라고 하고 있어요? 뭐라고 하죠?" 

"이 녀석아. 좀 기다려봐. 음… 그러니까 처음엔……." 

진양과 형란이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 매 주야로… 오른손과 왼손이 떨어질 줄 모른대. 칼은 오른손에 있고… 방패는 왼손에 있었다고 하는군. 함께 

그린 보름달이… 초승달이 된다고 하고……. 또… 친숙했던 땀 냄새가 어이 갔냐고 하는데?" 

대체 무슨 말인가. 진양도 형란도 무굉도 공통으로 느낀 생각이었다. 무굉은 내공이 심후해서 평소 공력을 끌어올리

지 않아도 귀가 매우 밝았다. 그래서 멀리서 들리는 작은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으니 양만풍의 방에서 들리는 말

소리쯤이야 우스운 셈이다. 

실상 좀 전 무굉이 들었던 그 말은 양만풍이 즉석에서 지은 시였다. 내용은 이렇다. 

<매 주야로 오른손과 왼손 떨어질 줄 모르고, 

칼은 오른손 방패는 왼손에 있었었는데. 

함께 그린 보름달이 초승달 되던 날, 

친숙했던 땀 냄새 어이 사라졌는가.> 

형란과 무굉은 기어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진양을 달랐다. 진작에 양만풍이 시를  좋아하고 자주 짓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것이 시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적당히 간추려보니 결국 그 내용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양만풍

이 얼마나 자신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지도 깨달았다. 

(만풍… 너와 나는 이제 적이 되었지만 우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천하가 뒤집히고 하늘에서 우시(雨矢 = 빗발 

같은 화살)가 떨어져도 너와 난 영원히 친구다…….) 

갑자기 그도 시를 한 수 지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양만풍은 무굉을 통해 진양이 시를 들을 줄 알고 

지은 것일 수도 있었다. 진양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더니 형란의 칼을 뺏어 대청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삶이 참 서글프다더니. 

바람결에 꽃 한 송이 날아가도, 

흙만은 여전히 변함 없구나. 

거주양난이라던가. 

결국에는 떠날 일. 

우린 힘들어하지 말자. 

양호와 육항의 이야기처럼 

흙과 나, 어찌 멀어지리오.> 

진양은 일필휘지로 그렇게 시를 지었다. 대청 바닥은 별로 단단하지 않아 그런 대로 글자가 안정되어 보였다. 다만 

진양의 글 솜씨가 좋지 못해 필체는 평범했을 뿐이었다. 

거주양난(去住兩難)은 가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말로, 삼국시대 재녀(才女)로  알려진 채문희의 

호가십팔박(胡家十八拍)에 나오는 말이다. 그녀는 채옹의 딸로  난을 당해 흉노족에게 강제 시집을  가고 말았는데, 

이 호가십팔박은 그때의 일을 비분하게 읊조린 말들이었다. 

양호와 육항 역시 삼국시대 말기의 인물이다. 이미 촉한이 망하고 위나라 조씨도 망하여 진나라와 오나라가 대치했

을 때 양쪽의 장군으로 국경을 지키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아 두 장군은  서로 싸움을 벌여야 

했고 위에서 그런 명령이 내려왔으나, 그들은 이미 깊은 우정을 쌓아 함부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칼 한번 맞대지 

않고 오히려 육항은 양호에게 술을, 양호는 육항에게 약을 건네주며 적군 대장과는 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이것들

은 모두 우정에서 나온 일로 과연 적군과 아군을 초월한 우정이라 할 수 있었다. 

진양은 지난날 대천산에 있을 적 삼국시대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조덕은 학문이 깊어 그러한 일을 잘 알고 있었기

에 제자들에게 항상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진양은 옛날에 있었던 그러한 일들을 비유하며 흙을 내세우고 양만풍

과의 우정을 논한 셈이다. 

그가 막 바닥을 긁고 검을 형란에게 넘겨주자 여러 명의 감총 제자들이 달려와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갑자기 바닥

에 글자를 남기니 놀랄 만도 하다. 누군가 나설 법도 했지만 이미 진양은 새 방주의 절친한 벗이니 아무도 말은 못

하고 있었다. 진양은 한번 더 깊게 탄식하며 무굉, 형란과 함께 대청 문을 나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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