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十 九 章. 조덕의 등장 2
융정은 대도를 들어 보기 드물게 선두에서 추격전을 벌였다. 진양 등이 부상을 입고 형란은 겁날 게 없으니 이러는
걸지도 몰랐다. 형란은 뒤에서 추격하는 걸 보고 한층 더 빠르게 발을 신법을 펼쳤다. 허나 무굉의 속도는 잡을 수
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거리가 점점 멀어져 북망산 아래로 거의 다 내려오자 제법 차이까지 났다.
그러나 무굉이 무적도 아니고 철인도 아니다. 어찌 그런 고통 속에서 오랫동안 달릴 수 있으랴. 무굉을 버티게 해준
건 그토록 강인한 자존심이 아니요, 바로 정신력이었다. 평생토록 그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지만 이번엔 그런 것이
없었다. 하나 뿐인 의제, 진양을 위하여 그를 살려주겠다는 의지 하나로 북망산 아래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황량한 들판이 사라지고 제법 나무도 보이는 게 분명 북망산에선 벗어난 게 틀림없었다. 뒤에서 형란의 숨찬 외침
이 들리고 또 북망인들의 목소리인 듯한 고함들도 여럿 들렸다.
"아… 쓰러져선 안 돼! 아우가… 아우가……."
급기야 무굉은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놀라운 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도 억지로 몸을 틀어 등뒤로 떨어졌다는 점
이다. 또한 손은 여전히 진양을 감싸안고 있어 옆구리나 어깨 등 살갗들이 더 심하게 벗겨지고 말았다.
"아우야… 아우야……!"
"혀, 형님……!"
진양은 무굉에게 들려 이동하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다만 말할 힘도 없고 주변을 돌아볼 힘도 없어서 숨만
할딱이고 있었을 뿐이다. 쓰러진 것도 알아 무굉의 힘이 한계에 달했음도 알 수 있었다.
"아우야… 미안하구나. 내 힘이… 내 힘이 이것밖에 안 돼서……."
"하하……. 어… 언제부터… 형님이… 그, 그리… 약하셨어요……."
"뭐… 뭐라고……! 내가 기습만… 그것만 안 당했으면……."
이 상황에도 무굉은 억울함을 상기할 수 있는 듯 이를 갈고 있었다. 그때 막 형란이 달려와서 그들 앞에 엎어졌다.
"모두 일어나세요! 도망쳐야해요."
"너 혼자… 혼자 도망가라. 나와 형님은… 도망칠 수 없어……."
"안돼요! 전… 전 진대협을 버리고 혼자 갈 수 없어요."
진양이 짐짓 성난 눈을 뜨며,
"어서… 어서 가! 지… 지금… 가면… 살 수 있어……!"
"못 가요!"
"가라니까……!"
"절대로 혼자 갈 수 없어요! 어떻게… 어떻게 진대협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란 말씀이세요?"
"너… 너……."
형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예 그들의 몸 상태를 살펴보더니 길게 탄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는 게 아니
라 도리어 그들 앞에 우뚝 서서 북망인들을 막으려는 것이다. 진양은 그걸 깨닫고 몇 번 힘을 쥐어짜 소리쳤지만
형란은 무조건 절대로 안 간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안 가요, 절대로 안 가!"
"너……."
"안 가요, 난 안 가! 안 가! 안 가!"
진양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듯 하다. 저렇게 소리를 질러서 일부로 그의 말을 못 들으려는 것이다. 형란의 볼엔 어
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북망인들은 그들 앞으로 도착했다. 형란이 도망치지 않자 뭔가 계책이 있는 줄 알고 주춤거렸으나, 융
정이 괜찮다는 듯 손짓하니 모두 한꺼번에 진양 일행을 또 에워싸고 말았다. 변한 건 없다. 단지 장소가 좀 변했을
뿐.
"열심히 도망치나 했더니 결국 이곳이 한계냐?"
"흥… 융가야…….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난… 진 게 아니야……."
"흥. 졌으니 그 꼬락서니가 된 거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융정은 조롱기를 가득 채우며 무굉을 분노케 했다. 무굉은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며 농락한다는 것도 모르는 듯 열
심히 분노만 해댔다. 진양은 그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치욕은 받을 수 없는 법이다. 진양은 속이
빈 듯한 음성으로 대소하였다.
"하하……! 이… 벌레 새끼야……. 내가… 세상에 안 알려진… 이야기 하나 들려주마……. 옛날에… 융 씨 성을 가
진 개가 한 마리가… 있었지……. 그 개는… 워낙에 더러워서… 사람들이 무척이나 싫어했단다……. 어느 날… 그
개새끼가 도둑질…을 해서…… 사람들에게 짓밟혀… 비참하게 죽었지……. 넌… 이 일을 아느냐?"
"흥. 웃기고 있군. 그래서 날 화나게 하려는 수작이렷다. 격장지계를 써서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거냐?"
"하하… 격장지계라니, 네가… 더 웃기고 있구나……. 그 개새끼 이야기는… 실화야……. 아직도… 북망산 뒷자락
에…… 묘지에 가보면… 그 개새끼의 무덤이 있지……. 잘 보면… 충견지묘(蟲犬之墓 = 개 벌레의 무덤)라고 쓰여
있을 걸……."
"너… 너… 이 자식! 죽고 싶으냐!"
"충견지묘 뒤엔… 광견지묘(狂犬之墓)도 있어……. 그 개 벌레를 낳은…… 미친 아비 개새끼의 무덤이라더라……."
융정은 그의 더러운 욕에 치를 떨었다. 어쩜 저런 욕을 할 수 있는지 융정으로선 의문이다. 어찌 되었건 분통이 터
졌고 진양을 얼른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죽여버려서 그런 욕들을 듣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냐.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내가 죽여주마. 어디 목을 내밀어봐라!"
"충견아……. 네가… 직접 쳐야지… 개 주제에… 감히 어디서……."
융정이 두 눈을 부릅뜬다.
"알았다. 내가 직접 쳐주마. 목을 치고 팔도 치고 다리도 쳐서 온몸을 산산조각 내주마."
"그래… 개새끼답게도… 내 말을… 잘 알아듣는구나……."
"이노옴!"
끝까지 격장시키는 진양 앞에 융정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대도를 단숨에 움켜쥐고 달려가 진양의 앞에 섰다.
한순간에 그 목을 내리칠 기세다. 형란이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들자 그는 그녀의 배를 걷어 차버렸다.
"다 죽여버리겠다. 어디 각오해라."
진양은 눈을 꼭 감았다. 이제 편히 쉬는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죽으면 절대 편히 쉬는 게 아니다. 왕령은 그들의
손에 농락을 당할 것이고 평생 저주받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진양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부릅떴다. 살 방도가 없
어도 일단 눈이나 뜨고 볼일이다. 할 일이 남았거늘, 어찌 이대로 먼저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늦은 것
일까. 어느새 융정의 대도는 그의 목으로 근접하고 있었다. 형란은 배를 걷어차여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무굉은 아
우가 죽을 광경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진양은 날아오는 대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몸통도 널찍하고 날도 제법 예리
하여 한방에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대도의 몸통으로 햇빛이 비춰져 눈이 부신다. 갑자기 푸른빛도 반사되고 누런
빛도 반사되었다. 대도가 움직이며 그 반사되는 빛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것이다. 그리고 그게 몇 번 안 지나면
진양은 죽는다.
헌데 누런빛 다음엔 웬 하얀빛이 반사되었다. 지금이 겨울이긴 하지만 지금 눈이 오는 건 아니었다. 진양의 눈동자
는 그 반사되는 하얀빛을 쫓아 몸통에게로 시야를 좁혔다. 저것은 무얼까. 꼭 나무가 흰색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조금 더 올려지니 살색도 보인다. 나무에 웬 흰색이며 살색이란 말인가. 눈을 부릅뜨고 몸통을 자세히 노려보자 그
비춰지는 몸통에 사람얼굴이 나타났다. 귀신도 아닐 터이고, 헌데 우스운 것이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조덕이 아닌가.
대천산에 있는 함종문의 장문인 조덕. 그의 얼굴이 왜 이 대도의 몸통에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하며 진양은
더 대도를 바라볼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턱 바로 밑까지 접근했던 것이다. 진양은 그 대도의 몸통
에서 봤던 조덕의 표정을 떠올렸다. 매우 급박하고 무언가 소리치기 직전인 듯 했다. 그 순간 진양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멈춰라!"
매우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진양은 그 찰나의 순간에도 어떤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 언제였던가. 오래 전 부모를
모두 여의고 도둑질로 홀로 목숨을 연명하던 그때, 어느 부잣집에 숨어 들어갔다가 걸려서 도망치던 그 당시. 진양
은 그때 거의 죽음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부잣집 주인은 성격이 좋지 않고 인정을 몰랐지만 돈은 매우 많아서 강호
무림인을 여럿 고용한 사람이었다. 진양은 들어가기 전엔 모르다가 도둑질에 실패하고서야 그걸 깨닫고 도망쳤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리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을 때 나타난 사람이 다름 아닌 조덕이었다. '멈춰라!' 라는 말은 그때도 조덕이
소리쳤던 말이었다. 지금 진양의 귀에 들렸던 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아주 똑같은 목소리였다. 억양이며 가슴
을 울리는 고함이며 모두 조덕임을 확정짓는 것이다. 진양은 그제야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었다. 융정의 대도 몸통에
나타난 조덕과 지금 소리친 자와는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허나 알면 뭐 하는가. 조덕이 구해주지 않는다면 말짱 헛
것, 진양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다행히도 진양은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닌가보다. 그의 소원대로 융정 따위에게 죽는 운명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운명이 아니라면 어찌 조덕이 이 순간 나타났을 것인가. 조덕의 표정만 봐도 알 듯 상황은 매우 급박
했다. 이미 대도는 융정의 힘을 주축으로 진양의 옆 목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덕은 그들과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무공이 예전보다 크게 성장한 듯 동작이 매우 빨랐다. 입에서 고함이 터지고 그 고함을 다른 자들이 들었
을 때, 이미 조덕은 진양 등뒤로 접근하고야 말았다.
진양은 이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라 생각은 길게 할 수 없었지만 그게 조덕의 기척이라는 건 보지 않고
도 생각하지 않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귀청 떨어지게 만드는 날카로운 금속성을 들어야만 했다.
<까깡!>
그의 얼굴 바로 옆에서 융정의 대도와 조덕의 검이 맞부딪친 것이다. 진양은 그 쇳덩이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물러선 후에도 귀가 멍멍한 게 속에서 '윙윙'하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대관절 누구요?"
융정은 대노한 듯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있었다. 확실히 진양을 죽일 수 있는 기회거늘 갑자기 나타난 자에 의해 망
쳐졌으니 분노할 만도 했다. 진양은 얼른 조덕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눈빛, 잘 기른 수염에서 풍기는 군자의 기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의의 당당함. 모두 예전과 같았다. 딱 한 가지 변한 거라면 어느새 희끗희끗 변한 머리칼
이라고나 할까.
"내가 누군지 알 건 없소. 허나 이 아이는 나와 인연이 깊으니 함부로 해칠 수 없소."
융정은 조덕의 말을 들으며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가 누군지 생각해보려는 듯 온몸을 훑어보며 눈을 번뜩였다. 그러
나 그가 알 턱이 없다. 조덕은 대천산으로 들어가 함종문을 세운 후부터 사천 지방 밖으론 나가본 적이 없는데, 어
떻게 그가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융정은 똑똑한 청년이었다. 진양과 인연이 깊다는 말과 조덕 뒤에 서있는 10
여 명의 젊은이.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마보강과 연경후를 보며 그는 조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호. 뭐가 두려워서 정체를 숨기는 거요?"
"흥. 내가 북망채의 도적 무리와 같은 줄 아시오?"
조덕의 냉소에 그는 발끈했다.
"옳거니. 그래서 너도 진가 놈을 도와 우리를 치려는 것이렷다."
"누가 그런 말을 했소? 난 저 아이를 구해주려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소이다."
"그럼 저 자들은?"
그는 잽싸게 무굉과 형란을 가리켰다. 조덕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대답한다.
"당연히 도와주어야지. 보아하니 당신들이 뭔가 잘못하여 이 아이의 일행이 공격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수수방관
할 수 있겠소?"
"흥. 꽤나 대협인 척 하는군. 자세히 보지도 않고 어떻게 우리가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거요?"
조덕은 여전히 웃으며,
"내 비록 오랫동안 대천산에서 지내왔지만 무림의 일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소. 하물며 난주에서 있었던 그 큰 사건
을 내가 설마 모를 거 같소?"
융정은 역시 조덕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과연 함종문이었군. 허나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는 걸 알아야지."
"뭘 말이오?"
"진가 놈이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나 있소?"
조덕은 이런 것도 모르고 올 사람이 아니었다.
"하하.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소? 나는 사실 이 아이를 구하기도 했지만 또 말리기도 하려고 온 거요."
"그렇다면 진가 놈이 수녀를 구하는 일을 막는다는 얘기요?"
융정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은 그 얘기를 들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 사부님……."
"흥. 아직도 나를 사부라 부르느냐?"
진양의 안색이 싹 변한다. 지금 조덕의 얼굴은 그 옛날 인자하던 조덕의 얼굴이 아니었다. 차갑고 쌀쌀맞아 원수는
안 되도 별로 좋은 사이 같지는 않아 보인다. 진양은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조덕은 언제나 사불승정(邪
不勝正)을 고수하여 악을 미워하고 정도를 걸을 것을 강조해왔다. 때문에 이전부터 금수쌍녀에는 별로 좋은 인식이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대천산에서 있었던 금녀와의 일 때문에 그 나쁜 인식은 크게 가중됐을 게 불 보듯 뻔한 일
이었다.
"사… 사부님……!"
"됐다! 그 일은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고 일단……."
조덕은 진양의 말을 막으며 곧장 융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겠소?"
그의 얼굴엔 강한 자신감이 비춰지고 있었다. 마치 융정은 알아서 물러날 거라는 듯 그러했다. 설령 그렇지 않는대
도 이길 자신이 있는 듯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그런 것인지 융정은 뭘 생각하며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 것이오? 빨리 대답하시오."
"흥. 몰아세우지 말아라. 한 가지 약속하면 이들을 구해 가는 걸 막지 않겠다."
"그 약속해야 하는 건 뭐요?"
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융정은 약간의 살기를 담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다시는 북망산에 오르지 않겠다는 약속! 무굉은 어쩔 수 없겠지만 진가 놈은 산에 오르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만
한다."
"왜 꼭 그래야만 하오? 저 아이의 무공은 대단치 않아서 크게 걱정할 게 없을 텐데."
"누가 저놈이 두려워서 그러는 줄 아느냐? 아버지께서 이제 곧 무굉과 결투할 텐데 저놈이 같이 오면 필시 무슨 악
계(惡計)를 펼칠 게 분명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진양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좋소. 내가 최선을 다해 설득해보겠소. 허나 본인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소."
"말도 안 된다. 명실공히 사부가 아니냐?"
"그건 모르는 소리요. 저 아이와 나의 사제 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청산되었소. 이젠 서로 안면만 있을 뿐 남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흥. 그럼 왜 참견하는 거냐?"
"그건 한때 내 제자였으니 나쁜 길로 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오."
융정은 더 할말이 없었다. 진양만큼 화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더 따질 명목은 존재하지 않았다. 곧 냉소하며 말하
길,
"좋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진가 놈이 기어코 다시 북망산에 오른다면 난 그를 죽일 것이다. 그때도
막겠느냐?"
"아니오. 그때는 막지 않을 거요. 그렇게 된다면 이미 저 아이는 나의 적에 되어있을 테니까!"
실로 청천벽력. 그야말로 진양에게 있어서 조덕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조덕은 물론 융정에게 자신의 의지를 표
현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대답했겠지만 함부로 허언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진양도 이를 잘 안다. 오랫동안 사부
로 모시며 그의 성격을 낱낱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더 막지 않겠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융정은 만족한 듯 말하며 곧 손짓으로 북망인들을 물러서게 했다. 잠깐동안 진양을 바라보더니 냉소한다. 진양이 노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부상을 입어 대적할 수도 없다. 융정은 북망채 방향으로 오르다가 문득 멈춰 서서 무굉
에게 말하였다.
"무가야. 네가 나의 손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니 내 아버지와의 대결은 취소해야겠구나."
"이… 이놈아! 죽고 싶어?"
"흥. 몸이 그 꼴인데 뭘 어쩌겠다고? 아버지와의 대결은 어찌할 것이냐?"
무굉은 실상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수백 번은 죽었어야 했다. 허나 그렇다
고 물러선다면 어찌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자존자대라 할 수 있겠는가.
"닥쳐! 내… 당장… 당장에……!"
"흥. 그 몸으로 무슨 싸움을 하겠다고."
무굉이 다시 뭐라고 소리치려 할 때 진양에 그를 붙잡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형님… 안… 안됩니다……. 7일 후로 정하세요……."
"그… 그건……."
그는 자존심 때문에 응낙할 수 없는 듯 했다. 허나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진양도 저리 간곡히 요청하니 더 거
절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기한이 다 지난 것도 아니었다.
"그럼 내 7일 후… 다시 산을 오르마……!"
"좋아. 기한은 아직 여유가 있으니 상관하지 않겠다. 허나 7일만에 그 상처가 다 나을 수 있을까? 하하하!"
융정은 그를 농락하며 북망인들 수십 명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무굉과 진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분노의 칼을 갈
고 있었다.
조덕은 제자들을 시켜 일단 그들을 치료해주었다. 무굉은 7일 후에 다시 오를 것이니 어디 다녀올 시간이 없다. 조
덕은 가능하면 마을로 돌아가 치료하기를 권했으나 무굉이 듣지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치료를
하기로 하며 산아래 쉴 곳을 찾아 천막을 쳤다. 제자를 시켜 근처 마을에서 약재도 사왔다.
부상이 가장 심각한 사람은 역시나 무굉이었다. 기습을 당해 초고성장법에 깊은 내상을 입고 거기에 발작까지 했으
니 속은 완전히 버린 상태였다. 진양을 구해주려 산 아래까지 달려오며 온몸을 얻어맞아 외상도 만만치 않았다. 도
대체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조덕도 의술은 약간 알고 있었지만 외상만 치료해줄 수 있을 뿐 내상까지 치료해줄
자신은 없었다. 진양은 좀 나은 편이었다. 무방비로 융정의 장법에 맞아 본래는 무굉보다 내상이 심해야 했으나 다
행히 발작은 하지 않아 그런 대로 치료가 가능했다.
일단 무굉은 외상부터 치료하여 고통을 감소시켜주었고 진양은 바로 내상 치료에 들어갔다. 좋은 약으로 몸을 보하
고 내공으로 운기를 시켜주니 내상이 빨리도 호전되어갔다. 3일이 지나자 진양은 제법 몸도 일으키고 걸어다닐 수
도 있게 되었다. 허나 역시 문제는 무굉이다. 사실 무굉의 외상은 찰과상, 타박상 정도라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이 맞았어도 역시 무공의 고수인 만큼 몸이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내상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내
공이 아무리 심후해도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발작을 일으키면 그만큼 손상이 크다. 몸 안의 일이라 남의 도움이 없
으면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내상이기도 했다.
조덕은 3일째 되는 날 일단 무굉의 내상을 치유하도록 노력은 해보았다. 그러나 역시 보통이 아니다. 조덕은 본래
내공이 심후한 것도 아니라서 무굉의 요동치는 내상을 쉽게 잠재울 수가 없었다. 하여 조덕은 공력을 최대로 끌어
올리고 심맥을 보호해주며 기를 넉넉히 넣어주었다. 나머진 무굉이 알아서 해야할 일. 조덕은 감히 그의 몸 안에 내
공을 불어넣고 그걸 자유자재로 움직여 치유해줄 만한 공력이 없었다.
다행히 무굉은 자주 기절하지는 않았다. 진양을 치료할 때 그가 자꾸 혼절해서 많은 제약이 있었는데 무굉은 고수
라 그런 건지 엄청난 고통에도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조덕이 내공을 불어넣어 주자 그는 즉각 주천시키며 몸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진양은 아픈 몸을 이끌고도 그의 곁에 붙어 앉아있길 원했으나 조덕이 말린다. 홀로 내상을 치
유하기 시작했으니 방해하면 큰일난다는 것이다. 진양은 하는 수 없이 조덕을 따라 그의 방을 나섰다.
조덕은 진양과 대화하기를 원했다. 그동안의 일들과 사건의 전말 등을 자세히 알고 싶은 듯 했다. 당연 진양이 이를
거부할 리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덕을 존경했고 비록 파문 당했으나 존경심은 크게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부이기도 했으니 그런 사람이 원하는 걸 안 들어줄 리가 없다. 말해준다고 뭘 잃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구나.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네가 나쁜 짓만 하고 다니는 줄 알았다."
한 시진에 걸쳐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접한 조덕은 낮게 탄식하였다. 진양이 말한다.
"아니에요. 제가 더 잘못했죠. 허나… 이번 일은 제 잘못이 아니에요."
"나도 알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왜 네 녀석이 나쁜 짓만 하고 다녔다고 오해한 줄 아느냐?"
진양은 대강 짐작한 바가 있으나 짐짓 모른 체 하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건 네가 수녀와 연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그녀가 다 나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렇고 나도 오해한 것이다."
조덕은 지금은 제자가 아니지만 한때나마 제자였던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시금 조덕의 말문은 열
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