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章. 사부냐, 친구냐
100여 년 전, 요(遼)나라에 맞서 음지에서 투쟁한 대협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무대협이다. 당시 거란족은 요나라
를 세워 송나라를 자주 침범했었기 때문에 무림인들의 이민족에 대한 분노는 심화되고 있을 때였다. 천무대협은 무
공이 탁월하여 어떤 강호인보다도 뛰어났고 성품이 곧으며 또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인(仁)을 깊이 추구하였기에
대협이란 칭호가 붙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본래 영웅은 여색을 밝히는 법, 천무대협이 여색을 밝힌 건 아니었지만 여난은 분명 있었다. 그는 인물이 훤칠하고
마음이 넓어 뭇 여인들을 사로잡았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당시 상당히 큰 명성을 떨치던 음양이리(陰陽二悧)로 불리
는 두 절색 여인과, 아름다운 미모에 뛰어난 의술을 갖춘 미양의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했던 것이다. 여기서 음양이리
는 한때 선리절미(善悧絶美)로 유명했던 단목리와, 마화미소로 유명했던 홍리다. 그녀들은 자매는 아니었으나 의기
투합하여 자신들을 음양이리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홍리는 무공을 잘못 익혀 사도의 길로 접어들었고 독조수를 연마하며 점점 악랄하게 변해갔다. 단목리는 그
녀를 교화시키려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절교까지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후로 그녀들은 원
수지간이 되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때마침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남자까지 있어서 그 불화는 더욱 컸다.
바로 천무대협이었던 것이다. 천무대협은 고의적으로 여자를 피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만나면 함께 하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날을 고대했다.
그녀들은 자연 만날 때마다 다투게 되었고 나중엔 목숨까지 걸고 결투도 벌이기를 일삼았다. 이 중 홍리는 매우 영
리하고 반면에 단목리는 그렇지 않았는데, 무공으론 비기기에 홍리는 계략을 써서 천무대협의 환심을 사는데 이른
다. 천무대협은 아무것도 모른 채 홍리를 사랑하여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허나 거짓은 언젠가 드러
나기 마련이라 천무대협이 요나라 군대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던 날, 홍리는 그를 데리고 한 의원을 찾았다. 거기서
미양이라는 아름다운 여의(女醫)를 만나게 된다.
천무대협은 미양을 보며 소위 말하는 식으로 첫눈에 반해버렸다. 더욱이 치료를 받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고명한
의술과 마음씨는 천무대협의 혼을 빼놓았다. 홍리는 당시 천무대협의 미움을 받기 싫어서 선한 척을 했었는데 눈치
가 빨라 이 사실을 깨닫고 미양을 미워하게 되었다. 급기야 몰래 죽이려 하지만 천무대협이 나타나 도리어 제 사랑
마저 잃고 만다. 홍리는 대노하여 미양을 죽이려 온갖 수단을 동원하지만 나중에 천무대협이 그녀에게 무공까지 전
수해줘 이제 홀로 죽일 수 없는 입장에 다다르고 말았다.
홍리는 그러던 와중 한 가지 기발하고 악랄한 계획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몇 달 동안 고심한 끝에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먼저 단목리에게 편지를 써서 미양의 집으로 유인하는 것이 바로 그것. 단목리가 미양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홍리는 교묘한 수단으로 그녀를 중독시킨다. 그 독은 평범한 독이 아니었다. 홍리가 쓰는 맹독으로 일명 광분절
독(狂奔絶毒)이라 하는데, 일단 한번 당하면 정신이 나가서 인사불성이 되는 무시무시한 독이었다. 더욱이 이 독의
무서운 점은 독을 당한 사람은 광분절독의 냄새만을 찾아다닌다는 점이다. 즉, 중독돼서 미치면 또 다른 광분절독의
냄새를 찾아 미친 듯 돌아다니는 아주 사악한 독이다. 마치 광분절독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듯 영원히 그 독을 찾
아 스스로 복용하고 잠시 만족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만다.
단목리는 독을 당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곧장 앉아 독을 억누르려 했지만 노도와 같은 열화가 치밀어 자신도 모르
게 대노하였다. 그리곤 인사불성이 되고 만다.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고 온갖 발광을 떨다가 반 시진이 지나자 다
른 광분절독을 찾아 돌아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미양의 집으로 들어섰다. 바로 홍리가 미리 미양의
집에 광분절독을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단목리는 미친 듯 들어가 광분절독을 찾아서 스스로 복용했다. 그리고는 다시 흉악한 살기를 띄우며 집안의 사람들
을 하나하나 죽이기 시작했다. 단목리의 무공은 홍리와도 맞먹는 수준이라 대단하기 짝이 없다. 한낱 의원 집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을 못 죽일 리 없었다. 이제 막 미양마저도 죽이려는 찰나 다행히 천무대협이 나서서 이를 막는다.
홍리가 몰래 지켜보며 크게 한탄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천무대협은 이 미친 여자가 단목리임을 깨닫고 뭔가
일이 생겼음을 깨닫는다. 미양 역시 그녀의 얘기는 많이 들어온 터고 척 보면서 나쁜 독에 중독된 것까지 알아내어
그녀가 만든 파독향(破毒香)을 뿌린다. 이 파독향은 정신적 충격을 가하는 독을 와해시키는 약으로 사실 파독향 자
체도 독이었다. 이독공독(以毒攻毒)의 원리라는 얘기다.
파독향에 의해 단목리는 잠깐 주춤거릴 수 있었다. 허나 홍리가 만든 광분절독은 워낙 맹독이고 좀 전에 또 광분절
독을 복용해서 완전히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천무대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때려서 정신이 들게 하였다.
약간 정신이 든 그녀는 잠깐 천무대협을 알아보다가 다시 미친 듯 절규하며 그 집을 떠났다. 자신의 망행을 기억했
던 것일까.
홍리는 이 작전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단목리를 이용하여 미양을 죽이려 했건만 고심해서 세운 작전이 실패로 돌아
가자 매우 노하기까지 했다. 한편 단목리는 미양의 집에서 도망쳐 이리저리 헤매다가 다시 독이 발작하여 일대 살
육을 벌이고 있었다. 나중에 정신이 돌아오면 기억을 하겠지만 그때는 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게 되었다. 그녀의 손에 큰 장원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마침 홍리가 나타났다. 홍리는 제
자들을 시켜 공격하였고 단목리는 반은 미치고 반은 제정신인 상태에서 공격을 받아 거의 반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운이 좋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물살에 떠밀려 가며 겨우 살아남지만 거의 폐인이 다됐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본
래 광분절독에 중독되면 새로 독을 섭취하기 전엔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거센 물살에 휘말리며 깨끗한 물로 독이
많이 정화가 됐던 것이다. 나중에야 정신이 든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
던 중에 조덕과의 인연이 생겼음은 지당하다.
거의 한 시진이 넘도록 다물리지 않는 조덕의 입이었다. 지금까지 조덕은 전대의 비화를 진양에게 알려준 것이다.
진양은 마화미소 홍리를 안다. 수녀의 입을 통해 금녀에게 무공을 전수해줬던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안
색이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사조는 선리절미 단목리란 말인가?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사부님께 무공을 전수해줬던 사람이구
나.)
진양은 뭔가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에 좀처럼 딱딱해진 안색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조덕의 말문이 열린다.
"사부님께선 떠나기 전에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중에 무공을 대성하면 내가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다고 말이
다."
"그것은……?"
조덕의 얼굴로 갑자기 강한 의지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첫째로 미양의 자식을 만나면 손쓰지 말되 만일 제자를 만나면 혼내주고, 둘째로 홍리의 자식이나 제자를 만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것이다."
진양은 설마설마, 했던 일이 이렇게 터지자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듬더듬 상황을 무마해보려 노력해보았
다.
"선리절미라는 건 착한 미녀를 말함이 아닌가요? 헌데 어떻게 그리도 악랄할 수 있지요?"
"대체 무엇이 악랄하다는 거냐?"
"악랄하지요. 불쌍하기도 하고요."
그의 말에 조덕이 갑자기 호통쳤다.
"네 이놈! 감히 말버릇이 그게 무엇이냐?"
"전 사실을 말했어요. 일단 끝까지 들어보세요."
"흥. 어서 말해라!"
조덕은 사부를 악랄하면서도 불쌍하다고 모욕한 것이 매우 불쾌한 듯 했다. 진양은 일단 숨을 고르게 쉬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첫째로 미양의 자식에게 손대지 말라는 건 그때까지도 천무대협을 잊지 못했다는 얘기지요. 사실 광분절독으로 일
이 생긴 후 완전히 인연이 끝났음이 당연한데도 잊지 못한다니 참으로 불쌍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넌 지금 내 제자가 아니지만 한때나마 나의 제자였다. 그럼 그 분은 너의 사조가 되는 것이다. 말조심해라!"
"그래도 할말은 해야지요. 둘째로 자식은 손 못 대게 하면서 제자는 혼내줘도 된다니 역시 선리절미라 불릴 자격이
없어요. 미양의 자식은 천무대협의 자식도 돼서 건드리면 안 되고 제자는 그게 아니니 건드려도 된다는 얘기인데,
이게 선리절미란 사람의 행동인가요?"
"이놈!"
"셋째로 홍리에 대한 원한이 깊이 쌓였다지만 만나면 자식이든 제자든 무조건 죽이라니 그런 악랄한 말은 또 어디
있어요? 단목 선배님이 본래 나쁜 사람이라거나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선리절미라는 별호까지 있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조덕은 조금 동감하는 듯 바로 호통을 치진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스럽긴 한지 쉽사리 얼굴을 펴진 않았다. 그
런 모습에 진양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조덕이 모르는 게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조덕은 수녀가 홍리의 사손이 된다는 걸 모를 것이다. 사실 홍리는 금녀에게 무공을 전수해줬지만 금녀는 그 무공
을 수녀에게 전해줬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홍리는 수녀의 사조가 되는 셈이다. 이 역시 제자와 마찬가지니 결국 조
덕이 이 사실을 알면 수녀를 죽이려 들 게 뻔했다. 그래서 진양은 미리 안전한 포석을 깔아두는 것이다. 이렇게 말
해두면 나중에 들통이 났을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휴……. 그래 네 말이 맞다. 허나 네가 그 상황이라면 어찌하겠느냐? 몸은 폐인이 되어 복수는 영원히 물거품이 됐
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
"물론 보복이 없을 수야 없지요. 예로부터 뭐 복수는 복수를 낳고 어쩌고 하지만 전 그 말을 믿지 않아요. 확실히
복수는 복수를 낳겠지요. 하지만 그냥 당하고 인정만 베풀면 그게 사람인가요? 부처지."
"그럼 네가 하는 말은 대체 무엇이냐?"
"제 말은 보복은 하되, 꼭 죽일 필요가 있냐는 거지요. 선리절미 선배님께선 선하고 인정이 많았던 분 같은데 어쩌
면 하늘에서 그때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조덕은 조금 감이 잡히는 게 있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넌 미양의 제자나 홍리의 자식, 제자에게 손을 쓰지 말라는 얘기구나."
"뭐 그렇기 되긴 하지만… 어쨌든 무고한 살상은 피하는 게 좋지요. 선대의 원한을 후대까지 이끌어서야 되겠어
요?"
"그건 안 된다. 난 반드시 사부님 말씀에 따라야해."
진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예 이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나 설령 이해한다 해도 조덕을 막을 것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결국 무굉과 왕령을 조덕이 노릴 게 아닌가.
"왜 꼭 따라야만 하죠? 틀린 점이 있다면 고쳐야지요. 오래 전부터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보답이 있다고 말
씀하셨어요. 미양과 홍리의 제자를 죽인다고 해서 뭐 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사부의 부탁이라지만 선리절미
란 명성을 생각한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지요."
"그럼… 좋은 방법이라도 있느냐?"
"없어요. 어떻게 제게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조덕은 낮게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고민될 것이다. 확실히 진양의 변론은 맞는 제법 일리가 있었다. 그러
나 그에게 있어서 단목리, 이 석 자의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사부도 사부이거니와 조덕이 존경했던 인
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딱히 다른 방도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오직 사부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구
나."
"사부님……."
"됐다. 나는 이제 너의 사부가 아니다. 좀 전엔 한때 사부였음을 말하여 말을 삼가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재
넌 내 제자가 아니다. 나를 이제 사부라 부르지 말고 다르게 불러라."
진양은 침통한 표정으로 뭔가 또 말하려 했으나 그는 손을 들어 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너는 잘 선택하여 스스로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무슨 말인
지 잘 알았느냐?"
"물론이에요."
"좋다……. 먼저 내가 대천산에서부터 이곳까지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저를 말리러 온 게 아니신지요."
"아니다. 꼭 그 일 뿐만은 아니지."
조덕의 표정은 매우 엄숙하여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경후와 보강에게서 너와의 일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거의 10년 만에 멀리 출타했다. 한때나마 내 제
자였던 아이가 죽이지도 않은 왕처일로 인해 큰 해를 입을까봐 너를 구해주려 황급히 달려나왔던 것이다. 일부로
말해주려는 건 아니다. 네가 비록 괴팍하여 뭇 사람들과는 생각이 많이 다르지만 의리도 도리도 모르는 아이는 아
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난 너를 믿고 이 음모를 파헤치려 했다."
"사… 사부님……."
"고마워할 건 없다. 난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으로 시비를 가리려 한 것뿐이다. 만일 네가 정말로
왕처일을 죽인 거라면 내가 먼저 널 처단했을 것이다."
과연 조덕다운 말이었다. 진양은 그 정도는 짐작했지만 조덕도 정이 많은 사람이라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는 건 거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여 나는 경후, 보강에게 이야기를 전해듣자마자 바로 대천산을 떠났다. 제자들을 시켜 정보를 수집해보니 당시
넌 난주로 도망쳤다고 하더구나. 난 그 얘기를 듣고 빨리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었다. 싸움은 이미 끝나고 너도 벌써
떠난 시기였지. 거기서 양만풍이란 젊은이에게 이야기를 전해듣고 네가 북망산으로 쳐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히 시간이 맞을 수 있었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와 무 형님, 형란은 전부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진양은 생각해보니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절로 무릎이 굽어졌다. 허나 조덕이 재빠르게 오른손을 뻗어 그를
밀쳐내자 무릎은 꿇지도 못하고 도리어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조덕은 딱딱히 굳은 표정을 조금도 풀지 않
고 매정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너를 구해주려 한 게 아니라 시비곡절을 명확히 하여 오해를 없애려 한 것뿐이다. 너는 아직도 함종문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사도로 오인 받으면 함종문에도 좋지 않기 때문이지."
"사부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그 무공들을 쓰지 않겠어요."
"아니다. 이미 오해는 풀렸고 너도 그럴 인물이 아니니 상관이 없다. 허나 파문 당했으니 함부로 남용하는 일은 없
도록 해라."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난주에 도착해서야 모든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네가 북망채까지 급히 달려간 이유도 알게 되었지. 첫째로
무굉과 융왕의 대결을 지켜보려 함이고 둘째는 수녀를 구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대천산을 나설 때와
는 계획이 많이 바뀌었지만 어쨌든 지금 내 너에게 하려는 말은 한 가지다."
"그… 그것이 무엇인지요?"
"수녀를 구하지 말아라."
그의 말에 진양은 북극의 얼음처럼 단단히 얼어붙어 입만 벌린 채 잠시동안 숨도 쉬지 못했다. 조덕이 옆에서 세
번이나 호흡했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사… 사부님… 그건……."
"난 네 사부가 아니니 다르게 불러라. 남들이 들으면 필시 오해가 생길 것이다."
"네……. 허나 령아를 구하는 건……."
그에게 있어서 왕령의 존재는 여전히 크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곤경에 빠지게 됐다는 자책감도 있었으니 그가 이
리 고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덕은 수녀를 조금도 좋게 보지 않았다.
"잘 생각해보거라. 나도 들은 게 있어서 너와 수녀의 관계를 잘 안다. 허나 그녀는 악녀야. 지금껏 살면서 수많은
원한을 만들었고 또 많은 악행으로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그런 여자를 위해 왜 굳이 목숨을 잃으려고 하는 것이
냐?"
"그건… 그건 아니에요. 다만 그녀는 이제 회개했으니 악녀가 아니라는 거예요. 개과천선했으니 이제껏 쌓아온 악행
을 무마시킬 선행을 많이 할겁니다."
"나는 아직 믿지 못하겠구나.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수녀가 회개했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 듣자하니 당주
고란 전진교 청년에게 시집을 갔다던데 그는 널 모함한 자들과 한통속이 아니더냐? 이런 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건
조금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야."
진양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에요. 령아는 당주고를 사랑해서 시집을 간 것이지, 그의 선악은 가리지 않았어요. 저도 그렇듯 령아도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랑이라면 목숨도 버린다는데 무엇이 문제겠어요?"
"그럼 그녀가 행동을 잘했다는 거냐?"
"그건 아니에요……. 그녀는 당주고의 비열한 내면을 알지 못하고 결국 시집을 가고 말았으니까……. 허나 구해주긴
해야해요. 당주고에게 시집갔어도 어찌되었건… 그녀는 분명 제 친구니까요."
조덕은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양의 눈을 바라보며 결정이 굳어졌다는 것도 알아 더욱 탄식이
흘러나왔다.
"너는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거라."
"저는 그녀를 구해주어야만 해요. 제가 못된 놈이니… 난주에서 질투심 때문에 그녀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어요.
이제 그녀에게 미련은 없어요. 하지만 우린 오랫동안 함께 지낸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수수방관할 수가
없어요."
진양의 뜻은 이미 정해진 바와 같다. 조덕은 더 설득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또 탄식하며 몸을 돌려버렸다. 진양은
보지도 않으며 왠지 쓸쓸해 보이는 음성으로 다시 말하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마지막으로 물으마. 나를 쫓아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겠느냐, 아니면 그녀
를 구하고 나와의 인연을 끊겠느냐?"
매우 단도직입적인 말이다. 진양은 이럴 거라 짐작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조덕과는 이미 사
제의 연을 끊어서 실제로 남남과 같다. 허나 어릴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고마움을 지금은 잘 알고 있어서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천산에서 내려온 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양은 세상에 자신을 크게 위해주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걸 깨달았기에 조덕을 향한 감사함도 커졌던 것이다.
조덕은 고민하는 진양에게 굳이 재촉하진 않았다. 다만 대답을 알고 있는 건지 이미 그의 표정은 침통하기 짝이 없
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어떻다해도 한때는 제자였던 만큼 정이란 게 생겼을 게 아닌가. 그저 조용히 진양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진양은 거의 향 한 대가 다 타 들어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아주
조용하여 오래 있으면 귀가 다 멍해질 듯한 적막감 속에서 뜨겁고도 고요히 울리는 몇 마디였다.
"저는… 어쩔 수가 없어요. 사부님, 죄송합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서글픈지 조덕은 들으며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동시에 진양에 대한 실망감도 들어 꼴
보기 싫어지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게 더는 진양을 볼 것 같지 않다. 한때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언제나 함께 했던 그들 사제는 결국 그렇게 연을 끊고야 마는 것일까.
조덕은 그 날 밤, 무굉의 상태를 한번 살펴보고는 천막을 걷어버렸다. 할말은 다했으니 이제 떠나겠다는 말과 같다.
진양은 그런 조덕을 보기 민망하기도 하고 보면 또 슬퍼질 것 같아 일부로 자리를 피했다. 대신 마보강을 불러 몇
가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크게 실망하셨을 거다. 너… 꼭 수녀를 구해야만 하니?"
"그래…….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잘못한 거고 또 나의 친구니까 반드시 구해주어야 해."
북망산 아래라 뭔가 공허해 보이는 들판, 그러나 제법 풍취도 일게 하는 곳이었다. 은은한 달빛이 황량한 들판을 내
리쬐자 매우 쓸쓸해 보이면서도 마음껏 감상에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경치였다. 북망산 가까이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 진양과 마보강은 마주 앉아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정히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결정했다면 부디 수녀를 구하고 무엇보다 너만은 무사하길 빈다."
"하하. 내 무공을 얕보는 건 아닐 테지. 인연이 있어 탄지신통도 습득하였으니 유루봉법과 잘 배합하면 대단한 위력
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난 네가 무사할 거라 믿는다. 넌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총명해서 언제나 작전 세우는 데 앞장섰잖아."
그들은 문득 옛일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만 머금으며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다 진양이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
다.
"아참. 그 암캐는 어찌 되었나?"
"아……. 능아 얘긴가?"
"얼씨구! 벌써 '능아', '능아' 하고 부를 정도란 말이지."
마보강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금새 입을 다물었다. 진양은 갑자기 그를 골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막 짖궂은 말을
꺼내려 하던 차였다. 멀리서 장엄한 음성이 고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보강아……!"
무굉의 고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무굉의 고함은 무식하게 크고 강렬해서 어쩔 땐 내상까지 입게 한다면, 이
음성은 차분하고 안정감이 있어서 절로 눈이 감겨지는 그러한 음성이었다. 이건 매우 귀에 익은 음성이며 또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던 음성이다. 낮에도 실컷 들었던 목소리가 아닌가.
"어이쿠. 사부님이 나를 찾는구나. 누가 불러낸 덕에 혼 좀 나겠어!"
마보강은 진양을 장난스레 노려보며 말한다. 그에 진양은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놈아.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떠나라. 사부님께는 죄송하다는 말 좀 전해 줘."
"바보 녀석. 사부님이 어떤 분인데 그 말을 듣는다고 기뻐하실 거 같니?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는 늙은이처럼 혀를 끌끌, 차고는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그냥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작별을 고하던 그
가 한 세 발짝쯤 갔을 때 갑자기 멈춰 서며 입을 연다.
"아참……. 양만풍과의 일은 전해들었다. 그것도 수녀 때문이지?"
"그건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고 그녀를 미워하면 안 돼."
"하하. 내가 왜 수녀를 미워해? 너희 둘의 문제는 너희 둘이 처리해야지. 원인을 제공한 사람보다 선택을 하는 너희
둘을 비웃는다면 모를까."
진양은 그가 꽤나 성숙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르치려 들지마 이놈아. 사부… 아니 조장문께서 부르신다. 어서 가봐. 괜히 늦게 갔다가 더 혼나지 말고."
간단히 일축하자 그는 가볍게 웃으며 이별의 미소를 보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겠지, 진양은 그의 뒷모습을 바
라보며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 날, 떠난 이들은 떠난 자들이라며 신경 쓰지 않던 무굉은 내상 치유에 전심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조덕이 해
준 건 외상 치료와 여러 약재를 제공한 정도라 나머진 무굉이 직접 해야만 했다. 조덕이 내공을 좀 불어넣어 주긴
했어도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스스로 치유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무굉은 의술을 알고 있어서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내상이 심했지만 배운 의술이 워낙 뛰
어나서 문제될 건 거의 없었다. 굳이 문제를 잡아내라면 시일 정도일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점차 약
속된 7일째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양과 형란은 그의 회복을 빠르게 해주기 위해 공력을 일으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3명이 합심하여 치유에 전념하자 무굉의 회복은 매우 빨라졌다. 신기한 건 그의 의술. 진양은 꽤 오랫동안
그를 의형으로 모셔왔지만 의술이 이토록 뛰어날 줄은 전혀 몰랐다. 진양도 들은 바가 있어서 제 자신의 몸을 스스
로 치유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헌데도 무굉은 무슨 남의 몸 치료하는지 척척 잘도 해갔다. 표면상으로는
그다지 한 일이 없었고 단지 자신의 혈도만 짚을 뿐이었지만, 그가 직접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말해주듯
중얼거리고 있어서 듣는 진양은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이었다.
"…… 전중과 기해를 계속 오고가고… 수족육양(手足六陽)의 대혈을 통하여 정기를 받아 키우고……."
참으로 해괴한 이야기다. 단지 전중과 기해로 내공을 나누어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과, 또 육양의 대혈을 통해 정기
를 받는 것 정도로는 이 내상을 치유하기가 힘들었다. 허나 그는 매우 진지하게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 정기는 물이 되고 원기는 뿌리가 되며… 내공이 줄기가 되고 대혈은 열매라… 하나가 된다면……!"
진양과 형란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이 중요한 순간임은 알 수 있었다. 무굉의 목소
리에 점차 힘이 가해지고 그의 안색이 붉어지는 걸로 보아 중요한 순간임은 틀림없었다.
"…… 백회로 천지정기가 들어옴에 회음(會陰)은 이를 받히고… 열매가 맺혀 모인 내공은 사지백해로 뻗어나가
니……!"
갑자기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얼굴을 들이대며 그를 살피던 진양과 형란은 화들짝 놀라 뒤로 엎어지고 만다. 그
는 눈을 찢어지게 뜬 채로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점점 눈빛이 맑아지고 안광이 빛나며 다시 무굉 본래의 눈
동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양과 형란은 감으로 그의 몸이 완쾌되었음을 알았다.
"형님! 어떻게 됐어요?"
"뭐 뻔한 걸 묻고 그래. 나의 의술과 무공의 융합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어서 무적을 자랑하지. 이걸 무의(武醫)라
고 한다. 그래서 난 자존자대가 될 수 있는 거야. 무공도 제일이요, 의술도 제일이니 감히 누가 나보다 대단하다 할
수 있겠느냐?"
역시 제 잘난 맛에 사는 그답게 내상을 치유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런 자랑들이었다. 진양과 형란은 왠지 모르
게 웃음이 터져 킥킥 웃었다.
"이놈들아, 웃지마. 어쨌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한번 더 깨달았겠지?"
"물론이지요. 과연 형님은 대단하세요."
"그래 역시 내 아우다! 와하하!"
무굉은 마냥 좋아서 하마 같은 입을 쩍 벌리고 실컷 웃어댔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호걸의 웃음이요, 광인의 웃음다
워서 진양과 형란은 도저히 웃음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도 킥킥거리니 북망산 아래 들판에 때아닌 웃음의 폭
풍이 찾아들었다.
한참동안 실컷 웃은 그들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형란은 아예 피곤해 보였고 진양은 땀까지 흘
리고 있었다. 역시 멀쩡한 건 무굉 뿐이다. 진양은 그가 멀쩡한 걸 보자 더욱 그 굉장한 의술에 대해 호기심이 들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의 의술은 가히 입신의 경지인 것 같아요. 어떻게 그리도 빨리 내상을 치유할 수 있었죠?"
"하하. 이런 건 일도 아니야. 몇 년 전엔 초죽음에 이른 사람도 살려줬었지."
"정말로요?"
평소라면 믿지 않을 이야기다. 허나 지금은 이미 그의 의술을 본 바가 있어 매우 대단히 여겼다.
"정말이지. 그럼 거짓으로 생각하느냐?"
"아니요. 형님을 믿어요. 그런데… 그 무의는 어디서 배웠어요? 매우 요상한 게 대단한 거 같아요."
"당연히 요상하고 대단하지! 의술과 무공을 융합해서 몸을 치료하는데 쓰니까 평범한 자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
이야."
무굉은 완전히 기고만장해서는 턱주가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형님이 쓰시는 방법은 형님이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 그게 분명 내가 만든 거이긴 한데……. 만일 나에게 사부가 없었다면 절대 못 만들었을 테지."
그는 슬쩍 안색이 변해서는 턱주가리가 조금 내려오고 말았다. 진양이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머뭇거리더니
곧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무굉은 본래 사부를 두 명이나 두고 있었다. 그들은 부부였는데 남편은 무공의 대가였고 아내는 의술의 대가였다.
어찌 보면 복 받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무공과 의술을 각 대가들한테 동시에 전수 받으니 그 어찌 복이 아닐 텐
가. 사실 사부를 두 명이나 두는 건 도리에 어긋났지만 그들 부부가 원하여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굉은 그들에게서 모든 걸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천천히 내공을 익히고 여러 가지 강력한 무공을 깨우치
며 더불어 뛰어난 의술까지 익힐 수 있었다. 무공과 의술은 일맥상통하니 멍청한 그가 이것들을 깨우치는데 큰 도
움이 있었음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가 강호출도 했을 때는 가히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의술과 무공을 융합한 방법
으로 내공을 더욱 빠르게 증진시켰고 두 사부가 워낙에 뛰어나서 무굉은 그때 이미 천하제일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 두 사부가 무굉에게서 떠나가기 전, 처음으로 자신들이 누군지 밝혔다. 실상 무굉은 그들과 처
음 만날 때부터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는 동안엔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헤어질 때야 비로소 그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들 부부 중 남편이 말했었다.
<나의 성은 이, 이름은 주공이다. 내 아내는 성은 미고 이름은 양이란다. 나중에 우리들이 누군지 알 날이 있을 것
이다. 허나 알게 됐다고 하여 우리들의 제자라고 떠벌려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명성에 힘입어 기고만장해져서도 안
된다. 네 힘, 오직 너 스스로 강호에서 독립하고 또 입지를 굳혀야 진정한 강호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훗날 그리
되었을 때는 우리와의 관계를 발설해도 상관없다.>
무굉은 당시 견문이 전혀 없기에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세상을 떠돌고 어느새 강호인들이 그를 자존
자대라 불러갈 때, 그는 드디어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전대에 대명을 떨쳤던 천무대협. 그리고 그의 아
내로 대단한 미모와 지식, 의술을 겸비한 천재 미양이라는 것을.
"뭐라고요? 그럼 형님의 두 사부는 바로……!"
"그래. 바로 그 분들이야. 천무대협 이 사부님하고 천문여협(天文女俠) 미 사부님이지."
진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참으로 다행인 일이리라. 천만다행으로 조덕이 떠난 후에야 이런 사실을 알
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일 이를 조덕이 알았다면 당장에 제자들을 시켜 무굉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당연히 무굉
은 미양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형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천하에 몇 명이나 될까요?"
그는 무굉의 신변이 걱정되어 넌지시 물었다. 무굉의 무공 수준이라면 딱히 걱정할 것도 없지만 함종문도 대단해진
듯 하고 어찌되었건 그들 양쪽이 붙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 생각했다. 무굉은 그의 물음에 대소한다.
"하하! 당연히 너하고 나하고 저 녀석이지."
고로 이걸 아는 사람은 무굉, 진양, 형란이라는 얘기가 된다. 진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지을 수 있었다.
"그럼 마음놓고 편안히 얘기해도 되겠군요."
"그래,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안전해. 그런데 그건 왜 묻느냐?"
"아… 그냥 물어봤어요. 아참! 그럼 형님. 그 광표장법이요."
그는 마침 궁금한 게 있었던 터라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광표장법이 왜?"
"그것도 천무대협의 무공인가요?"
"물론이지. 광표장법은 사부님께서 직접 창안한 장법으로 말년에 들어서야 완성시킬 수 있었던 장법이야. 그래서 더
욱 위력이 대단한 거지."
진양은 사실 궁금한 게 있었다. 무굉은 천무대협의 제자니 그의 무공을 쓸 텐데 왜 강호인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했
냐는 점이다. 그가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천무대협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많은 협을 행했다고 하니 역시 많은 강호
인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양만풍의 이야기만 들어도, 분명 그는 당년 뛰어났던 강호인들과 알고 지내지 않았는
가. 아무리 100여 년이 흘렀다지만 강호인들이 그리도 유명한 대협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허나 이젠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럼 형님은 광표장법말고 다른 무공은 쓰지 않으셨나요? 그 전광석화 같은 수법은 뭐였어요?"
"다른 무공은 잘 쓰지 않았지. 전광석화와 같은 그 수법은 백타권이라 한다. 이것도 사부님께서 전수하신 거야."
"그것도 천무대협이 말년에 들어서 깨우친 건가요?"
"아니다. 백타권은 사부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무공 중 한 가지야. 나도 그 많은 권법, 장법, 검법, 봉법, 편
법, 보법, 신법 등을 다 배웠지만 사실 쓸 일이 없어. 이 많은 것들 백 번 쓰는 것보다 광표장법 한 번 쓰는 게 낫
거든. 그나마 백타권이 쓸만해서 잡놈들 상대할 땐 그걸 쓰지."
"혹시 백타권을 알아보는 자들이 없었나요?"
"하하. 백타권은 써도 남들이 못 알아봐. 워낙에 빨라서 동작의 재빠른 정도로 따지자면 광표장법보다도 빨라. 그리
고 뭐 자주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진양은 모든 전말을 깨닫고 절로 손뼉을 쳤다.
(그러니 강호인들이 형님이 누구의 제자인지 알지 못했던 거로구나! 운명이란 역시 기이해. 만일 형님이 다른 무공
들을 여러 번 썼다면 혹 알아보는 자가 있어서 금새 형님의 신분이 탄로 났었겠지. 그럼 조 사부님과 앙숙이 되었
을 거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그는 이제 더 물어볼 게 없었다. 함께 듣던 형란은 대단히 놀란 듯 한동안 어리벙벙하게 있었다. 천무대협과 천문여
협 중 한 명만 사부로 모셔도 일생의 큰복이거늘, 둘 다 사부로 모셨으니 얼마나 큰복일까. 형란은 부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굉은 그 날 밤, 한번 더 그 만의 수법이라는 무의를 펼쳤다. 침에 내공을 주입하고 한순간 위로 내던지자 침 네댓
개는 다시 동시에 내려와 그의 요혈이 잘도 꽂혔다. 그는 침을 정좌한 채로 침을 맞으며 괴상한 방법으로 운기를
진행했다. 반 시진 후에 다시 깼을 때는 거의 완쾌된 상태였다. 진양과 형란은 그 무의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새삼 느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니 금새 6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이제 다시 북망산을 오를 시간. 진양은 조덕도 양
만풍도 그리 말렸지만 모두 무시한 만큼 이번에 또 오름에 있어서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왕령도 구해야하고 모
자란 무굉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도움도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형란은 진양이 가는 길이면 무조건 따라가겠다는 태
도였다.
"좋아! 융정 이놈 기다려라. 내 융왕이하고 둘 다 혼쭐내주겠어."
무굉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이를 빡빡 갈았다. 하기야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던 그가 융정의 계략에 휘말려
패했으니,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존자대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는 인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술수에 당한 거라
고만 생각할 뿐 패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북망산에서 내려온 지 6일만에 그들은 다시 산을 올랐다. 그 날과 같은 행로로 똑같은 방식으로 등산을 감행했다.
그들은 이번엔 당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무굉도 그러했고 진양도 그러했다. 저번엔 귀곡
진을 너무 얕봤다거나 융정의 야비함을 크게 알지 못했다거나 했지만, 이젠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잘 대비하여 걱정
이 없다. 다만 형란은 이번에도 두려움이 생겨 진양 곁에 찰싹 붙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