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二 章. 사랑의 길을 택하려한 여인
난데없이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아까부터 추운 겨울날의 한풍이 불긴 했지만 이건 좀 달랐다. 갑작스레 부는 이 거
센 한풍, 그저 바람이라고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융정은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왕령에게 다시 말을 건
넸다.
"왕 매, 어서 한번 결정을 내려봐. 당연히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시간을 끌지는 말라고.
나도 그렇고 아버지와 우리 북망인들도 모두 성격이 급해서 오랫동안 참지 못하니 서둘러 결단을 내리는 게 좋아."
그런 말을 듣고도 왕령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물우물, 마치 뭔가를 씹는 것처럼 입술과 턱이 움직였지만 기어
코 입안이 드러나는 건 아니었다. 아름다운 흰 치아도 아직은 볼 수 없고 단지 그녀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때때로 진양을 흘낏흘낏 쳐다보며 미간을 좁히기도 한다.
"결정을 내리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저기를 봐. 진가 놈과 무가, 형가 년까지 다 침을 꿀꺽 삼키며 네 대답을
기다리고 있잖아. 내 아버지도 얼른 이 일을 마무리짓고 싶어하셔. 실상 아버지가 나서면 뭐 한번에 끝낼 수 있지
만… 진가 놈 만큼은 내가 직접 죽이고 싶거든. 저들이 고통스러움에 절규하다가 죽는다면 참으로 기쁘겠지."
"어떻게 그런 말을……."
"내 말이 어때서? 너는 내가 저 진가 놈에게 당한 걸 몰라서 그래. 저놈은 바로 네 유루봉법을 이용해서 번번이 내
일을 방해하고 또 괴롭혔지. 이제야 그 원한을 갚을 때가 온 거야. 자! 어서 선택해."
융정의 선택하라는 말은 왕령에게 있어선 쇠 긁는 소리와도 같았다. 삑삑 하는 금속성, 들으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귀를 막고 싶어지는 그런 가혹한 음향과도 같았다. 그러나 선택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자신의 잘못으로 인
하여 이런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으니 결국 그 결말은 그녀 스스로 지어야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번 더 진양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미안할 뿐이었다. 서로 의지하며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는데 갑작스런
당주고의 출현으로 모든 게 무너졌다. 진양으로 인해 힘든 날도 많았지만 도움을 받은 게 더욱 많았다. 오늘도 그렇
다. 이렇게 자신을 구해주려고 달려온 진양이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었다.
(양아는 나 때문에 이러한 위기를 맞이했는데 그를 모른 척 하면 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내가
북망채에 있으면 필시 나쁜 일이 생길 거라 짐작하고 이렇게 구해주려 온 거야. 때문에 신선폐에 중독되어 목숨도
위태로워졌지만 이 순간에도 그는 나만을 위하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오라버니를 버릴 수 있어? 당 오
라버니는 내 남편이야. 이제… 겨우 사랑을 얻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나 했더니, 결국 이런 일이……. 나는 그를 버
릴 수 없어. 오라버니는 내 남편이고 앞으로 나올 자식의 아버지야. 아! 양아……! 너에게 이미 봉을 넘겨줌으로써
모든 은원을 풀었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 줘. 그래… 넌 나를 이해해줄 거야. 네 마음이 넓은 건 아니지만 봉을 넘
겨준 뜻을 모르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뭔가 결심이 섰으니 그건 표정이나 눈빛에도 나타났다. 융정은 진작부터 그녀를 바라
보고 있던 터라 즉시 눈치채고 물었다.
"드디어 결정을 내린 건가?"
"네, 결정을 내렸어요."
"그럼 말해. 모두에게 여기서 명확하게 말하라고. 세 가지 방도 중 하나를 말이야!"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난… 당 오라버니를… 버릴 수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한 무굉이 발끈하여,
"이 빌어먹을 계집아! 내 아우는 너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왔는데도 넌 내 아우를 구해주지 않겠다는 거냐?"
"미안해요, 무 대협……. 그와 나의 은원은… 이미 오래 전에 풀었어요. 저도 그가 얼마나 저를 위하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그를 구하면 당 오라버니는……."
"뭐야! 그럼 네 남편을 위해서 네 친구를 버리겠다고?"
왕령은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
"이럴 수가! 그깟 정 때문에 의리를 배반하다니, 나는 너 같은 부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 네 년부터 없애버려
야 속이 시원하겠다!"
무굉은 펄펄 날뛰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가 막 융왕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가려던 때, 갑자기
진양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막 형란이 달려와 지양혈을 세게 누른 덕에 졸음은 싹 가신 상황이었다. 사실
신선폐에 당했으니 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지양혈은 극양의 기운이 있어서 잘만 쳐주면 양기를 돋움으로써 음을
제압할 수 있었다.
"형님. 그만하세요. 저는 괜찮으니 더 이상 그녀를 몰아붙이지 말아요."
"아니, 아우야. 그……."
"괜찮아요. 사실 생각해보면 옳은 선택이지요. 이미 그녀와 나는 지난 관계를 봉으로써 청산했어요. 더 볼 거 없는
남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더구나 당주고는 그녀의 남편이잖아요."
"그렇다고 어찌 의리를 배반할 수 있어! 나 천하제일 자존자대 무굉, 일흔 해를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한번
도 의리를 배반한 적은 없어! 의리를 위해서라면 가족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게 바로 무공을 배운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겠어?"
이상하게도 무굉의 말들은 제법 이치에 맞았다. 아마도 이런 의리와 같은 부분은 필시 그의 사부인 천무대협, 천문
여협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전대에 대협, 여협으로 칭송된 만큼 강호의 의리를 중시하고 대의를
많이 따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그들의 제자이니 협과 의(義)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양만풍
이 자신의 사부에게서 도의를 배우고 실천하듯 무굉도 아무리 괴팍한 인물이라지만 사부의 뜻은 마음속에 잘 담아
두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무굉은 강호에서 자존자대라 하며 비꼬지만, 분명 악행을 저지르는 사도로 평가받
는 건 아니지 않는가.
진양은 이런 점을 일순에 파악할 수 있어 동시에 무굉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왕령을 몰아세울 뜻은 없다.
그녀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진양 그도 더 할말이 없는 거라 생각했다. 본인이 원치 않아 그러한 선택을 했으니 더
참견할 일도 떠들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 좋아. 왕 매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나도 그에 합당한 태도를 취해야지."
융정은 꽤나 기뻐하는 것 같았다. 수청을 들라는 제의를 거절했음에도 오히려 세상 다 얻은 듯한 얼굴로 좋아할 따
름이었다. 곧 품속에서 무슨 단약 하나를 더 꺼내더니 왕령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아까 내가 준 해약은 분명 해약이지만 그것만 먹여서는 당 동생을 살릴 수 없어. 이 단약도 함께 먹여야 몸이 치
유될 수 있지. 두 단약을 같이 복용해야 효력을 발휘해."
"뭐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나를 욕하지 말아. 왕 매가 혹시나 나쁜 선택이라도 하면 내가 고쳐줘야 하지 않겠어?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이
단약 두 개를 다 먹어도 금방 치유되는 건 아니야. 당 동생이 먹은 독은 그 위력이 강해서 금방 치유될 만한 게 아
니지. 7일 동안 매일같이 2알씩을 복용해야만 나을 수 있어."
왕령은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차마 뭐라고 할 순 없었다. 괜히 말 잘못 했다가 해약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당주고는 죽게 되니까. 그녀는 곧 해약을 품안에 간직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아마 당주고가 있는 곳으
로 가서 해약을 건네줄 생각일 것이다. 이리 선택한 이상, 그녀에게 있어선 오로지 당주고 뿐일 것이다.
무굉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울화통이 터져 방방 날뛰었다. 진양이 말리지만 않고 또 신선폐에 중독만 되지 않았다
면 벌써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그녀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현실은 그게 아니라 위기만 다가오고
있었다. 융정이 음흉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자… 이렇게 됐으니 어서 없애야지. 진가야, 너는 불만이 없겠지? 왕 매는 네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한
다."
"잔말말고 죽여라. 복수는 내 형님과 형란이 해줄 것이고 못한다면 함께 죽는 것이지. 기껏해야 황천에서 다시 만나
는 것뿐인데 뭐가 두렵겠느냐?"
"흥. 기개 있는 척 하지 마라. 그래봐야 너도 사람인데 설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융정은 완전 자만심에 도취한 상태였다. 그는 곧 융왕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 저놈만큼은 제가 직접 죽이겠습니다. 지난날 저놈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오늘 계략은 네가 세운 거니 원한다면 네가 다 죽여도 상관없다."
"아니지요. 무가는 아버지께서 직접 처리하셔야 합니다."
융왕은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무굉에게 다가갔다.
"자존자대 무굉. 다시 한번 대결을 펼쳐볼까?"
"네 까짓 게 얼마나 잘났다고! 내 힘을 보여주마."
무굉은 그 즉석에서 출수했다. 공력이 전혀 담기지 않은, 오로지 초식으로 승부할 계획이었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
고 왼손으로 융왕의 목을 노림과 동시에 우장으론 그의 가슴을 갈기려 했다. 이 수법은 본래 천무대협의 무공 초식
중 하나로 무굉이 웬만해선 잘 쓰지 않던 절초였다. 무굉은 언제나 내공의 심후함을 이용한 공격으로 싸웠으니 이
런 기교면의 초식은 잘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융왕은 이런 초수는 처음 보는 것이라 조금 놀랬다. 초식 자체의 성격이 무굉의 무공과는 달라서 그럴 만 했다. 허
나 한두 수 피하고 나니 단지 기교를 이용한 초식임을 깨달을 수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은 버릴 수 있었다. 가볍게
발을 밟아 뒤로 물러서며 한순간 일 장을 내갈기자 무굉은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만다. 무굉은 어이도 없
고 화도 나서 다시금 괴초를 펼쳤다. 자세를 낮추고 양손으로 상대의 무릎 관절과 어깨 관절을 붙잡아 부러트리는
이 초식은 저측탈망(低仄奪亡)이라 하여 쌍골수(雙骨手)의 초식 중 하나였다. 쌍골수의 장점은 모든 초수가 빠르고,
일단 잡히면 반드시 관절이 빠지거나 뼈가 부러진다는 것이다. 허나 동시에 그것이 단점이 되어 좀 악랄하다는 흠
이 있었다.
융왕은 자세만 보고도 뭔가 심상치 않은 초식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무굉은 공력을 운용할 수 없으니 큰 걱정이
일지 않아 대담하게 달려들었다. 그의 자세가 괴이하게 옆으로 기울고 양손이 날아들자 그제야 위험한 초수란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급하게 왼발을 들어 양손을 쳐내고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우장을 높이 쳐들었다가 그의 어
깨를 내려치려는 것이다. 이에 무굉은 깜짝 놀라면서도 무섭게 융왕의 품안으로 돌진했다. 쌍장을 앞으로 내밀고 돌
진하는 모습이 역습에 이은 역습이란 걸 짐작케 했다. 기세가 맹렬하고 저돌적이라 무척 맹수와도 같아 보였는데,
이건 호공장(虎攻掌)의 추공세(推攻勢)였다. 이런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융왕은 놀랄 수밖에 없었
다. 급한 대로 한 발 물러서며 좌장으로 쳐냈는데 그나마 무굉의 내공이 무산되서 망정이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
"이 빌어먹을 놈. 이런 무공까지 숨기고 있었다니."
"하하! 놀랐지. 내가 습득한 무공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아서 네 따위는 정말 10년이 걸려야 따라잡을
수 있어."
"닥쳐! 그 무공은 뭐라고 하느냐?"
무굉은 크게 기뻐하며,
"처음 거는 쌍골수, 다음 거는 호공장!"
"뭐라고!"
순간 융왕의 안색이 돌변하며 눈이 찢어질 정도로 번쩍 뜨여졌다.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는가. 무굉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비단 무굉 뿐만이 아니라 융정, 진양 등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너 왜 그리 놀라느냐?"
"정말로 쌍골수와 호공장이냐?"
"그렇지. 정말로 쌍골수와 호공장이야."
"그럼… 앞서 쓴 초식은 저측탈망이라 하고, 방금 쓴 초식은 추공세라 하겠지?"
이번엔 무굉이 크게 놀랐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이 무공은 내가 배우고 나서 한번도 쓰지 않은 무공인데."
"네놈의 사부는 누구냐!"
"내 사부는 왜?"
융왕의 눈이 번뜩인다.
"네놈의 사부는 다름 아닌 천무대협이지! 맞지?"
무굉은 입까지 쩍 벌리며 어떻게 그것까지 알았냐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도 연액혈을 눌린 채 듣기만 하는 진양은
금방 앞뒤 정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드디어 무굉의 정체가 세상에 공개되어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그는 지난날 난
주에서 융왕이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사부는 천무대협과 붙어보지 못한 걸 한으로 여겼다…….>
융왕은 분명 난주에서 그러한 말을 했었다. 그의 사부는 대체 누군지 이름조차 모르지만 어쨌든 천무대협과 결투를
원하던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융왕은 바로 그의 제자다. 그 정체불명인이 천무대협과 결투를 원했다면 필시 천무대
협의 무공에 대해서도 깊이 파헤쳤을 게 아닌가. 즉, 융왕에게 그 얘기를 안 들려줬을 리가 없다.
(그럼 융왕은 자신의 사부인 정체불명인으로부터 천무대협의 무공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거야. 명칭까지도 잘 듣
고 자세에 대해서도 들었겠지만 설마 무 형님이 천무대협의 제자라는 건 생각하지도 못해서 금방 깨닫지 못한 거
지. 그러다가 직접 무공명을 전해듣고 깨달은 게 확실해. 이제… 무 형님이 천무대협의 제자라는 사실이 천하에 울
리겠구나!)
진양은 안타까움에 깊이 탄식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굉은 진위를 알지 못하고 떠들어댔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내 사부가 천무대협이라는 것과 좀 전 무공들의 명칭을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흥! 과연 네놈이 천무대협의 제자였구나. 아! 사부님, 드디어 사부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놈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무굉은 전혀 알지 못하여 고개만 갸웃거렸다. 융왕이 다가오며 말한다.
"그럼 너는 그 수많은 무공을 전부 이어받았겠구나."
"물론이지. 내가 배운 무공은 너무 많아서 그 이름들을 다 대기가 힘들 정도야. 그나저나 너는 참 아는 것도 많다."
"흥. 천무대협의 제자라면 죽어야 해. 내 사부님께선 천무대협과 결투를 원하셨는데 기어이 못 찾아 나에게 하신 말
씀이 있었다. 훗날 그의 제자를 만나면 반드시 대결하여 꺾고 죽이라고."
무굉은 놀라서,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내가 대신 보복을 받으라는 말이냐?"
"그런 셈이다. 넌 이제 내 손에 죽어야 해. 그래야 사부님께서 구천에서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다."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러는 것이냐?"
그것은 진양도 크게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융정 역시 이러한 일들은 전혀 모르는 듯 멍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
기만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원한이 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넌 어쨌든 천무대협의 제자니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융왕의 대답은 확고했다. 표정만 봐도 이미 결심을 굳힌 듯하여 이제 그의 맹렬한 공격은 불가피할 것 같았다. 진양
은 묵묵히 천무대협이란 사람이 대협이지만 동시에 문제도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홍리와 단목리만 해도 그런데
또 융왕의 사부와 원수지간이라니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증도 치솟았다.
무굉은 그가 꼭 죽인다고 하자 할 수 없이 싸워야 함을 알고 대비를 하였다. 융왕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
만 같았던 것이다. 헌데 그는 공격은 하지 않고 잠시 그를 노려보기만 하더니 가만히 사람을 불러서 대도를 가져오
게 하였다.
"아니, 대도는 또 왜 가져와?"
"당연히 네놈에게 쓰려고 하는 거다. 내 무공 중 북망귀곡편법만 빼고는 전부 사부님께서 전수하신 무공이라 그 어
떤 걸 써도 상관없겠지만, 사부님이 당시 말씀하실 때 그 분개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난 오늘 그 한을 풀
어드리기 위해 대해도법으로 네놈을 도륙내야겠다."
꼼짝도 못하고 듣기만 하던 진양이 혼잣말한다.
"흥. 웬일로 제법 은혜를 아는군. 또 무슨 수작일지 궁금하네."
"이런 건방진 놈. 닥치고 가만히 있어!"
그의 말은 분명 혼잣말이지만 소리가 제법 커서 모두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융정이 거세게 호통하며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형란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감싸고 따진다.
"왜 혈도를 짚여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을 때려요? 너무 비열해요!"
"네년도 입 다물어! 더 떠들면 죽여버리겠다."
"정아. 그만하거라."
문득 융왕의 음성이 들려 융정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형란이 아파하는 진양에게 말한다.
"진 대협, 어때요? 제가 혈도를 풀어드릴 테니 짚인 곳을 말하세요."
"후후… 나는 괜찮아. 그리고 제압 당한 곳은 연액혈인데 내공을 쓸 수 없으니 소용없을 걸."
형란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연액혈은 몸을 허물어트리는 요혈이라 단순한 해혈로는 소용이 없었다. 내공을
적절히 운용하는 방도가 필요한데 지금은 모두 신선폐에 당했으니 그야말로 난관이 따로 없었다. 그때쯤 융왕의 음
성이 들렸다.
"자존자대 무굉! 신선폐에 당했어도 넌 분명 오늘 나와 대결을 하기로 약조가 되어있었지?"
"그래, 당연하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마침 잘 됐다고 하는 말이다. 약조한 대로 오늘 대결을 펼쳐 너를 쓰러트림과 동시에 사부님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겠다."
고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죽이겠다는 뜻과 같았다. 진양은 그의 수작이 너무 비열하다 느껴서 울화통이 터졌다.
더욱 답답한 건 바로 무굉이었다.
"좋아! 네가 나를 죽여서 원한을 풀겠다면 얼마든지 해봐라. 나 자존자대 무굉은 오늘 너와 대결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으니 절대로 피하지 않는다."
"그래, 각오나 해라."
융왕은 바로 출수할 듯 했다. 이제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무굉은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좀 전까진
괴초로써 그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이제 그의 정체가 확고히 드러난 이상 그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이제는
절대로 여유 부리지 않고 단숨에 해치울 것이 분명했다. 진양은 걱정이 치솟아 다급히 형란에게 말했다.
"네 검법은 공력과 기교의 비율이 어때?"
"저요? 쾌묘검법은 그 비율이 3 대 7쯤 될 거예요. 쾌묘검법은 무엇보다 기교를 중시하고 그 기교에서 나오는 속도
를 중시하여……."
"됐어, 됐어! 그럼 빨리 형님을 도와줘. 이대로 두면 형님은 10 초식 안에 융씨 개새끼에게 죽고 말 거야!"
형란은 크게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가 주춤거리자 진양은 거세게 호통친다.
"빨리 안 가? 어서!"
"아, 알았어요……!"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서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진양의 말 자체가 중요하긴 하지만 분명 그의 말대로라면 빨리 도와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굉은 그동안 동행한 사람으로 소문처럼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매우 좋게 여기고 있던 터
였다.
허나 그녀가 간다고 해서 대세가 바뀌지는 않는다. 이걸 진양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어떻게
든 시간을 끌지 않으면 다 죽게 되는 것이다. 아까 융정 앞에선 죽어도 살아도 어쩌고 어떻다며 기개를 보였지만
실제로 다 죽을 수는 없었다. 만일 자신이 죽고 무굉이나 형란이 살 수 있다면 모를까, 한꺼번에 다 죽는 경우는 절
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자신이 연액혈을 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나는가 싶었다. 융왕이 단숨에 세 초수를 펼쳐 무굉과 형란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쯤, 북망산의
좌측에서 웬 흑의 복면인 무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수는 서른 명도 넘는 듯 했는데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고수인
듯 동작이 매우 잽쌌다. 그들은 바로 울타리를 넘고 안으로 뛰어들어와 먼저 진양을 보호하고 무굉과 형란도 도우
려는 듯 융왕에게까지 공격을 퍼부었다. 융왕은 분노하여,
"네놈들은 또 누구냐? 강호인이라면 복면을 벗어라!"
"흥."
그들은 단지 코웃음칠 뿐 복면을 벗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서른 명의 동작은 굉장히 일사불란하여 한순간에 진양
과 무굉, 형란을 안전하게 해주었다. 융정은 그들의 움직임이 넋을 잃었다가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공격을 명령했
다. 순식간에 사방에 널려있던 북망인들이 각자 채찍과 칼을 휘두르며 공격해온다.
진양은 이 상황에 어이가 없고 정신도 없었다. 형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단지 무굉만은 융왕과 대결해야겠다며 난
리법석을 떨 뿐이었다. 그는 말리는 흑의 복면인들을 밀고 융왕에게로 돌격했다.
"형님, 안돼요! 나중을 기약해요. 지금 저놈은 형님이 중독된 걸 이용해서 이기려는 거예요!"
진양은 사력을 다해 소리쳤으나 이쪽저쪽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에 묻힌 건지, 아니면 일부로 모른 체 한 건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진양은 다급해졌다. 보아하니 이 복면인들은 자신들을 구해줄 심산인가 본데 무굉만 빼고 간다
면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아… 안 돼! 형님을 구해야 해!"
그는 힘없이 늘어진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형란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린다.
"진 대협! 안돼요. 진 대협은 지금 혈도를 제압 당해서 위험해요. 차라리 제가 가겠어요."
"아니야. 내 혈도는 풀면 돼! 네가 내 혈도를 풀어줘라."
진양은 옆에 있던 한 복면인을 붙잡고 소리쳤다. 허나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시간이 없소. 당신은 지금 내공이 무산되어 혈도를 풀려면 한참은 걸릴 거요. 우리들은 아까부터 쭉 상황을 지켜봤
는데 왕 낭자가 당신의 혈도를 짚을 때 보니 그다지 깊이 한 것 같지는 않았소. 이건 당신도 알 거 아니요? 시간도
많이 지난 만큼 머지않아 당신의 혈도는 저절로 풀릴 거요."
그 말이 맞긴 맞았다. 당한 사람이 바로 진양 본인인 만큼 왕령이 연액혈을 그리 강하게 찍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 뭐 한가. 당장 위험한 무굉은 어떻게 막아야 할 게 아니겠는가.
"그럼 무 형님은 어쩌라는 거야? 이대로 있다간 형님은… 형님은……."
"걱정 마시오. 일단 당신들은 도망가시오. 우린 무 대협과 함께 싸우다 죽던가, 아니면 그를 진정시키고 함께 도망
치겠소. 우린 저 융가 무리를 이길 수가 없으니 일단 당신들만이라도 도망쳐야하오."
"웃기는 소리! 생판 모르는 당신들도 싸우다 죽는다면서 의제인 나는 안 된다는 거냐? 빨리 내 혈도를 풀어라!"
도대체 도움을 받는 게 누군지 모를 정도로 진양의 말투는 엉망이었다. 다행히 복면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다만 진양이 자꾸 혈도를 풀으라 하여 곤란하게 하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지금 그의 혈도를 풀어주는 건 그
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나 북망채 무리는 막강하여 그의 혈도를 푸는 동안 위기가 닥칠 수 있었다. 일단 그
와 형란은 보내고 무굉은 자신들이 따로 구하는 방법이 더 좋다.
"나를 미워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소. 형 소저가 진 소협을 데려가시오. 급하니 예법 차리지 말고 어서 업으시오."
형란은 그를 업는 일에 대해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입이었다.
"개소리 하지마! 빨리 내 혈도를 풀어. 형란, 너도 만일 나를 업고 그냥 도망친다면 다시는 안 보겠다!"
"지, 진 대협……."
"시끄러워! 난 혈도를 풀고 형님을 도와야 해!"
진양은 막무가내였다. 평소 이렇던 인물이 아니었지만 무굉이 위기에 봉착한 걸 보고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흑의 복면인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결국 판단을 한 듯 했다. 진양에게 손을 천천히 뻗어 공력을 이용
하여 직접 혈도를 풀어주려는 듯 했다. 진양이 그제야 만족하고 가만히 거친 숨을 몰아쉴 때였다. 순간 갑자기 복면
인의 손이 그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꽂혔다. 팍, 하는 음향과 함께 진양은 간단히 장태(將台)혈을 제압 당하고 말았
다. 장태혈은 일단 점혈 당하면 바로 혼절한다. 내공이 심후하거나 폐혈(閉穴)한 경우가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젖꼭지 위로 2촌 조금 못 되게 오르면 있는 혈인데 심하게 칠 경우 즉사하는 경우도 있다.
진양은 어이도 없고 화도 나서 뭐라고 말을 하려하다가 곧바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형란이 놀라서 소리친다.
"무… 무슨 짓이에요?"
"걱정 마시오. 지금 그는 장태혈을 맞고 혼절한 거요. 보아하니 형 소저는 그가 거부하면 데리고 가지 않을 듯 해서
어쩔 수가 없었소. 이제 그는 혼절했으니 일단 데리고 가시오."
"나중에 그의 분노를 살 거예요. 제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무 대협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한탄할 거예
요."
"괜찮소. 무 대협은 무공이 가히 입신 지경에 이르렀으니 융가 무리쯤이야 사실 우습소. 우리가 도움을 주며 잘 타
이르면 그도 몸을 피할 것이오.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흑의 복면인은 제법 말솜씨가 있었다. 형란은 그 말이 확실히 옳다고 여기고 진양을 들쳐업었다. 복면인이 서남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쪽으로 가면 돌아가는 길인데 그쪽은 안전할 거요. 북망산에서 유일하게 나무가 많은 지역이고 무덤도 많아서
북망인들은 당신들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거요."
"무… 무덤이 많아요?"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빨리 가라는 듯 그녀를 밀었다. 그녀는 무덤이 많다는 말에 안색까지 변했지만 지금은
진양을 구하는 게 시급했다. 먼저 이 자리를 떠야한다. 흑의 복면인은 더 그녀를 보지 않고 몸을 돌려 북망채 무리
와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녀도 하는 수 없이 그가 가르쳐준 방향을 따라 급히 하산하였다.
그 자가 가르쳐준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진 않았다. 진양을 들쳐업고 가는 것이라 험난한 길이 나오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단지 북망산에 어울리지 않게 나무가 많았다. 이쪽저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서는 옷을 다 벗은 채 형란을 반기고 있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니 과연 복면인의 말대로 무덤도 엄청 보였다.
둥그렇게 솟아오른 무덤들. 나무가 있어서 그런지 이쪽은 무덤 천지인 듯 싶었다. 형란은 그것들을 보자 점점 소름
이 끼쳤다.
"안 돼! 여기서 겁먹고 돌아갈 순 없어."
허나 그녀는 상황을 직시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진양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기절한 상태. 북망인들이 추격을 해
오기 전에 이 길을 따라 산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녀는 그대로 내달렸다. 가면 갈수록 으스스해졌지만 나중엔 눈을
반쯤 감고 달리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앙상한 나무들은 늘어진 채 흐릿할 뿐이었다.
한 반 각쯤 내달렸을까. 추격을 두려워해서인지 음습한 경치를 두려워해서인지, 제법 빠르게도 산 중턱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앞으로 한 시진 정도만 내려가면 북망산에선 벗어날 수 있을 듯 했다. 이미 무덤들은 모두 지나쳤고 그
나마 있던 나무들도 안 보이는 곳. 그곳은 형란도 지나갔던 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까지도 없었다.
(진 대협은 잠시 혈을 짚여 혼절한 거니 일단 객잔으로 데려가야 해. 헌데… 이 근처엔 객잔이 없었어. 그럼 낙양까
지 가야 하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북망산 근방에 객잔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부근에선 제법 이름이 있는 북망채 도적 무
리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객잔 같은 게 없는 것이다. 예전엔 여러 곳 있었지만 북망채가 자꾸 약탈을 일삼아 모두
떠난 지 오래다. 형란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근방에 객잔이 없다는 것만 알았다. 낙양은 그녀가 살던 고
향이요, 또 그만큼 안전한 곳이기도 하니 그곳에 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한참 산허리를 감아 내려갈 때였다. 산 아래에서 웬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주고받고 이쪽에서 또 끼어
들고 하는 걸 보니 한 네댓 명은 되는 듯 싶었다. 형란은 좀 전까지 위기를 맞았었고 겨우 탈출한 터라 신경이 곤
두서있는 상황. 마침 그런 말소리가 들리자 크게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일단 옆에 언덕 뒤로 몸을 숨기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여간 이곳은 올 곳이 못 되요. 소주님께서도 보셨잖아요. 여긴 나무라곤 하나도 없고 풀 한 포기도 없어서 그야
말로 죽은 산이에요. 괜히 북망산인 줄 아세요?"
"북아. 북망산이란 이름이 붙은 건 역대 왕족들이 이곳에 많이 묻혔기 때문이야. 산이 이런 건 사실 북망채 때문이
지."
"그… 그런 건 저도 알아요! 아무튼 그만 내려가요. 이런 곳에 올라와서 뭐 하겠다는 거예요?"
형란은 문득 그 목소리들이 매우 귀에 익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대화였는데, 또 귀
에 익은 다른 여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북아! 소주님께서 가시면 우린 따라가는 건데 뭔 말이 그리도 많아? 잔말말고 따라오기나 해."
"하지만 동 언니……."
"시끄러워. 입 다물지 못해?"
형란은 그제야 확연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북아와 동 언니. 북아는 방홍미녀 중 막내고 그 막내가 부른 동 언니
란 당연 방홍미녀의 동아가 아니겠는가. 그럼 그들은 사공환 일행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걸 확인시켜주듯 마침 사공
환이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해라. 내가 오르자고 했으니 일단 따라와. 그리고 우린 지금 놀러온 것도 아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가문을
다시금 크게 일으킬 수 있어."
"소주님. 그때 당시 진 소협이 왕처일을 죽인 자라 했지만 그건 사실 당가 가문의 거짓말이라 했어요. 사실은 당광
이 죽이고는 진 소협에게 덮어씌운 거라 했잖아요. 이런 소문은 강호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북망산에 올라서 뭐 하
려고요?"
북아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물음에 사공환이 말한다.
"바보 같은 소리! 듣자하니 당광만 죽고 당무 등은 모두 북망채로 향했다고 했어. 끌려갔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무굉
과 진가 놈이 대판 벌이러 갔다 하잖아. 난주 격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너도 들었지? 무굉에 관해서."
"물론이죠. 그의 무공은 엄청나다고 했어요. 당광을 배반하고 죽인 그 융왕을 아주 가볍게 눌렀다더군요. 얼마나 무
공이 대단하면 그 정도겠어요?"
"그래. 그는 그렇게 막강하니 이번에 필시 북망채를 쓸어버릴 거야. 융왕과 대결한다고 하지만 융왕은 그를 꺾지 못
하고 대패할 걸. 그럼 당연히 당무 일행과 왕령이란 계집이 구출되겠지. 우린 그때 당무에게 가서 저번에 약속한 걸
이행하라고 하면 돼."
"그는 이행하지 않을 거예요. 가문이 폭삭 망했는데 무슨 수로 우리와 약속한 돈을 줘요?"
형란은 계속 쭉 듣고 있었지만 도무지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그저 인상만 찌푸리며 그들의 대화에 더욱 귀를 기
울일 뿐이었다.
"아니야. 그때 그는 하늘에 맹세까지 했으니 반드시 이행할 거야."
"이번에 강호에 알려진 그의 소문을 잘 생각해본다면 절대 이행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약속
을 지키는 대인도 아니고, 설령 지키려한다 해도 돈이 없어서 우리와 약속한 은 4백 냥을 넘겨주지 못할 거예요. 은
4백 냥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아니! 당시 그가 말했잖아. 자신들은 전진교도지만 따로 모아둔 돈이 많아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 설사
돈을 주지 않는다 해도 우린 이미 약속을 했지. 만일 돈이 없다면 어음까지 쓰게 하고 있는데 안 준다면 뺏어야지."
사공환은 제법 생각을 많이 해둔 것 같았다. 이런저런 경우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대책 방법을 쫙 나열하여 설명하
고 있었다. 한편 형란은 크게 놀라있었다. 입이 닫히지 않고 쩍 벌어진 채로 어이없다는 듯 허, 허 하는 한숨 소리
만 내쉬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다름 아닌 은 4백 냥 때문이었다. 송대에 은 4백 냥은 말 그대로 뉘 집 개 이름이
아니다. 이때는 다른 시대보다 은의 가치가 높아서 은 한 냥이면 동전이 3000문은 되었고, 한 냥이면 쌀 10~15석은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은 4백 냥이라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적게 잡아도 쌀만 4000석은 살 수 있는 거
액이다.
형란은 본래 부유한 집안의 여식이다. 형웅강은 죽었지만 당시 대협으로 칭송되던 터였고 나름대로 돈이 많던 집안
이었다. 옆집 문인가장과 함께 낙양 이대가장이라 불리니 오죽하겠는가. 헌데도 그녀가 느끼기에 은 4백 냥은 매우
많은 금액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대강의 정황도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였다.
"흥… 은 4백 냥은커녕 한 냥도 못 받을 걸……."
형란의 귀 뒤로 들려온 음성. 따뜻한 입김과 함께 들려온 이 음성은 그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란 게 그녀를 놀라게 할 법했지만, 더 놀란 이유는 그 음성이 진양의 음성이라는 데 있다.
"지, 진 대협!"
그녀는 너무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지르고야 말았다. 스스로 위기를 자처한 셈. 하지만 어찌하랴.
"누구냐?"
앙칼진 외침과 함께 은빛 침이 날아들었다. 형란이 깜짝 놀라며 어찌할 바를 진양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몸
을 날렸다. 우습게도 그건 도망치는 아랫길이 아닌 맞서는 언덕 바깥이었다. 그리로 나섰으니 사공환 일행과 정면으
로 마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공환 일행은 설마 진양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아니… 당신은 거기 왜 있었소?"
사공환의 물음에 진양은,
"내가 거기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왜… 내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을까봐?"
사공환 일행은 모두 안색이 변하고 만다. 그의 말투로 보아 좀 전의 대화를 모두 들은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다. 형
란은 그들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진양의 몸만 걱정이 되는 듯 했다.
"진 대협! 괜찮아요? 몸은 다 괜찮아졌나요?"
"그래. 독도 다 몰아냈고 혈도는 알아서 풀렸다."
형란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더 물으려 했다. 그러자 진양은 눈짓을 보낸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입
을 다물라는 뜻임을 깨달아 침묵을 지켰다.
실상 진양이 독을 다 몰아냈을 리가 없다. 산공독은 일단 단전까지 침투할 경우 남의 도움 없이는 치유하지 못한다.
12시진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독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직접 몰아내 줘야 하는 것이다. 헌데 혈도까지 짚이고 신선
폐라는 독에 당한 진양이 어찌 독을 스스로 몰아낸다는 말인가. 혈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풀린 거지만 신
선폐의 독은 여전히 단전 안에 남아있었다.
형란은 잠시 생각한 후에야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상을 알자 이젠 또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진 대협은 아직 독을 못 몰아낸 거야. 즉, 적과 부딪치면 좋을 게 없는데… 왜 하필이면 사공환의 정면으로
뛰쳐나왔지?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
그녀처럼 멍청한 이가 어찌 진양의 생각을 알겠는가. 진양은 사공환의 무공은 낮지만 방홍미녀의 무공은 높으므로
산공독에 당한 상태에선 도망갈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은 그나마 공력 없이도 경공을 펼쳐 어떻게 도
망칠 수도 있겠지만, 형란은 애당초 실력도 없는데 독을 당했으니 잡힐 건 뻔한 게 아닌가. 그때 잡혀서 망신을 당
하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나서서 허장성세의 술수를 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