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四 章. 폭풍전야
형란의 상처는 심하여 하루만에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피를 많이 쏟았고 진양이 호들갑을 떨어 웅덩이에
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외상에 불과해서 어떻게 진양의 내상에 비하랴마는, 결과적으로 손바
닥에 엄지손가락 만한 구멍이 났으니 심각한 상처에 속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건 진양이었다. 아니, 사실 일어
난 것도 아니다. 눈을 거의 붙이지 못하고 가슴과 왼팔을 짓찧는 고통에 시달렸다. 밤새 대혈을 점령한 신선폐와 전
쟁을 벌였으며 결과는 무승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피곤함을 달래고자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렸다. 곧 웅덩이 곁으로 다가갔다.
"란아. 란아."
아직은 꼭두새벽에 가까울 정도의 새벽이었다. 찬 새벽 공기가 북망산 특유의 귀기와 만나자 피부로 으스스한 기운
이 느껴지는 때였다. 진양은 그녀를 몇 번 불렀으나 대답이 없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골아 떨어져 전
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뛰어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로 떨어질 때 쿵, 소리를 냈는데도 그녀는 깨지 않는다. 정말 피곤하긴 한 듯 했
다. 입가에 동글동글 고인 침이며 헝클어진 머리며 조금도 외모에 신경을 두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터졌지만, 동시에 귀엽게도 느껴진다.
"형 아가씨. 이제 일어나시지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진양은 익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역시 못 듣고 뻗어있자 어깨까지 흔들어보았다. 그
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듯 했다. 음, 하고 비음을 내며 몸을 뒤척이더니 부스스한 눈으로 진양을 본다. 순간 그
녀는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진양임을 확인하여 더욱 놀란 것이다. 아무리 강호 여인이라지만 자는 모습을 보
였으니 창피했던 게 분명하다.
"아가씨, 이제 일어나셨네요."
"진 대형. 놀리지 말아요."
그녀는 슬쩍 눈을 흘기며 반 웃음 반 울음이었다. 그에 진양은 더욱더 장난기가 솟구쳤다.
"알았네요, 알았어. 그런데 아가씨는 사실 숨겨놓은 물병이 있었나보군요."
그는 그녀의 입술을 가리키며 말을 하고 있었다. 형란은 어리둥절해하며,
"물병이라니요? 저는 물병이 없어요."
"엥? 그럼 아가씨의 입가에 촉촉이 젖어있는 건 무엇일까요?"
그녀는 자신의 입가를 쓱 닦아보고는 그제야 진양의 의도를 깨달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여 입
을 가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허나 진양의 장난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아! 그리고 보니 이곳이 더럽긴 하군. 물이 있었던 듯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흙바닥이니… 그래서 아가씨의 눈에
흙이 많이 들어갔군요."
그녀는 곧장 눈을 비벼보고는 그게 눈곱을 말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처럼 창피한 경우도 없다. 그녀는 당장이
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무작정 몸을 솟구쳤다. 그러나 경공
이 형편없던 그녀는 웅덩이를 벗어나지 도 못하고 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추태가 따로 없다. 그녀는 창피
의 극을 경험하고 아예 진양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도 새빨개진 귀는 보여서 능히 그녀의 표정을 짐작케 했
다.
"란아, 부끄러운가봐?"
"대… 대형은 못됐어요."
"히히. 내가 못된 건 진작에 알고 있었어야지. 어디 란아의 침하고 눈곱이나 구경할까?"
그녀는 급기야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진양은 너무 심했나 싶어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이고… 순진한 란이가 또 우네. 에이, 울보 녀석."
"대형이 나쁜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내가 다 나빴으니 이제 울지 마라. 얼른 여기를 떠야지."
진양은 그녀를 다독거리며 오른팔로 그녀를 감싸안았다. 한순간 발을 퉁겨 위로 치고 오르니 금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형란은 새삼 그의 경공에 감탄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란아. 아마도 이 바깥은 철저히 봉쇄됐을 거야."
"봉쇄요? 갑자기 그게 무슨……."
그녀는 역시 바보 같았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것을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고 있다. 하지만 진양은 그런
그녀가 한심하다기보다 귀엽다고 느꼈기에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북망채 말이야. 우리가 이리로 도망쳐 올 때 우리만 온 게 아니었잖아. 추격 무리가 있었지? 그들은 비록 우리를
놓쳤지만 우리가 이 북쪽 방향으로 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럼 그들이 길을 막아놨다는 건가요?"
"비슷하지. 하지만 융왕이나 융정의 명이 또 있을 거야.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릴 그냥 보내주진 않겠지. 이
산을 내려가려면 동, 서, 남쪽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그 방면의 길은 전부 봉쇄했을 걸."
형란은 끙, 소리를 냈다.
"이 북쪽으로 나가는 길은 없나요?"
"없어. 아! 그리고 보니 넌 아직 절벽을 못 봤구나. 따라와, 내가 보여줄게."
그는 즉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절벽과 웅덩이는 가까워서 몇 걸음 가자 흐르는 황하부터 주위 초원이며 마을까지
훤히 보였다. 형란은 이곳에 정신 없이 왔었고 웅덩이 밑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과
연 진양이 말한 대로 절벽은 깎아지듯 하며 길은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럼 어떡하죠? 우리 둘이서 그들을 뚫고 나갈 수 있나요?"
"나도 그 점에 대해서 어젯밤에 좀 생각해봤어. 상대가 독하고 영악한 북망채 놈들인 만큼 신중을 기해야해. 괜히
어설픈 작전을 세우다간 당하게 되어있지."
"아… 어젯밤에 그래서 지금 대형의 안색이 안 좋군요……. 무리하지 마세요, 대형."
"괜찮아.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중요한데 그깟 무리하는 게 문제겠니?"
형란은 할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진양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히며,
"아무튼 생각해낸 방법이 하나 있었어. 겨우 하나 생각해낸 거라 이것이 아니면 다 죽는 수밖에 없지. 넌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고 반드시 따라야해. 이 작전이 아니면 방도가 없기 때문에 꼭 이행해야 하는 거야. 응?"
"대형이 하라면 당연히 해야지요!"
"좋아! 그럼 잘 들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간단하지만 좋은 방법인 '양동작전(陽動作戰)'이야."
진양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표정을 보니 깊이 이해는 못한 듯 했다. 곧 진양이 설명을 해주기 시작
한다.
"너도 이게 무슨 작전인지는 알 테니까 행동할 것만 설명할게. 간단히 잘라 말하면 넌 주(主)가 되고 난 부(副)가
되는 거야. 너는 내가 이곳을 떠나면 웅덩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고함소리나 여러 복잡한 기척이 들리면 바
로 서쪽으로 떠나. 단 절대로 소리를 내거나 적에게 들켜선 안 돼. 만일 그렇게 된다면 너도나도 모두 죽게 돼. 반
드시 신중을 기해서 조심스럽게 서쪽으로 빠져나가. 어제 알아보니까 저쪽을 통하는 게 좋겠더라. 험난하긴 해도 지
름길처럼 바로 서쪽 길로 끼어 들게 되어있어."
그는 서남쪽 방향의 길이 없는 지대를 가리켰다. 상당히 비탈져서 중간중간 나무 한 그루씩이 없다면 도무지 이동
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곳을 지나가려면 발을 땅에 꽉 붙이고 나무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해야만 할 것 같았다. 형
란은 그의 얘기를 다 듣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뭔가를 눈치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럼 대형은요? 저는 이쪽으로 빠져나가고 대형은 어디로?"
"아……! 나는 동쪽으로 갈 거야. 이렇게 갈라지는 수밖엔 없다."
"양동작전은 본래 한쪽이 희생하는 거와 같잖아요. 대형의 작전은 왠지 대형이 그들을 유인하겠다는 말 같아요."
그녀는 과연 눈치를 챈 상황이었다. 역시 멍청해도 명문가의 자손답긴 했다. 진양은 그녀가 또 안 가겠다고 할 것
같아 짐짓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양동작전과 비슷하긴 하지만, 난 동쪽으로 가면 도망칠 수 있는 방도가 있어서
걱정 없어."
"그게 뭐죠?"
"그건 말하면 안 돼. 천기누설이라고 천벌 받아!"
형란은 천벌 받는다는 말에 겁을 먹고 입을 꼬옥 다물었다. 하지만 표정은 왠지 의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진양은
급히 입을 열었다.
"게다가 나는 경공이 뛰어나잖아. 반면에 너는 떨어지고… 북망채 무리는 하나같이 산에 적응이 잘 돼서 나 같은
자가 아니면 그들을 따돌릴 수 없어. 난 험난한 대천산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그들을 충분히 따돌릴 수
있지! 양동작전이라고 꼭 한쪽이 희생하는 건 아니야. 정확한 계산만 있으면 양쪽 다 살아남을 수 있어."
"정말… 그런가요?"
"그렇지! 여하튼 난 동쪽으로 가야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으니 걱정하지마. 네가 만일 나를 막는다던가, 내 말대로
하지 않는다던가 하면 그건 곧 나를 죽이는 것과 같아. 물론 너도 죽고."
진양의 말은 굉장한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형란에겐 그랬다.
"아, 알았어요 따를 게요. 하지만… 대형 꼭 무사하셔야해요."
"히히. 너나 조심해. 괜히 내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고! 항상 신중하게 판단하고 이동해서 서쪽으로 빠져나
가."
"알았어요. 대형 말을 꼭 명심할게요."
그녀가 드디어 승낙했다. 진양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생각해 그저 가슴속으로만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젠 더 볼일이 없다. 괜히 지체해봐야 그녀의 상처만 악화될 뿐이다. 그는 곧장 떠나갈 기세로 준
비를 하였다. 봉을 허리춤에 매달고 그녀의 다친 손을 붙잡았다.
"이제 출발한다. 내가 사라지면 꼭 숨어있어야 해. 나머진 내가 말한 대로만 하면 무사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무
사히 하산하면 먼저 의원을 찾아. 그 손에 상처가 심하게 번지지 않도록 빨리 치료해야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전부
알아들었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진양은 기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진다. 형
란은 알지 못했지만 진양만큼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었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양은 그대로 몸을 날
려 동쪽으로 사라져버렸다. 형란은 아무 죄 없는 옷깃을 움켜쥐며 그의 안전을 빌고 또 빌었다.
바보 같은 형란을 속이기는 쉬웠다. 워낙 눈치가 없고 생각이 단순해서 아주 간단히 속일 수 있었다. 그 단순함이
말을 듣지 않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이제 진양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다. 동쪽으로 가면 살 수 있다
는 말은 당연히 거짓이다. 양동작전을 펼치고 양쪽 다 살아남자고 했지만 가망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지금 북망산
은 북망채 무리 천지로 사방팔방 뚫린 길이 없었다. 융정은 진양의 머리를 두려워해 북망산에서 내려갈 수 있는 길
이란 길은 모조리 막아버린 상황이었다.
진양은 이미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다. 어젯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을
까, 형란만이라도 살려보낼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일까? 신선폐와 밤새 싸우며 짜낸 계획은 고작 이 정도였다. 간단하
지만 훌륭한 방법, 물론 융정이 속아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만 형란의 상처는 아물었고 근래 진양을 따라다니
며 많은 걸 배웠으니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함께 다닐 수는 없는 것이 그렇게 했다간 결국 둘
다 죽게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신선폐가 가슴과 왼팔을 점령했다. 혈도를 눌러 확산은 막았지만 오래갈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 판단하길, 북망채에게 안 죽어도 채 열흘을 못 넘기리라 계산하였던 것이다.
좀 달리다보니 과연 주변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진양은 허허실실의 묘계를 펼치기 위해 일부로 은밀한 곳만 밟고
달렸다. 그런데도 발각이 된 걸 보면 북망채가 완전히 포위한 게 확실하다. 진양은 모르는 척하고 더욱 빠르게 내달
렸다. 이럴 땐 그들이 오랫동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빨리빨리 처리하는 게 좋았다. 달리는 내내 보이는 적막한 풍
경은 그의 가슴에 낙엽이 휘날리게 만들었다.
차 한잔 마실만한 시간이 지나자 주위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진양은 은연중에 대비하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순간 비도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저번처럼 하나둘씩 날아오더니 잠시 후엔 빗발치듯 떨어졌다. 진양은 마치 깜짝 놀
랐다는 듯 추태를 부리며 비도를 피해냈다. 허나 머뭇거리면 정말로 추태를 부리며 비도를 피해내야 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 그는 재빨리 동쪽으로 더 달려 그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과연 급하게 울리는 나팔소리가 들
린다.
"잡아!"
일갈소리가 들리더니 좌우 언덕에서 북망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대도를 쓰지 않고 채찍을 쓰며 진양의 움직
임을 저지할 생각인 듯 했다. 진양은 일단 봉을 꺼내들고는 그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수는 어림잡아 십여 명. 채
찍은 역시나 고룡 가죽으로 만든 그 단단한 채찍이었고, 저것들이 전부 쏟아지면 내상을 입은 그로선 막아낼 수 없
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방향을 잘못 잡았구나."
"쳐라!"
채찍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양은 이 북망귀곡편법과 여러 번 부딪쳤기 때문에 그 편법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
었다. 허나 그들을 쓰러트리기는 무리다. 이 편법의 단점은 채찍이 길게 만들어져서 상대가 근접하면 한순간에 무너
진다는 것인데, 진양의 몸 상태가 안 좋은 만큼 근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다. 진양은 그
들의 채찍을 요리조리 피하곤 있지만 동작이 시원시원하지가 않았다.
진양은 가능하면 북망인들을 이쪽으로 모조리 끌어올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들과의 싸움에서 매우 우세
함을 보여야 했다. 그는 즉각 봉을 휘저으며 유루봉법으로 이 채찍들을 제압하기에 나섰다. 기교의 대가라 불릴만한
유루봉법이 펼쳐지자 채찍들은 순식간에 그 효력을 잃었다. 지난번에 했던 대로 봉을 돌려 채찍을 막고 또 휘어 감
는 것이다. 이쪽저쪽으로 채찍 여러 개가 엉키자 그들의 공격은 잠시 멈춰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엉킨 모양이 꼭
그물과도 같아서 북망인들이 동시에 힘을 쓴다면 진양은 쉽게 사로잡힐 위험이 있었다.
그는 북망인들이 힘을 합치기 전에 선수를 쳐버렸다. 봉을 위로 번쩍 들었다가 또 한순간에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가 이번에는 돌렸다가, 하는 수법으로 혼란한 상태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채찍은 완전 엉켜버리고 힘이 딸린 몇
몇 북망인은 엎어지기도 하였다. 진양이 이긴 셈이다. 그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한 명 한 명 혈도를 제
압했다. 그의 근접에 북망인들은 채찍을 놓고 뒤로 내뺐지만 진양의 동작이 그보다 한 수 위였다.
더 시간 끌 필요는 없다. 그는 그들을 제압만 하고 다시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 10 걸음 밖으로 나갈 때
쯤이 되자 뒤쪽이 소란스러웠다. 보니 북망인들이 도착해있었다. 진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론 오만인상
을 다 쓰고는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이번엔 또 다른 북망인들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동쪽으로 더 나아가자 연락을 받은 북망인들이 가로막았다. 이대로 더 도망치게 내버려두면 동쪽 길로 빠져 쉽게
산을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북망인들은 앞뒤로 진양을 협공할 계획인 듯 했다. 허나 진양이 누군데 그런 계획에
당하겠는가? 그는 난데없이 좌측 언덕 위로 몸을 날렸다. 너무 재빠르고 그 언덕도 상당히 높아 북망인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덕을 통해 돌아서 갈 때쯤 또 나팔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언덕 위는 제법 한산
했는데 틈틈이 나무가 있어 몸을 숨기기엔 나쁘지 않았다. 주변을 한번 쓸어보니 벌써 산을 반은 내려와 중턱은 되
는 듯 했다. 앞을 보니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길도 보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본래 계획은 그들이 자신을 잡아야
하는 건데 이리 쉽게 뚫리니 좀 이상하기도 했다.
그는 설마설마 하며 다시 빠른 발 동작을 보였다. 몇 번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2~3장은 돌파한 것이 과연
진양의 경공은 대단하였다. 언덕을 돌아 내려와서 막 동쪽으로 통하는 길을 밟았으 때였다. 전후좌우에서 북망인들
이 여러 명이나 뛰쳐나왔다. 하나같이 대도를 들고 죽기살기로 덤벼들 기세인 것이 아무래도 그냥 맞붙기는 위험했
다. 진양은 숨쉴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달려 그들의 머리 위를 넘어 가버렸다. 실로 간단하게 돌파한 줄 알았다.
헌데 채 두 걸음도 못 가서 또 북망인들 서너 명이 막는다. 이번엔 좀 전처럼 그냥 피할 길이 없어서 유루봉법으로
위협을 하듯이 뚫었다. 그러나 역시 또 두 걸음을 못 가고 다른 북망인들에게 막혀버렸다. 뒤는 아까부터 계속 피해
왔던 30여 명의 북망인들이 무서운 기세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머뭇거리면 그야말로 죽음인 것이
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죽으면 란아가 위험해. 조금이라도 더 빠져나가서 시간을 끌고 그들의 발
등에 불똥이 떨어지게 만들어야해!)
진양은 결심하고 또 한번 돌파를 시도했다. 생각해보니 이쪽 길로 나온 후부터 적의 숫자가 많아졌다. 몇 걸음만 가
면 자꾸 서너 명을 단위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그러나 그건 오히려 진양의 작전에 발을 맞춰주는 꼴이었다. 이렇
게 되야 형란이 더 쉽게 서쪽을 돌파하리라 여겼다.
작전이 거의 성공하여 형란이 무사할 수 있다는 기쁨과, 왠지 모를 서글픔이 은은히 느껴질 때였다. 그때는 막 대도
를 휘두르던 북망인 둘의 대혈을 후려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날아온 비도가 진양의 목을 노렸다. 그는 깜짝 놀라
서 봉을 찍고 몸을 날렸다. 겨우 피했지만 워낙 빠른 속력이라 어깨 죽지가 베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호! 진가가 제법인 걸?"
순간 진양은 반 기쁨과 반 분노를 느꼈다. 그 목소리는 융정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네놈이었구나!"
"그래, 나다. 이놈 진가야. 내가 포위했는데 감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하하."
진양은 속으로 미소하며,
"운이 안 좋아 결국 이렇게 죽게 되었군! 내 운명이니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엥? 뭐가 운이 안 좋아?"
"북망산에는 세 갈래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재수가 없어서 네놈이 있는 이쪽 길을 택한 게 아니겠느냐?"
"우하하하!"
갑자기 융정이 대소를 터트렸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실컷 웃는다. 진양은 그의 웃음 속에 심한 조롱의 기운이 섞
여있는 걸 알고 가슴이 뜨끔했다.
"왜 웃어?"
"웃기지 않느냐? 너의 생각이 참 우습기 짝이 없어!"
"뭐라고?"
"멍청한 녀석. 내가 이쪽 길만 막아놨을 것 같으냐? 북망산 모든 길을 전부 봉쇄하고 난 북망채에서 기다렸지! 네놈
을 발견하면 나팔을 불라고 했는데 그 소리가 들려서 이리로 온 것이다."
과연 진양의 예상대로였다. 이번엔 형란의 안위가 궁금했다. 진양은 짐짓 놀란 체하며 정보를 유도해내려고 했다.
"그, 그럴 수가……! 내가 네놈 따위에게 당하다니."
"하하! 멍청한 놈.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한 걸 보니 네놈이 급하긴 급했나보구나."
"닥쳐라, 이 벌레 같은 새끼!"
"흥! 그런 말을 감히 내뱉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그런데… 그 형가 년은 어디 가고 너만 이리로 왔느냐?"
진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가 알 것 없다."
"설마 혼자 도망친 건 아니겠지? 정말 그랬다면 너야말로 벌레 같은 새끼다."
"이놈이!"
그는 매섭게 봉을 휘둘렀다. 그 모습이 꼭 정곡을 찔려 흥분하는 것 같아서 누구든 정말로 혼자 도망친 거라 오해
할 정도였다. 융정은 웃었다.
"하하. 정말 굉장한 걸! 진씨 대협께서 어린 소녀를 버리고 혼자 살고자 몰래 도망치다니."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그래그래, 정말 놀라운 일이야! 우하하."
진양은 뭔가 이상했다. 융정의 웃음소리와 말투에서 괴상한 느낌을 받았다. 꼭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이 거
짓말을 믿고 놀리는 걸 수도 있지만, 왠지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순간 그는 뭔가를 깨닫고 무릎을 치고
말았다.
"아차!"
"하하. 아차 해도 이미 늦었어. 벌써 형가 년을 찾으라고 애들을 보냈거든! 네놈이 양동작전 정도를 쓸 거란 건 진
작에 알고 있었지. 이런 상황에 양동작전이야말로 아주 적격이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너……."
"안타깝게도 넌 나팔소리로 내는 신호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겠지. 나팔소리는 두 번 들렸지? 첫 번째 것은 네놈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네가 동쪽 길에 근접했다는 것이야. 난 미리 애들을 불러 준비를 해두었거든! 핫
핫."
이만하면 완벽히 당한 것이었다. 진양은 그 나팔소리를 '이쪽으로 도망친다' 라는 걸 알리는 신호인 줄 알았는데 그
게 아니었던 셈이다. 그 소리는 '진양이 출발했다' 라는 걸 의미하였다. 융정은 진작에 부하를 불러모으고 그렇게
지시했다. 그리고 그 나팔소리가 울리면 안 울린 두 방향에서는 진양과 형란이 도망쳤던 그 북쪽 방향을 탐색하라
는 지시도 했었다. 즉, 동쪽에서 나팔이 울렸으니 남은 서쪽과 남쪽에 있던 북망인들이 북쪽 절벽가로 탐색하러 간
것이다. 이제 형란은 고립된 상황이요, 진양도 잡힌 상황이다. 양동작전을 펼쳐 형란만이라도 살리려 했는데 이제
둘 다 죽게 생겼다.
"비켜라!"
진양은 지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형란만큼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친 듯이 봉을 휘두르자 수십 명
의 북망인들이 대도로 맞선다. 진양은 몸도 성치 않고 더구나 적의 숫자도 많은데 어찌 쉽게 돌파할 수 있겠는가?
"길을 내줘라."
융정이 한 말이었다. 이 말은 비단 진양뿐만 아니라 북망인들도 놀라게 했다. 갑자기 길을 내주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들은 모두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융정이 다시 말한다.
"귀가 먹었냐? 길을 내주라고!"
그제야 북망인들은 서둘러 막았던 길을 열어줬다.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막을 풀고 정렬하듯 좌우로 쭉 나열했다.
진양은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무슨 계략이 있나 싶어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무슨 수작이냐?"
"수작은 무슨 수작? 난 원래 선해서 한번 봐주는 거란다. 어서 가서 네 란아나 구해보시지!"
"흥. 뭔 수작인지 알만하군."
진양은 냉소하며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좌우로 정렬한 북망인들은 살벌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하나하나 노려보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후, 북망인들 중 한 명이 다가와 묻는다.
"소채주님. 갑자기 왜……."
"흐흐. 그러니 너희들이 나한테 욕을 먹는 거다. 저놈이 지금까지 나에게 한 짓이 어느 정돈데 그냥 곱게 넘어갈 수
있냐? 아주 처절하게 죽여줘야지."
"그럼 그 말씀은……."
융정은 그 자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이 멍청한 것아! 그러니까 형가 년하고 만나게 한 후, 처절히 몸부림치다 죽게 만들 거란 얘기다. 뭐… 저놈이 보
는 앞에서 형가 년의 옷을 벗긴다던가, 아니면 고통을 줘서 진가가 지랄하도록 한다던가."
"아! 과연 소채주님께선 지헤가 탁월하십니다."
융정은 그의 발림수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소를 터트렸다. 완전 승리를 장담하는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진양은 황급히 본래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웅덩이 부근으로 재빨리 달려가는 것이다. 가는 동안은 다행히도 북망인
들의 습격이 없었다. 융정이 연락을 미리 해둔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덕분에 수월히 돌아갈 수 있었다. 웅덩이 부
근에 도달하니 형란이 없었다. 아마 이곳엔 없고 서쪽에서 곤란을 겪고 있을 거라 예상했었기에 그는 곧장 서쪽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나 급히 달리는지 종종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옷이 찢겨도 모르고 달리는 정도였다. 그렇듯
진양의 머릿속엔 온통 형란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만일 무슨 일을 당한다면 모두 내 책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함께 있다가 죽든 살든 할 걸……!
융정이 그리도 주도면밀했다니 아무래도 살아나가긴 틀린 듯 싶구나. 하지만 그녀만은 살려야해!)
그의 발에 점점 가속이 붙었다. 그 덕인지 금새 형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침 위기에 처해있었다. 사실 그
녀는 진양의 말대로 틈을 보아 서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서쪽 길엔 근접하지도 못하고 그 중간에 북망인
여러 명을 만나 한바탕 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녀의 쾌묘검법을 잘 수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 위력의 반에 반
도 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어찌 열 명도 넘는 북망인들을 뚫을 수 있겠는가? 완전 포위 당하여 마치 장난감 가
지고 놀 듯 농락을 당하다가 좀 전에 사로잡힌 상황이었다.
북망인들은 도적무리답게 여인네를 제압하면 항상 강간을 하곤 했다. 지난번 서쪽에 있는 촌락 하나를 휩쓸 때 남
자는 다 죽였고 여자만 살려서 음탕한 짓을 벌였다. 애도 늙은이도 절대 살려두지 않았고, 그나마 살아남은 아이는
전부 여자아이들이었다. 물론 노예로 팔아먹었다. 이런 게 북망채의 기본적인 행동이라 이 일대에서 북망채의 악명
이 자자한 것이었다. 헌데 우습게도 형란 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가 제압 당한지 반 각은 지났다. 반 각이면
그들이 평소 자주 하는 말로 '실컷 재미볼 시간' 이었다. 하지만 기어코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못생겼다거
나 싫어서가 아니라 융정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음탕한 북망인들답게 그녀를 그냥 두지는 않았다. 까짓 거 겁탈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얼마든지 농락은 할
수 있었다. 이제 막 그것을 깨닫고 대낮에 해괴한 짓거리를 할 찰나였다. 진양은 멀리서 이를 목격하고 가슴속에서
대화(大火)가 일어났다. 찬 물도 한순간에 증발시킬 듯한 이 열화는 그대로 머리에 전해져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
개져있었다.
"이 더러운 새끼들이……!"
진양은 분기탱천하여 빠르게 접근하자마자 일격을 가했다. 형란의 어깨에 막 손을 얹었던 북망인은 제 운이 재수
없는 걸 탓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손을 댔다가 진양이 나타나는 바람에 천돌혈이 부서진 채 황천으로 떠나고 말았
다. 진양은 형란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죽은 북망인의 시체를 밟고 곧장 튀어나가 일대 살육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좌충우돌로 완전 북망인들을 다 뒤엎어버렸다. 실상 그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차분히 맞섰다면 이리 쉽게 승부를 가를 수 없다. 허나 진양이 나타날 줄은 실로 꿈에도 모르던 터라, 그
의 틈도 안 나는 맹렬한 급습에 태반이 죽어 나자빠지고 만 셈이다. 잠시 어리벙벙해하던 사이에 다 쓰러지고 뒤쪽
에 있어서 목숨을 건진 북망인 둘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쳤다. 평소 진양이면 잡지 않을 텐데 오늘은 아
니다. 오히려 무섭게 쫓아가며 한 명에겐 봉을 던지고, 다른 한 명은 직접 붙잡아 골을 작살내버렸다. 봉은 도망치
던 북망인의 지양혈을 강타하여 즉사시킬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형란은 뭐가 어떻게 됐는지 다 끝난 후에야 깨달을 정도였다. 그만큼 진양
의 동작은 빨랐고 평소 행동과는 다르게 분노가 담겨있었다.
"란아, 괜찮아?"
진양은 그들 열 명을 싹 죽이고 형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만 열어 중얼거렸다. 진양이 다
가가 혈도를 풀어주자 바로 울음을 터트리며 품에 안겨든다.
"대형……!"
"그래, 네 대형이다. 이제 울지마."
좀 전까지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분노는 형란을 봄으로써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진양의 분노나 슬픔을
없애주었다. 지난날부터 그래왔다. 진양은 엉엉 우는 그녀를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잘 토닥거려주었
다.
잠시 후, 진양은 모든 상황을 전부 설명해주었다. 물론 양동작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고 다만 동쪽으로 갔다가
네가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되돌아왔다고 했다. 형란은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묻는다.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해주었어요?"
"누구겠어? 당연히 융정 그 벌레 놈이지."
그녀는 또 한번 놀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진양이 그녀의 어깨를 꼬옥 감싸준다.
"그놈이 그랬어. 내 작전은 모두 간파 당하고 너를 잡으려 애들을 보냈다고. 우린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기
로 했는데 나만 살아나갈 수 없잖아?"
"대형……."
"또 울려고 그런다. 울지 말고 돌아가자."
"어디로요?"
"어디긴, 웅덩이로 가야지."
그녀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형. 이들을 죽였으니 빠져나갈 수 있잖아요?"
"아니지. 융정에게 전부 간파 당한 이상 빠져나갈 수 없어. 이쪽은 물론이고 남쪽까지도 온통 북망채 도적놈들 천지
일 걸. 얼마 안 있으면 융정이 돌아올 테니 일단 웅덩이 근처로 가자. 위험이 닥치면 공생공사 할 수 있도록!"
진양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가 마지막에 말한 것은 더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절벽에서 뛰어내리자는 뜻이었다.
형란은 이를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웅덩이로 돌아와서는 절벽 아래를 보고 조금 이해가 갔다.
웅덩이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나도 융정 일행은 오지 않았다. 형란은 초조한 눈치였지만 진양은 아니다. 그는 오히
려 태평하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의 눕다시피 나무에 기대서 나중엔 아예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진양
은 알고 있는 것이다. 융정이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을 비참히 죽이려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언제 와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포위 당하여 도망칠 순 없고, 기다리다 죽겠지만 비참하게 죽을 거면 아래로 뛰어내
릴 것이다. 형란과의 약속대로 함께 공생공사 할 수 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쁘지도 않았다.
오래 기다리다 보니 심심해졌다. 절벽 밑바닥은 보이지도 않아 재미가 없었고 저 멀리 황하 유역이 볼만했지만 오
래 보니까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는 바닥을 뒹굴며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혼자 음음 소리내며 뒹구는 꼴이 참 가관
이다. 형란은 이 상황에 그런 작태를 보이는 진양이 놀랍기만 했다.
"대형은 걱정이 안 되나요? 곧 융정이 온다면서 그는 오지도 않고……."
"걱정할 게 뭐 있어? 어차피 우린 도망치지 않는 한 죽게 되어있어. 포위망을 뚫을 수 없으니 여기서 기다려야 하
지. 그가 언제 오든 결국은 죽을 텐데 뭘 그리 초조해하니?"
"그럼… 융정은 왜 이렇게 늦는 걸까요?"
"모르지 그야! 내가 너처럼 그리 초조해하도록 유도하는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여
하튼 좋은 뜻은 아닐 걸. 자자! 너도 그 인상 좀 풀고 뭐 할만한 일이 없나 생각 좀 해봐."
진양은 완전 놀러온 사람 같다. 형란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말이라면 전부 사실로 받아들였기에 한번 열심히 생
각 해보았다. 그리곤 한참이 지나자 부끄러운 표정으로,
"미안해요, 대형. 할만한 게 없는 거 같아요."
"핫핫. 뭐 그런 걸 갖고 미안해하니."
진양은 일어서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웅덩이 근처엔 나무가 몇 그루뿐인데 이 중에 진양이 보고 있는 나무가 가장
몸집이 컸다.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게 뭔가 기개가 엿보였다. 적막한 이 주변에 홀로 서있는 나무라니,
그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지 않을까? 진양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나무 몸통처럼 그
가지도 굵직했다. 일순 그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너 나하고 대련하자."
"무슨 대련이요?"
형란이 얼른 이해를 못하자 진양은 직접 나뭇가지를 꺾어 한 개씩 나눠가졌다. 그리고 말하길,
"뭐긴 뭐겠어. 무공 대련이지."
"대형. 제가 어떻게 대형의 상대가 되요?"
"왜 상대가 안 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자, 간다!"
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벌써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취하는 수식은 오랜만에 선보이는 함종절검법이었다. 한
동안 쓰지 않은 무공이라 과연 위력을 낼지는 미지수다. 그는 가볍게 보를 밟아 형란의 시야를 흐렸다. 그녀가 어찌
할 바를 모를 때 빠르게 나뭇가지를 내지르자 금방 목젖까지 도달했다.
"뭐하고 있어? 내 검을 잘 보라고."
그는 도로 나뭇가지를 뺐다가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이번엔 시야를 흐리지 않고 달려드는 맹공이다. 풍리초절이나
수저어절 같은 초식을 이용해 공격을 가하니 형란은 또 혼란을 일으키는 듯 했다. 본래 함종절검법은 두 초식만 빼
놓고 전부 방어초식이지만 때에 따라 응용하면 이처럼 맹공의 초식으로 변하였다.
"정말 함종문의 상승무공답군."
"무슨 소리예요?"
"이 검법은 함종절검법이라는 거 너도 알지? 난 이 검법을 쓴지 매우 오래됐는데 나뭇가지를 보니 갑자기 써보고
싶어졌어. 함종절검법은 함종문 최고 무공으로 대성하면 적수가 없지."
"그 정도라면 그동안 왜 안 썼어요?"
"그야 물론… 나도 인간으로서 일말의 미안함이 있고 하니까. 파문한 주제에 너무 남용하면 참 우습겠지. 더구나 난
이 검법을 대성하지도 못했고 유루봉법이나 탄지신통이 있으니까, 뭐."
형란은 안타까워했다.
"대형이 만일 이 검법을 대성했으면 적수가 없었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운명이란 기이해서 너와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진양의 대답에 그녀는 깜짝 놀라했다. 그러나 이유는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실제로 진양이 그 검법을 대성했다면 종
남산에서 쫓기지 않았을 것이라 양만풍조차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대성하지 못한 함종절검법은 대성한 유루봉법만 못해. 그래도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대형. 제가 너무 약해서 시험할 수 없군요."
"뭐 어때. 어차피 갑자기 생긴 마음으로 한 거라 깊은 뜻은 없어. 게다가 우린 곧 죽을 운명인데 당장에 이 검법을
대성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대형……."
진양은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대형, 대형 하며 울상 짓는 그녀가 귀여웠다.
"왜 툭하면 울상이니? 넌 역시 강호인답지가 않아."
"그래요……? 강호인답게 당당한 게 좋을까요?"
"어떻든 괜찮아. 하지만 넌 성격이 너무 온순하고 살생을 싫어하니 피투성인 강호에서 사는 것보단 평범하게 사는
게 낫겠지."
"그럼 대형은요?"
"글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울 뿐 확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란은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형이 계속 강호에서 산다면 저도 따르겠어요. 성격이 문제라면 고칠 수 있어요."
"에이. 성격은 고칠 생각 하지마. 차라리 내가 평범하게 살고 말지! 우린 공생공사 하기로 한 만큼 계속 함께 해야
하니까."
그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 끝에서 발소리도 들리고 두런대는 말소리도 들렸다. 사람인 듯 한데 수는 꽤나 많은
것 같았다. 진양은 형란의 손을 잡았다.
"이제 오네. 일단 부딪쳐 봐야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다가올 위기에 맞설 준비를 갖
추고 있었다. 우뚝 선 나무 한 그루는 진양과 형란의 마음처럼 굳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