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五 章. 선택 1
가장 앞서서 오는 자는 진양이 매우 싫어하는 인물 중 하나에 꼽힐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큰 대도를 어깨에 걸치
고 허리춤엔 잘 겹쳐둔 채찍을 달고 있었다. 젊은 나이로 진양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은연중에 풍기는 기도는 진양
보다 더했다. 옆에 있던 형란도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그의 등장도 맘에 안 드는데 저 거만한 자세는 더 맘에 안
들었다.
"하하. 그렇게 서서 나를 맞아주다니 꽤나 의외인 걸?"
평소 같으면 진양이 즉각 반격에 나섰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주둥이가 어디 갈 리가 없다. 허나 지금의 진양은 그
융정의 말조차 듣지 못하였다. 그의 시선은 융정이 아닌 융정 등뒤로 향해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누가 있을까? 형란
도 그쪽을 바라보며 크게 놀라는 듯 했다.
"왕령……."
그 뒤에는 다름 아닌 왕령이 서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녀의 곁엔 당무, 당주고, 당유민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융
정이 이렇게 늦게 온 건 그들을 데리러 갔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진양은 갑작스러운 왕령의 등장에 정신을
못 차렸지만, 이내 자신의 혈도를 짚었던 사람이란 걸 인식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융가야! 내 형님과 흑의복면인들은 어찌 됐느냐?"
"참 뻔한 걸 묻는군. 묻지 않기에 예상하고 있구나, 했더니 사실은 깜박했던 거구나."
진양이 잠깐 잊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허나 무굉의 무공을 믿었고 흑의복면인들도 믿었으며, 또 형란 걱정에 잊었
던 것이다. 그런데 마치 의형을 버린 놈이라는 듯이 말하자 진양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닥쳐라. 어떻게 됐는지 말해라."
"뻔한 거라니까. 너의 형님과 복면인들은 우리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잡혔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또 뭔가 모략을 꾸미는군."
"당연하지. 너희 형제가 만나서 함께 죽는 꼴을 보는 것도 재밌겠지. 하지만 안타깝게 됐어. 복면인들 때문에 당장
잡을 수가 없어서 일단 너부터 죽여야겠다. 괜히 시간 끌다가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지금 융정의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여기서 진양과 형란의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다. 진양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고
오히려 융정의 말에 의문만 느꼈다.
"처음엔 잡았다면서 뒤에선 또 당장 잡을 수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하긴 네놈이 이해할 턱이 없지. 네 형님이란 놈과 복면인들이 지금 어떤 줄 아느냐?"
진양이 말이 없자 융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다 말해주지. 복면인들의 무공은 생각보다 뛰어나더군. 하지만 우리 북망채의 진법까지 누를 순 없어. 그들
의 무공으로 보아 금방 잡긴 힘들 듯해서 우린 진법을 펼쳤지. 북망귀곡이진을 펼치고 북망채 테두리를 모조리 감
싸자 그들은 완전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단다. 저번에 너희들도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갇혀서 꼼
짝도 못하고 있지."
"지금도 그러고 있냐?"
"물론이지. 그럼 지들이 무슨 수로 빠져나와?"
"네가 한 가지 잊은 모양인데, 무 형님을 무시하다간 당할 걸."
사실 이런 걸 말해줄 필요는 없다. 괜히 말해줬다가 융정이 뭔가를 깨닫고 일을 더 귀찮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
다. 허나 융정의 머리로 보아 그 정도도 생각 못했을 리는 없어서 한번 떠보는 수작과도 같았다. 그의 말에 융정은
웃는다.
"하하! 네놈이야말로 나를 무시했구나. 무굉의 무공에 대해선 나도 잘 생각해두고 있지."
"나도 란아도 이미 신선폐에서 벗어났다. 그럼 무 형님도 그리 될 텐데 그때 너희가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냐? 지
금 형님은 북망채에 계실 리 없다. 이미 빠져나갔을 걸!"
"이 빌어먹을 새끼. 이놈이 아주 북망채를 얕보는군. 무굉이 설령 정상으로 되돌아온들 어떻게 북망귀곡이진을 홀로
깨부순단 말이냐? 더구나 내 아버지는 서서 구경만 하냐?"
"복면인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지."
"푸하하. 그들이 제법인 건 알지만 있어봐야 소용없다. 그들이 자꾸 뭉쳐서 손을 못 쓸 뿐인데, 귀곡이진을 상대하
면서도 뭉쳐 다닐 것이냐?"
진양은 북망귀곡이진은 물론 북망귀곡진도 상대한 경험이 있어서 그때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이 두 진법은 전부 채
찍의 공격으로 이루어지고 어디로 가든 수십 명 이상의 공격을 동시에 받는다. 즉, 절대로 뭉쳐서 뚫을 수 있는 진
법이 아니다.
"그렇군. 그럼 지금은 서로 노려보고 있는 상태겠네."
"과연 좀 아는구나. 그렇다. 지금은 서로의 허점만 살피고 있지."
그럴 수밖에 없다. 뭉쳐서 돌파하려해도 당하고 흩어져도 당하니 방어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복면인들은 무굉과
함께 뭉쳐서 함부로 공격을 가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북망채 또한 그들이 뭉친 채로 움직이지 않으니 역시 공격
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형님의 무공은 경천동지 할 만큼 뛰어나다. 하지만 귀곡이진은 뚫기 힘들 거야. 아……! 형님도 위기에 빠졌구나.
나와 란아도 이제 곧 죽을 텐데…….)
융정은 가만히 미소짓더니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형, 뭐하고 있소? 이리 좀 나와보시오."
나온 사람은 당무였다.
"무슨 일이오? 융형."
"당형이 저들 좀 없애줬으면 하오. 내가 당형과 당동생, 당매, 왕매를 데려온 건 이런 걸 부탁하기 위함이었소."
융정은 차례로 당무, 당주고, 당유민, 왕령을 가리키며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당무는 웃으며 답한다.
"저들쯤 죽이는 거야 쉽지. 헌데 융형이 직접하면 되는 걸 왜 우리에게 부탁하는 거요?"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소. 하지만 당형은 한번 잘 생각해보시오. 그동안 저놈 때문에 당형이 잡친 일만 몇 번
이요? 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도와줄 수가 없었는데 오늘에야 이렇게 도울 수 있구려."
"아하, 그랬구먼. 역시 융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오. 하지만 꼭 내가 죽일 필요가 있소? 융형도 사실 저놈에게 많이
당했잖소."
"나는 당형이 직접 죽여줄 거라 믿소. 아니면 당동생도 있고 당매, 왕매까지 있으니 누군가 죽여줄 거요. 난 본래가
직접 죽이는 것보단 구경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오."
그들의 대화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원수에게 꼬박꼬박 융형, 융형 하는 당무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직접 죽이기
를 피하는 융정이나 똑같았다. 융정이 직접 죽이지 않으려는 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행여나 무굉이
살아 도망간다거나 또는 친한 친구가 있어서 후환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진양은 이걸 알아서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의 대화나 당무의 행동이 더 어이가 없었다.
"아주 잘들 논다. 누가 너희 손에 죽어준다더냐?"
"아… 고놈 참. 곧 죽을 놈이 말이 많네."
"오냐, 너 말 한번 잘했다. 오늘 나와 사생결단을 낼 자신이 있냐?"
진양은 이참에 아예 내분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그들의 사이는 겉으론 친하지만 속은 아닌 것 같다.
당무는 죽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아서 이때야말로 내분을 일으키기에 좋은 시기라 여기는 것이다. 진양의 도전장과
도 같은 말에 융정은 슬쩍 물러선다.
"자신은 있다. 허나 너도 들었듯이 난 구경하는 사람이야. 오늘 너는 그동안 해온 죄에 대해 값을 치를 것이다."
"당무는 나서지 않는다는데?"
"나설 거다. 당형은 나와 이미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만일 나서지 않는다면 친구가 아니지!"
동시에 당무를 돌아보며,
"안 그렇소, 당형?"
"마, 맞소."
당무는 하는 수 없이 나섰다.
"진가야. 나와라, 결판을 내자."
"누가 너 따위 놈과 싸운다고 했냐? 넌 벌레만도 못해서 나와 감히 싸울 수 없다. 융정쯤은 되야 할 맛이 나지."
진양의 말은 상당한 의미를 담은 듯 하다. 당무가 불쾌하여 고함쳤다.
"할 거냐, 말 거냐?"
"너하고는 안 한다니까. 차라리 개하고 개싸움을 벌이고 말지. 융정, 네놈이나 나와라."
융정은 이미 진양의 속셈을 파악한 상태라 웃으며 한 발짝 나왔다.
"네가 정히 원한다면 상대해주지. 이간질 수법을 쓰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약간 손을 봐줘야겠군."
그는 이미 출수하고 있었다. 기습과 같은 출수라 진양은 일 장을 당하고 말았다. 급히 팔을 들고 봉을 휘둘렀지만
이미 늦어 어깨를 맞고 만 것이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후에야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비열한 새끼가……."
진양은 곧장 유루봉법의 정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현란한 동작을 펼치며 빠르게 융정에게로 접근하더니 즉각 전
요결의 술수를 부렸다. 봉 끝으로 머리를 내려치니 융정은 직접 쳐냈고, 그 쳐낸 힘을 받아 반대편 봉 끝이 그의 가
슴으로 날아들었다. 또 쳐내니 반대로 또 올라오고 다음도 같았다. 이런 상태가 유지되면 융정으로선 패배가 불가피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봉법에 대해 연구를 잘 해둬서 계속 쳐내기만 하진 않았다. 봉이 움직이는 행로를 잘 눈여겨
보고 틈을 노렸다. 왼쪽 허리로 날아들던 봉을 쳐내자 예상대로 오른쪽 허리로 날아든다. 이걸 또 아래로 내려찍으
니 반대편 끝이 안면을 노리고 있었다. 이만하면 완벽히 이 봉법의 허점을 찾은 것이다. 융정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
며 가볍게 물러섰다. 진양의 봉은 예상대로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움직였다. 계속 쳐내는 만큼 봉도 빠
르게 움직여서 언뜻 보기엔 융정이 위기에 몰린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융정의 좌수가 번쩍했다. 손바닥은
거칠면서도 빠르게 날아가 봉을 한순간에 잡아버리고 말았다. 진양이 놀라며 봉을 빼려 했으나 힘, 내공 모두 밀려
서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야."
융정은 웃으며 봉을 잡아끌며 오른손에 쥐여진 대도를 높이 쳐들었다. 진양의 몸도 같이 끌려간다. 이대로 힘만 쓰
다간 저 대도에 머리통이 갈라질 게 분명했다. 봉을 놓아야하는 상황이란 얘기다. 문득 한편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왕령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봉을 놓고 살아남기를 바랄까? 아니면 계속 봉을 쥐고 있다가 죽어서 나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알
려주길 바랄까?)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융정의 몸 앞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봉을 놓았다. 동시에 몸
을 뒤로 날려서 머리 위로 떨어지던 대도를 겨우 피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봉은 빼앗겼다.
"유루봉법을 펼칠 때 쓰는 봉이란 말이지? 유루봉법의 특유함을 잘 살리듯 역시 가늘고 약해 보이는군. 왕매, 이게
맞나?"
왕령은 좀 뒤에 있었는데 그의 말에 한 걸음 나오며 대답했다.
"맞아요. 바로 그 봉이에요."
"듣자하니 네가 이 봉을 저놈에게 줬다면서? 그럼 너와 이 봉은 아무런 관계가 없겠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이 버럭 호통친다.
"봉을 부러트릴 셈이냐?"
"당연하지, 그럼 이 더러운 걸 내버려두라고?"
"부러트리면 네놈 허리도 부러트려주마."
"하하. 능력이 있으면 해보렴."
융정은 대도를 높이 들었다가 세게 내려찍었다. 진양은 이걸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왕령과는 이미 연을 끊
었지만 그 추억이라 할 수 있는 봉까지 망가지게 할 순 없었다. 빠르게 한 걸음 내디디며 오랜만에 탄지신통을 펼
쳤다. 중지가 퉁겨지며 묵직한 지풍이 융정의 대도에 꽂혔다.
<쩡!>
대도는 탄지신통을 맞고 퉁겨지며 함께 융정의 오른팔도 뒤로 밀렸다. 그는 깜짝 놀랐지만 억지로 웃었다.
"제법이군. 내가 그 탄지신통을 깜빡해서 이런 일도 생기네. 하지만 다음부턴 어림없지."
"봉을 내놔라!"
"못 내놓겠다면?"
"널 죽여야지."
"난 이 봉을 왕매에게 줘야겠다. 그래도 날 죽일 거냐?"
진양은 일순 말이 턱 막혀버렸다. 그 꼴이 우스운지 융정은 대소를 터트렸다. 왕령이 옆에서 말한다.
"그러지 말아요. 봉은 그냥 돌려주세요."
"아니지, 아니지. 원래 주인을 찾아가야지. 이 봉은 원래 네 손에서 편안히 지낼 봉인데 저놈이 가져서 이처럼 위기
를 맞지 않았느냐? 이참에 네가 갖고 잘 보관해."
"이미 그에게 준 건데 그럴 순 없어요."
"내 말을 듣지 않겠다고?"
융정의 기세가 한층 사나워졌다. 왕령의 얼굴이 불안한 빛이 스친다.
"어쩔 수 없어요. 이 봉은 이미 준 건데 다시 제가 가지면 그게 무슨 꼴이에요?"
"내가 뺏어서 준거니 상관없다. 가지라면 가져."
그녀는 더 따질 생각을 못하는 듯 결국 봉을 받았다. 진양은 이런 모습과 상황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봉을 가져가서 분노하는 게 아니다. 융정의 기세에 꼭 겁을 먹고 받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고 실망도 한 것이다. 지
난번엔 해독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설마 이번엔 아닐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진양은 속에서 열화가 치밀자 갑
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대형! 왜 그래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융정이 이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진양은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제대로 섰다. 허나 점점 골이 띵하고
가슴과 왼팔에 따끔따끔한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린다.
(이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필 이 순간에 발작을 하다니! 아아……!)
신선폐가 발작했다. 이 독은 이미 왼팔과 가슴으로 번져가 있었는데 지금 또 발작했다. 싸움을 벌이며 공력을 쓰다
보니 독을 억누르는 힘이 줄어들었고, 방금 기가 막힌 상황에 울화가 치밀어 결국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형란은 아
는지 모르는지 발만 동동 구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형. 차라리 제가 맞서겠어요."
"안 돼! 나도 상대가 안 되는데 넌 말할 것도 없어. 계획한대로… 마지막 수를 쓸 수밖에."
"대형……!"
진양은 고통 속에 신음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꼭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것 같아 융정 등도 함부로 막지
않았다. 절벽 끝에 이르러서야 진양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좌하고 내공을 일으켜보았다. 단전에서 천천히 모이던
내공이 흔적도 없이 한순간 사라진다. 이미 사지백해로 신선폐가 퍼져나간 상황이기 때문이다.
"옳거니! 지금 보니 또 무슨 문제가 있구나."
융정은 승리의 미소를 말하며 당무를 돌아보았다.
"당형, 이제 직접 끝을 보시오. 내가 손을 써서 병신이 되도록 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저 지랄이니 이제 문제가 없겠
소. 당형 차례요."
"이렇게 됐으니 융형이 직접 끝을 보는 것도……."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거요?"
"알았소, 알았소. 직접 하겠소."
당무는 한 걸음 나서면서도 완전 울상이었다. 그도 직접 손을 쓰고 싶진 않은 것이다. 그는 진양에게 의외로 도움을
줄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본래 함종문 사람이었고 감총방 방주가 된 양만풍의 절친한 벗. 게다가 탄지신통
을 익힌 걸로 보아 소림사와도 연관이 있다고 여기는 셈이다.
함종문은 근래 들어 크게 성장했다. 진양은 아직 그 힘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함종문의 위상은 이전과는 너무
나도 달랐다. 진양이 파문 당한 후 차근차근 발전하던 함종문은 조덕이 가지고 있던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일약 급
성장했다. 이화접목은 굉장한 상승 무공으로 사량발천근 따위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조덕은 오래 전 단목리에게서
무공을 전수 받을 때 이것도 함께 전수 받았는데, 재능이 없어서 한참 후에야 대성한 것이다. 그때가 진양이 왕령과
함께 은거했을 때쯤이다. 더욱이 무림대회 때 화연철과 대등한 싸움을 펼친 이제자 연경후 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감총방 역시 무시할 방파가 아니었다. 감총방은 난주 최고의 방파로 본래 난주에 있던 많은 문파를 몰아내고 큰 세
력권을 가진 유명한 방파였다. 방주도 지금은 양만풍이라는 젊은이로 바뀌었지만 전대 방주 용상의 실력은 대단하
다. 개방 방주와도 금방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만큼 무공이 뛰어난 것이다. 감총방은 이렇듯 역사도 깊고 무공도 특
이하고 뛰어나서 이전에 당광 역시 감히 깔보지 못했다.
소림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무림의 태산으로 알려진 소림사니 말이다. 근래 소림사가 매우 잠잠하지만 진양이 익힌
탄지신통은 분명 소림사의 72절예 중 하나였다. 당무는 사정은 모르고 진양이 소림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 때 당무도 융정도 진양은 함부로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괜히 손을 썼다가 후환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당무는 몇 걸음 다가갔지만 역시 손을 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융형. 솔직히… 난 이 자를 죽이지 못하겠소."
"어째서?"
융정이 알면서도 묻는다.
"융형도 알잖소. 이 자는 감총방, 함종문, 소림사와 깊은 인연이 있어서 괜히 죽였다간 보복을 받을 수도 있소. 더욱
이 무굉이 지금 옴쭉도 못하지만 재수가 좋아서 빠져나가면……."
"당형은 우리 북망채가 보호해주잖소. 그들이 모조리 온다한들 감히 우리 북망채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 아니오. 내가 어찌 그런 망상을 품을 수 있겠소? 다만 나는 아무래도 융형과는 친구일 뿐이고… 여하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 융형이 직접 해줬으면 한다는 거요. 나는 이렇지만 융형은 북망채의 소주인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소?"
그의 말에 융정은 껄껄 웃었다. 당무의 말이 맘에 들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그 역시 분명
북망채 채주 융왕의 외아들이지만 소림사는 두려웠다. 아니, 소림사는 출가한 사람들이라 보복하지 않는다 해도 감
총방과 함종문이 함께 공격해오면 곤란해진다. 융정이 계속 당무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는 건, 그렇게 될 경우 북
망채에 손실이 커지기 때문에 미리 수를 써두는 것이다. 나중에 그들이 오면 [이 자가 죽였소] 하고 넘겨줘서 끝낼
수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서로 물러서지 않고 전가만 하니 결단이 나지 않았다. 융정은 아무래도 또 협박을 해야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또 안 하겠다는 거요?"
"나도 하고 싶소. 저놈을 죽이는 거는 정말 즐거운 일 아니오? 하지만 난 두렵단 말이오."
"뭐가 두렵소? 우리가 보호해준다니까."
"난 아무래도 안되겠소. 저놈을 죽이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지도 모르오."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융정의 짜증 섞인 물음에 당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슬쩍 고개 들어 융정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동생들을 바라보
고 이내 왕령까지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옳지, 옳지! 융형. 내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런 소리요. 나도 싫고 융형도 싫으니 왕매에게 부탁하자는 거요."
왕령은 순간 안색이 새파래졌다.
"저, 저는 못해요!"
"왜 못하나? 너는 본래 진양과는 친한 사이지만 이젠 갈라섰으니 깨끗이 결말을 해둬. 행여나 저놈이 오늘 살아갔
다가 나중에 당주고라도 죽이면 어쩌나?"
그는 완전 왕령에게 넘길 생각으로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융정도 조금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자 왕
령은 또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녀는 본래 심성이 착해서 진양에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여러 번 선택이 있을 때마다 전부 당가 집안을 위하고 진양을 철저히 버렸는데 또 이러한 상황을 맞게되니 너무 억
울했다.
"말도 안돼요! 저는 절대 못해요."
그녀가 걱정하는 건 당무, 융정과는 다르다. 그들은 보복을 염려하지만 그녀는 진양에게 너무 미안하여 그러는 것이
다. 하지만 이건 번복될 가망이 거의 없었다. 당무가 왕령에게 시키는 건 그녀가 자신과 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
다. 따라온 당주고와 당유민은 피를 섞은 동생들이요, 융정이나 그의 부하들은 북망채다. 허나 왕령은 뭔가? 아무것
도 아니다. 단지 당주고와 서로 사랑하여 이제 혼인한 사이라는 것뿐. 분명 왕령이 그에게 있어서 제수였지만 그나
마 가장 정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너 뿐이야. 왕매, 걱정 말아. 북망채가 지켜준다고 하는데 무슨 걱정이냐?"
"전 못해요. 소림사니 함종문이니 다 두렵지 않아요. 지금까지 진양에게 대한 걸 생각하고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뭐야, 그럼 내가 너에게 인간도 되지 말라고 시킨다는 거냐?"
당무는 괜히 화를 냈다. 그래도 왕령이 꼼짝도 안 하자 흘낏 융정에게 눈치를 주었다. 어서 도와달라는 뜻이다. 융
정도 알아채고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왕매, 더 시간 끌면 모두에게 안 좋아. 너만이 그를 죽일 수 있어. 우리는 모두 겁쟁이라 손을 못 쓰지만 넌 좀 전
에 네 입이 알려준 대로 다 두렵지 않잖아."
왕령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전 못해요!"
"정말 안 하겠다는 거냐?"
"이건 정말…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죽일 수는 없어요."
"그럼 하는 수 없군."
융정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로 당주고에게로 옮겼다.
"당동생. 자네의 아내가 진가를 못 죽이겠대. 이러면 큰일인데……."
"그녀는 마음이 착해서… 웬만하면 다른 사람이……."
"그럼 자네가 하겠나?"
"그, 그건……."
당주고는 완전히 겁을 먹은 듯 했다. 융정이 다가와 몇 마디 건네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말을 제대로
못 잇고 있었다. 융정은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럼 뭘 어쩌자는 거야! 저놈을 안 죽이겠다는 거야?"
"그, 그……."
"빨리 아내나 설득해. 남편이 돼서 여자도 하나 못 다스리진 않겠지."
융정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노파심에 하는 소리인 듯 마지막에 한 마디 덧붙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왕매가 안 죽이면 자네가 해야한다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옆 바위에 앉았다. 여유롭게 늘어지며 당주고와 왕령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주고는 크게
근심하는 듯 어쩔 줄 몰라했다. 그건 그만큼 왕령을 사랑한다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당주고도 바보가 아니라서 진양
을 죽이면 보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왕령이 죽이는 것도 자신이 죽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
다. 하지만 왕령이 하지 않으면 자신이 해야한다. 이건 피할 수가 없었다.
"려, 령아……."
"오라버니! 설마 오라버니도 저에게 강요할 생각이에요?"
"그게… 아무튼 가능하면 그를 죽여줘. 그래야 우리 모두 안심하지."
왕령은 할말을 잃었다.
"응? 령아. 이제 너뿐이다. 너 아니면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어."
"설마… 직접 죽이기 두려워서 강요하는 건 아니겠죠……?"
"무슨 소리! 내가 그런 인물로 보여? 난 상황에 맞게 대처할 뿐이야. 지금 상황을 보라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누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뒷말은 거의 귀엣말 같았다. 왕령은 그의 의도를
다 알고 역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전 그를 죽일 수 없어요."
"그럼 내가 죽여야해?"
"아니요. 오라버니도 죽이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말이 돼? 융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상황을 봐. 너나 내가 안 죽이면 너와 나를 죽일 태세야."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왕령은 이 상황을 대처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융정은
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듯 얼른 말을 걸었다.
"대관절 뭘 쑥덕대는 거야? 빨리 결정해."
"조금만 기다려요."
"뭘 기다려? 빨리 결정 안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이만하면 이빨을 드러낸 으르렁거림이다. 융정은 왕령과 당주고를 차례로 쏘아보며 완연한 협박을 하고 있었다. 결
국 진양을 죽이지 않으면 너희가 죽는다는 말과도 같은 저 으르렁거림. 왕령은 일단 그의 시선을 피했다.
"오라버니, 이제 어쩌죠?"
"어쩔 수 없어. 진양이 네 옛날 친구라는 건 알아서 나도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이 이러니 죽여야겠다.
네가 안 죽이면 내가 죽이겠어."
"그건 안돼요! 제가 죽여도 안 되고 오라버니가 죽여도 안돼요."
"안 돼. 일단 목숨을 건져야지. 나중에 보복을 받더라도 말이야."
당주고는 드디어 뜻을 굳힌 듯 했다. 융정은 방금 내공을 일으켜 대화를 엿듣고 있었기 때문에 흐뭇함에 미소를 지
을 수 있었다. 허나 왕령은 여전히 죽일 수만은 없는 듯 했다.
"오라버니. 그동안 제가 진양에게 해온 거… 알죠? 하지만 죽일 순 없어요. 그것만은 절대로 안돼요."
"죽여야해.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
"안돼요. 제발 이러지 마요. 차라리 그를 도와 융정에 대적하도록 해요."
"뭐라고?"
왕령의 발언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융정이 다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주고는 놀
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차피 이대로 가도 계속 당하기만 할 거예요. 지금껏 융정이 해온 걸 봐요. 우릴 붙잡더니 친구를 위장해서 협박
하고 얼마 전에는 독약까지 먹여서 가슴 졸이게 했잖아요? 지금도 후환이 두려워 우리에게 자꾸 양아를 죽이라 하
는 거예요. 만일 그의 말을 따른다면 지금은 살지 모르지만 훗날 더 비참하게 죽을지도 몰라요."
왕령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여자다. 얼마 전 왕령이 융정의 협박에 쉽사리 당하는 걸 볼 때 진양은 크게 의아해
했었다. 그녀는 본래 똑똑한데 너무 쉽사리 협박에 휘말려 뒷날을 내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
게 사실 당주고가 중독돼서 조급하게 행동했다는 걸로 밝혀졌지만, 진양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 걸로 봐도 왕령이
얼마나 잽싼 여자인지는 알만하다.
그녀를 비롯하여 당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잡혀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서로 형이니 아우니 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 단지 융정이 친한 척을 하니 뭐라고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당무와 당주고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융정이 불공
대천의 원수임을 알면서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었다. 당유민만이 그나마 반항을 했지만 두 오빠가 항상 말
려서 이런 상태로 시일이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왕령은 저번에 한번 진양의 혈을 짚는 큰 배반행위를 하고 크게
후회하였다. 그가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고, 다시 포위됐다는 말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진양은 왕령의 친구고 왕령 또한 진양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갖다보니 그녀도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조리 있는 말, 빠른 눈치를 다시 되살리고 여러 경우를
잘 생각해보았다. 과연 생각해보니 자신들은 완전히 이용당하다가 결국 죽을 입장에 처한 게 아닌가! 그녀는 그제야
깨닫고 적당히 융정을 돕는 척 하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은 절호의 기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는 좀 후에 당주고 등에게 알려서 철저히 진행하려 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지금이 더 좋았
다. 융정을 따라온 북망인 수는 고작 1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진양이 부상을 입었다지만 당무, 당주고, 당유민, 형
란까지 합하여 다섯 명이 서로 도와 맞선다면 탈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