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五 章. 선택 2
그러나 당주고는 그녀의 말에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녀가 똑똑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말을 감히 할 줄은 몰랐
던 것이다. 그는 안 그래도 융정이 무서워죽겠는데 그녀가 이런 말을 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그… 그게……."
"우리 그렇게 해요. 그 수밖엔 없어요. 이건 진작부터 생각해온 거라 지금이 바로 실행할 기회예요."
"하지만……."
당주고는 자꾸 말을 더듬으며 금방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왕령은 답답할 뿐이다. 이런 대화를 쭉 듣고 있는 융정은
놀랍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감히 이런 생각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그들은 서로 속삭인다고 하지만 융정의 내
공으론 쉽게 엿들을 수 있는 대화였다. 다행이 당주고가 겁이 나는 듯 빨리 결정을 못 내리니 융정으로선 먼저 선
수를 쳐야만 했다. 왕령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그들이 연합하면 놓치고 말 우려가 있었다.
"왕령! 지금 뭐라고 했나?"
왕령의 얼굴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허나 이내 풀리며 대답했다.
"오라버니께 죽이지 못한다고 하고 있었어요."
"웃기는구나! 내가 그런 것도 엿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순간 왕령이 당주고를 이끌며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뒤로 내뺐다. 하지만 융정은 이미 짐작한 바라 그보다 먼저
출수했다. 그가 번쩍 몸을 날리니 순식간에 거리는 좁혀졌고 동시에 허리를 비틀며 일 장을 후려치는 이 수법은 전
도직로의 초식이었다. 그런데 융정의 손바닥은 왕령이 아닌 그녀가 붙잡은 당주고의 손목을 노리고 있었다.
당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잡아끌었다. 왕령도 놀라 잡아끌었는데 아무래도 당주고의 무공이 더
나아서 동작 역시 빨랐다. 왕령이 힘을 주기 전에 먼저 그가 끌었기 때문에 아차 하는 순간 손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 간단한 공격에 왕령과 당주고는 양쪽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융정은 그들 둘을 노려보더니 이내 왕령에게로 몸을
돌리며 호통쳤다.
"왕령! 내가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이럴 수 있냐? 감히 당동생을 부추겨 배신을 하려고 해?"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흥. 그럼 왜 도망치지? 잘못한 게 없으면서 왜 황급히 몸을 내빼지?"
"그, 그거야… 공격이 들어오니까 그렇죠."
융정은 분노했다.
"보자보자 하니 이년이 정말 가관이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여? 오늘 네년도 죽여야겠다."
그는 정말 대노해서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당주고로선 큰일이라 서둘러 그를 말렸다.
"고, 고정하세요."
"흥. 어떻게 고정하라는 거야? 저년이 한 말을 설마 부정하진 않겠지?"
"그, 그녀가 안될 말을 했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이는 건……."
"죽이는 게 뭐 어떻다는 거냐? 설마 너도 저년과 함께 배신하겠다고?"
당주고는 크게 놀라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만 뭐라는 거야? 안되겠어. 너도 이 자리에서 결정해라. 나를 배신하고 그녀와 함께 도망칠 것인지, 아니면 배신
하지 않고 그녀를 죽일 것인지!"
당주고의 안색은 새파랗게 되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선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무는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여겨서 급히 나섰다.
"융형. 진정하시오. 이렇게 되면 진가만 좋지 않겠소?"
"그런 걱정일랑 때려 치시오."
융정은 당무의 간곡한 말을 매우 간단한 말로 밟아버렸다. 당유민은 나설 기미가 없이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융정은 다시 당주고를 향해 고함쳤다.
"어떻게 할거냐? 빨리 결정해!"
"제, 제가 결정 못한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전 배신도 할 수 없고 그녀를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냐? 아주 둘 다 죽여줄까?"
"그, 그게……."
융정은 길길이 날뛰며 악을 써댔다. 어째 크게 분노하는 모습이 침착하고 잔꾀 많은 융정답지가 않았다. 진양은 그
런 그의 모습을 보며 또 무슨 계획을 꾸미는가 눈여겨보고 있었다. 융정은 당주고가 우물쭈물 하는 걸 보며 이를
갈았다. 왕령을 보면서도 이를 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턱까지 괴며
침묵했다. 그러더니 곧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정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둘 다 택할 수 없다는데 다 죽일 수는 없잖아. 좋아, 당동생과 당형의 간곡한
말을 감안해서 네년을 한번 봐줄 수도 있다."
그는 처음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더니 나중엔 왕령을 쳐다보며 말을 잇고 있었다.
"네가 따른다면 다시 이전과 같은 관계로 무사히 살 수 있다. 동시에 당동생도 무사하고 당형, 당매까지도 모두 무
사할 수 있어. 허나 만일 네가 따르지 않는다면… 음……!"
"대체 뭘 따르라는 건가요?"
왕령은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몸을 흠칫 떨었으나 일단 물어보았다. 그러자 융정의 입에선 과연 그녀가 예상했
던 대답이 나왔다.
"너도 알겠지만, 당연히 진가 놈을 죽이는 거지."
그녀는 대답을 듣고 나니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괜한 수를 쓰려다가 도리어 나쁜 상황에 치닫고 만 셈이다. 이렇
게 된 이상 그녀는 진양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안 죽이면 당무 등이 모두 죽는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진양보다는
당주고가 더 중요했다.
이런 융정의 방편은 양날의 검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왕령이 거절하면 모두 죽이겠다는 것으로 완벽한 협박이었다.
만일 이 말을 들은 왕령이 당무 등과 연합하여 갑자기 배신을 하면 어쩔 텐가? 하지만 융정은 이미 당무 등의 심리
를 잘 꿰뚫고 있었다. 당무와 당주고는 무공이 제법이지만 겁이 많고, 당유민은 협심은 있지만 두 오빠의 말을 잘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협박을 한다고 해도 갑자기 배신할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융정의 생각을 진양
은 이 정도 상황에 이르자 눈치챌 수 있었다.
(과연 무서운 놈이다. 그 짧은 순간 대단한 수작을 부리는군.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처음부터 왕령과 당주고를 갈라
놓게 한 것만 봐도 무서운 놈이야. 그렇게 한 후 왕령을 몰아세우면서 분위기를 살벌하게 조장하고, 이제는 마치 용
서해준다는 듯이……. 그런 게 아니라면 애당초 왕령과 당주고 사이에 일 장을 격출할 이유가 없지. 빌어먹을 새
끼.)
왕령도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손은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갈등이다. 진양을 죽이기도 그렇다고
안 죽여서 당무 등이 모조리 죽게 할 수도 없다. 꼭 선택하면 답이야 뻔하지만 진양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아니, 이
번 상황은 미안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죽음은 최후로서 백날 미안해하고 절을 하고 해도 아무짝에 쓸
모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켜보던 융정이 또 고함친다.
"기어코 하지 않겠다고?"
그는 재빠르게 당주고의 목을 움켜쥐었다. 너무나 재빠른 동작이다. 당주고는 물론이고 잘 보고 있던 왕령이나 당무
마저도 보지 못한 빠른 움직임이었다. 과연 융정의 무공은 대단했던 것이다. 진양은 그의 무공을 맥적산에서 본 바
있어서 알았지만, 당무 등은 아니기 때문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할 테냐? 안 할 테냐? 안 한다면 어차피 다 죽여야하니 아예 당동생부터 죽이고 시작하자."
"기, 기다려요! 잠깐만……!"
융정이 손에 점점 힘을 가하자 당주고가 가래 긁어모으는 소리낸다. 그 소리를 듣는 왕령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당황하는 표정만 봐도 얼마나 다급한지 알만했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만 하지만 말고 얼른 선택을 해. 빨리 결단을 내리란 말이다!"
융정은 더욱 크게 고함쳤다. 당주고는 이제 발까지 바둥바둥하며 죽기 일보직전이다. 그의 시뻘게진 얼굴은 왕령의
가슴에 비수까지 꽂아서 결국 결정을 내리게 했다.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이 북망채
한 사람의 검을 뺏어가더니 재빨리 달려가 진양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친다. 이 얼마나 갑작스런 행동인가! 진양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이미 피할 시간이 없고 설령 시간
이 있다해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행동은 갑작스럽고 또 진양의 몸 상태 역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령도 진양도 이보다 더 깜짝 놀랄, 아니 더 끔찍하여 울부짖을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을 것이다. 왕
령은 이미 눈을 감은 채로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검날은 서슬 푸르게도 차디찬 바람소리를 내며 진양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 깜빡하고 나면 진양의 머리통이 갈라질 줄 알았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고 진양과 왕령 역시
그런 생각에 함께 눈을 감았다. 진양은 죽음에 직면하여 결국 초연하게 변한 것이고, 왕령은 그의 죽음을 볼 수 없
어 눈을 감은 것이다. 그런데 변수가 있다. 그 변수란 다름 아닌 형란. 그녀에게도 왕령의 움직임은 갑작스러운 거
였지만 진양의 머리를 내려치는 건 두고볼 수 없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어쩌면 생각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
다. 그녀는 본래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진양 곁에 있었는데 이렇게 되자 즉각 진양에게 몸을 날렸다. 그의 어깨
를 감싸안으며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이 덕분에 진양은 목숨을 건졌다. 형란과 껴안아 음탕한 자세로 바닥을 굴렀지만 지금 그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
았다. 분명 그는 들었다. 왕령의 검이 내는 차디찬 음향이 끊기고 어느 순간 가죽 찢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
소리는 너무 묵직하여 단순히 옷이 잘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진양은 껴안은 형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란아!"
그녀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창백했다. 완전히 새하얗게 변하면서도 생기를 잃은 듯한 것이 얼굴색으로
만 말하자면 꼭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이마로 작은 땀방울이 보였다. 식은땀이었다. 진양이 그걸 발
견함과 동시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진양은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보다도 그녀가 구른 땅바닥에 있는 핏
물이었다. 핏물은 띄엄띄엄 떨어져서 처음 진양이 있던 자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를 곱게 눕히고 보니 어느
곳에서도 다친 흔적이 없었다. 진양은 한순간 멍청히 있다가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녀를 뒤집었다. 그리고 보인
붉은 핏자국은 그녀의 발목 뒤축에 묻어있었다. 아니, 거기서 묻어 나오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양쪽 발목 뒤축
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다.
"대… 대형……."
"란아! 괜찮아. 내가 구해줄게. 발목 다쳤지만 별 거 아니야."
진양은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는 걸 알았다. 언뜻 들어도 엄청난 고통을 참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진양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그러면서도 꼭 대형이라고 부르고 마는 그녀를 생각하니 처참하고 가련
하여 눈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그녀의 바지 밑을 찢었다.
그녀가 다친 곳은 발목 뒤축에 있는 힘줄이었다. 아예 몽땅 잘려간 모양이었다. 피는 가슴을 뚫린 경우보다 더 많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이 뚫리면 내장과 함께 피가 철철 흐른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를 잘린 걸 보니 완전 피가 샘솟
듯 터져 나왔다. 더구나 이 상처는 가슴이 뚫린 것에 비할 만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이곳은 다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부위였다. 진양이 의술에 대해 아는 바는 적었지만 이런 기초적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기가 잘리면 사람
은 걷지 못한다. 한순간 다리 병신이 된다는 얘기다. 힘줄이 깊게 쑤셔 박혀 있어서 쉽게 다치진 않아도 일단 잘리
고 나면 고칠 방도가 없는 상처였다. 진양은 절망했다.
"왜… 왜 하필 이곳이야……."
"대형……."
"란아… 왜 그랬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는 어이없게도 미소했다.
"대형…이… 위험해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한시도 딱딱한 백색을 잃지 않았다. 진양은 그녀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서둘러 자신의 옷깃을
찢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지혈(止血)하는 것이다. 사람이 피를 많이 잃으면 정신을 잃고 심하면 죽는다. 혈이 부족
하면 생기 역시 부족해지는 법이다. 진양은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단단히 뭉친 다음 그녀의 양 발목을 휘감
았다. 피가 마구 터져 나와서 한동안은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있어야했다. 어찌나 피가 샘솟는지 손바닥으로 물줄기
가 밀어내는 것 같을 정도였다.
"란아……!"
결국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기어코 그녀는 진양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감당하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
면 했다. 진양 자신의 힘줄이 잘리든 발목이 통째로 잘리든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엄청 아플 텐데 이를 악
물고 '대형, 대형'만 웅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진양은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그냥 진작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면
이런 광경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도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진양도 그걸 보며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양은 갑자기 빨리 죽지 않은 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왜 그녀가 고통을 겪어야한단 말이냐? 그녀는 착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심으로 대했는데 어
째서 이런 고통을 겪는 거냐? 다 내 잘못이다! 내가 그녀를 빨리 보내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 내가 빨리 뒈지지 않
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무능하여 그녀를 구하지 못한 거란 말이다!"
진양은 꼭 미친놈 같았다. 엎어진 형란의 발목을 붙잡고 목이 터져라 악을 쓰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형란에 비할
만큼 불쌍했다. 진양은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가늘게 미소하는 융정도 보이지 않았고 놀란 표정의
당무 등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서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 아름다운 왕령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절규하는 자
신, 그리고 가련한 형란만이 보일 뿐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바로 이런 거야!"
진양의 절규를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었다. 그걸 한순간 깨버린 자는 역시 융정이었다. 그는 매우 흡족한 표
정으로 연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진양은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노의 불길이 머리통 위로 솟았음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너… 너……!"
"좋아! 내가 말했지. 이처럼 네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건 참으로 보기 좋단 말씀이야. 바로 이걸 고대했어. 바로 이
거야! 하하."
융정의 말은 실로 악독하여 모두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 중에 유일하게 소름이 돋지 않은 자가 있다면 역시 진양
뿐이었다. 그의 피부엔 소름은 돋지 않고 단지 살벌한 불길처럼 붉은 색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도 그런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사실 울어서 붉어진 건데 온몸이 시뻘겋게 변하자 눈도 대노해서 시뻘게진 것 같았다. 그야말
로 온몸이 타오르는 불길과 같다고 하면 어울릴까?
그 불같은 눈동자가 왕령에게로 돌려졌다. 이전에 왕령을 바라볼 때의 그 눈빛이 아니었다. 이전엔 포근하면서도 뭔
가 애타고 정으로 가득 찬 그런 눈빛이었다. 누구나 보면 '진양은 왕령을 사랑한다' 라고 느낄 만큼 따뜻함으로 충
만한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반대였다. 그대로 반복해 말하자면 분노로 충만한 그런 눈빛이었다. 융
정을 바라볼 때와 왕령을 바라볼 때와 별로 변함이 없었다.
"야, 양아……."
왕령은 너무 당황하여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진양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그녀를 노려본다. 진양의 말문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열렸다.
"그녀가 죽으면… 모두 죽일 테야. 전부 살려두지 않겠다. 내 몸에 온통 개 이빨 자국이 남고 불 속에서 절규하며
죽어가더라도, 그녀가 죽는다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천년이고 만년이고 다시 찾아와서 죽일 때까지 쫓아다닐 거
다. 다 죽여버릴 테다."
그의 말은 모두가 한번 더 소름끼치게 했다. 진양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너무 음습하고 비
분에 차있어서 정말 그럴 것처럼 느껴졌다. 왕령은 진양이 돌변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 '모두' 에는 왕령 그녀도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형란을 저 꼴로 만든 건 왕령이니 무의식중에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융정도 부지중에 소름이 돋았다. 진양이 지독한 인물이란 걸 알아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이 기회에 진양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죽이지 못하고 놓친다면 그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잠도 못 이룰 것 같았다.
"왕령! 빨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
갑자기 급한 마음이 들어 왕령을 재촉하는 융정이었다. 그러나 왕령은 완전히 얼어붙은 상태다. 진양의 말에 겁을
먹은 것은 물론이고, 진양이 그런 말을 할 줄도 몰랐으며, 자신의 잘못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진양에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지금 진양의 모습으로 봐선 쓰고 싶어도 못 쓴다. 겁을 먹게 만드니까.
융정은 그걸 알면서도 자꾸 그녀를 재촉했다. 직접 죽일 자신은 완전히 잃어서 더 이상 손도 대기 싫었다. 오직 왕
령을 이용해서 죽이게 만들려 했다.
"왕령! 뭐하는 거야?"
"저… 저는 못하겠어요. 더 이상 할 수 없어요!"
"설마 저놈의 개소리에 겁먹는 건 아닐 테지? 그를 죽이고 형가 년도 죽이면 아무도 네가 죽였다는 걸 모를 테니
걱정하지마."
왕령은 그를 홱 돌아보며,
"그런 것보다도 죄책감 때문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럼 어쩔 수 없이 당동생을 죽여야겠군."
다시 당주고의 입에서 가래 긁어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매달려있는 당주고다. 왕령은 망연자실했다. 결국 진
양을 죽여야만 한단 말인가! 형란도 자신 때문에 저 모양이요, 진양도 자신 때문에 저렇다. 그래서 더더욱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안 죽이면 사랑하는 당주고가 죽고 말지 않는가.
(양아! 양아! 내가 구천에 가면 너의 개가 되겠어. 먼저 가서 기다리는 너를 주인으로 섬기고 네가 하라는 대로 살
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겠어. 그러니 나를 용서해 줘. 내가 천하의 몹쓸 년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난… 난 결국
사랑을 위해 우정을 버리게 되는 거야. 내 이런 마음을 너도 알겠지… 그래, 내가 나쁜 년이야…….)
상황은 다급했다. 당주고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융정은 아까 하고는 달리 왕령이 검을 내려칠
때까지 손에서 힘을 뺄 것 같지가 않았다. 당주고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 점점 발버둥에도 힘이 없었다. 흐느
적거리는 게 사형장에서 죽어 가는 역적 같다. 왕령은 괜히 머뭇거리다간 어느 쪽도 좋을 게 없다고 여겼다. 결국
판단을 속으로 그렇게 내렸다. 그리고 진양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양아……."
"……."
"정말… 나는……."
진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왕령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왕령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검을 높이 쳐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볼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감기는 눈은 갑자기
많은 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검은 빠르게 떨어졌다. 영원히 돌아보지 않을 기세로 검은 그렇게 떨어지고
있었다. 진양은 형란의 발목을 여전히 움켜쥔 채로 눈을 감지 않았다.
하늘에서 돌이 떨어진다면 이럴 것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일직으로 내려쳐졌다. 바람도 마음도 그녀의
손을 막지는 못했다. 이미 선택했기 때문에. 그러나 왕령 그녀는 결국 진양을 죽이지 못하고 말았다. 마음속으론 죽
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그러지 못했다.
"아아악……!"
아까 형란이 발뒤꿈치 위를 잘릴 때 나던 썩둑, 소리와 함께 비참한 비명이 북망산에 울려 퍼졌다. 본연 지세에 따
라 음험하던 산은 그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그 귀기를 더했다. 진양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쥐고 있
었다. 그곳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흙바닥은 피에 젖어 점차 검붉은 색이 되었고 그 옆엔 팔 하나가 주인을 잃
은 채 형란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결국 왕령은 진양을 죽이진 못했지만 그의 어깨를 자르고 만 것이었다.
"으윽… 으아아악……!"
진양은 생애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의 오른팔은 완전 잘려나가 있었다. 어깨가 비스듬히 갈
라져서 그 모습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고 피는 분수처럼 뿜어 나오며 고통은 극에 달했다. 마치 뼈를 갉아내고 살점
을 뜯어내는 듯할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근본은 꼭 외적인 상처에서만 시작하는 게 아닐 것이
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동자는 여전히 왕령에게로 향해 있었다.
"으으… 으으으……!"
"양아……."
그녀도 진양의 모습이 비참하게 생각됐던 것일까? 손을 내뻗으며 그를 불렀다. 허나 진양은 입술만 깨문다. 순식간
에 입술이 터지고 피가 턱을 타며 방울방울 떨어졌다. 억지로 비명을 참고 또 분노를 참는 것이리라.
"아주 좋았어! 너무 좋다."
융정은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다. 왕령이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했다. 크게 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차라리 한번에 안 죽이길 잘했다. 왕매, 네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저렇게 죽여야 제 맛이지. 다른 놈은 한
번에 죽여도 저놈만큼은 사지를 하나씩 잘라가며 죽여야겠어."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왕령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융정과 같은 생각으로 진양의 팔
을 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본래 진양을 죽이려 했지만 끝내 마음이 동요하여 검 끝을 살짝 꺾어버린 것이었다. 그
의 팔을 자르고 융정에게 간청하여 목숨만 살려줘라, 하려 했는데 오히려 더 좋은 방도라며 기뻐하는 게 아닌가! 그
녀는 정말 말 그대로 기가 막혔다.
"좋았어, 좋았어. 이번엔 내가 왼팔을 잘라주지! 다음은 당형이 직접 왼다리를 자르고 오른다리는 당동생이 자르라
고. 마지막에 당매가 그의 목을 친다면… 참 공평하지?"
"말도 안돼요!"
융정은 벌써부터 대도를 꺼내서 걸어오고 있었다. 왕령이 놀라서 일단 막았다.
"비켜. 내가 직접 손을 쓰겠다는데 왜 막는 거냐? 넌 좋은 방법을 깨닫게 해줬으니 내가 고마워해야겠지만 또 방해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
"당신도 사람이에요? 내가 그의 팔을 자른 건 그를 살려달라고 하려했기 때문이에요!"
융정이 앙천대소했다.
"내가 바본 줄 아냐? 그런 것도 모르게. 하지만 소용없다. 난 반드시 오늘 저놈을 죽여야겠어. 왼팔도 자르고 왼다
리, 오른다리 다 자르고 목까지 자른 후에도 움직인다면 놓아줄 수도 있지만. 하하!"
"다…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그래서 막을 거냐?"
왕령은 대답하지 않고 봉을 쳐들었으니 막겠다는 대답과 같았다. 당주고가 놀라 화급히 달려왔다.
"령아! 그만둬. 어서 이리로 와."
"오라버니! 이 사람 얘기를 들어봐요. 얼마나 잔혹해요? 저희도 그의 말을 따르다간 결국 그렇게 죽고 말 거예요.
지금 양아를 도와 맞서 싸워야해요!"
"너… 미쳤어?"
"오라버니!"
당주고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오라버니, 어… 어째서……."
"네가 미쳤구나! 감히 배신을 하자고? 융공자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잊은 거냐?"
왕령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당주고는 연신 융정의 눈치를 보면서 고함을 쳐댔다.
"만일 한번만 더 억지를 부린다면 내가 직접 너를 죽여주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당주고는 융정을 바라보며 읍 했다. 매우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깊게 굽혔다.
"용서하십시오. 제 아내가 실언을……."
"흥. 너를 봐서 그녀를 죽이진 않겠다만 또 막는다면 그땐 정말 죽여버리겠다."
"물, 물론입니다. 그녀도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당주고는 흡사 객잔에서 일하는 점소이 같았다. 자꾸 허리를 굽신굽신하며 아양을 떨었다. 왕령이 이 모습에 넋이
나간 건 당연하다. 그녀는 정말 정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입은 닫힐 줄 모르고 시선은 당주고에게서 떠나갈 줄 몰랐
다. 가만히 있던 융정이 냉소하며 그녀를 밀어 내버린다.
"진가야. 고통스럽지? 내가 좀 더 고통을 주마. 한번 겪었으니 좀 나을 거야."
진양은 형란 옆에 앉아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새 적응이 됐는지 아까보다 고통은 덜해서 비명은 안 나오고
몸만 부르르 떠는 진양이었다. 놀라운 건 피가 용솟음치는 오른쪽 어깨를 잡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형란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진양의 오른쪽 어
깨에서도 피가 쏟아지고 형란의 양 발목에서도 피가 쏟아지니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융정은 마냥 기뻤다. 이제 대도를 후려치기만 하면 왼팔도 잘려나갈 것이다. 그는 더 시간 끌지 않고 대도를 높이
쳐들었다. 좀 더 약하고 느릿느릿 쳐야 더 고통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손에서 힘을 뺐다. 그냥 대도의 무게로만 진양
의 왼팔을 자를 심산이었다.
"아, 안 돼!"
순간 왕령이 울부짖으며 진양을 가로막았다. 융정과 진양 사이에 낀 셈인데 융정에겐 등을 보인 상황이었다. 융정은
그녀의 등장을 알고 손에 힘을 가해서 잠깐 대도를 멈췄다. 그러다가 이내 놀람이 분노로 바뀌어 오히려 아래 방향
으로 힘을 가해버렸다. 한순간 움찔했던 대도는 갑자기 맹렬히 떨어져 왕령의 등을 갈라버렸다.
진양은 놀라운 상황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그는 왕령에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호통조차 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런데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더니 융정의 대도를 막아주었다. 결국 자신의 오른팔은 잘랐지만 왼팔을 지켜주려 목숨
까지 내던진 것이다. 그녀는 대도가 등을 지나갔는데도 아직 서있었다. 하지만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
린다는 걸 알고 있었고 목소리도 그랬다.
"야… 양아… 나, 나는……."
그녀는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진양은 이를 충분히 감지했다. 왼팔만 내뻗으면 그녀를 안
을 수 있어서 본능적으로 손을 뻗을 뻔했다. 허나 끝내는 손을 내뻗지 않았다. 형란의 발목을 쥐고 있던 왼손은 잠
시 움찔했을 뿐, 그 자리를 지키며 도리어 힘이 가해졌을 뿐이었다. 왕령은 결국 바로 앞에 있는 진양의 손길 한번
받지도 못하고 허물어지고 말았다.
"령아!"
당주고의 외침이다. 그는 멀리서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한 걸음에 달려왔다. 왕령을 끌어안으며 눈물까지 흘린다.
"령아! 령아!"
"오… 오라버니……! 복수… 복수를……."
"알았어, 다 해줄게! 그러니 일단 치료부터 하자."
그는 왕령의 앉히고 장심에 자신의 양손 장심을 맞댔다. 먼저 내공부터 주입하여 시간을 벌고 치료를 할 생각이었
다. 허나 왕령의 상처는 매우 심각했다. 당주고가 그녀를 앉히자 등이 자연히 진양에게로 향했는데, 진양이 그때 본
갈라진 상처란 처참한 것이었다. 옷깃이 갈라지고 그 뽀얀 피부가 두 손가락 굵기만큼 갈라져 있었다. 온통 피투성
이며 굉장히 깊게 패여서 그녀는 아무래도 반 각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양아… 야, 양아……."
진양은 그 상처를 보자니 가슴이 뜨거워졌는데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갑자기 격정이 용솟음쳤다. 또 한번 형란의
발목에서 손을 뗄 뻔했다. 허나 기어코는 손을 떼지 않고 다만 대답을 했다.
"령아! 말해, 무엇이든!"
"미… 미안… 하다고…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다. 당주고는 그녀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걸 알고 더욱 공력을 크게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더 생기를 되찾지 못했다. 점차 눈이 감겨지고 끝내는 진양에게 할말을 잇지 못했다. 입만
벌리며 뭐라고 웅얼웅얼 할 뿐이었다.
"령아!"
진양과 당주고가 동시에 외쳤다. 평소 같으면 또 괜한 시비가 붙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
다. 절색의 미녀 왕령이 저승 문턱에 도달하고 있었다. 진양에겐 소중한 추억으로 남은 친구요, 당주고에겐 사랑하
는 아내다. 그런 그녀는 이제 비참한 말로를 맞고 있었다.
당주고는 왕령을 품에 안았다. 이제 더 살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녀를 안고 보니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직도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냥 들어서는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았고 귀를 가까이 대야 겨우 들
을 것 같았다. 당주고는 그녀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한번 더 눈물을 쏟아냈다.
"령아!"
당주고가 다시 그녀를 부를 때쯤엔 숨이 멎어있었다. 그녀를 안으며 느껴졌던 박동소리는 깨끗이 끊기고 없었다. 당
주고도 진양도 모두 굵직한 눈물 줄기를 볼 아래로 흘리고 있었다.
<전생(前生)의 죄업이던가,
아니면 현생(現生)의 죄업이던가.
검붉은 하늘은 나를 품에 안는구나.
마음속 깊은 그것, 결국엔 씻지 못하고.
슬프게 살다 슬프게 가는 내 인생이여.
배신은 배신으로 망하는 법이라니,
성현의 말씀 틀린 바 없어 나는 대가를 받는구나.
번쩍번쩍 짧은 과거 조금도 밝지 못하고
떠오르는 두 사람이 유루(流淚)할 뿐.
당신들 정말 보고싶어 힘겹게 눈뜨나,
촉촉이 젖은 세상 모든 걸 가렸으니.>
그것은 당주고의 입에서 흘러나온 시였다. 흐느낌과 섞인 목소리라 너무나 안타깝고 비참하여 이 음성이 산의 곳곳
을 배회하자 아까 진양의 비명소리에 뒤지지 않는 귀기를 자아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하늘을 보며 목
이 터지도록 악을 썼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야! 당신은 양귀비(楊貴妃)보다도 서시(西施)보다도 아름다워서 이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
는구려!"
진양은 좀 전의 시가 왕령이 지은 시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죽기 전에 웅얼거리던 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세를 한탄하는 시였던 것이다. 정말로 미인박명일까? 진양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했다. 결국 잘못된 선
택으로 그녀는 죽음을 맞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오른팔이 잘린 것도 어쩌면 스스로 잘못한 무언가가 있
었던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시까지 듣고 나니 형란 만큼이나 그녀도 가련해졌다. 갑자기 머릿
속으로 퍼뜩 만들어지는 구절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읊었다.
<삶과 죽음사이 방황하는 사람,
핏빛 눈물 가슴 타고
이내 마음 붉게 젖는다.
세상 운명 기이하다.
함께 잡던 봉은 어이 갔는가.
서글픈 사람 눈앞으로 무너져도
바라만 보는 한 맺힌 팔아.
한 맺힌 마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