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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十 六 章. 별리(別離) (72/90)

                                     第 三 十 六 章. 별리(別離)

당주고는 융정이 고의로 대도를 내려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양이 칼을 맞기  전 왕령이 사이를 가로막았는데 융

정은 대도를 잠깐 움찔했을 뿐 오히려 힘을 가하여 내려쳤던 것이다. 대도의  떨어지는 속도나 그의 표정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당주고는 본래 그를 무서워했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죽자 이성을 잃어버렸다. 

"융정, 이 빌어먹을 놈. 죽여버리겠다!" 

깜짝 놀라는 융정이 보이지도 않는 당주고는 곧바로 당가의 절학 당가웅웅장을 펼쳤다. 당주고는 그동안 독을 당했

다가 얼마 전 왕령에 의해 풀려진 터라 그 본래 힘을 낼 수 없었다. 허나 한때 양만풍도 놀라게 할 만큼 대단한 장

법이니 아직 위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당주고는 생각할 것도 없이  쌍장을 빠르게 놀려가며 공격을 시작했

다. 처음엔 우장이 안면을 노리고 좌장이 허리를 노리더니 금방 우장은 어깨를  노리고 좌장은 턱을 노리는 식으로 

변했다. 동작이 빠르면서도 매우 시원한 이 초식은 웅웅장의 전룡파미였다. 

융정도 이를 모를 리 없다. 지난날 융왕과 함께 그들의 부하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 무공에 대해선 많이 보았고 또 

많이 연구했다. 결과를 내놓고 보니 웅웅장은 결국 초고성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융정 실력으로는 

당주고를 이기는 게 힘들지도 모른다. 허나 저번에 융왕에게 비밀리에 내공을 전수 받고 대해도법과 초고성장도 완

전히 전수 받아 이제 그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걸  알려주듯이 그의 가슴으로 무지막지한 일 장을 내갈겼다. 이 

일 장은 전룡파미의 동작 가운데를 꿰뚫는 듯하여 당주고는 허둥지둥 쌍수만 휘젓다가 강타를 당하고 말았다. 

"으윽… 너……." 

"건방진 놈. 둘이서 아주 잘 노는구나. 저년이 끝까지  방해해서 죽인 것인데 감히 네 까짓게 보복하겠다고  덤벼들

어?" 

"죽일 테다!" 

당주고는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다시 달려들었다. 융정은 물론이고 모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은 완전 뒤집혀있었고 얼굴은 시뻘건 게 확실히 광분(狂奔)한 상태였다. 융정은 그가 자꾸 덤벼들자 크게 노했다. 

웬만하면 제압만 하고 정신이 들게 해주려 했는데 이처럼 죽기 살기로 덤벼드니  그럴 마음이 싹 가셨다. 머리통을 

날려버리려고 몇 수 피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자, 잠깐!" 

순간 당무가 고함치며 뛰어들었다. 그러나 융정이 듣고도 여전히 일 장을 거둘 줄 모르자 하는 수 없이 직접 일 장

을 맞받아 쳤다. 부딪치는 순간 그들 둘의 몸이 진동하며 융정은 한 걸음, 당무는 세 걸음이나 물러서며  사태가 진

정되었다. 

"무슨 짓이오?" 

융정은 아직 화를 가시지 못한 상황이다. 당무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융형, 고정하시오. 이놈이 그래도 내 동생 놈이요. 지금 아내가  죽어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니 융형이 너그럽게 

용서하시구려." 

"죽여버리겠다!" 

당주고는 완전 미쳐있었다. 당무가 열심히 말리는데도 옆에서 다시 일어나더니  융정에게 덤벼들 기세로 손을 뻗었

다. 당무는 급한 마음에 그의 가슴에 일 장을 후려쳤다. 너무 갑작스런 공격이었고 당주고 또한 융정만 바라보고 있

었기에 쉽사리 명중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손을 돌려 천주혈을 찍자 그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융정이 그

를 내려다보며 말문을 연다. 

"이 자가 또 일어나서 덤빈다면 그땐 당형이 말려도 소용없소." 

"걱정 마시오. 내가 잘 다루겠소. 아마 정신이 들면 이놈도 깨달아지는 게 있어 절이라도 할지 모른다오. 융형이 많

이 참아주시면 좋겠소." 

"흥." 

융정은 코웃음치며 몸을 돌렸다. 곧 진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가야. 운이 좋구나. 미녀 두 명이 너를 위해 막아서니 참 부럽기도 하다." 

진양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왼손으로 형란의 발목을 잡고 시선은 왕령에게로 향해있었다. 당주고 못지 않

게 충격을 받은 듯 하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냐?" 

융정이 한 걸음 내디디며 안면을 걷어찼다. 진양은 목뼈가 부러지는 통증을 느꼈다. 형란의 발목을 끝내 놓지 않았

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눈물범벅인 얼굴에 흙이 묻자 그야말로  시골 소년거지보다도 더 더럽게 변

하고 말았다. 온몸 역시 땀으로 젖어서 흙이 덕지덕지 묻고, 잘려나간 어깨와 거기서 나온 피가  살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놈이 그새 까마귀 고기를 처먹었나……." 

이번엔 가슴을 걷어찬다. 역시 왼손에선 힘이 풀리지 않아  왼팔이 끊기는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진양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오른팔이 잘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 형란의 치유 못할 부상과 왕령의  죽음에 상심

했기 때문인지 인상만 찌푸릴 뿐이었다. 

융정은 대노하여 또 걷어차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좀 전 왕령이  대신 죽은 행위나 당주고의 발악은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행여 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발발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진양을 

죽이는 게 좋겠다 싶었다. 허나 그가 시간을 끌었던 탓일까? 아니면 진양의 명이 길었던 탓인가? 융정이 채 대도를 

쳐들기도 전에 뒤편에서 깜짝 놀랄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구해라!" 

정말 까마귀 군단이라 할만했다. 언뜻 보아도 열 명은 넘는 듯 했다. 모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지금처럼 득의양

양한 융정이라면 별로 놀라지도 않을 텐데 그들을 보자마자 그의 안색이 싹 변하고 말았다. 까마귀 같은 무리는 순

식간에 흩어져 이미 공격을 시작했다. 급습 같은 공격이라  북망인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쓰러져갔다. 그들의 

목표는 아무래도 돌파인 듯 중앙으로 맹렬히 돌진해오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 다더니…….) 

융정은 한시 빨리 진양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막 대도를 쳐드는데 또 말리는 자가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 자란 

바로 당유민이었다. 융정은 기가 막혀서, 

"다 죽고 싶다 그거냐?" 

"그를 놓아주세요. 흑의 복면인들이 이곳까지 온 걸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그를 살려주지 않으면 

살아 돌아갔을 무굉이 언젠가 보복할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차분하여 조금도 위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융정은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먼저 그녀에

게 칼을 휘둘렀다. 

"막으면 너도 죽이겠다." 

"전 이 사람과 별다른 친분이 없어요. 다만 원수인 당신이 잘되는 꼴은 못 보겠어요." 

"그럼 죽여야겠군." 

과연 당유민은 앞선 두 오빠보다 나은 듯 했다. 여지까지 그녀는 한번도  융왕, 융정이 원수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융정의 무공엔 당할 수 없다. 빨리 검을 뽑아 몇 수 막아냈지만 연이어 날아온 초고성장법을 맞고 쓰러진다. 

"결국 원수도 못 갚는구나……!" 

"융형! 그녀를 죽이면 안 되오." 

융정 뒤에서 당무의 음성이 들렸다. 역시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그도 친동생들은 아끼는 것 

같았다. 융정은 이 상황에 그의 원한을 살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도 진양을 죽이는 게 시급했기 때문에 당유민을 무

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흑의 복면인들이 접근하기에 아직 시간이 남은 상황. 당유민을 지나치고 진양의 머리통 위로 대도를 내리찍는데 갑

자기 몸이 기울어졌다. 종아리가 찢기는 아픔을 느끼며 진양의 정수리로  떨어지던 대도는 살짝 옆으로 비껴나가고 

말았다. 

"이년이……." 

바로 당유민이 그의 종아리를 검으로 찌른 것이다. 장법에 맞아 힘이 없기에  세게 찌르진 못했지만 그래도 사력을 

다해 찌른 거라 제법 깊이 박혔다. 융정은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대도가 진양의 머리에 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

는 손으로 검날을 잡아서 무식하게 뽑아냈다. 그리고는 칼을 휘둘러 그녀의 목을 쳐버렸다. 지금 그녀를 죽이면 좋

을 게 없었지만 너무 화가 나서 결국 죽이고 만 것이다. 

실제로 당유민 그녀가 진양을 도울 이유는 없다. 허나 진양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계산에 

밝은 여자란 걸 주워들어 알고 있었고 정을 중시하며 은원을 잊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이 잘리는 

순간 그녀는 진양을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는 그 눈빛을 보고 진양은 느꼈다. 그건 복수를 부탁하는 거

라고. 분명 진양은 지금 정신이 맑지 못해서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지만 갑자기 그녀가 막아

섰기에 관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제 진양은 당유민의 한까지 풀어주기 위해 융정, 융왕을 죽여야하는  처지가 되

었다. 

당무의 비명소리가 들릴 무렵, 융정은 벌써 몸을 돌리고 다시 진양을 내려치고 있었다. 여기서 죽으면  자신 스스로

의 한도 못 풀고, 왕령의 복수도, 당유민의 복수도 못한다. 그리고 형란의 복수마저도, 가량 등의 원한도 못  풀어주

는 셈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적수공권이라 저 대도를 막을 수도 없고 늦어서 피할 수도 없다. 지금 진양이  이리 

앉아있어서 멀쩡해 보이지, 사실은 엄중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팔이 잘린다는 건 큰 부상이다. 대체로 팔이 잘리

면 일반 사람들은 죽게 되는데 그 이유가 너무나 큰 고통과 많은 피를  쏟아내서 혼절하고 금방 죽는 것이다. 놀랍

게도 진양이 죽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공이 있는  강호인이라는 점, 둘째로 형란의 부상 

때문에 차마 죽지도 기절하지도 않고 악으로 버티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이미 진양

은 황천길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극적(劇的)이란 이런 것이다. 대도가 진양 백회혈의 몇 치 위쯤 도착했을 때, 드디어 도달한 흑의 복면인이 막는 경

우! 이리하여 진양은 지금까지 4번의 죽기 일보직전 상황에서 살아났다. 흑의 복면인들은 본래 좀 거리가 있었는데 

가장 앞서서 오던 자가 번쩍 몸을 날려 대도를 걷어찬 것이었다. 이때 융정의 심정이란 참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이다. 

"쳐라!" 

진양을 살려준 흑의 복면인이 외치자 이어 따라오던 네댓 명이 곧바로 융정에게 덤벼들었다. 진양도 그제야 그들에

게 관심이 생겨서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알고 봤더니 그들은 이미 북망채에서도  한번 자신들을 살려준 그 흑의 

복면인들이 아닌가! 하지만 진양이 그리 놀란 이유는 그들보다도 무굉 때문이었다. 이들이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무굉이 무사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여 무굉도 함께 왔을까 열심히 둘러보았다. 그러나 역시 없는 것 같아 진

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흑의 복면인 중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그는 다른 복면인들이 융정을 상대하는 사이 진양의 몸 상태를 살폈다. 팔이 

잘렸음에도 아직 기절도 안 한 진양이 놀라운 듯 낮게 탄성을 뱉는다. 그는 곧장 옷을 찢어 진양의 팔을 단단히 동

여매고는 말했다. 

"진 대협. 갑시다." 

"내… 내 형님은……?" 

실로 오랜만에 열린 진양의 입이다. 그에 복면인은 '다른 방향으로 모셔갔다' 라고만  답했다. 진양은 그 말을 듣자 

힘이 쪽 빠지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한숨 자고 싶을 만큼 머리도 띵해졌다. 허나 옆에 쓰러져 벌써 기절

한 형란을 보니 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 대협, 일어설 수 있소?" 

"나보다도… 그녀의 상처를……." 

복면인은 형란의 상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녀도 진작에 보았지만 둘 다 구할 수는 없어 애써 무시하

려 했던 것이다. 

"안 되오. 그녀가 불쌍하긴 하지만 둘 다 구할 순 없소." 

"그럼… 그녀를 구해줘……." 

"진 대협!" 

진양은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형란을 바라보았다. 복면인은 탄식하더니 곧 자신의  옷을 또 찢어 형란의 양 발목

을 동여매 주었다. 진양의 손이 거의 하나처럼 붙어있는 상태라 그것을 떼어내는 데도 힘이 많이 들었다. 복면인은 

일어서서 뒤의 대세를 보았다. 10명이 함께  도착했는데 결국 두어 명이 죽고 남은  복면인들은 융정과 북망인들을 

막고 있었다. 흘낏 보아도 매우 밀리는 형세다. 얼른 떠나지 않으면 모조리 죽게 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재빨리 달

려나가 북망인 두어 명을 쓰러트리고는 복면인 한 사람을 데려왔다. 

"진 대협은 내가 업겠소. 형 소저는 이 친구가 업을 거요. 이제 둘 다 무사히 탈출할 수 있소." 

복면인 둘은 서둘러 진양과 형란을 들쳐업었다. 대장 복면인이 진양을 업은 채로  세게 휘파람을 불며 앞서 뛰어갔

다. 그러자 싸우던 복면인들은 한 차례 맹공을 퍼붓더니 금방 몸을 돌려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융정이 펄펄 날뛰며 

'잡아라, 잡아라'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가장 먼저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진양은 복면인 등에 업힌 이후로 바로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꾹 참고 만에 한에 생길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

여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독이 퍼져있어서 힘도 없는 왼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고, 옆에서 업혀 가는 형

란 생각을 하면 그때마다 정신이 들기도 했다. 얼마나 그리 달렸을까? 북쪽에서 절벽을 옆길 삼아 꽤 달린 듯 싶었

다. 진양은 온몸에 힘이 빠져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업혀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볼 수 없었다. 허나 억지로 고

개를 들었다. 어느 정도 도망쳤는지도 알 겸, 무엇보다도 형란의 상태가 어떤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들

고 돌리던 그의 안색이 한순간에 변해버렸다. 

"라… 란… 란아……! 란… 아……!" 

지금 보니 곁에서 업혀가고 있어야 할 형란이 없는 게  아닌가! 그녀를 업던 사람도 함께 사라졌다. 뒤를 바라보니 

따라 도망치는 복면인 수 또한 절반으로 줄어 고작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로는 북망인들이 사력을 다해 추격

해오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수가 절반 정도인 것 같았다. 

"란아……! 란아는… 어디 있지?" 

지금의 진양에게 이보다 더한 놀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앞으로의 진양에게 있어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안 그래도 

부상 당해 창백해진 안색이 더욱 딱딱한 백색으로 변해버렸다. 곧 업고 가는 복면인을 부르며 묻자 그는 잠시 망설

이는 듯 하더니 턱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오른쪽을 보니 약간의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나무들 뒤로 웬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니 그들은 형란을 업은 복면인과 함께 가는 복면인 2명. 그리고 북망인들  수

십 명이었다. 진양은 힘없이 속이 텅 빈 음성으로 악을 쓰듯 소리쳤다. 

"왜……! 왜… 그녀가……!" 

이만하면 소리치는 것도 아니다. 꼭 쉰 목소리처럼 힘도 없고 속이 텅 비어서 완벽한 중병자의 목소리였다. 복면인

은 이번에도 역시 망설이다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한 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소." 

"그, 그렇다면……." 

"형 소저는 서쪽으로… 우린 남서쪽을 통해서… 난주에서 만날 것이오." 

진양은 난주라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형란과 떨어진 상황이 더 문제

인 것이다. 그의 머릿속으로 혹시 형란과 다시 만나지 못하진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생각이 스

치니 다급해지는 건 당연했다. 

"안 돼……!" 

"어쩔 수 없소." 

복면인의 매정한 음성은 더욱 진양을 가슴 아프게 했다. 진양은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 형란의 손을 붙잡아주고 싶

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기 때문에 그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쉰  음성으로 열심히 악을 써보지만 그 

소리는 추격하는 소리, 도망치는 소리에 밀려 공중분해 되고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수천 번도 더 불러볼 것을 마치 

꿈에서나 있을 듯한 광경으로 그녀는 멀어져만 갔다. 나무 몇 그루가 시야를 가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모습은 완전

히 사라졌다. 진양은 그럼에도 계속 '란아'를 불렀다. 살아있는 한 계속 부르겠다는 듯 끝없이. 허나 그걸 형란이 들

을 수 있었을까? 

진양의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깨자마자 작은 신음소리부

터 흘렸다. 그러고 한참을 고통 때문에 입도 열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했다. 정신은 들었지만 그만큼 상처의 고통은 

컸던 것이다. 허나 그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 수 있었다. 이 아픔이 잘린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이요, 자신의 몸

은 아직도 말을 탄 것처럼 들썩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겨우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웬 남자의 옆얼굴이었다. 진양은 그가 자신을 업고  도망쳤던 복면인이라는 걸 

대번에 눈치챘다. 그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오랫동안 바라보던 진양은 그가 누군지 눈치채고 쉰 소리

를 내질렀다. 

"전효!" 

바로 그 복면인은 전효였던 것이다. 전효는 진양이 깼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듯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깼소?" 

"당신… 그럼 당신들은……." 

진양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잇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달리는 곳은 숲이었는데 

따라오던 복면인들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게 있어 전효의 몸  상태를 살펴보던 진양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진양처럼 어딜 잘리는 등 큰 부상은 없었지만 온몸이 찢겨진 상황이었다. 상의는 이미 다 찢어

져 벗겨진 듯 하고 하의만 남았다. 그나마 그것도 어딜 통해서 지나왔는지  무릎 아래쪽으론 바지가 이어지지 않았

다. 종아리에 있는 여러 상처들과, 온몸에 보이는 갈라지고 찢겨진 상처가 공격을 당해 이리 된 것이란 걸 알 수 있

게 하였다. 진양은 왼팔을 들으려다가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처음엔 팔이 안 떼어져서 없는 힘으로 악을 써서 

떼고 보니 검붉은 딱지가 앉아있던 것이다. 아마도 전효의 몸에 난 상처에서 피가 많이 흘러 진양과의 살갗 사이에

서 굳은 모양이었다. 눈물과 범벅이 되어 아주 꼴이 말이 아니다. 즉, 이렇게 피가 흐른 지도 꽤 됐다는 얘기다. 

"도망친지… 얼마나 됐소?" 

전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헉헉거리며 끊임없이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진양은 재차 물어보았으나 그가 대답하지  않

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문득 형란과 무굉이 떠올라  이것저것 더 물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묵묵  무언. 오로지 발만 

교차시켜 힘겹게 달리는 전효였다. 진양은 다시 형란, 무굉 생각에 깊은 상념의 나락으로 빠졌다. 

(둘 다 무사할까? 형님은 무공이 고강하지만… 북망채 도적 새끼들이  워낙 간악하니……. 란아는 어찌 됐을까? 나

처럼 이렇게 업혀가고 있긴 할까? 아… 그녀의 발목 부상이 심한데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을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슬프다. 그는 상념에 빠지자 절로 울고 싶어졌다. 무굉도 무굉대로 걱정이 됐지만 그보다도 형란이 

걱정됐다. 그녀는 이미 발목의 근맥을 잘려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도 오른팔이 잘렸지만 그녀는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정도면 괜찮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와 이별을 하고 만 

게 아니겠는가! 이제 겨우 그녀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고 자신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는데 이렇게 

생이별하게 되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요, 비분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눈물은 그칠 줄 모르게 흘렀다. 

그 순간 갑자기 그는 몸이 붕 떴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 막 느끼고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에 다시 땅으로 곤두박

질 쳤음을 알았다. 떨어질 때 충격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한동안 띵한 머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확실히 아직

도 쏟아낸 피를 보충하지 못한 것이고 오른팔을 잘린 상처며 몸에는 여전히 산공독이 남아있는 것이다. 완전 대(大) 

자로 뻗은 그는 안간힘을 쓴 덕에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앞에는 전효가 고꾸라져 있었다. 

다가가서 그를 뒤집었다. 이걸 하는데도 엄청난 힘이 들었다. 한두 번 왼손으로만 들다가 도저히 힘이 들어가질 않

아서 나중엔 무릎으로 받치고 왼손으로 밀었다. 이렇게 해서야 겨우 그의 몸을 뒤집을 수 있었다. 전효의 상태는 참

으로 가관이었다. 진양이 몸과 마음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면, 전효는 작은 상처를 수백 개나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성한 곳이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기에 베인 듯한 상처, 채찍에 맞은 상처, 이리저리 부딪친  상처

로 가득했다. 진양은 자신의 부상도 부상이지만 그런 그를 보니 갑자기 가련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동병상련일지

도 몰랐다. 

"전형! 일어나 보시오. 전형!" 

한동안 흔들며 부르자 전효는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내뱉은  한마디는 진양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이제야 겨우 다정하게 부르는군요, 진 대협……."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시간의 피로와 부상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었다. 말도 존중하는 말투로 꼬박꼬박 대협이라 부

르고 있었다. 그렇게 대협이라 부르는 이유는 옛날 화산에서 구해준 일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다. 사실 진양은 대협

은커녕 소협이라 불릴 자격도 없어서 이런 말을 들으면 매우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형란도 그리 부르지 못하게 만

들지 않았던가? 그때 그 일 하나 가지고 대협이란 칭호를 붙이는 전효도 우스웠지만, 형란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전효가 불쌍하면서도 그동안 소홀히 대했던 것이 미안했다. 

"전형……. 대체 이게 어찌 된 거요?"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오다가 공격을 받아서……." 

전혀 별 거 아닌 게 아니다. 이만큼 다치고도 살았다는 건 진양의 팔이  잘리고도 살았던 것에 맞먹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진양은 그의 부상이 심한 것 같아 일단 질문은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왼팔을 뻗어 일단 옷소매로 그의 피

를 닦아주려고 했다. 

"그냥 두십시오. 저는 더 살지 못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오? 나도 살았잖소." 

"그건… 모르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방주님께서 주셨던 단약을 이미 다섯 알이나 드셨습니다." 

그리고 보니 무언가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혼절했을 때 억지로 먹인 것 같았다. 

"방주라면… 양만풍? 만풍이 당신들을 보낸 거요?" 

"… 그렇습니다. 방주님께선 필시 진 대협이 위험할 거라시면서, 지켜보다가 위험해지면 구해줘라 하셨습니다." 

"만풍이……." 

진양은 양만풍이 떠오르자 새삼 서로 나누었던 우정이 생각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만풍은 잘 지내고 있소?" 

"방주님은… 평안하십니다." 

"알았소. 일단 당신부터 치료합시다. 당신 상처가 말이 아니오." 

"압니다……. 전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곧 죽을 겁니다… 진 대협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알고 있었다. 전효의 목소리는 진양 만큼이나 힘이  없었다. 허나 진양은 단약을 먹어서 무사하다지만 전효는 

그렇지 않다. 

"그럼 당신 몸 어디에 단약이 있소? 내가 꺼내서 먹여주겠소." 

"전부 다섯 알이었지요……." 

진양은 그가 한심해졌다. 미운 감정을 기반으로  한 한심함이 아니라 안타까움을 기반으로 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전효는 그의 마음을 아는 듯 쓰게 웃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하셨으니 다 물어보십시오……." 

"전형……." 

"전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어서……." 

진양 역시 그의 마음을 알았다. 이미 터진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차근차근 그동안의 일을 물어보았다. 전효가 이에 

아주 간략하게 답했으니 그건 이러했다. 

앞서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전효 등 복면한 감총방 사람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진양이 위기를 처했을 때 나섰

다. 일단 진양과 형란을 보내고 무굉을 도와 싸웠는데 융왕을 비롯한 북망채의 공격이 너무 거세서 매우 수세에 몰

리기도 했다. 허나 나중에 무굉이 제 무공을 회복하자 그때부턴 상황이 뒤바뀌었다. 융정이나 융왕이 예상했던 것보

다 무굉의 무공은 초절하여 전효 등과 함께 북망채의 포위망을 돌파했던 것이다.  무굉은 그에 모자라 융왕의 가슴

에 일 장을 때려 쳐 기절까지 시켰다. 그 후 이들은 반으로 갈라져서 절반은 무굉과 함께 동쪽으로  피하고, 절반은 

진양을 구하러 찾아왔다. 마침 위기의 순간 나타나 진양을 구했으며 형란을 데리고 간 3명은 서쪽으로 향했는데 아

직 소식은 얻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 북망인들이 끝까지 추격을 해와 떨쳐버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무 대협을 동쪽으로 보낼 때 설득하느라 많이 애 먹었지요……." 

그는 간추린 설명을 끝내고 여담처럼 웃으며 그리 말했다. 진양은 무굉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한번에 이해했다. 

"그럼 북망인들은 아직도 쫓아오고 있는 거요?" 

"아닙니다… 그들의 추격을 따돌려서 지금은 안전합니다. 허나 너무 지독해서 머뭇거리면 또 쫓아올지도 모르지요." 

"난 전형과 함께 갈 거요!" 

진양은 전효의 말에 빨리 떠나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고 외쳤다. 쉰 목소리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터져 나온 의

기 있는 쉰 목소리는 전효를 감동시켰다. 

"진 대협… 어서 떠나야 합니다. 그들이 곧 올 겁니다." 

"전형과 함께 갈 거요. 누가 뭐래도 말이오." 

"어차피 전 금방 죽습니다. 빨리 떠나십시오… 그리고 살아남으십시오. 그것이 방주님, 형 소저, 무 대협, 그리고 제

가 원하는 것입니다." 

진양도 감동하여 어느새 눈이 촉촉이 젖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을 굳게 해줄 뿐이다. 

"절대 안 되오!" 

"제발… 윽!" 

갑자기 전효의 상태가 악화됐다. 진양이 놀라기 무섭게 그의 입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전형!" 

전효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억지로 미소를 짓더니 곧 말한다. 

"사실… 도망치다가… 초고성장에 맞았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이럴 수가… 융정 이……." 

"꼭 무사하십시오… 복수를 할 수 없다면… 감총방을… 찾아가세요……. 방주님께서 환영… 환영을……." 

진양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갈 거요! 반드시 가겠소. 전형도 함께 갑시다." 

"조… 조심하……." 

갑자기 전효가 말을 잇다 말고 몸부림쳤다. 한 차례 발작한 그는 그대로 숨을 더 쉬지 않았다. 진양은 비통함에 멍

해졌다. 

"결국 또 나 때문에… 아!"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요 며칠 간 자신 때문에 별의별 사람이 다 죽었다. 처음엔 그리 통탄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왕령이나 전효 같은 이들도 죽고 나니 그들 모두의 죽음이 다만 비참하게 느껴졌다. 누구의 잘못인가? 진양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량의 죽음이나 형란의 부상은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 생각했고, 전효나 왕령, 당유민은 자

신을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북아 같은 경우도 농담 한번 잘못 지껄여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게 하지 않았

는가! 

진양은 전효 말대로 즉각 떠날 수 없었다.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운  것보다도 자신도 죽어야하는 게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진양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생각이다. 허나 지금 진양의  마음은 그러했다. 그는 계속 눈

물을 쏟으며 전효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온힘을 쏟아 부어 왼손으로 땅을 팠다. 안 그래도 부상으로 힘이 없고 왼

팔엔 독까지 번져서 거의 미친 짓이었지만, 한밤중이  될 때까지 그 일만 하자 겨우 전효가  들어갈 크기의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끝내고 나니 왼손은 완전 떡이 되어있었다. 손톱이 다 빠지고  상처와 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비석도 못 만들어줬다며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전형……! 내가 쳐죽일 놈이요. 결국 나 하나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소. 난 그동안  나쁜 짓만 했는데도 

전형 같이 좋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은 거요. 내가 죽일 놈이요, 전형!" 

어두컴컴한 이 한밤의 숲에서 울부짖는 소리는 그야말로 귀기를 자아냈다. 스스로 자책하는 그였지만 이미 때는 늦

어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다쳤다. 그걸 진양 또한 알고 있기에 이리 더 슬프고 자신을 탓하는 건지도 모른

다. 이 힘없고 쉰 울음소리는 다음 날이 다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지켜보던 부엉이는 하늘마저 흘리는 눈물에 몸을 

숨겼다. 

숲을 빠져나온 진양은 정신 없이 걸었다. 이 숲이 어딘지도 모르고 이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숲 옆에는 길다랗게 통

한 길이 있었는데, 어디가 동인지 서인지 남인지 북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태양을 보면 알련만 천둥 번개까지 

치는 이 마당이니 방향 감각이란 전혀 없을 수밖에. 설령 알았다고 해도 진양은 지금과 같을 것이다. 이미 그는 기

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냥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발을 옮겼다. 진흙이 자꾸 그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고 형

란, 무굉, 전효 등등의 인물들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의 걸음이 느릿느릿 해지는 건 당연하다. 

눈물샘이 다 마르도록 울고도 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시뻘건 눈이 그것을 증명했다. 소나기처럼 쏟아 내리는 이 

비가 눈물을 가려주었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안 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나중엔 또 눈물을 가려주지도 

못했다. 처음엔 가렸는데 나중엔 피눈물이 흘러 가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찢어져 피눈물을 쏟

아낼까? 피눈물이 흐른다는 건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진양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가 숲을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중얼거린 말이다. 다른 말은 하지도 않았고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어째서' 라는 말이 떠오를 뿐이었다. 

(어째서 우직하지만 착한 그들은 다 죽고, 어째서  남을 도우며 선량한 사람들은 전부 죽는데, 어째서  도움만 받고 

도움은 안 주는 나는 사는가?) 

결국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하염없이 내

리는 비처럼 진양도 하염없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양은 듣지 못

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볼을 타고 피눈물이 흐르고  어느새 그의 눈은 아예 감겨져 있었

다. 무의식적으로 아픔을 느낀 것인지 어쩐 것인지 이미 감겨져 있었다. 그런  모습들로 보아, 지금 이 어딘지 모를 

길을 걷는 진양은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었다.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근처에 마을도 보이지 않고 작은 객잔 하나도 안 보였다. 진양은 보

고 싶어도 못 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눈은 감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것도 개의치 않고 한 방향만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 비가 그칠 때쯤 진양은  어느 이름 모를 산에서 혼절했다. 혼절할 때  그는 감으로 느꼈다. 

이제 이렇게 쓰러지면 자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산이 사실 지난

날 그가 와본 적이 있는 사천 지방의 최고 명산인 아미산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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