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三 十 七 章. 진안(眞眼) 2 (74/90)

                                    第 三 十 七 章. 진안(眞眼) 2

얼마나 시일이 흘렀을까? 봄이면서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던 아미산은 어느덧  완전한 봄을 맞이했다. 꽃들이 만

개하고 단단히 얼었던 냇물은 쩡, 쩡 소리를 내며 부수어진지 오래였다. 높은 산이지만 여럿 새며 짐승들은 산의 곳

곳을 휘젓고 다니며 다시 생명의 계절이 다가왔음을 실감케 하였다. 

여느 날처럼 정고는 절벽 앞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념에 빠져 조용히 수도를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귀가 한순간 꿈틀거린다. 어디선가  딱딱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누가 왔는지 안 

듯 눈을 뜨고 있었다. 

"가만히 있지 왜 또 싸돌아다녀?"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에 그녀 뒤에서 나타난 진양은 말이 없었다. 오른쪽 소매가  펄럭이고 손에 길다란 봉이 들고 

있는 그는 침울한 안색으로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잠자는 사람처럼 감겨진 눈과 손에 들려진 봉은 그가 완전히 장

님이 됐음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어느덧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진양은 이제 혼자 뒷간도 찾아다녔고 잠에서  깰 때마다 머뭇거리는 일도 없었

다. 그가 지내는 곳은 지난날엔 없었던 한 조그마한  사원인데, 아미사원에서 자꾸 파문을 일으키는 정고가 지내는 

곳으로 정하며 지은 곳이었다. 턱없이 작고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진양에겐 오히려 작은 게 좋았다. 그리해야 길을 

외울 수 있으니 편한 것이다. 

진양은 언제나 침울했다. 이유는 뻔한 것으로 과거의  일 때문이었다. 무굉은 어찌 됐는지 형란은  또 어찌 됐는지. 

밤마다 떠오르는 전효 등의 인물까지 모두가 그를 괴롭게 했다. 허나 한번도  그런 자신이 비참하다고 여기진 않았

다. 자신은 지금껏 저지른 일의 대가를 받는 거라 여겼고 그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생각

하며 이런 대가는 매우 약한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오늘 진양은 간만에 밖으로 나왔다. 묘작이  날씨가 좋다고 하며 같이 동행하겠다 했는데  진양은 홀로 나가겠다며 

그녀의 도움을 거부했다. 이제 그녀의 도움을 더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석 달간 그녀의 도움을 받아서 아예 송

구스러울 정도다. 대소변 일부터 밥 먹는 일, 이동하는 일, 약 먹는 일 등등  도대체 한 가지라도 도움을 받지 않는 

게 없었다. 진양은 가끔 그게 치욕스럽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선  마음은 고마움이었다. 그 고마움을 느끼

면 치욕 같은 마음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놈아. 얼른 안 돌아가? 왜 자꾸 싸돌아다니는 거야?" 

"사태. 석 달간 도움을 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떠날까 합니다." 

정고는 깜짝 놀란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에겐 놀라운 일이지만 진양에겐 하나도 놀랍지 않다. 그는 얼마 전부

터 너무 도움만 받는다고 생각하고 떠날 것을 결심했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고는 괴이해서 괜찮다 하더라

도 묘작의 경우를 생각하면 가능한 떠나는 게 좋았다. 그녀는 수도하는 승려지만  결국 여자라서 함께 오래 있다보

면 아미사원에서도 곱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다. 결국 도움만 받고 또다시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고는 한동안 그를 노려보며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입을 떼며 그의 어깨를 쳤다. 

"이 건방진 놈아. 저번에 나한테 지껄인 말은 다 뭐냐?" 

"무슨 말씀이세요?" 

"뭐 네놈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며 그게 다 네놈 탓이라면서.  그들에게 보은하지 못했으니 넌 쳐죽일 놈

이라면서." 

"……네." 

정고가 버럭 화를 낸다. 

"뭐가 네야! 그럼 넌 영원히 쳐죽일 놈으로 남고 계속 도움만 받으며 보은은 하지 않을 거냐?" 

"아닙니다. 이제부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제부턴? 이놈 웃기는 놈일세. 야, 이놈아. 나하고 묘작은 사람으로도 안 보이냐?" 

진양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굉장히 화를 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그

녀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깨달아지는 게 있어서 무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다만……." 

"뭐가 다만이야! 잡소리 집어치고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둬. 내 네놈을 잘 부려먹어서 보은을 받아야겠다." 

"사태." 

"얼레? 그럼 보은하지 않고 또다시 배은망덕한 놈이 되겠다고?" 

진양은 그녀의 괴이한 기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지난날 진양이라면 서로 치고 받으며 재미났을 것을,  이젠 변해버

린 진양이라 계속 밀리기만 했다. 지금 정고가  말하는 것은 '자신들 역시 도움을 줬는데 보은도  안 하고 갈 수는 

없다' 라는 말로 떠나려는 진양을 붙잡는 것이다. 진양은 사실 보은해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서 더 도움 받기 전

에 빨리 떠나려고 한 것인데, 그녀의 이런 말은 참으로 그를 놀라게 할 만 했다. 허나 그는 알고 있었다. 왠지 감으

로 느꼈다. 예전처럼 표정을 볼 수도 없어서 단지 귀로 목소리만 들을 수 있지만 왠지 느껴지는 게 있었다. 정고가 

그런 행동을 보여 자신을 붙잡는 건 전부 자신을 위하기 때문이란 걸 느낀 것이었다. 

그 날부터 진양은 온갖 고생을 다했다. 원기는 모두 회복하였고 그때부터 정고는 그를 부려먹었다. 여러 가지 잡일

부터 정고의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수도 없었다. 팔은 하나요, 앞은 안  보이는 장님이 이런저런 잡일을 다 도맡

아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실제로 지금 진양은 봉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봉이 있어야 땅을 찍어가

고 앞을 휘저어가며 겨우겨우 길을 걸을 수 있다. 

허나 진양은 마다하지 않았다. 이왕 은혜를 입은 몸,  반드시 갚겠다고 생각했다. 진양은 본래 고집이 센 인물이다.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 이제 좋은 인간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이상  반드시 보은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 스스로 배은망덕한 일생을 살아왔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그는 본의 아니게 배은망덕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을 기르는 일부터 사원 안을 청소하고, 정고를 매일 같이 따라다니며 그녀의 뒷바라지를 했다. 정고는  한번쯤 좋

은 말을 해줄 법 한데 끝내 욕만 퍼부었다. 대체로 진양이 확실하게 하여  별다른 트집을 잡힌 건 아니었지만 항상 

걷는 게 느리다고 욕을 먹는 것이다. 진양은 장님이다. 장님은 지팡이 같이 땅을 짚고 주변 사물을 느끼게 해줄 것

이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한다. 설령 있다고 해도 아기 걸음마처럼 아주 느릴 수밖에 없다. 헌데도 정고는 무슨 생각

인지 진양이 느릿느릿 걸으면 와서 한 대씩 때려주었다. 

"망할 놈아! 네놈 때문에 날이 다 새겠다. 한밤중이 돼서야 돌아갈래? 빨리 오란 말이야." 

진양은 따질 수가 없었다. 아니,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의도를 그토록 영특한 진양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호통칠 때면 언제나 말없이 잘 따랐다.  묵묵히 왼쪽으로 가라면 왼쪽으로, 오른쪽으

로 가라면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왼쪽 오른쪽 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여기 앉아!" 

정고의 고함에 진양은 절벽 앞에 앉았다. 바로 지난날 정고와 묘작이 수련을 하던 그곳이었다. 오늘 비는 그 날처럼 

폭포인양 쏟아졌다. 얼마나 많이 오는지 지세가 그러한 곳은 순식간에 강물을 만들고 흐르고 있었다. 진양은 자리에 

주저앉자마자 미끄러졌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하다가 정고가 직접 손을 잡아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돌대가리 같은 놈. 하는 짓은 묘작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사태. 이 아래는 절벽 같은데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셨나요?" 

"잔말말고 네놈 대가리 옆에 나뭇가지나 잡아. 떨어질 땐 그것을 잡아라. 다음부턴 미끄러져서 떨어져 죽건 말건 상

관하지 않을 거야." 

진양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 팔로 힘겹게 올라와 다시 정좌하고 앉았는데 역시 미끄러진다. 정고는 버럭 화

를 냈다. 

"정신을 가다듬어. 도대체 알려주지 않으면 네놈이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제야 진양도 조금 버틸 수 있었다. 허나  역시 절벽이 코앞이고 경사진 곳에서 수련을 한다는  자체가 그를 떨게 

하였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저절로 마음이 흐트러져 도저히 명상에 잠길 수 없었다. 금방 또 미끄러져 나뭇가지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아주 웃긴 놈일세." 

정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놈아. 죽음이 두려우냐?" 

"두렵지요." 

"예전에 네놈이라면 안 두렵다고 지랄발광을 할 텐데, 이제 깨달은 게 있어서 두려운가 보구나." 

진양은 슬픈 얼굴로 부정했다. 

"사람 치고 죽음이 안 두려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지만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변했을 

뿐이죠." 

"흥, 재미있는 놈. 잘 들어라. 저 아래는 끝이  안 보이는 절벽이고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 그리고 이곳은  경사진 

곳이고 비가 이처럼 많이 오는 날엔 미끄러워서 절로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자신도 모

르게 몸을 떨기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가만히 있기 때문에 안 미끄러진다.  뭔 말인지 

알아들어 처먹었냐?" 

정고의 험한 말에 진양은 잠시 안색이 변했다.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죽음', '죽음'. 자신 때문에 수많

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다. 너무 무능하여 가량을 살리지 못했고 입을 잘못 놀려 북아를 자결하게 만들었다. 또 무능

하여 왕령을 죽게 하고 부상당한 형란과 헤어졌으며, 멍청하여 무굉이 위기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 뿐인가? 별 

관계도 없는 당유민은 자신에게 복수를 부탁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모두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결

국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이며 진양은 그것 때문에 많은 회한을 가졌다. 

여러 지난날이 떠오르자 갑자기 뇌리를 강타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하는가? 나 때문에 죽은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간단히 자결도 했고 고작 나 따위 친구를 살리고자 목숨도 버렸다. 란아는 발 병신이 되었고 당유민은 복수를 부탁

하며 죽었다. 가량은 우리까지 위험에 처하지 않길 빌며 스스로 칼에 목을 들이댔다. 그런데 내가 이따위 죽음을 두

려워한단 말인가? 그들도 죽기는 싫었을 것이다. 허나 남을 위해서 기꺼이 죽었다. 나를 위하고 또는 다른 어떤  이

를 위하여 기꺼이 죽은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도 못하고 혼자 살아남았다…….) 

진양은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젠 두렵지 않았다. 저  아래 떨어져 온몸이 부수어지고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해도 자신은 할말이 없었다. 결국 응보를 받는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즉각  자리에 앉아서 다시 명상에 잠겼다. 

처음엔 지난날 죽었던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어쩐 일인지 금새 사라졌다. 온통 세상이 하얗게 될 뿐이었다. 그

는 경사진 그 땅에서 완벽한 무념의 경지로 빠져든 것이다. 

1년이란 시간도 별 게 아니었다. 진양 스스로 지겹다고 느낀 나날은 단 하루도 없었기 때문에 별 게 아닐지도 몰랐

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절벽 앞에서 무념에 빠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온통 하얀 세계에서 무(無)로 지냈다. 그러

는 중에도 귀는 열려 있었다. 만물의 모습을 이젠 보지 못하지만 대신 만물의 음향을 더 잘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이 절벽 앞에 있으면 새 지저귀는 소리나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 정도밖에  들리질 않았다. 허나 시간은 점차 흘

렀고 귀는 더욱 더 열렸다. 새가 단지 지저귀는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가기도 했고 물줄기도 좌측엔 작은 물줄기가, 

우측은 좀 더 큰 물줄기가 있었다. 

점차 진양은 시간이란 개념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어떻고 또 안 흐르면  어떠한가? 자신이 

잠에서 일어났을 때가 아침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는데, 그런 건 알 수도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진양

에겐 낮이나 밤이나 결국 그게 그거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변화는 그의 마음 상태였다. 이제껏 그는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여기고 매우 슬퍼했었

다. 한때는 자결을 하려 하기도 했고 삶에 의욕을 잃어 며칠 간 굶은 적도 있었다. 허나 잘 생각해보니 그건 잘못된 

행위였다. 자신이 다시 죽는다면 그들이 분해할 것이다. 자신들은 죽어가면서 그를 살려줬는데 진양 그 자신이 그리 

허무하게 자결한다면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헛되겠는가? 진양은 이런 것을 깨달은 이후로 함부로 죽으려 하지 않았

다. 더욱 꿋꿋이 살고자 노력했다. 자신이 오른팔을 잃고 눈을  잃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은 전부 하늘의 벌이라 

여기며 순응하기로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전부 정고의 도움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정고가 진양을 부려먹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져서는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안 보였다. 묘작에게 

물어보니 원래 그런 분이라면서 아무 말이 없었으면 괜찮다고  하였다. 진양은 그때부터 홀로 절벽 앞에서 지냈다. 

가끔 묘작이 찾아오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그녀가 가면 또 명상을 할 따름이었다. 

하루는 진양이 절벽에서 명상에 잠겨있을 때였다. 동북 방향인 뒤쪽에서 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귀에 익

은 소리였다. 묘작의 발소리처럼 가볍지는 않지만 뭔가 표홀한 그런 발소리. 그런 발소리는 정고만이 낼 수 있었다. 

"사태께서 웬일이신지요." 

"네놈이 죽었나 살았나 보러 오는 것도 안 되냐?" 

진양은 굳이 등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봐도 보이지 않으니 소용없고 어차피  정고임을 알아서 크게 예를 갖출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가볍게 미소하며 답했다. 

"한동안 안 보이다 갑자기 나타나신 걸 보니, 오늘이 바로 그 날이군요."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얼마 전 정고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정고도 한번에 알아듣고 말했다. 

"그래, 바로 그 날이다. 이제 네놈은 꺼져도 된다." 

"전 이곳이 좋습니다. 사태께 보은했다 해도 전 이곳에 있고 싶습니다." 

"이놈이? 누가 네놈을 재워준대?" 

정고는 또 무슨 까닭인지 진양을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진양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태께서 가라면 결국 가야겠군요. 그럼 전 이곳에서 아예 살겠습니다. 사원엔 가지 않고 이곳에서만 지낼 테니 사

태께서 양해해주십시오." 

"허이고, 이놈 봐라. 이제 멀쩡해진 놈이 여기가 뭐가 좋다고 남으려는 거야?" 

"제가 멀쩡하다니요?" 

"멀쩡하지 이 돌대가리야. 팔 한쪽이 없어서 무공만 잃었을 뿐, 귀는 부처님 귀가 돼서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듣는 

놈이." 

진양이 미소한다. 

"귀가 밝아졌을 뿐이고 앞은 여전히 안 보입니다. 이쪽 길은 달달 외워서 잘 다니는 거지요." 

"이 사기꾼 자식아! 네놈이 터득한 건 진안(眞眼)이라 할만한데 감히 날 속이려들어?" 

실제로 진양의 말은 사실이었다. 귀가 아무리 밝아져도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은 잘 걸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허나 

정고의 말도 사실이었다. 무념의 경지에서도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듣는 진양은 귀가 굉장히 밝아졌기 때문에 실로 

그것이 진짜 눈이 될 만 했다. 

"이곳에서 밥 처먹은 지도 벌써 2년이야. 그까짓 잡일로 대가를 치렀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더구나  네놈만 보면 답

답해서 꼴도 보기 싫다. 엉금엉금 뭔 거북이도 아니고." 

"나름대로 빨리 걷는데 여전히 느린가 보군요." 

"그걸 말이라고 해! 얼른 강호로 나가버려. 가서 물에 빠져 뒈지든 말발굽에 밟혀 뒈지든 좀 사라지란 말이야." 

"전 팔을 잃어서 무공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죽지요." 

정고가 앙천 대소했다. 

"푸하하. 야, 이 겁쟁이야. 그럼 넌 그 형  뭐라는 애하고 무 뭐라는 형님 안 만날 생각이냐?  그 당씨 계집 복수도 

해줘야 한다며? 전효라는 놈도 네놈 살리고 뒈졌는데 고작 생각하는 게 그런 것밖에 안 되냐?" 

"그게… 전 본래 오른손잡인 데다 눈도 멀어서 왼팔로 좀 싸운다 해도 무리가 있습니다." 

진양은 그들을 떠올리자 또 괴로웠다. 하지만 설령 나간다 해도 자신이 없다. 복수는커녕 길도 못 찾고 헤매다가 죽

을 것이라 여겼다. 차라리 확실히 무언가 방도를 찾은 후에  행동에 옮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순간 문득 

정고가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곧 손을 쳐들고 내리치는 것도 알았다. 파공음이 넓게 퍼지지 않고 둥그렇게 집중되

어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주먹으로 때리려는 것 같았다. 진양은 피할까 하다가 그냥 맞았다. 

"이놈이 괜히 못 피하는 척 하네." 

"사태. 저도 강호에 나서서 란아도 만나고 무 형님도 보고 싶습니다. 당유민의 복수 역시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이

고 전형의 묘비도 찾아 가봐야지요. 하지만 몸이  성치 않으니 그곳까지 혼자 갈 수조차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

다." 

"이런 돌대가리!" 

다시 정고가 꿀밤을 쥐어박는다. 

"이놈아. 그건 네놈이 자포자기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정신차리고 이거나 읽어!" 

갑자기 그녀가 뭘 던져주었다. 진양은 그게 책자라는 걸 한번에 눈치채고 왼손으로 받아들었다. 만져보니 책자긴 책

자인데 딱딱한 철로 만들어져 있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곧 난감한 표정으로, 

"사태. 눈먼 장님에게 책을 읽으라니요?" 

"아… 이놈이 드디어 맛이 갔군. 이 썩을 놈아. 네놈 손가락은 뭐에다 쓰려고 그래? 책이 괜히 철로 된 줄 알아?" 

진양은 뭔가 감이 잡히는 게 있어서 얼른 책에 손을 댔다. 먼저 손바닥으로  책표지를 쭉 훑어보니 움푹 패인 부분

들이 있었다. 진양은 그게 글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지로  한 획씩 느껴보니 글귀는 <음양합무론(陰陽合武論)>

이었다. 

"음양합무론?" 

"뭘 꿍얼대? 이맹이란 대협께서 남기시고 간 책자다." 

진양은 그동안 여러 일을 겪으며 천무대협의 이름이 이맹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나니 절로 가슴

이 두근거렸다. 

"음양합무론이라면 무공비급일까요?" 

"그렇겠지. 내가 그거 빼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은 줄 알아?" 

"아… 그 때문에 사태께서 한동안 안 보였군요." 

"그렇다. 옛날에 그 대협이 호랑이들이 나타날 땔 대비해서 즉석에서 쓴 그 책을 두고 가셨다는데,  읽어봐도 뭔 소

리인지 알아야지. 그냥 사원에 고이 보관되고 있었다." 

"이거… 철로 된 거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요." 

오래 들고 있다보니 조금 무거워져서 일단 땅에 내려놓았다. 정고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이 끝내 꺼지지 않는다면 나도 별 수 없지. 그 음양합무론이 무공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네놈이 알아

서 해먹어라." 

"이걸 다 읽으면 어찌할까요?" 

"당연히 돌려줘야지! 망할 비구니들이 알면 뒤에서 또 시끄럽게 해댈 거야." 

진양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정고가 갑자기 그를 내쫓으려  한 건 그의 무공 상태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공을 익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진양을 시험할 수 없으므로 이런 수단을 쓴 것이다. 만일 진양이 그냥 알아듣고 

내려갔다면 음양합무론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잘 알았습니다. 사태께 또 은혜를 입었군요." 

"나도 그게 뭔지 모르니 일찍 넘겨짚고 소란부리지 마. 어디 가서 수련을 하고 이곳은 오지 마라. 여긴  원래 내 수

련장소인데 네놈이 와서 한동안 참선도 못했어." 

"사태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진양은 가볍게 허리를 굽혀서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산을 조금 내려가 어느 숲 속으로 들어갔다. 길을 몰라서 한참 

동안이나 봉을 휘둘러댄 끝에 그곳이 깊은 숲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새  지저귐이 사방으로 퍼질 때 파동을 일으

키는 것 같아서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음양합무론은 천무대협 이맹이 쓴 무학서였다. 진양은 첫머리를 읽으며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진양을 조금 맥이 빠지게 하였다. 

<…해서 음양합무론은 만 가지의 무학이 하나임을 알리고, 무(武)라는 것을 이해를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진양은 솔직한 심정으로 실망했다. 뭔가 대단한 무공이 있으리라 믿었거늘  실제로는 그런 무학서가 아니었던 것이

다. 음양합무론은 말 그대로 음양처럼 무학이란 결국 하나로  조화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무공이란 남을 

돕고 세상을 바로 하는 협심에 중심을 두며 글이 전개되고 있었다. 고로  이 책자는 무학서라기보단 무학 이론서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지. 내가 이런 책자를 얻은 것도 커다란 행운이 아닌가? 전대의 절정고수로 불리는 천무대협의 책자를 얻었는

데도 불만을 갖다니 나란 놈은 참 어쩔 수 없군……." 

진양은 마음을 바로 하고 책을 읽어나갔다. 장님이 된 후로 처음 읽는 책이다. 눈으로 금방금방 읽던 것을 손가락으

로 하나하나 헤쳐가자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그런  마음은 채 반 시진도 못 가서 사라지고 말았다. 

진양은 순식간에 그 책 내용에 빠져들어 식음까지 전폐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시간은 점차 

흘렀지만 진양은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삼매경에 빠져 누가 칼로 찔러도 모를 상황이다. 팔도 한쪽 잘린 장님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며 책을 읽는 모습에 새들도 감동한 듯 더 시끄럽게 지저귀지 않았다. 

해가 떴다 지고를 십여 번 반복했다. 진양은 책을 읽으며 가능한 움직이지 않았다. 정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못 참

을 때는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온 물로 배를 채웠다. 그런 후엔 다시 책만 읽었고, 나중엔 검지손가락이  아파져 중

지와 엄지 등으로 바꿔가며 책을 읽었다. 그리하여 손가락에 더 이상 글이 잡히지  않을 때는 이미 수십 일이 지난 

후였다. 물통엔 더 이상 물이 없었고 주변에 잡풀들은 진양이 먹다 뱉은 것들과 함께 어지럽혀져있었다. 

"그렇구나!" 

진양은 혼자 머리통을 치며 기뻐했다. 한동안 그렇게 미친놈처럼 떠들던 그는 약간의  배를 채운 후에 갑자기 봉을 

쳐들었다. 

"음과 양은 본래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근본으로 올라가면 결국 태극으로 만나게 된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말

해주는 것으로 무공 역시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무학은 소림사에서 시작하였다고 하질 않는가? 좋아! 그야

말로 합무(合武)다!" 

음양합무론에서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전체적인 기반을 협(俠)에 두고서 음과 양을 합하며 만물의 이치를 

설명했다. 이름은 음양합무지만 음양합물(陰陽合物)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을 정도였다. 한번 읽고  나니 깨달아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게 아닌가! 진양은 미친 사람처럼 혼자 봉을 휘둘러댔다. 

"음이고 곧 양이요, 양이고 곧 음이니. 그것을 구태여 갈라 무엇하겠는가?  결국엔 갈라졌다 모이는 것이리라! 음양

만 그렇겠는가?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결국엔 모두 하나요, 모두 단일이다!" 

음양합무론의 내용이 바로 그러했다. 결국 한낱 이론서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이해했을 때의 힘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천무대협이 이 책자를 아미사원에 남긴 것은 행여 호랑이들에 피해를 입을 때, 이  책을 읽

고 무공의 근본 이치와 협을 깨달아 알아서  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허나  아미사원 여승들은 모두 

기초적인 무공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이 '음양합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물론 그에는 천무대협의 안이함도 있었

을 것이다. 책의 설명은 대체로 간결하고 중심은 협심에  맞춰져있었다. 진양 같이 영특하고 무공도 익힌 사람이라 

쉽게 이해했지, 그게 아니라면 이 책은 한낱 잡설을 써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진양은 그 날 이후로 무공 수련에 들어갔다. 무엇을 연마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양  자신만이 알 뿐. 그는 굳게 

뻗은 나무들을 상대로 수련을 거듭했다. 탄지신통, 함종절검법, 함종권법, 유루봉법까지 번갈아 가면서 수련했다. 한

참 수련하다 말고 혼자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갑자기 미친 듯이 또 무공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때 진양의 모습은 

한마디로 광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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