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八 章. 혈해(血海)속의 강호 2
양만풍은 다급해졌다. 빨리 대책을 강구해보다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눈을 부릅떴다. 이 순간 난관을 타개해줄
능력이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뿐이지 않는가? 더욱이 그는 도와줄 것을 약속했고 언제든 불러만 달라고 했으니 아무
런 문제가 없었다. 양만풍은 아직도 그가 직접 나서는 걸 껄끄럽게 생각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서형! 그 분께 도와달라고 전하시오!"
싸우는 와중 틈을 보아 서존에게 고함치는 양만풍이었다. 서존은 바로 대답하고 막 그를 데리러 가려던 때였다. 몸
을 돌린 그의 어깨를 갑자기 누군가가 밟고 날아갔다.
"그 분이 누구야? 내가 도와주마."
귀신처럼 나타난 인물은 막 부르려던 자존자대 무굉이 아닌가! 그는 '그 분'이 그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싸
움을 멈춘 동촉삼속 등을 보며 소리쳤다.
"네놈들이 함종문이냐?"
그의 등장은 이런 혼전을 한순간에 멎게 할만했다. 그 웅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한 고함소리며, 귀신같은 움직임은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종문도 잠시 놀랐을 뿐 이내 정색했다. 이유는 물론 이 괴상한 노
인이 바로 자존자대 무굉이라는 것을 알았음이다.
"난 함종문의 장문인 조덕이오. 저번에 북망산에서 봤는데 기억나시오?"
"오……! 바로 너구나."
무굉은 반가운 듯 소리치더니 바로 호통으로 바꾸었다.
"이놈! 네놈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그렇소."
"왜 나를 죽이려는 거냐?"
"아직 전해듣지 못한 거요? 좋소, 그럼 알려주겠소. 내 사부님인 선리절미 단목리 여협은 한을 품고 돌아가셨소. 바
로 천무대협과 그 아내 천문여협과 관련이 있소."
조덕이 그렇게만 말했는데 무굉은 벌써부터 펄쩍 뛰었다.
"왜 그 한이 내 사부들과 관련이 있는 거냐?"
"자세한 건 시간이 없어서 설명해줄 수 없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부님께서 그들의 제자는 반드시 죽이라
고 하셨다는 거요. 그들의 제자는 당신이니 내가 당신을 죽여야하오."
무굉도 어느새 이해했다. 하지만 인정은 못했다.
"이놈!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내 사부님의 한을 풀어야 하니까!"
"안 죽겠다면?"
"직접 손을 쓰겠소."
조덕의 말에 그는 앙천 대소했다.
"우하하! 그럼 직접 날 죽이겠다고? 우하하!"
"흥. 아무리 자존자대라 해도 산중답십이공진을 깨부술 거란 생각은 못하겠소이다."
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산중답십이공진? 그건 무슨 진법이냐?"
지켜보던 동촉삼속은 그의 태도에 더 참을 수 없었다. 자세부터가 오만하여 불만스러웠는데 아예 산중답십이공진을
모른다고 하다니 분통이 터졌다. 그만큼 명성이 뛰어난 것이라 일부로 무굉이 모른 척 한다고 여긴 것이었다.
"직접 보고 싶습니까?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연경후의 말은 무굉의 큰 흥미를 돋구었다.
"보고 싶긴 한데 별로 대단할 거 같지가 않아서……."
"흥. 어디 한번 맞서기나 해보시죠."
"아니야, 아니야. 요즘은 도대체 쓸만한 진법이 없단 말씀이야. 청성파의 천하삼유, 전진교의 단양이십사진, 북망채
의 북망귀곡진, 귀곡이진 같은 것도 참 쓸모가 없어. 이왕 진법이라면 나한진(羅漢陣) 정도는 되어야지."
참으로 자존자대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경우다. 실제로 천하삼유나 단양이십사진, 북망귀곡진
등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진 절정의 진법으로 감히 맞서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허나 무굉의 눈에는 별 게 아니
다. 무굉이 뭐 대단히 강해서 그들 진법에 맞선다고 쉽게 이기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그가 어찌 높
이 평가하겠는가? 그런 면에서 나한진을 칭찬했다는 건 실로 그 진법이 대단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조덕 등도 실제로 이렇게 그의 오만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동촉삼속도 할말을 잃어 입만 딱 벌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조덕이었다. 그는 호통치듯 제자들에게 명했다.
"좋아! 어디 자존자대께서 직접 산중답십이공진을 맛보겠다 하시니 보여드려야지. 동촉삼속은 빼고 1대 제자 12명
나와라!"
조덕은 이미 화가 나있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무굉을 눌러 함종문의 명성을 더 드높이겠다 다짐했다. 더불어 사부
의 한도 풀게 되니 일거양득이라 여겼다. 그의 고함에 1대 제자 12명이 잽싸게 나열했다. 다시 양쪽으로 갈라서며
특이한 방위를 밟고 선 그들은 금방 산중답십이공진을 펼친 후였다.
무굉은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저 주름살이 더 생기고 허연 머리칼 가운데 있던 몇 가닥의 검은색이 사라
졌을 뿐이었다. 모습은 그처럼 그대로였고 말투며 하는 생각이며 모두 변하는 게 없었다. 자세도 예전처럼 오만했
다. 양 허리에 두 손을 얹히고 가슴을 편 채 산중답십이공진 앞에 섰다.
"이건가? 뭔가 대단해 보이는 걸?"
잠시 눈알을 굴리며 진법을 살피던 무굉이 한 말이었다. 조덕은 냉소하며 다시 공격을 명했다.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자존자대의 코를 꺾어라!"
십이공진이 발동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양만풍은 그걸 지켜보면서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자
신들과 싸울 때와는 뭔가 다른 진이다. 분명 같은 진법인데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그는 시전자들이 1대 제
자고 특수한 인물 세 명이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전해듣기로 십이공진 중 정해진 3명이 짝을 지으면 그
위력이 배가된다고 하니 멀리서 지켜보기에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저 진법은 이제 무굉조차 쉽게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무굉은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들이 공격은 안 하고 자꾸 왔다갔다하면서 유인하자 무굉은 별 생각 없이 공격을 들
어가는 것이다. 그는 몸을 낮추고 약간 앞으로 엎드리다가, 갑자기 왼손으로 땅을 치며 번쩍 날아올랐다. 이미 오른
손은 앞으로 뻗어나간 상태. 자세야말로 꼭 광표(狂豹) 같았다. 괜히 광표장법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십이공진은 잠깐 주춤하는 듯 했다.
"받아라, 요놈들아!"
십이공진이 좀 더 양옆으로 퍼지면서 이 첫 초식을 피해가자 무굉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연달아 쌍장을 휘둘러댔
다. 양쪽으로 대치한 그들 사이에서 좌우로 몇 장씩 때리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동에 번쩍 서에 번
쩍 하면서 순식간에 십이공진을 와해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그만큼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그냥 무너진다면 '동촉유함'이라는 칭호는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
러했다. 동촉유함이라 하여 함종문이 높게 평가되는 것처럼 그 문파의 축이 되는 산중답 십이공진의 위력은 대단했
다. 한순간에 역전되고 있었다. 무굉이 어느새 몰리고 있었다. 이쪽저쪽 공격을 가하던 무굉이 잠깐 주춤댄 사이, 순
식간에 사방에서 12명이 일어나 3명씩 짝을 지어 공격을 가하는 해괴한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셋씩 짝을
짓고 각각 포진하면서도 기어코 산중답십이공진의 범위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무굉은 그들의 맹공에 놀라 물러서다가 시험해볼 심산으로 빠르게 일 장을 내질렀다. 헌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굉의 웅후한 내공을 담은 그 유명한 광표장법이 한순간 사라지는 게 아니겠는가? 무굉은 그저 입만 딱 벌릴 뿐이
었다. 분명 공력을 8성까지 끌어올려 후려쳤는데 채 그들에게 닿기도 전에 힘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양만
풍은 깜짝 놀라면서도 소리쳐 그를 도왔다.
"무 대협! 십이공진은 3명씩 짝을 지으면 굉장히 무섭게 변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쓴 건 이화접목의 수법이니
당황하지 마세요!"
확실히 그러했다. 양만풍이 본 대로 그들은 간단한 이화접목의 수법을 통해 무굉의 일 장을 무산시켜버린 것이다.
그의 일 장이 날아들자 진의 정면에 있던 3명은 각자 이상한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일 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고 여길 만큼 이상한 방향이었다. 한 명만 그의 손바닥 근처에만 갔을 뿐, 나머지 두 명은 각자 양쪽으로 검을 휘둘
렀다. 그런데 그 순간 광표장의 위력이 분해되듯 사라지며 그 힘이 사라져버렸다. 먼지를 불어 한순간에 흩어 없어
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거 참 괴상하네!"
무굉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재차 공격을 가했다. 세 번 공격을 더 하고도 계속
그러자 그때부터 그도 흥미가 돈 듯 했다.
"이것이 이화접목이라고?"
"그렇습니다! 저들이 강해진 것도 다 그 때문이니 조심하십시오."
양만풍이 고함쳐 대답하자 무굉은 웃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 웃음은 분명 재미 반, 비웃음 반이었다. 조덕은 대노했
다.
"뭐하고 있는 거냐? 어서 공격해!"
그는 주춤거리는 십이공진을 재촉했다. 허나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무굉이 움직였다. 빠르게 경신법을 펼쳐
접근하더니 다시 맹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십이공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서로의 실력을 알고 어
떻게 대처하는가 보는 그런 정도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굉은 자신이 이 진법을 깨트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고, 함종문은 무굉이라는 절정의 고수이자 목표를 만나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싸움은 쉽게 판가름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팽팽했다. 무굉이 한 수 공격하면 그들이 쉽게 와해하고 반격했고, 무굉
이 다시 피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강공을 펼치면 그들은 다시 막아내며 또 반격했다. 이런 주거니 받거니가 반
복되면 반복될수록 싸움은 점점 깊어지고 치열해졌다. 무굉도 이제 8성이 아닌 10성의 광표장법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모두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장차 천하제일의 진법으로 이름이 날지도 모르는 산중답십이공진을 맞아
혼자서 잘도 싸우는 무굉이 신기한 함종문. 그리고 오만하면서도 분명 막강한 무굉이 산중답십이공진에 고전분투
하는 걸 신기하게 여기는 감총방. 결국 놀라는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그 주체가 무굉이라는 점이 같았다.
가장 크게 놀란 인물이라면 역시 조덕이었다. 조덕은 설마 무굉이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다. 그는 분명 자신이 있었
던 것이다. 산중답십이공진의 힘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실력도 믿었다. 산중답십이공진은 그가 근래 수년 간 고안하
여 겨우 창안해낸 진법이다. 혼자서 할 능력은 못 됐는지 제자 중 가장 총명하고 지식이 많은 연경후와 함께 고안
했었다. 그는 완성한 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시험해본 후 그 위력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지금 무굉과 싸우는
이들에게 처음 가르쳤을 때도 혼자 맞붙어보니 도무지 깰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만들고도 깨기 힘들 정도라면 정말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물론 후에 파훼법을 찾아내서 스스로 깰 수는 있었다.
어찌되었건 그만큼 고생도 많이 했고 모두가 인정하는 막강한 진법이었다. 이 진법은 본래 연경후의 지식에서 나온
게 기반이 되었다. 산중답십이공진은 사실 이백의 시로 잘 알려진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을 기반으로 짜여진 것이
다. 방위 같은 건 하늘의 별을 보며 고안했지만 그 별들의 조화는 결국 산중답속인이었다. 이 진법엔 방위가 총 12
개다. 여(余), 소(笑), 화(花), 별(別), 서(棲), 이(而), 묘(杳), 천(天), 벽(碧), 한(閑), 거(去), 지(地)가 그것이다. 이 자
리를 12명이 각각 하나씩 맡고 좌우로 여섯 명씩 갈라서서 갈 지(之) 자의 모양으로 선다. 이때만 해도 위력은 굉장
하였다. 실제로 그냥 선 듯 보이지만 교차되게 섰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아 보인다. 또한 가장 요점은 이화접목을 부
합시켰다는 데에 있었다.
이화접목은 사부인 단목리에게서 오래 전에 전수 받지 않았던가? 함종문을 개파할 당시에도 그 이치를 확실히 깨닫
지 못하여 함부로 선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안 보여준 건 어쩌면 그의 조심스러운 성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리고 다시 수년이 흐르며 그는 드디어 이화접목을 깨달았다. 곧바로 제자들에게 가르쳐줬음은 물론이요, 이 진법을
만들고 부합시켜서 함종문이 사천 최고의 문파로 성장하게 하였다. 이처럼 이화접목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사
량발천근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화접목이다.
그리하여 이화접목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진 형태가 3명씩 짝을 짓는 것이었다. 12명이 그냥 방위만 밟고 서있
을 땐 이화접목의 힘이 크지 않다. 하지만 일단 정해진 조합 방위의 3명이 합치면 그 힘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서벽', '소이한', '화묘거', '별천지'의 방위였다.
이런 걸 알고 있기에 조덕은 웃을 수 없었다. 감히 미소조차 질 수 없었고 그저 딱딱한 얼굴에 입만 딱 벌려 그 싸
움을 지켜보는 수밖엔 없었다. 무굉은 과연 천하제일이라 큰 소리 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좀 멍청한 면이 있
지만 굉장히 오만한 만큼 그 실력은 분명 뛰어난 것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것들! 반드시 깨부수겠다."
난데없는 고함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무굉의 입에서 터진 말이었다. 그는 지금 대노하고 있었다. 스스로 천하제일
이라 자부했는데 이런 진법 하나 깨부수지 못한다니 자책감 반이요, 분노 반이었다. 남들이 그의 이런 생각을 안다
면 어떨까? 실로 실력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자존자대 무굉이기에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었다. 그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방 날뛰었다. 열화가 머리로 치솟아 정수리에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한순간 그는 공력을 11
성까지 끌어올려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이렇게 되자 조금 싸움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그 본연의 힘을 넘어서 필사적인 공력 11성으로 싸우니 그 힘은 가
히 천지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십이공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3명씩 짝을 지은 4개의 인간 덩어리가 그를 가운데
몰아두고 맹공을 펼쳤지만, 무굉은 11성의 공력으로 사방팔방 수십 장을 쏟아내 삽시간에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
들고 있었다. 다급해진 조덕은 서둘러 고함쳤다.
"여소벽 소이한 화묘거 별천지 순으로 공격하고 방위는 지켜서 몰아붙여!"
갑자기 또 십이공진의 공격력이 증대된다. 무굉은 크게 놀랄 따름이었다. 도대체 조덕이 지껄인 게 뭔 말인지 십이
공진의 공격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이화접목도 그 빛을 더욱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굉은 이대로라면 다시 원점이
라 생각했다. 하는 수 없이 12성 공력을 전부 끌어올렸다.
공력을 말함에 있어서 12성이라 하면 그건 단순한 공력만을 벗어나 진기를 포함한 것이다. 무공마다 10성 대성했다
니 11성 대성했다니 하는 것이 있듯, 공력이나 무공에서 몇 성이란 그 힘을 얼마나 쓰느냐를 말한다. 물론 다른 점
도 있었다. 무공에선 완성한 정도가 8성이라면 8성밖에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공력은 그 개념이 약간 달라서 언제
든 12성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누구든 12성까진 끌어올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11성부터는 단지 내공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있는 진기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므로 자주 사용하면 수명의 단축, 공력의 저하 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무굉이 12성까지 전부 끌어올린 걸 보면 진정으로 사생결단의 의도가 보이는 것이다. 무굉은 그
만큼 초조하기도 했고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는 팔십 평생 강호인의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패배는 매우 적었다. 그를
이긴 자는 달랑 두 명 뿐인데 그나마 그 중 한 명도 사부인 천무대협이었다. 그러니 무굉이 어찌 열 받지 않고 배
길 수 있으랴!
"우아아아!"
순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귀가 찡하고 머리가 어지러우며 내장이 다 뒤집히는 느낌에 절로 구역질이 나왔다. 이
대로 가만히 있다간 죽을지도 모를 정도라 하나같이 정좌하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무굉의 입에서 갑자기 미친 고함
소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굉은 십이공진과 싸우면서도 천지를 진동케 하는 고함소리를 내고 있
었다. 사자후(獅子吼)만큼 위력적인 이 음공은 지난날 진양 앞에서도 한번 선보인 적이 있는 광후대란, 그것이었다.
광후대란이 폭발하듯 나오자 십이공진은 순식간에 개판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함종문의 1대 제자들로 그 실력이
비범하다 하지만 어찌 내공에서 무굉을 따라잡겠는가? 당금 무림에서 무굉만큼 내공이 심후한 인물은 거의 없을 것
이다. 그리하여 십이공진은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다. 무굉은 광후대란을 펼치느라 자연히 광표장법은 엉망이 되었지
만, 그들은 이미 귀를 막고 비틀거리며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상태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굉의 간단한 손놀림에
도 그들 12명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결국 무굉의 승리인 것이다.
"우하하! 결국 또 내가 이겼군."
그는 그제야 악 지르기를 그만하고 웃어댔다. 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건 함종문이든 감총방이든 모두 광후
대란의 영향으로 운기조식을 하느라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무굉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이겼다는 기쁨에
연신 떠들어댔다.
"정말로 대단하긴 한 진법이야. 나한진하고 붙으면 재밌을 거 같다! 나중에 소림사에 쳐들어가서 붙어봐. 내가 보기
엔 나한진이 이기겠지만 아무튼 이 산중… 뭐라는 진법도 세니까. 물론 나는 못 이기지! 하하."
그의 웃음소리만 장내에 울릴 뿐 여전히 고요하다. 그는 또 말을 이었다.
"12성 공력을 끌어올리니 그제야 상대가 안 되더군. 12성을 끌어올려서 그냥 누를 수도 있었는데 너무 시간을 끌면
안 좋으니 이렇게 대처한 거야. 너희는 모두 공력이 일천해서 내가 광후대란을 반 각만 펼치면 모두 피를 토하고
죽겠지? 푸하하."
조덕 등 함종문의 안색이 잠깐 변했다. 그러나 운기조식 중이라 이내 평심을 되찾았다. 그들은 모두 무굉의 오만한
말을 들으면서 억지로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그가 짧게 끝낸 덕으로 모두 무사히 운기할 수 있었다.
"흥. 과연 자존자대로군. 아주 오만할만해."
운기를 마친 조덕이 일어서며 한 말이었다. 무굉은 웃는다.
"물론이지. 내 실력은 정말 대단하지 않느냐?"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치사한 놈!"
조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굉의 말에 거세게 따진 자는 다름 아닌 마보강이었다. 그는 광후대란으로 인해
아직은 약간 창백한 얼굴이었다.
"뭐라고! 내가 왜 치사해?"
"치사하지, 그럼 안 치사하냐? 실력으로 십이공진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런 사자후를 내뿜다니. 천하제일
이라고 자부하는 작자가 고작 그밖에 안 되나?"
사실 그의 말은 약간 억지가 있었다. 사자후든 광후대란이든 결국은 음공(音攻)으로 다 무공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
가? 꼭 치고 받는 게 싸움인 건 아니다. 이런 식으로도 승리를 거머쥘 수 있고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마보강은 사형들보다 경험도 적고 자존심이 크게 상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없었다. 옆에서 듣던 연경후가 말린다.
"마 사제. 음공도 무공이니 그를 탓할 순 없는 거다. 우리들이 약한 걸 탓해야지."
"사형. 하지만 비열하지 않나요? 보아하니 자존자대도 사력을 다한 것 같던데 하다가 안될 것 같으니까 그런 수작
을 부린 거라고요. 우리 동문들은 젊어서 내공이 부족하고 그건 우리 동촉삼속도 마찬가진데, 그걸 알고 자존자대가
수작을 부린 겁니다!"
"어쩔 수 없다… 우린 패했으니 할말이 없어야 한다."
마보강은 또 뭐라고 따지려고 했다. 그러나 조덕이 눈치를 주자 입을 꼭 다물었다. 조덕은 천천히 걸어나와 무굉을
향해 말했다.
"자존자대의 무공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군. 설마 산중답십이공진까지 깨부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음공에 당한 거
니 많이 칭찬할 것도 아니겠지."
"뭐가 어쩌고 어째? 음공은 무공이 아니냐?"
무굉이 바로 맞섰다. 조덕은 웃으며,
"물론 무공이지. 하지만 상황이 그러하니 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음공을 쓴 것이다."
"웃기지 마라! 내 12성 공력을 전부 끌어올리면 너희를 누를 수 있다."
"12성이건 11성이건 상관없다. 어쨌든 넌 음공으로 우릴 공격한 게 아니냐?"
무굉은 말이 턱 막혔다.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방방 날뛴다.
"정말 난 이길 수 있어!"
"그럼 또 해보자. 정녕 이길 수 있다면 이번에도 이길 수 있겠지."
"좋다!"
조덕이 희미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던 양만풍은 별로 좋지 않음을 느끼고 급히 막아섰다.
"조 장문! 일파의 장문인이 한번 패했으면 인정할 줄 아시오!"
"양 방주는 왜 나서는 거요? 난 당신들에게 볼일이 없고 자존자대에게만 볼일이 있소. 그가 응하니 제대로 한번 붙
겠다는 건데 왜 말리시오?"
양만풍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이 조덕은 벌써 제자들에게 명을 내리고 있었다. 이번엔 동촉삼속이 직접 나
서며 남은 아홉 방위는 방금 싸웠던 1대 제자들이 맡았다. 결과적으로 달랑 3명만 바뀐 셈이다. 하지만 그 힘은 무
시할 수 없었다. 이미 동촉삼속은 명성만큼 실력도 뛰어난 인물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양만풍은 갑자기 걱정이 됐
다.
"무 대협. 맞서지 마십시오. 한번 이겼는데 뭐 하러 또 붙습니까? 무 대협은 이미 산중답십이공진을 격파한 것입니
다."
"아니야, 아니야! 저들이 내가 비열하게 이겼다고 하는데 어찌 물러난다는 거냐? 확실히 이번에 깨부숴서 잔말을 못
하게 만들어야지."
본디 무굉이란 이런 인물이다. 양만풍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더 말릴 수가 없었다. 허나 이대로 붙는다면 명백히
불리하다. 그는 아까 싸울 때도 알았다. 무굉이 안색이나 태도로 보아 전심전력 다한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 쉽게 이기지 못하여 광후대란을 펼친 게 뻔한데 또 싸운다니? 하물며 동촉삼속도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무굉의 뜻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미 포진한 십이공진에 맞서서 벌써부터 쌍장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대격돌이 일어날 상태였다. 무굉은 초반에 확실히 끝장을 보려는 듯 땅이 울리도록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가 12성을 단숨에 끌어올렸다는 건 그가 밟은 땅이 가라앉고 저절로 바람이 분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안 돼. 무 대협은 저 진법을 깨부술 수 없어. 설령 깨부순다 해도 진기까지 소모하여 큰 피해를 입을 것이야. 그때
가 되면 조덕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저들의 수는 많은데 무 대협이 싸울 수 없게 되면 결국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게 아닌가? 말려야 하는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벌써 무굉이 공격에 나섰다. 이번엔 광표장법을 쓰지 않고 백타권으로 정면에 있는 사원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다. 그러자 사원은 슬쩍 피하고 연경후와 마보강이 양옆에서 검을 내질렀다. 다른 1대 제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발검하여 무굉의 움직임을 철저히 묶고 있었다.
헌데 그때,
"아미타불."
갑자기 들려온 이 웅후한 음성. 이 소리를 낸 자는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무굉만큼 내공이 뛰어난 자가 낸 소
리인 듯 저절로 속이 거북해지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하지만 무굉과는 뭔가 다르다. 무굉의 음공이 천지를 진동하고
내장을 뒤집는 그런 광적인 음공이라면, 이 음성은 좀 더 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은은히 내상을 입게 할만한 그런
음공이었다.
무굉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건 이때였다. 그는 십이공진과 맞서다가 그러더니 난데없이 몸을 내뺐다. 십이공진에
빠지면 원래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으나 그들 역시 이 은은한 음공에 잠시 주춤거렸던 것이다. 무굉은 순식간에 몸
을 내빼고는 빠르게 양만풍 뒤편으로 이동했다. 아니,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