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十 八 章. 혈해(血海)속의 강호 3
모두의 시선이 돌려진 곳은 감총방 대문이었다. 그곳엔 물론 중이 있다. 맨 앞에서 합장하고 자아한 미소를 짓는 중
과 오른쪽에 험악한 인상으로 째려보는 중, 그리고 그 뒤로 수행승쯤으로 보이는 두 젊은 중이 서있었다. 이들은 모
두 소림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정면에 있는 중은 하얀 눈썹을 가지고 있어서 흡사 삼국시대 인물 백미
(白眉) 마량(馬良)을 떠올리게 했다.
헌데 지금 이곳에 모여 소림사 승려들을 바라보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하고 불
호를 외운 자가 소림사 승려라는 건 사실 신기할 게 못 된다. 그쯤이야 고개를 돌릴 때 대강 짐작을 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놀라고 있는 이유는 딱 잘라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백미 승려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하얗디하얀 눈썹에 매우 인자한 얼굴은 청청인도로 소문난 용정학
만큼이나 인(仁)을 중히 여길 것 같았다. 하기야 강호에서 백미방장(白眉方丈) 운무를 모르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
다. 백미방장은 운무의 별호고, 운무는 소림사 방장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 탄지신통과 일지선공(一指禪
功)을 유명해진 바 있어 지공백미(指功白眉)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 오랫동안 강호에 나온 적이 없었기에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만 것이었다.
놀란 이유의 두 번째로 말하자면, 첫 번째 이유보다 더 놀랐으면 놀랐지 덜하지는 않을 정도다. 본디 승려는 여인과
함께 있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사실 속세를 떠난 몸이라 그다지 신경 쓰는 정도는 아니지만, 대체로 여자와 동행하
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헌데도 함께 있는 젊은 여인이 있다면? 하물며 그것도 그냥 여인이 아니라 흡사 제
갈공명 같이 사륜거(四輪車)를 타고 나타난 여인이라면? 바로 그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나타난 사람은 모두 다섯인
데 중은 네 명이고 그들로 둘러싸인 한 명은 이제 겨우 20살이나 넘겼을 듯한 여인이 아닌가! 그 여인은 그다지 아
름답다고 할 순 없지만 나름대로의 미색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운무의 바로 뒤에 있으니 완전 제갈공명과 마량
같아 신비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그 여인에 있어 한 가지 안 좋은 점을 꼽으라면, 모두가 그녀의 슬픈 얼굴
을 꼽을 정도로 매우 우수에 젖어있었다.
그들의 어리벙벙하고 놀란 작태에 운무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옆에 있던 흉악하게 생긴 중은 그 답답한
기운을 참지 못한 듯 하다. 이 고요한 전내 기운에 저 혼자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더니 급기야 좌중을 보며 고함치
고 말았다.
"뭐요, 당신들! 언제 꿀이라도 한 사발 드셨나?"
이쯤 되면 모두가 한번 더 놀라야 한다. 지금 고함친 자의 말투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수도하는 중의 말
투가 아니었다. 생긴 건 꼭 도둑놈 같이 생겨서 양만풍에 비할 만 하지만, 알게 모르게 풍기는 흉악함은 양만풍 따
위에 비견될 게 아니었다. 비유를 하자면 산 도적을 넘어선 살인마 정도가 풍기는 흉악한 기운이라고나 할까? 모두
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의 정체도 간파할 수 있어 놀라는 세 번째의 이유를 만들 수 있었다. 소림사
에서 저만큼 흉악하고 성질 급한 인물은 단 한 명, 운무의 사제로 유명한 운화다.
한번에 세 가지 놀라움을 접하니 모두가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건 양만풍이었
다. 그가 빨리 정신을 차린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은 한 걸음 나서서 읍하고 예의를 갖추었다.
"양만풍이 소림사 대사님들을 뵙습니다."
운무가 편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지난날 난주 최고의 문파로 유명한 감총방 방주가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젊은 시주가 방주직을
맡았구려.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감축 드리오."
"별 말씀을요."
양만풍은 그들이 나타난 이유를 물어보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여인을 보며 기쁨에 찬 얼굴로 막 말
을 걸려고 했다. 그때 먼저 방해한 인물이 있었으니 물론 흉악한 운화였다.
"아니, 너는? 네놈이었구나!"
운화의 얼굴은 또 시뻘게지고 말았다. 양만풍과 그는 일전에 마주한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양만풍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척을 하려고 했다. 다만 먼저 여인과 아는 척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을 본의 아니게 막은
운화는 지금 양만풍이 그때 진양과 함께 자신을 놀렸던, 바로 그 양만풍이라는 것을 알고 펄쩍 뛰었다.
"감총방 방주의 이름이 양만풍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네놈일 줄이야."
"운화 대사.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때는 본의가 아니었고 이미 다 끝난 일이니 후배를 용서하십시오."
그의 말에 운화는 냉소했다. 운무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를 아느냐?"
"아, 아닙니다. 그냥… 지난번에 좀 본 적이 있을 뿐입니다."
"또 무슨 일을 벌였었구나."
"사형, 아무 일도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해도 큰 일은 아니었을 테니 생각하지 마세요."
문득 운무가 웃는다. 지금 운화는 스스로 말실수를 한 셈이다. 정녕 아무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게 큰 일인지 아
닌지 단정지어 말하겠는가? 운화도 곧 스스로 깨달아지는 바가 있는 모양인 듯 금새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이
런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거의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 모습은 불같은
운화도 운무 앞에선 꼼짝을 못한다는 소문에 확실히 부합하고 있었다.
양만풍은 아까부터 보고 있던 그 사륜거에 앉은 여인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다. 어느덧 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
만 그 소녀 때의 얼굴 형태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양만풍은 도저히 기쁨의 웃음을 참아낼 수 없었다.
"란아! 너 형란 맞지?"
그녀는 우수에 찬 얼굴로 억지 미소했다. 곧 두 손을 모아 읍하며 입을 열었다.
"양 대협, 오랜만이에요. 몸이 불편해서 예를 못 갖추니 이해해주세요."
"예는 무슨 예! 상관없다. 난 네가 무사한 걸 안 것만으로도 기쁘기 짝이 없구나."
양만풍은 들떠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평소 근엄한 모습과 그런 기도를 풍기던 양만풍과는 심히 어울리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감총방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나타난 여인은 양만풍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양, 형란
중 바로 형란임을 말이다. 그가 그렇게 찾아 헤맨 것도 어언 5년이다. 그동안 북망채의 궤멸, 함종문과의 시비 등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는 한시도 진양과 형란을 잊지 않았었다. 오히려 진양과 절교했던 것만 잊었고 그들 둘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이런 사실을 조덕 등이 알 리가 없다. 조덕은 속으로 그가 한 방파의 방주로서 체통 없이 군다고 비웃었다. 그건 함
종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형란은 미소하며 양만풍과 만난 것을 좋아하더니 곧 운무를 향해 말했다.
"대사님. 저 분은 저의 은인이에요. 진 대형과도 절친한 친구사이죠."
"나도 알고 있네. 친구를 살리기 위해 방내 제자들로 하여금 북망채에서 직접 구해주었던 사실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함종문과 싸우는 이유도 그 친구의 의형인 무굉을 지켜주려는 것이고 말일세."
운무는 그동안 강호에 안 나왔으면서도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하기야 정말로 현 강호에서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
는 거의 없었다. 특히 양만풍과 진양이 사실 절교했지만 끝내 친구가 걱정된 양만풍이 사람을 보내 구해주었다는
얘기. 이걸 모르는 자는 먹통으로 불릴 만 했다. 양만풍은 잠시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예를 표하고는 전말을
듣고 싶어했다. 역시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궁금한 것은 형란의 그동안 사정이다. 그 5년 간 뭘 어쩌고 지냈기에
연락도 없다가 이제야 갑작스레 소림사 고승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궁금증은 꼭 그에게만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조덕 등도 형란의 등장엔 별로 관심이 없으나 소림사가 갑자가 나타난
이유는 매우 궁금했다. 정황을 들어보니 이랬다.
형란은 당시 진양과 떨어져 서쪽으로 도망쳤다. 북망채의 맹추격은 계속 되었고 때문에 함께 가던 감총인 두 사람
도 죽임을 당했다. 그때 형란을 업고 도망친 사람은 한마일이었다. 한마일은 서쪽으로 도망쳐서 난주까지 갈 계획이
었으나 중간에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고 말았다. 막은 자는 놀랍게도 감총방의 복차경이 아닌가? 한마일은 그의 속
내를 알고 대노했지만 그 자신 또한 부상을 입었고 복차경의 무공은 그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쪽으
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천을 돌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난주까지 갈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북망채는 정
말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아예 사천까지 따라 들어와 그들을 잡으려고 용을 썼다. 한마일은 하는 수 없이 작전을 세
웠다. 갑자기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계책은 잘도 들어맞아 그야말로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 확실히 입증시켜주었다.
한마일은 일단 동쪽으로 도망쳐서 한동안 쉬다가 난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는 형란이 낙양 출신이라는 걸 알
고 있었다. 낙양이 북망채와 가깝지만 설마 그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 낙양에서 지내면 안전할 거라
여겼다. 이때까지도 형란은 기절한 상태였다. 보혈(補血)하는 약을 먹여서 그나마 살아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었다. 한마일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 숭산에 도달했다. 그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그
녀를 업고 도망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안전한 곳에 두고 죽기라도 해야하는데, 그는 결국 숭산의 한가운데 쓰러져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그리고 형란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소림사 중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아! 그럼 대사님들이 너를 치료해주었구나."
쭉 듣고 있던 양만풍이 손뼉을 쳤다. 곧 운무 앞으로 가며 깊이 읍 한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아미타불. 빈승이 도움이 됐다면 기쁠 뿐이오."
형란이 그들 모습을 보며 살짝 웃는 것을 보고 양만풍은 신기하게 여겼다. 본래 형란은 잘 웃고 또 잘 울지만 지금
처럼 여유로운 여자는 아니다. 지금 형란의 모습은 예전과는 꽤나 상반돼있었다. 아까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다. 예
전의 형란 같으면 양만풍을 보자마자 먼저 기뻐하며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기뻐하는 양만
풍을 침착하게 대했고 지금도 그렇지 않는가? 그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쭉 설명해주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형
란은 뭔가 이상하여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많이 바뀌었구나. 아직도 말을 더듬고 바보 같은 건 사실이지만 뭔가 침착해 보여. 바뀐 게 얼굴에 우수가 깔린 것
뿐은 아니겠구나.)
양만풍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형란은 말을 잇고 있었다.
"운무, 운화 대사께서는 저를 치료해주시고 이곳까지 데려다주신 거예요. 다리는 이미 치료가 불가능해서 어쩔 수
없이 사륜거를 타고 왔지요."
"그 치료를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린 거냐?"
"그렇죠. 3년이나 걸렸어요."
양만풍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완치하지 못하고 앉음뱅이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무슨 3년씩이나 걸린단 말인가?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운무를 쳐다보자 그는 불호를 외우며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소. 나는 의술을 배운 적이 있었으나 여시주의 다리 근맥이 잘린 건 치료할 수가 없는 거였소. 해
서 대강 보혈하고 작은 상처들만 치료했는데 그것만 끝내면 이미 4년 전에는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을 거요."
"그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늦으신 건가요?"
"상심."
운무가 잘라 말하곤 다시 합장하며 눈을 감는다. 형란은 다시 우수에 젖어들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양만풍은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진양과 헤어져서 도망쳤다고 하니 그때 슬픔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게 분명하다. 결국 4
년이나 늦게 온 건 그녀의 마음을 치료해주느라 그랬던 것이다.
"그동안 불경을 외우게 하고 마음을 편히 다스리도록 했지요."
운무는 보충해주듯 짧게 말해주었다. 양만풍은 그제야 모든 전말을 알 수 있었다. 문득 뒤에서 유호가 말을 걸었다.
"복차경을 데려왔습니다."
양만풍의 눈이 갑자기 번뜩였다. 그는 홱 고개를 돌려보고는 복차경을 째려보았다. 복차경은 지금까지 이들 함종문
에 맞서려 나와있지 않았다. 그는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당시 형란을 가로막아 위기에
빠지게 했다는 걸 깨달은 유호가 대노하여 그를 강제로 데려온 셈이다.
"복차경. 내 그동안 당신의 자리를 뺏었다고 생각해서 많은 배려를 해주었는데 설마 그런 짓을 벌였을 줄이야?"
유호의 왼손은 이미 복차경의 완맥을 움켜쥐고 있었다. 갑자기 유호가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 절로 무릎꿇게 만들었
다. 복차경은 완전히 겁먹은 얼굴로 덜덜 떤다.
"바, 방주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막은 건……."
"닥쳐라! 쓸데없는 변명은 집어치고 왜 그녀를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던 건지나 말해."
양만풍은 쌍심지를 키고 있다.
"그, 그게… 그건……."
"이놈이? 빨리 안 말해?"
성질 급한 유호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양만풍은 그를 말리며 몸을 움츠렸다. 복차경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다시 물었다.
"왜 그녀를 막았지?"
"그게… 사, 사실은……."
"사실은?"
"제가 미쳐서… 바, 방주님의 명성을……."
복차경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말을 더듬더듬 해댔다. 하지만 양만풍은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아니, 지금 그
말만 들었으면 됐고 뒤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네놈이 나의 명성을 깎기 위해 그녀를 구출하지 못하도록 막았구나. 그럼 내가 감총방 제자들로 하여
금 진양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처음 낸 것도 네놈이겠지?"
복차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복차경은 원래 용상의 제자로 성품도 좋지 않고 생각도 짧으면
서 매우 간사하지만, 무공 실력은 제법이었다. 허나 그는 양만풍이 나타난 이후로 되는 게 없었다. 그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기도 했고, 용상이 완전히 양만풍의 기개에 빠져 그에게 방주 자리까지 넘겨주고 말았다. 복차경이 기다리
던 건 그 방주 자리이거늘 같은 방파 제자도 아니고 난데없이 나타난 자에게 빼앗겼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는
가?
그는 당시 양만풍이 전효와 한마일 등으로 하여금 진양을 도우려 한다는 걸 알아챘다. 또한 그들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착용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이게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들 신분이 만일 탄로 나면 강호에 양만풍
에 대한 악담이 나돌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한번 절교한다던 자가 그런 수법으로 진
양을 구하려 한다는 거니 이야말로 최고의 순간이라 여겼다. 거기에 만일 구해오지도 못하고 들통까지 난다면? 참
할말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마침 도망쳐 오는 한마일을 막고 공격했던 것이다. 비록
놓쳤지만 상관은 없다.
그러나 양만풍은 그 소문이 제대로 나돌기도 전에 불안한 나머지 강호인들을 규합하도록 했다. 북망채는 만 명 강
호인의 적이니 반드시 궤멸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양만풍에 대한 그런 소문은 더욱 좋은 뜻
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그와 함종문이 연합해 북망채를 궤멸시키면서 한층 더 빛을 발했다. 결과적으로 복차경은 그
를 깎아 내리려다가 오히려 높이 치켜준 셈이 되었다.
양만풍은 모든 사실을 알고 대노했다. 자신에 대한 건 어찌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형란을 구해오는 한마일까지 막
다니 그건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한마일은 난주로 갈 수 있음에도 그에게 막혀 숭산까지 갔다가 죽고 만 게 아닌
가!
"그럼 네놈이 한형을 죽인 셈이 되겠구나."
"바, 방주님… 부디 선처를……."
"뭐가 선처란 말이냐? 난 네놈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어서 네가 날 따르지 않는 걸 알면서도 굳이 괴롭히지 않았는
데… 어찌 이럴 수가? 너 같은 배은망덕하는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한형 같은 호인이자 동문을 죽게 만든 너 같은
놈은 가만둘 수가 없다."
양만풍은 그를 단숨에 때려죽일 심산으로 높이 손을 쳐들었다. 운무가 놀라 말리려던 찰나 먼저 막는 사람이 있었
으니, 형란이다.
"양 대협. 참으세요. 자고로 인(仁)이 훌륭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어요."
"란아, 넌 이놈 때문에 죽을 뻔했고 한형은 죽었어!"
"복수는 또 복수를 낳고 은혜는 다시 은혜를 낳아요. 차라리 그를 용서해주면 그가 감복하여 훗날 보은할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어요?"
역시 예전의 형란이라면 할 수가, 아니 할 수조차 없는 말이다. 용서해주면 감복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좀 단순한 생
각이긴 했지만 어쨌든 형란은 변해있었다. 허나 양만풍은 그를 용서할 맘이 없었다. 한마일이라면 방주가 된 후에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다. 전효도 그렇고 그들은 둘 다 능력이 뛰어났다.
"그건 네가 이 복차경이란 놈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놈은 벌써 배은망덕하지 않았느냐? 내가 여기서 또 살려준
다 해도 그는 다시 배은망덕하고 결정적인 일을 저지를 것이다."
"양 대협. 좋게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만일 그가 막지 않았다면 전 이렇게 깨끗이 치료될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운무, 운화 대사 같은 좋은 분들도 알게 되었고 말이에요."
"하지만 네 다리는……."
양만풍은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언뜻 보면 그냥 사륜거에 앉아서 편하게만 보이지만 잘 보면 그녀
의 다리에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란이 미소를 지었다.
"다리는 이미 북망산에서 망가졌어요. 진 대형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튼 저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를 용서
해주세요."
그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허나 그냥 살려줄 순 없었다. 그는 복차경을
감옥에 1달 간 가두고 개과천선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한 이후에 감옥에서 나와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도 놓았다. 복차경은 그저 살아남은 게 기쁠 뿐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차경은 양만풍과 형란에게 돌아가며 인사를 했다. 곧 감총 제자들이 그를 끌고 데려간다.
조덕은 지금까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모두 끝이 난 듯 싶으니 자신들과의 일도 끝을 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무굉이 잘 안 보여 찾아보니 저 감총방 제자들 뒷구석에 움츠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어
이가 없어서,
"이보시오, 자존자대. 게서 뭐 하는 거요?"
순간 무굉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얼굴이 새빨개진다. 마침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가니 무굉은 참 불쌍할 정
도로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몸을 홱 돌리고 달아나려 했다. 조덕 등은 기가 막혀 입만
딱 벌린다.
"무 시주는 어딜 가시오? 내가 출가했다고 무시하는 거요?"
운무가 웃으며 한 말에 무굉은 흡사 얼음처럼 한순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한 발자국도 더 떼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운무가 다시 말했다.
"무 시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인사도 없이 가버릴 참이오?"
그 말에 무굉은 잠시 움찔하더니 곧 손을 들었다. 몸은 돌리지도 않고 오른손만 들어 인사하듯 손짓하고는 다시 빠
르게 도망치려고 했다. 운화가 버럭 고함친다.
"방장사형께 그 무슨 태도냐?"
운화의 몸은 이미 무굉의 머리 위로 날아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인지 들고 있던 거대한 반룡장
으로 무식하게 무굉의 정수리를 후려칠 기세였다.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무굉은 멋진 무공을 선보였다. 갑자기 정지
하듯 멈춰 서고는 왼손으로 반룡장을 살짝 받히고 오른손으로 운화의 머리통을 잡아 앞으로 던져버리는 게 아니겠
는가? 과연 자존자대는 자존자대다.
"이놈! 넌 뭐라고 날 막아?"
그러면서도 끝내 등은 돌리지 않는 무굉이었다. 애당초 운화를 앞에다 집어던진 것도 뒤를 돌아보기 싫었던 것 같
았다. 운화는 얼굴이 시뻘게져 악을 썼다.
"방장사형이 부르잖느냐? 예의를 지켜라!"
"네까짓 놈이 무슨 상관이야!"
"사제니까 상관한다."
무굉은 말문이 막혀 멍청히 서있었다. 잠시 후에야 또 호통쳤다.
"아무튼 비켜라. 안 비키면 빛나는 머리통을 백타권으로 때려주겠다!"
"이놈이?"
운화는 대노하여 무굉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무공은 지난날 양만풍이 본 적이 있듯 대단했다. 반룡장 같이 거대하고
묵직한 지팡이를 들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는 듯한 저 작태는 흡사 지난날 마녀로 불리던 금녀와도 같았다. 그는 이
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일순 무굉의 허리에 반룡장을 후려쳤다.
"죽고 싶으냐?"
노하긴 무굉도 마찬가지. 그는 몸을 펄쩍 띄우더니 양손으로 땅을 짚고 양발로 날아오는 반룡장을 밀어 차듯 날려
버렸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반룡장이 날아오며 내는 무식한 굉음만 봐도 그 위력이 절실히 느껴지
는데, 그걸 저런 괴상한 자세로 걷어 차내는 무굉의 양발은 더 위력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 자세는 힘센 말
한 마리가 뒷다리로 사람을 때리는 것 같았다.
"멋진 노마강퇴(怒馬强腿)!"
지켜보던 운무가 찬사를 보냈다. 양만풍은 큰 의문을 느껴 그에게 물었다.
"무 대협이 저런 무공도 알고 있었습니까?"
"양 방주는 그가 천무대협의 제자라는 걸 모르고 있소? 천무대협의 무공은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 힘들 정도라오.
노마강퇴는 지난날 그가 펼치는 걸 한번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소."
양만풍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천무대협이 수많은 무공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노마강퇴 같은 해괴한 무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문득 또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 대사님. 헌데 무 대협은 어떻게 저런 많은 무공을 익힐 수 있었을까요? 무공을 많이 익히고 대성하려면 아무
래도 총명해야……."
운무는 그의 뜻을 알고 웃는다.
"무 시주가 말하길, 천문여협이 함께 지도를 해주었다고 하더구려. 천문여협은 말솜씨가 좋고 두뇌가 굉장히 뛰어나
서 아마 무 시주가 빨리 깨우치도록 도와주었을 거요."
양만풍은 그제야 무릎을 치며 전말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무굉은 천무, 천문의 가르침을 받은 최고의 행운아다.
그 사이에도 싸움은 진행되고 있었다. 양만풍이 보니 운화가 확실히 밀리고 있었다. 공격은 대부분 운화가 하지만
무굉은 모두 간단히 제압하고 한 수 한 수 내미는 것이 매우 치명적이었다. 운화의 무공들은 소림사에서 대대로 내
려오는 절학들인데 무굉의 앞에 서니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런 무굉도 손쉽게 운화를 물리칠
순 없었다. 운화가 미친 듯이 달려들어 꼬리를 물고 넘어지니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무굉은 더 참을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운화의 따귀를 연달아 다
섯 번이나 후려갈겼다. 운화가 어지러워 할 때 다시 빡빡 깎은 머리통을 때리고 이어서 노마강퇴의 수법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 찼다.
"비켜!"
"무 시주. 끝내 그냥 갈 참이오? 한번 얼굴이라도 봅시다."
무굉은 이제 멈추지 않았다. 운화를 쓰러트리고 맹렬히 달리며 운무가 한 말도 듣지 않는 듯 했다. 운무는 웃으며
일순 몸을 날렸다. 빠르게 세 발짝 달려나가 작은 바위 하나를 밟고 몸을 띄운다. 꼭 날아가는 것처럼 군웅들을 지
나 무굉의 정면을 가로막고 말았다.
"일위도강(一葦渡江)?"
이런 동작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무굉만한 내공이 있든지 아니면 대단한 절정고수가 뛰어난 신법을 익히고 있든지
해야만 했다.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가만히 지켜보던 조덕이 놀라 경호성처럼 지른 말은 군웅들이 한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운무는 일단 무굉의 정면을 가로막고 미소했다.
"함종문 조 장문의 견식이 대단하구려. 그렇소, 이건 본파의 일위도강 신법이라오."
일위도강은 소림사에서도 대단히 뛰어난 신법 중 하나로 꼽힌다. 도약법(跳躍法), 비행공(飛行功), 연대구품(蓮臺九
品) 등등 여러 신법들과 함께 일위도강은 상당히 뛰어난 신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중 일위도강이 다른 것보다
높게 평가받는 것은 익히기 힘들다는 게 첫째 이유요, 도약법보다도 빠르다는 게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조덕은 단목
리에게 무공을 배울 적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단목리는 말끝마다 소림사하고는 웬만해선 적대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소림사를 높게 평가했었다.
운무는 더 이상 조덕을 보지 않고 바로 무굉을 쳐다보았다. 무굉은 완전 얼어있었다. 입을 딱 벌리고 새파래진 안색
으로 식은땀까지 흘렸다. 이런 광경은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천하제일이라고 방방 날뛰는 그가 갑자기 운무
앞에선 그야말로 고양이 앞에 생쥐 꼴이 아닌가?
"고, 고홍(高洪). 오랜만이야……."
"무 시주는 아직도 날 그렇게 부르는구려. 하긴 나도 아직 무 시주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이, 이봐. 그거 꼭 지켜야 하는 건가? 우린 친군데……."
운무는 자애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물론 무굉에겐 흉악한 마귀의 살인미소였다.
"내가 비록 출가했지만 우리가 친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거요. 그러므로 친구를 위하는 내 마음도 무 시주가
이해해야 하오."
"잠깐잠깐. 그건 절대로 날 위하는 게 아니야… 제발 나를 내버려둬."
"무 시주,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오. 아까 형란 형 여시주가 말했듯이 인이야말로 훌륭한 사람을 만들 수 있기
도 하고 말이오. 무 시주가 마음을 가다듬고 나와의 약속을 지킨다면 모두가 무 시주를 칭찬할 거요."
무굉은 울상을 지었다.
"그럼… 하지 않으면?"
"모두가 욕할 거요. 신의 없는 인간이라고……."
양만풍 등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무굉 같은 인물이 소림사 방장이라고 저리 겁을 먹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옛날에 그들이 친구였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저리 겁먹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 보아
하니 아무래도 무굉이 운무에게 약점을 잡힌 것 같았다.
"무 시주. 자, 갑시다."
"안 돼! 나를 제발 내버려둬. 그 약속을 지키면 내 남은 몇 년 인생은 어쩌고!"
"무 시주는 강호에서 자존자대라 불리잖소? 본디 진정으로 귀하고 큰 인물이면 약속을 지킬 줄 알아야하오."
이때 무굉의 꼴은 참으로 말이 아니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인양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기어코는 승낙하지 않았다. 지
켜보는 양만풍은 더더욱 궁금증이 연기처럼 피어올랐지만 무엇보다도 무굉이 안되어 보였다.
"운무 대사. 대체 무슨 일인지요? 무 대협은 진양의 의형이니 저도 알면 좋겠습니다."
"과연 친구를 아끼는 양 방주의 마음은 그 의형에게까지 번지는구려."
운무가 돌아서서 대답하는 동안 무굉은 잽싸게 양만풍 등뒤로 숨었다. 그야말로 가관이 아닌가?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트릴 만 했다.
"무 시주. 그게 뭔 꼴이요?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거요."
"그… 그건……."
결국 양만풍 등뒤에서 나온다.
"고홍. 우린 친구잖아. 제발 나를 내버려둬. 다음부턴 잘 하고 다닐게."
"무 시주는 약속을 잘 지키잖소? 하지만 나와의 약속은 안 지키고 아예 도망을 치더니, 아직도 거만하며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들었소. 내가 강호에 나온 것도 사실 그 때문이오."
양만풍이 웃으며 말한다.
"운무 대사.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천천히 논하도록 하죠. 함종문과의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무 대협도 원하지 않으니 저도 천천히 알아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양 방주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구려."
운무는 그 말을 끝으로 한 발 물러섰다. 양만풍은 옆에서 무굉이 쉬는 안도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허나 조덕은 문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어쩔 수 없게되는 거요? 무굉이 소림사 방장의 친구며 또 데려가려 하니 내가 죽일 수가 없겠구
려. 결국 함종문은 이제 감총방에 더불어 소림사와도 맞서게됐군."
"흥. 은근히 운무 대사가 끼어 들지 않길 바라는군. 어찌되었건 간에 무 대협을 죽이려는 이유가 전대의 원한을 갚
겠다는 건 말이 안 되오."
"왜 말이 안 되오? 만일 양 방주의 사부가 떠나시기 전에 누구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양 방주는 따르지 않을 수 있
소? 사부는 부모님과 같소."
양만풍은 할말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양만풍에게도 만일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
문이다. 허나 무굉을 죽이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무굉의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함종문 역시 막강해서 합해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소. 이미 말했듯 무 대협은 나의 절친한 벗인 진양의 의형이요. 당신 같으면 누군가가 당신 친
구의 형을 죽이겠다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거요? 더욱이 그 형은 마침 당신이 존경하는 분이라면?"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군."
"그럴 거요."
그들은 서로 냉소를 머금었다. 다시금 싸우려는데 문득 운무가 불호를 외운다.
"아미타불. 두 시주는 진정하시오."
"소림사 방장께선 막을 생각이오?"
조덕으로선 이미 짐작한 상황이었다. 무굉이 운무의 친구인 것도 그렇고 본래 운무가 인이 많은 인물이라 필시 막
을 거라 생각했었다. 운무가 답한다.
"막을 수밖에 없을 것 같소. 한쪽은 죽이려는 쪽이고 한쪽은 막으려는 쪽이니 역시 죽이려는 쪽이 한 발 물러서면
좋을 것 같구려."
"흥. 난 소림사 방장이 있다고 겁먹지 않소. 사부님께서도 소림사의 무공은 뛰어나니 함부로 맞서지 말라고 하셨지
만, 사부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니 설령 함종문이 멸한다 해도 난 싸울 거요."
조덕의 의지는 확고한 듯 했다. 운무가 잠시 대답이 없는 틈에 운화가 씹어뱉듯 내뱉었다.
"건방지군!"
"내가 건방지건 말건 운화 대사가 뭔 상관이오? 소림사가 이처럼 남의 일에 끼어 들다니 참 어이가 없군."
"이놈이? 죽고 싶으냐?"
운화가 분노하자 운무는 그를 말리며 대신 입을 열었다.
"빈승의 사제는 성질이 급하니 이해해주시오. 빈승이 한번 더 말씀드리건데 살생은 나쁜 거요. 오면서 들으니 함종
문과 감총방의 싸움으로 서로 사상자가 많다고 들었소. 한 걸음만 양보하면 많은 사람이 죽지 않을 수도 있소."
"내가 공격하는 쪽이니 결국 내가 양보하란 말이오?"
"그렇소. 개인의 한을 풀자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건 천인공노할 일이요."
"난 무굉 한 명만 죽이면 되는 거요. 감총방이 막아서니 그런 거지."
"양쪽 다 양보할 기미가 안 보이는데 결국 내버려두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게 아니겠소? 이 일이 끝나면 수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그들은 한을 가질 것이오. 마치 조 장문의 사부가 가졌던 그런 한처럼 분노하고 이를 갈 거요.
나중에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원수를 갚겠다며 함종문을 칠 것이고, 함종문에서 죽은 사람과 연관이 있는 사람
들 역시 원수를 갚겠다고 또 싸울 것이오. 이것이 응보요. 곧 죄악이오."
조덕은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듯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요?"
"……정히 그렇다면, 한 가지 나은 방도가 있소. 그나마 살생을 줄이고 정정당당히 사부의 한을 풀 수 있을지도 모
르오."
"정정당당이라 하는 걸 보니 나와 무굉만 붙으라는 얘기로군."
운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방법이 최선의 방책이오. 빈승은 소림사 방장으로서 이 일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소. 복수를 위해, 한을
풀기 위해 살생하는 건 매우 나쁜 일이오. 대의를 위한다면 친족도 멸할 수 있다지만, 개인의 한을 풀기 위해 무작
정 살생을 벌이는 건 옳지 않소. 벌써 죽은 자가 몇 명이오? 부상당한 이들도 많다고 들었소. 은혜는 은혜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으니, 조 장문이 반드시 사부의 한을 풀어드리겠다면 이 방법이 최선의 방책이라 여기오."
조덕은 이번에도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자연히 장내엔 정적감이 감돌았다. 그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역시 살생은 하기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다. 단목리는 그에게 은혜를 입어 무공을 가르쳤지
만, 조덕은 그 무공으로 함종문을 세웠기 때문에 단목리를 은인이자 사부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곧 은혜가 은혜를
낳는다는 걸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덕은 단목리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분명 천무대협, 천문여협의 제자라면 죽이라고 했
다. 한에 담긴 음성으로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 조덕은 그걸 이미 오래 전부터 머릿속 깊이,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었다. 무굉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허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건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조덕이 천하에 못된 나쁜 놈도 아니고
정파의 장문인이다. 그가 어찌 이런 쓰잘데기 없는 살생을 원하겠는가? 그는 진작에 무굉의 무공이 초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홀로 적대할 자신이 없어 결국 제자들을 동원하게 되었다. 그것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운무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조
금은 느낄 수 있었다. 개인의 한을 풀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천인공노할 짓이요, 다시금 복수를 낳는 일
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좋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 역시 많은 사람이 죽는 건 원치 않으니까 내가 설령 진다고 해도 정정당당히 대
결을 벌여야겠소. 설령 한을 풀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나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니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소."
"아미타불. 조 장문의 선택에 감복하오."
"별 말씀을."
조덕은 가볍게 답례하고 좌중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럼 이렇게 하겠소. 3개월 뒤 대천산에서 만납시다. 그땐 오해의 소지를 풀기 위해 모두를 초대하겠소. 이름은 대
천대연(戴天大宴) 할 것이며 모든 이들 앞에서 자존자대와 승부를 가리겠소. 그럼 3개월 뒤 춘절(春節)에 대천산 함
종문에서 봅시다."
운무는 연신 아미타불만 되뇌었고 양만풍은 이제 한시름 놓은 기분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조덕은 잠시 무굉을 쳐다
보다가 곧 제자들을 추슬러 감총대전을 나섰다. 가히 수많은 사람이 땅속에 묻힐 뻔한 이 일은 운무가 나타나는 바
람에 좋은 방향으로 풀리게 된 셈이다. 물론 조덕이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끝내는 싸움이 벌어졌겠지만, 다행히
그는 상황을 분간하고 좋고 나쁨을 아는 사람이었다. 은혜는 은혜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바로 인과응보다.
이로써 조덕은 여러 명에게 은혜를 입힌 셈이 되었고 복수의 씨는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