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 十 章. 화주대도
나라의 정세가 그렇고 강호의 정세가 그리 살벌할 때. 양만풍 일행이 난주를 출발하여 사천에 접근하고 있을 때쯤.
그 사천은 벌써부터 사람이 붐비고 수많은 강호인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이제 대천대연은 1개월 남짓 남
겨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미리 도착하여 사천의 분위기 파악에 나서는 듯 했다. 어떤 이들은
미리 대천산에 오르기도 해보고, 어떤 이들은 객잔이나 주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또 어떤 이들은 청성산, 아미산 같
은 명산을 두루 돌아보고 있었다.
이 중에도 사람이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단연 성도(成都)다. 청성산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대천산의 남쪽에
위치하는 이곳은 그 옛날 촉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사천에서는 중심지나 다름없었으며 사람도 많았다.
여행객도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만리교(萬里橋), 사마교(駟馬橋), 금관성(錦官城), 청양궁(靑羊宮), 무후사(武候
祠), 두보초당(杜甫草堂) 등등 볼거리가 매우 많다.
그 사천 지방의 성도에서도 또 유난히 사람이 많은 곳을 꼽으라면, 성도 최고의 객잔이라는 만리객잔(萬里客潺)을
꼽을 수 있었다. 만리객잔은 성도의 남쪽에 위치고 있었다. 남쪽에 흐르는 금강(錦江) 위로 만리교(萬里嬌)가 놓아져
있는데, 그 근처에 객잔을 세워 만리객잔이라 하였다. 만리교는 제법 명성이 있었다. 이 다리도 촉나라와 관계가 있
는데, 당시 나라 일로 촉 땅을 떠나려던 비위(費褘)를 제갈량이 연회를 열어 환송해준 곳이라고 한다. 비위의 만리
지행시우차(萬里之行始于此)라는 명언으로 더욱 이름이 알려졌다고도 하다.
만리객잔 주인은 입이 머리가 들어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그럴까? 얼굴을 보자면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뻐서 미쳐 가는 수준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것이, 유명하고 큰 객잔이
긴 하지만 요즘처럼 손님이 많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리객잔은 매우 크다. 이층집인데 일층도 굉장히 넓어서
수십 명의 손님을 접대할 수 있었다.
"주인장. 하나 물어볼 것이 있소이다."
함지박 만하게 입이 찢어진 주인장에게로 이층에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이때 이층에는 1명의 점원이 올라가 있긴
했지만 매우 바쁜 상태였다. 만리객잔엔 점원이 7명이나 된다해도 손님이 매우 많아서 모두 그렇게 바쁜 것이다. 주
인장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이층 모서리에서 배터지게 먹어대던 사람이었다. 그 자리는 난간에 붙어있어서 고개만
살짝 돌리면 바로 아래 주인장이 보이는 곳이었다.
"아이고, 네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주인장은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하고 옆에서 주문을 받아오던 점원에게 가보라고 지시했다. 주인장은 확실히 경험이
많은 듯 했다. 역시 정보라면 주인장보다는 점원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게 궁금하신가요?"
점원은 잽싸게 계단을 밟고 올라가 물었다. 그러던 점원의 눈빛엔 신기하다는 듯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난간 옆
자리에서 술과 안주를 배터지게 먹어댄 사람의 모습이 희귀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부가 굉장히 하얬다. 선녀를 연상시킬 만한 그런 여인의 피부라고나 할까? 척 보기에도 매우 부드러울 것
같아서 피부만 보면 대단한 미인을 만났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이는 20대 중반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남자
였다. 얼굴도 하얗고 고우며 생긴 게 꼭 여자 같지만 목소리로 보나 옷차림으로 보나 분명 남자였다. 가슴도 들어간
걸 보면 남자가 확실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점원은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금은 역겹기도 했다.
"사천에서 가장 훌륭한 술은 어떤 건가?"
점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대답한다.
"헤헤. 손님도 그 싸움 잘하신다는 강호인이시군요. 사천엔 처음 오셨나봐요?"
"처음 왔네. 아무튼 가장 훌륭한 술이 뭔지 아는가?"
"당연히 알죠! 사천에는 사실 좋은 술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전 전흥대국주(全興大麴酒)를 꼽겠습니다."
청년은 거창한 이름에 벌써부터 침이 넘어가는 듯 하다.
"전흥대국주라! 이름도 거창한 게 왠지 무척 좋은 술 같군."
"당연하지요. 전흥대국주는 여기 성도에서만 만듭니다."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는가?"
"저희 객잔에도 있지요. 가져다 드릴까요?"
청년은 이미 술의 유혹에 넘어간지 오래다. 그는 자신의 나무통 같은 술병을 내어주면서 한 병은 그냥 가져오고, 다
른 한 병은 그 술병에 옮겨 담으라고 말했다.
점원이 전흥대국주를 가져오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름만큼 그릇도 멋진 것이 확실히 유명하고 비싼
술인 듯 했다. 청년은 급하게 마개를 땄다. 순간 객잔 이층으로 전흥대국주의 독한 술 향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는 주변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자 떠들어대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 마시고, 두 잔 마시고 하는 동
안 그의 표정은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절로 입이 찢어지며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굉장히 좋은 술이구나. 맛도 좋고 단전도 편안하니 이 술이 있으면 한동안 걱정은 없겠다."
청년은 급하게 그 한 병의 술을 먹어치운 뒤 벌떡 일어서서 주인장에게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은 놀라는 눈치다. 술
향만 맡아도 그 술이 전흥대국주이며 얼마나 독한지 아는데 한 병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청년이 멀쩡하게 걸어가니
말이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 전흥대국주 세 병만 더 주시오. 단 깨지지 않게 이 술병들에다 담아주시오."
그리고 보니 그의 양 허리춤에는 좀 전 꺼냈던 나무통 술병이 세 개나 있었다. 굉장한 애주가인 듯 하다. 그는 전흥
대국주를 옮겨 담은 술 네 병을 두 병씩 양쪽 허리에 나눠 달았다. 좀 무거울 것 같지만 정작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는 생김새만큼 희귀한 인물이라 객잔에 있던 사람들의 괴이한 시선을 받으며 곧 밖으로 나섰다.
밖은 꽤나 어두워져 있었다. 청년은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이제 한 달쯤 남았군. 미리 가는 사람도 있던데 나도 그리 해볼까?"
조금 고민하는 듯 했으나 금방 혓바닥으로 입술을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북쪽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성도를
벗어나더니 대로를 따라가지 않고 굳이 음침한 산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 달빛에 비춰진 그의 얼굴은 조금 붉
은 것 같았다.
청년이 어두운 산길로 들어간지 채 한 시진이 지나지 못한 시간, 그러니까 이제 막 어둠이 깔렸을 때 그 음침한 숲
속에서 웬 여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
비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한밤이나 다름없는데 산중에서 웬 여자의 비참한 비명소리가 들리니 그보다 소름끼
치는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면 태반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을 법하다. 허나 지나는 사람은 없었
다. 이미 한밤이고 그쪽은 사람들이 잘 지나지 않는 험난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산중에 약초를 캐고 사는 사람
들이 이룬 촌이 있지만 모두 합쳐봐야 서른 명도 넘지 못했다.
이후엔 비명은 안 들리고 뭔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다투는 소린 듯 한데 거의 여자가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여자의 음량은 항상 높았으며 중간중간 짤막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아니, 자세히 들어보면 떠
든다기보다는 악을 쓰는 축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 악쓰는 소리는 곧 사라지고 이젠 울
먹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나무 위에 올라앉은 부엉이가 이상하게 여겼는지 눈을 빛내면서 그리로 다가들었다.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아니? 넌 참 이상하구나. 아까는 목숨만 살려달라면서 이젠 그 향락의 세계에도 안 가겠다는 거냐?"
부엉이의 눈은 마침 달빛까지 받아서 훤한 그 장면을 잘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이제 20살쯤 됐을 법한 처녀였고 누
추한 옷으로 보아 이 근방 촌에 사는 사람인 듯 했다. 나무를 등지고 앉아서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측은했다. 반면
남자는 그 앞에 척 서있었는데 뒷모습을 보자면 꼭 여인네 같았다. 분명 전흥대국주를 사간 그 여인 같은 청년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아무튼 제발……!"
"누가 널 죽인다고 했니? 나도 그리 원하는 건 아니다만……. 어쨌든 그만 시끄럽게 해라. 네가 아무리 떠든다고 해
도 이 주변에서 널 구해줄 사람은 없고, 나도 너 같은 애들한텐 이력이 나서 그만두지 않는단다."
"제발……."
"자자. 내 말을 따르라고. 잠시 후면 네가 절로 안길 걸?"
청년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매우 더러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처녀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곧 생길 일을 생각하곤
절망해하는 듯 했다. 온몸을 덜덜 떠는 것을 본 부엉이도 안타깝게 여겼는지 몸을 날려 사라진다.
"자, 힘 빼고 가만히 있어."
"저리가!"
명백하게 겁탈하려는 순간이다. 청년은 반항하는 처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힘을 주어 옷을 찢어가고 있었다. 물론
세상일이 그렇게 옷 찢는 것처럼 간단할 리는 없다. 처녀의 정조를 지키라고 하늘이 도와준 건지 아니면 청년이 재
수가 없었던 건지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달빛이 훤한데 망측하군……."
청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마 이곳으로 누군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녀가 소리지르든 말든 내버려둔 것도 근방에 있는 촌하고는 거리가 있어서 그런 것인데 도대체 지금 나타난 인물
은 누구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괴상한 것은 새로 나타난 인물은 그 청년 자신 못지 않게 희귀한 인물이라는 것이었
다.
느리면서도 차분하며 끝말을 흐리듯 말한 인물은 사립을 쓰고 있었다. 농부들이 흔히 써서 농립(農笠)이라고도 하는
삿갓이었다. 강호인들도 얼굴을 숨기려 할 때 잘 쓰는 것이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지나칠 정도로 사립을 눌
러썼다는 점이다. 저렇게 하면 비록 얼굴은 잘 가릴지 몰라도 앞이 안 보여 땅만 보고 걸어다녀야 할 것이 분명했
다. 또 한 가지는 사립이 좀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사립의 양옆으로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 위치가 딱 귀라서 소리
를 좀 더 잘 듣고자 해둔 배려인 듯 했다.
게다가 또 재미난 게 있으니, 바로 오른팔이 없다는 점이다. 달빛에 비추는 그는 흑포를 입었는데 오른쪽 소매가 시
원한 봄바람을 만나 펄럭이고 있었다. 왼손에는 얄팍하면서도 길다란 봉을 들고 있었고 덩치나 목소리로 보아 청년
과 나이가 비슷할 듯 했다. 청년은 문득 이 사립인이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가졌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한낱 정욕이나 채우자고 처녀를 겁탈하는 인물에겐 알려줄 이름이 아니다……."
청년은 냉소한다.
"말하기 싫으면 관두시오. 하지만 그 사립은 벗어야할 걸?"
"자신 있으면 덤벼라. 어떻든 강호인은 일단 싸워야 말이 통하니까……."
사립인의 말에 청년은 코웃음치며 먼저 처녀의 혈도를 제압했다. 그리고 나서야 정면으로 내달리며 사립인에게 공
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청년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었다. 장법을 쓰는데, 파도와 같은 힘은 없었지만 빠른 겨울바람 같은 예리함이 있었다.
동작이 빠르고 시원하며 한 초 한 초가 모두 요혈을 노리는 훌륭한 장법이었다. 무엇보다도 음한의 장법이었다. 한
번 쌍장을 휘두르면 절로 오한이 느껴지고 음흉한 느낌이 들어 이 장법을 상대하는 인물은 먼저 몸을 움츠릴 듯 했
다.
그러나 그런 청년은 채 열 초식도 넘기지 못하고 금방 수세에 몰렸다. 대여섯 초식을 공격에만 퍼붓던 그는 갑자기
반격에 나선 사립인의 공격에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왼팔밖에 없는 외팔이요, 사립에 가려 앞도 안 보
일 듯한 이 사립인의 봉에 얻어터지며 계속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건 그만큼 사립인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말과
같다. 음한의 장법을 몇 초식 받으며 마치 '아, 이런 무공이구나.' 하고 느낀 후 느긋하게 반격에 나서는 듯했다. 하
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역시 청년처럼 음적인 무공으로 강맹한 기운은 전혀 없으나, 봉을 휘두를 때마다 뛰어난 묘
수로 간단히 그를 제압해 나갔다.
"양근대동(兩斤大同)."
갑자기 사립인의 봉이 청년의 앞가슴으로 날아왔다. 노리는 곳은 전중혈인 듯하여 청년은 황급히 일 장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좌장으로 찔러오는 봉의 옆구리를 때리고 동시에 오른발을 쳐들어 사립인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허나 놀랍게도, 좌장이 봉의 옆구리에 닿는 순간 좌장이 절로 튀어 올라갔다. 마치 거문고 줄처럼 퉁겨지듯 닿는 순
간 왼손에 쳐들어졌다. 이 때문에 중심을 잃은 청년은 오른발을 멈추지 못해 너무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사
립인의 봉은 전중혈을 향해 쇄도하다가 일순 방향이 틀어지며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장법이 제법 뛰어나구나……."
"오만 떨지 마라! 내가 음기만 보충했다면… 윽!"
청년이 울컥거리며 피를 토해낸다. 사립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청년을 향해 딱히 한 일은 없었고 죽일 마음도
없어서 전중혈을 때리지 않고 일부로 턱을 쳤다. 그런데 피를 토하니 이상하면서도 어이없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래
도 이유는 따로 있는 듯 했다. 사립인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음기만 보충했다면?"
"시끄럽다! 졌으니 할말은 없다. 그냥 죽여라."
청년은 그래도 기개가 있었다. 좀 전 처녀를 겁탈하려했던 사람 같지가 않다. 사립인의 입가에 미소가 잡혔다.
"장부다운 기개는 있구나. 그런 놈이 힘없는 처녀를 겁탈하려고 해?"
"닥치고 죽이기나 해!"
"죽이지 않겠다. 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기로 맹세한 몸이니 네가 죽여달라고 애걸해도 죽이지 않으련다."
"너……."
사립인은 잠깐 말을 하지 않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을 먼저 생각해라. 네가 처녀를 겁탈하면 너는 행복하겠지만 그 처녀는 어찌 되는지 생각을 해봐라."
"내가 그런 것도 모를 머저리인 줄 아느냐?"
"알면서 왜 겁탈을 하려고 해?"
사립인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더니 곧 차분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처녀의 어떤 혈을 찍었느냐? 대답해라."
"어, 어떻게……."
청년의 안색이 홱 바뀐다. 피를 토하면서도 놀란 표정은 역력했다. 분명 청년이 처녀의 혈도를 찍을 때 사립인은 사
립을 눌러써서 앞이 안 보였을 것이다. 헌데도 혈도를 제압한 걸 알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사립인이 미소한다.
"빨리 대답이나 해라."
"흥. 내가 대답해줄 것 같으냐?"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그녀를 겁탈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쓸데없는 고집은 버리고 말해라."
이치에 맞는 말이다. 청년은 그리 생각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견정혈을 찍었노라 대답했다. 그러자 사립인은 봉을
든 채 왼손을 들어서 갑자기 손가락을 퉁겼다. 놀랍게도 처녀의 견정혈에 무언가가 정확히 명중하는 게 아닌가! 처
녀는 몸이 정상으로 되돌아온 걸 확인하고는 사립인을 향해 몇 번 고개를 숙이더니 급히 도망쳤다. 청년은 그걸 보
면서도 놀라움에 입이 딱 벌릴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보지도 않고……."
"놀랄 거 없다. 아까 너희가 대화하던 걸 듣고 있어서 위치쯤은 알고 있었지. 저 처녀는 네게 혈도를 찍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테니 자리를 움직였을 리도 없고 말이다. 움직였어도 알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어쨌든 사립인은 나타난 내내 사립을 벗지도
않았고 고개를 높게 쳐들어 처녀를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귀로 위치만 확인했다는 얘긴데 어찌 그리 정밀하게 맞출
수 있는가? 좀 전에 대결을 벌일 때도 그는 단 한번도 앞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사립을 쓴 채로 잘만 싸웠다.
청년은 그 순간 이 사립인이 굉장한 절정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보통 대단한 자가 아니었구나. 그래도 별 볼일 업는 놈에게 억울하게 죽는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음기
를 보충했어도 못 이기겠군. 다행히 절정고수에게 뒈질 운명이었어. 핫핫!"
사립인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처녀나 겁탈하고 있을 사람은 아닌 듯 하군."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 당신 이름이 궁금하지만 안 알려줄 것 같군. 그러는 당신은 내 이름은 궁금하지 않
나?"
"알려줄 거면 궁금하다고 해두지. 아니면 궁금하지 않다고 하고."
청년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배꼽을 잡고 깔깔대더니 급기야 피를 또 토해내고 만다. 허나 그러면서도
웃음기는 지우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좋아! 알려주지."
"그럼 궁금하네."
"난 석 씨고 이름은 앙이다! 여자와 술만 훔치는 도적 석앙이다! 그래서 강호인들이 날 화주대도라고 부른다지?"
사립인은 조금 놀란 듯 했다. 바로 답하지 못하던 그는 방금 청년처럼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청년의 안색이 조금
변한다.
"뭐냐? 무시하는 거냐?"
"누가 무시를 했다는 거냐? 잠깐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
청년의 안색이 바로 풀어졌다. 사립인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과연 화주대도의 명성답게 어디서 또 여자를 훔쳤나보군."
"그래, 이 산이 음습해서 겁탈하기 아주 좋은 것 같더라. 마침 근방에 촌이 있다기에 가서 보니 어여쁜 처녀가 한
명 있어서 데리고 나왔지."
"술은?"
사립인의 물음에 청년은 주저앉은 채로 양 허리를 두들겼다. 두 통에 담긴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사립인은
피식 웃었다.
"아까 싸울 때 웬 물소리가 나나 싶었는데 그게 사실은 술이었군. 들어보니 네 통이네."
청년은 또 놀란다.
"대체 어떻게 그리 잘 알 수 있지? 그 사립은 귀 부분에 구멍이 뚫렸지, 눈 부분엔 뚫린 것 같진 않은데."
"설명하자니 귀찮다. 헌데… 여기에 오면서 들으니 화주대도는 요즘 무림공적에 가깝다고 하던데, 나한테 신분을 밝
히는 게 두렵지 않는가?"
"하하!"
갑자기 그가 웃어댔다. 사립인이 이상하게 여기자 그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난 누구처럼 지레 겁먹고 사립을 쓰지도 않으며 이름을 숨기지도 않는다! 무림공적? 날 죽일 능력도 없는 것들이
날 무림공적이라 하다니 우습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맞붙을 자신도 없는 것들이."
청년의 말투엔 조소의 기운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말에 사립인이 웃는다.
"언중유골이구나. 그건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하튼 네가 잘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아서 설명해줘야겠군. 강호
인들이 널 무림공적으로 치부한 게 네가 두려워서 그런 줄 아느냐?"
"그게 아니면 뭐냐?"
"네가 자존자대만큼의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럴 리 없지. 너 정도는 감총방의 양 방주나 함종문의 조 장문이
면 가지고 논다. 개방의 묵 방주도 그럴 거고 소림사의 운화 대사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들이 널 무림공적으로 치부
하는 건 너 때문에 숱한 처녀가 고통스러워하다가 자결하고, 귀한 명주란 명주는 다 훔쳐먹으며, 이룰 걸 이루면 먼
저 도망을 치기 때문이야. 무림공적으로 강호에 소문을 내둬야 여러 강호인들이 널 잡으려 안달을 하게되지."
사립인의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번엔 청년이 웃었다.
"그럼 그들은 날 잡아야겠는데 잡지는 못해서 무림공적으로 떠든단 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무림공적이란 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뒤편에서 강호인의 입과
입을 거쳐 번지는 것이다. 너의 무공은 전혀 고강하지 않는데도 무림공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건 그런 이유란 거다."
"그래도 감사하군. 무림공적이라니까!"
사립인도 은근히 오만한 기운이 있었지만 청년 역시 오만한 기운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사립인은 그가 마음에 드
는 듯 했다.
"넌 오만하면서도 당당해서 마음에 든다. 나에게 이름을 알리면 내가 죽일지도 모르는데 당당히 말하고……. 게다가
지금 얘기를 들으니 겁탈하는 짓도 뭐 원하는 것 같지 않아서 죽이진 않겠다."
"뭐야? 날 모욕하겠다는 거냐?"
"쓸데없이 넘겨짚지는 마라. 난 너를 호인으로 생각해서 죽이지 않는 것뿐이다."
사립인은 그대로 떠날 듯 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번 미소짓더니 그냥 몸을 돌렸다. 청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
묵히 있다가 사립인이 한 두어 발짝 갔을 때 빨리 말문을 열었다.
"넌 이름이 뭐냐? 내 이름만 알고 가면 공평하지 못하다."
"난 알려주지 않을 거라서 네가 궁금해봤자 소용없다. 괜히 요란스럽게 굴지말고 그동안 지은 죄를 갚을 생각이나
해라."
또 두어 발짝 갔을 때 청년이 다시 소리친다.
"죄는 어떻게 갚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나한테 왜 묻느냐?"
사립인은 여전히 싸늘하게 답하며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청년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몇 번 더 그를 불
렀지만 이젠 사립인도 대답하지 않고 멈추지도 않았다. 그는 느리면서도 은근히 빠른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그곳에
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