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 十 章. 화주대도 2
어느 대낮, 복잡한 만리객잔 안에서 갑자기 귀를 울리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네놈이 뭔데 참견해? 죽고 싶어?"
호통소리를 듣는 사람은 며칠 전 산중에서 화주대도를 제압했던 그 사립인이다. 그는 평소 웃던 대로 겨우 보이는
입가만 길게 늘어트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성도 제일의 객잔에서 웬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데 그냥 있을 순 없지. 내 자리도 바로 옆인데 말이다."
"이놈이 감히… 사천삼귀(四川三鬼)에게 시비를 걸어?"
사립인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자는 봉두난발의 괴인이었다. 괴인은 그 말고도 두 명의 일행이 더 있었는
데 말하는 걸로 보아 그들 셋이 사천삼귀인 듯 했다. 이들의 명성은 사립인도 들은 적이 있는 듯 했다. 설령 들은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천삼귀라는 네 글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는 것만 봐도 어떤 자들인지 알 수가 있
었다.
"알고 보니 사천삼구(四川三狗)였군. 얼마나 악독한지 어린애부터 노인, 여자까지 잔인하게 물어 죽인다던데 마침
잘 만났구나."
"이놈……!"
계속 소리치던 일귀가 이젠 악쓰며 덤벼들었다. 일귀는 삼귀 중 대장이다. 이들은 명성 날리길 좋아해서 일부로 특
별한 표식을 해두었는데, 그게 귀에 달린 귀걸이다. 일귀는 한 개를 달고 이귀는 두 개, 삼귀는 세 개를 단다고 알
려져 있었다. 지금 사립인에게 덤비는 자는 귀걸이 한 개를 단 일귀가 확실했다.
"살아서 덕을 쌓아야 하는 법인데……."
사립인은 중얼거릴 뿐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귀는 그의 무공이 낮다고 여겨 한순간
죽일 심산으로 더 손에 힘을 가했다. 허나 일귀에겐 안타깝게도 사립인의 무공은 대단했다. 가만히 있다가 칼이 더
가까워지자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올려 그의 팔꿈치를 걷어차고 말았다. 일귀는 오른팔이 곧장 부러졌다.
"이건 나에게 까분 대가다. 아직 세상에 지은 죄의 대가는 받지 않았지."
말하며 다가오는 사립인에 이귀와 삼귀마저 몸을 날렸다. 사립인은 이번엔 봉을 휘둘러 몇 수 싸웠다. 일귀는 방심
했던 터라 간단히 당했지만 확실히 사천삼귀의 실력은 제법이었다. 이귀, 삼귀는 협공실력을 펼쳐 신중하게 한 초식
씩 전개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어찌 사립인을 누를 수 있으랴? 그리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명한 화주
대도마저 간단히 제압한 인물이 바로 이 사립인이다. 이들 사천삼귀라고 하는 자들이야 비록 무공이 괜찮긴 해도
사립인의 봉술은 매우 뛰어나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귀와 삼귀의 오른팔마저 부러트린 사립인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지은 죄를 참회해라."
"웃기는 개소리는 집어쳐라! 우리와 맞서다니… 네놈이 사천에서 무사할 줄 아느냐?"
사립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용히 참회하라고 할 때 말을 들을 것이지, 기어코 말을 안 듣는군. 너희가 금관파(錦官派)인 건 안다만 금관파라
고 뭐 대단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겁낼 것 같으냐?"
"이놈이 감히 금관파를 모욕해?"
"너희들이 아까부터 이곳 주인장을 괴롭히고 사람들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건 근래 강호인들이 많이 몰려서겠지?
강호인들에게 자신들을 알리고 너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너희 실력은 별 게
아니야. 일귀 같은 놈이 금관파를 책임지니 앞날이 아주 훤하다. 차라리 그러지 말고 몇 안 되는 착한 문도생들은
돌려보낸 후에, 너희 셋이 절에 들어가서 과오를 반성해라."
주변에서 몇몇 인물들이 킥킥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천삼귀는 모욕을 받아 얼굴이 시뻘게진다.
"이놈! 반드시 복수하겠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는 게 좋다. 다음 번에도 내가 살려줄 거라 생각하느냐?"
"너……."
사천삼귀가 할말이 없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귀가 악을 쓴다.
"내가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네놈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립인이 웬일로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으며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때 문득 만리객잔 정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면
서 대신 대답을 했다.
"웬놈들이 오두방정을 떠나 싶었더니 철(鐵)씨 삼형제 너희였구나."
사천삼귀의 낯빛이 한순간에 대변한다.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석 대협,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오두방정 떨지 않겠습니다."
"누가 대협이냐? 저런 분이 대협이지. 이놈들은 이제 보는 눈도 잃었어."
나타난 인물은 얼마 전 사립인과 만났던 청년, 화주대도 석앙이었다. 석앙은 아부 떠는 사천삼귀를 한 대씩 쥐어박
았다.
"얼른 꺼져라. 너희들을 보면 속이 부글거려서 토할 것 같다."
"네! 네!"
사천삼귀는 잽싸게 사라졌다. 사립인은 낮게 웃었다.
"후후. 화주대도가 대협 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군."
"당신도 만만치 않잖아? 나도 당신한테 대협이라고 했으니까."
"그래, 피차일반이군."
사립인과 석앙은 함께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난 건 우연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대작하면서 술을 마시다가 사립인이 입을 열어 한 말이었다. 석앙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면서 뭐 하러 묻나? 며칠 전 우리가 만난 것도 우연인데 설마 우연이 두 번씩이나 이어지려고?"
"결국엔 날 찾아다녔다는 얘기로군."
"거봐, 잘 알잖아. 핫핫."
실제로 석앙은 그 날 헤어진 후로 사립인을 찾아다녔다. 원래 미리 대천대연에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사립인에 큰
호기심을 느껴서 나중에 가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사립인이 성도 방향으로 가기에 일부로 쫓아와서 사람들에게 물
어 찾아올 수 있었다. 워낙 행색이 기괴한 사람이라 찾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뭐 하려고 날 찾아다녀?"
사립인의 말투는 궁금하다기보다 캐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날 찾았니?'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생각으로
날 찾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거냐?' 하고 묻는 듯한 느낌이 다분히 풍겼다. 석앙은 소리내어 웃었다.
"이름을 알려주면 나도 널 찾아다닌 이유를 말해주겠다."
"이름이라! 그거 꼭 말해야하나?"
"왜? 몹쓸 짓이라도 하고 다녔나?"
사립인이 슬쩍 미소를 머금는다. 그의 얼굴은 안 보이되 입은 보여서 입 모양만 보면 웃는지 안 웃는지 알 수 있었
다. 허나 평소 하던대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그런 기분 좋은 미소가 아니라, 뭔가 억지로 벌어지는 듯한 그런 미소
였다.
"몹쓸 짓 많이 했지. 그래서 이름을 밝히기 싫다."
석앙은 더 떼쓰지 않았다. 그냥 술 한잔 들이키더니 다른 걸 물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르면 네가 누군지도 모를 거잖아. 날 제압한 인물이 누군지도 몰라야 한다니! 너무하지 않나? 이
름을 알려주기 싫으면 뭐 별호라도 좀 알려주시지."
"별호? 안타깝게도 난 너처럼 별호가 없다."
석앙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넌 무공이 엄청 고강한데 어째서 별호가 없다는 거지? 말도 안 된다."
"수년 간 은거했으니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
"오호라! 알고 보니 은거고인이셨구먼."
그는 장난치듯 말했다. 사립인은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봉을 쳐들었다. 깜짝 놀라는 석앙에게 그는 봉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
석앙은 놀라며 고함쳤지만 사립인은 그만두지 않는다. 그냥 앉은 채로 봉을 능란한 솜씨로 휘둘러 공격했다. 한 손
으로 휘두르는 봉의 공격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석앙은 사립인의 속뜻은 알지 못하고 일단 피하고자 마음
을 잡았는데 어떻게 피할 수조차 없는 정도였다. 지난번 산에서 붙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묘수로 간단히 석앙
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석앙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쌍장을 벌려 화주음장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애용하는 선화후주(先花後酒)라는
초식을 펼쳤다. 좌장을 아래로 내리고 우장을 쳐들어 우장만 가지고 상대를 공격하다가, 허점을 잡는 순간 좌장을
날려 일격을 가하는 그런 초수였다. 하지만 공격을 퍼부을 수가 없었다. 사립인의 봉법은 도대체 공격이 끊이지 않
는 게 아닌가? 봉은 마치 몸을 타고 넘실거리듯 이쪽저쪽에서 공격이 이어졌다. 어찌나 괴이한지 한 수 한 수가 따
로 노는 게 아니라 꼭 하나로 이루어진 하나의 초식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움직임도 빠르기 짝이 없고 전부 결정적
인 묘수라 방어에도 급급할 뿐이다.
"잠깐, 잠깐!"
석앙이 악을 쓰자 그제야 사립인도 봉을 빼내었다. 겨우 공격을 그만두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왜 공격하는 거냐? 내가 뭘 또 잘못했다고!"
"하도 별호를 알려달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이 봉법은 내가 만든 건데 어떠냐?"
석앙은 멍하니 있다가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오호. 그래, 그 봉법의 이름은 뭐지?"
"상혼봉법."
"상혼봉법? 뭔 이름이 그리 괴상해?"
"네가 알 바 아니지. 내가 알려줄 건 이 정도다."
사립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객잔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겁을 먹은 눈치
였으나 다시 싸움이 벌어지지 않자 안심하는 듯 했다. 일부 강호인들은 상혼봉법, 이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에 잠기
고 있었다.
그런 건 석앙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상혼봉법, 상혼봉법 해가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럼 당신은 상혼객이라 불러야겠군. 하는 행동으로 보아 대협이 될 거 같진 않고 하니까."
"마음대로 해라. 네가 하도 떠들어서 하는 수 없이 가르쳐준 거니."
수일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상혼객은 만리객잔을 떠나지 않았다. 어디로 갈 계획인지, 아니면 여기서 살 계획인지
는 몰라도 그는 한동안 만리객잔에서만 지냈다. 낮에 가끔 한번씩 나가서 무공 수련을 하고 돌아왔지만 거의 대부
분은 만리객잔 안에서 지냈다. 석앙도 마찬가지였다. 석앙은 상혼객이 매우 맘에 들었다. 마음도 맞고 무엇보다도
그의 오만한 기질이 석앙을 들뜨게 했다. 그들은 동행하는 사람처럼 지내지는 않았으나, 같은 객잔에서 묵으며 같이
대작도 하고 같이 수련도 했다.
하루는 상혼객이 바깥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봉을 사방팔방으로 휘저으며 그가 말했던 그 상혼봉법을 펼치
는 듯 하다. 한참 그가 수련했을 때쯤 석앙이 찾아왔다.
"상혼객, 오늘은 나도 함께 수련해야겠어."
"좋을대로 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의 대답에 석앙은 조용히 웃었다. 주위는 벌써 어두컴컴한 한밤이었다. 삼경인데다 사천 지방의 특징 때문에 매우
음습하고 쌀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앙에겐 오히려 힘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수련할 때면 밤에만
수련했고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그는 상혼객의 옆에 정좌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한 일 각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운기조식하
던 석앙의 안색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색이 붉으스레 변하다가 잠깐 시퍼렇게 변하더니 식은땀이 흐르며 다시
붉게 변했다. 주기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며, 숨도 매우 거칠어졌다. 누구도 그 모습을 보면 운기조식을 하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뭔가?"
상혼객이 한 말이었다. 그의 몸 상태에 이상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평소에 석앙은 가만히 앉아서 수련을 했었
다. 오늘처럼 이상한 소리는 내지 않았다. 항상 가만히 앉아서 반 시진 정도 정좌하고는 몇 번 쌍장을 휘두르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던 것이다.
석앙은 기를 풀고 수련을 중지한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상혼객의 말은 못 들은 듯 눈을 뜬 후에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무슨 악독한 무공을 연마하기에 그리 오두방정이야?"
"글세! 그게 뭘까?"
석앙은 항상 장난을 쳤다. 이 상황에서 또 장난을 칠 심산이다. 하지만 상혼객은 받아줄 심산이 아닌 듯 했다.
"똑바로 말해라. 기공을 연마하는데 왜 숨이 거칠어져? 몸까지 부르르 떨리고 말이다. 주화입마를 입은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니 무슨 악독한 무공을 연마했겠지. 내가 앞을 못 봐서 알 수는 없지만 네 안색도 심하게 변했을 것 같
군."
"앞을 못 본다고? 장님이었단 말인가?"
"장님이건 말건 그건 나중에 할 얘기고, 무슨 악독한 무공을 연마하는지 그거나 말해. 내가 수년 전에 본 무학서가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건 그게 매우 악독한 무공이기 때문이거나 또는 주화입마가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대체 무슨 무학서이기에? 네 말대로 내 안색이 변했겠지만 주화입마는 하지 않았는 걸."
"그러니까 무슨 악독한 무공을 연마한 거냐?"
석앙은 그의 말투가 엄한 걸 보고 더 장난치지는 못했다. 곧 자신도 정색하더니 좀 있다가 말문을 연다.
"화주음장이다."
"과연……. 바로 저번에 보여준 그 장법이군."
"그래, 네 말대로 악독한 무공이지. 굉장히."
석앙은 웃으며 대답했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담겨진 그런 웃음소리요, 그런 말투였다. 허나 상혼객은 상황 탓인지
미소를 짓지 않았다. 입 꼬리를 살짝 밀어 올리는 상혼객 특유의 여유만만한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석앙
의 말투에서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손을 내뻗어 석앙의 혈도를 누르더니 그를 눕혀두었
다.
"어떤 무공인지 자세히 말해."
"대체 왜 이래? 이 무공은 악독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석앙은 놀란 듯 했다. 허나 상혼객은 도리어 화를 냈다.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 악독한 무공은 사람을 악독하게 만드는 법이다. 네가 악한 마음을 갖지 않아
도 너의 손끝에서 악한 무공이 발출되니 결국 네 자신도 악독하게 변하고 말 것이다."
"나도 알긴 알아. 아무튼 이 무공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석앙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듯 하다. 허나 그의 말에는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 하여 상혼객의 궁금증을 더하
게 만들었다. 만일 상혼객의 눈이 정상이라면 필경 지금 석앙의 안색을 보고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안색
은 다 죽어 가는 병자와도 같았다.
"이제 그만 혈도를 풀어. 네가 그런다고 해서 내 무공에 대해 다 알려줄 거 같아?"
상혼객은 대답하지 않는다. 석앙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풀어주란 말이야!"
그래도 대답이 없다. 그저 깊게 눌러쓴 사립만이 석앙의 눈에 비춰질 뿐이었다. 석앙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점점 다
급해하는 듯 했다. 똥 마려운 강아지 꼴이라면 어울릴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빨리 뭔가를 해야한다는 듯한 표정이
요, 말투였다. 상혼객은 그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듣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어떤 사람의 말만 듣고도 대
강의 감정을 유추해낼 수 있는 굉장한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찌 석앙의 마음 상태를 모르겠는가?
"뭐가 그리 급하지? 여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나?"
"그, 그건……."
"아니지, 너라면 여자와 만나는 게 아니라 여자를 잡아가겠지. 지금 네가 다급해하는 건 이 상황에도 정욕이 솟았기
때문이냐?"
"날 뭘로 보는 거냐!"
갑자기 석앙이 악을 썼다. 매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날카롭게 상혼객을 쏘아붙였다. 상혼객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길게 숨을 내쉬며 사과한다.
"미안하다. 내 말이 좀 심했는지도 모르겠군. 허나 그게 다 너의 평소 행동으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해. 내가 너를
처음 본 때도 처녀를 겁탈하려던 순간이었으니까. 아무튼 대답해라. 왜 그렇게 서두르지?"
"알았으니까 혈도를 풀으란 말이야!"
"점점 과격하게 변하는군. 꼭 뭔가에 중독된 거 같아."
"빨리 풀어라! 빨리……!"
석앙의 말투가 변하고 있다.
"빨리……! 제발……!"
그의 말투는 부탁에서 위협으로, 위협에서 애걸로 변했다. 상혼객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매우 신기한 것이었다. 동
시에 그가 불쌍하게도 느껴졌다. 대체 뭔 일이 있기에 이러는 것인가? 그러나 아직 그 악독한 무공에 대해서 대답
을 듣지 못했다.
"네 무공을 그냥 내버려두면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고 말 거야. 악독한 무공에 대해 말해라. 그건 나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어서… 풀어……!"
"이건 너를 위하는 것이기도 해. 넌 그런 무공을 연마하다가 스스로 몸이 망가질 거고, 더 나쁜 일을 저질러서 정말
무림공적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하면 되니 일단 그 무공이 어떤 것인지 설명 좀 해봐."
"풀으라니까……! 으으……."
이만하면 절규에 가까웠다. 석앙은 정말 절규하고 있었다. 상혼객이 확실히 앞을 못 보는 장님이지만 귀만으로 그의
상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석앙이 한 차례 몸을 진동하더니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며 기절했다. 놀란 건 상혼객. 설마 이렇게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자꾸 발광의 기운이 보이긴 했지만 뭔가 급한 일이 있다고만 여겼을 뿐인데, 설마 기절까지 할 줄이
야. 상혼객은 서둘러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워서 명문혈로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기절한 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공이 그의 단전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어떤 괴이한 기운에 의해 모조리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신선폐에 당한 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내공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리 주입시켜도 결과는 똑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단전 근처에만 가면 저절로 내공이 소멸되는가?"
상혼객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곧 그를 들고 객잔으로 돌아갔다. 한 팔로 들어야해서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
볍기도 했다. 하기야 석앙의 체구는 좀 작은 편이었다.
객잔으로 돌아온 상혼객은 일단 의원을 불렀다. 허나 의원은 그를 진맥해보고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상혼객
의 괴상한 행색 때문에 겁을 먹어서 한참동안 열심히 진맥했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그의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들은 상혼객은 그 마음 상태를 가늠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소?"
"네…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진맥한 결과로는 별 이상이 없는데……."
상혼객은 이 의원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의원을 돌려보내고 보신하는 약이나 사서
먹였다. 석앙이 정신을 차린 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정신을 차린 석앙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하얗게 질려서는 중병 환자도 이만한 중병 환자가 없을 듯 했다. 상혼객은
물론 못 보았지만 그의 숨소리가 너무 가냘프고, 겨우 말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서 그의 몸에 큰 이상이 생겼음
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혼절까지 하고 그래?"
"내가 혼절을 했었나?"
상혼객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앙은 실소했다.
"어쩐지… 단전이 아프더라 했지."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알면 죽어도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좀 말해 줘.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
도록 하겠다."
"네가?"
"그래."
석앙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다.
"난 너에게 딱히 잘해준 것이 없는데 어째서 나를 돕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거지?"
"꼭 남이 잘해줘야 보답하겠냐? 너의 당당함은 애당초 마음에 들었으니 설령 네가 싹수없게 굴었다 해도 난 너를
도왔을 것이다."
"후… 굉장히 고맙구먼."
그렇게 말하면서도 섣불리 사정을 알려주진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을 뿐. 그러던 와중에 또 발작
이 일어나는 듯 했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단전을 움켜잡더니 신음소리까지 낸다. 상혼객은 크게 놀랐다.
"또 왜 그래?"
석앙은 억지로 괜찮다고 말하고는 일순 그의 손을 잡았다.
"사정을 알고 싶다면… 좋아! 알려주겠다.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그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네 이름."
그 말에 상혼객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사립 밑으로 그의 딱 벌어진 입이 보인다. 어이가 없는 것이다. 무슨 조
건이 있다기에 뭔 대단한 건가 했는데 고작 이름이나 알려달라니 어이가 없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석앙의 모습
이 좋기도 했다.
"핫핫. 고작 내 이름을 묻다니 어이가 없군! 좋아, 나는 진 씨고 이름은 양이다. 됐냐?"
이 사립인, 석앙에 의해 졸지에 상혼객이라는 칭호가 붙은 그는 바로 진양이었던 것이다. 진양은 아미산에서 6년의
수련을 마친 후에야 하산했다. 만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안을 터득했고, 음양합무론에서 얻은 지식으로 수년
간 피 말리는 노력 끝에 상혼봉법이라는 전후무후한 절학까지 만들어냈다. 하산한 후 가장 먼저 형란을 찾고자 난
주로 향하고 있었는데, 마침 대천산에서 대연이 벌어진다 하여 이렇게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석앙은 진양이라는 이름을 여러 번 되새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사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한편 듣는 진양
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