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 十 一 章. 짧은 인연 2
그 자리에서 나타난 자는 화주대도 석앙이 아닌가! 진양은 목소리를 듣고 눈치챘기 때문에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
고 있었다. 뒷간에 간다던 자가 갑자기 거기서 무굉을 암살하려 하다니. 그것도 무굉은 자신의 음장을 치유해줄 사
람이 아닌가? 스스로 무덤을 파겠다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진양은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이 못된 놈! 왜 덤비는 거냐?"
"알 필요 없다. 그냥 내 손에 죽어주면 된다."
"네까짓 놈이 날 죽일 수 있다고? 푸핫, 웃기지 마라."
무굉의 오만은 석앙이 치를 떨 만 했다. 그는 한 차례 진동하듯 몸을 떨고는 쌍장을 펼쳐 무굉에게로 덤벼들었다.
무굉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석앙의 손바닥에서 푸르스름하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석앙은 단숨에 좌장을 무굉의 옆머리로, 우장을 가슴으로 돌진시키며 첫 초를 선보였다. 충분히 그럴 듯한 공격이며
제법 기세가 엿보이는 공격이었다. 무굉은 코웃음치며 간단히 그의 허리를 걷어찼다. 너무나 빠르고 여유만만해서
이 한 수만 보아도 석앙은 그의 상대가 아닌 듯 했다. 발차기 한 방에 초식 자체가 무너져 내렸음에도 석앙은 물러
서지 않았다. 우당탕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며 오히려 몸을 날려 또 덤벼들었다.
무굉은 조금 놀란 듯 손바닥을 펴서 그의 따귀를 때렸다. 백타권이다. 굳이 광표장법은 쓸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무
래도 석앙은 연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희고 고운 피부를 가져서 남장한 여자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의 사내다. 생긴
것도 예쁘장하니 저절로 손이 움츠러드는 건 당연했다. 무굉은 원래 여색을 탐하는 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껏
여인이나 어린아이, 노인을 괴롭혀본 일은 없었다.
백타권은 실제로 백 가지 타법을 권으로 승화시킨 것인데, 일단 출수하면 그 동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권법
이다. 여기서 백 가지 타법은 모두 양손을 이용해서 벌어진다. 손등으로 때리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며
수도로 치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치기도 했다. 타법인 것처럼 찌르기는 없었다. 그저 왼손으로 치고 오른손으로 치고
양손을 합해서 치고 하다보면 어느새 백 가지 타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손의 모양새도 펴서 때리는 게 있고 움츠려
서 때리는 게 있고 또 반만 쥐어서 때리는 게 있으므로 일백 가지 만드는 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하여간 빠른 거 하나는 확실했다. 눈으론 도무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수많은 강호인들이 백타권에 당하
고도 그것이 천무대협의 백타권이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언뜻 보면 그냥 때리는 것 같지만 실제론 내공의 운
용과 바람 가르는 방법을 오묘하게 교합해서 최대한 빠르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권법이었다. 지금 상황도 그
러했다. 수많은 군웅들이 눈을 번뜩이며 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냥 뭔가 나온다 싶
으면 짝, 소리가 나고 또 나온다 싶으면 짝, 소리가 나니 군웅들을 눈은 소경이라고 해도 심한 말은 아닐 것이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석앙. 그는 백타권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듯 했다.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으며
도무지 공격을 하지 못했다. 먼저 일 장을 발출해도 무굉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따귀를 맞는 게 아닌가! 그러
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자 석앙의 얼굴은 자다 일어난 뚱보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
"이 빌어먹을 놈! 광표장법을 써라."
"그거 쓸 필요도 없다. 백타권이나 막아보시지."
무굉은 오만한 웃음과 함께 다시금 그의 따귀를 때렸다. 석앙은 분기충천하며 품에서 잽싸게 독표를 꺼내 가까운
거리에서 날리려고 했다. 이때 석앙과 무굉은 발로 한 걸음이면 될 정도의 거리라 일단 던진다면 피하거나 막을 방
도가 없었다. 무굉은 그걸 알았는지 따귀를 때리다 말고 그의 손목과 손등을 연달아 세 대씩 후려쳤다. 독표 다섯
개가 바닥으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 순간 석앙의 일 장이 무섭게 덤벼들었다. 그럼 일부로 독표를 꺼내며 틈을 노렸던 것일까? 어찌되었건 석앙의
좌장은 빠르게 우회하여 무굉의 어깨를 벌써 건드리고 있었다. 무굉은 양손을 이용하여 손목과 손등을 때렸었기 때
문에 거의 동시에 날아온 이 좌장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이까짓 일 장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얼씨구?"
한 대 맞은 후에 무굉이 뱉은 말이다. 놀란 기색이 보이면서도 뭐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 같진 않았다. 무굉이 맞은
곳은 오른쪽 어깨였다. 맞은 지 채 숨 한번 몰아쉬기도 전에 벌써 푸르뎅뎅하게 변하며 딱딱하게 얼고 있었다. 여기
서 언다는 건 얼음처럼 언다는 게 아니었다. 마치 마비된 듯, 누군가 얼음을 갖다 붙여준 것처럼 차가운 한기를 느
끼며 가만히 그 부위가 마비되는 그런 형상이었다.
"야아, 이게 뭐야?"
"화주음장에 무방비로 얻어맞으니 그렇지. 이젠 각오해라."
석앙은 조소를 흘리며 급작스레 일 장을 발출했다. 무굉은 일단 왼손으로 맞서며 악을 써댄다.
"이게 뭐냐니까? 왜 안 움직여!"
"방금 알려줬잖느냐?"
"그럼 뭐야. 화주음장인지 화주양장인지 그게 독장이란 말이냐?"
석앙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과연 무굉의 어깨는 점차 푸르스름한 색깔로 변하며
부어오르고 이 푸르스름한 색깔은 온몸을 향해 번져나갔다. 무굉이 음장에 맞은 뒤 확인하고자 웃통을 벗었기 때문
에 수많은 군웅들도 이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정말 화주대도 석앙의 장법이다!"
"저거에 맞으면 며칠도 못 가서 죽는다던데."
"무 대협, 위험합니다. 어서 해독을 해야해요!"
"아니야. 무 대협은 천문여협의 제자도 된다 했으니 혹시 치유법을 알지도……."
군웅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었지만 대체로 무굉의 상태를 염려하는 말들이었다. 일부는 아부를 떨고자, 일부는 진심
으로, 일부는 다른 계획이 있어서 염려를 하고 있었다. 무굉은 그 말을 들으며 이를 갈다가 '천문여협'이라는 말을
듣자 눈을 번뜩였다.
"아, 맞다. 무의가 있지."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려고 했다. 어디 이처럼 무식한 작자가 있는가? 석앙은 그가 스스로 치유하려는 걸 알고
노발대발하여 말도 없이 흉악한 눈을 뜨고 덤벼들었다. 무굉은 막 손을 모으고 무의를 펼치려다 석앙이 덤벼들자
펄쩍 뛰어올라 소리쳤다.
"이 나쁜 놈아! 치료 좀 하자."
"난 널 죽이려는데 네가 치료하도록 내버려둘 거 같으냐? 이 틈에 널 죽여야겠다."
"이놈이… 네놈 따위가 무서워서 치료하는 줄 알아?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지만 두 손을 써서 확실하게 이기려
는 거야."
"웃기는 소리는 집어쳐라. 각오해라!"
석앙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입장이다. 무굉이 정말 자신을 한 손으로도 누를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아
무튼 상대가 회복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바보 같은 행위라고 여겼다. 석앙의 목표는 분명히 무굉을 죽이는 데 있었
다.
"왜 자꾸 날 죽이려는 거야! 이놈!"
그의 몇 장에 맞서 무굉은 재빠르게 백타권을 펼쳐 일일이 막아냈다. 그러자 석앙은 더 화가 나서 제 몸은 생각도
안 하고 오로지 무굉을 죽일 듯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무굉도 가만히 백타권만 쓸 수는 없는 입장이
었다. 양손이라면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지만 왼손만 가지고는, 그리고 백타권만 써 가지고는 이 석앙을 쉽게 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새파란 후배 앞에서 고생 끝에 겨우 누르면 자존자대의 명
성이 뭐가 된단 말인가. 그는 하는 수 없이 광표장법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과연 광표장법 이름 그대로 무식하게, 미친 듯이, 저돌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처음엔 석앙의 몸을 사리지 않는 공
격에 잠깐 주춤했지만 애당초 석앙은 무굉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물며 아무리 한 손으로 상대한다지만 무굉이 어떤
고수인가? 내공이라면 소림사 방장인 운무와도 대등한 수준이요, 무공이라면 수십 가지의 절학을 소유하고 있는 그
다. 경험도 많으며 무엇보다도 광표장법은 전대의 무신, 천무대협이 평생에 걸쳐 만든 최고의 장법이 아니던가!
석앙은 다섯 초도 못 넘기고 열세에 몰렸다. 거의 발악하듯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분전했지만 무굉의 광표장법 앞에
선 떨어지는 모기와도 같았다. 한순간 쌍장을 교묘히 뒤섞어 배후여소(背後女笑)를 펼쳤을 때 무굉은 간단히 웅후한
내공을 모아 일 장을 날려버렸다. 이 일 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란 말을 쓸 만큼 위력적인 것이라 석앙 따위는 감
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배후여소인지 뭔지 하는 초식이 가볍게 무너지며 동시에 앞가슴에 이 일 장을 제대로 맞
고야 말았다. 피를 뿌리며 몇 장이나 날아가는 석앙의 모습은 실 끊어진 연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과연 자존자대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굉은 좌중을 돌아보며 거만한 자세로 대소를 터트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
저앉아 주저리주저리 무의를 읊기 시작했다. 내용은 매우 신기했다. 언뜻 들으면 말이 되지 않는 주천이었으나 또
어떻게 들으면 매우 심오한 뜻이 담긴 것 같기도 했다. 자세도 신기하니 군웅들의 눈이 번쩍 뜨여질 만 했다. 군웅
들은 행여나 무슨 절세 무학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앞다투어 귀를 기울였다. 허나 진양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난날
들었던 무의와 틀린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진양이 이때 느낀 게 있다면 언뜻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음양합무론의 덕이었을까?
무굉이 무의를 한참 읊으며 해괴한 자세를 해대고 있을 때, 석앙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있었다. 일 장을 정
통으로 맞아 멀리 날아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절벽에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이를 본 운무가 일지선공으로 멈춰주어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광표장법은 과연 광표장법. 쓰러지자마자 많은 피를 토하고 헉헉대는 모습은
그가 이제 곧 죽게 된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운무는 소림사의 방장답게 그의 고통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몇몇 혈
도를 눌러 잠시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아미타불. 시주는 무엇 때문에 무 시주를 공격했었소?"
"사… 상혼… 상혼객을 데려……."
어느새 좌중은 고요해진 상태였다. 무굉도 무의를 끝마쳤고 운무도 나선 상태라 입을 꼭 다물고 그들의 대화에 귀
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군웅들은 상혼객이란 이름을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운무도 마찬가지였다.
"상혼객이 누구요?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상혼객… 진……."
그가 막 무슨 말을 더 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군웅들 틈에서 사립 쓴 외팔이가 번쩍 튀어 올랐다. 그는 다른 사람
들의 시선은 신경도 안 쓰고 석앙의 곁으로 갔다. 석앙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함종문이라 진양이란 그 말을 꺼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침 그가 나서서 말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왜 그랬나?"
진양의 첫 말이었다. 석앙은 피를 흘리면서도 미소했다.
"끝내… 너의 얼굴… 못 보겠군……."
"보고 싶으면서 왜 이런 짓을 했나? 네 실력을 알면서 대체 왜."
"후후……. 도와주지 않아서 고맙다… 도와줬다면 널 보지 않고 죽었을 걸……."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화내지 말고… 내가 누군지… 알아?"
"너야 화주대도 석앙이지. 호탕하고 당당한 남자며 솔직 담백한 진실 된 청년이다."
진양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서 군웅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필경 일부로 그런 것이리라. 석앙도 눈치챘
는지 다시 한번 후후, 하고 웃더니 한번 더 피를 토하며 말을 이었다.
"난… 한인이 아니다… 난… 원래 금인……."
"금인?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네가 금인이라고 내가 널 싫어할 줄 알았냐?"
"내 사형… 있는데… 누군지 알고… 싶지?"
"알고 싶다."
진양의 간단한 말에 석앙도 간단한 답으로 알려주었다.
"융왕……."
금인이라는 말에도 놀라지 않던 진양이었다. 진양은 본래 성격이 그러해서 금인이라도 좋은 사람이면 싫어하지 않
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융왕이 석앙의 사형이 된다는 말에는 크게 놀랐다. 융왕이 누구인가? 그와 그의 아들 융정은
자신과 형란을 병신으로 만들게 하였고 이렇게 헤어져서 고통스럽게 한 장본인이다. 진양만큼이나 뒤에서 듣고 있
던 양만풍, 운무 등도 놀라는 듯 했다.
"융왕이라면 들어서 알고 있다. 그가 악명 높은 작자라는 걸 알지만 너와는 무관하다. 너의 사형이든 사부든 나하고
는 상관없는 일."
진양은 일부로 그리 말했다. 석앙은 안심하는 듯 했다.
"다행이야… 다행… 네가 날 미워할 줄… 알았어……. 융 사형은… 천하의 못된 도적……."
"너하고는 상관없다. 네가 화주대도가 된 것도 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니 난 조금도 널 미워하지 않는다."
석앙은 안도의 미소 같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양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무 대협은 무엇 때문에 공격했지?"
"혹시… 융 사형의 사부… 내 사부가… 누구인지 알아?"
"소문을 들으니 어떤 절정고수라던데,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라더군."
"우리… 사부님은… 역숭무(易崇武)……."
정말 기인인 듯 이름도 이상했다. 아마도 본명은 아니고 스스로 무공을 너무나 좋아해서 지은 이름인 것 같았다. 숭
무(崇武)란 무술을 숭배한다는 뜻이다.
"처음 듣는다. 역숭무라! 이름이 참 기이하군."
"사부님은… 기인이셨다……. 천하에 널린… 제자만… 8명이고… 그 중에 난 막내……."
"그래? 들어보니 별로 좋은 인물 같지는 않던데 위험하겠구나."
"아니… 모두들… 누가 사형이고… 누가 사제인지 몰라……. 난 막내… 사부님께 귀여움을 받아서… 많은 걸 알았
을 뿐……."
진양은 이제 좀 이해가 갔다. 그는 나머지 얘기는 어떻게 내공을 더 불어넣고 하려고 했으나 석앙은 힘겹게 손을
들어 막으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은… 살아 생전… 한 가지 소원이 있으셨어……. 천무대협… 만나 싸우는 일……."
"그 얘기는 들은 적이 있어. 융왕이 그렇게 말했다던데."
"그래… 사부님이 말씀하시길… 천하를 떠돌며… 여덟 제자를 얻었는데… 한 사람씩 가르쳤다고… 그리고 천무대협
을 만나 싸우고 싶다고……. 난 사부님의 은혜를 갚고자… 무굉을……."
과연 융왕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이유였다. 진양은 짐작할 수 있었다. 융왕이 몇 번째 제자인지는 몰라도 천무대협과
싸우고 싶다는 사부의 말에, 천무대협의 제자라는 무굉과 싸워 이기고 싶었을 것이다. 역숭무의 무공을 사용해 천무
대협의 제자를 이기면 사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그건 석앙도 마찬가지리라. 하지만 그 역숭무란 자가 제자들
에게 노골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으므로 남은 여섯 제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능력이 없어서 나서지 못
하거나, 죽었거나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므로 나타나 무굉을 죽이려는 자는 융왕과 석앙 뿐이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제 그만 말하지 말고 일단 치료부터 하자."
"틀렸어… 오장육부… 단전… 전중… 모두……."
말을 잇던 석앙은 한 차례 더 피를 토해냈다. 그 피 속엔 내장 부스러기도 있었다. 확실히 죽기 직전인 것이고 살려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진양은 내장 부스러기까진 보지 못했어도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더 살 수 없다는 걸 능
히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으면 말해라.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
"네 능력은… 무한하니까… 후후……."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소원이나 말해."
"적수(赤水)에… 융 사형이 있다……."
진양은 깜짝 놀랐다. 운무는 옆에 있으니 들으며 놀라고 운화나 양만풍, 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내공이 높으니 멀리서
도 듣고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는 죽었다던데?"
"죽지 않았어… 사형은… 얼마 전 감총방을… 습격했다……."
갑자기 양만풍이 튀어나오며,
"뭐라고!"
석앙은 그의 외침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진양만 바라보며 말한다.
"북망채를 멸한… 복수… 감총방과 함종문… 아까 뒷간 간다고 했을 때… 사실은 사형이 보낸 사람을 만났는데…
감총문… 쑥대밭이 됐다고… 그리고 지금 사형은 적수에 있다고……."
"그럴 수가?"
"융정은 죽었지만… 사형은 살아서 복수를 준비… 초고성장 12성 대성했고… 적수에 금군과 함께……."
"금군과 함께 있다고?"
이때였다. 갑자기 산 아래에서 젊은 거지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올라왔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개방 방주 묵산을
찾아내고 달려가 큰 소리로 고했다.
"서안 분타주 위정번(位整煩) 위 분타주께서 급히 전해드릴 게 있다하십니다. 친필서한이 있습니다."
거지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얼굴에 피로가 가득 한 것이 아무래도 멀리서 온 것 같았다. 서안에서 온 것이리라. 그
거지의 옷엔 매듭이 한 개 뿐이라 일결 제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묵산은 얼른 뛰쳐나가 그에게서 서한을 받아
들고 한동안 조용히 읽었다. 군웅들은 대체 무엇인가 하고 궁금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석앙이 하는 말이 더 궁금했
다. 내공이 부족한 자들은 말이 잘 들리지 않아서 자꾸 가까이 붙고 있었지만, 조금 듣는 사람들이 뒤로 내용을 알
려주고 있어서 석앙이 하는 놀라운 말들을 다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양도 개방의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석앙이 더 중요했다.
"석앙. 계속 말해봐."
"금군의 숫자는 오백쯤 되는데… 원래는 서안에 있던 군사들… 갑자기 몽고군이 쳐들어와서… 성을 뺏기고 도망쳤
다고… 적수에서 융 사형과 합류해서… 숨어 있는 상태……."
"그럼 내가 어떡하길 원해?"
"사형을… 죽이고… 금군은 살려 보내 줘……."
석앙은 지금 금나라를 그 어떤 악마보다도 원수로 여기는 한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그리 말했다. 진양은 그런 일에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나 차마 거절할 수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기야 오백
명이라면 그리 큰 숫자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문제는 융왕이지 그깟 오백 명의 패잔병이 아니었다.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그래, 믿어라.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믿어라!"
"너… 상혼객… 강하지만… 사형도… 12성 대성……."
석앙의 숨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양은 갑자기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석앙! 말을 하지 마라. 내가 내공을 불어넣어 주겠다."
"넌… 내 유일한 친구… 소련아… 친구 얻었다……."
이젠 이상한 소리도 해댄다. 하지만 진양에겐 조금도 이상한 소리가 아니었다. 칼로 가슴을 찢는 그런 음성과도 같
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런 정도로 진양과 석앙은 마음이 맞는 친구사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소련아… 네 말대로… 좋은 친구 만나서… 만족했다……. 이제… 다시 널 만날 차례……."
"석앙! 정신차려라!"
"난 비참한 운명… 유일한 사랑도 두 달만에 잃고… 유일한 친구와는 한 달만에 헤어져… 운명이라면… 받아들
여……."
"석앙!"
진양의 외침에 대한 응답처럼, 아니면 진양의 진심을 외면하듯, 그렇게 석앙은 고개를 꺾었다.
죽음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 아까만 해도 웃으며 농담 따먹던 그가 어느새 무굉을 죽이려 들다 도리어 죽고 말
았으니. 발에 밟힌 꽃처럼 죽은 그는, 31살의 나이에도 배운 무공 때문에 결혼도 못 해보고 온갖 멸시만 받다 허무
하게 죽은 남자. 사람들은 그를 화주대도라며 멸시하지만 실제로는 화주음장 같은 악랄한 무공이라도 전수해준 역
숭무를 사부로 깍듯이 모시고, 악랄한 사형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착한 남자. 그는 그렇게 죽고 말았다.
불쌍한 인간. 진양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눈을 잃어 장님이 되었지만 감긴 눈으로
도 눈물을 찔끔거리며 흘러내렸다. 물론 눈물을 흘리면 눈이 아팠다. 그러나 어찌 지금 그런 사사로운 아픔에 눈물
을 멈출 수 있으랴! 진양이 마지막으로 사귄 친구가 될지도 모른 석앙이 죽어버렸다.
"석아앙!"
진양의 절규에 좌중은 숙연해졌다. 모두들 느끼고 있었다. 화주대도 석앙이란 남자가 얼마나 불쌍한 남자였는지 말
이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원하지도 않는 악랄한 무공 때문에 금수같은 짓을 행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면서도 사
부는 사부라며 보은하고자, 그 한을 풀어드리고자 자신보다 한참은 강한 무굉에게 정면으로 싸우다가 죽어버렸으니.
그것도 모르는 강호인들은 그가 무슨 악마라도 되는 듯 미워하고 저주했으니!
최초로 정적을 깬 건 오히려 진양이었다.
"묻어주겠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겠다. 이승에선 음지에서만 살았으니 저승에선 양지바른 곳에서 살아라."
진양은 그를 번쩍 안아들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석앙이 비록 가벼웠지만 진양의 애당초 뛰어났던 경공에 음양합무
론에서 얻은 지식이 합해지니, 그의 경공 실력은 가히 놀라운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단상 위에서 두어 발짝 정도 달
리다 번쩍 몸을 날렸을 뿐인데 군웅들이 그 모습을 따라가는 순간 그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모두가 놀라 가볍게 탄
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단상 위엔 웬 투명한 액체가 몇 방울 떨어져있었다.
진양이 떠난 뒤 묵산은 편지의 내용을 밝혔다. 아니, 밝힐 내용도 없었다. 이미 석앙이 다 말해주었던 내용이다. '몽
고군이 쳐들어와 금군을 몰아내고 서안을 점령했는데, 몽고군은 더 전진할 뜻이 없다. 그래서 이럴 땐 우리 강호인
이 나서서 나머지 무리를 소탕해야 한다. 개방 제자들을 보내 알아본 결과 그들은 지금 적수에 위하 부근 숲에 숨
어있고 숫자는 오백여 명으로 추정된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군웅들은 너나할것없이 저절로 규합했다. 지난번 북망채를 멸할 때처럼 다시 한번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엔 융왕 한 사람만 잡는 게 아니라 철천지원수 금군을 때려잡는 일이니 만큼 더욱 기세 높게 규합되었다. 단,
석앙이 금군은 살려달라고 했던 말 때문에 꺼려하는 일부 강호인들도 있었다.
양만풍은 좀 전 상혼객이라는 자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진양인 것 같다고 생각한 탓일까? 하기야
한쪽 팔이 없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필요 이상으로 깊이 눌러쓴 사립도 굉장히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지
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상혼객은 떠났고, 눈앞에 닥친 것은 감총방이 쑥대밭이 됐다는 것과 적수에 있다는
금군이다. 양만풍은 오래 전부터 금군 만큼은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했기 때문에, 설령 상혼객이 정말 진양이고 자신
들을 막아 금군을 살려준다 해도 싸울 생각이었다. 감총방이 가장 먼저 하산했고 뒤이어 군웅들이 하산했다. 함종문
은 뒷정리를 하고 하산했는데, 조덕은 동촉삼속을 불러다가 이런 말을 했다.
"금군이 있다고 하니 너희도 대송을 위해 힘써라. 무공을 익히는 건 협을 위함이니 조금도 손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다. 알아들었으면 떠나고 다시는 이 산에 오르지 마라."
그는 매정한 말을 남기고 그 날 바로 봉문을 했다고 한다. 동촉삼속은 눈물을 삼키며 하산했다. 그들은 조덕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대천산 봉우리에 모였던 강호인들 중 진양과 석앙만 빼고는 전부 적수로 향하게 되었다. 감총방은 먼
저 난주에 들렸다 향하기로 하였고 군웅들은 그들이 오기를 일단 서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개방은 적수에 있는
그들이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주변에 여러 제자를 심어두었고, 동촉삼속은 감총방과 따로 행동하는 듯 그들
의 행동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적수로 향했다.
아니, 사실은 모두가 아니다. 다들 그렇게 착각했을 뿐이고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한 사람이 빠졌다는 걸 양만풍은
하산을 해서야 알았다. 바로 자존자대 무굉. 그는 교묘하게 혼란한 틈을 타서 운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끝에 잽
싸게 사라져버렸다. 들리는 후문으론 첩첩산중 어딘가에 은거했다고는 한다. 나중 이야기지만 후에 양만풍 등이 아
무리 찾아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운무가 무굉에게 약속했다는 건 이런 것이었다.
<무 시주가 조덕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감총방과 함종문의 싸움을 중재한다면 노납은 무 시주를 더 귀찮게 하지
않겠소. 그러나 다시 말썽을 부린다면 또 잡으러 갈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