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四 十 二 章. 적수 대전 1 (85/90)

                                    第 四 十 二 章. 적수 대전 1

대명사 옆의 한 언덕에서 작은 흐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느껴 우는 소리, 듣고 있자면 저절로  마음이 우울해

지는 그런 비통한 흐느낌이었다. 흐느낌에 맞춰 그를 달래주기라도 하는 듯 나뭇잎들은 몸을 살랑대고 있었다. 누가 

우는 건가? 그건 대천대연에 참석했던 사람이라면 조금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언덕엔 누런 사립을 깊게 눌러쓰고 

한쪽 팔이 잘려나간 괴상한 사람, 바로 진양이 있는 것이다.

대명사 근처에 보면 한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오지 않는 한 바깥에선 잘 안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땅의 굴곡과 이

쪽저쪽에 널린 나무들이 그 언덕을 가려서 대명사 중들이나 함종문 사람들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곳이기도  했

다. 그런 만큼 이 언덕으로 가는 방법도 여간 만만치 않았다. 가는 길이 너무 험해서 그냥 갈 수는 없고  대단한 경

공의 고수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진양은 이미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라있었으므로 이런 곳에 오는 건 너무나 쉬웠다.  하지만 가는 것만 쉬웠지 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갈 수밖에 없었을 뿐. 언덕 한쪽으로 낭떠러지가 있는데 진양은 그 낭떠러지를 등지고 

한 묘비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넓은 구름바다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소련이라는 여인이 너의  여인이었다면 함께 신선이 되어 저 구름바

다에서 놀아주어라."

구름바다는 낭떠러지 아래로 광활하게 펼쳐진 구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낭떠러지  중간쯤에 우유 빛 구름이 바다처

럼 있어서 구름바다라는 말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묘비에서 본다면 언덕 아래 낭떠러지는 정면이 되는 셈이라 

이 구름바다처럼 편안한 세계에서 지내라는 것 같았다. 진양은 장님이라 구름바다를 볼 수는 없었지만, 옛날 대천산

에 살아서 어느 정도 높이면 구름이 모이고 안개가 잘 끼는지 자세히 알고 있던 것이다.

"나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은 것이다. 장님이 되었고 한쪽 팔도 잃었지만, 평생 원치 않는 일로 어쩔 수 없이 저주를 

받으며 산 너에 비하면 별 게 아니었다. 게다가 넌 사랑하는 여인도 잃은  것 같았고 나를 유일한 친구로 여겼지만 

또 헤어지게 되었으니……."

그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을 잇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도 않을 묘비. 그러나 묘비엔 분명 글이 새겨져있

었다. 돌로 긁어서 새긴 듯 했는데, <호인 석앙지묘(好人 席仰之墓)>라는 글귀가 새겨져있었다. 진양은 마치 사립을 

뚫고 그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 얼굴이 묘비에 정확히 향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립을 벗었다.

"내 얼굴이 보고 싶다고 했지……."

아마 진양의 옛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아니,  아닐 지도 모른다. 그는 매우 수척해 

보였다. 안색이 파리하고 피부가 그리 곱지 못한 것이 고생한 과거가 훤히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온갖 역경을 

겪은 그런 남자의 얼굴이었다. 피로가 가득한 듯, 슬픔이 가득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도가 풍기기도 했다.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다. 진양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점이라면 눈  정도다. 장님이 되어도 

눈은 뜰 수 있는데 진양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정고도 몰랐다. 그가 안 뜨는 것인지 어떤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치 자는 사람처럼  고요히 감겨있는 눈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감겨진  눈 사이가 촉촉한 

물기로 젖어있었다.

"난 형란을 찾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훗날 형란을  다시 찾았을 때 그때 그녀와 무 

형님, 만풍 등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어.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나와 원수진 사람도 많아서 드러내기 곤란했었

지. 그러나 너를 만나면서 조금 달라졌다. 이제 잠시 후 이곳을 떠날 땐 다시 사립을 쓰겠지만, 떠나기 전까지 너와 

얘기하는 동안엔 쓰지 않을 거야."

그는 곧 일어서며 묘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강호를 출도하면… 내가 아는 사람들만큼은  절대 죽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했건만…….  많은 사람들을 돕고 

덕을 쌓아서 이전의 죄를 씻으려 했건만… 결국 한 달만에 또 너 같은 훌륭한 친구를 살리지 못했구나."

말을 끝내며 다시금 흐느끼는 진양의 모습에선 충분히 석앙에 대한 우애를 볼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다. 만난 지 

겨우 한 달 남짓한 사람이 바로 석앙이었다. 그런데도 진양이 이렇게 슬퍼하는  건 그만큼 석앙이란 사람은 진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애뿐만이  아니라 사정을 전해듣고는 그가 얼마나  비참한 운명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우애 이상으로 동병상련의 정도 느낀 것이었다.

"너의 앞에서 다시 한번 맹세하겠다. 네 소원대로 융왕은 반드시 죽일 것이고 금군은 반드시 살아 돌아가게 만들겠

다. 천하의 영웅들이 날 매국노라고 욕해도 좋다. 난 너의 소원을 반드시 이루어줄 것이다."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양만풍 같은 나와 절친한 사람들도 죽는 일이 없게 만들겠다. 뼈가 가루가 되도 말이다. 넌 비록 안타깝게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지만 다른 사람까지 그리 되게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다. 내 힘이 되는 데까지, 아니 설령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겠다."

한번 큰 일 벌어질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양의 얼굴에선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결심을 한 것이다. 매국노가 

되더라도 석앙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만풍 등을 다치게 하지는 않겠다는 그런 맹세였다.

곧 하산한 진양은 문득 형란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난주 감총대전에 있다고 들었는데 석앙의 말로는 융왕이 감총방

을 공격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형란도 자연 위험해질 것이다. 진양은 일단 사태도 자세히 알아볼 겸 먼저 난주

로 향했다. 근방에서 튼튼한 말 한 마리를 사고 질풍처럼 달려 오로지 북으로, 북으로만 향했다.

가는 길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어떤 누구도 그를 장님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잘만 달렸다. 당연히 그

러하다. 남들에게 사립 쓰고 말을 탄 채 전력 질주하는 저 자가 장님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

고 말 것이다. 그들은 진양이 진안을 쓸 줄 안다는 걸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알려준다고 해도 믿지 않

을 것이고, 믿는다고 해도 진안이 뭔지 모를 것이다. 진안의 이치를 설명해줘도 깨닫지 못하여 믿지 않을 게 분명했

다. 그러나 진양은 분명 장님이었고 그러면서도 말을 타고 잘만 달렸다.

난주성에 도착한 진양은 성문에서 잠깐 멈추게 되었으나 이내 통과되었다. 가보니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듯 검문

이 철통같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엔 왠지 느낌이 달랐다. 진양은 갑자기 형란의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비키시오!"

난주 대로 한복판에서 말을 타고 맹렬히 달린 진양은,  계속 길을 물어가며 감총대전으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형란이 있다는 감총대전과 진양의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심상치 않은 소

리도 들렸다.

"미생형, 미생형!"

"방주님! 모두 죽었습니다."

"정말 융왕이 왔다간 거야."

"방주님, 형 낭자도 없어요!"

꽤 되는 거리인데 진양은 그런 소리를 충분히 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는 그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말을 채찍질했다. 귀로 들리는 모든 것들로 형상을 만들며 

그는 그렇게 빨리도 감총대전에 도달했다.

냄새가 맡아졌다. 감총대전이 코앞에 있다는 건 진양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가 전혀 없고 오

히려 타는 냄새만 났다. 감총방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그는 마상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잠시 주변에서 들리는 말

소리와 냄새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과연 감총대전은 하나의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몽고군과 사이가 좋은 난주 최고의 

방파 감총방을 잿더미로 만들 줄을! 감총방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불타버려서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고, 

일부 운이 좋은 자들만 시신이 온건했다. 그 일부 중에 다행히도 미생요가 있었다. 몽고병이 진화를 하고 홀로 살아

남아 신음하는 그를 막 치료하던 중이었다.

"사, 살 수 있습니까?"

양만풍의 목소리였다. 진양은 곧바로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진안의 독특한 방법을 이용하여 소리만으로 

모든 사물을 형상화했다.

"안타깝게도… 중상을 입어서……."

"살릴 수 없습니까……?"

몽고군은 불타버린 대전 앞에 온건한 시신들을 나열해놓은 상황이었다. 그  옆에선 미생요를 치료하고자 의원을 불

렀는데 의원은 맥을 짚어보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때 양만풍  일행이 나타난 것이었다. 미생요는 곧 죽을 듯 했

다. 숨소리가 너무나 가냘프다.

"바, 방주님……."

"미생형! 대체 어찌 된 거요?"

"융… 융왕 그놈이… 어떻게 살아서……."

양만풍은 '융왕'이란 말만 들어도 이젠 치가 떨렸다. 갑자기 그의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풍긴다. 미생요가 뭐

라고 더 말을 하려고 하자 양만풍은 급히 말렸다.

"됐소, 됐소. 알고 달려온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형 낭자가……."

"란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소?"

미생요의 숨이 점차 빨라진다는 걸 진양은 깨달았다. 죽음이 임박했다.

"복차경… 융왕과 내통을… 형 낭자는 복차경이 납치하……."

"무슨 말인지 잘 알았소! 이제 그만 말하시오."

"부디… 악을 멸해서… 나라와 백성… 안위를… 훌륭한 방주가 되기를……!"

"미생형!"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더불어 고개가 꺾이는 소리도 들렸다. 이어서 양만풍과 감총문도들의 흐느낌이 들

리기 시작했다.

(란아가 납치되었구나! 적수로 향했을 테니 구하러 가야겠다.)

진양은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했으나, 미생요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와 친분은 없었지만 양만풍의 흐느낌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던 것이다. 얼마 전에 자신도 석앙의 죽음 앞에서 흐느꼈지 않았던가? 그는 미생요 등이 있는 

방향을 향해 잠시 읍을 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그곳을 떴다. 양만풍은 그 자리에서 한 차례 악을 지르는 듯 했다. 비

분이 가득 담긴 그 괴성으로 그렇게 악을 지르더니 동시에 몇 마디 말을 했다. 대전과 멀어져 가는 진양도 잘 들을 

수 있었다.

<적수로 바로 출발한다>

적수는 서안에서 위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나온다. 본래는 마을이었다. 송나라  때만 해도 서안과 가까이 있어서, 

크게 번창하진 않았으되 제법 이름은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침공으로 서안이 함락될 당시 약탈을 당하

여 완전 폐허가 된 곳이었다. 지금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집이 몇 채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양만풍 일행은 서안에 들려서 강호인들을 규합하고 곧장 적수로 향했다. 과연 서안은 몽고군 천지였다. 굉장히 살벌

하여 서안 주민들이 겁을 먹고 집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일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몽고군에 성 밖에 민가를 

약탈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 말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역시 양만풍이었으나 그들은  송을 돕고 있었으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한번은 몽고병과 충돌도 있었지만 양만풍을 알아보는 병사가 있어서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수에 도착한 일행은 폐허가 된 마을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미 폐허가 된지 꽤 오래되어서 알고 있기는 했

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보니 전쟁의 희생양이 된 백성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금군은 오래 전 이곳을 폐허로 만

들고는 더 손을 대지 않았다. 굳이 이런 작은 마을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적수는 강을 

등지고 모래만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폐허 앞에서 멍청하게 서있는 양만풍에게 뒤에 있던 묵산이 말했다.

"양 방주. 어서 갑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잖소?"

"아! 미안하오. 폐허가 된 마을을 보니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서 그랬소."

그들은 다시 적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줌의 모래로 변한 집들인양 유난히도 이 부근엔 모래가 많았다. 큰 강이 뒤

에서 흐르고 있어서 그런지 은근히 서늘한 바람도 불었다. 낡아서라도  버티고 있는 집은 열 채를 넘지 못했고, 강 

가까이로는 숲이 있었다.

"개방 제자가 알아본 결과, 융왕과 금군은 저 숲 안에 있었소. 금군의 병력은 오백여 명쯤 되고 우두머리가 팽준(彭

駿)이라는 놈이요."

"그럼 숲을 포위합시다. 일단 혼전이 벌어지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병사들 서넛 앞에선  속수무책이 되오. 

그러니 함부로 쳐들어가지 말고 각각 대를 나눠서 기습을 하는 게 좋겠소."

반대 의견은 없었다. 확실히 조련된 병사들은 혼전에도 능하기 때문에, 만일 혼전이 벌어지면 한 명 한 명이 독립적

인 강호인들은 매우 불리했다. 아무리 무공이 높다한들 죽여도 죽여도 계속 창을 내미는 병사들을 어찌 감당하겠는

가? 한 명이 다섯을 맡는다는 건 말하기만 쉽다. 실제로 혼전이 벌어지면 사람  키 만한 창이 전후좌우에서 불쑥불

쑥 튀어나와 알면서도 막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숲은 작았기 때문에 포위하기는 쉬웠다. 실제로 숲 안엔 얼마간의 공터가 있었다. 해서 금군이 이곳에 숨은 것이다. 

밖에선 설마 이 숲 안에 금군이 숨어있으리라고는 모를 테니 나름대로 안전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허나 개방의 정

보력 덕분에 일단 금군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은밀히 포위를 했다. 양만풍은 묵산 같은  일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함께 잠시 계책을 마련했다.

공격은 곧 시작되었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 바로 행동에 옮길 수가 있었다. 양만풍이 이끄는 감총방 스무 명이 먼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쳐라."

속삭이는 듯한 말로 양만풍이 명령을 내리자 스무 명의 감총인은  재빠르게 금군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인데

다 설마 이런 기습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진 주변에 보초를  서던 수십 명의 금군은 삽시간에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양만풍 일행은 기세가 올라 그대로 밀어붙였다. 진채를 뛰어넘어 막아서는 금군을 향해 주먹을 대고 

창을 댔다. 그러나 금군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간단히 무너지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신호가 울리자 점차 대열

을 찾아가고 있던 것이다.

"됐다. 그만 돌아가자!"

양만풍은 더 있다간 낭패할 거라는 걸 깨닫고 재빨리 퇴각을 명령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무 명의 감총인

은 순식간에 진채에서 빠져나왔다. 당연히 금군의 추격이 있었다. 금병들은 스무 명밖에 안 되는 그들을 깔보고 창

을 꼬나 쥔 채 그들의 등을 찌를 듯 달려들었다. 그때쯤 감총인 한 명이 하늘에 신호탄을 올렸다.

"오랑캐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순간 좌우에서 군웅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무리의 군웅들은 추격병의 옆구리를 쳤고, 또 한 무리는  오히려 진채를 

급습했다. 많은 수가 한꺼번에 혼전을 벌이면 불리하기에 일부로 이런 각개격파의 전술을 쓰는 것이었다.

추격해오던 금병 수십 명은 너무나 간단히 몰살되었다. 앞뒤로 공격을  받아 우왕좌왕하다가 군웅들의 공격에 허무

하게도 무너졌다. 양만풍 등은 다시 방향을 돌려 진채로 돌진했다. 진채에는 이미 급습을 한 군웅들이 열심히 싸우

는 중이었다. 조금은 방비를 한 듯 했지만 그래도 설마 바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양만풍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두에 서서 창을 휘둘러댔다. 악가창법의  오묘함을 살려 허둥대는 금병 두

어 명을 곧바로 죽여버렸다.

머지않아 또 신호탄이 울렸다. 역시 감총인이 올린 것으로 군웅들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금군의 등뒤

에서 나타났다. 금군은 기습한 무리를 상대하면서도 오십 명도 안 된다는 말에 전 병력을 투입하진  않았는데, 갑작

스럽게 또 등뒤에서 기습을 감행해오자 점점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막아! 막아!"

금군 뒤에서 말을 타고 사색이 되어 부르짖는 자가 있었다.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는 자고 또 아까부터 쭉 지휘를 

해오던 자라 그가 바로 팽준이라는 것을 다들 알 수 있었다. 허나 특별히  찬란한 복장은 아니라서 본래 직분이 높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팽준은 이들의 지휘관이긴  하지만 원래 위치는 형편없는 것 같았다. 이런 작은 

기습에도 자꾸 놀라며 사색이 된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을 알 수 있게 했다.

"저놈을 쳐야해!"

묵산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막아서는 금병들을 삼화무추대장권으로 허수아비처럼 쓰러트리고 전장 속의 맹

장처럼 무자비하게 돌진했다. 묵산은 금군의 배후를 친 개방을 지휘하고 있어서 팽준과는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금

병들이 배후의 기습에 놀라 일단 앞을 막고 있었지만, 개방의 거지들은 잘  화합하여 한순간에 그들을 깨트려 길을 

열었다. 묵산이 금방이라도 팽준의 코앞에 닥칠 것 같았다. 팽준이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묵산도 같이 비명을 질렀다. 팽준을 향해 내리치던 주먹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몸만 붕 떠

서 개방인들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상태를 본 개방인들 역시 절로 입이 벌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묵산의 

오른손이 터지기라도 한 듯 사라지고 손목에서 피만 철철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가슴에도 격타를 당한 듯 신음하

며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알아서 찾아왔구나!"

팽준 곁에서 누군가 소리치더니 개방인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거지들은 그 기세가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님을 알고 

그가 바로 융왕임을 짐작했다. 과연 옛날의 그처럼 덩치도 크고 한번 손을 휘두르면 두어 명의 군웅들이 피를 토하

며 쓰러졌다. 동시에 금병들도 기세를 되찾아 덤벼드니 이대로 있다간 전멸이 확실했다. 서안 분타주로 묵산과 동행

했던 위정번은 사태를 직감하고 내공을 모아 크게 소리쳤다.

"감총방이 있는 곳으로 피해요!"

개방인들은 위정번의 외침을 듣고 우회하여 양만풍  쪽으로 향했다. 위정번은 도망치면서 미리  준비했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연달아 세 발을 쏘아 올려 이번엔 뭔가 다름을 암시했다. 과연 그러했다. 남은 수십 명의 군웅들이 한

꺼번에 몰려오는 것이었다. 위정번은 그들과 합세하여 추격을 잘 막으면서 조금씩 양만풍 쪽으로 이동했다.  금병이 

무섭게 덤벼들자 운화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덕분에 결국에는 양만풍과 합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해가 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개방인들이 가장 피해가 심했고 강호인들도 많이 죽어나갔다.

"포위해라!"

팽준의 고함소리였다. 양만풍은 개방, 운무 등과 막 합세하였는데  도망치기도 전에 벌써 백여 명의 금병이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말았다. 한 차례 무너지면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만 것이다. 팽준은 곧 고함쳐서 

공격하지는 않게 하고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왔다. 아까 사색이 되었던 얼굴을 먼지 날리듯 없애고 아주 의기양양한 

얼굴로 양만풍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의 곁에는 눈에 익은 덩치 큰 자가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봉두난발의 

머리에 더러운 옷차림이었지만, 얼굴만 봐도 그가 융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게 당한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일거에 전멸할 리는 없다는 점이었다.  숲이 전체적으로 작아서 안의 공터

도 그리 넓지 못했다. 때문에 금병 수백 명이 동시에 덤벼드는 건 피할 수 있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한인인 거 같군! 감히 대금국의 진채를 기습해?"

팽준이 거만한 얼굴로 소리쳤다. 시선은 딱히 정해진 곳이 없고 그냥 양만풍  등 군웅들을 바라보며 소리친 것이었

다. 양만풍이 한 발 나서며 맞받았다.

"그 빌어먹을 소금국이 뭘 어쨌다는 거냐? 네놈을 치고 금군을 모조리 몰살할 수 있었는데… 다만 안타까울 따름이

다!"

"뭐라고? 이놈이 감히… 죽고 싶으냐?"

양만풍은 지지 않았다.

"대송을 침략하여 수많은 백성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조정을 멋대로 주물러 모두를 괴롭히는데 뭐가 어쩌고  어

째? 오늘 우리가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과 끝까지 싸워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갈 테다."

"건방진 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그러나 안 한다면 아주 비참하게 죽여주

마."

"시끄럽다! 송의 조정 대관도 대관이지만 너희도 그에 못지 않다. 망할 대관들은 제 목숨에 연연하여 너희 같이  악

랄한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르다는 걸 오늘 똑똑히 알려줘야겠다."

양만풍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백성과 나라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군웅들은 그에 깊

은 감명을 받은 듯 죽음을 각오하는 얼굴로 서있었다.

사실 팽준은 병사를 지휘할 만큼 높은 직분이 아니다. 병졸이면 몰라도 이렇듯 오백 명이나 지휘할 만한 장군은 아

니었다. 그가 이렇게 병사를 이끌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서안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고 말았는

데, 팽준은 목숨에 연연하여 동문으로 재빨리 도망을 쳐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추격병이 있을 것이므로 혼자 

도망쳐봐야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항복한다고 해도 몽고군은 잔인하다고 하여 죽일 거라고 여겼다.  그리하

여 팽준은 전투 때문에 혼란한 틈을 타  대기 중이던 병졸들에게 원군 요청을 빌미로 따를  것을 명했다. 병사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상황이 너무나 화급해서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연기도  일품이라 오백 명 중 그 누

구 하나 속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이니 만큼 금국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없었다. 양만풍은 곧 죽을 것이라 여기고 한이라도 풀 듯 온갖 욕설

을 내뱉었지만 그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일부로 화를 내는 것일 뿐, 속으론 웃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고 가만히 웃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이 오백 명의 병졸들은 요즘 들어 그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군을 요

청하러 간다더니 웬 이상한 괴인을 받아들이고 이 숲에서 숨어있으니 말이다. 물론 병졸들이 무슨 금국에 충성하는 

대단한 충인들이라도 되는 건 아니었으나, 그들에게도 눈이 있으므로 팽준은 짐짓 화난 체를 했다.

"저… 저 망할 놈… 저 개 같은 놈을 쏴 죽여라!"

포위한 병사들이 활을 꺼내들었다. 군웅들은 깜짝 놀라 무기를 앞으로 내밀며 날아올 화살에 대비하고 있었다. 허나 

말이 대비이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근접한 거리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모두들 죽음

을 각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갑자기 나무 위에서 웬 남자 셋이 팽준에게로 떨어졌다. 팽준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입을 딱 벌렸다. 완전히 얼어

버려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 세 사람의 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융왕이 반응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을 더 구기고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모조리 쳐내버렸다. 한순간  몸을 띄우더니 공중에서 

양손을 이용하여 검의 옆구리를 때리는 것이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새로 나타난 세 명의 괴한은  검과 함께 몸이 

날아가고 말았다.

"아니? 동촉삼속이잖아?"

한 강호인이 한 말이었다. 과연 가까이서 보니 동촉삼속이 맞았다. 허나 연경후는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 사형, 마 사제. 삼진(三陣)을 펼칩시다."

"융왕을 먼저 죽여야하나?"

"그렇습니다."

연경후는 삼진을 제안했다. 삼진은 산중답십이공진을 크게 축소한 것인데, 그리하면 십이공진 그 특유의 힘이  사라

지지만 이화접목의 이용은 그대로 할 수 있었다. 문득 양만풍이 말했다.

"연형. 융왕의 무공이 예전 같지 않소."

분명 연경후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사원, 마보강과 함께 삼진을 펼쳤다. 그가 입을 연다.

"융왕! 살아있다니 의외로구나. 아무튼… 겁나지  않으면 혼자 덤벼봐라. 겁나면 병사를  이용해서 공격해도 상관없

다."

"후후. 뭔가 오해를 하는구나."

처음으로 융왕의 입이 열렸다. 이제껏 기껏해야 기합만 해서 벙어리가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줬을 뿐, 한  마디도 하

지 않았다가 이제야 말을 한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좀 더 탁한 듯 했다.

"나는 식객일 뿐이다. 그리고 밥값으로 팽 장군을 돕는 것뿐이다."

"과연 끼리끼리 노는군. 그럼 결국은 겁이 나서 혼자 덤비진 못하겠다는 거냐?"

"누가 그런 말을 했냐?"

융왕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팽준에게 말했다.

"팽 장군. 저놈들은 저 혼자서도 무난히 처리할 수 있으니 굳이 군사를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소? 뭐 그럼 한번 해보시오."

팽준은 융왕에 대해서 잘 아는 듯 했다. 그가 부탁을 하자 얼굴이 조금 변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융왕은 간

단히 읍하고는 삼진 앞에 우뚝 섰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듯 하다. 지켜보는 양만풍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서로 원

수처럼 대하긴 하나 한때는 절친한 관계였고, 이미 은원도 해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걱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삼

진 정도로는 융왕을 제압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위정번도 '융왕이  얼마나 재빨랐는지 눈 깜박 하고 나니까 묵 

방주가 부상을 당했다.' 하고 말했을 정도다.

(위험해, 위험해! 융왕은 과연 석앙의 말대로 초고성장을 12성 대성했고 공력도 한층 더 깊어진 거 같구나. 나는 물

론이고 운무 대사나 운화 대사가 상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삼진은 비록 강하긴 하지만 산중답십이공진 특유의 

위력이 사라졌으니 융왕을 제압하기는 힘들 것이다.)

양만풍은 나름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조바심을  냈다. 그때 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선공은 융왕이었다. 후배에게 

먼저 공격을 허락하지도 않고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미친 듯이 살초를 퍼부었다. 하긴 이해할 수도 있는 부

분이다. 융왕은 본래 악랄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결국 감총방과 함종문에 의해  북망채가 멸하고 말지 않았던가. 정

말 그런 것인지 몰라도 아무튼 융왕의 온몸에선 그야말로 살기가 거센 파도처럼 몰려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