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 十 二 章. 적수 대전 2
모두가 아는 사실이듯 삼진은 십이공진의 열 두 방위를, 세 명이 네 방위씩 나눠 맡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화접목의
오묘함을 그대로 삼진에도 옮겨놓을 수가 있었다. 허나 여서벽, 소이한, 화묘거, 별천지의 방위가 발휘하는 경천동지
의 힘은 없어졌다. 이 방위들이 힘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정해진 세 방위가 합해져야 하기 때문에 한 명당 네 방위
씩 맡는 삼진의 경우에는 절대로 특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날 북망채를 공격했을 때 가장 위력을 본 건 역시 산중답십이공진이었다. 이 진법으로 인해 북망채 도적들이
순식간에 괴멸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당시 융정도 이전보다 무공이 한 단계 올라서 조덕과도 맞먹을 그런 경지
에 올라있었다. 하지만 이 진법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얼마나 괴이하면서도 강력한지 이 앞에서 한동안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연경후의 검 끝에 목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융왕은 아들의 그런 최후를 알고 있었다. 해서 감총방도 밉지만 함종문은 거의 저주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망할 함종문의 동촉삼속이 나타나서는, 십이공진과 매우 유사한 삼진을 펼치는데 어찌 대노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지금 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원래 성품마저 악랄하여 이들을 그냥 죽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천천
히 괴롭히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할 그런 계획이었다. 그래서일까? 초고성장을 12성 대성한 융왕인데도 삼진
을 제압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흥. 예전보다 오히려 약해진 거 같군. 정말로 무공이 예전 같지 않구먼!"
연경후의 조롱이 담긴 말이다. 언뜻 들으면 그냥 융왕을 모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욕의 범주에 양만풍도 끌어
들이고 있었다. 양만풍은 이 말을 듣고 그냥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들이 자신들의 사부를 너무나 존경하여 그러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융왕은 그의 말에 화가 난 듯 했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꺾을 성싶으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융왕의 쌍장은 쾌속무비로 움직였다. 그 손바닥은 또 어찌나 단단한지 검과 부딪쳐도 오히
려 검이 퉁겨질 지경이었다. 한 두어 초 붙었을까? 융왕은 무굉이 썼던 방식대로 양강지기의 초고성장법을 앞세워
이 삼진을 간단히 와해시키고 말았다.
연경후는 너무 화가 났다.
"이놈! 알고 보니 대천대연에 참석했었구나."
"또 무슨 헛소리냐?"
연경후가 그런 말을 한 건 이화접목을 깨트린 수법이 무굉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융왕은 대연에 온 적이
없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경후는 그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이 비열한 놈. 아무튼 좋다. 우리는 오늘 몸을 불살라 너와 금군을 모조리 쳐죽이겠다."
"네놈은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왜 네놈이 날 죽이고 금군을 죽이려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죽인다면 내가 너희를
죽여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너희의 손에 북망채가 전멸했으니까!"
"북망채는 망해도 싸다. 네놈은 한인이면서도 금군과 함께 동족을 죽였으니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저 금군은
오래 전부터 서안에 머물며 온갖 악행을 서슴대지 않았으니 역시 대가를 받아야 한다. 하늘을 대신해서 벌을 내리
는 거다."
융왕이 대소한다.
"이거 참 웃기는 노릇이군. 다짜고짜 야습이나 저지른 주제에 어디서 수작을 부려?"
"누가 야습을 했다는 거냐?"
"하하. 네놈은 참 뻔뻔하구나."
연경후는 전말을 전혀 몰랐다. 동촉삼속은 대천산에서 내려와 곧장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힘만으론 융왕
과 금군을 전부 제압할 수 없으니 먼저 군웅들과 싸우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합세할 생각이었다. 해서 일부로 느
릿느릿 이동하여 먼저 그들이 가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야습은 알지 못했다. 숲에 도착하니 병기 부
딪치는 소리, 살가죽 베는 소리, 비명 소리 등이 들려 단지 나무 위로 올라가 구경했던 것일 뿐이다. 동촉삼속은 그
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정면대결이 벌어진 줄로 알았다. 그러다 양만풍 등이 포위를 당해 고슴도치가 될 위기에 처
해서 의협심을 발휘해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융왕을 뻔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또 오히려 자신들을 보고 뻔뻔하다고 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동촉삼속은 오늘 아예 끝장을 보리라고 다짐했다.
"못돼먹은 매국노 같으니라고. 수년 전엔 불타 죽은 척 해서 살아남았지만 오늘은 안 될 것이다."
"핫핫!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삼진인지 잡진인지 모를 무슨 진도 무너졌는데 무슨 배짱으로 그런 헛소리를 나열하
는 거냐?"
"이놈!"
사원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먼저 덤벼들었다. 연경후는 나름대로 생각했다.
(정말로 삼진은 무너졌으니 그를 이길 방도가 없구나. 많은 군웅들은 금병에 포위되었고 내 힘도 융왕에 미치지 못
하니 매우 힘들겠다. 어차피 이리 된 것, 명예롭게 매국노와 싸우다 죽자. 혹시 모르지? 후세에 어떤 인물이 우리
동촉삼속을 기억해줄 줄!)
마보강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한번 맞추고는 함께 검을 뽑아 사원을 거들고자 했다. 그러
나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검에 약간의 힘을 주자 갑자기 검날이 뚝, 하고 동강나는 게 아닌가! 연경후와 마보강
은 다시 동시에 사원의 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검도 막 동강이 나있었다.
"이럴 수가? 언제 검이 부러졌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헌데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융왕이 아까 손을 써둔 것 같소이다."
돌아보니 운무다. 과연 그런 것 같았다. 정말 융왕만한 절정고수라면 그런 일은 어렵지도 않은 것이었다. 몇몇 머리
좋은 군웅들은 이때 저절로 간이 오그라들었다. 운무는 여기 있는 군웅들 중 최고 고수다. 그런 그도 말하는 투가
단지 짐작하는 듯 확신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운무조차 못 봤다는 얘기다.
동촉삼속은 벌써 합세하여 부러진 검을 버리고 함종권법으로 맞서고 있었다. 함종권법도 알고 보면 뛰어난 권법이
다. 겉은 부드러움으로 치장하고 속으론 예리함, 강함, 빠름 등을 감추어 공격하기 때문에 상대는 함부로 짐작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양도 예전에 유리장쾌의 초식만 쓰면 적들이 아차, 하는 순간 당하곤 했던 것이다. 부드러운
듯 한데 갑자기 쾌로 변해 섬광처럼 날아드니 막을 수 없고, 설령 뭔가 있다는 걸 안다고 해도 그게 쾌인지 묘인지
예인지 강인지 모르니 막기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양이 그렇게 함종권법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던 건 특유의 자존심을 밑바탕으로 한 배짱과 어렸을 적부터
검을 버리고 그 권법만 수련해온 결과였다. 그에 반해 동촉삼속은 달랐다. 이들은 함종문의 무공 절학을 모조리 익
히고 나중엔 이화접목과 십이공진까지 배웠다. 그러니 무공은 높을지 몰라도 함종권법의 부분에 있어서는 도리어
진양만 못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은 여실히 드러났다.
"윽!"
동촉삼속 중 둘째지만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총명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연경후가 제일 먼저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사원과 마보강이었다. 이들 세 명을 제압하는 데 걸린 초수는 채 다섯 초가 안 되었다. 그들의 함종권법은 하나하나
가 절묘하지 못하고 다만 술수를 부릴 뿐이라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어때? 또 덤빌 테냐?"
"비열한 놈, 우리가 검법을 쓰면 당하지 못할까봐 일부로 부러트렸지?"
마보강의 악이다. 연경후는 사제의 말이 스스로를 하수로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아서 얼른 입을 열었다.
"매국노야. 조롱할 생각일랑 집어던지고 그만 죽여라. 네놈의 손에 죽는다는 게 얼마나 더러운 건지 알지만 이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구나."
"핫핫, 건방진 녀석. 그럼 네놈이 직접 자결을 해보겠느냐? 하겠다면 난 손을 쓰지 않겠다."
"좋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다."
연경후는 단지 코웃음만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부러진 검을 들고 한순간 자신의 목을 베려고 했다. 사원과 마
보강은 그의 성격을 잘 알아서 정말로 자결할 거라는 걸 알았다. 일단 말리고 보자는 심산으로 그의 팔과 몸을 붙
들었다.
"사제, 왜 이래?"
"대사형도 자결하십시오. 매국노의 손에 죽는 건 매우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절정고수니 강호인답게 당당하게 싸우다 일 장에 맞아죽는 것도 괜찮지 않
겠어?"
사원의 말은 농담조 같으나 그는 원래 농담을 할 줄 몰랐다. 마보강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사형. 매국노의 손에 죽는 게 비록 치욕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그 매국노의 앞에서 포기하고 자결을
한다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죽을 때까지 악으로 싸우다 정히 따를 수 없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
겠습니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결국 죽음은 마찬가지. 그러나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연경후는 스스로
를 한심스럽게 생각했고 또 냉정하게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반대로 사원과 마보강
은 먼저 그의 자결을 말리려고 했던 것이지만, 이면에도 일찍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끝까지 싸우다가 기어이
패해 직접 그의 일 장에 맞아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연경후는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항상 자신이 총명하고 무공 자질도 뛰어난 천재라고 느끼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았던 그였다. 약간의 자만심이 있었지만 그건 자부심에 가까웠고 그만큼 능력이 있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
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은 완패를 당했을 때 충격도 대단한 법이다. 연경후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는 저도 모르
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포기할 순 없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하신 것도 이들을 제압하고 이후에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협을 행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리 쉽게 쓰러지면 어찌 함종문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비록
겉은 추잡할지라도 끝까지 물고 넘어져 진실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자!"
혼잣말에 가까운 그의 말은 뒤에서 듣고 있던 군웅들마저 감동시켰다. 물론 가장 감동을 받은 이는 양만풍이었다.
한동안 그의 협행을 보지 못하고 사조 단목리의 한을 풀겠다고 날뛰던 모습만 보아서 매우 안타까웠는데, 알고 보
니 협심도 그 옛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나라와 동족을 위하는 마음도 여전했다. 절로 감흥이 일어나 양만풍은
목청 높여 소리쳤다.
"이 자리에서 설령 죽는 한이 있다하더라도 그 누가 겁을 먹겠는가? 우리 강산을 침범한 오랑캐와 그들과 한편에
선 매국노를 처단하는데, 비록 힘이 닿지 못해 죽을지라도 물러서지는 않겠다."
군웅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며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도무지 포위를 당해 곧 죽을 사람들 같지 않아 보인다. 동촉
삼속도 이때만큼은 양만풍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함께 죽음을 직면하고 보니 괜히 옛날의 추억들이 속
속들이 떠올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는 역시 융왕이 깨트렸다.
"어디 한번 해보아라. 너희를 죽이고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들개의 먹이로 줄 테니."
연경후는 순간 일갈하며 미친 듯이 돌진했다. 사원과 마보강도 가만히 있을쏘냐? 세 사람이 함께 삼면으로 벌어져
금방 융왕을 에워싸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특히 이때 연경후의 실력은 한층 높아진 것 같았다. 뭔가 깨달은 바
가 있어서 그런 건지, 죽음을 등한시해서 그런 건지 아무튼 한 수 한 수가 좀 전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융왕은 이길 수가 없었다. 삼대일인데 융왕은 이미 상수를 잡은 상황이요, 언제나 먼저 공격하는 순간이었
다. 일순 연경후는 오른발을 뻗어 올렸다가 융왕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흔들거리며 내리찍었다. 이건 연경후가 만든
마퇴(馬腿)의 급조금이(急雕擒餌)라는 초식으로, 언뜻 보면 그냥 내려찍기 같지만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언제든
급전할 수 있게 흔들거리며 떨어지기 때문에 상당한 변초를 내포하고 있는 초식이었다. 융왕은 그걸 눈치챘는지 섣
불리 피하려들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일 장을 쳐들어 그의 종아리를 때려버렸다. 어지간한 인물은 급조금이의 이
괴상한 자세 때문에 저절로 피하기 십상인데 오히려 그는 한 수 빠르게 움직여 반격했으니 과연 대단한 자임엔 틀
림이 없었다.
연달아 사원과 마보강의 주먹이 융왕의 온몸을 때렸다. 아니, 때리려고 했다. 그저 근처에까지만 도달했을 뿐, 결국
엔 닿지 않는 것이다. 꼭 거의 다 근접하면 반격이 나오고 이어서 또 공격하려고 하면 이번엔 먼저 일 장이 날아와
초식을 거두게 만들었다. 꼭 반쯤은 미친 말처럼 이쪽에서 앞다리 들고 저쪽에서 앞다리 드는 식으로, 그야말로 동
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양만풍이 움직일 기미가 보였다. 팽준은 우연히 그걸 보고 안색이 변해서는 소리를 질
러 병사들이 활을 겨누게 했다. 양만풍은 잠깐 주춤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냥 물러서는 척 하
며 그들의 마음이 풀어지게 하더니 갑자기 내공을 실어 일갈해서 병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동시에 창을 넓게 붙
들고 춤을 추듯 병사들을 돌파해나갔다. 앞에서 포위하고 있던 금병들은 활을 들고 있어서 이렇게 근접하면 한순간
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간단히 포위망이 무너지는가 했다. 허나 다시금 뒤로 창병들이 몰려들며 양만풍을
에워싸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동촉삼속은 코끝이 찡해졌다. 자신들을 구하겠다고 나오다가 저런 위험을 맞이했으니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할 텐가! 정면엔 절정의 고수 융왕이 버티며 공격을 해오고 있어서 빠져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
고 그를 제압할 수도 없었다. 동촉삼속이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마치 그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운무와 운화가
몸을 날려 양만풍을 구하려고 했다. 군웅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렇게 시선이 분산되어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갑작스레 다시 혼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운무와 운화의 맹활약으로 일단 양만풍을 위기에서 구출했으나 그는 제 몸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동촉삼속을
구하고자 했다. 군웅들은 병사들과 맞붙으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양만풍은 이때 모두를 구해 얼른 달아나야 한다고
여겼다.
"대사님들은 융왕을 잠깐 저지해주십시오."
그는 운무, 운화에게 그리 말하고는 몸을 똑바로 하여 팽준에게 돌진했다. 놀란 팽준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은 금병들이 무의식적으로 창을 내질렀다. 양만풍은 지난날 전진교에서 보여주었던 독룡출동의 묘수를 펼쳤
다. 땅에다 창을 찍고 초식을 펼쳐 몸이 붕 뜨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팽준의 코앞까지 접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었을까! 본래 워낙 겁이 많던 팽준은 그가 돌진해오는 기세만 보고도 완전 넋이 나가
서 지랄병이 난 듯 혼자 몸을 떨다가 저절로 말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양만풍이 내질렀던 창은 말의 등에 구멍
만 만들고 말았다.
"이놈이!"
땅에 발이 닿자마자 그는 다시 팽준을 향해 창을 찔렀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황. 팽준이 미친 듯이 악을 써대는 탓
에 병사들이 그와 양만풍 사이를 가로막은 후였다. 금병들을 상대하고 있다보니 어느새 팽준은 저 멀리 뒤로 몸을
뺀 뒤였다.
그러는 사이 운무와 운화는 융왕과 한바탕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동촉삼속은 이미 양만풍은 물론이고 다른 군웅들
에 대해서도 반감이 싹 사라져서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설령 반감이 있다고 해도 운무는 소림사의 방장
이라서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다섯 명이 협공을 펼치는데도 융왕은 상수를 좀처럼 뺏기지 않았다. 아까
보다는 신중한 안색과 자세로써 그들 다섯을 상대했는데, 장법이 신출귀몰하고 위력이 광표장법에 맞먹을 것 같은
게 과연 12성을 대성하긴 한 것 같았다. 운무는 주로 일지선공과 탄지신통으로 그의 동작을 방해했고, 운화는 항마
선장(降魔禪杖)과 금강장(金剛掌)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으며, 동촉삼속은 기회를 보며 연이어 절묘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이쪽저쪽에서 군웅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혼전 속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강호인들 중 태반이 결국 창칼
에 맞아 죽고야 만 것이다. 그런 비명 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양만풍의 마음은 아프면서고 조급해졌다. 융왕은 어
느 순간 한 차례 쌍장을 발출해 운화의 가슴을 후려치고 말았다. 그렇게 막강해 보이기만 하던 운화도 입가에 한
줄기의 피를 흘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어서 마보강, 사원 역시 그의 장법에 맞아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날아갔다.
완연히 패색이 깊어진 상황!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운무는 평심을 지키며 사력을 다해 융왕에 맞서고 있었다.
바로 이때 어둠 속에서 휘이익, 하는 빠른 움직임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달을 가리는 듯 어둠과 동화된 듯한 무엇인
가가 공중에 몸을 날리고 있었다. 잘 보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펄럭이는 오른쪽 팔 소매, 누런 사립, 누런 봉은 그
렇게 자세히 보지 않아도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러면 누군지 알 수도 있다. 누구긴 누구겠는가? 웬 소리에 하늘
을 올려다본 사람들은 눈 한번 깜박이는 사이 그가 상혼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진양이 소리쳤다. 아직 몸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도중에 외친 것이었다. 허나 금병들은 물론이고 군웅들도 듣지 않았
다. 아니, 정말 그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치열한 혼전이라 어느 쪽이든 멈추면 바로 지옥행임을 알았기 때
문이다. 진양은 떨어지다가 한 금병의 어깨를 밟고 다시 몸을 퉁겼다. 금병은 어깨가 아프다기보다는 떨어지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저절로 주저앉고 말았다. 진양의 몸은 곧장 양만풍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사립과 비스름한 색
깔의 봉이 갑자기 이쪽저쪽으로 빙글빙글 돌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목표란 없는 듯 했다. 대체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을 못해먹는 게 일정한 자세와 동작으로 계속 동, 서
로 번쩍하며 봉을 휘둘러 적도 치고 아군도 치고 그랬다. 이 봉엔 양만풍도 허벅지를 맞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봉이 다가옴을 느끼고 잽싸게 피했지만 어느새 반대편으로 봉이 날아와 허벅지를 격타 당하고 만 것이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양의 동작은 꽤나 여유로워서 까짓 거 못 피할 거 없다, 하고 생각할 정도인데도 막상 접하
면 그 괴이한 봉의 움직임에 꼭 다리의 어느 한 부분은 얻어맞았다. 어떤 이는 반격도 하려고 했다. 허나 그리고 보
니 잘 보이지도 않았다. 진양은 꼭 춤을 추는 것처럼 봉과 한 몸이 되어 봉이 돌면 그도 돌고 봉이 나가면 그도 나
갔다. 쫓아가서 때리려고 하니까 어느새 등뒤로 돌아와 종아리를 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도 이처럼 신기하게 나타나니 금병이건 군웅들이건 모두를 막론하고 갑자기 겁을 먹고 말았다. 마침 이때 진양은
흑포를 입고 있어서 그 귀기가 더했다.
그나마 안 맞은 사람이 있다면 융왕과 운무, 운화 정도다. 그들 셋은 진양이 한동안 주변일 빙글빙글 돌며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는데도 모조리 피해냈다. 가끔은 매서운 반격도 하여 진양도 하마터면 맞을 뻔하기도 했다. 진양은 그들
을 제압할 수는 없음을 알고 그냥 몸을 돌려 다시금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저앉아서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 금병
의 어깨를 디디며 펄쩍 뛰니 금새 한 고목의 나뭇가지 위에 앉을 수 있었다.
좀 전 그가 등장할 때는 그의 몸이 달을 가렸었고, 그가 공격을 해댈 때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허나 이제 나뭇가지에 가만히 앉고 나니 달빛에 훤히 그의 몸뚱이가 드러났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가 상
혼객임을 확인했다.
"이 망할 놈아! 네놈은 대체 아군이냐, 적군이냐?"
운화의 폭발이었다. 운무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그는 벌써 펄펄 날뛰며 진양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진양
은 그가 운화라는 걸 알았다. 운화는 상혼객이 진양임을 몰라도 진양은 그가 운화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옛날에 그
불같은 성격이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는 걸 생각하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운화 대사시군요. 저는 중립입니다."
"뭐? 중립? 그건 또 뭐냐? 아면 아고 적이면 적이지 중립이 뭐야, 대체."
여전히 드러나는 부분은 입 아래고, 보이는 것은 베시시 입 꼬리를 당기는 여유의 미소였다.
"운화 대사도 보셨을 겁니다. 저는 석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뭐라고! 그럼 네놈은 금군을 도와 우리를 치겠다는 말이렷다."
운화는 이때 운무와 함께 융왕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화를 듣던 융왕은 석앙이라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기뻤다. 승리가 자신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군웅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운무도 만만치
않아서 갑자기 변수가 생길까 걱정이 됐는데, 이 돌발적으로 나타난 절정고수 괴인이 그런 약속을 했다고 하니 크
게 기쁜 것이다. 그는 즉시 진양에게 말을 건넸다.
"대협은 막내 사제를 아시는군요?"
"알지요. 그와 교제를 한 건 겨우 한 달 남짓이지만, 마음이 통했고 그의 일생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져 소원을 이루
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오! 그럼 그는 어디 있습니까?"
진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석앙 이야기가 나오니 다시금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는… 대천대연에서 화를 자초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융왕은 꽤나 놀라는 듯 안색이 잠깐 변했다. 곧 평심을 되찾고는 진양의 눈치를 보더니 밝은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막내 사제. 네가 장수할 줄 알았는데……."
진양은 저절로 코웃음을 치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다만 속으론 코웃음을 연달아 대여섯 번이나 쳐대며 그를
비웃었다.
(또 수작을 부리는구나. 네가 정말로 석앙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하는 이유
를 곧바로 물어봤을 것이다.)
내색하지 않고 진양은 말문을 열었다.
"방금 도착하고 보니 이처럼 싸움이 벌어지기에 그냥 둘 수 없어서 막게 되었습니다. 석앙과의 약속이 있어서 금군
을 도와야하지만, 그렇다고 한인 군웅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일단 이렇게 멈추게 한 거지요."
"과연 의리도 배반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대협의 풍모답습니다."
융왕이 아첨을 떨어대니 진양은 속이 부글거렸다. 그러나 아첨도 비굴한 아첨은 아니라서 과연 융왕이란 인간이 할
만한 아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양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데 운화가 버럭 호통을 쳤다.
"목소리로 보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어디서 감히 영웅 행세를 해? 네놈이 만일 금군을 도와 한인을 치겠다면
네놈은 그야말로 망할 매국노겠다."
"하하. 그렇습니까."
진양은 굳이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히려 운화의 분노를 사서 그가 더 욕설을 하게 만들었다. 운무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곧 그를 말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주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오?"
"존성대명이라니, 남들이 비웃습니다. 제 이름은 별로 좋은 이름이 아니라서 밝히기가 곤란하군요."
"얼굴은 왜 가리셨소?"
"너무 추악해서 보는 사람들이 곧잘 기절을 하기에 이렇게 가렸지요. 운무 대사께선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해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 본래 무명인이라 아무리 고심하셔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는 비록 운무는 만난 일이 없지만 양만풍이나 동촉삼속 등이 있어서 그들이 진양의 정체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얼굴을 가려도 목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진양의 목소리는 다년간 고생을 겪으며 조금 탁하게 변했
기 때문에 양만풍조차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물며 만난 적도 없는 운무가 어찌 알겠는가? 절정고수라서 행여 아는
인물인가 살펴보았지만 이처럼 사립을 쓰고 오른팔이 잘린 채 달랑 봉 하나 들고 다닌다는 절정고수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운무가 말이 없자 진양은 군웅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싸움은 그만 중지하고 모두들 돌아가십시오."
은근히 압도하는 기색이 있는 말이다. 내공이 담긴 것일까?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양만풍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인물이오? 아니, 그런 거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둡시다. 모른다고 해두고, 우리는 그냥 갈 수 없
소. 저들은 우리 강산을 짓밟고 수많은 백성을 학대하는 무리요. 이곳 적수도 원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저들이 와
서 약탈을 하는 바람에 이 모양이 되었소. 그런데도 어찌 그냥 가도록 내버려둔단 말이오?"
진양이 바로 답한다.
"틀렸소. 대저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다 몰살하겠다는 거요? 저들은 명을 받으면 그냥 따라야만 하는 밑바닥
졸병들이오. 서안이 몽고에 의해 함락될 때 도망친 패잔병들이라고 들었소. 까짓 오백 명, 뭐 하러 죽인단 말이오?
저들을 죽인다고 금국이 개과천선이라도 하는 줄 아시오? 아니면 금국이 분노해서 군대라도 이끌고 정면대결을 펼
치러 오는 줄 아시오? 이들 오백 명은 이미 버려진 목숨에 가까운 가여운 사람들이오. 살려두면 덕을 쌓는 것이요,
죽이면 악덕을 쌓는 것이지."
사실 진양도 금에 대한 생각은 무척이나 안 좋았다. 아무렴, 조국을 침범에 국토의 절반을 뺏은 나라인데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야만 했다. 석앙의 소원을 이뤄주고자 그들 금병들을 살려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만 생각을 했었는데, 적수까지 오면서 소식을 알아보고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진양
자신이 말한대로 이들은 졸병으로서 단지 명을 받든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단지 패잔병일 뿐이다. 이런 자들을
조국을 침범한 오랑캐라고 하여 죽인다고 한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이건 황제가 폭정을 한다고 친위대 병사를 죽이
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운무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돌아 박혔으나 그는 신경도 안 쓰고 진양을 향해 말했다.
"시주의 마음씨는 참으로 올바르고 착하오. 노납은 소림사 방장임을 자처하면서도 자비심이 시주만도 못하구려. 노
납은 나름대로 이들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 혈도를 누르기만 했지만, 시주처럼 모두를 말리지 않았으니 아직도 수행
이 부족한 탓이오. 내 잠시 이들의 그런 어떠한 사정도 모르고 악행을 저질렀으니 참으로 한스럽소."
"운무 대사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아미타불, 오늘 젊은 시주의 말에 크게 감복했소. 노납은 당장이라도 시주의 의견에 동참해서 자비를 베풀겠소."
진양은 한 마디로서 운무를 달랬으나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운무는 말을 마치고는 그 혼전의 대열에
서 벗어나 진양이 있는 고목 근처로 이동했다. 이러니 운화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운무를 따라 일단 고목
근처로 오다가 또 뭘 봤는지 악을 썼다.
"사형! 그런데 저놈만은 안 됩니다."
"아미타불.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으니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피 바람이 불게다."
은근히 진양의 의견을 묻는 말투였다. 진양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번엔 융왕이 소리쳤다.
"흐흥. 그래, 마치 나를 봐주는 식으로 말하는데 어디 그 소림사 방장 실력 좀 보자."
"당신도 그만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그와 싸워선 안됩니다."
진양의 외침이었다. 융왕은 진양에게만큼은 호의가 있었다. 그의 정체가 까발려지면 펄쩍펄쩍 날뛸 테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가 진양임은 모르고 상혼객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니까. 융왕은 새삼 궁금한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나도 무슨 할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매우 중요한 할 일이 있습니다."
"대협이 말씀만 하시면 속히 이행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그것이 무엇인지요?"
"이런 겁니다."
순간 진양은 중지를 퉁겨 소림의 절학 탄지신통을 발휘했다. 이들의 거리는 제법 되었는데도 이 신통은 정확하게
융왕의 족삼리혈을 때렸다. 기습 아닌 기습에 융왕은 몸이 휘청거렸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융왕은 화가 나서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무슨 속뜻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이 상황에도 말투를 제법 공손히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진양의 농락뿐이었다.
"중요한 일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암기에 맞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요?"
어둠 속인데다 너무 의외의 기습이라서 융왕은 이것이 탄지신통인 줄은 모르고 그냥 암기에 맞은 줄로 알고 있는
듯 했다. 진양은 웃었다.
"그건 중요한 일의 하나일 뿐입니다. 아직 세 개가 더 남았습니다."
"그것들은 또 뭡니까?"
진양은 또 잠깐 베시시 웃더니 이내 미소를 지우며 위압감 있는 음성으로 엄숙히 말했다.
"첫째, 난주 감총대전에 있었던 형란 낭자를 즉시 데려올 것. 둘째, 당신과 내통하고 그녀를 도둑질해간 복차경을
데려올 것. 셋째, 난주에서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여 참회할 것. 이 세 가지요."
융왕은 그제야 이 상혼객이 자신에게 호의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내버려두면 일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혹
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니, 왜 갑자기 나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거요?"
"석앙은 너를 죽여달라고 했지만 아무리 악하다 해도 생명은 함부로 없앨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난 네가 이 세
가지 일을 행하고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죽이지 않을 계획이다. 허나 만일 이 중 한 가지라도 하지 않
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너를 죽여 석앙의 소원을 풀어주어야겠다."
대강의 전말을 깨달은 융왕은 한바탕 상혼객에게 속을 걸 알았다. 너무나 치욕스러워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지고
열화가 치밀어 얼굴이 시뻘개졌다. 주변에 군웅들도 그가 당한 꼴이 재미있는지 낄낄대며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융왕은 이제 진양에게 공손히 대하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나를 농락해? 어리지만 무공이 고강하고 제법 괜찮은 놈 같아서 좋게좋게 말했는데… 이런 망할 놈을
봤나?"
"<제법 괜찮은 놈 같아서>… 는 빼주시지.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잖나?"
그가 일거에 거절하자 진양 역시 말투에서 슬슬 적의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말은 은근히 자신의 무공을
추켜세우는 부분이 있었다. 융왕은 그런 건 개의치 않았지만 그의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몇 번 칭찬을 해주니 기고만장하여 주제를 모르게 되었구나. 오늘 네놈을 잡아 사지를 끊고 불에 달구어야겠다."
"오냐, 그렇게 해주마."
"내가 네놈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무슨 헛소리가 그러냐? 사실 너 같은 강호의 쓰레기는 일찌감치 돼지고기가 되었어야 했다."
융왕은 분노에 펄펄 날뛰었다. 그는 심계도 깊고 교활하며 무공까지 고강했지만 치미는 분노에는 어쩔 수 없는 정
도였다. 가까스로 열화를 억누르며 공격하지 않을 뿐, 이를 뿌득뿌득 갈아대는 소리는 운화도 들을 수 있었다. 하기
야 그도 그럴 것이, 진양은 원래 말솜씨에 있어서 천하제일이지 않았던가. 융왕이 구미호(九尾狐)면 진양은 십미호
(十尾狐)였다.
진양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밥상에 올려줄까?"
"이노옴!"
융왕의 그 자리에서 폭발하여 아까 탄지신통이 날아가듯 그처럼 날아왔다.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고목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진양 곁으로 날아오고야 만 것이다. 운무 등은 그의 무공을 알면서도 융왕이 너무 강하
여 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융왕이 덤벼들며 곧바로 일 장을 내질렀는데 진양은 맞받지 않고 손으로 나뭇가지를 밀어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올랐
다. 당연히 그 일 장은 나뭇가지에 명중, 곧 부러졌고 융왕은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성질 급한
운화가 막 덤비려 했으나 운무는 눈짓을 주며 말렸다. 그 사이 융왕은 벌써 고목을 타고 올랐다. 직선에 가까운 고
목의 몸통을 발로 밟더니 동시에 그 큰 고목 몸통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위로 무섭게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그가
손을 집은 자리에는 정확히 다섯 개의 구멍이 있어서 그의 손가락이 뚫고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진양은 다른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그가 오는 걸 느끼고 몸을 날려 이번엔 다른 나무의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융왕은 더 화가 나서 한순간에 쫓아왔다. 진양은 또 도망쳤다. 발을 두어 번 디디며 오르니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
다. 융왕은 아예 나무의 중간에 일 장을 먹여 큰 나무를 통째로 쓰러트렸다. 허나 진양은 역시 그곳에 없고 저 다른
나무의 가지에 앉아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완전 원숭이 놀음이다. 융왕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겁이 나는 거냐? 왜 자꾸 도망만 다니느냐. 이리로 와서 정정당당히 붙어보자.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 이놈아!"
진양은 들은 체도 안 하고 한 반 각 가까이 그렇게 그를 놀려먹었다. 진양은 비록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경공을
펼치는 자세가 매우 조롱하는 듯 했고, 종종 쉬면서 보이는 노골적인 농락은 융왕의 분을 더하게 만들었다. 더군다
나 융왕은 자신의 무공은 물론 경공에도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 상혼객인지 망혼객인지 하는 놈을 만나서 완전 뭉개
지는 게 아니겠는가?
반 각 정도가 지난 후에는 진양도 도망치지 않았다. 한 차례 피하고는 다른 나뭇가지에 앉아서 덤벼오는 융왕을 피
해 또 옮겨갈 듯 했다. 허나 예상을 깨고 한순간 봉을 내질러 융왕의 배를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는 상당한 내공이
담겨져 있었고 융왕은 전혀 짐작도 못했던 술수라 하마터면 중상을 입을 뻔했다. 다행히 원래 융왕의 내공이 극히
대단하여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한편 군웅들은 융왕처럼 교활한 인간이 더 교활한 인간을 만나 당하는 꼴을 보자
모두들 배꼽이 빠질 것 같이 재미있어 했다.
"상혼객이라 하는 저 친구, 정말로 재미있고 대단하군요."
유호가 양만풍을 보면서 한 소리였다. 양만풍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뭔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었다.
이때부턴 정면대결이 펼쳐질 거 같았다. 진양과 융왕의 상태는 달빛을 받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진양은 그동안
도망을 치면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고 융왕을 농락하는 쪽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경공이 탁월했다. 그래서 진양은 숨
이 매우 고르고 사립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안색도 평온했을 것이다. 반면에 융왕은 분통이 터져 반쯤은 이성
을 잃은 상황이며 농락을 당하는 쪽이요, 경공 역시 진양엔 미치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반 각이 넘도록 원숭이 놀
음을 했으니 융왕이 안색이 파리해진 건 당연한 이치다. 그의 안색이 이리 된 건 힘들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분노해
서 그런 것에 가까웠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숨도 고르질 못했다.
융왕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반 정도 이성을 잃어서 앞뒤 분간을 못했지만 한 대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번
쩍 들었다. 게다가 진양의 히죽대는 주둥이를 보니 절로 소름이 끼쳤다.
(이놈 망혼객이 혹시 철저히 준비를 하고 나타난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처음에 나와 대면할 때부터 나를 농락
하기 위한 작전이 진행 중이었던 거겠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불리한 처지인 채로 대결을 벌이면 상수를 점유할 수
있게 때문이었을 거고.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니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가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상혼객이 자신보다 무공이 떨어진다는 것. 만일
그 스스로 더 강하다고 여겼다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다른 수작이 있으면 몰라도 말이다.
진양은 과연 융왕의 짐작대로 이길 자신이 없어서 이런 격장지계를 써서 성공했다. 그러나 융왕은 그 격장지계 이
면에 담긴 문제를 알아챘으니 결국 평수가 되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