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로, 용병이 아닌 민간인이다.
대한민국 특전사로 7년.
알파 리드 코프의 용병으로 7년.
무려 14년 만의 일이었다.
*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주.
부르르르릉.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과 함께, 모터사이클이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포효를 터트리며 도로를 질주한다.
미국 동부에서 시작한 여행은 남부에서 서부로 이어졌다.
캔터키와 미주리, 캔자스를 지나 옛 서부 개척로인 오레곤 트레일로를 따라갔다.
그렇게 17개의 주를 지나면서, 죽은 에릭의 유언대로 조유강은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과거 서부개척시대의 폐광촌을 중심으로 여행경로를 짜고, 대도시는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그 시작은 캘리포니아주의 새크라멘토 강 인근의 서터스 밀.
“이 마을이 골드러시의 출발점인가.”
재미있는 사실은, 1848년 미국의 골드러시를 일으킨 주역들은 정작 금광의 소유권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최초로 금광을 발견한 자들이 정작 가난하게 일생을 마감했다니.
아이러니 한 일이다.
억울하겠지만, 한편으론 안 죽은 게 다행 아닌가. 무법자들이 금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으니 말이다.
유령도시가 되어 버린 폐광촌을 둘러보고, 여러 박물관도 들렀다.
그러는 사이 복장도 하나둘 당시 시대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카우보이 모자와 조끼, 붉은색 스카프. 총알 없는 리볼버의 권총집까지 차고 있었다.
‘이 무슨 덕질을···.’
동료의 유언 때문에 시작한 여행이지만, 조유강은 분명 즐기고 있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 국가가 된 미국을 돌아보는 건 나름 흥미로운 일이었다.
“조선은 이때 뭐했더라.”
역사학자처럼, 태블릿으로 틈틈이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여행은 지식이 있을 때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게 나름의 신념이다. 원래 책 읽는 것도 좋아했고.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주로,
다시 유타에서 뉴멕시코로 이동했다.
광활한 들판을 감상하며 도로를 달리던 때.
마침 기름도 채울 겸 주유소를 들르게 되었다.
“뻐킹 에이시언! 여긴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야.”
“꺼져, 새끼들아.”
“꺄악!”
백인 셋이 한 아시아인 가족을 밀치며 욕을 퍼붓고 있다.
여행 중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인 가족인가.’
털털털털.
푸슉.
모터사이클의 시동이 꺼지고.
장내의 시선이 조유강에게 쏠린다.
백인들의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
그중 한 명이 조유강을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이건 또 뭔 카우보이 코스프레야, 요 뻐킹 애쏠.”
다가오는 놈의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온다.
이때 조유강이 다리를 벌리며 재킷을 옆으로 젖혔다.
“!”
하지만 골동품 총이라는 걸 확인한 백인들은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조유강도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헤이 브로. 저 새끼 웃는데?”
“사이코 새끼. 너 오늘 제대로 걸렸다, 요 머더 뻐커!”
한 놈이 달려와 주먹부터 휘두른다.
조유강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놈의 주먹을 휘감아 방향을 틀었다.
어어, 중심을 잃은 놈의 얼굴에 팔꿈치를 가져다 대었다.
빠각 소리와 짧은 비명이 어우러지고 놈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다른 두 명이 흠칫하는 사이 조유강은 방금 때린 놈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이런 양아치들은 하나만 조지면 된다.
물론 다 덤벼도 상관은 없지만.
목을 움켜잡자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뻘게졌다. 조유강의 팔을 치며 벗어나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끄극···.”
얼굴이 뻘겋다 못해 푸르딩딩하다.
조유강은 다가오려는 두 명을 노려봤다.
“다가오면 이 새끼 목, 꺾는다.”
“!”
살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
멈칫한 놈들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조소하듯 한쪽 입꼬리를 올린 조유강은 붙잡은 놈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다가가서는 발로 지그시 머리를 밟아주었다.
“좋은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히 여겨. 서부시대였으면 벌써 뒈졌으니까.”
코웃음 치며 얼굴에서 발을 떼었다.
공포에 질린 놈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들이 엉거주춤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운다.
조유강은 놈들이 차로 돌아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차로 들이받았을 텐데.
놈들은 그럴 깜냥이 되지 못했다.
그대로 주유소를 벗어나 사라졌다.
‘무서워···.’
방금까지 인종차별을 당했던 가족들은 조유강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데. 그들의 눈빛엔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조유강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애초의 목적에 충실했다.
카드를 넣어, 모터사이클의 배를 채우고.
털털털털.
유유히 주유소를 떠났다.
가족 중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진짜 카우보이 같아···.”
휘이이잉.
뉴멕시코의 따뜻한 바람에 아이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
비스타이(bisti) 배드랜드.
에릭이 말하던 장소에 드디어 도착했다.
“와,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곳처럼 특이한 곳은 처음이었다. 마치 지구가 아닌 외계의 행성에 도착한 느낌이랄까.
황량한 벌판.
기묘한 형상으로 솟은 바위들.
이색적이고 오묘한 풍경에 홀리듯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해야겠다.”
과연 지구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신비한 장소. 그 밤하늘은 어떨까.
일몰 직후부터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밤에 본 비스타이는 지구가 아닌 우주의 신비를 간직한 장소였다.
날을 잘 잡은 건지.
어둡기에 빛나는 별들이 하늘을 채우고, 은하수 물결이 하늘에 수를 놓았다.
왼손에는 시가를, 오른손으론 목걸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 펜던트.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테두리와 가운데 뚫린 구멍 사이로 비친 은하수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보고 있나, 에릭? 너 대신 내가 왔다.”
- 용병 생활 끝나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거침없이 살 거야.
“그래서 카우보이라도 되고 싶었냐? 어쨌든 네가 꿈꾸던 삶. 내가 대신 살아주마.”
에릭이 아니었으면 과연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을까.
그와의 추억.
여행 중에 알게 된 서부개척시대의 모습들이 그려지며, 낭만을 떠올려본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누군가 자신을 발로 툭툭 치고 있었다.
“원숭이 노예 새끼가 뛰어봤자지. 크크큭.”
‘!’
19세기 중반 미국의 어느 서부.
조유강은 이막산이라는 18살 조선인으로 빙의했다.
망망황야에서 길을 잃다
후드드득.
뺨 위로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
눈가는 파르르 떨려오고, 의식이 돌아온 뒤엔 심한 갈증이 밀려온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비스타이에서 야영하고 있었는데···.’
말을 꺼내려 하지만, 밀려오는 갈증에 입술은 바짝 붙어있다.
게다가···,
두통과 수족의 따끔함.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뿌옇고 감각은 둔해 있었다.
‘탈수 증상인가.’
전생에 조유강은 사막에서 작전을 수행할 당시에, 이와 같은 현상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체내 15%에 가까운 수분 손실.
시각장애와 촉각 둔화에 이은 탈진 상태.
하지만 천운인지 죽기 직전 비가 온 덕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땅에 처박힌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렸다.
주변을 확인한 뒤엔, 물이 고인 곳으로 기어갔다.
드르륵, 드르륵.
수갑에 연결된 쇠사슬이 땅에 끌리고, 웅덩이에 도착해 얼굴을 마주했다.
‘뭐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조유강은 눈을 부릅뜨며 호흡을 삼켰다.
‘이, 이게 나라고?’
생전 처음 보는 얼굴.
앙상하고 초췌한 몰골에, 20살이 안 되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속이 말라버릴 것 같은 갈증에 목부터 축이기 시작했다.
“흐아, 이제 살겠다.”
수분이 보충되자, 느린 심장박동이 정상을 찾기 시작한다.
이제야 생각이라는 걸 할 여유가 생겨났다.
조유강은 다시 한번 웅덩이에 비친 소년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때.
“으윽! 으으아아!”
짧지만 극심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으로 일련의 기억들이 스며들었다.
가난한 조선인 이막산.
신분 상승을 꿈꾸며 우연히 듣게 된 골드러시를 찾게 되지만, 청나라 상해에서 캘리포니아행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희망이 아닌 절망스러운 곳이었다.
노예 계약, 금 한번 만지지 못하고 인디언의 습격과 무법자에 죽거나 쫓기는 나날. 그러다 한 백인이 호의를 가장하며 이막산에게 접근한다.
말을 못 알아듣기에,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이해한 내용은.
- 먹고 자고 돈까지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주마.
하지만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놈은 노예상인이었고, 이막산을 남부의 노예로 팔려고 접근한 것이었다.
목화솜을 빼내는 조면기의 등장으로 남부 목장의 노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흑인이건 동양인이건 노예를 꽤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젠장! 저 자식 잡아!
- 빌어먹을 새끼가!”
이막산은 기회를 틈타 도망에 성공한다.
문제는 이 거친 서부엔 사람은커녕, 마실 물조차 찾기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살아갈 생존지식도 전무했다.
‘그래서 황야를 헤맨 끝에 탈수로 쓰러지게 된 건가.’
모든 기억이 흡수되고.
조유강, 아니 이막산은 수그러든 두통에 숨을 토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몸에 내가 들어왔다는 건데···.’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감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생생하지만, 하루빨리 꿈에서 깨어나길 바랄 뿐.
그저 꿈속에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라 여겼다.
“후르릅.. 후르릅···.”
다시 한번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정신없이 물을 마실 때였다.
“원숭이 노예 새끼가 뛰어봤자지. 크크큭.”
누군가 다가와 발로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들자, 웬 백인 놈이 조소를 짓고 서 있었다. 이막산의 기억에 따르면 노예 상인에게 고용된 무리 중 한 명.
조선으로 따지면 이놈은 추노였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역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이막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놈은 덥썩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얼굴이 젖혀지자 놈은 침을 뱉고는 입을 열었다.
“사지를 모조리 잘라버리고 싶다만. 쳇, 노예인 걸 감사히 여기라고.”
짜악.
뺨을 후려치고, 쓰러진 다음엔 발길질이 이어졌다.
퍽, 퍽!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이 부들거렸다.
몸에 고통. 맞다 보니 깨닫게 된다.
절대 꿈이 아니라는 걸.
조유강이 아닌 18세의 조선인으로서
서부개척시대에 살아야 한다는 걸 말이다.
현실을 깨닫자, 세차게 요동치던 동공이 진정된다. 웅크리던 이막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원숭이 새끼들은 너 말고도 많아. 황야에서 그냥 뒈졌다고 보고하면 되니까.”
화가 치민 놈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막산을 짓밟았다.
이대로 놈에게 끌려가면 더 많은 적이 기다릴 테고, 탈출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