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60)

‘죽인다.’

몸은 엉망이지만, 단 한 번.

기회를 포착해 힘을 쥐어 짜내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기회는, 놈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쏠릴 때다.

“쓰레기 같은 노예 새끼. 너 때문에 내가 며칠을 고생했는 줄 알아!”

놈이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일어나, 새끼야. 이러다 일행 못 만나면 네놈 살점을 뜯어 먹어주마. 넌 이제부터 내 비상식량이라고. 크크큭.”

놈은 비틀거리는 이막산의 몸을 질질 끌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때 이막산은 의도적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툭 하고 떨궜다.

“음?”

놈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빗물 속에 반짝거리는 작고 동그란 금속.

얼핏 은처럼 보이는 펜던트다.

눈이 가늘어진 놈이 그걸 집으려 허리를 숙이는 순간.

‘지금이다!’

옆에 있던 이막산이 쇠사슬로 이어진 수갑을 뻗쳤다. 순식간에 놈의 목을 휘감고, 잡아당긴 채 포개지듯 쓰러졌다.

백 마운틴 자세에서 곧바로 백 초크가 이어졌다.

“켁!”

팔뚝 대신 수갑의 쇠사슬로 놈의 경동맥을 압박한다. 놈의 겨드랑이에 다리를 낀 채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시켰다.

손이 총에 닿지 않자, 놈은 필사적으로 쇠사슬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막산의 팔뚝에 힘줄이 튀어나오고, 발버둥 치는 놈의 손톱이 살갗을 긁어댄다.

수갑에 힘을 쏟은 탓에 손목 피부가 벗겨져 피가 뚝뚝 떨어졌다.

놈의 눈동자엔 핏발이 잔뜩 섰다.

얼굴은 뻘게지다 이내 시퍼렇게 변하였다.

필사적인 몸부림은 커다란 경련을 끝으로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이막산은 곧바로 풀지 않았다.

보통 10초면 의식을 잃고, 4분이 지나면 뇌세포 손상이 온다.

이막산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한 뒤에야 손에 힘을 풀었다.

가뜩이나 부실한 체력.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비로소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헉···, 헉···, 평소 같았으면···, 이딴 새끼는···.”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 이막산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시체에 손을 뻗었다.

어차피 일행들과 떨어진 놈. 당장 누군가 이곳에 찾아올 일은 없어 보였다.

품속에서 수갑 열쇠를 찾아냈다.

툭.

피 묻은 수갑을 땅에 떨구고, 옷과 소지품, 장비들을 전부 이막산의 몸에 귀속시켰다.

‘네가 작은 거냐, 이 몸이 큰 거냐.’

이막산은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백인의 옷이 오히려 작은 느낌이랄까.

체구의 비교 대상이 없다 보니, 자신의 키조차 제대로 파악이 되질 않았다.

‘못 먹어서 그렇지. 몸은 좋네.’

일단 사지가 멀쩡하고, 팔과 발이 쭉쭉 뻗은 몸이다.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는데, 힘든 노동 때문인지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이막산은 뒤늦게나마 몸을 파악하려 이리저리 움직이며 적응해 나갔다.

그런 다음 수통에 빗물을 담고, 놈의 롱코트와 카우보이모자도 챙겼다.

이막산은 말린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알몸이 된 시체를 쳐다봤다.

죄의식은커녕, 그냥 무덤덤하다.

전생에도 없던 감정들이 지금 같은 서부개척 시대에 생겨날 리도 없고.

이막산의 몸에 빙의된 조유강은 살인에 거리낌이 없었다.

“네 덕분에 서부의 첫 시작이 나름 풍요롭겠구나. 요긴하게 쓰마.”

놈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풀 세팅은 꿈도 못 꾸었을 터.

시체에서 몸을 돌린 이막산은 몇 걸음 가다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중요한 걸 놔두고 갈 뻔했네.’

적의 시선을 빼앗았던 땅에 떨어진 작은 금속 펜던트.

놀랍게도 에릭이 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목걸이 줄이 달려있진 않지만, 펜던트의 재질과 생김새, 문양이 똑같았다.

‘이게 나를 여기로 불러왔다 이거지.’

이막산의 스며든 기억에 따르면.

노예상들에게 도망쳐 황야를 헤매던 때 그는 우연히 펜던트를 발견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조유강을 이막산의 몸으로 불러들인 게 분명했다.

대체 이게 뭘까.

왜 자신을 서부개척시대로 내던졌을까.

펜던트의 겉에 새겨진 기이한 문자를 응시하지만.

당최 모르겠다···.

조유강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에릭이 하늘에서 힘을 쓴 거라고.

꿈꾸던 서부에서 꿈을 펼치라고 말이다.

‘시대가 어떻든.’

조유강은 이막산의 몸으로, 기꺼이 새로운 인생을 즐기기로 했다.

“에릭!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하늘에서 똑똑히 지켜봐라!”

황야에 이막산의 목소리가 퍼져갔다.

와일드 웨스트.

기회의 땅.

무법자들의 시대.

방금까지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그 흥분과 짜릿함이 이막산의 온몸에 퍼져나

갔다.

*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구름 사이로 해가 나타났다.

‘어딘가 말이 있을 텐데.’

도망간 노예를 추적하는데, 그냥 걸어왔을 리가 없다. 그렇게 주변을 돌아다닌 끝에 바위에 묶어둔 말을 발견했다.

히이이잉.

검은색 말은 주인이 아닌 이막산의 접근을 경계했다. 하지만 인간의 손을 탄 말이라 몇 번을 쓰다듬자 이내 온순해졌다.

안장 주변에는 작은 가방이 주렁주렁 걸려있었는데, 상처 치료에 필요한 알코올과 탈지면도 들어있었다.

‘병으로 죽으면 안 되지.’

위생과 청결도 신경 써야 한다.

미래엔 보잘것없는 병들이 이 시대엔 치명적일 수 있다.

제대로 된 항생제가 없어 작은 상처가 덧나 파상풍에 걸릴 위험도 컸다.

손톱에 긁히고, 수갑에 벗겨진 상처들을 알코올로 소독한 뒤 붕대를 휘감았다.

‘대충 준비는 끝났는데···.’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망망황야에서 길을 잃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어디를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막산에겐 문제들이 산적했다.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인종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조선인, 그것도 동양인의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난제였다.

물론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면 뭐 있나?’

지금 조선은 철종이 재위하던 시기.

이막산은 조선의 밑바닥 하층민.

돌아가봤자, 남부 노예에서 조선의 노비로 바뀌는 차이밖에 없었다.

더구나 능력을 발휘해 얻을 수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위험하지만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곳.

스스로의 정의를 펼칠 수 있는 서부개척시대야말로 전생의 조유강이 꿈꾸던 세상이 었다.

“미국에서 끝을 보자!”

그렇게 결심을 굳힌 뒤엔 말 위에 몸을 실었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쓴 이막산은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랴앗!”

히이이잉!

털썩.

“조또··· 말을 안 타봤네.”

낙마한 이막산은 다시금 낑낑거리며 말 위에 올라탔다.

특전사 7년.

용병 생활 7년.

말은 처음이었다.

  백인가족과 인디언들

‘배고프다, 배고파.’

방울뱀을 잡아 불에 구워 먹지 않았다면 영양실조로 몇 번이나 쓰러졌을 몸이다.

하지만 육포와 뱀만으론 목숨만 연명할 뿐, 허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망망황야에서 어디로 가면 길이 나올까.’

노예상인들은 이막산을 남부의 농장주에게 노예로 팔려 했고, 놈들은 서부와 동부를 잇는 유일한 육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탈출에 성공한 이막산은 며칠을 줄곧 남쪽으로 내달렸다.

즉, 반대로 되돌아가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해서 이막산은 북쪽으로 달렸다.

안장에 쓸리는 허벅지. 연신 들썩이는 엉덩이에 뼈가 아리지만, 말 타는 것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해서야 되겠는가.

‘신마합일을 이루자···.’

몸과 말은 하나이니, 생각하는 길이 곧 말이 가는 길이리라.

그런 다음엔, 신총합일을 이룰지니···.

조선인 이막산의 기억이 뒤섞여서인가.

아무튼, 개소리 같지만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곳이 서부다.

말 위에서 총을 쏘고 불을 붙이는 훈련도 필요했다.

이막산은 말 위에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육체에 적응하고, 생각대로 움직이기위해 잠시도 쉬지 않았다.

물결치는 파도처럼 끝없이 펼쳐진 평원.

하늘에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을 따라 사흘을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초원 저 멀리 서쪽에서 동쪽을 가로지르는 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낯선 동양인을 어떻게 대할지.

무턱대고 가다가 총 맞는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찼다.

그럼에도 말을 몰고 달려갔다.

다그닥, 다그닥.

거리가 오십 미터 쯤 되었을 때.

상대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멈춰라! 이 이상 다가오면 몸에 구멍을 내주마!”

마부석에 앉아있던 30대 남자가 소총을 들고 엄포를 놓았다. 옆에 있던 부인은 라이플을 겨누었고, 이들 부부의 눈엔 노골적인 적의가 담겨 있었다.

‘역시 서부야···.’

평범해 보이지만 총으로 무장한 백인 부부.

이 이상 다가갔다간 총이라도 쏠 기세다.

서부시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막산은 말을 거는 대신, 그들과 백 미터가량 거리를 둔 채 따라갔다.

백인 부부는 뒤가 신경 쓰였지만, 무턱대고 총을 쏴 쫓아내기엔 위험부담이

있었다.

게다가 조금만 있으면 마차 행렬이 늘어선 오레곤 트레일(가도)과 합류한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막산은 마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참 신기하네.’

며칠 전 박물관에서 봤던 역마차 '프레리 왜건'이 눈앞에서 잘도 굴러다닌다.

배 모양처럼 생긴 사두마차는 천막이 앞뒤가 개방되어 있고, 짐이 많아서인지 이동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이막산은 머릿속으로 백인 가족의 가치를 따져봤다.

정보, 인맥, 식량.

이중 가장 우선시되는 건 역시 인맥이다.

마을을 찾았다 쳐도, 그 안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 백인들의 적개심을 걷어 내려면, 그걸 무시할 실력을 갖추거나 명성을 쌓아야 했다.

지금 상태로는 물 마시러 마을에 들렸다가 총에 맞기 십상인 것이다.

백 년이 지나도록 미국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인종차별. 더욱이 지금 시기에 처음 본 백인이 동양인과 웃으며 인사 나누길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백인 사회를 비집고 들어가려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서부에서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백인들과의 연줄이라···’

이막산이 골몰히 생각하고 있던 때.

마차에서 한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곤 길쭉한 망원경을 눈에 대고 이막산을 살펴봤다.

“안녕.”

이막산은 손을 흔들고 자본주의 미소를 추가했다.

그런데 미소가 너무 과했는지.

소년은 천막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식, 부끄러워하긴.”

하지만 이막산의 생각과 달리, 소년은 마차 앞쪽으로 가서는 소리쳤다.

“비쩍 마른 해골 원숭이예요! 금 캔다고 바다 건너온, 그 원숭이!”

“코닐.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원숭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니?”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요?”

“그렇다고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니.”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 젓고,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에게서 망원경을 받아 들었다.

“흠. 복장도 우리랑 비슷한데 쿨리라고?”

금을 캐러 온 동양인들을 원숭이 혹은 쿨리라 부르는데, 대충 노예라는 뜻이다.

흑인 노예무역이 금지된 후, 중국이나 인도에서 데려온 계약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제임스는 망원경으로 이막산을 살펴봤다.

마차의 천막 앞뒤가 뚫려있어 몸만 틀어도 볼 수 있었다.

카우보이모자 아래 이목구비와 피부색이 영락없는 동양인 쿨리다.

“······일단 네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이리 줘봐요.”

부인이 망원경을 낚아챘다.

“진짜네요, 여보. 저자가 탄 말과 옷도 다른 자에게 빼앗은 것 같은데···. 혹시 우리 물건도 노리는 게 아닐까요?”

“일단 다가오진 않으니, 지켜봅시다.”

“제가 뒤를 경계하고 있을게요.”

낯선 동양인은 부인과 아들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죽이지 않으면 반대로 자신들이 죽게 되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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