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까 꽤 굶주린 것 같은데. 음식과 물을 준다고 하는 건 어때요? 그렇게 안심시킨 다음 총을 쏘는 거죠.”
열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의 말이 가관이다.
하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곧 있으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다.
화근을 뒤에 달고 다니느니, 없애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상대는 혼자고, 자신은 지켜야 할 가족이 있지 않은가.
선제공격하기엔 위험부담이 크다.
제임스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동양인과는 말도 통하지 않아. 조만간 오레곤 트레일에 합류할 테니 그때까진 지켜보자꾸나.”
초원 한복판에 커다란 돌산이 보일 즈음.
마차 바퀴가 덜컥거리며 문제가 생겼다.
나무를 휘감은 얇은 철판이 삐죽 튀어나와 수리가 필요했다.
마차 바퀴가 고장 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뒤에 있는 동양인과 인디언의 습격이 신경 쓰였다. 지금이야말로 먹잇감이 되기 좋았으니 말이다.
“하필 지금 말썽이네.”
“당신은 고치는 데 신경 써요, 제가 저 자를 감시하고 있을게요.”
부인은 라이플을 움켜잡으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곧 멈춰 서버렸다.
그걸 본 이막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퀴가 고장 났나?’
다가가 봐야 괜한 오해가 생길 게 빤하다.
이막산은 말 고삐를 잡아 멈춰 세웠다.
마침 엉덩이뼈가 아리던 차.
말에서 내린 이막산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망원경으로 이를 지켜본 아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쿠, 쿨리가···, 몸을 푸는데요? 공격할 준비라도 하나 봐요!?”
“표정은 어때?”
“그냥 생각 없는 원숭이처럼 무표정해요.”
“저런······.”
부인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바퀴를 고치던 제임스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말을 오래 탔으면 저럴 수도 있는 거지. 다른 마음 먹었으면, 지나가는 척하면서 공격했겠지.”
“당신은 매사가 참 긍정적이네요.”
부인은 옆에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남편의 성격은 나무랄 데 없으나, 거친 서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부인은 남편 대신 작은 것에도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아들도 마찬가지고.
한편, 스트레칭을 끝낸 이막산은 이번엔 주변을 거닐며 환경을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버팔로 떼들인가?’
말 위에 올라탄 이막산은 비교적 높은 지대로 올라가 먼지가 이는 곳을 살펴봤다.
그리고 이내 기겁하며 방향을 틀었다.
“헉! 엄마, 쿨리가 이리로 와요!”
아들이 호들갑 떨며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이막산은 빠른 속도로 마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한 남편은 나무바퀴에 둘러야 할 철판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는 멀지만, 부인은 들고 있던 라이플의 해머를 뒤로 젖혀 코킹한 뒤 이막산을 조준했다.
그런데 이때.
“인디언들이다!”
이막산의 목소리가 평원에 울려 퍼졌다.
“!”
안색이 파래진 부인이 남편을 바라본다.
“여보···?”
“이제, 거의 다 됐는데. 젠장!”
낑낑거리며 철판을 끼우지만, 좀처럼 끼워지질 않아 짜증이 치밀었다.
“여보! 저자는 어떻게 하죠?”
“쏘지 말고, 겨누고만 있어!”
아들은 망원경으로 인디언의 위치를 확인하고, 부인은 이막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이막산은 양손을 들어 보여 그들을 안심시켰다.
“인디언 무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
부인의 눈이 커졌다. 남편 제임스도 손을 멈춘 채 이막산을 쳐다봤다.
“우리 말을···, 할 줄 알아?”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이막산은 제임스가 들고 있는 쇠바퀴를 쳐다봤다. 굴렁쇠처럼 얇고 동그란 철판은 나무바퀴가 이탈하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했다.
“제가 도와드리죠.”
흠칫한 부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총구는 여전히 이막산을 향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에서 내렸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쪽을···. 눌러주면 되네.”
작업은 단순했다.
힘으로 욱여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못 먹어서 비실비실한 이막산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제임스와 아들까지 힘을 합쳐, 똥 싸기 직전까지 힘을 쏟아부어서야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조금은 삐져나온 것 같기도 하고···.
‘위험할 뻔했다.’
이막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의 말에 걸린 작은 가방에서 위스키병을 꺼냈다.
부인의 눈이 커진다.
‘마이 갓, 이 상황에 술을 처마신다고!?’
이마를 찡그린 부인과 이막산의 시선이 마주쳤다.
움찔한 그녀가 라이플을 고쳐잡았다.
“혹시 기름 있습니까?”
“기름···?”
“인디언을 상대하려면 필요하거든요.”
“기름이라면 여기 있어!”
마차에서 뭔가를 뒤적거린 아들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기름이 담긴 통이 들려 있었다.
경계심이 사라졌거나, 혹은 인디언 때문에 필사적이었거나.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막산은 조금 남아 있는 위스키병에 알코올과 기름을 집어넣고 뒤섞으며 말했다.
“먼저 출발해요. 제가 인디언들을 저지시키겠습니다.”
“저, 저지하겠다고?”
장비를 마차에 집어넣던 제임스와 부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막산을 쳐다봤다.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동양인 쿨리가
인디언들까지 처리겠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게 보고만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뒤를 확인한 제임스와 부인은 황급히 마차에 올라탔다. 인디언들이 육안으로 확인할 정도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랴! 어서 움직여!”
다급한 채찍질에 응답하듯 네 마리의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달려갔다.
이막산은 병 입구를 천으로 두르고, 붕대처럼 길게 늘어트린 천은 기름을 적셔 심지로 만들었다.
짧은 시간 만들어낸 화염병.
위력은 약하지만, 지금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무기였다.
문제는 바닥인데. 화염병을 흙모래의 푹신한 땅에 던졌다간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앞에 보이는 돌산 주변은 작은 돌들이 많은 지형이라는 거.
‘저곳에서 승부를 본다.’
이막산은 말에 올라타 뒤를 힐끔 쳐다보고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랴!”
대평야를 질주하는 마차,
그 뒤를 따라가는 이막산.
4시 방향에선 인디언 일곱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내 이름은 막스 조.
이막산은 지형을 살피며 질주했다.
인디언들과의 거리가 이백 미터 내외로 좁혀졌을 즈음.
슈우우욱.
텅.
“오우, 쉣!”
마차에 박힌 화살 깃이 파르르 진동하고,
탕! 탕!
총성도 들려온다.
“아후우우! 아후우우!”
사냥하듯 먹잇감을 몰고 위협 사격까지 더해지니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이막산은 적당한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 말의 속도를 높여 마차를 추월했다.
뒤통수로 부인의 황당한 눈빛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소리쳤다.
“따돌리겠다며!”
“기름 내놔! 이 원숭이 자식아!”
아들도 가세했다. 인디언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모자는 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막산은 한 귀로 흘리며 품속에서 백린으로 만들어진 성냥을 꺼냈다.
달리는 말. 바람의 저항.
이막산은 어디든 긁으면 불이 붙는 일명 딱성냥을 이용해 코트 품속에서 불을 만들고, 심지에 옮기는 데 성공했다.
며칠 동안 말 위에서 한 연습의 효과였다.
심지가 타들어 갈 때, 이막산은 달리는 말의 속도를 급격히 줄여갔다.
마차와의 거리가 다시 좁혀지고.
백인 가족의 시선은 이막산이 들고 있는 불붙은 병으로 향했다.
‘저게 뭐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이다.
마차가 스치듯 지나갈 즈음.
가족들을 슬쩍 쳐다본 이막산은 뒤를 향해 병을 내던졌다.
인디언들과의 거리는 불과 30m.
쫓아오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땅에 떨어지는 불붙은 위스키병을 향했다.
‘?’
펑!
화르르르!
바닥에 돌들이 많아 병은 쉽게 깨졌다.
위력이 크진 않지만 기름과 알코올이 퍼지며 말들 앞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막산이 노린 건 인디언들의 말.
타이밍은 정확했다.
히이이잉!
우르르 말들이 발광하며 일부는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화염병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탕, 탕!
마차 뒤를 달리며 이막산은 몸을 돌려 총을 쐈다. 당황하는 적들에게 총소리는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효과적이다.
이때 인디언 중 하나가 이글거리는 눈빛과 사나운 기세로 쫓아왔다.
머리에 퓨마 대가리를 뒤집어쓴 자였다.
‘리더인가?’
이막산이 유심히 쳐다볼 때.
마차 안에서도 총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의 지원사격이었다.
탕!
그녀는 라이플에 이어 권총까지 꺼내 쏘아댄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따라오던 퓨마는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막산을 노려보던 놈은 뭐라 소리치더니, 추격을 포기한 채 말머리를 돌렸다.
‘너희들한테 악감정은 없다.’
백인들에게 많은 걸 수탈당한 인디언.
그들의 아픔이야 어찌 됐든, 그냥 앉아서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격하면 반격하는 거지.’
그 안에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비이성의 시대에 존재하는 건 죽거나 살거나, 이 두 가지뿐이다.
인디언에게서 시선을 뗀 이막산은 마차를 바라봤다.
부인은 헛기침을, 아들은 시선을 피했다.
욕한 기억 때문인지, 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
이막산은 백인 가족이 이끄는 마차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다.
어느 순간, 전력으로 질주하던 말들은 힘에 부치는지 다리를 푸들거렸다.
‘휴식이 필요하겠군.’
속도가 줄고, 마차 뒤에 두 팔을 걸친 소년이 말을 걸었다. 조금은 여유가 생긴 표정이다.
“우리말을 왜 그렇게 잘해?”
“왜, 원숭이가 말하니까, 이상하냐?”
금발의 소년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부인은 이막산이 욱하는 마음에 총을 쏘진 않을까 눈치를 살폈다.
마차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라이플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 형은 말야, 영어 말고도 5개 국어를 할 수 있거든.”
“우와, 진짜!?”
“풉. Es gracioso(웃기고 있네).”
부인이 코웃음을 친다.
이막산 역시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훗. No confiar en las personas también es una enfermedad(사람 못 믿는 것도 병이야.)”
“어머!”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내용은 둘째치고, 이막산의 에스파냐어는 영어만큼이나 능숙했다.
‘진짜 5개 국어 하는 거 아냐?’
더 테스트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할 줄 아는 언어가 영어와 에스파냐어뿐이다.
부인은 입을 삐죽 내밀며 이막산의 시선을 흘렸다.
이때 남편 제임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말도 지쳤어. 이쯤에서 쉬어야겠는데?”
누구에게 말한 건지 그 대상이 모호했지만, 이막산은 자연스레 대꾸했다.
“제 말도 저처럼 지친 것 같은데 잘 되었네요. 여기서 쉬도록 하죠.”
“그러다 인디언들이 쫓아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