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불안한 듯 말꼬리를 흐리자, 이막산이 물었다.
“아까 그 인디언들이 어느 부족인지 알아요?”
“이 부근이면 나바호족이겠지.”
부인의 말에 이막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리칸 인디언 중 가장 강력하고 부유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게 나바호족이다.
이막산이 말을 이었다.
“이번 습격은 충동적으로 했을 겁니다. 마차가 멈춘 걸 확인하고 누군가 부추겼겠죠. 그런데 실패했고,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전생의 조유강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시시콜콜하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과 가까워져야 할 때.
신뢰와 믿음을 심어줘야 했다.
그런데 조금은 못 미더운지 아들이 물었다.
“고작 그 이유가 다야?”
“일단 습격한 인디언들이 어리잖아. 젊은 혈기에 독단적으로 벌인 짓일 테고, 그러니 실패는 감추고 싶겠지.”
“꼭 본 것처럼 말하네.”
‘봤지. 책에서.’
인디언들은 수백 년이나 전쟁을 치러왔기 때문에, 나이든 어른일수록 백인들의 습성을 알고 있었다.
어설픈 습격은 한참 뒤에도 후환이 따른다는 걸. 실패할지라도 습격은 치밀하고 은밀하게 계획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설사 책이 틀렸다 해도 상관없다.
멍청하게 대평원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습격하는 애송이라면 안심해도 될 것 같지 않은가.
마차를 몰던 제임스는 신기한 눈으로 이막산을 쳐다봤다. 그가 이곳에서 쉬자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으니까.
‘흥미로운 동양인이군.’
급조해 만들어낸 화염병, 인디언들을 상대하면서도 침착한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일행은 커다란 바위 옆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제야 마차에서 내린 제임스가 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임스 해리스네.”
‘내 이름은···’
조유강도, 이막산도 아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뿌리내리려면, 발음이 쉽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막산을 기리고 전생의 성을 붙여 탄생한 이름은.
“막스 조. 조선에서 왔습니다.”
“반갑네, 막스. 그런데 조선이라고?”
‘당연히 처음 들어봤겠지.’
이 당시에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흘러들어온 청나라인만 만 명이 넘어간다.
동양인은 대부분 차이나 혹은 인도인으로 생각할 때였다.
“조선과 차이나는 전혀 다른 나라죠. 영국과 프랑스처럼요.”
“흠. 어쨌든, 아까는 고마웠네.”
막스와 악수를 한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부인 메리와 아들 코닐이라네.”
“아까 기름 고마웠어, 코닐.”
“그 정도야 뭐.”
코닐은 코를 문지르며 헤헤거렸다.
“그나저나, 자네 복장이 궁금하군.”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다.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막스는 오해를 피하려 그간 사정을 말했다.
머나먼 조선 땅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제임스 가족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하마터면 남부 농장의 노예로 갈 뻔했군.”
“제가 목화솜은 잘 못 따거든요.”
막스의 말에 코닐이 키득거리고, 메리가 눈치를 주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족 누구도 함께하자는 말은 안 했지만, 막스는 자연스럽게 백인 가족 틈에 끼어들었다.
미국의 주 지배층이 백인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생각보다 빨리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게 다 인디언 덕분이네.’
제임스는 마차를 담처럼 이용해 야영 장소를 만들었다. 등 뒤론 움푹 파인 바위가 있어, 잠자리로 적당해 보였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막스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소소한 정보를 얻어냈다.
이들이 아일랜드계 이민자고 얼마 전까지 캘리포니아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현재 위치가 유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타는 사막부터 툰드라까지 다양한 기후를 가진 지역. 9월이라 제법 쌀쌀했고, 일교차가 심해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춥기까지 했다.
타닥, 타닥.
제임스는 버팔로 똥을 땔감 삼아 불을 피웠다. 주변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부인 메리는 빵에 베이컨과 콩을 넣어 식사를 준비했다.
세 개를 만든 그녀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막스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는 추가로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걸 본 막스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잠시 후.
모닥불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육포만 먹던 뱃속에 빵과 고기라니.’
막스는 맛을 떠나 포만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눈시울을 붉히며 부인을 쳐다봤다.
“더 없어.”
막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이때 제임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묻는다.
“그래서 막스, 자네 목적지는 어디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요.”
“목적지가 없다 이 말이로군. 차라리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건 어때? 거기엔 자네와 같은 동양인이 많을 텐데.”
백인들 틈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막스는 고개를 저었다.
“금광도 끝물이잖아요. 돌아가 봐야 빤하고, 가는 길도 만만치 않네요.”
“하긴. 나도 그래서 떠나긴 했지.”
골드러시를 쫓아 많은 이들이 캘리포니아를 찾았지만, 그중 성공한 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소득도 없이 가진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설사 금을 캤다 해도, 무법자들이 나타나 약탈하기 일쑤였고 그마저도 알고 보면 황동이 대부분이었으니.
그걸 금인 줄 알고, 필사적으로 지키려다 개죽음당하는 이들도 꽤 되었다.
현재의 캘리포니아는 엘도라도는 개뿔.
현실은 그냥 시궁창이었다.
‘네바다와 다른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긴 하지만, 그건 몇 년이 지나서지.’
막스와 제임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 아들 코닐이 벌떡 일어났다.
“저 쉬 좀 하고 올게요.”
“얘는 밥 먹다 말고.”
메리가 눈을 흘기고, 급한 코닐은 마차 옆에 달려가 바지를 내렸다.
솨아아아.
시원한 오줌 소리. 그런데 미세하지만 뭔가 다른 게 섞여 있다. 순간 막스의 고개가 휙 돌아가더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무, 무슨···!”
제임스와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짓고, 막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던졌다.
휘리릭. 푹.
칼이 꼽히자 그제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뱀 대가리가 칼에 꼽혀 꿈틀거린 것이다.
“오우, 쉣! 방울뱀!”
코닐은 황급히 바지를 올리며 메리 품으로 달려왔다.
막스는 유유히 뱀에 꽂힌 칼을 회수하며.
“오줌 튄 거 아니지?”
“전혀!”
코닐의 말에 막스가 피식거렸다.
제임스는 칼 던지는 기막힌 솜씨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이로 봐선 군인도 아닐 텐데, 여러모로 놀라운 실력이군.”
“과찬입니다.”
막스를 본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으면 든든한 기분이랄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정 갈 곳이 없으면, 우리와 함께 가는 건 어떤가?”
위험한 여정을 함께 할 실력자.
그래도 상대는 낯선 동양인이 아닌가.
백인으로선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막스가 노린 것도 있었지만, 보통의 백인들과 달리 제임스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인을 쳐다봤다.
그녀 역시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다.
이제 중요한 건 과연 이들이 어디로 가는 가였다.
막스가 제임스에게 물었다.
“목적지는 어디 십니까?”
“캔자스. 네브레스카와 함께 올해에 준주가 된 곳이지.”
미국의 주가 되려면, 그 이전에 준주가 되어야 한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미국의 영토일 뿐이다.
설령 준주가 되었다 해도, 주가 되려면 짧으면 몇 년 길게는 몇십 년이 걸리기도 했다.
‘캔자스라···’
미국의 짧은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을 꼽으면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남북전쟁의 도화선을 지핀 곳이 바로 캔자스.
후에 ‘피의 캔자스’라 기록될 만큼, 앞으로 몇 년간은 처절한 폭력으로 얼룩지게 될 곳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스 입장에선 서부 어딜 가나 위험하긴 마찬가지 아닌가.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캔자스는 누군가에겐 끔찍한 지옥이지만, 막스에겐 비상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이기도 했다.
생각을 끝낸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죠. 캔자스.”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한 일행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오레곤 트레일에 늘어진 역마차 행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오레곤 트레일은 미 중부의 미주리에서 서부 끝인 오레곤까지 이어지는 가도다.
대륙 횡단 철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서부 이주자들의 이동로였다.
코닐은 꼬리에 꼬리를 문 역마차들을 보며 말했다.
“전부 캘리포니아로 가는 거예요?”
“일부는 오레곤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로 향하는 후기 성도 교도들일 수도 있지.”
모자의 대화에 막스는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Go, Go West!
골드러시는 시들해졌지만, 서부로 향하는 인파는 늘어만 간다.
특히 몰몬교로 불리는 후기 성도 교회 신자들은 차별과 박해를 피해 수년간 서부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들이 정착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는 후에 몰몬교의 본부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막스가 머릿속 지식을 뒤적거릴 때.
탕! 탕!
어디선가 들려온 총소리에 막스의 신경이 곤두섰다.
“대부분, 방울뱀은 총으로 잡거든.”
광활한 평야엔 뱀과 메뚜기도 득실거렸다.
칼을 던져 방울뱀을 죽인 막스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코닐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질문은 한결같다.
“캘리포니아요.”
“근데 왜 돌아오는 거요?”
“일이 있어서요.”
일확천금의 꿈과 희망을 품고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굳이 비관적인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제임스의 대답은 현명했다.
“근데, 저거 쿨리 아냐?”
“그러네. 캘리포니아에 동양인이 많이 들어왔다더니, 진짠가 보네.”
막스를 본 자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우습게 보이면 안 되지.’
언제라도 총을 꺼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막스는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비는 상대가 약해 보일 때 일어난다.
반대로 강해 보일 때는 조용하게 넘어간다.
자신의 소망과 꿈. 그리고 가족.
먼 여정을 떠나는 자들은 지켜야 할 게 많다. 그러니 잃을 게 없는 동양인과 싸워봐야 자신들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이주자들은 마차들로 울타리를 친다. 인디언의 습격이나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차를 빙 둘러 세워 그 안에서 먹고 쉬고 잠을 잤다.
서쪽으로 이주하는 자들의 네트워크에 끼지 못하면, 조금은 무리에서 떨어진 곳에 야영지를 만들어야 했다.
“엄마, 우리는 고기 없어요?”
저녁을 준비하는 메리에게 코닐이 칭얼거렸다. 어디서 바베큐 파티라도 벌이는지 고기 향과 연기가 장내에 퍼져나갔다.
“얘는. 갑자기 고기가 어디서 나니.”
“벌써 두 달째 빵 아니면 콩이잖아요.”
코닐의 말에 막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빵에 숨겨진 작은 베이컨.
더욱이 빵의 양은 어찌나 적은지 서부에 온 이후로는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막스 역시 냄새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나도 배 터지게 한번 먹고 싶다!’
잘 먹어야 살이 붙고, 근육도 생기는 법.
말라 비틀어진 몸은 좀체 회복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런 식으로 무슨 체력을 단련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잘 먹고 잘 자려면 집도 있어야 되네.’
전생이나 지금이나.
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이 더 심각했다.
기회의 땅에서 굶주리고 있는 신세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디 현상금 왕창 걸린 놈 안 나타나나.’
이 넓은 황야의 로또랄까.
남을 죽여 얻는 현상금이지만,
돈에 질이 무슨 소용이냐, 양이 중요하지.
‘일단 배부터 채우자.’
대평원에 깔린 아메리칸 바이슨, 버팔로.
제임스 가족은 일행이 달랑 넷이라 남들 사냥하는 걸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내일은 혼자서라도 사냥해야겠어.’
다음 날, 해가 뉘엿뉘엿 저가는 느지막한 시간. 막스가 메리에게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