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360)

“발목 안 잡을 테니까, 시켜줘.”

“작은 마을에 부 보안관이 있는 걸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예산 문제도 있고.

막스의 말에 피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엔 열정 페이도 마다하지 않을 확고한 결심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 분위기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마을 사람들이 다 오케이야!"

"설마요."

"진짜라고! 그냥 보안관인 네가 막 정하면 되는 거라고!”

“지금 화내는 거예요?”

“설마. 내가 감히?”

피치는 양 손바닥을 들어 흔들었다.

이를 본 막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 오케이 한단 뜻이지?”

“생각 중이라는 거죠. 일단 내일 찰스 의장과 상의해보고 다시 말해요.”

“어. 그래.”

“그럼 내일 봅시다.”

막스가 등을 돌리자, 피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다음 날.

잠에서 깬 막스는 누군가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청소하는 피치였다.

“일어났어, 보안관님?”

잠이 확 달아난 막스는 눈알을 굴려 피치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일단 복장이 이전과는 딴판이다.

긴 머리는 뒤로 묶고, 치마 대신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조끼에 뭔가 붙어있었는데.

“뭡니까, 그건.”

“종이로 내가 만들었어. 부 보안관 배지!”

“......”

막스는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찰스 의장한테 갔다 올 테니까, 사무실 청소 깨끗이 해둬요.”

“예썰!”

사무실을 나온 막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부 보안관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름 나쁘지 않다.

운신의 폭도 넓어지고, 피치라면 임기응변도 괜찮을 테니까.

막스가 실실 웃으며 거리를 걸어갈 때였다.

누군가 빠른 속도로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피치가 막스 옆에 따라붙었다.

그녀는 라이플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가시죠! 보안관님!”

그리고 잠시 후.

히이이잉!

먼지를 일으키며 말이 멈춰섰다.

남자는 모자를 벗어 툭툭털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막스 보안관.”

인디애나 주의 의원 임기를 끝낸 제임스 헨리 레인.

그가 마침내 로렌스로 돌아왔다.

작가의말

리븐워스 투표날 이후 사라진,

제임스 헨리 레인이 돌아왔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지사는 어디에 있던 걸까

제임스 헨리 레인의 재등판.

막스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 자네 소문은 들었네. 엄청난 일들을 해냈더군.”

“소문이 과장된 거죠. 그런데 혼자십니까?”

“집 정리할 것도 있고, 할 일이 많아서 오늘은 혼자 왔네.”

리븐워스의 투표소 사건 이후. 레인은 인디애나주에 있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로렌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레인은 막스 옆에 있는 피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계약 기간이 끝났거든요. 그래서 부보안관 해보려고요.”

“개척마을에 여자 부보안관이라.”

레인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는 막스를 보며 물었다.

“진심인가?”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이런 식이면 로렌스가 다른 쪽으로 유명해지는 건 시간 문제겠군.”

보안관은 동양인, 부보안관은 여자.

로렌스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모여 정착한 곳이다. 레인은 그 의미가 다른 식으로 희석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무튼, 또 보세나.”

“알겠습니다.”

막스는 팔짱 낀 채 멀어지는 레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고민은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과연 어디까지 개입하는 가였다.

그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를.

한편, 피치는 화가 나는지 볼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여자는 부보안관하면 안 되나, 뭐!”

“아직은 안 되나 보죠.”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막스는 잠시 피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죠.”

“...... 너처럼 실력으로 보여주는 거?”

“실력이든 뭐든. 인정을 받으려면 그만한 노력은 해야겠죠.”

피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막스의 말을 곱씹어봤다.

막스 덕분에 부보안관이 된 자신을 마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리겠지.’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자신은 민병대를 지원한 특이한 여자 선생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식을 바꾸면 된다.

‘막스가 그랬던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쥔 피치는 비장한 얼굴을 하곤 사무실로 돌아갔다.

*

일부 반대는 있었지만, 피치는 로렌스 마을의 부보안관이 되었다.

모든 건 막스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 일 못하면 자르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피치의 주급은 막스보다 5달러 적은 7달러.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불안한 자리였다.

로렌스에 있는 신문사 세 곳이 이 기사를 다루었다.

레인의 우려대로 마을의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만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피치는 불안과 초조함을 느꼈다.

능력을 발휘할 사건들이 안 생겼다.

“더럽게 한가하네. 이놈의 마을은 뭔 일도 안 터지냐.”

“피치가 평화의 여신인가 보죠.”

“진짜 그래서 그런가.”

로렌스가 조용한 이유. 아니, 캔자스가 조용한 이유는 오늘이 재투표일이기 때문이었다.

11곳에서 치러지는 투표소에 자유주는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지만, 노예주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다.

결과에 상관없이 입법부 구성은 노예주가 우세했으니 말이다.

“밖에 좀 갔다 올 게요.”

“어이구, 우리 보안관님 운동하실 시간이네. 다녀오십쇼.”

막스는 입을 삐죽 내민 피치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마을과는 조금 떨어진 곳. 막스는 매일 이곳에서 서너 시간씩 운동과 사격을 한다.

구보로 시작해 무거운 돌도 옮기고, 나무에 연결한 통나무를 어깨 위로 들어올리는 유격 훈련도 빼놓지 않았다.

살과 근육이 붙고, 키는 더 자라났다. 몸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훈련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마을 입구에서 두 대의 마차를 볼 수 있었다. 집안 살림을 잔뜩 실은, 긴 여정 끝에 도착한 새로운 정착민들이다.

“도, 동양인?!”

“로렌스 마을의 보안관입니다만.”

“진짜요?”

동양인 보안관이 신기하고, 못 미더워하는 얼굴이다.

그들의 색안경을 벗기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터.

새로운 정착민들은 막스를 힐끔거리며 그들이 개척할 땅을 알아보기 위해 위원회를 찾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풍경은 일상이 되어간다. 자유주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로렌스는 다른 마을보다 매력적이었으니까.

*

재투표의 결과는 11석 중 8석을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가져갔다. 얼핏 압승으로 보이지만 무의미한 결과다.

로렌스 마을 위원회는 이 같은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주지사는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투표가 끝나니까 기어 나오는 겁니까?”

“어디서 뒈졌는 줄 알았는데, 아쉽네요.”

“흠흠.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솔직히 이참에 주지사가 바뀌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쓸모도 없는데.”

지난 부정선거도 막지 못하고, 재투표는 부분적으로 시행했으니 노예주의 입맛에 맞는 일만 하는 주지사였다.

웃긴 건 노예주도 그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어찌됐든 재투표를 했으니 말이다.

찰스 의장은 장내를 진정시킨 뒤 입을 열었다.

“주지사 욕해봐야 지금 바뀌는 건 없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주지사가 7월 2일 포니라는 곳에서 입법부를 소집한다고 하더군요. 캔자스 헌법을 만들려는 거겠지요.”

미연방에서 캔자스를 준주로 선포하면, 해당 지역은 정부 수립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연방을 구성하는 주는 국가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헌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헌법에서 노예제와 자유주를 규정하게 되는데.

주지사 앤드류 리더는 그 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입법부를 포니라는 뜬금없는 지역으로 소집했다.

“레콤프턴도 아니고 포니라니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말로는 노예주에 영향을 안 받는 곳이라서 선택했다더군요.”

“어찌 됐든, 그 지역을 주도로 만들겠다는 것 아닙니까? 토피카는 어쩌구요?”

위원회에서 토피카가 언급되자, 홀리데이의 다크써클이 더욱 짙어졌다.

망할 주지사가 무슨 이유로 포니를 주도로 삼으려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대로면 다 날아가겠구나.’

찰스와 홀리데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회의장은 허탈감과 절망감에 싸여 말소리가 잦아졌다.

막스의 시선이 레인을 향한다.

그는 턱을 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갈등은 자유주 진영의 제이호커스라는 무력단체를 언제 활용할 것인가였다.

보더 러피안이 빌미를 주면 그걸 명분 삼아 대대적인 반격을 하던가.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어떠한 계기만 있다면 제이호커스를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스가 그 계기를 만들려 한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위원회의 시선이 막스에게 쏠린다.

마을의 일을 제외하면 회의에 끼는 일이 없기에 다들 궁금증이 일었다.

“다들 보안관 말을 들어봅시다.”

찰스 의장과 홀리데이, 그리고 레인 의원도 막스의 입을 주목했다.

“아시다시피 입법부는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드는 법안을 만들 겁니다. 그리고 주지사는 포니라는 곳을 주도로 만들 생각이겠죠.”

“음. 현재 상황이 그렇지. 그래서 자네 생각은?”

막스는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입법부를 거부하고, 로렌스에 새로운 입법부를 선출해서 앉혀야 합니다.”

쿵.

순간 회의실이 충격에 휩싸였다.

“그, 그건 반란 아닌가?”

“연방에서 우릴 가만 놔두지 않을 텐데?!”

“보안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위원회는 질겁하지만, 몇 명은 눈을 반짝거렸다.

찰스, 홀리데이, 레인.

막스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저들의 마음속 한구석엔 이미 이런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었다는 걸.

다만, 사안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을 내뱉지 못한 것뿐이었다.

“일단 끝까지 말을 들어봅시다.”

찰스 의장의 말에 장내의 웅성거림이 수그러들고, 막스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마을의 설립 목적을 생각하면 됩니다. 자유주는 로렌스를 만들었고, 그들은 끝까지 로렌스를 지킬 거라는 걸요. 부정선거로 입법부가 구성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노예주 입장에서나 반란이지, 자유주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막스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우리의 신념을 행동으로 보이면 됩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지지를 끌어낼 겁니다.”

“허. 잘못되면, 이 마을이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야.”

“자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면 안 되지.”

노예주든 자유주든.

이방인, 아니 동양인과는 상관없는 일.

위원회는 보안관과 이 일을 구분 지어 생각했다. 이는 막스를 무시해서가 아닌 반란이라는 말의 두려움 탓이었다.

위원회에서 막스의 말을 부정할 때, 레인이 입을 열었다.

“무조건 반대할 건 아닙니다. 방금 마을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노예주가 된 마을에 로렌스가 존속될 이유가 있습니까? 자유주를 만들려고 왔지, 우린 노예주의 구성원이 되려고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진다.

“보안관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중요한 건 처음 이 마을로 왔을 때 지녔던 신념입니다. 그걸 지키는 게 할 일이지요.”

레인이 막스의 말에 힘을 실어주자, 작은 수군거림만 들릴 뿐 더는 반박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찰스 의장과 홀리데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 말했던 레인도 마찬가지.

반란이라는 단어에 막혀있던 생각이 마침내 전진할 동력을 얻은 것이다.

‘어차피 오늘 결론 나진 않겠지.’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은 필요할 터.

회의가 끝나고 찰스 의장은 막스를 따로 불러냈다. 홀리데이와 레인도 함께였다.

찰스 의장이 막스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오늘 엄청난 말을 던진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만. 말했듯이 전 반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자네 말처럼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건 사실이겠지. 다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네. 주지사가 적극적으로 반란자라고 규정하면 그땐 군인들과 맞서싸워야 하거든.”

“자유주에서 도움을 주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당할 수 있겠지.”

레인 의원도 찰스 의장에 동조했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오락가락하는 주지사. 총독으로서 군사권까지 쥐었기에 더욱 큰 문제였다.

“주지사가 이쪽저쪽 눈치만 보면 다행인데. 분명 노예주의 압력이 거셀 거란 말이지. 그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있어.”

홀리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반란의 무서움은 군대의 개입이다.

더구나 아직 자유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주지사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쉽게 행동할 수 없다는 말이로군요.”

“현실은 그렇네.”

대답하는 찰스 의장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막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지사인 앤드류 리더가 자리를 비운 기간.

족히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