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360)

터벅터벅 느린 속도에 짜증이 난 코빈은 고개를 돌려 뒤를 노려봤다.

기절한 건 둘째치고 이번 일을 주동한 존스는 팔까지 부러졌다. 당시 모습과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기까지 했다.

‘병신 기고만장하고 날뛰더니만.’

마음속엔 동양인보다 존스를 향한 분노가 거세게 일었다.

저 잘났다고 설친 놈 덕분에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다 문득,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친구가 아닌 폭군.

공포와 두려움으로 놈을 따랐던 걸 생각하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요동치는 코빈의 눈동자가 허리춤의 총을 향했다. 하지만 이때.

존스의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말했지···. 뒤통수치면··· 수십 배는 되돌려준다고···.”

“무, 무슨.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근데, 팔은 괜찮아?”

너덜거리는 팔을 움직이려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전해진다.

이가 깨질 정도로 악다문 존스는 막스의 눈빛, 표정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분노,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공포와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나는 단 하나의 방법.

‘놈을 기필코 이 손으로 죽인다.’

하지만 그 시기는 한참 뒤로 밀어둬야 했다.

팔도 팔이지만, 레콤프턴에서 존스를 기다리고 있는 자 때문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스트링펠로우.

그가 존스의 상태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장은 입법부가 소집되는 포니에 집중한다. 그리고 주지사 놈도 이참에 그냥 놔두어선 안 되겠지.”

“......”

“실력 있는 의사 붙여줄 테니까, 네 놈은 당분간 나서지 마.”

“......알겠습니다.”

존스는 칙칙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

레인이 포니를 떠난 지 일주일이 되어서야 로렌스로 돌아왔다.

회의실엔 찰스 의장과 홀리데이, 막스는 레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포니에 사는 토른튼이라는 자가 그러더군요. 마을 설립 투자자 중 주지사 리더가 중심부에 1200에이커를 가지고 있다고.”

“역시. 우리 보안관의 예상이 적중했군요.”

찰스와 홀리데이는 놀랍다는 얼굴로 막스를 쳐다봤다.

사실 이 시기에 땅 투기는 흔한 일이다.

대도시는 이미 오를 대로 올라 투기꾼들이 개척지에 관심을 두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주지사 리더처럼 천 달러에 1200에이커(147만 평)를 살 정도로 저렴했으니 적은 돈으로 분산투자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인 추측이라 해도 주지사의 사라진 행방과 땅 투기를 연관 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미있는 건, 포니 중심에 주 의사당이 건설 중이고 완공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이더군요.”

“햐, 사라진 동안 그걸 준비한 거였네요.”

“주지사란 양반이 어찌 그런.”

생각만 해도 기막힌 일이 아닌가.

홀리데이와 찰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 사실을 알자마자 주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자신은 애초에 캔자스를 노예주가 아닌 자유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더군요.”

“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요. 실제로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처음엔 노력도 했었으니까.”

찰스 의장 말대로 주지사도 처음엔 의욕을 보였었다. 투표 인구 조사와 공정한 선거를 위해 어떤 게 최선일까 고민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무장한 보더 러피안들의 투표소 점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이 사건 이후로 주지사는 노예주들에게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다.

“주지사 본인이 말하길. 협박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로렌스를 돕겠다고 하더군.”

말만 들으면 쌍수 들고 반길 일이다.

하지만 작금의 주지사 말은 금보다 가치가 없어 보였다.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홀리데이와 찰스의 말에 레인은 안심하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주지사가 충격적인 말을 하더군요.”

‘지금 충격적일 게 뭐가 있지?’

기억 구석구석을 아무리 뒤적거려도 막스는 레인의 입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주지사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게다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한 사람을 콕 짚어 지칭하더군요.”

‘설마.’

레인이 막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첨이라는 듯이.

  주지사 앤드류 리더

‘주지사의 경호 임무라니.’

캔자스 준주 주지사 앤드류 호레시오 리더.

신변 보호까지 요청할 정도면 자기가 사면초가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서 땅 투기에 열 올리는 걸 보면 그 양반도 참 평범한 사람은 아니야.’

굳이 지켜야 하나 싶지만, 캔자스를 자유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인물이긴 하다.

게다가 갈팡질팡하던 주지사가 자유주의 편을 든 계기는 곧 있을 포니의 입법부 소집 때문이기도 하고.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라.’

주지사를 보호하기 위해 로렌스에서 빠지면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마을의 무장은 서두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결심을 내리고, 막스는 레인에게 말을 건넸다.

“주지사를 보호하는 동안 로렌스에선 단독 입법부를 미리 선출하고, 병력 집결은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자네가 떠나기 전에는 마을로 모일걸세. 그리고 그중 다섯이 자네를 지원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죠.”

제이호커스(Jayhawkers).

풀뿌리처럼 흩어져 활동하던 노예제 폐지론자들, 그중 무력을 앞세운 이들이 레인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이 로렌스로 몰려드는 건 원래 역사보다 빠른 시기. 이는 막스가 반란이라는 카드를 꺼내어 벌어진 결과였다.

찰스는 턱수염을 만지며 막스에게 물었다.

“공표는 언제쯤이 좋겠나?”

로렌스가 반란, 아니 단독 입법부를 만들겠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시기.

막스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포니에서 소집이 되는 날이 적기죠.”

찰스와 레인, 그리고 홀리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같은 생각이로군. 그나저나 토피카는 언제쯤 이전할 수 있겠나.”

찰스가 이번엔 홀리데이에게 물었다.

로렌스는 임시 장소일 뿐, 토피카를 주도로 만드는 게 이들의 숙원이다.

“의회 건물은 막바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변 편의시설까지 갖춰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뭐 다들 열심이라 조만간 끝나지 않을까 합니다.”

홀리데이의 말에 막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토피카에 진짜 애정이 많구나.’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어 만든 도시의 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막스는 전생에 자신이 본 토피카를 홀리데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말이다.

*

“주지사 경호라니!? 와, 우리 보안관님 출세했네.”

피치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다.

막스는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지사가 뭐 별건가요.”

“하긴, 우리 보안관님에 비하면 주지사는 뭐. 근데 나는 안 데려갈 거지?”

“같이 갈래요?”

“아니. 나는 마을을 지켜야지.”

피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잘 갔다 와. 마을은 걱정하지 말고.”

“어째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설마.”

눈가에 웃음기가 남아있다.

피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최근 있었던 훈련 때문이다.

지난번 발차기를 본 후 자기도 배우고 싶다길래 기본부터 착실히 알려주기로 했다.

그 시작은 다리 찢기.

- 발차기의 기본입니다.

- 그래?

- 일단 최대한 다리 벌려봐요. 오케이. 이 상태에서 어깨를 누르는 거죠. 이렇게.

- 자, 잠깐. 아아아악!

그렇게 하루하루 강제로 다리를 찢었더니, 못 버티겠나 보다.

“나 없다고 게을리하지 말고 열심히 해요.”

“네네. 발차기의 기본인걸요.”

기대하진 않았지만 피치가 근전접투까지 배우면 임무에 활용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훗날 남북전쟁에서 그녀의 활약을 기대할 수도 있고.

‘차라리 마타하리로 키워볼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첩보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마타하리.

‘그건 아닌가.’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최후를 떠올리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막스는 벽 짚고 다리 찢는 시늉만 하는 피치에게 말을 건넸다.

“내일 민병대 소집해줘요.”

“마을 비우는 거 걱정돼서 그래?”

“그것도 있고. 전할 말이 있어서요.”

“알았어.”

“그리고 그렇게 다리 찢어서 어느 세월에 발차기하겠어요. 도와줄게요.”

“괜찮습니다, 보안관님! 접근 금지!”

다음 날.

막스는 오랜만에 민병대를 소집했다.

피치까지 열 명. 막스는 그들을 모아두고 입을 열었다.

“조만간 로렌스에 많은 사람이 올 겁니다.”

“뭐야, 또 무슨 일 있는 거야 보안관?”

“누가 오는 데?”

일부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로렌스 마을을 노예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에요.”

“오오! 그럼 잘 된 거 아냐?”

누군가 마을을 지켜준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있나. 하지만 막스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고 싶었다.

“마을을 지키는 게 민병대의 임무에요.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마을 밖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알죠?”

“우리야 그냥 평범한 정착민들인데 뭘.”

“그러니까요. 지금 이대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제 말 꼭 가슴에 새겨둬요.”

“걱정하지 마요 보안관님! 우린 영원한 로렌스 민병대니까요!”

뭘 알고 대답하는 건지, 피치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소집을 끝내고 사무실로 가는 길.

막스의 말을 곱씹어보던 피치가 물었다.

“그 온다는 사람들이 어떻길래 그래?”

“신념으로 무장한 군인들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음. 그럼 보더 러피안과는 완전 반대네.”

“글쎄요. 신념은 반대지만 나머지도 그럴지는 지켜봐야죠.”

막스가 우려하는 건 민병대원이 제이호커스에게 동화하여 폭력에 물드는 것이다.

레인에게 민병대 창설을 제안하고, 주도권을 가져온 이유도 이 중 하나였으니까.

*

포니의 입법부 소집이 있기 사흘 전.

로렌스 마을에 무장한 자들이 들어섰다.

그 수가 대략 50명.

레인이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막스를 본 제이호커스들의 반응은 그들의 나이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어깨에 총을 걸친 자들 일부는 인사 대신 침을 뱉고, 일부는 말없이 시가 연기를 뿜어댔다.

대부분 멕시코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 혹은 인디언과 싸운 전적이 있는 자들.

그중엔 피를 찾아 무리에 끼어든 자도 있을 터.

노예제에 관한 신념만 다를 뿐 이 시대 여느 백인과 차이가 없었다.

“이들 다섯이 자네를 따라 주지사를 보호할 걸세.”

막스를 배려해서인지 레인 의원이 데려온 남자들은 비교적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

“막스 조입니다.”

“진짜 살다 살다 동양인을 다 보네.”

“근데 나이가 어떻게 돼?”

“19입니다만.”

“애송이네.”

“다 애송이 같습니다만.”

“시발, 우린 다르지.”

레인은 굳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무라거나 눈치를 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완성되지 않은 조직은 체계도 없다.

레인 의원의 주도하에 모였을 뿐 그들을 장악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어쩌면 레인은 어린 제이호커스 만큼은 막스가 정리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

캔자스를 택했을 때부터 제이호커스와의 만남은 정해진 수순.

막스는 제이호커스를 통째로 집어삼킬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보도록 하죠.”

막스는 그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곤 사무실로 돌아갔다.

“마을 지키러 온 게 아니라 털러 온 거 아냐? 죄다 현상금 걸린 것처럼 생겼던데.”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조심해요. 가끔 시비가 붙거든 총 꺼내는 건 자제하고.”

“하, 갑자기 우리 보안관 따라가고 싶어지네. 늦었지?”

“그럼요. 마차 떠났습니다.”

*

다음 날. 막스는 레인이 정해 준 다섯 남자와 함께 레콤프턴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여기가 접선 장소다.”

“무슨 접선 장소까지 만들고 난리냐.”

막스가 뒤를 돌아봤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심드렁하다. 그렇다고 딱히 시비를 걸거나 딴지를 걸진 않았다.

어제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랄까.

주지사를 기다리는 동안 뻘쭘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그중 막스보다 한 살 어린 터커라는 남자가 침묵을 깨며 막스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진짜야?”

“다짜고짜 그렇게 물으면 진짜라고 답하겠다.”

“..... 아니, 그 뭐냐. 열 명도 넘게 죽였다며?”

터커의 말에 다들 막스를 쳐다본다.

이들 대부분이 캔자스가 아닌 북부 출신.

막스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젯밤 레인에게 무슨 말을 들었나 보다.

“아니지? 시발, 뻥 일줄 알았다니까.”

사람 죽인 게 자랑도 아니고, 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애송이 새끼들.’

막스가 내심 비웃고 있을 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오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투기꾼, 아니 주지사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구나.’

말이 멈춰 서기도 전.

조금만 기르면 구레나룻이 양쪽 입까지 닿을 것 같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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