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360)

‘오늘 결과를 보면 방향이 나오겠지.’

홀로 남은 막스는 천막을 벗어나 레인을 찾아갔다.

“요새를 지어야 한다고?”

“제이콥 브랜슨을 데려온 다음이 더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미 데려온 것처럼 말하는군.”

레인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요새를 어디에 짓겠단 말인가?”

“오레드 산입니다. 적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만들면 위협용으로도 적당할 겁니다.”

“이 문제는 주지사와 상의해야 할 텐데. 나를 찾아온 이유는?”

“선물입니다. 레인 의원께서 주도적으로 나서시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실제 역사에서 로렌스의 요새는 레인의 건의로 지어지게 된다. 막스는 그 시기를 앞당기고 레인에게 또 한 번의 깊은 인상을 남기려 했다.

“선물이면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제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면 됩니다.”

“찰스 주지사가 아닌 나를 택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군.”

제임스 헨리 레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막스의 말이 묘한 기쁨을 준 모양이다.

그는 애써 침착한 척,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인은 요새 건설을 건의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를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천막으로 돌아오는 길.

‘일 년 남았다.’

신분조차 뚜렷하지 않은 막스가 정식 영주권을 얻는 날까지.

‘로렌스 보안관도 그때가 되면 슬슬 정리해야겠지.’

부족한 기반은 그때까지 다져놓으면 된다.

*

때는 11월 말.

평원의 풀들은 색깔을 잃고, 추위에 얼어붙은 땅들이 말발굽 소리에 들썩거린다.

두드드드드.

막스와 그 뒤를 따르는 61명의 젊은 제이호커스. 찬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그들의 흥분과 긴장감은 높아져만 간다.

맨 뒤에 쳐진 로어는 몸통 반 만한 너비의 철판을 달고 다녔다. 옆에 있는 분대원도 마찬가지. 둘은 덩치가 컸다.

그리고 얼마 후. 평원에 홀로 서 있는 제이호커스가 합류했다.

터커의 통신분대원으로, 다른 분대원 또한 로렌스에서 그린터 플레이스 구간 사이를 일정 간격으로 서 있었다.

막스를 보자마자 말에 올라탔다는 건, 아직 터커의 소식이 여기까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

이후 3번째 통신분대원을 만났을 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제이호커스들은 터커의 무지막지한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터커와 분대원들의 말 타는 솜씨는 제이호커스 중 단연 최고였다.

“모세 그린터가 요청을 승낙했습니다!”

“그 외엔?”

“거칠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오케이. 가자!”

가는 구간마다 통신병들이 합류해 인원은 다시금 69명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린터 플레이스 페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물류를 배에 실어 나르고, 거래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갑작스레 무장한자들이 몰려오자 몸을 내빼기 시작했다.

탕!

여기에 더해 막스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며 소리쳤다.

“그린터 플레이스는 우리가 점거한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무법자의 등장, 뒤이은 모세 그린터가 튀어나와 분노를 터트렸다.

짜고 치는 포커판이건만 그린터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눈에 핏기가 서려 있었다.

‘이 양반 연기 잘하네.’

잠시 둘의 눈이 엉키고.

막스는 모세 그린터를 묶도록 지시했다.

터커가 강제로 끌고 가자 그린터는 발버둥까지 치며 메소드급 연기를 펼쳤다.

‘그동안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본데.’

이 기회에 푸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린터의 연기는 나름의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노예제 옹호론자들에게 배신자라며 공격받지 않으려면 이 방법뿐이었으니.

막스가 무턱대고 도와달라고 했다면 분명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스는 리스크는 따르지만 재미있는 제안을 편지에 적어 보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여간 잔머리는.’

묶여있는 그린터는 피식거리며 배를 타고 와이언도트로 향하는 막스를 쳐다봤다.

그리곤 그 뒤에 각 잡고 서 있는 제이호커스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백인들을 지휘하는 동양인이라.’

오늘은 그린터의 상식이 또 한 번 깨지는 날이었다.

*

그린터 플레이스에 분대 하나를 주둔시켜 말을 지키게 하고, 막스는 배를 타고 와이언도트 마을로 향했다.

같은 시각 북쪽으로 진격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존 브라운의 일행들이었다.

뒤늦게 이들의 구출 작전을 알게 된 레인은 서둘러 병사 한 명을 특파했다.

이들이 만난 건 와이언도트와는 27km 떨어진 올라테라는 마을이었다.

“동양인이 구출 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존 브라운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그자에게 동양인의 군세와 전략을 물었다.

“글쎄요. 대략 80명인데 그중 전투 인원은 대략 50명 안팎으로 알고 있습니다.”

“30명이 비전투 인원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좀 특이하긴 하죠.”

통신병에 잠입, 공병부대까지 있다는 말에 존 브라운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총칼 들고 싸우려 모인 자들을 굳이 비전투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존 브라운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동양인을 전적으로 의지할 순 없네. 개인 능력은 뛰어날지 모르나 이건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걸세.”

“음. 제가 낄 자린지 모르겠는데.”

존 브라운이 힐끔 뒤를 쳐다봤다.

몇 번 생사를 넘나든 적이 있는 바운서 콜린이었다.

“그 동양인이 보통은 아닙니다.”

“자넨 잘 아는 모양이군.”

“뭐, 몇 번 부대껴 봤는데. 애새끼가 몸은 19살인데 머릿속은 시커먼 정치인이 따로 없거든요.”

MJ인지 뭔지가 새겨진 탄두 두 개로 자신의 은혜를 퉁 치려는 게 노회한 정치인보다 더 악랄했다.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 콜린.

입이 걸걸한 그가 칭찬까지 하는 걸 보면 동양인에게 뭔가 있긴 한가보다.

고심하던 존 브라운은 생각을 떨쳐내고 말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작전은 계획대로 하겠소. 갑시다.”

“......”

레인의 지시를 받은 병사는 하는 수없이 존 브라운의 일행과 함께 와이언도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고집은.’

바운서는 우직한 존 브라운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한편, 미주리 주의 병력도 와이언도트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운 놈이 꾸물거리며 지각하듯, 급할 것 없는 그들의 이동속도는 느리기만 했다.

그린터 플레이스와 와이언도트의 페리 선착장은 뱃길로 불과 12km밖에 되지 않는 거리다.

배가 멈추고 닻을 내린다. 이어 커다란 나무판이 선착장과 이어지자 병력들이 쏟아져 나왔다.

놀란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그러는 동안 피치와 함께 먼저 도착한 분대원 넬슨이 막스에게 달려왔다.

무장을 전혀 하지 않은 농부의 모습.

정보요원다운 옷차림의 정석이다.

“피치 분대장이 작성한 겁니다.”

돌돌 말린 종이를 펼치자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나타났다.

막스는 붓 대신 총을 든 화가 지망생 스탠리 넬슨을 힐끔 쳐다봤다.

“네가 그린 거지?”

수줍게 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고퀄이야.’

종이로 시선을 돌린 막스는 와이언도트 마을 풍경 속에 피치가 적어둔 깨알같은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제이콥 브랜슨을 가둔 보안관 사무실.

주변을 지키는 병력의 수와 위치까지.

짧은 시간 알아낸 것 치고는 만족스러운 정보들이었다.

‘피치의 능력은 확실히 이 쪽이군.’

첩보, 정찰 및 정보습득 요원으로 제격이 아닌가.

“그래서 피치의 계획은?”

“대원들이 오는 대로 적들을 유인하겠다고 했습니다.”

“흠. 두 개 분대가 피치를 지원한다.”

“옛썰!”

그린터 플레이스와 이곳 선착장, 그리고 피치와 그녀를 지원할 분대까지 빼면 남은 인원은 막스 포함 32명.

‘이번 작전은 빠르게 치고 빠진다.’

곧 들이닥칠 미주리 병력도 문제고.

한 사람 살린다고 몇 명을 죽인다면 다음 벌어질 사건에서 적들에게 명분을 실어주는 꼴이다.

막스는 애초에 이 작전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낼 생각이었다.

“되도록 총은 쏘지 않고 끝낸다.”

“......!”

하지만 이를 모르는 분대원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 그게 가능해?

- 죽을지도 모르는 데 총을 안 쏜다니.

- 난 모르겠다. 걍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 아니, 아무리 계획이 좋아도 그렇지···.

완벽한 계획도 어긋나는 법이 아닌가.

일부는 걱정을 일부는 아쉬운 말도 했다.

-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화끈하게···.

“이유 없이 총 쐈다 걸리면 각오해.”

“... 옛썰.”

제이콥 브랜슨이 있는 곳까진 3km 거리.

막스는 허리까지 자란 목초지를 헤치며 나아갔다.

잠시 후. 목적지가 눈에 들어오자 막스는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해질녘 노을로 붉게 물든 마을.

마을의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오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막스는 시선을 바삐 움직여 피치를 찾아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헛간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들어왔다.

‘!’

시선을 떼지 못한 막스는 곧이어 무장한 채 말을 타는 모습을 지켜봤다.

“피치가 곧 작전에 돌입한다. 한 개 분대는 이곳에 대기, 나머지 분대는 나를 따른다.”

목초지에 몸을 숙여 마을로 접근하는 때.

탕!

피치가 총을 쏘자 이를 신호탄으로 제이호커스 20여 명이 마을로 진격한다.

“로렌스 새끼들의 습격이다!”

존스의 사무실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몸을 숨겼다.

‘신중한 우리 존스는 안 나오려나.’

아마도 사무실 안에서 진을 치고 있을 터.

막스는 피치가 알려준 정보대로 사각지대인 사무실 뒤쪽으로 접근했다.

로렌스와 달리 상점 몇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마침내 벽까지 진입했을 즈음.

- 로어. 앞장서.

- 옛썰.

로어와 분대원 한 명이 등에 짊어진 3cm 두께의 철판을 앞으로 가져왔다.

전투 경찰이 진압 작전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작금의 납알탄을 고려하면 나름 효율적인 전투 방패였다.

다만 투박스럽기에 손볼 곳이 많았다.

로어와 분대원이 허리를 숙여 은밀하게 사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을 가리기 위해 마을로 쳐들어올 것처럼 굴던 피치는 주변을 맴돌며 총격전을 벌였다.

한편 적들의 총소리를 가늠한 존스는 철창에 갇힌 제이콥 브랜슨을 비아냥거렸다.

“마을로 진입하지 않는 걸 보니까 우리를 밖으로 꾀어낼 생각인가 본데. 나한테는 안 통하지. 헛된 짓거리라고.”

“.......”

“그래도 즉결 심판이 아닌 정식 재판에 넘기는 게 어디야. 보안관다운 처리 아닌가?”

“뻔뻔한 놈.”

브랜슨의 반응에 존스가 피식거렸다.

이때.

콰앙!

사무실 스윙도어가 부서질 듯 젖혀지고.

철판 두 개가 위아래로 문짝을 가로막는다.

그게 무엇이든, 존스와 일곱 명의 부하들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 방아쇠부터 당겼다.

탕! 팅!

탕! 팅!

납알탄으로 철판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진정 모르는 걸까.

수차례 총알을 쏟아부은 뒤.

철컥. 철컥.

보안관 양쪽 창문에서 수십 개의 총구가 튀어나와 존스와 수하들을 향한다.

“이 미친···.”

존스가 눈을 부릅뜰 때, 철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총 내려놔.”

‘!’

기겁하여 몸을 부르르 떤 존스는 자연스레 부러졌던 팔로 손이 갔다.

“총 내려 놓으라 했다.”

철컥.

장전된 총구가 존스에게 향한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가 부하들에게 눈짓하자 다들 똥씹은 얼굴로 무장을 해제했다.

“팔은 다 나았나 봐?”

철판 뒤에서 막스가 나타났다.

눈이 마주친 존스의 눈동자가 또다시 출렁거렸다.

하지만 이내 분노가 치밀고 다가오는 막스를 향해 이를 바득 갈았다.

“동양인 쿨리 새···.”

짜악!

“눈에 힘 빼, 새끼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