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마다 돌아가면서 저를 괴롭히는군요. 제 입에서 원하는 말을 듣긴 힘들 겁니다.”
“안심해, 스콧. 우리 핑커톤이 자넬 지켜줄 테니까.”
‘퍽이나 지켜주겠다.’
스콧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밀고자를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언제 우리 가족들에게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지켜준단 말입니까.”
“우리 탐정들이 어디 한 둘인가. 이런 식으로 입을 닫는 것도 도둑들을 돕는 거야. 방조죄 몰라?”
토디의 은근한 협박에 스콧의 미간이 좁아진다. 그러나 절대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보다 못한 막스가 끼어들었다.
“캔자스 로렌스에서 온 막스 조라고 합니다.”
“로, 로렌스?”
드레드 스콧의 눈이 조금은 커졌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심장 로렌스. 흑인들, 특히 노예들에겐 상징성이 큰 곳이었다.
“로렌스를 위해 일하는 친구의 물건이 도둑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돈이라면 이렇게까지 부탁하진 않았겠죠.”
“돈이 아니면···?”
“말할 순 없지만, 로렌스에는 상당히 중요한 서류에요.”
막스는 교묘하게 서류를 노예제 폐지론과 연결지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드레드 스콧의 머릿속에도 이미 그렇게 단정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콧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곧 중요한 판결을 앞두고 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결과를 떠나, 한 가지 제안을 하죠.”
“제안이요?”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로렌스로 오세요. 지금 받는 주급의 두 배를 주겠습니다. 일자린 많습니다.”
포터로 일하는 스콧의 주급은 5달러.
백인들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막스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 결과가 어떻든. 지금처럼 당신을 후원하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먹고야 살겠지만, 자식들까지 먹여 살리려면 악착같이 벌어야지 않겠습니까?”
어정쩡한 신분이지만 가장 최근 미주리 지방 법원의 판결에서 드레드 스콧은 자유 신분을 인정받았다. 그 때문에 거취만 명확히 밝힌다면 로렌스로 옮기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막스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재판에 이겼다 치죠. 노예제 옹호론자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마 가족들은 더 시달리게 될 겁니다. 반대로 패소했을 땐 어떨까요? 노예의 신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막스는 스콧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로렌스에 있으면, 당신을 데려가긴 쉽지 않을 겁니다. 왜냐, 이미 우린 노예제 옹호론자 놈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거든요.”
대통령이 폭도들이라고 규정해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로렌스다.
막스는 드레드 스콧을 로렌스로 데려와 자유주의 심장을 더욱 견고하고 튼튼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율리시스 그랜트와 드레드 스콧 둘 다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네.’
그랜트는 미래를, 스콧은 현재에 폭발력을 가진 인물이다.
뭐든 로렌스로 끌고 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설사 그게 아니어도. 뒤틀린 역사로 인해 개털이 될지언정 일꾼으로 고용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야··· 내가 한때는 로렌스 보안관이었던 사람이기 때문이죠.”
막스가 스카프를 내리자 드레드 스콧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동양인!?”
얼굴은 보였으나 막스는 신분을 증명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핑커톤 토디와 직원이 침을 튀기며 설명하고, 막스는 입맛을 다시며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어줬다.
‘언젠가 내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리라.’
캔자스 밖, 막스는 신기한 동양인일 뿐이었다.
*
스콧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핑커톤은 그가 로렌스로 이주할 때까지 보호해주겠다는 짧은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그리고 나서야 도둑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 라이언 홀드, 그가 최근 조직한 갱단이 있습니다. 아일랜드계만 모아서 몸집을 불리고 있죠.
포터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손님 물건을 훔치다 걸린 일이 있었다. 나이 어린 아일랜드계인 그는 스콧에게 발각되자, 이 일을 불면 각오하라며 갱단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후에도 그 동료가 호텔과 항구에서 부자들의 짐을 훔치는 걸 목격했다고도 했다.
스콧과 헤어지고, 호텔을 빠져나온 토디가 막스에게 말을 건넸다.
“라이언 홀드라면 저도 잘 압니다. 2년 전 독일인 신문사를 불태우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있었거든요. 뭐, 한때는 저도 같이 어울렸던 적도 있었고요.”
수석 탐정 토디는 짐작되는 장소가 있는 듯, 막스와 직원을 음침한 골목으로 안내했다.
“참고로, 여긴 캔자스가 아닙니다. 총은 가급적이면 사용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러다 총 맞으면?”
“가난한 노동자들이라 총 사기도 쉽지 않고, 총 쏘는 순간 사람들이 몰려와서 칼 아니면 쇠파이프를 선호합니다. 라이언 홀드의 경우엔 뒷골목에서 주먹으로 먹고살던 놈이었어요.”
“오, 돈을 걸고 싸운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한 번 이기면 수십 달러씩 벌 수 있으니까요. 저도 한때는 좀 싸웠습니다.”
토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핑커톤 탐정이 되기 전엔 뒷골목을 전전했다고 했다. 뉴욕이나 뉴올리온스처럼 항구가 발달한 곳엔 이민자들이 넘쳐나고, 그들 사이에서 돈을 걸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도 했다.
“라이언 홀드와는 아는 사이니까, 제게 맡겨주세요.”
“알아서 하십시오. 뭐, 저야 홀리데이의 서류만 찾으면 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스의 머릿속엔 이미 싸움판을 상상하고 있었다.
파이팅 머니가 걸린 길거리 싸움.
이 시대의 과격한 주먹 싸움은 영화로도 꽤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었다. 서부의 황무지가 총이라면 대도시는 주먹과 쇠파이프였으니.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걷던 차. 갑자기 사람들의 함성이 일행의 고막을 두드렸다.
토디는 다소 긴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싸움판이 벌어졌네요. 거기에 분명 라이언 홀드도 있을 겁니다.”
“가시죠.”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두 어깨가 좁은 골목을 막아섰다. 그들의 육덕진 몸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보이질 않았다.
그중 하나가 토디와 테리를 보며 아는체했다.
“호오, 이거 핑커톤 탐정 나리들이 여긴 어쩐 일이실까?”
“내가 못 올 데 왔나?”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면 수상한 거 알지? 게다가.”
남자가 막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왜 얼굴은 가리고 지랄인데?”
“남이사 가리든 말든.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까지 가려서 받았냐?”
“너 진짜, 오랜만에 왔구나. 핑커톤인지 핑크통인지 네놈들이 알짱거리고부터 그런 거야, 병신들아.”
토디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었다.
이를 뒤에서 지켜본 막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싸움에 참가하려고 하는데, 뭔 말들이 그렇게 많아.”
토디와 테리, 그리고 두 살덩어리가 막스를 쳐다봤다.
“스카프부터 벗지 그래?”
막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벗기는 놈한테 10달러. 어때?”
< 그러니까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 끝
작가의말
드레드 스콧 소송건을 어제 독자님께서
댓글로 달아주셨더군요.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기엔 사건이 너무 복잡해서,
자유신분, 노예신분을 두고 벌어진 사건이라고 제가 축약해버렸네요.
< 나중에 갚아 >
스카프 벗기는 데 10달러.
막스의 도발적인 제안에 두 살덩어리는 마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막스가 보인 13g짜리 10달러 동전과 함께 사라졌다.
“일 년에 한 번씩 미친놈이 나타나더니, 올해는 빨리 왔네.”
“하여간 정상인 놈들이 없다니까.”
두 놈이 이죽거릴 때, 막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토디와 테리가 길을 터주었다.
“우리를 물로 보는 구만.”
한 놈이 막스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스카프를 잡으려 오른손을 뻗었다.
닿을 찰나, 막스가 놈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안쪽으로 비틀었다. 손목 회전 꺾기라는 호신술로, 가볍게 손목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행동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기술이었다.
“윽! 아, 알았어. 이거 놓고 얘기해. 악! 시발. 놓으라니까!”
비트는 각도가 커질수록 고통도 커진다. 땀을 뻘뻘 흘리던 놈이 이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 손 안 놔!?”
멍때리던 옆에 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막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살이 덕지덕지 붙은 주먹은 바람 소리만 클 뿐, 스피드는 형편없었다.
슬쩍 피한 막스는 히죽 웃으며 이미 잡고 있던 놈의 손목을 더욱 비틀었다.
“아아악! 시발, 안 도와줘도 되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새끼야!”
“.....”
뻘쭘해진 동료는 공격을 멈추고 눈을 껌뻑거렸다. 막스는 그제야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
“안내해.”
고통에서 벗어난 남자는 시뻘게진 자신의 손목을 잡으며 이를 갈았다.
“으···. 이 개새끼. ”
남자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막스를 노려봤다. 여차하면 또다시 덤빌 기세였다.
“이번엔 진짜 부러트린다. 각오하고 덤비는 게 좋을 거야.”
흠칫한 남자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눈을 찡그렸다. 자기가 상대할 레벨이 아님을 깨닫고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에는 싸움 실력이 뛰어난 놈들이 넘쳐난다.
들여보낸 뒤에, 당하는 걸 지켜보면 된다.
‘개자식. 나갈 땐 기어나가게 만들어 주마.’
남자는 토디와 테리를 쳐다봤다.
“너희 둘,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둬.”
“그냥 구경 온 거라니까, 그러네.”
“따라와. 넌 여기 계속 지키고 있어, 병신아.”
“이 새낀 도와줘도 지랄이야.”
친했던 둘 사이를 쪼개버린 막스는 담담하게 남자를 따라갔다.
좁은 골목이 끝나고,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공터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는 두 사람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진한 갈색, 또 다른 한 명은 누리끼리한 내복을 입어 구분하기가 수월했다.
“아주, 박살 내버려!”
“외지 놈들한테 지면 되겠냐!”
“아오, 시발. 어째 불안 불안허냐.”
지켜보는 관중들은 소리를 지르며 열기를 더해갔다. 토디가 막스에게 설명하듯 속삭였다.
- 대부분 새벽에는 하역장에서 일하고, 번 돈으로 내기를 하는 자들이죠.
- 그래서 라이언 홀드는 어딨습니까?
토디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한 곳을 가리켰다.
- 길쭉한 모자를 쓴 남자가 라이언 홀드입니다. 그새 콧수염을 길렀군요.
코트를 걸치고 정장 차림에나 어울리는 모자를 쓴 남자. 라이언 홀드는 싸움판을 쳐다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살덩어리가 막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놈 이벤트는 이게 끝나면 하는 거로 하지. 단, 우리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참가하는 자들에게 3달러 받고. 그중 1달러는 수수료로 하지. 어때?”
“뭐, 그렇게 하던가.”
“그럼, 각오 단단히 해둬. 네 놈 코뼈랑 이빨 잘 챙기고.”
살덩어리가 키득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스의 시선은 라이언 홀드처럼 싸움하는 두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진한 갈색 내복을 입은 자가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동시에, 안쪽 다리를 걸어 몸의 중심을 무너트린다.
동시에 목을 잡아 땅에 내다 꽂았다.
그 뒤엔 몸에 올라타 파운딩을 시도하는데···.
‘어째 많이 보던 기술이다.’
막스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나, 저 쉑!’
- 꽃피는 봄이 오면 다시 오겠습니다, 대장!
젊은 제이호커스. 막스 중대 중 콜린의 휘하에 있던 2소대 2분대 데니스 헤인즈.
꽃피는 봄이 올 때까지 세인트루이스 뒷골목에서 싸움질을 하고 있었다.
‘설마 혼자는 아니겠지.’
막스는 눈알을 굴려 관중들을 훑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분대였던 제이호커스 세 명이 헤인즈를 응원하고 있었다.
“기술 들어가면 끝난 거지!”
“시발, 대장이 봤으면 분명 감탄했을 거야! 헤인즈가 아주 제대로 배웠네.”
‘...... 감탄은 개뿔.’
기껏 이러라고 훈련 시킨 게 아닐 텐데.
막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올 때. 헤인즈 밑에 깔려있던 놈이 항복을 선언했다.
“승자는, 데니스 헤인즈!”
심판이 헤인즈의 승리를 선언하자 함성과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라이언이 아니면 답이 없다니까.”
“근데, 저 새끼들 대체 어디서 온 거야?”
“말은 일리노이주에서 왔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막스의 귀는 관중들의 대화에, 눈으로는 헤인즈를 향했다.
거친 숨을 내쉬던 헤인즈는 파이팅 머니를 챙기곤 승리의 미소와 함께 동료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막스가 고개를 절레 저을 때, 옆에 있던 살덩어리가 드디어 중앙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모두 주목! 지금부터 오늘의 특별 이벤트를 안내하겠다!”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자에게 쏠린다.
그 수가 족히 50명은 되었다.
“여기 있는 이자가 말하길! 자신의 스카프를 벗기는 사람에게 10달러를 주겠다고 한다. 참가비는 3달러! 도전할 사람 있나?”
전대미문의 이벤트. 장내엔 침묵이 흘렀다.
이때 누군가 막스를 훑어보며 소리쳤다.
“이벤트고 나발이고, 저자 허리춤에 보이는 총부터 없애야 하는 거 아냐?”
“맞아! 언제부터 이곳에 총이 허용됐냐!”
“그리고 옆에 둘은 핑커톤 탐정들 아냐?”
“요새 월급 안 나오나 보네. 갑자기 여긴 왜 기어들어 왔대.”
관중들이 비난과 조롱을 쏟아내고, 토디와 테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핑커톤에 대한 인식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막스는 홀스터를 풀러 둘에게 건네줬다.
그리고는 중앙으로 나서며 말없이 10달러 동전을 들어 보였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장내의 목소리가 수그러들고 이내 도전자가 나타났다.
방금 게임을 끝낸 데니스 헤인즈.
동료에게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중앙으로 나선 것이다.
‘에휴, 저 병신.’
막스의 눈에 한심한 빛이 떠오르고, 헤인즈는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피식거렸다.
“아주 자신감만큼은 누구랑 똑 닮았구나, 요 머더 뻐커. 과연 실력도 그런지 확인해 볼까?”
허리를 슬쩍 숙인 헤인즈가 막스를 노려본다.
권투 자세로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스카프를 낚아채려 오른손을 뻗는다. 문지기였던 살덩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막스.
왼쪽 어깨가 슬쩍 뒤로 빠지더니, 어느새 내지른 오른발이 헤인즈의 얼굴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