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막스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유주가 밀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죠. 반면 노예주는 확실한 구심점이 있습니다.”
“대통령이군.”
“바로 그겁니다. 대통령을 빼앗기고 캔자스까지 자유주로 선언되면, 노예주는 극도로 불안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확실히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터진다면, 자유주와 노예주의 처지는 완전히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
가지고 있던 걸 빼앗긴 노예주는 필사적으로 이를 되찾으려 할 테고, 반대로 구심점이 생긴 자유주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자야.’
존 브라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막스가 슬쩍 한발 물러났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 미래를 그 누가 알겠습니까.”
“이제 와 발을 빼기엔 늦었네. 자네가 한 말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장 완벽한 그림이네!”
한껏 고무된 존 브라운.
그의 머릿속에 막스의 말이 깊숙이 새겨졌다.
노예 해방을 이루는 마지막 종착지인 전쟁.
이를 만들어 낼 방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에 드러난 변화를 지켜본 막스는 이때다 싶어 말을 던졌다.
“문제는 전쟁이 벌어진 다음입니다. 전쟁을 결판 짓는 건 돈과 무기지 신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막스는 존 브라운에게 역할 분담을 제안했다.
“저는 이곳에서 돈과 무기를 만들 테니, 존은 그림을 완성하는 건 어떻습니까? 차기 대통령과 캔자스를 자유주로 만드는 겁니다.”
사실 존 브라운이 하려던 행동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다만 맹목적이고 흐릿한 목적을 뚜렷하게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우리가 제대로 손잡고 활약하는 건, 전쟁터가 될 겁니다.”
원 역사에서 존 브라운은 남북전쟁 직전에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과격한 행동이 원인이지만, 이는 대통령 선거와 남북전쟁 발발에도 영향을 끼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데 만약 존 브라운이 죽지 않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전쟁은 벌어진다에 내 전 손모가지를 건다.’
*
사무실에서 나온 막스와 존 브라운은 대장간으로 향했다.
“ 전쟁 물자를 이 대장간에서 만들 생각이로군.”
“비밀입니다.”
존 브라운은 헛웃음을 지었다. 막스는 그를 대장간 옆 창고로 안내했다.
그곳엔 존 브라운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신기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이건 뭔가?”
“야전에서 튼튼하게 캠프를 만들 수 있는 망치와 못입니다. 엄청나죠.”
“이건?”
“야전에서 병사들의 배를 채우고 사기를 올려 줄 바비큐 화로죠. 대단하지 않습니까?”
존 브라운은 페달식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 그건 돈 벌려고 만든 겁니다.”
“대체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전부 자네 고향에서 쓰던 것들인가?”
“뭐, 그런 셈이죠.”
“죽기 전에 조선은 꼭 가봐야겠군. 레인 의원도 그 말을 하던데. 같이 가봐야겠어.”
“......”
창고를 둘러보는 중간 율리시스가 나타났다.
존 브라운에게 소개하자,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율리시스 그랜트?”
“기억하시는군요. 아버지가 제스 그랜트입니다.”
“이런 우연이 다 있구만.”
‘뭐야, 이 양반도 알아?’
은근 율리시스와 엮인 자들이 많다.
존 브라운의 아버지는 가죽을 가공하는 무두질 공장을 운영했고 율리시스의 아버지는 그 공장을 감독하는 직원이었다.
드넓은 미국이지만 좁다면 좁은 인연이었다.
오래된 인연인 만큼, 존 브라운과 율리시스의 긴 대화가 이어졌다.
“멕시코 전쟁 영웅이 왜 대장간에 있나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만.”
“예. 처가살이는 좀···.”
“이해하네. 그러고 보니 자네 장인은 노예제 옹호론자가 아닌가?”
“...... 잘 아시는군요.”
“뭐 자네만 아니면, 그걸로 된 거지.”
율리시스와 대화를 나눈 존 브라운은 대장간을 좀 더 둘러본 뒤 막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내 할 일을 좀 더 생각해보겠네. 다음에 좋은 소식을 들고 오도록 하지.”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존 브라운과 헤어진 막스는 코디와 히콕이 있을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던 중, 얼굴이 퉁퉁 부은 네이선 로어와 마주쳤다. 어깨를 축 늘어트려서는 막스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뭐냐, 그 얼굴은?”
“...... 졌습니다.”
‘?’
막스는 이내 한 남자를 떠올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젊은 제이호커스 중 가장 싸움을 잘하는 로어. 그를 이길 자라면.
“히콕한테 졌어?”
그런데 당황스럽게 로어가 고개를 젓는다.
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찰스 하트. 그놈한테 졌습니다.”
“..... 선생님?”
“..... 네.”
로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근데 어디 가?”
“혼자만의 시간을···.”
“미쳤구나.”
막스는 로어를 데리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피 터지게 싸우는 두 남자.
히콕과 찰스 하트였다.
흥미로운 건 서로 주먹을 피하지 않고 크로스 카운터를 날린다는 거.
이때 히콕의 주먹이 강했는지 점차 찰스 하트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 틈에 결정적인 한 방을 배에 꽂으니, 찰스 하트의 허리가 꺾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숨을 깊이 들이 마신 히콕.
“후우우.”
크게 내뱉더니 고개를 돌려 막스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10분만 쉬었다 붙자.”
‘!’
< 10분만 쉬었다가 > 끝
< 그 자식 뭔가 이상해 >
훈련장의 소란은 찰스 하트가 다른 훈련병을 폭행하면서 시작되었다.
화가 난 네이선 로어는.
-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그럼 덤벼!
그래서 찰스 하트는 진짜로 덤볐다.
결과는 로어의 패배.
이때 한쪽에서 구경하던 히콕이 뜬금없이 튀어나오고 찰스 하트와 대결을 청했다.
그렇게 방금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0분···.
백여 명의 신입 훈련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히콕은 코디가 건넨 빵을 오물거렸다.
찰스 하트에게 맞은 얼굴이 얼얼한지 피가 섞인 침을 퉤 뱉고는 다시 빵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코디와 대화를 나누었다.
막스는 그 모습이 잠시 배를 채우려 쉬고 있는 여행자처럼 보였다.
멀리서 히콕을 지켜보던 콜린의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물건이네, 물건이야. 저 상태에서 훈련받으면 이건 뭐 당해낼 자가 없겠어.”
“콜린도 질 것 같아요?”
피치의 말에 콜린은 코웃음을 쳤다.
“장난해? ··· 내가 왜 싸워.”
“헹. 하여간 그 말 할 줄 알았다니까.”
입을 삐죽이던 피치는 신발을 벗고 있는 막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정겨운지 피치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오늘은 발로 이렇게 할 거야?”
피치가 발차기를 하며 물었다.
“...... 그런데 저 선생님은 대체 정체가 뭐야?”
피치의 시선이 이내 찰스 하트로 향했다.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반쯤 누워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 한 가지 확실한 건 훈련병 중에서 성적이 제일 좋다는 거? 지구력은 떨어지는데, 힘과 스피드, 반응 속도와 판단력이 뛰어나. 게다가 학생처럼 호기심도 많아. 특히 막스 너에 관해 관심이 많더라고.”
‘선생님이 어디서 좀 놀다 왔나.’
막스는 찰스 하트와 악수하던 때를 떠올렸다.
거친 손바닥과 악력. 짧지만 히콕과 싸우는 모습도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찰스 하트라. 당최 모르겠네.’
아무리 기억을 뒤적거려도 떠오르질 않는다.
하긴 역사에 기록된 자들을 전부 아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뿐 뛰어난 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던 건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히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연병장 중앙으로 걸어오는 히콕은 어서 나오라는 듯, 막스를 쳐다본다.
히콕 같은 남자를 어떻게 동료로 만들 것인가.
막스는 이번 대결의 의미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중앙으로 나섰다.
찰스 하트는 얼굴을 덮은 수건을 치우며 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소문이 진짠지 확인해 볼까.’
찰스 하트의 담담한 눈빛 속엔 왕성한 호기심이 깃들어있었다.
한편, 막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히콕과 마주섰다.
포커판에서 총 맞아 죽기까지 짧은 인생을 바람처럼 살다간 남자.
제이호커스로서 제임스 헨리 레인을 경호했고, 남북전쟁에서는 북군의 정찰병으로 활약. 이후엔 보안관으로서 거친 카우보이 시대를 열어갔으니, 전설의 총잡이 히콕과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왜 맨발이냐?”
“이게 편하니까.”
히콕은 막스의 발을 쳐다보며 실소했다.
“생각이 많은 부류구만. 싸움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막고 피하고, 틈이 보이면 치는 게 전부라고.”
“긴장했어? 뭔 말이 이렇게 많아.”
막스의 말에 히콕은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참고로 나는 피부색 따위로 사람을 구분하진 않아. 내게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지는 말라고.”
“진짜 긴장했나 보네.”
“건방지긴. 난 그런 어설픈 도발엔 넘어가지 않아. 싸움은 냉정함, 힘과 스피드. 이 세 개면 끝나거든.”
히콕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손을 들어 올려 얼굴에 가드를 쳤다.
그리곤 틈을 노리듯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발은 땅에 박혔는지 상체만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휘이익.
히콕이 빠르게 접근하며 왼손을 휘두른다.
단순하지만 힘과 스피드가 실린 주먹.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꽤 위협적이었다.
‘맞으면 아프겠는데?’
막스는 복싱에서 사용되는 풋워크로 히콕의 주먹을 피했다. 실력을 가늠해볼 생각으로 방어에만 치중했다.
슬슬 히콕은 짜증이 밀려왔다.
‘왜 안 맞는 거야!’
그렇다고 냉정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휘둘러도 닿지 않자 히콕의 시선이 막스의 발에 쏠렸다.
‘맨발인 이유가 있었군.’
가벼운 발놀림의 위력을 깨달은 히콕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잠깐 타임!”
“......”
갑자기 뒤로 물러난 히콕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몇 번 콩콩 점프를 뛰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지자 히죽이며 입을 열었다.
“신발 벗는 이유가 이거였구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히콕이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새 막스의 스텝을 연구했는지 움직임을 따라 했다. 상당히 어설펐지만, 그것만으로도 히콕은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확실히 거리 조절이 편하네.’
새로운 깨달음. 누구든 다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히콕의 발바닥에서부터 샘솟았다.
얼굴에도 그 자신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막스는 코웃음 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피하기만 하던 막스가 오히려 거리를 좁혀 왼손을 가볍게 내뻗었다.
툭툭 내뻗는 가벼운 잽들이 히콕의 코를 때리고 왼쪽 눈을 가격했다.
히콕은 뒤늦게 가드를 올리며 뒤로 물러나고,
막스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젠장,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지?!’
가드를 쳤지만 팔에 가해지는 충격이 만만치 않다. 통증이 느껴지자 히콕은 냉정함을 잃기 시작했다. 화가 치민 그는 급기야 방어를 무시하고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휘우우웅.
무지막지한 주먹이 바람을 가른다.
막스는 왼손으로 히콕의 공격을 쳐내며 사이드로 흘려버렸다. 일명 패링이다.
직후엔 왼발에 체중을 싣고, 허리와 어깨를 비틀었다. 이내 막스의 자유로운 오른 주먹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냈다.
휘우우웅. 퍽.
오른손 훅에 이은 왼손 훅. 힘과 스피드가 실린 막스의 주먹은 휘두르는 족족 히콕의 얼굴에 꽂혔다.
뒤로 휘청거린 히콕. 반쯤 풀린 눈동자엔 막스가 하늘 높이 발을 쳐드는 모습이 맺혀졌다.
저게 뭔가 싶었을 땐 발꿈치가 자신의 정수리를 내려찍고 있었다.
빠각.
강한 충격은 자신감마저 날려 버렸다.
히콕의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다.
그 앞에 선 막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냉정함과 힘, 스피드 말고도.”
“......”
“싸움엔 겁나 많은 게 필요하다, 히콕.”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자, 히콕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장내에 탄성이 터져 나오고, 신입 제이호커스들의 눈빛엔 새로운 열망이 차올랐다.
막스에게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찰스 하트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인의 소문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방금 본 실력은 진짜였다.
‘제이호커스들 하는 짓이 좆같긴 해도. 이렇게 되면 참아야지.’
노예제 폐지론자인 찰스 하트는 민간인 마을을 공격하는 제이호커스들의 과격한 행동에 실망을 느끼던 참이었다.
동료를 폭행하고 교관에게 대결을 청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역겹지만 당분간은 로렌스에 있어야겠군.’
막스라는 존재 때문에 이곳에 남을 이유가 생겨버렸다. 찰스 하트의 시선이 바닥에 너부러진 히콕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