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아···.”
“아는 개뿔. 네 말대로면 동양인은 흑인 노예 물건 털어도 인정이냐?”
“.......”
“돌아가라. 아니면 생각을 더 하고 오던지.”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생각은 충분히 하고 온 거다.”
막스는 비웃음을 지우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원하는 게 뭐야?”
“나도 도둑질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진 않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리고 미주리주에도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많아. 나 역시 그중 하나고. 물론 도둑질은 후회하고 반성한다. 비록 나 혼자 잘 먹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드레드 스콧은 라이언 홀드가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보살폈다고 말했었다. 물론 아일랜드계에 국한되긴 했지만.
이제 입이 트였는지 라이언 홀드는 구구절절하게 과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은 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일랜드인들이 공통되게 하는 말들이었다.
굶주림을 피해 미국으로 왔더니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열심히 살려 했는데, 미리 와 있던 잉글랜드계에 공격받고, 독일인들에게 밀려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등.
“어쨌든, 앞으로는 너와 함께 일하고 싶다.”
라이언은 비장한 눈으로 막스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믿지?”
“도둑질은 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거든.”
“뭐가 더 나쁜 건데.”
“..... 거짓말?”
막스는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라.”
“물론이지.”
“네가 대답했으니까 하는 말인데.”
자리에서 일어난 막스는 라이언 홀드에게 다가갔다. 마주 선 막스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을 건넸다.
“지금 훈련병 중에 도둑이 있다.”
“도···둑?”
“누군지는 짐작이 가는데, 그놈의 진짜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지.”
도둑을 도둑으로서 잡는다.
그러다 둘이 마음이 맞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라이언을 걸러낼 방법이었다.
“기한은 보름.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라이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막스가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이건 테스트다. 이번 일로 내 능력을 보여주겠어!’
생각을 마친 라이언이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이틀 뒤. 라이언 홀드가 훈련에 참가했다.
세인트루이스 뒷골목에서 파이팅 머니를 걸고 싸웠던 데니스 헤인즈와 일행은 그를 도둑놈이라며 비난했다.
이는 라이언이 막스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라이언은 며칠 동안 화려한 손기술로 훈련병들의 물건들을 털기 시작했다. 희생자 중엔 히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새끼가 진짜 뒈지고 싶나.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
“증거 있어? 그리고 설사 내가 도둑이라 치자. 너 같은 거지새끼 물건을 훔치겠니?”
“거, 거지?!”
라이언은 히콕의 화를 돋우며 각을 세웠다.
들어오자마자 사방을 적으로 만들더니, 훈련병중 가장 강력한 히콕과도 척을 진 것이다.
다들 라이언을 기피할 때,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자가 있었으니. 찰스 하트였다.
“작작 좀 털어. 그렇게 티 내면 자다가 총 맞는 수가 있다.”
“충고 고맙다. 근데 나 도둑 아닌데?”
"아, 물론 알지. 설마 도둑이 도둑이라고 하겠냐.”
그렇게 둘은 동료들의 눈총을 받으며 가까워졌다.
*
기지에서 훈련이 이루어지는 동안, 제이호커스와 보더 러피안은 게릴라 전투를 펼치며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처음 민간인 마을을 공격한 제이호커스지만 이후론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았다. 드레드 스콧 판결로 촉발된 분노가 점차 사그라들고 찰스와 레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보더 러피안과 게릴라 전투를 치르는 동안 마을 세 개가 불타고, 희생자는 30여 명이 넘어갔다.
캔자스 유혈 충돌의 원인을 제공한 제임스 뷰캐넌은 정치적으로 공격받고, 이는 존 기어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캔자스 북쪽의 포트 리븐워스, 남쪽의 포트 스콧에서 군인들을 개입시켰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최초 제이호커스가 리븐워스 마을을 공격하고 두 달 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막스, 네 말대로네.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났잖아?”
홀리데이의 말에 막스가 고개를 저었다.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눈치 보며 쉬는 거죠. 군 개입은 근본적인 해결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갈등을 해결하려면 어느 한쪽이 포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되겠어요?”
“안 되겠지.”
“아무튼, 이제 미뤄둔 일을 해야겠네요.”
막스는 책상에 있던 서류를 모아 홀리데이에게 내밀었다. 주지사에게 보여줄 광산 탐사 기획안이었다.
“만나러 가볼까요?”
“드디어 때가 왔구나.”
레콤프턴의 주지사 집무실.
“이쪽은 토피카 협회장 겸, 로렌스 위원인···.”
“아아, 이미 알고 있네. 구면이거든.”
존 기어리는 홀리데이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홀리데이도 마찬가지.
‘뭐지,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는 건가?’
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근 들어 모르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나, 막스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 금광 얘기를 꺼내더니, 기획안까지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날 대화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 말은 존 기어리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 적혀있으니 거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왠지 당한 느낌이구먼.”
“이 친구랑 있다 보면 그런 기분 많이 듭니다. 그런데 결과가 항상 좋아서 문젭니다.”
홀리데이의 말에 존 기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당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기획안을 살펴보려는 존 기어리에게 막스가 말을 건넸다.
“혹시, 측량사와 토지 관리 담당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마 관내에 있긴 할 걸세.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회의실로 자리를 옮기세나.”
커다란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측량사와 토지 관리 담당자까지 모이게 되었다.
“캔자스 서부는 대부분 인디언들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최근 섬너 장군이 샤이엔과 전쟁을 벌이는 통에, 현재 그곳에는 체로키 부족이 아마 터를 잡고 있을 겁니다.”
측량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일부 백인들은 인디언들한테 땅을 사기도 합니다. 당사자들끼리 계약서를 쓰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고요.”
“현재 측량된 부분까지 소유주를 보면, 여기까진 인디언 구역. 나머지는 소수의 개척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토지 담당자의 말이었다.
개척민들의 경우 5년을 정착해서 땅을 경작하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인디언들 틈에서 황량한 땅을 개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지 대장에 기록된 수를 보더라도 캔자스 서쪽의 개척민 수는 20가구가 채 되지 않았다.
“땅을 사기 위해선, 해당 지역에 정착민이 있으면 그들과 거래를 해야 할 것이고. 없다면 다음은 인근의 인디언 추장을 찾아가야 합니다. 가신다면 인디언 부족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데려가야겠죠.”
“그렇군요.”
막스에겐 조 짐 주니어가 있다. 그는 포토와토미족과 오세이지족 언어를 할 줄 알기에 인디언 부족과도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땅과 관련된 회의가 끝나고 그동안 기획안을 검토한 존 기어리가 입을 열었다.
“그날 이야기한 것 말고도 추가된 게 있더군.”
“보강한 거라고 봐야죠.”
“감탄이 나오는 것도 있긴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것도 있네. 물론 그건 주에서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상황은 얼마든 변할 수 있죠. 기본 가닥만 잡고 가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존 기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획안을 막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도 끼워주게.”
“그렇게되면 할 일이 많으실 텐데요. 지금 가진 권한을 전부 동원할 만큼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니 끼워주게.”
일이 많다는 건 금광이 발견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존 기어리는 막스의 자신감에 자신의 운을 맡기기로 했다.
금광이 발견되면 주지사 권한을 총동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심은 막스가 가져온 기획안이 절대 소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심했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막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어허, 이거 왜 이러나.”
막스가 즉답을 피하자, 존 기어리는 홀리데이를 쳐다봤다. 둘은 눈빛으로 또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 둘이 무슨 관계에요?”
“...... 그냥 오다가다 만난 사이지.”
홀리데이의 말에 존 기어리는 진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로렌스로 돌아가는 길.
밤이 깊어 달빛만이 주변을 비추고 있다.
“끝까지 말 안 할 거예요?”
“뭐? 아, 그거? 진짜라니까. 그냥 오다가다 만난 사이야.”
‘눈빛이 그게 아니던데.’
막스는 치사해서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존 기어리와 홀리데이가 어떻게 알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근 궁금해지는 것들이 많아져서, 쓸데없는 것까지 관심을 두는 게 아닌가 싶다.
막스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봤다. 주위가 어두워 유독 밝게 빛나는 별들은 미래에선 보기 쉽지 않은 광경이었다.
‘서부로 오기 직전에도 저렇게 밤하늘은 아름다···?’
간만에 사색에 잠기는 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야밤에 뭐가 급해서 저렇게 달리냐.”
홀리데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이윽고 완전히 사라진 뒤에는 다시 적막함이 찾아왔다.
로렌스 마을에 도착할 즈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입구에서 막스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히콕이 소리쳤다.
“라이언 홀드가 칼에 찔렸어!”
“!”
< 야밤에 뭐가 급해서 > 끝
작가의말
중간에 수정할 부분이 있어서 지각했습니다 ㅠㅠ
어제 찰스 하트의 정체를 맞춰주신분이 계셨습니다.
조만간 발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 나는 최선을 다했다 >
콰르르릉.
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짙은 먹구름이 집어 삼킨다.
먼 곳에서부터 번개가 내리치고, 막스의 머릿속에 찰스 하트의 얼굴이 스쳤다.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
라이언 홀드를 칼로 찌를 놈이 그놈밖에 더 있을까. 막스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히콕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술집 부근에서 라이언 홀드가 쓰러져 있는 걸 마을 사람이 발견했어. 의사가 그러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대. 범인은 말 안 해도 누군지 알지? 다들 그 새끼 잡는다고 마을을 저렇게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삼삼오오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라이언은 현재 병원에서 치료 중이고, 기지 내에 있는 80여 명이 쏟아져 나와 찰스 하트를 찾고 있었다.
마침 말을 탄 콜린이 막스와 홀리데이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미친 새끼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질 않아.”
“이미 이곳을 벗어났을 겁니다. 콜린, 대원들 모아서 북쪽으로 가요. 밤이라 나룻배로 강을 건너진 못했을 겁니다.”
“찰스 하트가 벌써 빠져나갔다고?”
“오다가 마을 북쪽으로 달아나는 걸 봤습니다. 정황상 찰스 하트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홀리데이도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밤에 누가 급히 말을 달리나 싶었는데, 설마 찰스 하트였을 줄이야.
“그럼 갔다 올게. 반드시 잡아 오겠어!”
콜린과 히콕은 추격조를 소집하고, 막스와 홀리데이는 병원으로 향했다.
투둑, 투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이내 빗줄기가 되어 막스와 홀리데이의 몸을 적셨다.
하얀 벽돌로 세워진 2층 건물.
그 앞을 피치와 대원 몇 명이 지키고 있었다. 막스를 본 그녀는 다급히 말을 건넸다.
“마침 잘 왔어. 라이언이 횡설수설하면서 널 찾고 있어.”
“의식이 돌아왔어?”
“어. 너 아니면 절대 말 안 하겠대.”
병원 내부로 들어간 막스는 마침 피 묻은 손으로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가는 듀들리와 마주쳤다. 그는 실전 경험도 쌓을 겸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침 닥터 브라이스께서 수술을 끝냈어요. 환자가 대장을 찾고 있습니다.”
“갔다 와, 난 여기 있을 테니까.”
피치와 홀리데이를 남겨두고 막스는 듀들리와 함께 라이언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앞치마에 피가 잔뜩 묻은 닥터 브라이스.
그는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막스를 쳐다봤다.
옷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바닥을 적시자 브라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가 많이 내리는 모양이군. 상처가 깊긴 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야. 이 친구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니까, 얘기 나눠봐.”
라이언 홀드는 막스가 들어올 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통증으로 인상을 찡그리던 그는 막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자를 끌어다 침상 가까이 가져가자, 라이언이 웃음을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정도면 상대는 어떤지 알겠지?”
“말 타고 잘만 도망가던데.”
“...... 목은 아쉽게도 스쳤지만, 내가 그 새끼 팔하고 어깨 두 곳을 찔렀어.”
“그랬구나.”
라이언 홀드는 진짜라며 막스를 쳐다봤다.
“믿는다니까.”
“아무튼, 그 새끼 눈치가 장난 아니었어.”
찰스 하트와 부쩍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라이언은 그에게 진짜 정체를 물었다.
- 내 이름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 선수끼리 왜 이래. 나도 본명은 이게 아니거든. 타이거 홀드. 그게 내 이름이다.
찰스 하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 내가 말야. 오하이오에서 사람을 죽이고, 여기 오기 직전까진 인디애나에 있었거든. 거기서도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노예제 폐지에 관심이 있어서 로렌스에 오게 됐지. 그런데 제이호커스가 하는 짓을 보니 역겹더라고.
민간인 마을을 공격했으니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제이호커스들의 과격한 행동은 같은 편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 짓거리였으니까.
‘근데 왜 제이호커스 훈련을 받았지?’
궁금했지만, 막스는 담담한 얼굴로 라이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찰스 하트가 자기 본명을 말했어.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데?”
곧이어 라이언의 입에서 찰스 하트의 진짜 이름이 튀어나왔다.
“윌리엄 클라크 콴트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