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360)

< 내가 실세야 >

느즈막한 저녁.

막스가 후팡을 찾아갔을 때 그는 천막 하나를 수련 장소로 만들어 땀을 흘리고 있었다.

“헙! 헙!”

탁! 탁!

천막 한가운데 놓인 목인장을 절도있게 후려치는 모습은 흡사 중국 무술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마차에 저걸 실어 온 건가.’

차라리 음식을 더 싣겠구만. 

목인장은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사람 팔과 다리처럼 봉들을 연결한 것으로, 상대와 대련하듯 권법을 수련하는 데 사용된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 헙! 아직 끝나려면, 헙! 있어야 하니까! 헙헙!”

‘지랄도 풍년이구나.’

한쪽 구석에 앉은 막스는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후팡의 훈련 모습을 지켜봤다.

중국 무술 특유의 과한 몸동작, 군더더기 많은 전혀 치명적이지 않은 타격법. 

애초에 중국 무술에는 별 관심 없던 터라 금세 지루함을 느꼈다. 막스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자, 후팡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배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냐? 새꺄, 넌 이거 배우려면 백 년도 더 걸려.”

“백 년이면 난 포기.”

탁! 탁!

“아무리 총이 있다고 해도. 헙! 남자라면 기본적인 무술은 익혀야지. 헙! 헙! 총알도 피할 만큼 강인한 육체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헙!”

대꾸하면 계속 말할 것 같다. 

막스는 입을 닫고 육포만 오물거렸다.

한참 뒤.

“후우우.”

긴 호흡을 내쉰 후팡은 천으로 얼굴을 닦으며 막스 맞은편에 앉았다.

“알아보란 건?”

“이 땅 사용료는 월 2달러. 1에이커당 1달러래.”

1에이커는 1,224평.

막스는 광산 회사의 이름을 빌러 중국인들에게 2에이커를 거주공간으로 내주었다.

후팡은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분명 큰돈은 아니지만, 문제는 자신들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최소 천 에이커 정도 영구적인 정착지가 필요해. 마땅한 장소 없어?”

‘왜, 차이나타운 만드려고?’

어림도 없지. 막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도시 밖으로 벗어나면 가능하겠지.”

“완전 사기꾼 새끼들이구만. 광산에 도시 땅까지 전부 해 처먹겠다는 거 아냐.”

“뭐, 그게 사업이니까.”

후팡이 막스를 노려봤다.

“너 말야. 아무리 조선이 소국이라 해도, 긍지는 있어야지. 네가 백인이라 착각하는 거냐?”

“여기에 왔으면 여기에 맞춰 살아야지.”

“..... 병신. 하긴 조선인에게 긍지 따위가 있겠냐. 그래도 최소한 네가 동양인이라는 건 잊지 말아야지, 새꺄.”

“그래놓고 동양인이라고 뭐라 하면 차별한다고 그럴 거면서.”

“이 새끼가!”

후팡이 팔을 뻗어 막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사이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막스는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후팡이 고약한 땀 냄새를 풍기며 위협했다.

“꼬박꼬박 말꼬리 잡고 늘어지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진정해. 같은 동양인끼리 이러면 되겠어?”

‘이 능구렁이 같은 새끼.’

후팡은 막스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며칠 동안 일해본 결과 막스가 이곳에 빠삭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후팡에겐 필요한 패였다.

‘나중에 대가리를 쪼개주마.’

흥분을 가라앉힌 후팡은 멱살을 놓으며 물었다.

“홀리데이는 언제 데려올 거야?”

“요새 바빠서 잘 못 봐.”

“너 진짜 적극적으로 안 할래?”

입술을 씰룩거린 후팡은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구석에 있는 상자에서 뭔가를 뒤적거렸다. 

실로 묶은 손가락 한 마디의 종이 꾸러미.

막스에게 던지며 말했다.

“약속한 아편이다. 팔아먹든 혼자 벽보고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막스는 묘한 시선으로 꾸러미를 쳐다봤다.

아편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고 현재도 진통제로 사용되는 마약이다. 별다른 법도, 제제도 없는 시대. 하물며 유구한 아편 역사를 간직한 중국인이라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친김에 여자도 붙여줘?”

“아니, 됐다.”

“설마 고자냐?”

‘이 새끼가 선 넘네.’

막스의 눈가가 꿈틀거리자 후팡은 비아냥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양옌 건드린 건 아니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니면 안 데리고 오는 이유가 뭔데? 몸이 나아졌으면 어서 데려왔어야 할 거 아냐.”

“그건 의사가 판단할 일이다.”

후팡은 눈을 가늘게 떠 막스를 노려봤다.

“의사는 개뿔. 걔 주인은 나야. 비싼 돈 주고 사 왔으니 슬슬 써먹어야 할 때라고.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천진데, 그만큼 벌어야지.”

“뭘 하든. 홀리데이부터 만나고 결정해.”

후팡은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 설마 계집애들한테 동정심 느끼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래봐야 소용없어, 새꺄. 걔들은 조선인한테 관심도 없고, 설사 있다 해도 너한테 갈 일은 없으니까. 아, 혹시 모르지. 2천 달러주면 내가 팔 수도 있거든.”

“할 이야기가 없나 보네. 내일 보자.”

막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천막을 벗어나려 할 때 뒤에서 후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홀리데이를 빨리 데려와야 할 거야. 이제 곧 영업 시작할 거거든.”

막스가 사라지자 후팡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져갔다.

‘몇 년이나 혼자 있었으면, 외로울 만도 하지. 차라리 계집애 한 명 붙여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버려?’

막스가 여자들을 신경 쓰는 건 맞지만, 후팡이 생각하는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후팡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약점이라도 잡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요새 안 막스 사무실.

홀리데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여기 실세였어? 지금까지 나만 몰랐던 거야?!”

“...... 아무튼, 며칠 있다가 중국인 한 명 불러올 테니 만나봐요.”

“마이갓 내가 실세라니!”

“적당히 해요.”

홀리데이가 헛기침을 하며 정색했다.

“그나저나, 만나면 무슨 얘길 해야 하는 거야? 걔들이 매음굴 만들 생각이면 난 절대 반대라고.”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홀리데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라이언 홀드가 들어왔다.

콴트릴에게 칼 맞은 상처가 아물고, 콜로라도로 넘어온 라이언은 현재 대원들과 금광 갱도를 지키는 중이었다.

막스는 추위에 얼굴이 벌게진 라이언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밖에 날씨 많이 춥더라. 몸 좀 녹여. 근데 어쩐 일이야?”

“금광 주변을 얼쩡거리는 놈들이 있어서. 봤더니 멕시코에서 넘어온 놈들 같더라고.”

히스패닉계. 대놓고 습격하거나 시비를 걸진 않았지만 주변을 정찰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도시 남쪽에 있는 놈들 일행인가.”

“인디언, 히스패닉, 중국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어제는 흑인들도 왔던데. 아주 난리도 아니구만.”

“금으로 대동단결. 이거야말로 진정한 인종의 용광로고 엘도라도죠.”

막스의 말에 홀리데이가 혀를 끌끌 찼다.

한파가 몰아친 콜로라도의 겨울.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종, 국가별로 모여든 자들은 한 지역을 거점으로 세를 불리려 한다.

미리 도착한 자들은 일종의 선발대.

겨울이 끝난 뒤, 콜로라도 광산을 먹기 위해 지리를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겨울을 이용하려고 했더니, 오히려 뭉칠 시간을 줘버렸네.’

인종과 출신 불문하고 금 캐느라 정신없어야 할 시간에 겨울은 그들에게 생각하고 준비할 여유를 준 셈이다.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무리 중에 갱단들도 섞였을 텐데, 움직이기 전에 골라내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지금처럼 우리는 독점 운영되는 금광을 지키고, 금을 운반하는 것에 집중하자고.”

“오케이. 아, 그리고. 아라파호족 인디언이 그러는데 우테 부족도 관심을 보이는 것 같대.”

“우테?”

로키산맥을 어슬렁거리는 유타와 콜로라도를 거점으로 사는 우테 부족.

아라파호, 샤이엔과 더불어 이 일대에선 가장 세력이 큰 인디언 부족이었다.

“봄 되기 전에 나와 거래할 생각인가.”

“아라파호족 경비 인원이 늘어가고, 이득을 챙겨준 게 소문이 돌았나 봐.”

최초 아라파호족 경비 인원은 10명에서 현재 50명까지 늘어났다.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막스는 그들에게 식량과 말, 가죽 등을 보상으로 제공했다. 값으로 치면 정확히 그들의 급여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인디언이 늘어나면, 함께 움직일 백인들을 더 늘려야 해. 지금 인원만으론 부족하거든.”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라이언의 말에 막스는 웃으며 답했다.

광범위한 광산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줄기차게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

문제는 제대로 된 자를 고용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 뒤통수 칠 놈들을 미리 골라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막스는 일찌감치 한 가지 작업을 해두었다. 

앨런 핑커톤.

미 전역에 흩어진 탐정 사무실 인력을 끌어오기로 계약을 끝낸 상태였다.

홀리데이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핑커톤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계획한 거야?”

“일전에 일리노이 간 적 있었잖아요.”

물론 그때는 만약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막스는 금광을 발견하자마자 편지를 동봉해 세인트루이스의 핑커톤 사무실로 대원 몇 명을 파견 보냈다. 

최근 그들이 회신을 가져왔는데, 빠르면 3월 전에 인력을 보내겠다는 답변이었다.

어찌 됐든, 이번 일로 홀리데이는 막스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일리노이면 한참 전의 일인데···.’

막스는 진작부터 금광 위치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짐작이 아닌 확신을.

홀리데이를 놀라게 한 건 금광을 터트린 시기다. 생각할수록 타이밍이 절묘했다.

금광이라는 엄청난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대공황 직전에 터트렸고, 심지어 겨울을 이용해 몰려든 사람들을 건설 인부로 채용했다.

여기에 더해, 전력의 공백이 생긴 로렌스를 동부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 보더 러피안들의 습격을 원천 차단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극강의 전투력과 전략 전술,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모습이었다.

‘예지력? 선견지명? 대체 뭐지?’

라이언은 그냥 그런 인간인가보다 하고 있었지만, 막스를 잘 안다고 자신했던 홀리데이에겐 새로운 충격이었다.

막스가 라이언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튼, 핑커톤 인력 배치는 두 달 뒤야. 그때까진 인디언과 우리 대원들만으로 이곳을 잘 커버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오케이. 그럼 가볼게!”

라이언 홀드가 나가자 사무실에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홀리데이의 초점 없는 시선은 식어버린 커피를 응시했다.

이런저런 퍼즐들을 맞추던 홀리데이의 생각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갔다.

‘막스 정도면 가입시켜도 될 것 같은데.’

홀리데이가 턱을 만지며 고심할 때, 이번엔 네이선 로어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동양인 여자가 깨어났습니다.”

며칠째 사경을 헤매던 양옌이라는 여인이 이제야 의식을 차린 모양이다.

*

막스는 핏기없는 양옌과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진작에 정신을 잃어서인지 막스를 처음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녀의 억양이 조금은 특이했다.

“...... 난 광시성 출신이거든.”

“그렇구나. 근데 이곳 캘리포니아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

작은 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그래서 검은 머리가 더욱 돋보이는 양옌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막스는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해 이막산의 비참한 과거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 노비 새끼가 멍청하게 계약서에 사인한 거야. 뭐, 겨우겨우 탈출하긴 했지만, 하마터면 목화 농장에서 목화 따고 있을 뻔했다니까.”

유체 이탈 화법의 자조 섞인 드립은 양옌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냈다.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는지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광시성 출신의 훙슈취안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고, 이때 청나라 관부에게 잡힌 자들이 캘리포니아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들은 태평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 농민들이었다.

“관료들이 돈을 받고 팔아넘겼구나. 주로 여자들이 많겠네.”

“남자들도 있어. 같이 온 차홍도 그중에 하나거든.”

“영어 잘하는 차홍?”

“응. 고향에 있을 때 선교사한테 영어를 배웠다고 했어.”

“여기온지 6년 됐다는 거 뻥이었구나.”

“...... 제발 모른 척해줘. 사정이 있었으니까.”

차홍이 온 건 불과 2년 전으로, 정작 이막산이 미국 땅을 밟은 게 6년 전이었다.

‘하여간 더럽게도 일찍 왔다니까.’

이막산을 슬쩍 떠올린 막스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차홍이 언제 여기 왔는지 내가 알 게 뭐야. 내가 궁금한 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뒤거든.”

“지하에 거래소가 있는데, 넌 모르는 거야? 아, 조선인이라서 모를 수도 있겠구나.”

“뭐, 그럴지도 모르지.”

조선인을 떠올린 순간 경계심이 든 걸까.

갑자기 양옌이 입을 닫아 버렸다.

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래소면 노예 거래소를 말하는 거구나.’

초기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중국인들은 전부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본토에서 여자들을 데려왔다.

그 수가 중국 이주민들의 8%.

이 일에 관련된 조직은 중국 본토에서 인신매매, 사기 계약, 빚에 의해 끌려온 여인들을 매음굴이나 노예 거래소에서 백인들에게 팔아 버렸다. 가격은 3백에서 3천 달러까지.

차이나타운의 매음굴은 이런 악랄한 방법으로 끌려온 여인들로 채워졌고, 그들의 평균 수명은 채 5년이 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다.

“양옌.”

“?”

“시궁창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

흔들리는 동공. 양옌이 말을 머뭇거렸다.

“조만간 그들이 몰려올 거야.”

“몰려오는 것들은 문제가 아냐. 캘리포니아 본진에 있는 것들이 문제지. 넌 그자들을 제대로 모르겠지?”

양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막스를 응시했다.

그리곤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조선인이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하고, 방금 말한 것도 죄다 수상한 말들이다.

양옌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쳐다보며 막스가 물었다.

“여기 온 자들 중 누가 정상이야?”

“정···상?”

“다들 비정상이구나. 질문을 바꿀게. 그나마 상식이 있는 자는 누구야?”

정상, 상식? 의미를 곱씹던 양옌은 고심 끝에 차홍을 언급했다.

“그자가 상식이 좀 있구나.”

“차홍이라면 말도 통하고, 나보다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좋아. 며칠 뒤 차홍을 데려올 테니까, 그를 설득시켜. 그 대가는 자유야. 이곳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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