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360)

기뻐하기엔 두려움과 공포가 큰 모양이다.

양옌은 질겁하며 말을 이었다.

“후, 후팡은 싸움을 잘해. 캘리포니아에서도 그자의 손에 죽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말은 고맙지만, 네가 상대할 사람이 아니야.”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막스는 피식하며 가져온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심심할 테니까, 앞으로 이거 먹으면서 편하게 구경하고 있어.”

“이, 이게 뭔데?”

“팝콘.”

< 내가 실세야 > 끝

< 부끄러운 건 아는구나 >

홀리데이와의 만남을 주선한 막스.

그 대상에서 후팡은 예외였다.

“차홍만 갈 수 있다고? 누구 맘대로!”

“홀리데이 마음이지. 싫으면 거절한다고 한다?”

후팡은 이를 갈며 막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어렵게 만든 기회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할 때 이막산이 또다시 성질을 긁어왔다. 

“어차피 너 영어도 못 하잖아. 참고로 홀리데이 중국말 못 한다. 가봐야 밥도 안 줄 거고.”

“이 새끼가 누굴 거지로 아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차홍, 준비됐으면 나와.”

천막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차홍은 단정한 옷차림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다, 다녀올게.”

“시발, 가서 말 잘해라.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나한테 보고해야 하는 거 알지? 그리고 이막산, 넌 갔다 와서 보자.”

대답 없이 막스가 등을 돌리자 차홍이 뒤를 따라 천막에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후팡은 핏발선 눈으로 노려봤다.

‘건방진 새끼.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그때가 마지막이다.’

요새로 향하는 길.

차홍은 잔뜩 위축된 채 막스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넌 겁이 많구나.”

“백인들한테 당한 게 많아서 그래.”

“같은 동포들한테 당한 건 없고?”

“그거야 뭐···.”

막스는 담담하게 물었다.

“광시성 출신이라며?”

“양옌이 말했구나? 너랑 대화할 정도면, 몸이 괜찮아진 모양이네.”

“걱정됐냐?”

“그럼. 같은 고향 출신인데.”

“다른 건 걱정 안 되고?”

“......”

막스의 질문을 이해한 차홍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건 아는 모양이네.”

“너한테 이런 소리를 왜 듣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은 했어.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힘이 생기면 바꾸고는 싶고?”

“당연하지. 그럴 수만 있다면···.”

막스는 차홍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바꾸고 싶은데?”

“...... 그런 쓰레기 같은 사업은 안 할 거야.”

“쓰레기라는 건 알고 있었구나.”

“자꾸 비아냥대지 마. 이래 보여도 나 무술 배웠거든?”

막스는 발걸음을 멈춰서는 차홍을 돌아봤다.

“그럼 그 무술로 후팡을 죽이지 그랬어.”

“걔는··· 홍가권 고수야. 그리고 후팡 뒤에는 사람 죽이는 걸 우습게 아는 조직이 있다고. 조만간 그들이 몰려올 텐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홍가권은 삼합회의 전신인 천지회 일원이 수련한 권법이다. 영화에서도 등장한 실존 인물 황비홍도 홍가권을 연마했다.

“방금 말한 그 조직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

“내가 왜?”

문득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닐까 의심된다.

차홍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막스를 쳐다봤다.

만약 조직과 관련되었다면 말하는 순간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양인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고.

차홍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막스가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미소와는 달리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후팡을 죽일 생각이다.”

“뭐?”

“동족을 납치해서 돈벌이로 사용하는 놈들은 죽어야지. 쥐새끼들이 이곳을 시궁창으로 만드는 걸 내가 두고 볼 것 같아?”

“조선인인 네가 무슨 수로?!”

말하는 사이 어느덧 요새에 도착했다.

막스는 스카프를 벗으며 높은 담장을 올려다보는 차홍에게 말을 건넸다.

“답답하면 스카프 벗어.”

막스는 얼굴을 드러냈으나 차홍은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백인들과 마주치면 비난과 폭언이 쏟아질 게 빤하지 않은가.

막스에게나 집이지 차홍에겐 요새와 밖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요새 안으로 들어선 차홍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 막스 대장이잖아?

- 워워, 아는 척하면 죽여버린댔어.

- 맞다. 후우, 방금 손 흔들뻔했네.

마주치는 백인들이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흠칫하며 피하거나 갑자기 등을 돌렸다.

‘왜 저런 거야?’

차홍은 나란히 걷는 막스를 힐끔거렸다.

훤히 얼굴을 드러낸 채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콜로라도는 좀 다른가.’

캘리포니아 밖으로 벗어난 게 처음인 차홍은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이때 막스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너도 홍가권 익혔어?”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차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조직이 삼합회 쪽이야?”

“.......”

“본토에서 납치한 여자들을 노예 밀매하고, 매춘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게 어느 조직인지. 넌 알지?”

“모, 몰라.”

“아무래도 홀리데이를 만나기 전에 양옌부터 만나야겠네.”

막스는 임시로 만든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었을 때, 침대에 앉아있던 양옌이 둘을 쳐다봤다. 

그녀는 팝콘을 입에 막 넣으려던 참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차홍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아픈 건··· 다 나았어?”

“어.”

둘 사이의 어색한 인사가 오고 가고. 

차홍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양옌. 너 왜 쓸데없는 말까지 한 거야? 그러다 후팡이 알면 어쩌려고.”

“나, 어차피 천막으로 안 돌아갈 거야.”

“뭐?”

차홍이 막스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너 대체 무슨 약속을 한 거야!? 네가 무슨 수로 양옌을 지키냐고!”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난 지키는 게 아니라 골라내고 있는 거야.”

“골라내다니?”

막스는 차가운 눈빛이 차홍을 향했다.

“여길 시궁창으로 만들 놈들을 미리 골라낸다고. 내가 귀찮게 너를 데려와서 지켜보는 이유가 뭔지 알아?”

“......”

“너를 골라낼까 말까 고민하고 있거든.”

“네까짓 게 뭐길래 그딴 말을 하냐고!”

차홍이 흥분하여 소리칠 때, 

양옌이 끼어들었다.

“나 여기서 다 들었어. 저 사람이 실세야.”

“어?”

“생각해봐. 우릴 공격한 갱단을 해치우고, 숙소까지 제공해줬어. 그깟 중국인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주겠니?”

차홍은 막스와 양옌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바보야. 니가 날 지킬 생각이었으면 천막으로 데려가면 안 되지. 가면 어떻게 되는지 빤히 알면서···. 입으로만 맨날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대체 하는 게 뭔데? 이 나쁜 놈아!”

양옌이 차홍을 향해 팝콘을 집어 던졌다.

“반청복명을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거라고? 병신같이 그걸 믿어? 동족끼리 팔아먹고 죽이는 걸 보면서도 그딴 말을 믿냐고!”

차홍을 향한 원망 섞인 눈빛은 이내 눈물로 가득 찼다. 양옌이 눈물을 떨구며 흐느꼈다.

반청복명은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라는 비밀결사 조직 천지회의 슬로건이다.

처음엔 그 의도였는지 모르나, 세월이 지나면서 반청복명은 사람들을 세뇌하는 데 쓰였다.

천지회에서 이름만 바꾼 삼합회.

그들은 미국 땅에서 자국민들의 고혈을 빼먹으면서도 반청복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를 합리화했다.

막스는 멍한 얼굴의 차홍에게 다가갔다.

둘의 키 차이는 10cm가 넘는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막스는 차홍의 모자를 벗겼다.

“무, 무슨 짓이야···?”

“반청복명이라면서 변발하는 꼬라지 하고는.”

변발은 몽골이나 만주족의 상징.

“청나라도 아닌 이 먼 땅에서도 그 머리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명나라 역사와 문화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반청복명이나 외치면 끝이냐? 그 말 뒤에 숨어서 자국민 등쳐먹는 건 그냥 정신병자야. 너 같은 병신들이 그 정신병자들을 먹여 살리는 거고.”

막스는 짜증 섞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니들이 모여있는 차이나타운은 그냥 돼지들 키우는 목장이다. 여기 콜로라도에도 그걸 만들려는 것 같은데.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아?”

“......”

“차홍, 그걸 바꾸고 싶다면 네가 할 일은 간단하다.”

막스는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조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살생부를 만들어. 그리고 내 지시를 따르면 된다.”

“살생부?”

대가는 시궁창에서 빠져나올 자유. 

콜로라도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유다.

*

똑똑.

막스가 자신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막산입니다.”

- ...... 누구?

“이.막.산이요.”

- 아, 막산이! 어서 들어와!

덜컥.

책상에 앉아있던 홀리데이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곳 실.세. 홀리데이네.”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홍입니다.”

홀리데이는 웃으며 차홍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이때 아니면 언제 하겠어.’

“막산이는 커피 두 잔 부탁하고.”

“......”

“지시를 내렸으면 대답해야지?”

“연기할 필요 없습니다. 다 아니까.”

“왓더!”

홀리데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막스를 부려 먹을 찬스를 놓쳤으니, 목소리는 자연 퉁명스러웠다.

“근데 여긴 왜 데리고 온 건데?”

“보여주려고요.”

“뭐를?”

“내가 실세라는 걸.”

막스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자, 홀리데이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나 나갈 거야! 아예 이 요새를 떠날 거야!”

어차피 홀리데이는 내일 아침 일찍 로렌스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잠깐만요.”

“왜 또!”

“로렌스로 갈 때, 부인께 이것 좀 전해 줘요.”

“응? 메리한테?”

막스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도면들이 가득했다. 특이한 건 지금껏 막스가 손대지 않은···.

“옷이야?”

“광부들 작업복 바집니다. 예전에 부인께 말한 적이 있어서 갖다주면 알 거예요.”

“아, 그때 말한 거구나.”

“제임스 부인하고 힘을 합치면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홀리데이 부인과 제임스 헤리스 부인의 이름이 같다. 두 메리의 재봉 솜씨가 뛰어나 막스가 생각한 바지 샘플을 만드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오케이! 아니지. 쳇. 나 이제 안 올 거야!”

“알았으니까, 잘 다녀와요.”

“엉.”

홀리데이가 나가자 차홍이 물었다.

“백인들 틈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던 거야? 우리는 쪽수라도 많지, 조선인은 너 혼자잖아.”

“쪽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 오히려 그게 네 발목을 잡는다고는 생각 안 해?”

차홍은 막스의 말을 곱씹었다. 

만약 미국 땅에 자기 혼자 있다면 어땠을까? 

확실히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 것 같다.

“나처럼 되긴 힘들겠지만, 노오력하면 어느 정도는 성공할 수 있을 거다.”

“......”

“아무튼. 돌아가거든 후팡에게 전해. 홀리데이가 3월부터 사업을 시작하라고 했다고. 대신 그동안 일자리를 준다고 해.”

*

“금광? 천막도 옮기고?”

후팡이 미심쩍은 눈으로 차홍을 바라봤다.

“광부들만 옮기는 거야. 지금 회사가 보유한 갱도에서 금을 캐고 있대. 일손이 부족하니까, 사업 시작하기 전에 일자리를 준다더라고.”

“조건은?”

“캐낸 금 절반을 준다는데?”

“절반이나?!”

파격적인 조건이다. 

후팡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이곳에 도착한 내내 신경이 쓰이는 건, 대체 왜 중국인들에게 관심을 두는가였다.

이에 대해 차홍이 말하길.

“앞으로 봄이 되면 중국인을 대거 채용할 생각이래. 근면 성실하다나?”

“하긴, 게으른 백인 새끼들보단 우리가 낫긴 하지. 근데 홀리데이와 이막산의 관계는 어떤 것 같아?”

“뭐, 그냥···. 주종관계 같던데.”

“백인 따까리 새끼가,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건방지게 굴었다 이거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민다. 후팡은 주먹을 움켜쥐며 차홍을 노려봤다.

“너, 양옌은 만나봤어?”

“아니. 못 만났어.”

“시발, 어디 다른데다 빼돌린 거 아냐?”

“당장 사업할 건 아니잖아. 몸이 좋아지면 오히려 이득이지.”

“쳇. 이참에 양옌한테 병원비 명목으로 빚을 얹어야겠네. 그래야 더 열심히 일하지.”

후팡의 입에서 음흉한 웃음을 흘러나왔다.

차홍은 이런 인간하고 같이 일한다는 게 원통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후팡.”

“미쳤냐? 누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

“후팡 따거. 반청복명은 대체 언제 이뤄질까?” 

“뜬금없이 뭔 개소리야. 그거야 위에서 신경 쓸 일이지. 너는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해.”

차홍이 나가자 후팡이 혀를 끌끌 찼다.

‘아직도 반청복명을 지껄이네. 저러니까 밑바닥을 벗어나질 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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