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360)

“······ 그게 다야?”

“어. 말했잖아. 나도 모른다고.”

피치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막스의 말이 오히려 그녀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든 모양이다.

“피곤하면 머리가 더 안 돌아가니까 푹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봐. 난 이만 간다.”

덜컥.

‘진짜 그냥 가네.’

피치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책상 위의 종이를 보며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피치의 방에서 나온 막스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안 자냐? 훈련이 덜 빡셌어?”

“!”

스르륵.

조용히 문이 닫히고 대원들이 속닥거렸다. 

- 시발, 귀신이야 아무튼. 

- 드디어 뭔가 벌어지나 싶었는데, 오늘도 꽝이구만.

- 그래도 키스 정도는······?

- 아닐걸.

- 왜? 

- 키스에서 끝나는 게 말이 안 되거든.

- ······ 잘 이해가 안 되는데?

- 애송이 새끼들.

곧이어 숙련된 조교의 성교육이 이어졌다. 

하지만 피곤해서인지 얼마 가지 않아 모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다음 날.

연병장에 집합한 SFBC는 혹한기의 후유증이 덜 풀린 듯 눈들이 반쯤은 썩어 있었다. 

이를 날려버리기 위해 5km 구보가 시작되고,

앞서 달리는 막스가 소리쳤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오늘따라 거슬린다! 훈련받은 건 전부 꿈이었나?!”

“아닙니다!”

“자다 깨니 기억이 안 나나!?”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져스 스피릿’을 제창한다. 핫, 둘, 셋, 넷!”

“SFBC의 늠름한~ 용병으로 태어나!”

“회사를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힘찬 노래가 울려 퍼진다. 요새 부근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SFBC가 훈련을 끝내고 복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저기에 들어가고 싶다.”

“아서라. 훈련하는 거 못 봤어? 일주일도 안 돼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차홍은 질겁하며 양옌을 만류했다. 

둘은 이른 아침부터 세탁물을 수거하는 일을 하는 중이다.

또한 공사 현장으로 가는 히스패닉, 게르만, 인디언들도 구보하는 모습을 보며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추운 겨울 동안은 요새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했으니 말이다.

막스는 피치 옆에 나란히 달리며 물었다.

“방법은 찾아냈어?”

“헉, 헉. 뛸 땐, 말 좀 시키지 마. 악마 같으니까.”

“······”

“구보 끝나면 대원들한테 할 얘기가 있어.”

“오오! 찾아냈구나, 피치!”

피치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더는 말 시키지 말라며 손을 휘이 저었다. 

연병장으로 복귀하고 막스는 피치, 콜린, 헤리 러브와 짧은 회의를 열었다.

잠시 후. 막스는 단상에 서서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주목! 콜로라도 어딘가에 식인마가 서식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옛썰! 알고 있습니드아!”

“놈의 사냥을 피치가 맡아 지휘하기로 했는데, 이의 있는 사람?”

“없습니드아!”

안타깝게도 피치를 여자로 생각하는 대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엔 외모 때문에 설레거나 흑심을 품은 자들도 있었으나, 대개 하루 이틀이면 사라질 신기루였다.

막스와의 묘한 관계를 떠나 피치의 전투력과 사격 솜씨, 체력은 일반 대원들보다 비슷하거나 우월했으니. 

다들 피치를 세븐 스트롱의 일원이자 SFBC의 대원으로 보고 있었다.

단상 앞에선 피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장내를 둘러봤다. 그리고는 밤새 구상해둔 작전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둘씩 조를 이루어 작전에 투입됩니다. 핵심은 식인마가 먼저 접근할 수 있도록 허술하게 보여야 한다는 거. 다들 수배 전단지 얼굴부터 확인해 두세요.”

콜린은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막스를 쳐다봤다.

“나 보고 못 믿냐더니, 어젯밤에 피치한테 찾아갔다면서? 음흉하긴.”

“오해 말아요. 내가 알려준 거 아니니까. 나도 지금 놀라는 중입니다. 말해준 건, ‘내가 식인마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게 전부였거든요.”

생각보다 별거 없잖아. 

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걸 듣고 저런 작전을 세운 거야?”

“그렇다니까요.”

“그럼 성공할지 장담은 못 하는 거네.”

“피치 못 믿어요?”

“······믿는다니까, 그러네.”

콜린이 피치와 합류하는 동안, 막스는 그녀의 작전을 곱씹어봤다.

‘어떻게 내 말만 듣고 이런 작전을 세웠지.’

*

“핑커톤 탐정들은 방금 나눠 준 수배 전단지의 얼굴을 잘 기억해 주세요. 현상금이 걸렸기 때문에 도시에 있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3인 1조로 광산 캠프를 수색해야 합니다.”

콜로라도 로키산맥에 걸쳐있는 광산에는 수십 개의 캠프가 존재하는데, 일명 천막촌이라 불린 광산촌이다.

골드러시로 몰려든 이들은 언제라도 금을 찾아 이동할 수 있도록 두꺼운 천으로 천막을 치고 살았다.

레비 분 헬름은 식인마라는 무시무시한 별명과 함께 목에는 현상금 5백 달러가 걸린 놈이다.

케이트 와네의 합리적인 판단에 탐정들은 군소리 없이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천 오백 명에 가까운 탐정들이 준투 도시에서 나와 각 광산 캠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피치.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내 승리다.’

케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진다. 

뉴욕에 있을 당시, 같은 아이리쉬 출신으로 그녀는 여러모로 피치와 비교된 인생을 살아왔다.

좋아하던 남자마다 피치에게 더 관심을 가졌고, 학업 성적도 노력하는 것에 비해 피치와 비슷했다. 

여자라는 굴레에 얽매여 있는 자신에 비해 피치는 거리낌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부러웠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부러운 마음과 함께 시기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 넌 여자가 돼서, 언제까지 그놈의 탐정 소설만 볼 건데?

- 남이야 보든 말든.

- 아이리쉬 여성 탐정이 말이 되냐? 가뜩이나 무시당하는 판에, 누가 너한테 사건을 맡기겠냐고.

소설을 보는 피치의 뒤통수를 째려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케이트 역시 ‘애드거 앨런 포’ 소설에 미치도록 빠져 있었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의 골은 깊어지고 열등감은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치가 NEEAC를 통해 캔자스로 떠난다고 충격 선언을 했다.

- 개척마을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기로 했어. 돈이 모이는 대로, 시카고에 있는 핑커톤을 찾아가서 내 꿈을 이룰 거야.

꿈이라······.

여전히 피치는 거침없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

반대로, 자신은 부모님의 등에 떠밀린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 케이트. 너도 네 인생을 살아. 그게 여자로서든 아니든.

- 말 참 쉽게 하네.

- 말이라도 쉽게 해야지. 그리고 말야.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뭘 기대하고 망설이는 거야?

- ······.

피치가 떠나고 한동안 초라함 속에 자신을 절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마치 신의 계시처럼 일이 벌어졌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가 증기선 사고로 죽어버린 것이다.

슬픔과 비통, 황담함.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에게 둘러쳐진 속박이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미친년처럼 웃어도 가족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쉬운걸.’

케이트는 핑커톤이 있는 일리노이 시카고 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피치가 꿈꾸던 ‘세계 최초의 여성 탐정’ 타이틀을 먼저 얻게 되었다.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수석 탐정 토디가 말을 건넸다.

“케이트 양. 길목마다 매복시키고 뒤를 쫓게 한 계획은 좋은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로키산맥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곳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찾을 방법은 없죠.”

“그럼 포기한단 말입니까?”

사실 광산 캠프 자체도 로키산맥 안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산길은 정해졌다. 

만약 그곳을 이탈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식인마의 종적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SFBC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쉽지만 무승부에서 만족해야겠죠.”

“흠.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묘하게 경쟁 구도가 되어버린 상황. 

승패엔 관심이 없는 토디지만, 이왕이면 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다만.

“막스가 어디까지 개입할지 모르겠네요.”

“그자가 개입하면 결과가 달라지나요?”

“뭐, 막연하게 드는 생각이 있죠. 또 이번엔 뭘 보여줄까 하는 기대감이랄까.”

“수석 탐정님도 그자를 높이 평가하는군요.”

“옆에서 지켜보면 그렇게 돼요.”

“이번엔 그렇게 안 될 거예요. 용병으로서 능력은 몰라도, 이건 우리 탐정들의 전문 분야니까요.”

“그렇군요.”

토디는 씨익 웃으며 케이트와 함께 도시 서쪽 로키산맥 입구로 들어갔다.

< 켄터키 식인마(1) > 끝

< 켄터키 식인마(2) >

막스와 피치도 2인 1조가 되어 요새 부근의 광산 캠프로 향했다.

“내가 엄청난 힌트라도 준 거야? 갑자기 이런 작전은 어떻게 생각해 냈어?”

“식인마 입장에서 생각하라며. 헤리 러브가 말해준 정보로 분석해봤지.”

식인마 레비 분 헬름은 켄터키 출신의 거센 남부 억양을 구사한다는 것. 

그리고 다섯 건의 연쇄살인에서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놈의 동료들이라는 것. 

그것도 여러 명이 아닌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 수 있도록 분 헬름은 한 명을 동료로 삼아 여행을 했다.

“철저히 동료를 이용하는 놈이거든. 아마 걸어 다니는 식료품으로 취급했겠지. 그런 놈이 현상금까지 걸렸으니 사람 많은 곳보다는 규모가 작은 천막촌, 그것도 온 지 얼마 안 된 광부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어.”

“그럴듯해.”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핑커톤 탐정들이 들쑤시면 분명 식인마의 눈과 귀에도 들어갈 거야. 그럼 여길 벗어날 생각을 하겠지.”

문제는 골드러시를 찾아온 광부들이 선뜻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혼자 도망치려 할 테고,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건 도주에 필요한 식료품과 물건들이었다.

피치의 작전은 핑커톤 탐정이 탐문 수색하는 걸 역으로 이용하려했다.

그 방법이 무릎을 치게 할 정도라, 막스도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탐정이 적성에 맞는 건가.’

용병과 탐정.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만약 피치의 능력이 탐정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핑커톤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

“이렇게 생긴 자를 본 적이 있나?”

“어, 없습니다.”

광산 캠프 곳곳에 핑커톤 탐정들의 탐문 수사가 벌어졌다. 하지만 워낙 범위가 넓기에 하루에 커버할 수 있는 지역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째가 되고, 핑커톤 탐정들은 여전히 수배 전단지를 들이밀며 캠프를 들쑤시고 다녔다.

‘젠장! 현상금 사냥꾼들이 콜로라도에 도착한 모양이군.’

레비 분 헬름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천막 안에 몸을 숨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동료 하나를 만들었고, 그 동료가 사금을 채굴하는 동안 헬름은 빈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도 얼른 떠야겠구나.’

가장 안전한 건 로키산맥을 타고, 북쪽 와이오밍이나 남쪽 뉴멕시코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식량도 생필품도 변변치 않다. 

게다가 유사시 식량이 되어 줄 동료 없이 로키산맥을 지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분 헬름이 손톱을 뜯고 있을 때. 

캠프촌으로 노새 두 필이 이끄는 작은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행상이 왔구나.’

골드러시로 몰려든 광부들은 가난하다.

그나마 있던 돈도 이곳에 오는 여행 경비로 썼기 때문에, 도착할 즈음엔 거지나 마찬가지였다.

천막 안 집기라고는 해 봐야 나무 궤짝 하나에 담을 수 있을 정도. 광부들은 금을 발견한 뒤에야 조리기구, 삼발이, 작은 오븐 등을 마련하곤 한다.

식료품과 술과 담배 역시 빼놓을 수 없었는데, 방금 본 노새가 끄는 마차 짐칸에는 이러한 물건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이 행상들은 준투 도시를 거점으로 막스가 컨트롤 하고 있었다.

분 헬름이 수중에 가진 돈을 탈탈 털었다.

몇 명을 죽이고 먹어가면서 긁어모았거늘 채 10달러가 되지 않았다.

‘골라도 아주 거지새끼들만 골랐구나.’

혀를 찬 분 헬름은 핑커톤이 사라진 뒤에야 슬그머니 천막을 나왔다.

말은 가는 도중 훔치기로 하고 일단 필요한 물건부터 살 생각이었다.

챙이 긴 모자를 눌러 쓰고 스카프를 두른 분 헬름은 느릿느릿 이동하는 행상에게 다가갔다.

마부를 쳐다본 분 헬름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뭐야, 인디언 새끼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려 보이는 인디언 애송이. 

분 헬름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강낭콩과 베이컨, 말린 과일. 화약과 탄알이 필요하다.”

마부석에 있던 인디언이 고개를 돌려 분헬름을 쳐다봤다.

켄터키 특유의 남부 억양, 스카프로 가린 얼굴.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 아닌가.

‘이게 웬 빵이냐.’

레비 분 헬름이 분명하다.

인디언, 아니 조 짐 주니어의 입가에 미묘한 경련이 짧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핑커톤이 쑤시고 이에 화들짝 놀란 분 헬름은 피치의 예상대로 행상을 찾아왔다.

운이든 아니든. 

피치의 작전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잠시만요.”

노새를 멈춘 주니어가 짐칸으로 이동했다. 

그 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데 그 동작이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그걸 본 분 헬름은 혹여 핑커톤 탐정들이 다시 나타날까 마음이 조급했다.

“장사하는 놈이 자기 물건도 못 찾냐?”

“······ 워낙에 종류가 많아서요. 헤헤.”

“웃지마 새끼야.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

순간 짐칸에 머리를 처박고 물건을 찾던 인디언이 꼿꼿이 허리를 세운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분 헬름을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냐.”

“······?”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를 뿜어낸 인디언. 

분 헬름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한다.

괜히 건드렸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침이 고이기도 했다.

“시간 없으니까 물건이나 줘.”

“싫은데?”

“이 새끼가, 진짜.”

거리는 불과 1m.

서로 눈을 응시한 채, 분 헬름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홀스터를 향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인디언을 노려본다. 마침내 분 헬름의 손가락이 총 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

인디언의 손이 번쩍하더니, 무언가 날아왔다.

쉐에엑. 푹.

“윽! 망할 인디언 새끼···!”

분 헬름의 팔뚝에 칼이 꽂히고, 이를 빼내려 할 때는 발로 가슴을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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