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건을 외친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약속은 되어 있으신가요?”
“...... 아니요.”
“그럼 곤란합니다, 손님. 용무를 말씀해 주시면 에이전시와의 상담을 안내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라서요. 콜로라도에서 막스가 찾아왔다고 전해주면 알 겁니다.”
“콜로라도요?”
여직원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막스에게 시선이 쏠렸다.
골드러시와 더불어 미 전역에 흩어진 핑커톤 탐정들이 모여있는 핫한 곳. 그 콜로라도에서 왔으니 관심이 절로 간다.
로비의 한 직원이 앨런 핑커톤에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갈 때였다.
“앨런은 자리에 있나?”
“안녕하세요, 맥클레란씨. 지금 사무실에 계십니다만.”
여직원이 막스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두 명이 동시에 사장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한 명은 철도 회사 부사장이고 정체불명의 남자는 콜로라도에서 온 사람이다.
전자는 철도 호송 경비 임무를 위탁했고, 후자는 콜로라도 금광 경비를 맡긴 회사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둘 다 VIP 고객이지만 급이 다르다···.
‘그렇다면!’
여직원은 빠른 계산 끝에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녀의 선택은 막스였다.
“로비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맥클라렌씨. 이분과 먼저 약속이 되어 있으셔서요.”
‘이게 뭐라고 기쁘냐.’
막스는 실소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여직원이 보통이 아니라며 흡족해하는 때,
옆에 있던 맥클레란이 막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이놈한테 밀렸어?’
그것도 모자를 눌러쓰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수상한 놈한테.
링컨이 변호사로 있던 일리노이 센트럴 기차 회사의 부사장. 그 이전에는 멕시코 전쟁 영웅이었던 맥클레란은 날카로운 눈으로 막스의 눈을 노려봤다.
“여기가 추워? 왜 스카프로 얼굴을 그렇게 가리고 있지?”
“...... 내 마음이야.”
맥클레란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흑갈색 눈동자라. 백인이 아니로군.”
“지나친 관심은 사양이다.”
“허리춤에 리볼버도 그렇고.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있나.”
막스가 넌지시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물었다.
“후아유?”
“.......”
맥클레란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여직원과 핑커톤 직원들이 끼어들어 제지했다.
“아이구, 여기서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진정하십시오, 맥클레란씨.”
“내가 누군 줄 알고 건방지게 말야. 노려보면서 뭐? 후아유?”
“후아유가 언제부터 욕이었냐.”
“네 태도가 문제지, 자식아!”
맥클레란이 날뛰려 할 즈음. 계단에서 내려오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듯 뛰쳐 내려온 앨런은 로비에 등장하자마자 소리쳤다.
“우리 VIP 고객님이 오셨다고!?”
하지만 막스와 맥클라렌을 본 앨런의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 눈동자가 두 VIP를 향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내 선택은.’
앨런은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맥클라렌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제가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제가 사무실로 찾아뵙도록 하죠.”
“...... 그게 무슨 말이야, 앨런? 나야 나, 일리노이 센트럴 기차 부사장! 한 달에 우리가 몇천 달러씩 지급한다는 거 잊었어?”
맥클라렌이 쌍심지를 켜자, 앨런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잘 알죠. 우리 VIP 고객이신데. 다만, 이쪽은 매월 12만 달러씩 지급하고 있거든요.”
“시, 십이만?!”
콜로라도에 고용된 핑커톤 요원만 1,300여 명.
그들에게 매월 지급되는 돈이 무려 12만 달러였다.
물론 이를 막스가 전부 부담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계약 당사자인 광산 최대 주주.
그깟 부사장인 맥클라렌과는 비교할 수 없는 VVIP였다.
‘그걸 떠나서 말이 많아, 넌.’
매번 찾아와 그놈의 대륙횡단기차 얘기를 꺼내는데, 시작했다 하면 반나절이었다.
더욱이 부사장이 반대한다고 회사가 핑커톤과의 계약을 파기할까?
대체할 집단이 없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
앨런의 사무실.
“괜찮겠어요?”
“신경 쓰지 마. 짜증도 나고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자존심을 긁어봤어. 맥클라렌이라는 작자랑은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거든.”
하물며 정치색도 다르다.
앨런이 링컨의 상원 선거를 도울 때, 맥클라렌은 상대인 스티븐 더글라스를 밀었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그를 사령관으로 중용했다.
하지만 원 역사에서나 그렇지,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설마 여기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존 브라운은 무사한가?”
“사실 이곳에 같이 왔습니다.”
“헉, 진짜?”
앨런 핑커톤은 한때 지하철도의 일원이었다.
역장으로, 때론 차장으로 일하며 도망 노예의 탈출을 도왔다.
게다가 하퍼스 페리 습격 직전, 앨런은 존 브라운과 프레데릭 더글라스와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비밀회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자네는 그렇다 치고. 피해 있어도 부족할 판에, 존 브라운이 시카고에 온 이유가 뭐야?”
앨런의 질문에 막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공화당에 입당하려고요.”
“입당!?”
앨런의 눈이 커졌다.
국가를 전복시킬 궁리만 하던 존 브라운이 갑자기 정치판이라니.
하지만 이어지는 막스의 말은 앨런을 더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내년 대선. 존 브라운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만듭시다, 앨런.”
“!”
“러닝 메이트로는 상원 의원 에이브러햄 링컨이 어떨까, 싶구요.”
러닝메이트는 부통령. 그 부통령이 차기 대선 주자가 되는 게 통상적인 일이었다.
*
SFBC가 시카고에 머문 지 이틀.
막스는 대원들을 재촉했다.
“어서 콜로라도로 가야 해. 시간이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막스는 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가서 혹한기 훈련해야지.”
"!!!"
< VIP 고객님 오셨다 > 끝
< 혹한기 장소와 일정이 바뀌었다 >
“벌써 일 년이 됐다고?! 말도 안 돼!”
“그냥 뛰어 내릴까.”
호텔은 6층.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시체는 로키산맥에 묻어 주마. 혹한기 훈련장을 떠돌면 대원들의 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은 되겠지.”
-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 악마니까.
- 시발, 차라리 지옥이 낫겠구먼.
막스는 대원들을 이끌고 호텔을 나섰다.
존 브라운과 헤어졌기에 복귀하는 길은 말을 팔아치우고 기차를 이용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막스에게 옆에 앉은 피치가 물었다. 호텔에 있는 동안 뭐를 한 건지 몸에서 상큼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이틀 동안 핑커톤 사무실에서 뭐 했어?”
“앨런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
“쳇. 모처럼 도시에서 데이트나 하려고 했더니. 거기서도 일이나 하고.”
“...... 중요한 일이었거든.”
피치는 됐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막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창밖을 응시했다.
일리노이에서 세인트루이스로 향하는 풍경만 벌써 두 번째. 별 감흥이 없어서인지 머릿속으론 앨런과의 대화가 맴돌았다.
- 만에 하나. 공화당에서 대통령이 당선되면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합니다.
- 전쟁?
- 큰 변화 앞에선 극렬한 저항과 투쟁이 동반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 무서운 말이로군.
전쟁이라는 게 쉽게 내뱉을 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큼 분열과 갈등이 극에 달했기에, 앨런 또한 정권이 바뀌는 순간 혼란은 피할 수 없다고 여겼다.
시카고에 있는 동안 막스와 앨런은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이는 향후 미국의 정세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였다.
물론 사적인 말도 오고 갔다.
- 켄터키 식인마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던데, 피치 양이 이겼다면서?
- 피치니까요.
- ...... 만약 내가 도왔다면 케이트 양이 이겼을 수도 있지.
- 글쎄요. 피치는 혼자의 힘으로 한 겁니다.
묘한 신경전이 오고 가던 끝에,
앨런은 이내 피식하며 말을 이었다.
- 케이트 양이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솔직히 많이 놀랐네. 여자의 몸으로 뉴욕에서 시카고까지 와서 탐정을 지원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거든.
- 흔한 일은 아니겠죠.
- 그럼, 하여간 대단한 여자야. 오자마자 몇 가지 사건을 연달아 해결했거든. 우리 슬로건 봤지? 그것도 케이트 양의 아이디어거든.
- 좋으시겠습니다.
- 암, 좋고말고. 유능한 직원이 곧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법이지. 그나저나, 자네가 만든 프로파일링 기법 말일세.
앨런은 탄성을 내지르며 말을 이었다.
- 솔직히 토디에게 보고를 받고 한동안 충격을 받았었어. 난 객관적인 자료만 데이터화 할 생각만 했지, 범죄자들의 심리까지는 고려하지 않았거든. 근데 그런 좋은 소스를 우리에게 그냥 줘도 괜찮겠어?
- SFBC가 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요원이 많으니까 데이터를 모으는 속도가 빠르지 않겠습니까.
- 생각해보니 그런 문제가 있었군. 아무튼, 자네가 만들고 제안한 것이니 데이터는 공유하도록 하겠네.
- 역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군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던 앨런이 책상에서 뭔가를 뒤적거렸다.
두 개의 작은 보석함을 손에 쥐고는 뚜껑을 열어 확인하더니, 그중 하나를 가져와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건 검붉은 루비와 금줄이 연결된 브로치. 옷깃 양쪽을 연결하는 용도로 쓰이는, 여인들이 착용하는 액세서리였다.
- ...... 설마, 저한테 주는 선물입니까?
막스가 질겁하자 앨런이 콧방귀를 끼었다.
- 콜로라도로 돌아가거든 케이트 와네 양에게 전해줬으면 해서 그렇네. 지난번에 약속한 게 있거든.
- 아까 다른 상자는 뭡니까.
- 그건 내 와이프에게 줄 거네. 루비 색깔만 다르지.
- ...... 그럼 그거 저한테 팔아요.
- 어째 그냥 달라는 소리 같은데?
‘지금 줄까.’
기차 밖을 바라보던 막스가 고개를 돌려 피치를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오리처럼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품을 뒤적이던 막스가 작은 상자를 내밀자.
“뭔데?”
“선물.”
“음?”
씰룩거리던 오리 입은 쏘옥 들어가고, 눈은 그새 반달이 되어 있었다.
상자를 건네받은 피치는 뚜껑을 여는 대신 막스를 쳐다봤다.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열어 봐.”
“알았어. 으힛.”
상자 안에는 앨런 사무실에서 봤던 브로치가 예쁘게 담겨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센스람!”
피치는 손에 브로치 금줄을 휘감으며 과하게 들어 올렸다. 주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SFBC 대원들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고, 여자 승객들은 부러운 눈으로 브로치를 쳐다봤다.
자랑질이 끝난 뒤엔 재빨리 양쪽 옷깃에 착용하여 막스에게 보여줬다.
“어때?”
“예쁘네.”
“솔직히 반지가 아니라 실망했는데, 용서해 줄게.”
“......”
피치는 손으로 연신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브로치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고마워.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 태어나서 처음이거든.”
“부모님한테도?”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데 선물은 무슨.”
감자 대기근으로 아일랜드를 탈출한 피치의 가족은 미국에 와서도 뉴욕의 뒷골목에서 어렵게 생활했다. 선물이란 꿈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근데 학교는 어떻게 다닌 거야?”
“스폰서가 있었거든.”
“스, 스폰서!?”
“왜 그렇게 놀라. 부유한 집 부인들이 가끔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해주거든.”
“아, 그 스폰서.”
“다른 스폰서는 뭔데?”
“.......”
아무튼, 뉴욕의 저명한 사업가를 남편으로 둔 부인이 피치를 도와줬다고 한다.
“대가 없이?”
“그런 거 없어. 그냥 도와주는 거야.”
“천사들이네.”
“나를 도와준 마담은 진짜 천사였어. NEEAC를 통해서 로렌스에 간다고 했을 때 50달러를 지원해줬거든.”
“놀랍다. 이유 없이 그렇게까지 남을 돕다니.”
피치는 잠시 생각하더니, 팔짱을 끼우며 말을 이었다.
“이유가 없진 않아.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통해 대리만족했던 게 아닐까 싶거든.”
“대리만족?”
“마담이 나한테 한 말이 있거든.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 피치. 만약 네가 결혼해서 남편만 의지한다면, 나는 슬퍼질 거야.’라고.”
피치가 또다시 성대모사를 했다.
똑같은지 알 순 없지만, 어찌 됐든 막스는 피치의 정신적 토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21세기 마인드를 가졌지만 19세기에 갇혀 있는 여인. 그녀는 억압된 자유로움을 피치로 대리만족하려 한 것이었다.
“마담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중요한 건, 네 자유 의지로 살아가는 거 아닐까.”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특히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되거든.”
“나?”
“응. 너한테 의지 안 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
피치는 브로치를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자꾸 왜 이래. 두 개 사줬으면 큰일 났겠는데, 이거.”
“지금은 네가 내 후원자인 거 알지? 서부에서 여자인 나를 이렇게까지 믿고 일을 맡겨준 사람은 네가 유일할 거야.”
“흠. 네가 여자고 예뻐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네 능력이라고.”
피치가 고개를 돌려 막스의 눈을 쳐다봤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집고는.
“내가 예뻐?”
“..... 문맥이 그게 아니잖아.”
이때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손 오그라들었는데, 어떻게 펴냐.
- 혹한기 훈련 가면 펴질걸.
- 그럼 지금 가야겠는데, 이거. 심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