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밥 먹고 살겠냐! 생각해보니까 이틀은 너무 길다. 저녁 먹기 전에 깃발을 뺏지 못하면 끝나는 걸로 한다.”
이틀이란 넉넉한 시간이 갑자기 줄어버리자 대원들의 눈빛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그럴수록 천 달러의 열망은 높아만 가는데.
‘앞으로 한 시간!’
각 분대는 움직임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분대장들이 한데 모여 속닥거리더니.
“전원 돌격! 우리는 한 몸이다! 누가 깃발을 빼앗든, 모두의 승리다!”
“와아아아!”
‘헉!’
백여 명이 넘는 대원들이 일제히 달려든다.
“보스부터 눕혀!”
“!”
순식간에 30여 명이 막스에게 달려들었다.
재빨리 마차 위로 튕기듯 올라간 막스는 급기야 지붕까지 올라가 달려드는 대원들을 떨어트렸다. 그런데 이때.
“포니 익스프···.”
“......”
마차 지붕 위로 율리시스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다. 막스는 가차 없이 이마를 밀치며 마차 밑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곤 소리쳤다.
“깃발은 내 애인이다! 감히 누가 빼앗는단 말이냐!”
“미친.”
피치가 혀를 끌끌 차는 사이, 대원들이 그녀를 덮쳐 바닥에 쓰러트렸다.
이를 시작으로.
“피치 제거 완료!”
“히콕 제거 완료!”
“콜린 제거 완료!”
“조 짐 주니어, 산초 제거 완료!”
“네이선···· 엉?”
마차 위로 간 네이선 로어. 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지붕 위로 올라가려 했다.
“보, 보스. 제가 끝까지 깃발을.”
“..... 이러면 둘 다 죽어!”
막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지붕으로 올라온 네이선 로어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전 언제나 보스의 곁에··· 응?”
찌이익.
막스와 네이선 로어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고, 이내 천이 찢어지며 둘이 마차 짐칸으로 떨어졌다.
쿵!
“끌어내!”
“잡았다!”
“천 달러다!”
개처럼 끌려 나온 네이선 로어가 막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짜증이 난 막스가 이를 밀어냈다.
“로어, 넌 이따 봐.”
“보, 보스···!”
결국, 깃발은 3분대의 큐브릭이라는 대원이 차지하게 되고, 몸을 부르르 떤 그는 깃발을 펄럭이며 외쳤다.
“이건 우리 모두의 승리다!”
천 달러. 인원수로 나누면 10달러밖에 되지 않지만,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비대칭 전력인 세븐 스트롱, 게다가 보스에게서 깃발을 빼앗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웠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브라운스 빌과는 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모닥불을 지피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대원들은 흥을 이어나갔다.
개중엔 기타를 가져온 대원도 있었는데, 막스가 진짜 가져갈 거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곧 죽어도 낭만’을 택한 대원이었다.
딩딩딩. 디리리링.
밤하늘에 촘촘히 수놓은 별빛. 그 아래 모닥불 주위로 다들 고개를 까딱거리며 음악에 심취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기타 소리에 피치의 목소리가 섞였다.
“너도 기타 칠 줄 알아? 조선에도 있을 거 아냐.”
가야금이야 있지.
기타가 있을지는, 글쎄다.
하지만 특전사 시절 기타를 배운 적이 있긴 하다.
막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타야 나도 좀 치지.”
“오오. 듣고 싶다.”
마침 기타가 멈추자 피치가 분위기를 띄웠다.
막스에게 넘어간 기타는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마틴이 만든 플렛탑 기타.
현대식 통기타와 가장 근접한 형태였다.
둥, 둥.
조율 한번 끝내고. 막스는 장내를 둘러보며 코드를 잡고 6줄을 동시에 튕겼다.
아름다운 화음이 울리자, 다들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렸다.
디리링.
“하나면 하나지 둘은 아니····”
그렇게 대원들이 하나둘 잠이 들고서야 막스는 기타를 내려놓았다.
“원래 피아노가 전문이거든.”
“어. 다시는 안 시킬게.”
겨울이지만 춥지 않은 날씨.
불씨가 남은 모닥불에선 탁탁 튀는 소리가 들려오고, 피치가 몸을 꿈틀거리며 막스 옆으로 다가왔다.
하늘을 수놓은 밤하늘의 별을 보노라니, 서부로 끌려올 당시 비스타이의 밤이 떠오른다.
목에 걸린 펜던트에 손이 가려던 막스는 멈칫하며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이러다 다시 돌아가면 곤란하지.’
상식을 벗어난 일. 그러기에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현실이 될 것 같다.
돌아간다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은퇴한 용병의 삶. 다른 의미에서 아등바등 살 바엔 지금의 삶이, 시간이, 사람들이 좋았다.
더구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피치는 어떻고.
문득 그녀의 가족이 궁금해졌다.
“뉴욕에 있는 가족들은 안 보고 싶어?”
“글쎄. 다들 잘 살겠지, 뭐.”
피치는 오빠가 둘,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가난과는 별개로 자식은 놓고 보자는 이 시대의 평범한 가정이랄까.
막스는 피치가 가끔은 파발을 통해 집에다 돈을 보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는 광산이 본격적으로 채굴되고, 막스가 주는 월급이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세븐 스트롱은 평균 30달러로 주지사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있었으니, 어지간한 노동자들 수입의 3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말로는 그렇게 해도, 내가 보기엔 네가 가장인 것 같은데?”
“여동생 때문에 그래. 멍청해서 그런지 아무에게도 후원을 못 받았거든. 그럼 그냥 적당히 살아야지, 공부는 무슨 공부야. 그런 시궁창에서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져?”
용기도 없고, 고집만 피운다면서 피치는 여동생의 험담을 늘어놨다.
결국, 피치는 자신을 기준으로 동생을 평가하고 판단했다.
“동생 입장은 다를 수도 있지. 네 기준으로 하면 동부에 있는 여자들은 죄다 한심하게?”
“이럴 땐 내 편을 드는 거야. 여동생이 여기에 있어? 어?”
“...... 네 말이 맞네.”
“뭐가 맞는데?”
“그냥 맞아.”
입을 꽉 다문 막스는 문득 피치가 말한 시궁창의 의미를 곱씹어봤다.
그녀가 사는 곳은 뉴욕주의 맨해튼.
‘그 악명높은 파이브 포인츠가 피치의 집이랬지.’
가난한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집단 거주지.
피치가 집을 떠난 게 저절로 이해가 갈 만큼, 파이브 포인츠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슬럼가였다.
“그런데 이거 너무 예쁜 것 같아.”
피치는 막스가 선물한 브로치를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별들 가운데 브로치에 중앙에 박힌 루비 역시 반짝거렸다.
‘파이브 포인츠에서 이런 선물을 기대하긴 힘들었겠지.’
머리털 나고 처음 받아보는 선물.
막스는 이해한다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브로치를 하늘에 대고 살피던 피치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
“그러다 눈뜨면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어.”
“음?”
자신의 경험을 비춰 피치가 다른 시대로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막스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은 채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
콜로라도로 복귀하는 길은 혹한기 훈련의 연장선. 아침엔 달리고, 점심엔 전술 훈련이다.
그리고 저녁엔 집체교육을 해가며 북진했다.
그렇게 콜로라도 준투에 진입할 즈음.
탕! 탕!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무리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망원경을 꺼낸 막스는 후미에서 쫓는 자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토디와 케이트 와네 양이군.’
“핑커톤이 갱단을 추격하는 모양이다. 다들 준비됐지?”
“옛썰!”
“사냥할 시간이다!”
“가즈아!”
말 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하는 줄기는 곧 다섯 갈래로 쪼개지고, 이내 분대 단위로 넓게 퍼져갔다.
탕! 탕!
SFBC는 파도처럼 적들을 집어삼켰다.
질겁한 갱단들은 말에서 떨어지는 이들이 속출하고, 촘촘히 둘러싼 SFBC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무기를 던졌다.
뒤늦게 따라붙은 토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스를 쳐다봤다.
“후, 때마침 SFBC가 복귀했군요.”
“누굽니까?”
“웨스트 크리크 캠프에서 조직된 갱단입니다.”
놈들은 광산 캠프에서 다섯 명을 죽이고, 그 기세로 중간 은행까지 습격. 하지만 핑커톤에 막혀 도주하던 참이라 했다.
“점점 갱단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만 벌써 네 번째에요.”
“겨울이 버티기 힘들었나 보군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결성된 갱단들.
눈과 얼음 밑에 있을 금을 손가락 빨고 지켜보기엔 인내심이 부족한 놈들이었다.
스멀스멀 치밀어오르는 탐욕과 광기. 이는 뜻에 맞는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 자리에서 갱단이 조직되는 건 흔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텍사스 남부에 갔다더니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나요? 엄청 늦게 오셨네요.”
“뭐, 겸사겸사 훈련도 하고 왔습니다.”
케이트의 물음에 막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옷깃에 달리 브로치를 본 뒤엔 막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필 저걸 차고 왔네.’
앨런 핑커톤의 부탁대로 브로치를 케이트에게 전했다. 그런데 루비 색깔만 다르지, 피치와 똑같다는 게 문제였다.
‘뭐야, 저 브로치는!?’
커플도 아니고 이게 무슨.
피치와 케이트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둘의 시선은 이내 막스에게로 향했다.
두 여인의 이글거리는 눈빛. 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토디에게 말을 건넸다.
“우린 이만 요새로 복귀하도록 하죠.”
“나중에 찾아가겠습니다.”
토디와 인사를 나눈 막스는 SFBC 대원들을 이끌고 요새로 향했다.
피치가 다가오자 막스는 말 허리를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할 일이 많다! 서두르자!”
*
요새에 복귀한 막스는 그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겨울 시작 전에 떠나, 끝날 즈음 왔으니 쌓인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모처럼 동부에서 특허 관련 업무를 했던 데이비드 러셀이 요새를 찾아왔다.
초반 그의 임무는 특허에 관심을 보인 회사들을 물색하고, 그중 일부를 팔아 현금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노예 상인 존 크렌쇼를 죽여 재산을 빼앗고, 콜로라도 광산까지 얻은 바람에 막스는 현금이 궁하지 않았다.
해서 막스가 데이비드 러셀에게 요구한 건, 동부의 회사 리스트와 특이사항을 요약해 반기별로 보고하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많이 설립된 분야는 철도 쪽인데, 2년 전 경제 공황 때 파산한 곳도 적지 않습니다.”
데이비드가 작성한 보고서는 그 페이지만 백여 장에 달한다. 회사 이름과 사업 분야, 간략한 현재 상황까지 요약한 마음에 쏙 드는 정보였다.
막스는 우선 회사 이름부터 빠르게 훑어갔다.
일부는 따로 메모해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작성한 종이를 데이비드에게 넘기며.
“이 회사를 일단 예의주시하고 있어. 만약 재정 상태가 악화되거나, 투자가 필요하면 직접 뛰어들어.”
“제가 독단적으로 말입니까?”
“이 회사들에 한해서는 선조치 후보고를 허락한다.”
데이비드가 목록을 훑어봤다.
듀폰(Dupont), 화이자(Pfizer), 웨스턴 유니온(Western Union),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 키엘(Kiehl), 돌 푸드 컴파니(Dole food Company), 코닝(Coaning), 엘머(Elmer’s) 등.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회사 리스트.
데이비드 러셀이 눈을 껌뻑거렸다.
사실 막스의 기준은 단순했다.
미래에도 존재하냐, 안 하냐.
남북전쟁이라는 대혼란의 시기.
리바이스, 스미스앤 웨슨처럼.
막스는 기업의 지분을 잠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본이 쌓일수록 씨를 뿌려야지.’
< 미래에도 존재하나 > 끝
< 빛 좋은 개살구 >
씨를 뿌리는 건 좋은데, 이왕이면 체계를 갖고 시작하는 게 나을 터.
막스는 오래전부터 구상해둔 걸 꺼내 들었다.
“지금 사무실이 워싱턴에 있지?”
“네.”
“거기도 중요하긴 한데, 앞으론 특허보단 기업들에 집중할 생각이야. 이참에 뉴욕 맨해튼에도 사무실을 낼 거고.”
“그럼 사무실이 두 개가 되는 건가요?”
“그렇지.”
‘일은 혼자 하는데?’
데이비드가 입을 오물거리자, 막스는 미리 구상해둔 걸 종이에 끄적거리며 말했다.
“돌아갈 때, 윌슨 섀넌과 세 명이 따라갈 거야. 도착해선 워싱턴과 뉴욕 사무실에 인원을 10명씩 채용할 거고.”
“아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데이비드가 우렁차게 대답하자 막스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로 회사가 만들어지는 건데, 뭔지 알고 대답하는 거야?”
“그냥 기존의 막스 인베스트먼트의 지점 아닙니까?”
막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만들려는 건 언론사야.”
“네에!?”
놀란 데이비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론사라니. 동양인 오너가 이제 하다 하다 별걸 다 건드린다.
“어차피 기업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 언론사 명함 들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정치 쪽도 마찬가지고.”
“그야 그렇죠. 그런데 전 그쪽 경험이 없는데요···.”
“윌슨과 함께 가는 자들이 캔자스 신문의 발행인들이라 채용도 알아서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