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 SFBC 대원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거야.”
“그럼 막스가 우리한테만 말 안 해준 거야?”
해리 러브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거지. 다음에 혹한기 훈련할 때 알게 될 거야. 우린 무식하게 체력만 기르는 훈련은 안 하니까.”
“혹한기····?”
듣기만 해도 몸이 추워지고 반발심이 생긴다.
문득 월러스와 포드의 시선이 SFBC 대원들로 향했다. 러브의 말마따나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만약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이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면?
함성은 물론, 리더를 찬양하는 말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SFBC는 당연한 듯 승리를 받아들인다.
“천천히 적응하다 보면 알 거야.”
“그건 그렇고. 왜 우리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데?”
포드의 말에 러브가 피식했다.
“그냥.”
“......(뭐지, 이 자식은).”
콴트릴의 시체.
억울한 게 많은지 그는 눈을 뜬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히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콴트릴의 최후가 아군의 배신이라니. 눈을 못 감을 정도로 억울했나 보네.”
“이번 작전에 불만을 품은 걸까? 결국 콴트릴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글쎄, 찌른 놈만 알겠지.”
피치의 말에 대답한 막스는 한편으론 기억을 뒤적거리며 인물 정보를 끄집어냈다.
윌리엄 T 앤더슨.
일명 ‘블러드 빌 앤더슨’이라 불린 미국 남북 전쟁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악명 높은 남부 연합 게릴라 리더.
앤더슨은 콴트릴 레이더스 소속이었으나, 후에 콴트릴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등장 시기는 남북 전쟁이 후반으로 접어든 때였다.
‘뭐, 이정도 역사가 뒤틀렸으면 시기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으려나.’
존 브라운이 대통령이 된 시대. 그깟 등장 시기가 무슨 대수인가.
앤더슨이든 아니든.
콴트릴을 칼로 찌를 때, 그 눈빛만큼은 막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
메이플 슬래쉬 전장으로부터 35km 떨어진 딥워터 마을.
패잔병들이 하나둘 모여들지만, 그 수가 백을 넘지 못했다.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보다 짙은 좌절감과 패배감이 그들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우울한 분위기 속.
콴트릴을 가르쳤던 인디언 혼혈, 조엘 메이스가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코트 자락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리볼버 총구.
이를 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스를 따라갔다.
무리에서 떨어진 곳.
“앤더슨. 지금부터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야 할 거야.”
“콴트릴의 최후를 봤나 보군요. 안 들킬 줄 알았는데.”
앤더슨은 당당하다 못해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갓 20살이라는 걸 감안하면 꽤 대범한 행동이었다.
“욕심 많은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간이 큰 줄은 몰랐구나.”
“이제라도 아셨으면 된 거죠. 그나저나, 나한테 뭐 물어본다면서요?”
메이슨은 잡아먹을 듯 앤더슨을 노려보며 물었다.
“리더가 되고 싶었나?”
“뭐,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에요.”
이죽거림은 사라지고, 앤더슨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SFBC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한 사이코가 벌인 짓을 보십시오. 콴트릴이 지휘하는 한 오늘과 같은 일은 계속해서 벌어질 겁니다. 신념도 대의도 없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날뛰는 리더는 그만 퇴장하는 게 낫습니다.”
“콴트릴에게 끼어달라고 사정한 건 네 놈 아니었나?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고!”
결국 콴트릴이 아니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을 조직이란 소리였다.
메이슨이 목소리를 높이자 앤더슨의 시선이 무리로 향했다.
게릴라의 구심점이 콴트릴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앤더슨 역시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혼란을 틈타 죽인 것도 이 때문이었고.
“누군가는 오늘의 패배를 책임져야 할 텐데, 감당할 수 있습니까? 참고로 콴트릴에게 전략과 전술을 가르친 건 당신이에요, 메이스.”
“......”
“그리고 콴트릴이 죽은 그 말. 당신이 타고 왔잖아?”
메이슨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앤더슨은 방향을 틀어 협박 어조로 메이슨을 몰아쳤다.
“인디언 혼혈인 당신이 나한테 총을 쏘면 무사할 것 같아요? 게다가 내가 콴트릴을 죽였다고 말해봐야 몇 명이나 동조할까요? 나도 내 나름의 세력은 만들어 놨거든요.”
콴트릴이 조직한 게릴라 집단은 대체로 나이가 어리다. 이유는 세뇌하기 좋고 선동이 잘 먹힌다는 것. 이를 간파한 앤더슨 역시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만드는 작업에 꽤 공을 들였었다.
“메이슨. 차라리 콴트릴처럼 저를 밀어주는 건 어때요? 어차피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주류로 올라가는 게 목적이었잖아요. 나도 마찬가지고.”
“전쟁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말은 참 쉽게 하는군.”
“뭐, 저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남부군에 들어가서 경험을 쌓으려고요.”
앤더슨은 메이슨에게 한발 다가가 눈을 응시했다.
“어차피, 콴트릴이 죽든 말든 상관없잖아요. 내 생각을 들어보려고 한 거 아닙니까?”
“......”
“누구처럼 제 잘난 맛에 날뛰다 뒈지고 싶진 않으니까, 차근차근 만들어가죠. SFBC를 능가하는 조직을요.”
‘콴트릴과는 확실히 다른 부류군.’
전투 능력과 냉정함은 비슷하나, 콴트릴은 어딘가 모르게 심각하게 결여되거나 광적인 집착을 보일 때가 있었다.
이는 리더로서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
그에 반해 앤더슨은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타입이다.
게다가.
“아 참, 얼마 전에 콴트릴하고 하는 대화를 엿들었는데.”
앤더슨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도 들어가고 싶어요. 프리메이슨.”
“..... 별걸 다 아는군.”
오클라호마 프리메이슨 랏지의 회원.
조엘 메이슨은 머리를 굴린 끝에 앤더슨과 손을 잡기로 했다.
“그나저나, 텍사스에서 온 병력은 합류할 생각이 없나 보군. 한 명도 오질 않다니.”
“아마 남부 연합군으로 갔을 겁니다. 패잔병들끼리 만나봐야 뭐 하겠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무리와 합류한 조엘 메이슨은 콴트릴이 오기 전까지 임시 리더가 되도록 앤더슨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크나큰 패배 이후라 분위기 쇄신을 위해, 앤더슨은 큰 물줄기로 노선을 변경했다.
“미주리주를 장악하고, 캔자스를 박살 내는 게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 오늘의 패배를 만회하려면, 남부 연합군에 합류하는 수밖에 없다.”
앤더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잭슨 주지사와 합류하기 위해 주도인 제퍼슨 시티로 향했다.
*
전장을 수습한 막스는 로렌스로 복귀한 뒤 곧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이번엔 캔자스 민병대를 놔둔 채, 250명의 SFBC를 이끌고 캔자스강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가는 중간 ‘그린터 플레이스’ 선착장에서 모세 그린터를 만났는데.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화물 증기선 세 대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자네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없는 배편도 만들어 줄 수 있네.”
노예제 옹호론자에서 이제는 반대 노선으로 갈아탄 모세 그린터.
막스 덕분에 자유주가 된 캔자스에서 페리 사업은 번창했고 핵심 권력자들과도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어디까지인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요.”
연방군과 미주리주의 민병대가 충돌하는 곳.
그리고 이 전투엔 곧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훈련하고 있을 율리시스 그랜트가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다.
막스는 율리시스와 그 연대에 소속된 SFBC 대원을 돕기 위해 미시시피강줄기가 맞닿은 세인트루이스를 목적지로 삼았다.
< 메이플 슬래쉬 전투 > 끝
< 율리시스의 첫 임무 >
의용군은 자원봉사자다.
보통 의용군은 위급한 경우에 모집되기 때문에 훈련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최초 존 브라운이 각 주에 의용군 7만 5천 명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30일에서 90일 복무 조건이 붙었었다.
당초 율리시스 부대 역시 30일간 유지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 일로를 걷자, 존 브라운은 의용군 소집령을 수정해 3년으로 늘렸다.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인근 기지.
제21보병연대 대령 율리시스 그랜트는 의용군들의 훈련을 두고 클루이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기본 훈련 일정의 많은 부분을 SFBC에서 빌려왔는데, 아침 구보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 둘! 하나, 둘!”
“목소리 크게!”
기지 주변을 두 바퀴 돈 다음엔 아침 식사를.
그 뒤엔 꽉 찬 훈련 일정을 소화했다.
또한 병사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에 적합한 주특기를 부여하는 것도 나름 체계적이었다.
일리노이주 주지사는 율리시스가 규율이 없고 반항적인 제21보병연대를 다루기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자원봉사로 소집된 의용군은 빠른 속도로 민간인의 허물을 벗고 있었다.
연방군을 상징하는 짙은 푸른색 재킷과 어깨에 노란색 술이 달린 군복을 입은 율리시스 대령.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연락병이 찾아왔다.
“미주리주 팔미라 산 근처에서 일리노이 군이 반란군에 포위되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임무가 떨어졌군.”
율리시스는 이내 참모들을 소집하고 대략적인 전략을 상의한 뒤 출전 준비를 했다.
1861년 7월 3일.
율리시스의 첫 남북전쟁 군사 작전이었다.
*
막스와 SFBC 대원들은 모세 그린터의 도움으로 화물과 승객을 태우는 증기선 세 척에 나누어 미주리강을 지났다.
무기들은 운송물인 목재 사이에 숨겨두고 일부는 일꾼으로 몇 명은 깔끔한 차림의 승객으로 위장했다.
마찬가지로 흑인으로 분한 막스는 잔뜩 선적된 짐 위에 걸터앉아 미주리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SFBC 대원들은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숙덕거렸다.
- 측은하고 처량 맞아 보여.
- 어쩜 저렇게 탈출한 노예 같냐.
- 지하철도 마음을 알겠네.
막스는 귀를 후벼파며 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뻥긋거렸다.
대충 모양으로 해석해보면.
‘뒈지고 싶냐’였다.
막스는 시선을 돌려 다시금 강을 쳐다봤다.
시시각각 경관이 바뀌지만, 눈엔 들어오지도 않는다. 머리는 온통 전쟁으로 가득했으니까.
이때 한 줄기 빛이 막스의 눈을 어지럽혔다.
오랜만에 여성스러운 복장을 한 피치.
그녀는 브로치에 박힌 루비가 빛에 반짝거리며 눈을 부시게 했다.
막스는 입 모양으로 욕을 하려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정착하는 곳은 웰링턴입니다! 내리실 분은 미리 짐을 챙기세요!”
배가 선착장에 다가가자 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배를 타기 위해 대기 중인 앳된 남자들.
문제는 복장과 어설픈 무장 상태였다.
‘난 위험한 인간’이라며 총과 칼을 드러냈는데, 그 총마저도 독립전쟁에서 할아버지가 썼을 법한 연식이 오래된 총이었다.
‘그나저나 어디 쪽 애들이지.’
미주리주는 연방과 남부 지지자들이 뒤섞인 곳이라 저들의 진영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배가 완전히 멈춰 서고.
20명 남짓 무장한 자들이 배에 올라타며 주변을 훑어본다.
대부분 나이가 10대로 보였는데, 흑인인 막스와 눈이 마주치자 놈들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일부는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남부 쪽이구먼.’
막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 바, 방금 보스 쫄은 거지? 맞지?
- 와, 쏘뻐킹 희귀한 장면인데.
- 사진기 없냐? 이건 찍어야 한다고!
‘저것들이 돌았나.’
막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주인 잃은 흑인처럼 또다시 강을 응시했다.
뿌우우우.
뱃고동 소리와 함께 증기선이 출발을 알리고.
소음이 줄어들자 방금 탄 남자 중 형제끼리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형이 봐도 내가 어려 보여?”
“어. 그놈의 의용군은 포기하라니까 그러네.”
“그냥 속이고 들어가도 된다던데.”
“넌 아냐. 딱 봐도 꼬맹이로 보이는데, 누가 널 받아주냐고. 그냥 농장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만족하라니까.”
형은 곧이어 다른 남자, 아니 소년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일단 제퍼슨 시티에서 내려서 곧바로 북쪽으로 올라갈 거지?”
“그래야겠지. 그런데 만약 연방군이 쫙 깔려 있으면 좀 돌아가야 할 거야.”
“잭슨 주지사님이 민병대를 모으고 있으니까 제퍼슨 시티는 아직 안전할···.”
느낌이 싸했는지 소년들은 말을 멈추곤 주변을 둘러봤다. 빤히 자신들을 쳐다보는 눈들.
어쩐지 그 수가 꽤 많았다.
더욱이 예쁜 여인과 눈이 마주쳤을 땐, 얼굴이 붉어지며 헛기침을 내뱉는 아이도 있었다.
이어진 대화는 귓속말에 가까워 더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몇 가지 사실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의 나이가 십 대 중반의 소년들이라는 것.
따분한 시골 농장에서 벗어나 영웅이 되어 싸우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남부 연합 지지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소년병들이라.’
막스는 전생의 용병 시절,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만난 총을 든 소년병들을 떠올렸다.
저돌적이고 어쩌면 어른보다도 더 단단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은 솔직히 가장 까다롭고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다.
이유는 역시 심리적인 요인이다.
어른의 잘못된 신념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동정심. 어른으로서 죄책감.
이는 방아쇠 당기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강력한 장애물이었다.
날이 어둑해져 밤이 찾아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배는 제퍼슨 시티에 도착, 미래의 남부군 새싹들이 우르르 배에서 내린다.
전장에서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막스는 눈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자 뭘 꼬나보냐며 아이들은 뻑큐를 날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막스가 헛웃음을 지을 때.
- 어떻게, 대신 조져줄까요?
대원 하나가 다가와 생글거리며 속삭였다.
- 아냐. 너부터 조져줄게.
대원은 급히 유턴해 자리로 돌아갔다.
- 화 많이 났나 보네. 당분간 조심하자고.
- 애새끼들한테 뻑큐까지 당했잖아. 나 같으면 바로 리볼버 뽑아서 대가리를 확.
- 그만하자. 우리 대가리부터 깨질라.
아침이 올 때까지 배는 선착장에 머무른다.
대충 끼니를 때운 막스는 짐칸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때 피치가 슬그머니 다가와 옆에 누웠다.
“같이 보자.”
둘은 말없이 별을 보다 잠이 들었다.
이런 상황은 배가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할 때까지 반복되었다.
가끔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시답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피치의 기억에 남는 것도 있었다.
- 무슨 걱정 있어?
- 앞으로 대원 중 누군가는 죽을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