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는 이름을 뇌까리며 기억을 뒤적거렸다.
물론 비슷한 이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미주리주의 게릴라고 형제 중 동생의 이름이 제시라는 건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콴트릴을 죽이고 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놈이 진짜 블러드 빌 앤더슨이라면.’
제시라는 아이는 설마 제시 제임스일까?
물론 확신할 순 없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다만 하는 짓거리를 보면 싹수가 훤했다.
‘놈들이 맞든 틀리든. 바뀌는 건 없지.’
어차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마주치면 죽여야 할 존재들. 차이가 있다면 막스의 머릿속에 두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 되었다는 것.
만나거든 좀 더 처절한 죽음을 선물하면 그만이다.
막스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피치가 말을 건넸다.
“나 때문에 시간 지체된 것 같은데, 이제 움직일 수 있어.”
“다음 타겟은 게릴라들의 집결지라, 율리시스와 함께할 생각이야. 너 때문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응. 알았어.”
피치에게 좀 더 쉬라고 말한 뒤 막스는 방을 벗어났다.
“피치는 어때, 보스?”
흩어져 게릴라들을 처리한 SFBC 부대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었는지 히콕과 대원들은 막스를 보자마자 피치의 상태를 물었다.
“가벼운 타박상이야. 오늘 하루 쉬면 괜찮아질 거야.”
“총 맞고 타박상이라니. 역시 피치!”
운만큼은 최고라며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막스와 피치 일찌감치 로렌스 보안관과 부보안관 시절부터 남다른 사이였다.
한 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연인이 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이였다.
물론 일부 대원들이 ‘막스 고자설’을 주장하긴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피치의 죽음 앞에 막스가 담담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율리시스 대령의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정찰대는 플로리다 마을을 정찰할 수 있도록. 놈들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을 테니, 무리한 행동은 피하고.”
“옛썰!”
막스의 지시에 따라 정찰대 30여 명이 마을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향했다.
*
게릴라와 민병대가 모여있는 플로리다 마을.
막스가 있는 스타우츠빌과는 남동쪽으로 불과 9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척, 척.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제임스 형제.
걸을 때마다 물을 떨구며 자신들의 지휘관 윌리엄 앤더슨을 찾아갔다.
“호른이 이끄는 게릴라들이 전멸됐다고!?”
앤더슨은 프랭크 제임스의 팔에 난 총상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런데 연방군 복장이 아니었어요.”
밤이지만 복장을 구분할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달빛이 훤했고, 뭔지 모르지만 게릴라들이 머물던 집에 빛들이 번쩍거렸으니까.
설명을 듣던 앤더슨은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SFBC. 그놈들이 틀림없다.’
연방군이 내려오는 길을 미리 청소하듯 제거하는 조직.
그렇다고 연방군이 직접 이런 작전을 펼 리도 없고, 제이호커스 역시 가능성이 희박하다.
놈들은 캔자스 민병대로 흡수되어 더는 게릴라 작전을 펴지 않았으니까.
“연방군의 움직임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프랭크, 제시. 너희 형제가 큰일을 해냈구나.”
“이 정도야 기본이죠. 제시는 SFBC 대원 한 명을 죽이기까지 했는 걸요.”
“제시가 대원을?”
앤더슨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제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다. 옷부터 갈아입고, 프랭크 넌 상처치료에 전념해. 내가 의사 하나를 붙여주마.”
“감사합니다, 대장!”
제임스 형제가 나가자 앤더슨은 얼굴을 굳힌 채 고민에 휩싸였다.
‘북쪽에 있는 아군의 게릴라는 전부 몰살. 이후 SFBC와 연방군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온다면.’
다른 곳도 아닌,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플로리다 마을이라면 아군이 전멸할 위험성이 크다.
‘애초에 잭슨 주지사가 병력을 나눈 게 잘못이야. 철도를 장악해봐야 그걸 지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미주리주 잭슨 주지사는 주를 장악해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 연합에 가입.
이를 위해 민병대와 게릴라들을 동원해 각개 전술을 펼치려 했고. 북쪽의 철도 노선과 동쪽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전투가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병력을 합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당장이라도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섬 같은 작은 호숫가 마을을 벗어나야 했다.
더구나 현재 남군과 북군의 분위기를 보면 절대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동부 전선에선 남군이 불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연일 승전보를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제퍼슨 주도에서 병력을 합치는 게 우선이다.’
결심을 끝낸 앤더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관들이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지휘관들은 앤더슨의 의견을 수용해 철수를 결정했다.
*
플로리다 마을에서 미주리주 병력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때.
민병대 중위 사무엘은 지인의 집안에 처박힌 채 환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입대한 친구는 꾀병인지 모른 채 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얼마나 몸이 안 좋은 거야?”
“이상하게 팔다리가 움직이질 않아. 하지만 북군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이 빌어먹을 몸뚱아리를 이끌어서라도 막아낼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무튼, 아쉽다. 조금만 있으면 대위로 진급할 수 있을 텐데.”
‘그까짓 직급이 뭐가 중요하다고.’
사무엘은 2주 전 친구와 함께 미주리주 민병대에 자원했다.
처음엔 사병이었으나 불과 일주일 만에 소위로 진급하더니 지금은 중위가 되었다.
그렇다고 거저 얻은 건 아니다.
미주리 북동쪽 팔미라에서 북군과 전투를 벌였고, 사무엘과 부대는 적을 죽이는 공을 세웠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건 적이 아니었다고!’
평범한 민간인들이었다. 이를 적으로 오인해 죽였음에도 다들 쉬쉬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전투는 이름조차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이 이런 전쟁에 끼어들었는지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사무엘. 그럼 나 먼저 갈 테니까, 몸이 괜찮아지면 제퍼슨 시티로 와. 그곳에서 전선을 구축하기로 했으니까.”
“알았어. 조만간 내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거야.”
‘가긴 개뿔. 여기가 내 고향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도망갔을 거라고.’
하필 자신이 태어난 플로리다가 게릴라와 민병대 집결 장소가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어찌 됐든 사무엘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를 집에서 버팅겼다.
그리고 마을에 군인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밖을 어슬렁거리던 때.
한 형제와 맞닥트렸다. 한 소년의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사무엘 중위님 아니세요?”
“..... 마, 맞는데.”
“아파서 누워있다더니, 잘만 돌아다니시네요?”
두 형제의 꼬나보는 눈빛이 사무엘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몸은 물론 아프지. 그래도 연방군들이 쳐들어올까 봐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가만히 안 있으면요?”
“죽을 때까지 이 칼을 휘둘러야겠지.”
사무엘은 만약을 위해 가져온 야전 장교의 대검을 어색하게 쳐들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두 형제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겁쟁이. 누굴 바보로 아나.”
“뭐, 여기 숨어서 잘 해봐요.”
“...... 내가 보기엔 너희 형제는 꼭 성공할 것 같구나.”
‘인생에 필요한 건 무지와 확신뿐이니. 성공한다면 네 놈들이지.’
돌려 깐 말이지만 형제는 기분 좋아 보였다.
“뭐, 그 말은 듣기 좋네요. 아무튼 북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이봐요,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요?”
‘이봐요? 이 싸가지없는.’
아직은 미주리주 민병대 중위거늘.
사무엘이 뚱한 표정을 짓지만, 제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북군이 아저씨를 죽이려거든, 이렇게 말해요. 내가 SFBC 대원을 죽인 자를 알고 있다고.”
“SFBC?”
사무엘도 들은 적이 있다.
민간군사기업이라는 이상야릇한 별칭을 가진 회사. 콜로라도를 지배하는 세력.
그리고 콴트릴스 레이더스란 게릴라의 리더를 죽이고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조직.
근데 누가 대원을 죽였다고?
사무엘의 눈빛을 받은 제시가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리곤 자랑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바로 저요. 제시 제임스.”
“노, 농담 아니고?”
“농담은 무슨. 아무튼, 제가 아저씨 목숨 구해준 겁니다.”
형제는 키득거리며 이내 말을 타고 마을을 벗어났다.
영웅이 되고자 하는 아이가 전쟁 한복판에 섰을 때. 그 잔인함과 포악함은 껍데기를 잡아먹고 악마가 될 것이니.
사무엘은 미래 악마들의 뒷모습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은 하룻밤을 잔 뒤, 머나먼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작은 노새에 짐을 얹고 터벅터벅 마을을 벗어났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걸어갈 즈음.
열 명의 군인이 자신을 포위했다···.
북군도 남군도 아닌 검은 색에 가까운 군복.
‘SFBC!?’
심장이 덜컥했지만, 사무엘의 복장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
“플로리다 마을에서 나오는 길이신가?”
“..... 그런데요.”
“그럼 반란군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겠구만?”
“글쎄요. 나한테 말을 안 하고 가서. 전 그냥 민간인이거든요.”
“이름은?”
“......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요.”
“직업은?”
히콕은 날카로운 눈으로 질문을 쏟아내고.
사무엘은 최대한 침착한 척 대답했다.
“미시시피강 증기선 조종수요.”
“근데 왜 여기에 있지?”
“전쟁 때문에 실업자 됐거든요. 플로리다는 고향이라 잠시 들렀습니다.”
‘지금까진 잘하고 있다.’
사무엘이 자신을 칭찬하고 있을 때.
스카프를 두른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빤히 자신을 노려봤다.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
“...... 그, 그런데요.”
“미시시피강 증기선 조종수!?”
“무섭게 왜 그래요.”
‘뭐지, 이 자식.’
사무엘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릴 때.
스카프 속 막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
미국의 대문호이자, 불과 막스보다 한 살 많은 ‘마크 트웨인’의 젊은 시절.
반가운 나머지 막스가 손을 내밀려 했다.
하지만 이를 오해한 사무엘이 소리쳤다.
“내, 내가 SFBC를 대원을 죽인 아이를 알아요!”
“썅! 방금 뭐라고 했냐?”
히콕이 엄청난 속도로 총을 뽑자, 사무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내가 알아요! > 끝
< 마크 트웨인 >
‘말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총부터 뽑네!’
사무엘은 자신의 주둥이를 원망했다.
한편으론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악마 같은 놈들이야.’
군에 있는 동안 SFBC를 욕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 무자비하고 잔인한 놈들이야.
- 심지어 여자와 애들도 죽인다니까!
미주리주라 유독 심했을지 모르지만, 그땐 설마 했던 것이 자신을 둘러싸고 윽박지르는 게 과연 그런 소리를 들을 법했다.
더욱이 사무엘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건, 살기등등하게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는 여인. 그녀는 언제라도 자신의 이마에 구멍을 낼 태세였다.
‘이 잔인무도한 놈들한테서 어떻게 벗어나지.’
사무엘이 눈알을 굴려 있지도 않을 틈을 찾을 때였다.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자가 총든 자를 제지했다.
“진정해, 히콕.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사람한테 이러면 쓰나.”
“남군이면서 아닌 척하는 거 봤잖아, 보스? 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누가 믿겠어.”
‘보스?’
자고로 목숨을 부지하려면 권력자 옆에 서야 하는 법. 눈치 빠른 사무엘은 은근슬쩍 보스 옆으로 다가갔다.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보자고. 그래서 흉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남군을 뛰쳐나온 이상 말 못 할 이유가 있나.
사무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퍼슨 시티. 거기서 전선을 구축한다고 들었거든요.”
“흉수 이름도 알고 있나?”
“물론이죠. 제시 제임스! 아주 자랑스럽게 자기가 SFBC 대원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죽인다는 말이 혹시나 자극적이진 않을까, 말끝을 흐린 사무엘은 대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다만 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동자가 이상하네?’
여느 백인과는 달라 보인다.
사무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때 막스는 제시 제임스 이름을 곱씹고 있었다.
‘역시 제임스 형제였군.’
콴트릴의 죽음이 앞당겨져서 윌리엄 앤더슨과 제임스 형제의 등장도 빨라진 모양이다.
남북전쟁 후반에 나타날 인물들이 벌써부터 설치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혀를 찬 막스는 한발 다가가 자신보다 10cm가 작은 사무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넌 어디로 가는 길이지?”
“...... 네, 네바다로 가는데요?”
“그래? 그러지 말고 우리랑 함께 가자.”
“!?”
‘갑자기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 시기의 마크 트웨인은 전쟁에 질색하며 자신의 형이 장관으로 있는 네바다 준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주지사의 비서관이 되었지만 이내 광산을 떠돌며 발명과 사업에 손을 대고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똥손 율리시스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사무엘이라고 했지? 제퍼슨까지 함께 가서 네 말을 입증해. 우리 대원이 죽었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사무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렇다고 거절할 상황도 아니다.
남군의 민병대 장교를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