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서 더 서둘렀네. 내쉬빌에 있는 자네 사령관과 합류하면 낭패였거든. 그리고 필로우 장군의 무능력함도 승리의 요인이었네.”
“그 친구 얘긴 꺼내지도 말게.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니까.”
필로우는 벨몬트에서 율리시스에게 패해 퇴각한 지휘관. 이번 전투에서도 막판에 버크너에게 모든 걸 맡기며 먼저 요새를 빠져나간 인물이었다.
“전투에서 두 번이나 패했으면서, 뻔뻔하게 도망은 어찌나 잘 가는지 원.”
“원래 그쪽으로만 특출난 자들이 있지. 자네나 나는 그게 부족해서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거고.”
율리시스의 말에 버크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뒷담화를 실컷 떠들고, 어느 순간
율리시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곧 보스턴의 수용소로 가게 될 텐데, 조금이라도 감옥에 있는 기간을 줄이려면 돈이 필요할 걸세.”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네.”
“그러지 말고 내게 빚을 갚을 기회를 주게.”
멕시코 전쟁 이후.
율리시스가 알코올 중독을 이유로 군대에서 쫓겨나 뉴욕에서 방황하던 때, 버크너가 숙박 비용과 식사비용을 대신 지급한 적이 있었다.
당시를 떠올리던 버크너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율리시스. 나는 포로로 붙잡힌 남부 연합의 장교네. 전쟁이 끝나면 모를까. 친구로서 자네의 도움은 마음으로만 받겠네.”
버크너가 모멸감을 느꼈을까.
포로로 붙잡힌 패전 장군에겐 율리시스의 진심이 동정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성급함을 깨달은 율리시스는 더는 돈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미소를 머금은 버크너는 줄담배를 피워대는 율리시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그렇게 많이 태웠었나? 제발 한 가지만 하게, 한 가지만.”
“있으니까 자꾸 피우게 되네. 대신 술은 많이 줄였지.”
“그나마 다행이구만. 그나저나, 자네 사령관이 동양인이라는 게 사실인가?”
버크너가 느닷없이 질문을 치고 들어왔다.
서부 전선에서만큼은 남부 연합을 연전연패의 늪으로 빠트린 장본인. 그 때문에 남부에는 서부 사령관에 관한 온갖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버크너의 의도가 어떻든, 율리시스는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네.”
“안타깝군. 비록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 자네나 나나 나라의 충성심은 같지 않은가. 그런데 동양인을, 그것도 사령관으로 내세워 싸우는 게 정상인가?”
“사령관이 흑인이었으면 기절이라도 했겠군. 이 땅은 우리 백인만의 것이 아닐세. 전쟁이 끝났을 땐 자네의 생각이 달라졌으면 좋겠군.”
대화를 끝내고 얼마 후 버크너는 보스턴의 포트 워렌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승리와 착잡한 기분이 교차한 율리시스는 울적함에 담배만 늘어갔다.
이렇듯 흡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 승리 직후, 사진 기자가 율리시스를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시가를 문 사진이 포트 도넬슨 승리 소식과 함께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 율리시스 장군이 시가를 좋아하는군!
북부 사람들은 존경과 축하의 의미로 후원금이 아닌 시가를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잔뜩 보내왔다.
해서 하나둘 피우다 보니 그새 습관처럼 입에 물고 다니고. 그렇게 율리시스는 후두암으로 죽게 된다···.
적어도 원 역사의 결말은 그랬다.
그런데 이때.
“사령관님께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율리시스는 미소를 머금으며 봉투를 뜯었다.
첫 문장은 예상대로였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율리시스 장군.]
내용은 서부 사령관이 휘하의 장군에게 보내는 평범한 축하문이었다. 다만.
[어젯밤 제 꿈에 장군님이 나타났는데.
전쟁터에서 총이 아닌 담배를 피우다 쓰러지더니, 일어나질 않으시더군요.
너무 생생해서 이렇게 편지로라도 안부를 묻습니다.
괜찮으시죠?]
콜록콜록, 시가 연기에 사레가 들린 율리시스는 물을 들이켜 기침을 진정시켰다.
‘꿈이라니, 이젠 별소리를 다 하는군.’
하지만 무시하기엔 시기가 공교롭다.
더욱이 편지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막스였다는 게 신경 쓰였다.
사업을 보는 안목.
정세를 판단하는 예리한 눈.
게다가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까지.
‘찝찝하군.’
며칠 뒤 율리시스는 선물로 받은 시가들을 다른 장교들에게 나눠줬다. 시가의 경우 평균 5~10센트 사이의 것이지만, 율리시스가 준 건 그보다 곱절은 비싼 품질 좋은 시가였다.
“이런 걸 그냥 주시다니. 아깝지 않으십니까?”
“셔먼 장군에게 주는 건데 아깝긴요.”
율리시스는 껄껄 웃으며 셔먼에게 시가를 왕창 떠넘겼다. 이 일로 둘은 더욱 돈독한 관계가 되었다.
같은 시각 서부 사령부.
피치가 막스에게 물었다.
“진짜 꿈에 율리시스 장군이 나타났어?”
“어.”
“나는?”
“.......”
“말이 돼?”
피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꿈은 개뿔. 그냥 하는 소리지.’
며칠 전,
막스는 신문에서 시가를 문 율리시스의 사진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시가를 보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원 역사에서 율리시스가 말년에 후두암으로 죽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사망 원인이 명백한 이상 경고라도 해두자.’
지어낸 꿈 이야기로 바뀌기야 하겠냐마는, 축하 메시지에 몇 줄 추가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
“사령관님, 헨리 할렉 장군의 연락병이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네.”
대원은 세인트루이스와 헨리 할렉이 있는 캠프를 오가는 연락병.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무슨 일인가?”
“아칸소와 미주리 경계에 징후가 포착되었습니다.”
“징후?”
서부 전선의 연이은 패배로 남부 연합은 서부의 병력을 새롭게 개편했다.
일명 ‘미시시피 횡단 지구’라 불리는 남서부 군단을 창단한 것이다.
“규모는?”
“병력 규모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주축은 미주리주 민병대와 텍사스에서 넘어온 군인, 그리고 아칸소 병력입니다.”
“최소 1만은 넘겠군. 사령관은?”
“...... 아직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헨리 할렉 준장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내용인즉, ‘남군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미주리주 경계는 물론 아칸소 북부까지 적들을 밀어버리겠다’는 말이었다.
‘지휘권을 달라 이건가?’
한쪽에선 승전보를 펑펑 터트리며 소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율리시스 때문에 헨리 할렉의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동양인이 고깝다 한들 사령관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으려나.’
조소를 짓던 막스는 대원과 눈이 마주치자 정색하며 말했다.
“답장을 줄 테니, 밖에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막스는 책상을 두드리던 끝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헨리 할렉은 자신이 지휘권을 얻어 율리시스처럼 승승장구하고 싶었겠지만.
막스는 원하는 대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내 명령을 거부한 자를 키워줄 이유가 없지.’
막스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오하이오주 출신. 멕시코 전쟁 당시 여러 점령 도시의 군 총독인 사무엘 커티스를 미주리주의 지휘관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경험이 풍부하고 공화당 당원으로서 존 브라운의 적극적인 지지자라는 것.
그리고 원 역사에서 미주리주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헨리 할렉보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헨리 할렉에게 당장 그 뜻을 내비칠 필요는 없다.
[일단 세부적인 작전을 보내주십시오, 헨리 할렉 장군님. 지휘권은 추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임시’지만 사령관으로서 야전에서 고생하고 계실 장군님의 건강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특별히 향이 좋은 커피 원두를 보낼 테니,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피치가 키득거렸다.
“이게 병 주고 약 주는 거구나. 그나저나, 널 그렇게 무시했는데 커피는 왜 보내는 거야?”
‘잠도 자지 말고, 개 같이 일하라고.’
물론 입 밖으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상대방이 싫어한다고 똑같이 굴면 되나. 나 그렇게 옹졸한 사람 아냐. 아무튼, 요즘 병사들 사이에서 커피가 유행이라며.”
“곧 군대 보급품으로도 나올 거래.”
‘일종의 스팀팩인가.’
커피 기운으로 불침번 서고 빗발치는 총알에 몸을 던지라는 정부의 술수가 아닐까 싶다.
며칠 뒤 헨리 할렉의 연락병이 답신과 새로운 정보를 들고 찾아왔다.
적군의 사령관이 누구인지 알아낸 것이다.
“남부 연합의 미시시피 횡단 지구 지휘관은 얼 반 돈 소장입니다. 휘하에 미주리주 민병대 사령관 스털링 프라이스와 알버트 파이크 장군이 있다고 합니다.”
“얼 반 돈?”
그는 콜로라도를 공격하다 개 박살 난 뒤 퇴각한 지휘관이었다.
얼 반 돈이 신경 쓰이는 건, 그가 콜로라도에서 봤던 전술을 사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참호전과 개틀링 기관총 조합이 막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군의 전술로는 든든하지만, 상대가 취했을 땐 최악이지.’
게다가 남부에도 슬슬 개틀링 포가 나올 때가 되었다.
개틀링 박사와 일했던 엔지니어들이 남부 연합에 끌려갔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벌써 수개월이 흘렀으니 그동안 개틀링 포가 만들어져 배치되었을 수도 있다.
‘이걸 부술 방법은.’
생각을 굴리던 막스는 일단 헨리 할렉의 편지부터 뜯어봤다.
세부적인 작전과 함께 헨리 할렉은 강력하게 이번 전투의 지휘권을 요청했다.
생각에 잠긴 막스는 결국 다음과 같은 편지를 작성했다.
[작전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일이 촉박하므로···.]
‘이번은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헨리 할렉이 노발대발 욕을 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답신을 보낸 막스는 곧바로 특수부대를 소집했다.
< 이것도 전술이다 >
미주리주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롤라 마을.
정착민 대다수가 남쪽에서 몰려왔기에 남북전쟁 직후 남부 연합에 기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프란츠 시겔 장군이 이곳을 점령.
두 개의 요새를 지으면서 롤라 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리고 그중 포트 데트는 현재 사무엘 라이언 커티스가 주둔하고 있었다.
“서부 사령관이 요새로 오고 있습니다!”
병사의 말에 커티스 장군이 사무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 뺨에만 희고 덥수룩한 수염이 자란, 조금은 특이한 외모였다.
커티스는 요새 입구로 가 말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병력을 지켜봤다.
‘저들이 특수부대인가?’
서부 사령관이야 두어 번 본 적이 있지만, 특수부대 대원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주로 어두운 검은색 계통의 군복을 입는다더니 오늘은 북군의 푸른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요새의 군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특수부대원의 도착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에 달린 견장들을 본 병사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지 저 계급들은!?’
선두의 사령관이야 소장이니 그렇다 치고.
대위(Captain) 밑으로 볼 수가 없다.
‘전부 중대장급이란 소리야? 말이 돼?’
경외심과 질투, 시기가 엇갈린 눈빛 속에 막스와 대원들이 말에서 내려섰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커티스 장군.”
“어서 오십시오, 서부 사령관님.”
사무엘 커티스는 미주리주 중심에서 주변을 안정시키고 게릴라들의 활동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지금껏 그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관이 동양인이라는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막스가 서부 전선 승리의 일등 공신임을 인정하고 흠모하기까지 했다.
“편지는 받았습니다만,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시죠.”
올해 나이 56세. 그럼에도 커티스는 한참이나 어린 막스를 정중하게 요새 사무실로 안내했다.
“남군의 미시시피 횡단 지구가 아칸소 북쪽에 집결되어 있다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막스의 질문에 커티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주리주의 탈환이요, 다른 하나는 테네시를 점령하고 있는 율리시스 장군의 발을 묶기 위한 반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헨리 할렉 장군이 선제 공격을 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생각합니까?”
커티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집결된 남군 병력이 미주리주로 올라오기 전에 선제타격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게다가 헨리 할렉이 서두르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율리시스 장군에 대한 견제와 열등감이 그 원인이었다.
커티스가 말이 없자 막스가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엔 적들이 우리를 유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경 부근에서 병력을 집결해 도발하는 거죠.”
“선제공격을 하도록 말입니까?”
“미리 진지를 구축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참호와 개틀링으로 무장했다면 말려드는 순간 몰살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커티스의 표정이 굳어진 걸로 보아 같은 생각하는 듯했다. 콜로라도 방어선을 직접 보진 않았지만, 당시 남군의 대군이 퇴각한 이유는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헨리 할렉과 함께 있는 프란츠 시겔 장군 역시 욕망이 큰 인물이었다.
독일계 이민자로 독일인들의 지지를 얻는 그는 미주리주의 지휘권을 주지 않으면 자리에서 물러난다며 협박까지 한 자였다.
이 둘이 뭉쳐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빤하지 않은가.
“할렉과 시겔 장군도 이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제 말을 들을지 모르겠군요.”
“......”
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가 됐든. 적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행군을 서둘러야 합니다. 거리가 제법 머니까요.”
“이미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투를 위해 스프링필드의 병력도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리옹 장군까지요? 거길 비우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번 전투에서 지면, 스프링필드를 혼자 지키기 어렵습니다.”
리옹 장군도 막스를 무시한 인물이었으나, 이번 전투에는 흔쾌히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율리시스의 승전 소식에 자극받은 탓도 있고.
혼자만 도시에서 처박혀 수비만 하고 있느니,
‘윌슨 크릭 전투의 영광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겠지.’
그렇게 막스와 커티스는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놔둔 채 헨리 할렉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남서쪽으로 300km.
4천 명의 병력과 20문의 야포, 그리고 특수부대도 함께였다.
그리고 며칠 뒤.
스프링필드의 나다니엘 리옹 장군 역시 최소의 병력만 남긴 채 2천의 병력과 10문의 야포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
꽤 먼 거리를 이동하는 탓에, 가는 동안 막스는 정찰대와 연락병에게 헨리 할렉 부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했다.
커티스 부대와 이동한 지 5일째 되던 날.
연락병 코디가 소식을 가져왔다.
어느덧 열여섯 살이 된 코디는 말 타는 것뿐만 아니라 총과 칼에도 능숙해 웬만한 대원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