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360)

윌슨 크릭 전투는 스프링필드를 차지하기 위해 남과 북이 벌인 전쟁이었다. 그만큼 미주리주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거길 비워두고 와?’

텍사스를 빼앗겼던 치욕을 만회할 기회! 

분명 기회는 기회인데, 안타깝게도 남군에겐 빈집을 털만 한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나다니엘 리옹의 움직임을 간과한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모든 게 꼬이는구나!’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더 절망적인 일이 벌어졌다.

교전이 벌어진 지 어느덧 한 시간.

해는 땅 밑으로 사라지고 하늘은 평소보다 더 짙은 어둠을 예견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딸칵. 딸칵.

“시, 시발! 총알이 안 나가!”

“착검으로 돌진하라!”

비에 젖은 남군의 무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독립 전쟁 때나 사용했을 법한 구식 플린트 락과 머스킷 소총이 말썽을 일으켰다.

원인은 이들 총에 사용되는 종이 카트리지 탄피와 퍼커션 캡이 문제였다.

총알과 뇌관 역할을 하는 화약이 물에 젖어 작동하지 않았다. 남과 북의 경제력과 제조업 차이가 곧 무기의 수준 차이를 만들어 냈다.

“날씨까지 우릴 버리는구나!”

림파이어 탄약이 막 보급된 북군, 그보다 앞선 센터파이어 방식의 풀메탈재킷 탄피로 무장한 특수부대는 남군을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이를 맞으면서도 남군은 착검한 상태로 적진을 돌격하며 개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또 밀리다니.’

장탄식을 내뱉은 얼 반 돈의 머릿속에 절대 꺼내지 않으려던 카드가 떠올랐다. 

지휘관들 역시 패색이 짙어지자 사령관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마침내 얼 반 돈의 입에서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미시시피 횡단 지구는 전군 퇴각하라!”

아비규환이 된 전장 속. 

남군의 탈출 러시가 시작되었다.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그들의 뺨을 적셨다.

퇴로를 누가 확보해 줄 것인가.

불신에 가득 찬 병사 중 지휘관을 따라가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각자도생은 탈영으로 이어지고 사방으로 산개한 남군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엔 체로키 원주민과 게릴라들도 있었다.

창단하자마자 치른 미시시피 횡단 지구의 첫 전투. 작금의 패배로 남서부 지역의 남군은 와해 수준까지 이르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

[전투가 끝난 전장은 적막하고 슬프다. 독수리와 늑대는 이 협곡의 지배자가 되고, 죽은 동료들과 적들은 외로운 무덤에서 함께 잠을 자고 있다.

- 피 릿지 전투 며칠 뒤, 사무엘 라이언 커티스 장군의 말 중에서.]

훗날 피 릿지 전투가 남긴 수치는 다음과 같다.

북군 12,500명, 남군 18,700의 충돌.

북군은 사망자 572, 부상자 1,320 실종자 201. 남군은 사망자 1,100, 부상자 1,570 실종자 12,400의 손실을 기록했다.

협곡에 널려진 시체들. 

빗물이 고인 웅덩이는 시뻘건 핏물로 흘러넘쳤다.

적막한 어둠을 뚫고 내리치는 번개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해갔다.

커티스 장군이 무거운 입을 뗐다.

“참혹하군.”

“전쟁이니까요.”

잔혹하고 잔인함을 깨달았을 때.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전쟁의 덧없음을 알게 되리라. 

‘물론 이 나라는 아픔과 상처를 다른 식으로 승화시키겠지만.’

미국 땅에서만 아니면 괜찮다는 왜곡된 방식으로 말이다.

커티스와 막스가 각자의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헨리 할렉이 찾아왔다. 그는 할 말이 있다며 막스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아까 했던 말을 마저 하고 싶소.”

‘드디어 내 손에 칼자루가 쥐어졌군.’

헨리 할렉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장군들이 있는 곳에서 버럭버럭 소리쳤겠지.’

사령관에 대한 항명, 막대한 병력의 손실.

막스의 보고서에 따라 헨리 할렉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어디 한번 지껄여보라는 듯 막스가 팔짱을 꼈다.

“사령관은 나와 시겔 장군을 이용했소. 와슈번에서 곧바로 합류했으면 시겔 장군이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시간에 참호를 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합류했으면? 저 많은 적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막스는 할렉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적을 유인하려 했다는 건 본인 생각이지. 그런 가정법은 씨알도 안 먹힙니다, 할렉 장군.”

“시겔 장군 때문에 틀어진 거요. 애초에 적을 진지에서 끌어낸다는 내 계획은 사령관과 다를 게 없지 않소!”

헨리 할렉이 마지막 저항을 시도한다.

‘어림없지.’

막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많이 틀리지요. 결과가 다른데. 어찌 됐든, 본인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건 그리 보기 좋지 않군요.”

열이라도 받은 건지. 비에 젖은 헨리 할렉의 정수리에 김이 모락모락 일어났다.

이를 따라가던 막스의 눈동자가 다시금 헨리 할렉을 응시했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본인이 벌인 짓을 알고 있을 테니.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옷을 벗던지, 아니면 행정가로서 전쟁부 참모로 들어가던지.

헨리 할렉의 동공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예상보다 사령관이 세게 나오자 당황한 듯 보였다.

인맥을 동원하면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워싱턴의 내각, 동료 장군들이 과연 동양인의 손을 들어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사령관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절망적인 건 그 칼자루를 넘긴 건 다름 아닌 헨리 할렉 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전쟁부로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일 당장 대통령께 요청하도록 하세요.”

“......”

침울한 헨리 할렉을 보던 막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런 말은 뭣하지만, 전 장군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술하신 탁월한 군사 이론과 전술을 감명 깊게 읽었거든요.”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겁니까?”

“진심으로 한 말입니다. 냉정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럴지도요. 사령관을 무시하는 지휘관과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가겠습니까.”

헨리 할렉에 관한 전생의 정보가 없다면 굳이 이런 말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율리시스 이전에 서부 사령관과 북군 총사령관이 된 헨리 할렉. 이는 맥클라렌 만큼이나 인맥과 명성이 두텁다는 말이었다.

만약 이번 전투가 패배했다면 헨리 할렉을 무너트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수가 크다 해도 전쟁은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막스가 끌어내리려 해도 그가 인맥을 동원한다면 작은 징계에서 그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적대감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고.

‘이쯤에서 끝내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남북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한 걸림돌. 

율리시스의 잠재적 경쟁자를 전쟁장관 섬너 밑에 박아두는 데 성공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합니다, 율리시스.’

막스는 보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헨리 할렉을 쳐다봤다. ‘이 새끼가 미쳤나’하는 눈빛이지만 상관없다.

“전쟁부로 요청하는 즉시, 이번 실수는 덮어두도록 하겠습니다.”

“?”

“보시면 알 겁니다. 어떻게 보고를 올릴지.”

*

[존 브라운 대통령님께.

헨리 할렉 장군이 적들을 유인하는 와중에 병력 손실이 컸습니다. 

이는 작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병사들은 피 릿지 전투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잊히지 않도록 조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휘관의 실수를 덮어두면, 죽은 병사들이 억울해할까. 

반대로 개죽음 보다, 승리를 위해 헌신한 군인으로서 이름을 남기는 게 낫지 않을까.

막스는 자신이 쓴 편지를 곱씹으며 고민했다.

그러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닫고, 봉투에 넣어 밀봉했다. 그리고 헨리 할렉의 행동에 따라 보낼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 만나러 가자 >

워싱턴의 백악관.

“서부 사령관을 중장으로···.”

쾅!

“절대 안 됩니다! 제발 참으세요!”

“가뜩이나 정국이 혼란한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있습니까!”

존 브라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 각료들이 기겁하며 반발했다. 

그렇다고 피부색을 따지며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정치적 입장과 대중의 눈치를 고려한 판단이었다.

존 브라운의 정확한 워딩은 ‘서부 사령관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싶지만 그건 힘들겠지요?’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말을 자르고 반대부터 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게 피를 성토하는 심정으로 맥클레런 장군을 설득하는 건 어떻습니까? 대체 언제 남부 연합을 공격할 건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거든요.”

“......”

북군 총사령관 맥클레런 소장은 19만이 넘는 병력을 모으고도 차일피일 전쟁을 미루고 있었다.

- 남군의 병력이 우리보다 많은데 지금 들어가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소 27만은 모아야 합니다. 아무래도 대통령께서는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군요.

- 대체 어디서 그런 첩보를 얻은 거요? 오히려 남부 연합에게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 같은데.

- 그럼 제가 고의적으로 늦춘다는 말입니까?

존 브라운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맥클레런이 6만의 병력을 모았을 때, 남군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이후 북군이 10만일 때는 6만, 현재는 19만 명 대비 13만까지 비율을 좁혔으니 시간만 벌어준 셈이었다.

물론 맥클레런도 잘한 점은 있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대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으니까.

‘그러면 뭐 하나, 움직이질 않는데.’

화가 치민 존 브라운은 몇 차례 진군을 요구했으나 기다리라는 대답뿐이었다. 

게다가 존 브라운이 직접 맥클레런의 집을 방문했음에도 잠자리에 들었다는 핑계로 만남을 거부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서부 전선이 몇 차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동안에도 맥클레런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피 릿지 전투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두다]

[서부 사령관의 연전연승, 과연 제네럴 조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서부 전선의 잇따른 승리로 북부의 사기가 절정에 달했다. 동부의 언론은 이를 칭송하며 전쟁의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더러는 직접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캔자스와 콜로라도의 언론사들은 서부 사령관을 찬양하며 영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반대의 시선은 존재하는 법.

[승리가 부끄러운 이유. 우리는 왜 동양인에 의지하는가.]

심지어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를 들먹이며 서부 사령관을 비난하는 신문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단 한 명의 사상자가 없는 특수부대, 과연 우연일까?]

[백인들의 희생으로 이룬 승리를 동양인이 가로채다!]

찌이이익.

“쓰레기 언론들이 극성을 떠는군.”

백악관 존 브라운의 집무실.

존 브라운은 읽던 신문을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신문을 읽던 섬너 장관 역시 신문을 찢으며 말했다.

“이런 신문사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맥클레런을 칭찬하던 곳입니다. 언제부턴가 서부 사령관을 깎아내리는 기사를 쓰더군요.”

“남부 언론이야 그렇다 쳐도, 연방의 언론이 이러면 되겠습니까. 하여간 그놈의 피부색은 더럽게도 따진다니까요.”

답답함을 토로한 존 브라운은 섬너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헨리 할렉 장군이 전쟁부 참모를 자청했더군요. 어쩔 생각입니까?”

“좀 뜻밖이긴 합니다만. 그 친구의 능력이라면 나쁠 건 없지요.”

막스의 보고대로라면 미끼를 자처해 적을 유인한 헨리 할렉은 칭찬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갑자기 야전이 아닌 전쟁부의 참모를 자청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헨리 할렉처럼 야심이 큰 인물이라면 사령관을 하겠다고 난리를 쳤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헨리 할렉의 실수를 덮어준 것 같은데. 뭐, 막스의 의도대로 모른 척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경쟁자는 이렇게 제거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 셈이군요.”

그 방법이 뭐가 됐든.

정부 관료와 장군들이 헨리 할렉을 밀어줘도, 막스는 자신의 힘으로 경쟁자를 제거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인물이야.’

섬너는 휘하에 헨리 할렉을 두게 된 것을 기꺼이 반겼다.

똑똑.

비서가 집무실 문을 두드려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이름을 듣는 순간 존 브라운과 섬너 장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한 노신사가 들어오자 존 브라운이 악수를 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나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밴더빌트 ”

“오랜만에 뵙습니다. 섬너 장관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말도 마십시오. 일단 앉으시지요.”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증기선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현재는 동부의 철도 사업에 눈을 돌린 사업가. 

훗날 철도왕이라 불리는 밴더빌트가 백악관을 찾아온 건, 피 릿지 전투 바로 다음 날 벌어진 전쟁 때문이었다.

버지니아주 햄튼 로드에서 벌어진 남부와 북부 최초의 해전.

포트 헨리와 도넬슨에서 건보트에 당한 보복으로 남부가 북부의 함선들을 침몰시킨 사건이었다.

“남부 연합의 철갑선 버지니아 호를 상대하려면 귀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제가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겠습니까. 연방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배를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자신이 보유한 가장 큰 증기선 ‘밴더빌트 호’를 기부하고 개조하여 무장하는 것에도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러한 통 큰 기부는 아무리 부자라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뭔가 바라는 게 있을 텐데.’

몇가지 짐작은 간다.

연방의 승리를 기원하는 순수한 의도.

증기선의 몰락과 철도의 시대가 왔음을 직감한 사업가의 본능. 여기에 더해 밴더빌트가 가장 좋아하는 막내아들이 웨스트포인트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제 아들이 연방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섬너 장관이나 저나. 아들들이 전부 전선에 나가 있으니 마음이 뿌듯하더군요. 물론 걱정으로 잠을 설치긴 합니다만.”

원 역사에선 존 브라운의 아들들은 대부분 하퍼스 페리 습격 사건으로 처형당하거나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막스로 인해 사건이 뒤틀렸다.

그 결과, 대통령의 아들 넷은 최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섬너 장군의 두 아들도 그렇고. 

누구의 강요도 아닌 아버지들의 의지와 자식들의 뜻이 일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밴더빌트의 기부가 아들 때문이라면야 찜찜할 이유가 없지.’

존 브라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밴더빌트가 둘만의 독대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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